< 쿤 칸칸의 남자 > 정신을 차려보니 차원 이동을 했더라-는 건 요즘 세상에 특이할만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한번쯤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봤었다. 하지만 이게 실제로 자신에게 닥치고 보니 장난이 아닌 거다. 끝없는 모래사막, 피라미드와 모래빛 기둥으로 만들어진 사원. 온 사방이 모래뿐인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나흘을 헤매다가 구조 받았을 땐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뭐, 여타 먼 치킨 판타지 소설들처럼 자신에게 뛰어난 능력이나 미모, 혹은 이쪽 세계에서 뭔가 써 먹을 수 있을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김두조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이 안통하고 외모도 이국의 그것이다 보니 구조 받기가 무섭게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 곧장 감옥에 처넣어졌고, 덩치가 커서 일 잘하겠다는 단 하나의 장점을 인정받아 노예로 팔려갔다. 역노로 팔려가는 아이들 중에서는 두조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피라밋을 건축하는 대 공사 현장의 노동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힘 좀 꽤나 쓴다는 역노들이 채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니 역노로 쓰기에도 어린 아이들을 붙잡아다 노동을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실비실하게 곯고 병든 아이들 속에서 두조는 단연코 눈에 띄였다. 외국인인데다가 잘 먹고 잘 자란 탓에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기 때문이다.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곧 흉터와도 같은 근육들이 몸에 아로새겨졌고 피부는 구릿빛으로 그을렸다. 한국에 있을 때 이런 몸매였더라면 여자들이 줄줄이 붙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선 여자는커녕 차 일하는게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라면 어느 상황에서도 반드시 우선되는 성욕조차 시들어버렸을 정도니 피라밋 대 공사의 노동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알만하다. 그런 두조의 차원이동 인생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두조가 이 사막의 세계로 떨어진지 꼭 석 달하고도 열흘. 근육이 생기는 지경을 떠나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르기 시작하여 햇빛만 봐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배급받은 죽조차 먹어도 토해내기 바빠 이러다 죽지 싶었던 그 어느 날이었다. 황제의 가마가 피라밋 건설의 진행 정도를 보기 위해 공사현장을 방문했던 것이다. 황제의 이름은 쿤 칸칸. 이곳의 모래색과 꼭 같은 빛바랜 금발머리, 이곳의 밤하늘과 꼭 같은 감청색의 눈동자에 진흙처럼 붉은 피부를 한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칸칸의 혈통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아름다웠다.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게 위해 찾아든 시인들이 전부 그의 아름다움은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다 한숨을 쉬면서 붓을 꺾었다고 할 정도로. 하지만 고양이처럼 요염하고 연꽃처럼 화려하며 파피루스처럼 날씬한 이 남자의 성격은 고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어찌나 냉혹하며 비정한지 고작 십 오세의 나이에 손수 모친의 목을 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자신에게 거역하거나 거슬리는 자들을 살려두는 법이 없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하여 하늘을 치사시킬 정도였다. 얼마나 그 자존심이 대단했느냐면, 온 나라의 미인이라는 미인은 다 모아들여 후궁 전에 집어넣고 그 뺨에 황제의 낙인을 새기고 베일로 가린 채 절대 남에게 얼굴을 보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미인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품으려 한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이가 존재하는 것이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숭배한다기보다는 증오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아름답기를 바랐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자신을 치장하고 가꾸는 것에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으며, 심미안조차 지극히 까다로워 후궁에 들어차 있는 천여 명의 후궁들보다 황제의 옷과 보석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대접받는 것은 쿤 칸칸이 아끼는 보석세공사와 재봉사였으며, 쿤 칸칸의 가장 큰 야망은 자신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피라밋을 짓는 것이었다. 피라밋은 고대로부터 왕이 죽어서 다스릴 사후세계를 상징했다. 쿤 칸칸은 자신이 죽어서 몸을 뉘게 될 그 장소가 세상 어느 곳보다 성스럽고 호화롭길 바랐다. 또한, 가장 은밀하고 잔혹하길 원했다. 쿤 칸칸은 미라가 된 자신의 흉한 시체를 누군가가 보는 것을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쿤 칸칸의 소망 중 하나는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차라리 요절하는 것이었다. 금과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가마위에 올라탄 쿤 칸칸의 행차는 화려했다.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보니 쿤 칸칸의 가마는 엄청나게 무거워 그것을 무려 스무 명의 장정들이 들어야만 했다. 쿤 칸칸의 가마를 지고 다니는 것은 하찮은 노예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부 귀족과 호족의 고귀한 혈통들이었다. 귀족가의 자제들은 열다섯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쿤 칸칸의 것이 된다. 쿤 칸칸의 호위병이 되고, 쿤 칸칸의 노예가 되고, 쿤 칸칸의...... 첩이 된다. 쿤 칸칸의 남색은 세상 모두가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쿤 칸칸은 자신보다 아름다운 것- 즉 여자를 증오했으며, 황후이자 자신의 누이인 시에 칸칸과는 거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시에 칸칸은 쿤 칸칸의 누이인만큼 그와 똑 닮아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누이이자 유일한 황족이며 부인인 시에 칸칸을 죽이거나 얼굴에 낙인을 찍어 추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보니 쿤 칸칸은 시에 칸칸의 발소리만 들려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그녀를 미워했다. 그가 남색을 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여기서 또 한 가지 그의 괴팍한 점은... 그렇게 자존심이 세고 오만하고 까다로운 이 지배자는, 침실에서는 교태어린 고양이가 되었다. 그는 건장하고 거칠고 무례한 자들에게 깔려 수모를 당하는 것을 즐겼다. 쿤 칸칸이 침실에서의 일을 바깥까지 끌고 나오는 자였더라면 이 사막위에 선 제국은 애저녁에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쿤 칸칸은 다행히도 자신의 취미를 단지 침실에서 즐기는 것에 그쳤다. 침실 안과 침실 밖의 그를 착각하고 대했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차양을 드리운 가마위에 앉은 쿤 칸칸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참혹한 몰골의 노예와 백성들에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는 피라밋 건축의 진행이 더딘게 그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공사를 시작한 것이 벌써 5년이 넘었거늘 아직까지 기초도 채 못 닦았단 말이냐!” 쿤 칸칸의 노여운 목소리에 이 대 공사를 도맡아 하고 있는 추에립은 뚱뚱한 몸을 흔들며 손을 비벼댔다. “폐하, 천 년 만 년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을 피라밋을 짓기 위해서는 그만큼 오랜 세월과 견고한 반석이 필요한 법입니다. 조급한 마음으로는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얻을 수 없사오니 너무 재촉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더 서두르란 말이야, 더! 나라의 노예와 백성이 몇인데 피라밋 하나 짓는데 몇 십 년이나 잡아먹겠다는 것이야! 그 전에 내가 죽기라도 하면 내 시신은 대체 어쩔 셈이냐? 엉?” 역정을 내는 쿤 칸칸을 보고 쿤 칸칸의 수행관인 바레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십니다. 후사조차 계시지 아니한데 벌써 죽음을 입에 올리시면 폐하만을 바라보는 이 나라의 백성들은 어찌하오리까?”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미 더 이상 서두를 수 없을 정도로 서두르고 있습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역노를 부리고 있고 이제 곧 밀림의 왕국에서 사들인 노예들도 도착할 예정이오니 한 달 후쯤이면 다 완성된 기초위에 벽돌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세공벽돌의 생산은 순조롭겠지?” “물론입니다.” 추에립의 손짓에 곁에 서 있던 현장감독이 붉은 빛깔의 벽돌 하나를 그에게 건넸고, 그가 다시 그것을 쿤에게 건넸다. “이것이옵니다.” “흐음.” 쿤 칸칸은 손에 든 벽돌을 유심히 보았다. 유약을 발라 구운 벽돌은 앞 뒤의 면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세공이 일일이 새겨져 있었다. 면 하나만 놓고 봐도 하나의 무늬를 그리고 있는 이것은 전부 붙여져서 조립되면 거대한 그림을 이루게 된다. 그것은 쿤 칸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쿤 칸칸의 눈동자엔 사파이어가, 이마엔 다이아몬드가 박혀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눈이 부셔서 그 앞을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빛나게 될 것이다. 벽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운 그것을 보고서야 흡족한 표정이 된 쿤 칸칸은 그것을 추에립에게 돌려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추에립, 이 피라밋 대 공사의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예에, 물론.” “그동안 황실에서 잠자고 있던 보물창고를 열어 이 피라밋을 짓고 있다. 즉, 이 피라밋은 황족이 아니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보물창고를 옮겨다 놓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 금은보화에는 저주가 걸려있지. 황족이 아닌 자들이 탐할 수 없는 저주가.” 추에립의 얼굴이 조금 창백하게 질렸다. 황족의 보물창고는 무시무시한 정령이 지키고 있다. 그곳을 탐욕의 눈길로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멀어버린다는 곳. 후 칸칸이 사막을 통일하며 약탈한 막대한 보물이 산처럼 쌓여있다는 지하의 동굴. 쿤 칸칸이 이 대 공사의 자금을 위해 황실의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꺼내다 쓸 거라고 했을 때 귀족들은 선대 황제와 정령의 노여움이 내릴 거라 두려워했다. 하지만 쿤 칸칸은 그 보물들이 자신의 것인데 누구 눈치를 봐야 하는 거냐고 성을 내면서, 정령을 두려워해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모조리 사형시켰다. 죽는 것이 두려워 동굴 안으로 들어간 백 명의 노예들이 보물창고에서 열 개의 항아리에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나왔을 때 그들 역시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정령의 저주 탓이 아니다. 천한 노예주제에 황제의 보물창고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쿤이 그들을 모두 죽이라 명했던 것이다. 자금이 떨어질 때마다 쿤은 그런 식으로 보물창고의 막대한 보화를 끌어냈다. 열 개의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실려 나오는 금은보화는 황실의 삼년 치 재정과 맞먹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그것은 외국으로 팔려나가 피라밋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겁을 상실한 일부 관리들이 횡령을 하는 것은 별로 특이할만한 점도 아니었다. 황실의 아주 먼 사촌으로서 유들유들한 처세로 쿤 칸칸의 벼락같은 노여움을 피해 살아온 추에립은, 이 대 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만큼 그 횡령의 정도가 남들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간도 남들보다 조금 더 컸다. 하지만 분노한 황제의 시선을 마주볼 만큼 크진 못했다. 추에립은 자신의 횡령사실을 안 황제가 노여움을 품었는가 싶어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한밤의 사막에 서 있는 것 마냥 손발이 차갑게 식었다. 황제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인생의 주마등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황제는 겁에 질린 추에립을 보고 킥킥 웃더니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피라밋을 바라보았다. “저 피라밋은...... 세상의 그 어떤 건축물보다 완벽해야 한다. 나는 저 완벽하고 아름다운 왕국에서 영원히, 영원히 머무를 것이야. 그러니 성심을 다해라.” 추에립은 죽었다 살아난 기분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쿤 칸칸은 명랑한 목소리로 바레사에게 말했다. “그럼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보자.” “날이 뜨겁사옵니다, 폐하. 한 바퀴 둘러보시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이 걸릴 텐데요.” “상관없다! 죽어서 내가 다스릴 왕국을 보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하신다면 얼음을 띄운 석류차를 준비하겠나이다.” “가자!” 쿤 칸칸의 가마를 짊어지고 있는 스무 명의 장정들이 일어섰다. 그들의 팔뚝과 이마에 핏발이 돋아 올랐다. 쿤 칸칸의 가마는 공사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현장 감독의 막사위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조는 언덕에 머물러 있다가 내려오기 시작하는 화려한 행차를 보고 허리를 들었다. 진짜 화려한 가마였다. 판타지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금과 보석으로 칠갑이 된...... 그렇게 가마를 쳐다보느라 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곧 호된 채찍이 날아왔다. 두조는 아픔에 윽, 하는 짧은 비명을 내뱉고는 허리를 숙였다. 노예감독이 뭐라 뭐라 소리를 치는데,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는 다 알아들을 수 없어도 대충 한눈을 판다고 뭐라 하는 것 같았다. 이 세계에 온지 반년, 두조는 아직 듣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어려움을 느꼈다. 아주 간단한, 꼭 필요한 일상회화는 할 수 있었지만 장문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어려웠고 말을 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귀족들 같은 경우에는 노예들과는 좀 더 다른 말을 썼기 때문에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저 언덕에서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가마가 그동안 얼핏 봐왔던 귀족들과 비교도 되지 않게 화려해서, 가마에 앉아있는 남자가 몹시 귀한 신분의 사람이랄 것은 짐작이 갔다. 누구인지 곁에서 일하고 있는 노예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노예감독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앞에 버티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벽돌을 옮기는 손길이 느릿느릿했다. 오늘따라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가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 듯 했다. 몸에 엉겨 붙은 진흙과 그 위로 흘러내리는 땀. 파리가 주변을 왱왱거려서 신경에 거슬렸고 가슴이 답답하고 이따금 눈앞이 캄캄해졌다. 두조는 요 며칠 상태가 안 좋았다. 이 공사 현장에 끌려온지 삼 개월이 조금 넘었다. 여태까지 육체노동이라고는 해보지 않고 산 것치고는 오래 버텼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 그의 육체는 한계라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죽을 먹기가 무섭게 토한 것이 사흘째. 오늘은 물 한 모금 넘어가질 않았다. 이곳의 물은 한국의 그것처럼 깨끗하고 맑은 생수가 아니었다. 빗물이 가장 깨끗하고 평소 땐 그저 항아리에다가 개천의 흙탕물을 떠서 먼지를 가라앉힌 후 위에 뜨는 맑은 물을 먹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맛도 이상하고 비위생적이었다. 근처에 공동 화장실(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구덩이를 파놓은 것에 불과한)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입에도 대기 싫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기엔 그런 물이라도 감지덕지하다. 두조는 벽돌을 실은 등짐지개를 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머리가 핑 돌았지만 애써 중심을 바로잡았다. 한차례 구워져서 나온 무른 벽돌을 무늬를 새겨 유약을 발라 2차로 구워내는 가마로 옮겨가면서 두조는 생각했다. ‘아... 맥주 마시고 싶다. 탄산 꽉 찬 콜라나. 얼음이 동동 뜬 냉커피. 그냥 냉수 한 잔이라도. 아니, 깨끗한 물 한 바가지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발을 질질 끌면서 걷다가 자신처럼 힘들어서 휘청거리던 다른 노예랑 부딪쳤다. 평소라면 넘어지지 않았겠지만 그는 딴 생각 중이었던 데다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등에 진 벽돌의 무게가 한쪽으로 확 쏠리면서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호되게 부딪친 어깨나 쓸린 얼굴보다는, 바닥에 떨어져 퍽퍽 깨지는 벽돌 때문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뿔싸. 벽돌을 이렇게 망가트리면 매질을 면할 도리가 없다. 가뜩이나 컨디션이 별로인데 얻어맞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나? 하지만 채찍을 들고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노예감독을 보니 싸한 체념이 찾아들었다. 차라리 죽을 만큼 얻어맞아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람.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형도 보고 싶고 동생도 보고 싶었다. 남들은 차원이동해서 자기개발도 하고 숨겨진 능력도 찾고 미인 엘프랑 노닥거리는데 이런 죽을 것처럼 더운 사막에 떨어져서 노동착취라니...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다. 두조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노예 감독에게 비는 대신 벌러덩 드러누웠다. 눈꺼풀을 감아도 눈이 부신 태양빛이 찔러 들어왔다. 벌렁 눕는 그를 보고 노예 감독은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이놈이 싹싹 빌어도 모자랄망정 개겨? 채찍이 하늘을 날았다. 짜악! 짜악!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은 매섭기 짝이 없는 채찍이 살을 훑어내자마자 사라졌다. 아무리 맞아도 이 고통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두조는 신음을 지르며 채찍을 맞고 있다가, 울컥 대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가하는 생각을 했다. 벽돌 몇 장이 무슨 대수라고 사람을 이렇게 패나 싶은 분개를 참지 못하고 노예감독에게 달려들었다. 노예감독은 깜짝 놀랐다. 성난 황소처럼 달려온 두조의 머리에 배를 맞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으아앗!” 두조는 노예감독의 몸 위로 올라타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쌓인 울분이 치밀어 올라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방금 전까지 피죽 한 사발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비실거렸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다른 노예 감독들이 달려와 그를 뜯어내는데도 악착같이 그 노예 감독에게 매달렸다. 주먹질을 하기가 용이하지 않자 두조는 노예감독의 멱살을 잡고 확 끌어당겨 귀를 물었다. “으아아아악!” 찢어지는 노예감독의 비명소리가 때마침 그곳으로 다가오던 쿤 칸칸의 귀를 찔러 들어갔다. “무슨 소란이냐?” “노예 하나가... 소동을 일으키는 모양인데요.” “흐음?” 바레사의 대꾸에 따라 쿤 칸칸은 단순한 흥미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선 노예감독들이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는 악착같이 한 명의 노예감독을 붙잡고 귀를 물어뜯고 있다가, 억지로 떼어 내지자 입안에 한가득 고여 있던 피를 바닥에 탁 뱉었다. 귀를 뜯긴 노예감독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했다. 질린 노예감독들이 그에게 다시 채찍을 휘두르기까지의 일순간의 공백. 그는 뭔지 모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허리를 쭉 펴고 자신이 쓰러트린 적을 바라보았다. 마치, 싸움에 이긴 짐승 같은 순수하고 야성적인 모습이었다. 헐벗은 몸,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 그것을 혀로 핥아 뱉어내는 동작...... 어느 장난기 많은 정령의 심술이었을까? 아니면 잔혹한 신의 형벌이었을까? 쿤 칸칸의 감청색 눈동자에 그 모든 것이 가득 들어찼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쿤 칸칸은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을 보고 바레사가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폐하?” “......저, 저 노예를 데려와라.” “저, 소란을 피운 외국인 노예 말씀이십니까?” “그래! 당장 데려 와!” 바레사는 가련한 노예의 운명에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쿤 칸칸의 행차 앞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다니, 황제의 심기가 무척이나 상한 모양이었다. 뭐, 어차피 고된 노역으로 죽든 매질을 당해 죽든 황제의 손에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는 가벼운 손짓으로 뒤를 따르고 있던 시종에게 쿤 칸칸의 명령을 전했다. 시종이 달려가 노예에게 매질을 퍼붓고 있던 노예감독들에게 황제의 명을 전했다. 황제가 지척에 다다른 것도 모르고 성이 나서 채찍을 휘두르던 노예감독들은 질겁하며 바닥에 무릎을 박았다. 가마가 멈춰 서자마자 쿤 칸칸은 시종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채찍을 맞고 있던 두조를 일으키기도 전에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쿤 칸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려 몸을 낮췄다. 쿤은 긴 옷자락과 샌들 사이로 드러난 발가락이 흙먼지에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리고 있던 두조의 눈에 눈알만한 보석이 박힌 화려한 샌들을 신은 발이 보였다. 두조는 시선만을 들어 그 샌들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역광 때문에 그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허리를 살짝 숙인 후에야, 태양빛이 완전히 가리우며 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굉장한 미인이었다. 물결치며 아래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모래빛 머리카락, 매혹적인 이목구비와 매끄러운 붉은 살결. 무엇보다 장관인 것은 바로 그 눈동자였다. 그냥 하늘이 아닌, 바다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나 보일 법한 시원스러우면서도 깊디깊은 푸른 빛...... 두조는 순간 고통도 잊고 그 미인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남자라고도 여자라고도 딱히 지칭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지라, 그 입에서 나온 음성이 저음임을 듣고서야 상대가 남자인 것을 깨달았다. “네 이름이 무어냐?” 쿤 칸칸은 그렇게 물었지만, 두조는 상류계급이 쓰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두조는 대답을 하는 대신 뭘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다가, 순간 다시 눈을 찔러 들어오는 태양빛에 시야가 캄캄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혼절하고 말았다. ‘앗! 콜라다!’ 평소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냉장고를 딱 열었더니, 거기에 콜라가 가득 들어 있었다. 두조는 평소에 콜라를 즐겨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같은 탄산이라면 맥주가 훨씬 낫다. 그렇지만 꿈이라서 그런지 콜라가 무지하게 반가웠다. 두조는 1.5리터짜리 콜라를 꺼내서 뚜껑을 따고는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시원하지가 않았다. 탄산 특유의 그 톡 쏘는 화끈함도, 냉장고에 들었던 음료의 시원함도 느낄 수 없었다. 뭔가를 마시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도무지 갈증이 해결되지가 않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샌가 콜라 한 병을 다 비워버려 두조는 정신없이 다른 펫트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또 다시 콜라 한 병을 모조리 들이켰지만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미칠 지경이었다. 시원한 콜라, 콜라가 마시고 싶다! 두조는 다음 콜라병을 따서 또 들이켜 보고, 또 들이켜 보고, 한 열 댓 병을 그렇게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악몽이구나! “헉-!” 눈을 떴을땐 이게 꿈의 연속인가 싶었다. 지나치게 호화로운 천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온 몸에서 통증이 엄습했다. 윽... 하고 신음을 억누르는데, 좋은 옷을 입은 동그란 얼굴의 여자가 두조의 기척에 가까이 다가왔다. 두조는 고통을 억누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엉금엉금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엎드렸다. 채찍으로 후려갈겨진 온 몸이 딱 죽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아무래도 이 여자가 이 호화로운 방의 주인인 듯 싶은데 노예 신분으로 그리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아까는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의 목숨이란게 그리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이대로는 억울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두조는 엎드려서 생각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아까 죽였을 것이다. 필시 살려둔 것은 무슨 연유가 있을 터, 여기에서 처신을 잘 한다면 살아나갈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다른 남자가 또 들어왔다. 여자의 샌들보다 더 화려한 샌들. 그럼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이 방의 주인인가? 갑자기 그 샌들을 보니 잊고 있었던 기절하기 전에 봤을 남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너무 아름다워서 죽음의 신인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그 남자인가 싶었지만 떨어져 내린 목소리는 다른 이의 것이었다. “몸을 움직이기에는 힘들 텐데. 고개를 들어 봐라.” “.........” “고개를 들어보래두.” 바레사는 꿈쩍 않고 굳어 있는 노예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얻어터져서 엉망이 된 얼굴이긴 하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이국적인 얼굴이었다. 먹물처럼 까만 머리카락과 개처럼 순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내다우면서도 부드러운 얼굴의 윤곽이나 묘한 피부빛은 밀림의 나라에서도 초지의 나라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고동빛의 새카만 피부나 진흙빛의 갈색 피부, 혹은 황토처럼 붉은 피부는 흔했지만 이런 밀빛 피부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역장에서 뒹굴던 노예를...... 바레사는 한숨을 푹 쉬고 두조의 턱에서 손을 떼고는 시녀에게 말했다. “이 상태로는 침실에 보내봤자 힘도 못쓸 텐데.” “상처가 대충이라도 나으려면 사흘은 걸릴 겁니다.” “황제께서는 이 노예를 당장 보고 싶어 하신다.” 두조는 머리위에서 뭐라뭐라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불안하게 듣고 있었다. 말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도대체 뭔 소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주술사를 보내 줄 테니 이 자의 회복에 전념을 다하고......” 바레사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혹시 폐하께서 들리실 지도 모른다. 그때 자네는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는게 좋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기본적인 예절 정도는... 가르쳐 두는 편이 좋겠지. 어차피 몇 번 잠자리를 하고 나면 흥미를 잃어버리실 테지만 이 노예가 황제폐하의 심기를 건드리면 죽어나는건 이 놈 뿐만이 아닐 테니까.” “명심 하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나가보겠다.” 바레사가 나가자 시녀는 두조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두조는 얼결에 몸을 일으키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시녀가 말했다. “눈을 들어 봐.” 두조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시녀는 두조의 얼굴을 붙잡아 들어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생긋 웃어보였다. “다른 사람이랑 이야길 할 땐 눈을 마주보는게 좋아. 여태껏 노예로 살아오느라 그러기 힘들었겠지만.” 황제는 비굴한 자를 싫어한다. 물론, 노예 같은 것이 감히 황제의 얼굴을 마주볼 수는 없겠지만, 황제는 노예 같은 것을 곁에 둔 적도 본 적도 별로 없으니 이런 식으로 시선을 피하면 불쾌해 할 것이 틀림없다. 황제는 성격이 무척이나 지랄 맞고 변덕스러웠지만 뭔가 묘하게 솔직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는 절대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그런 것이겠지만, 그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가식이나 의뭉스럽게 구는 짓 같은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는 정책회의에서 말을 돌려 시간을 끌고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자들을 혐오했으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돌려 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물론 가신들이 진언을 하는게 맘에 들지 않으면 팔딱팔딱 뛰면서 저놈을 죽이네 마네 거품을 물기도 하고 이따금은 정말 그리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눈치를 보거나 속과 겉이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쿤 칸칸은 그리 좋은 황제는 아니었다. 영민하지도, 자애롭지도,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는 허영심이 지나치게 강했으며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너무 집착했다. 잔혹하고 변덕스럽고, 어린애처럼 제멋대로에 즉흥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 칸칸이 시에 칸칸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황제 위를 잘 지키고 있는 것은 그의 성격 중에서 유일한 장점이다시피 한- 솔직함과, 사람의 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눈치 때문이었다. 쿤 칸칸은 항상 대화를 할 때 상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했다. 그는 시선을 마주대하고 하지 않는 이야기는 흘러가는 바람소리나 의미 없는 벌레소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귀담아 듣지 않는 성격이었다. 덕분에 항간에서는 신비로운 감청색 눈동자에 상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까지도 내심, ‘정말 그런게 아닐까.’ 라면서 쿤 칸칸의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시녀는 말했다. “당신 이름이 뭐지?” 두조는 눈만 깜박일 뿐 대답하지 못했다. 시녀는 두조가 귀족의 말을 단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예들과 하층민들이 쓰는 말도 다 못 알아듣는데 귀족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시녀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시롭, 시롭.” 두조의 입술이 달싹였다. “시롭......” “당신은?” 두조는 시롭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자, 시롭의 말이 뭘 말하는지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두조...” 그 후로 며칠 동안, 두조는 이게 웬 호강인가 싶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맑은 물은 물론이거니와, 영양가 가득한 죽이며 고기, 게다가 이 세계로 온 뒤로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과일까지! 두조는 그것들을 열심히 먹으면서 시롭의 돌봄으로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상처 때문에 오르던 열도 웬 괴상하게 생긴 아저씨가 다녀간 이후로는 내려갔고, 황실 특제 연고를 바르니 상처도 빨리 아물었고 젊다보다니까 원기도 금방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호화로운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두조는 내심 굉장히 불안했다. 이 세계로 온 이후, 단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곳은 차원이동으로 떨어지게 된 이계이긴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철저한 계급 사회 속에 혜택은 아주 소수의 인간만이 누렸으며, 그 와중에 가진 것 하나 없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신세로는 노예로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에 자신을 데려온 것 역시도 뭔가 꿍꿍이가 있다. 뭐든 간에 채찍에 맞아서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보다 더한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순 없지 않는가? 스미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오후, 두조는 시롭을 붙잡고 안 되는 말을 더듬거려 가면서 그 이유를 물었다. “저, 여기에... 왜? 전 노예인데.” “아......” 시롭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뒤늦게 말해준다고 충격이 덜할 것도 아니고, 잠시의 흥미일 뿐이라도 노예이면서 황제의 눈에 들었으니 그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상황파악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황제에게 목이 잘리는 것보다야 목숨을 조금이라도 오래 연명하기 위해선, 혹은 바레사나 자신을 위해선 충분히 설명을 해주는 쪽이 낫겠지. 시롭은 말했다. “황제폐하의 잠자리를 모시기 위해서야.” 당연히 두조는 못 알아들었다. 하층민들은 황제폐하라는 단어를 몰랐다. 하층민은 황제폐하를 그냥 신이라고 불렀다. 잠자리라는 고상한 표현역시 쓰지 않았다. 눈만 뎅그랗게 뜨는 두조를 보고 시롭은 흠, 하고 미간을 모았다. 시롭은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말했다. “밤일하러 왔다 그거야.” “밤...일?” 시롭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조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허걱...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돈 많은 중년 마나님집에 종마로 끌려온 것이다! 아직 동정인데! 첫 상대가 아줌마란 말이냐! “영광으로 생각해. 너같이 천한 노예는 폐하의 발끝조차도 바라볼 수 없는 존재니까. 공사판에서 힘들게 일하다 죽는 것 보다야, 황제폐하를 모시다가 편히 죽는게 낫지 않겠어? 그 편이 고통도 덜할 테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호위호식도 해보고 말이야.” 사실 쿤 칸칸의 잠자리에 들었다고 해서 두조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쿤이 그에게 관심을 잃는 순간, 감히 노예 주제에 고귀한 황제폐하의 육체에 손을 댔으니 죽는게 당연하다. 그가 여자라면 후궁 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그는 남자였다. 황제의 주변에서 물잔 심부름을 다니는 시종 하나조차 귀족의 자제들이니 두조가 황제의 곁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조는 시롭의 말이 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눈치로 노역장 노예보다는 색노가 낫다, 잘해서 이쁨 받아라 뭐 이런 걸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예쁜 여자 만나 알콩달콩 가정꾸리고 자식 낳고 이런 걸 꿈꾼 것은 아니지만... 정말 너무하다. 도대체 사주팔자에 무슨 액이 끼었기에 이 먼 곳에 와서 남창노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노역장에서 일하다가 허무하게 죽는 것보다야 이쪽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두조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추녀면 어떻게 하나. 새삼 이런 곳에 떨어진 자신의 팔자와 인생에 대한 고뇌로 골머리를 썩히다 보니, 처음엔 불로장생약이라도 되는 듯 허겁지겁 먹던 호화로운 저녁식사도 입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음식을 남기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릇을 치우고 시롭이 잘 자라고 두조를 혼자 남겨두고 간 후에도 복잡한 심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차라리 도망갈까.’ 하지만 도망가다 붙잡히면 맞아 죽을 것이다. 설령 도망가는데 성공한다 치더라도? 외국인에다가 말이 안 통하는 자신은 또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두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눈 딱 감고 기둥서방 노릇이라도 하면서 말을 배우면 무언가 기회 같은 것을 잡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만 상대가 폭탄 맞은 얼굴이라든가 도저히 할 마음이 나지 않는 비만한 몸매라든가 쭈그렁바가지 할머니라든가 하면... 애초에 행위자체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긴 했다. 아들놈이 말을 듣지 않아 이쁨받지 못하면 당장 내쳐지는거 아냐, 이거... 다시 그 노역장에 끌려가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은데. 두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두조는 털썩 잠자리에 누웠다. 새파란 밤하늘에 달이 홀로 떠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달빛을 싣고 들이쳤다. 두조는 몰려오는 잠을 느끼며 꾸물꾸물 이불을 끌어올렸다. 사막이기에 낮에는 숨도 못 쉴 만큼 덥다가도 밤에는 춥기 때문에 이불은 두둑했다. 그렇게 가물가물 잠이 들랑 말랑 할 때 쯤, 누군가가 두조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조가 머무는 방에는 문이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다 문이 있지만 날씨가 더울 때에는 들어 올려 처마에 걸어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문이라는 것은 추위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닌 모래폭풍을 대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따금씩 부는 여신의 분노는 무시무시했다. 일설에는 열흘 밤낮으로 분 모래폭풍이 궁전을 허문 적도 있다고 할 정도로. 모래폭풍이 불거나 집안에 환자나 죽은 사람이 있을 때가 아니고는 문 대신 커튼으로 입구를 가려두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문이 열리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바닥이 얇고 가벼운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덕분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문득 자신의 침대 맡에 선 사람을 발견했을 때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키자 두조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도 놀랐는지 눈을 깜박거렸다. 두조는 남자가 지독하게 아름다운 것에 한번 놀라고, 또한 그 사람이 낯익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너무 아름다워서 인간이 아닐 거라 생각했었던 그 남자였다. 그 이후에 마주친 적이 없어 틀림없이 헛것을 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모래빛의 긴 머리카락, 붉은 피부, 감청의 눈동자. 숨이 막히도록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낭창한 몸에는 반투명한 흰 옷과 에메랄드로 장식한 벨트를 두르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도 대단히 아름다웠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나머지 차라리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쪽이 훨씬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워 봤자 남자였다. 두조는 드러난 남자의 가슴이 밋밋한 것을 보고 뭔지 모를 실망감을 느꼈다. 쿤 칸칸은 깜짝 놀라 눈을 등잔만하게 뜨고 있다가 멍하니 넋을 잃는 두조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덩치는 커다란 것이 뎅그랗게 뜬 까만 눈동자가 순수하고 귀여워보였다. 처음 봤을 때 자신을 한눈에 사로잡았던 수컷의 사내다움이나 야성미는 느낄 수 없었지만, 이런 모습도 나쁘진 않다. 침대 위에서라면 그런 격정을 끌어낼 자신이 충분했으니까. 당장 침실로 끌어들이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 짓을 할 몸 상태가 아니라고 바레사가 말려서 참고 있었다. 이제 사흘이 지났으니 괜찮은가 싶어서, 정확히는 잠자리를 함께 해도 될 수준인가 싶어서 남몰래 찾아와 본 것이다. 쿤 칸칸은 손을 쭉 뻗어 두조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벗은 목덜미나 가슴팍에 아직도 상처가 벌겋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출혈도 멎어 있었고 붉게 갈라진 상처 속으로 하얗게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몸을 살피다 보니 늠름한 어깨며 벌어진 탄탄한 가슴이며 꽉 쪼인 배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쿤은 뱃속이 근질근질하며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두조가 앓아 누워있는 지난 사흘간 아무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이 두조로 꽉 차 있는데 다른 놈이 흡족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곳은 황제가 밤을 보내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후궁전도 아니고 별궁도 아닌 바레사의 개인 거처였던 것이다. 노역장에서 뒹굴던 노예를 황제 가까이 데려다 두려니 대신들 눈에 띄지 않을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황제가 지금 내킨다는데 나무랄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해가 중천이라 시종들이 왔다갔다하는 시간도 아니고, 이미 밤이 깊은데. 쿤 칸칸은 이제라도 바닥에 엎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알을 굴리고 있는 두조를 보고 훗, 웃고는 입을 맞췄다. “-!” 두조는 그야말로 머리털이 거꾸로 솟을 만큼 놀랐다. 아니 이 남자가 대체 왜 자신에게 입을...!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가려고 했지만 상대가 무척이나 고귀한 신분의 사람으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흠칫 멈췄다. 높은 사람들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세계는 칼 같은 신분제 사회였던 것이다. 노예인 자신은 어떤 부당한 일도 참아야 했지 그러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샌들은 시롭의 샌들이나 바레사의 샌들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지금하고 있는 벨트만 봐도 주먹만 한 에메랄드가 굴비처럼 엮여 있지 않는가. 하지만 자신은 돈 많은 유한마담의 노리개로 끌려온 것이 아니었나? 도대체 어째서 남자가... 같은 남자인 자신에게? 정상적인 대한민국 남자의 머리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매끄럽게 혀가 입안으로 헤엄쳐 들어왔을 때는 본능적인 혐오감에 소름이 쭈삣 돋아 올랐다. 여태껏 동성애니 뭐니 이런 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생각하고 무관심하게 살아왔는데, 이런 곳에서 같은 남자에게 입맞춤을 당하다니! 두조는 속으로 절규했다. ‘내 첫 키스!’ 쿤 칸칸은 돌덩어리마냥 굳어있는 두조의 혀를 툭툭 건드려보다가 입술을 떼고는 중얼거렸다. “처음인가...?” 노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남색가라는 것을 알고 그의 총애를 받기 위해 부지런히 기술을 연마한 쿠칸이나 주변의 시종들과는 확연히 틀렸다. 입맞춤 한번 가지고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놀란 얼굴을 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뭐, 이런 반응도 신선하긴 해. 쿤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두조의 위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를 쓰러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두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어지러운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반항해야 하나? 응해야 하나? 반항하면 죽겠지? 하지만 상대는 남자잖아! 이대로 나, 겁탈당하는 건가! 똥구멍을 따먹힌다는 둥의 농담은 계집애같이 생긴 놈들에게나 해당되는 건줄 알았는데. 도대체 자신의 어디가 좋다고 이러는 거지! 쿤 칸칸에게서는 뭔지 모를 무척 좋은 냄새가 났다. 부드러운 모래빛 머리카락이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길고 가늘고 단단한 손가락이 두조의 목덜미와 가슴과 배를 훑어 내려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조는 떨고만 있었다. 쿤은 덩치는 산만한 주제에 강간당하는 소녀마냥 떨고 있는 두조를 보고 킬킬 웃었다. 으스러져라 이를 악 물고 눈을 꾹 감고 있는 그의 눈꺼풀을 혀로 툭툭 두드리자, 두조가 깜박거리며 당황스러운 시선을 들어올렸다. 쿤은 웃어보였다. 멀쩡한 사람의 혼도 빼 갈만큼 매력적인 미소였다. 순간, 두조는 상대가 남자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능수능란한 손길이 중심에 와 닿자 본의 아니게 금욕하고 있었던 페니스가 벌떡 일어섰다. 이런 이런, 튼튼하구만. 쿤은 허술한 옷자락을 헤치고 일어선 두조의 페니스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뒤가 뜨거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 훌륭한 것이 자신의 몸 안에서 분탕질을 칠 것을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게다가 상대가 최하층 신분인 천한 노예라는 것이 더욱 더 욕망에 불을 당겼다. 언제나 남들 위에 군림만 하기 때문일까. 쿤은 침대위에서 상대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했다. 최하층의 천한 남자가 황제인 자신을 농락할 것을 생각하니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쿤의 손이 페니스를 훑어주자 두조는 아찔하게 몰려오는 쾌감에 허둥거렸다. 상대가 남자라는 모럴은 계속 두조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아랫도리 이기는 남자 없다고 두조는 참지 못하고 쿤을 와락 안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쿤이 입을 맞고 혀를 밀어 넣자 두조는 거칠게 그 혀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허리께에서 아프게 부딪치는 쿤의 에메랄드 벨트를 풀어버렸다. 두조는 쿤의 황홀한 미모에 넋을 잃었다. 상대가 남자라는 찜찜함만 잊으면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랄만한 완벽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동정인 두조는 그저 애가 닳아 끙끙거리며 쿤의 혀만 빨고 있었다. 쿤은 손 안에서 부풀어 오를대로 부풀어 오른 두조의 것을 보고 자신역시 애가 닳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항상 상비하고 다니는 작은 병 모양의 목걸이에서 향유를 쏟아 부어 두조의 것과 자신의 뒤에 충분히 발랐다. 원래라면 두조가 해야 할 일이지만 쿤은 처음인 두조를 배려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헤집어줄 뜨거운 물건이었지, 사랑하는 사람사이에서나 오갈 상냥한 애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을 밀어 넣은 뒤가 당장 불기둥이라도 삼킬 듯 달아오른 것을 느끼고 쿤은 몸을 일으켜 두조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두조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는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쿤의 몸- 밋밋한 가슴과 자신의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는 훌륭한 물건을 보고 핏기가 삭 가시는 기분을 느꼈다. 두조의 것을 붙잡고 자신의 안으로 밀어 넣으려던 순간- “?!” 쿤 칸칸은, 물렁물렁하게 변해버리는 두조의 물건에 눈썹을 들어올렸다. 두조는 당황했다. 쿤 칸칸도 당황했다. 쿤은 두조의 페니스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두조는 바로 눈앞에서 꺼덕이는 페니스를 보고는 도저히 세울 수가 없었다. 쿤 칸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남자라고 해서 그가 거부당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남색가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니는 자신을 유혹하는 자들이 있었으면 있었지, 이렇게 대놓고 면전에서 망신을 준 놈은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설령 남색을 하지 않는 자들이라 해도 감히 황제인 자신의 유혹을 거부하는 자가 있을 리 없었고, 또한 그는 다 죽어가는 남자도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만큼의 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두조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게이가 아니었고, 남자와 이런 짓 저런 짓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쥐뿔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워 봤자 남잔데,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의 다리 사이 물건은 호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쿤 칸칸의 아름다운 외모에 혹 하여 굶주린 탓에 발기했던 건 사실이지만, 눈앞에서 저리 실한 물건을 봤는데 발정하는 쪽이 이상했다. 차라리 쿤 칸칸이 범하는 쪽이었다면 어차피 노예니까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쑤셔댔겠지만, 안타깝게도 쿤은 뒤로 넣어주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었다. 쿤 칸칸은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굴욕을 맛보았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자신이 이렇게 유혹하는데, 소금에 절인 무처럼 시들시들한 음경이라니! 쿤 칸칸은 참지 못하고 손안에 쥔 물렁한 페니스에 손톱을 세웠다. 두조는 그 고통에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엉겁결에 자신의 중심을 쥔 채 위에 올라탄 쿤 칸칸과 정면에서 시선을 맞부딪치게 된 두조는, 새파란 불길이 이는 듯 분노한 쿤 칸칸의 눈동자를 코앞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쿤 칸칸은 손안에 쥔 음경과 음낭을 터트릴 듯 힘을 주고는 이를 득득 갈면서 소리쳤다. “감히 노예 주제에 날 거부해!” “으으... 으아악!” “네놈의 건방진 이것을 뽑아버리겠어!” “으아아아아악!” 두조는 처참한 비명을 올렸다. 눈물이 쑥 빠졌다. 쿤이 음경과 음낭을 마구 잡아당기는 바람에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두조는 몸부림치면서 쿤 칸칸의 얼굴을 쳤다. “악!”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쿤이 침대 밑으로 쿠당, 떨어졌다. 떨어지면서도 쿤이 두조의 것을 놓지 않았기에 두조는 쿤의 위로 같이 떨어졌다. 쿤은 또 비명을 질렀다. 두조의 머리통이 쿤의 코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던 것이다. 쿤이 중심을 놓아주자 두조는 사타구니를 붙잡고 바닥을 굴렀다.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킨 쿤은, 코에서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에 코 밑을 더듬었다가 경악을 하고 말았다. “피!” 노예에게 맞아서 코피가 났다!(정확히는 부딪친 거지만 쿤은 맞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감히... 감히 황제에게 손을 댄 것만으로 모자라 피까지 보게 만들다니! 한낱 노예가! 쿤 칸칸의 얼굴이 귀신처럼 변했다. 쿤은 벌떡 일어나 중심을 뜯긴 아픔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고 있는 두조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는 미친 말 마냥 날뛰며 두조를 짓밟았다. “아악! 으윽!” 두조는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작정 얻어맞았다. 쿤은 욕설을 고래고래 퍼부으며 발길질을 하다가 바레사를 꽥꽥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바레사! 바레사 네 이놈! 당장 채찍을 가져와! 아니! 병사들을 불러 와! 이놈을 쇠꼬챙이에 꽂아서 모닥불에 구을 테다! 아님 칼을 가져와!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살을 발라 줄 테니까! 감히... 감히 날 거부해? 노예 주제에, 노예 주제에!” 사실 쿤은 두조에게 맞은 것보다, 코피를 흘린 것보다, 두조가 발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더 분노하고 있었다. 태산 같은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을 거부하다니! 소란에 놀라서 달려온 시롭이 벌거벗은 채 날뛰고 있는 황제를 보고 바로 무릎을 꿇었고, 이어서 달려온 바레사가 방안의 난동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쿤은 바레사가 당도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씩씩거리며 발길질을 멈추고는 허리를 숙인 그를 홱 돌아보았다. “채찍!” “예?” “채찍을 내놔!” 시롭이 곧장 일어나 채찍을 가져왔고, 바레사는 군말 없이 그것을 쿤에게 건네주었다. 쿤은 채찍을 양손에 들고 휘며,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알몸의 두조를 보고 냉혹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지?” “.........?” “왜 이 몸을 거부했느냔 말이다! 대체 나의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두조는 대답하지 못했다. 연거푸 말하지만 그는 말을 모르는 것이다. 상황이 어찌된 것인지 알아차린 바레사가 미간을 모으고 대신 대답했다. “폐하, 그 자는 말을 모릅니다.” “뭣이? 말도 모르는 병신 같은 놈을 황궁에 들였단 말이냐!” 그걸 들이라고 한건 자신이면서 쿤은 역정을 냈다. 바레사는 쿤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나아가던 상처가 터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두조에게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물었다. “왜 그랬느냐.” “......?” “왜 폐하... 저분을 안지 않았느냔 말이다.” “.........”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 두조는 속으로 대답해도 죽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억울했다. 정상적인 남자인 자신이 남자를 안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데, 날더러 어쩌라고. 생리적인 반응인걸. 두조는 북받쳐 오르는 억울함에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 남자잖아요.” 바레사는 표정을 굳혔다. 비록 천것들이 쓰는 투박한 말에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아주 간단한 말이었기에 쿤 칸칸 역시도 두조가 무어라 대답했는지 알아차렸다. 쿤 칸칸의 손안에서 꾸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채찍이 휘어졌다. 쿤의 얼굴에 아까와는 온도가 다른 분노가 떠올랐다. 아까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것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빙해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노였다.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으로도 모자라 소금까지 끼얹어진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쿤 칸칸은 여자를 증오했다. 그는 자신보다 아름다운 존재인 -나긋나긋하고 가는 목소리, 풍만한 몸매, 부드러운 살결, 아무리 자신이 아름답다 해도 결코 지닐 수 없는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를 끔찍이도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작, 고작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안지 못한다니. 무슨 대답을 했더라도 쿤 칸칸의 분노를 식히진 못했겠지만, 두조는 쿤에게 있어서 가장 최악의 대답을 했다. 쿤은 채찍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살기를 바라지 마라.” “하아, 하아, 하아......” 쿤은 뺨으로 튄 핏방울을 스윽 닦아내며 채찍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의 발치에는 핏덩이가 된 두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때려죽이겠다고 맘 먹고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렀지만 사람 때려죽이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지친 것은 쿤 쪽이었다. 바레사는 무릎을 꿇은 채, 시롭은 바닥에 손을 대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하나의 핏덩이가 될 때까지 잔혹하게 맞는 두조를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누구라도 그를 말렸다간 두조와 똑같은 꼴이 될 것임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쿤은 뻐근하게 아픈 팔을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조를 내려다보았다. 실컷 화풀이를 하고 나니 분노가 찬물처럼 뱃속으로 내려갔다. 남은 것은 짙은 탈력감이었다. 때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긴 했지만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놈을 끌고 가서 죽이라고 말하려던 쿤은, 이 노예를 이대로 죽여 버리면 아주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자신을 괴롭히게 될 것임을 예견했다. 놈을 죽인다고 해서 상한 자신의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쿤 칸칸은 그렇게 영민하진 않았지만 바보는 아니었고, 솔직한 성격은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 패배라고 이를 수도 있는 그 감정을 인정했다. 그것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저 노예뿐이었다. 쿤 칸칸은 홱 몸을 돌려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저 놈을 고쳐 놔라.” “예... 예?” 틀림없이 개에게 던져주거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사막에 버리라고 명할 줄 알았던 바레사는 너무 의외의 말에 되묻고 말았다. 멍청한 반문에 쿤 칸칸이 그를 째리릿 노려보았다. 바레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시켜놔. 적어도 말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놓으란 말이야, 알겠어? 바레사 네놈이 손수 책임을 지고 쓸만하게 만들어 놔라.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긴다면 바레사 네놈의 책임도 같이 물을 것이다.” 바레사는 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노역장에서 굴러들어온 저 망할 노예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인지. 저 놈이 고자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싫습니다, 라고는 대답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쿤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일별하고 핏방울이 튄 나체인 채로 복도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바레사는 한숨을 쉬고 살짝 굽히고 있었던 허리를 일으켰다. “시롭, 시종을 불러 저 자를 침대에 눕힌 다음에 주술사와 의사를 불러와라. 아니, 일단...... 목숨은 붙어 있는 것이냐?” 시롭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동 없이 누워 있는 피투성이의 두조에게 다가가 코밑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어디 병신은 되지 말았어야 할 텐데.” 바레사는 난데없이 떨어진 자연재해에 가까운 골칫덩이에 혀를 찼다. ‘앗! 콜라다!’ 콜라다, 라고 외치긴 했지만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은 냉장고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조는 그 안에 콜라가 꽉 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반가워서 단숨에 달려갔지만, 냉장고 문에는 커다랗다 못해 거대하기까지 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두조는 그 자물쇠에 붙어 이리 끙끙 대고 저리 낑낑 대어봤지만 냉장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냉장고에 붙어 안간힘을 쓸수록 목구멍에 달라붙는 격렬한 갈증이 느껴졌다. 너무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당장 두조를 구워버릴 듯 강렬한 태양이 하늘에 떠 있었고, 사방엔 물 한 방울 없는 모래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두조는 생각했다. ‘이 냉장고 문을 열지 못하면 죽는다!’ 두조는 욕설을 내뱉으며 냉장고 문을 차고 자물쇠를 비틀고 이로 물어뜯어 보았지만 냉장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물쇠를 부숴보려고 해도 팔뚝만한 쇠고리가 그의 힘에 끊길 리가 없다. 열쇠, 열쇠가 필요해! 두조는 바닥에 엎드려 미친 듯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모래지옥처럼 깊은 구덩이가 될 때까지 계속 팠다. 하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목이 타는 듯 했다. 그냥 갈증이 이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갈급해서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두조는 힘에 겨워 그 구덩이 안에 벌렁 드러누운 채 혀를 길게 빼고 개처럼 헐떡거렸다. 눈부신 태양빛이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견디지 못하고 팔뚝으로 눈을 가리려는데, 문득 그의 머리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두조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초록색의 역광에 그의 얼굴은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품에는 바이올린 크기만 한 커다란 열쇠가 들려있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밤일을 잘한다면 이 열쇠를 주지!’ 두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중심에 솟구친 거대한, 품에 안은 열쇠만큼이나 거대한 페니스를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건 악몽이야! “으아악!”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땐, 요전번 악몽에서 깨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온 몸을 비틀었다. 두조는 이번엔 꿈 때문이 아닌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도로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너무 아파서 식은땀이 쭉 흐르고 눈물이 찔끔 났다. 고성에 놀란 시롭이, 커튼을 걷으며 그의 침대로 달려왔다. “정신이 들었구나!” “시, 시롭.” “사흘 밤낮 의식도 찾지 못하고 헛소리만 지껄이기에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어!” “걱정...... 아, 악몽을 꿔서 그래요.” 그래, 악몽이었다. 엄청나게 실한 페니스를 지닌 남자가 자길 안아달라고 했다. 물건을 세우지 못한다고 콜라도 못 마시게 하고, 채찍을 휘두르며 자신을 마구 때렸다. 눈물 날만큼 억울하고 미치고 환장해서 팔짝 뛰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남자더러 같은 남자를 어떻게 안으란 말인가? 차라리 후장을 내주는 것이라면 강제로라도 가능하겠지만,(이쪽이라고 해서 덜 끔찍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같은 남자를 보고는 흥분하지 못하는데 남자를 안지 못하는 죄로 맞아 죽는 건 너무 어이없지 않는가. 무슨 악몽이 이렇게 리얼해,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잖아. 그렇게 생각하던 두조는 문득 온 몸을 칼로 후비는 듯한 통증과 상처투성이인 몸을 자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던 무자비한 남자의 잔혹한 표정도,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도, 실한 페니스도 떠올렸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이지? 차라리 악몽이 낫다! 그건 꿈이니까! 두조는 고통을 참으며 시롭을 돌아보았다. “저... 어떻게 된 거......” “어휴, 그래도 살아난게 어디야. 폐하께서 치료사를 보내주셔서 많이 나았어. 한 일주일이면 상처가 거의 아물 거 같네.” 시롭은 대답을 회피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살아난게 다행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대로 죽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살아난다고 해봤자 황제의 노여움은 가라앉지 않을 테고, 두조는 황제의 심기를 달래기 위해선 죽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분풀이가 끝나면 전보다 더 참혹한 방법으로 죽임 당하게 되겠지. 그날 밤 일의 전말을 확실히 아는 것은 쿤 칸칸과 두조 뿐이었고, 그 일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고 있는 것은 바레사와 시롭 뿐이었다. 바레사는 사경을 헤매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두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으셨어. 누구보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자부심을 가지고 집착하고 계신 분이 아니던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선 무슨 짓을 하실지 몰라. 그건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롭. 이대로라면 이 노예가 죽어도 폐하의 진노를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살아도 골치가 아플 것이야. 피해를 최소한도로 하기 위해선 이 노예가 폐하를 만족시키도록 만드는 수밖에는 없어. 그리한다면 적어도 이 노예를 죽이는 것에서 그치겠지. 이렇든 저렇든 폐하의 흥미가 식으면 죽게 될 놈이었으니 이 놈의 목숨이야 안타깝지 않지만, 그 책임을 나에게 물으시겠다니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폐하께서 두조를 살려두신 것은 역시......’ ‘그래. 이 노예를 안아서, 아니 이 노예에게 안겨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되돌려 받고 싶으신 거다. 그걸 위해선 같은 남자는 안지 못하는 이 꽉 막힌 돌대가리를 어찌해보는 수밖엔......’ 두조는 핏기 없는 얼굴로 부르튼 입술을 달싹여 말했다. “아파요......” “그래, 일단 살아난 목숨이니, 죽음의 신께서 다시 거두어 가실 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야지. 죽을 좀 내올 테니까 그거 먹고 약 먹자.” 그 후 일주일을 두조는 침대위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나마 황제가 직접 보낸 황궁의 몇 안 되는 치료사가 부지런히 드나들었기에 회복이 빨랐다. 일주일 후에는 거동이 가능하게 되어서, 시롭은 바로 두조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주일동안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시롭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알아듣는 것은 꽤 늘었다. 읽고 쓰는 건 둘째 치고 일단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 급하게 말을 배우다 보니, 아직은 어순이 뒤바뀌거나 하는 둥의 앞 뒤 안 맞는 말밖엔 하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간단한 말은 알아듣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인사 예법은 아주 간단해. 이 곳이 다섯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예... 황족, 사제, 귀족, 백성, 그리고 노예......” “응. 성이 없는 자들이 노예, 보통의 성을 쓰는 사람들이 백성, 가운데 이름이 있는 것이 귀족, 이름에 신성어가 들어가는 것이 신관, 그리고 신성어와 칸칸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황족이야. 예를 들자면 넌 노예니까 그냥 두조고, 내 이름은 시롭 아드레이, 평민이지. 귀족이신 바레사님의 풀 네임은 바레사 나흐 아드레이, 제 1 고위신관이시자 현 황제폐하의 숙부이신 카룹님의 성함이 신성어이고 카룹님도 본래는 황족의 혈통이시지만 칸칸의 성을 내려 받을 수 있는 것은 장자와 장녀뿐이야. 그래서 황제폐하의 성함이 쿤 칸칸이신거지. 내 말... 무슨 뜻인지 다 알아 듣겠어?” 두조는 고개를 저었다. “잘......” “음 뭐. 이건 차차 알면 되니까 넘어가고. 그 외 계급에 따른 예법도 이것저것이 있는데... 넌 노예니까 네가 지켜야 할 예법만 말해줄게. 평민에게 인사할 때는 허리를 숙이면 돼. 귀족에게 인사할 때는 무릎을 굽혀야 하고, 신관에게 인사할 때는 손바닥을 바닥에 대야 해. 그리고 황제폐하 앞에서는 이마를 바닥에 대야하지.” “그렇군요... 그치만 제가 황제폐하를 만날 일이 있을까요?” 두조는 그렇게 말하고 허허 웃어보였다. 두조는 이곳이 황궁이라는 것도, 그 날 밤 다녀갔던 남자가 황제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노예인 자신을 황제가 어쩐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시롭은 굳이 그 사실을 일러주지 않았다. 그날 밤 일에 대해서는 두조도 굳이 묻지 않았고 시롭도 때가 있겠거니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두조는 자신이 돈 많은 마나님의 노리개로 끌려온게 아니라 남색의 대상으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 남자가 자신의 주인일 거라고. 하지만 그걸 직접 물어서 확인사살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남자니까 남자를 보고는 죽어도 서질 않는데, 내 주인이 남자냐, 나는 남자하고는 못하는데 어쩌면 좋냐 하고 말해서 벌집을 들쑤시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몸으로 바깥에 쫓겨났다간 당장 죽고 말아버릴 것이다. 어떻게든 건강을 회복하면 남색 짓은 못하더라도, 이 저택에 빌붙어 일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시롭이나 그때 본 다른 남자(바레사)에게 애원이라도 해보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롭이 그날 밤의 그 남자가 바로 황제폐하라고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갈등하고 있을 때, 바레사가 나타났다. “바레사님!” 바레사는 턱짓으로 시롭의 인사를 받고는 뚜벅뚜벅 두조의 곁으로 다가왔다. 바레사는 자신을 보고 일어서려는 두조를 만류하고 그의 침대 곁에 섰다. 두조는 바레사의 냉랭한 인상에 긴장하고 말았다. 바레사는 딱딱한 얼굴과는 달리 평이한 인사를 건네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흠, 말은 그럭저럭 알아듣는군.” “그럭저럭......” 바레사는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시롭을 돌아보고 나가있으라고 말했다. 시롭을 일부러 내보내는 것에 두조는 불안감을 느꼈다. 바레사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 두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리 쳐다봐도 도대체 인종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정령의 생김이 이러할까? 가장 신기한 것이 바로 피부였다. 팔뚝이나 얼굴 등 그을린 부분은 잘 구운 빵 같은 황갈색을 띄고 있지만 귀를 보면 치즈처럼 희멀겋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먼 바다의 나라에 살고 있는 자들처럼 머리카락이 노란 것도 아니고. 바레사는 도대체 출신이 어디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머리를 저었다. 중요한 건 출신 따위가 아니었다. 이 놈이 지금은 노예라는 사실이며, 황제를 만족시키고 죽어줘야 할 몸이라는 것이었다. 바레사는 개인적인 궁금증을 털어버리고 입을 열어 곧장 본론을 말했다. “정말 그 날 밤, 단지 남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안지 못한 것이냐?” “아......” 두조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곧이어 푸르러졌다. 바레사는 그런 두조의 표정변화를 무심히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은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분이시다. 그 일족 중에서도 그 분의 미모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해질 정도로.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그만큼 아름다운 분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야. 그런데도 단지 남자이기 때문에 안지 못했다는 거냐?” 두조는 또 맞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름다우신 분 맞습니다. 하지만... 남자인데 어째서 여자를 안지 않고 여, 여자처럼 안기시려는지...” “그게 그분의 성적 취향이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그것 때문에 여태껏 자식이 없어 대신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기까지 하지만, 그분께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되니까.” “차, 차라리...” “차라리?” “차라리 제가 여자 쪽이었다면 참으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그...” “네가 안으려니까 도저히 동하지가 않더냐?” 두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레사는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두조의 말이 옳았다. 차라리 노예인 그가 안기는 쪽이었다면 수치스럽든 어쨌든 강제로 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다. 하지만 쿤 칸칸이 안기는 쪽이니 내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물건이 서야 일을 치르는 것이 가능할 텐데, 이 자는 남자를 보고는 발기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바레사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말했다. “아예 안 되더냐?” “예?” “아예 기능을 하지 않더라는 말이냐. 발기부전은 아니겠지?” 두조는 기능이라는 단어도 발기부전이라는 단어도 몰랐지만 바레사의 시선이 이불에 덮혀 있는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 닿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발기는 했었다. 너무 몸이 고되어 오랫동안 자위조차 하지 않았으니 상대가 남자인걸 알면서도 섰고, 그 아름다운 얼굴에 혹하여 순간 남자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덮칠 뻔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의 물건을 확인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성욕이 사라져버렸다. “예뻐서... 서, 서기는 했습니다만 몸을 보는 순간 도저히...” “그 분의 얼굴까지는 좋았는데 몸이 남자라서 아니다 싶더란 말이지.” “예... ” 바레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뒤로는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겠군.” “.........” 내가 바로 들은 거 맞나? 두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살짝 빠져나갔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아직 환자인데다가 귀족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는데 낯선 남자와 발기가 되니 안 되니, 뒤로는 가능하니 안하니... 이따위 대화나 해야 하다니. 게다가 난 아직 동정이라고! 아줌마로도 모자라 남자, 같은 남자를 안아야 하는 건가! 도대체 내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어 차원이동으로 이런 도덕도 윤리도 없는 곳에 끌려와 팔자에도 없던 호모노릇을 해야 한단 말이냐! 두조는 간절한 눈빛을 하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전 정말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일 노옙니다. 힘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그냥 그런 일 하면 안 될까요? 피라미드 만들러 도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전 젊고 건강합니다. 그... 주, 주인님을 안지 못한다고 저를 도로 피라밋 공사장에 보내실건 아니지요?” 바레사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노역장으로 돌아갈 순 없다. 그냥 죽는 거지.” “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서 고개를 돌리고 바레사는 말을 이었다. “그 분은 자존심이 매우 높으신 분이다. 네가 그 분의 자존심을 상처 입혔으니 원래라면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없는 입장이다. 그 분이 너를 살려둔 이유는 단 하나! 너에게 안겨서 자신이 누구에게나 여전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야. 그 쓸모가 없다면 너는 죽게 되겠지. 아니, 쿤 칸칸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하면 너는 죽는게 낫다 싶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진노는 너 뿐만이 아니라 너를 돌본 시롭이나, 너를 책임지게 된 나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쿤... 쿤 칸칸이라고요?” 쿤 칸칸, 칸칸이라면...... 바레사가 확인사살을 하자, 두조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래. 네가 안아야 할 대상은 바로 이 모든 사막의 나라, 제국의 황제폐하이신 쿤 칸칸님이시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두조는 붕어마냥 입을 빠끔거렸다. “제, 제가 어찌 감히 황제폐하를-!” “안지 못하면 넌 죽는다.” 이게,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두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노예놈의 상태는 어떻지?” 오늘쯤 쿤 칸칸이 두조에 대해 물으리라고 예상하고 있던 바레사는,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르면서 되도록 말 속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렇지만 폐하의 시중을 들기엔 아직......” “그럼 언제면 되지?” “글쎄요...” 바레사의 애매한 대답에 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글쎄요라니? 감히 그런 대답을 하다니, 너에 대한 나의 총애가 너무 과했나보구나.” 바레사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하오나, 그 자는 한 달이 지나든 일 년이 지나든 쿤 칸칸님을 안기에 적합한 자가 아닐 겁니다. 노역장에서 일하던 가장 하찮은 노예가 아닙니까. 게다가 정체도 알 수 없는 외국인, 귀족어는커녕 천한 말조차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그런 자를... 왜 원하시는지 소인은 정녕 모르겠사옵니다.” 바레사는 노예의 멍청한 얼굴을 떠올리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특이하다는 것 외에는 아름답지도, 총명하지도, 하다못해 배짱이 넘치지도 않았다. 상대가 황제라는 말에 새하얗게 질리며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걸 간신히 떼놓고 나왔던 것이다. 발에 채이고 채이는 흔한 돌멩이만큼의 쓸모밖에 없는 그런 노예의 품에 쿤 칸칸이 안기다니, 우습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쿤 칸칸이 남자에게 여자처럼 안기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대신들이 많은데, 상대가 하물며 노역장의 노예임에야...! 아니, 애초에 그런 놈이 쿤을 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할게 뻔한데 만족은커녕 쿤 칸칸의 부아만 돋우지 않으면 다행이다. “내가 내 행동의 이유를 일일이 설명이라도 해야 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허나 폐하의 곁에는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아름답고 훌륭하고 고귀한 청년들이 많지 않사옵니까. 그들 중 누구를 고르시더라도 폐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쿤 칸칸은 킥, 하고 웃었다. “너를 포함해서 말이냐?” 쿤은 손을 내밀어 바레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앞섶을 바싹 붙이고 눈웃음을 치며 쿤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침대위에서의 너는 굉장했지. 지극히 뜨겁고, 거칠고, 격렬했어. 그 후로도 너만큼 나를 만족시킨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놈에게 질투를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너에게 안길 의사가 있으니...” 바레사는 입술을 가까이 가져오는 쿤 칸칸을 외면했다. 그리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쿤 칸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네 명의 청년들을 힐끗 바라 보고 시선을 돌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잠자리 기술로 수행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쿤 칸칸은 재미없다는 듯 코웃음을 픽 치고는 바레사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내가 너를 총애하는 건 사실이지.” 바레사의 얼굴이 굳자 쿤은 놀리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를 수행관의 자리에 앉힌 것은 너의 업무능력을 총애하기 때문이지 잠자리 실력 때문이 아니야. 물론, 침대위에서의 너를 아끼는 것 역시 사실이지마는 그것만을 생각했다면 너를 ‘쿠칸’에서 놓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쿠칸이란 것은 15세부터 20세까지 황제의 곁에 머무르는 귀족과 호족가의 자제들을 말하는 것이다. 황제는 황제의 고유한 권리로 그 연령대의 귀족 청년들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었다. 그들은 주로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그 곁에서 나라의 국정을 배운다. 쿠칸은 수도에 머무는 귀족들과는 달리 멀리 토착세력을 가지고 있는 호족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황제가 붙잡고 있는 인질이기도 하면서, 반대로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 항상 존재하며 누구보다도 황제의 치부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쿠칸 시절에 황제의 총애를 입어 고위관직에 오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쿠칸 시절에 본 황제의 치부를 이용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쿠칸일 때는 황제의 일을 일체 발설할 수 없지만 쿠칸에서 나가고 나면 사정이 또 다른 것이다. 쿠칸은 제국 정치의 바탕이었다. 귀족과 호족가의 자제들은 황제를 수행하며 정치를 배우고, 황제는 자신이 기용할 인재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나중에 약점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의 행실을 조심히 한다. 그런고로 쿠칸은 전부 남자다. 허나 쿤 칸칸은 남색의 취미가 있는 터라 그 인재기용에 진정 사심이 없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대신들이 많았다. 쿤 칸칸의 총애를 받으라 자신들의 아들을 공공연히 황제의 침실로 떠미면서도, 정적의 자제가 쿠칸으로 총애를 받다가 관직에 오르면 그 등용의 이유에 불만을 품는 것이다. 허나 쿤 칸칸은 자신의 사생활과 정치는 아주 별개의 것으로 생각했으며, 누군가 그것에 의문을 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황제로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소세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아름답고 늠름한 쿠칸이 있었다. 그는 명문가 출신의 귀족자제는 아니었지만 그 미모로 인해 쿤의 눈에 들었다. 하지만 쿤 칸칸의 총애를 믿고 지나치게 오만방자해진 그는 귀족들로부터 뇌물을 받다가 침대에서 쿤의 칼을 맞고 죽었다. 쿤 칸칸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그의 목을 손수 잘라 쿠칸들이 돌려보게 했다. 그렇게 쿤이 자신의 사생활 관리 능력을 과시한 이후 대신들은 아무도 그의 공정함에 대해 의심을 표하지 못했다. 허나 쿤 칸칸 앞에서나 그랬다는 말이고 뒷말이 오가는 것은 쿤 칸칸이 남색을 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레사는 그런 쿠칸의 제도와 쿤 칸칸의 총애, 그것을 고깝게 보는 대신들 사이에 끼어 피해를 보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용모가 눈에 띄도록 아름다운 편이 아닌지라 나이 열여덟이 되도록 쿤 칸칸의 눈에 띄지 않고 있던 바레사가 쿤 칸칸의 관심을 받게 된 계기는 사실 그의 총명함 때문이었다. 허나 어쩌다가 잠자리를 함께하고 보니 바레사의 테크닉이 쿤 칸칸을 아주 크게 만족시켜주었고, 쿠칸을 나갈 때까지 매일 밤 시중을 들었을 정도로 그 총애가 대단했다. 그렇다보니 별다른 뒷배가 없는 바레사가 황제의 수행관이라는 자리에 임명되었을 때 대신들은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바레사가 더 이상 쿠칸이 아니니 황제가 그를 수행관으로 두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뒹굴려 한다는 소문이 온 궁전 안팎으로 자자했다. 바레사로서는 무진장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바레사는 정말 그런 의도로 자신을 수행관으로 임명한 거라면 그 인사를 철회해 달라는 탄원을 쿤에게 올렸다가 죽을 뻔 했다. (다행히 곤장 스무 대에 그쳤다.) 그렇다고 해서 쿤이 바레사와의 잠자리를 관두려 했다는 건 아니다. 쿤이 그를 수행관으로 임명한 건 바레사의 능력과 청렴함을 보고 결정한 것이었지만... 쿤은 자신의 사생활과 정치는 별개! 라고 생각하는 만큼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면이 있었다. 즉 바레사랑 침실에서 뒹굴어도 자신만 공정성을 지키면 누가 뭐라하든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레사를 열심히 유혹했다. 하지만 바레사로서는 주변의 눈도 신경 써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번번이 쿤의 유혹을 물리치곤 했다. 그러나 같이 살을 섞은 적이 있는 군주에 대해서... 아무 사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하찮은 노예를 질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 그런 하찮은 노예에게 안기는 쿤을 보기 싫은 것도 사실이다. 쿤은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다시 가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잠자리 시중을 들어줄 것이 아니라면, 그 노예에 대해서 군말 하지 마라. 오늘 밤 그 놈을 내 거처 별궁으로 보내!” 바레사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 노예는 폐하를 만족시켜 드리기는커녕 손끝하나조차 대지 못할 것입니다.” “너는 내가 그 노예하나 요리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거냐?” “누구보다 높으신 폐하께선 폐하께 품는 저희들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실 겁니다. 하물며 그것이 비천한 노예임에야...” 쿤은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하지만 그 놈은 내가 황제인 것을 모를 때도 나를 거부했어. 내가 황제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에 거부했다고! 물렁한 젖가슴만 달리면 이 아름다운 나보다 여자가 더 좋단 말인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고정하시옵소서.” “놈은 나를 안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해!” “...그 후에는 어쩌실 겁니까.”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쿤은 코웃음을 팩 치고는 싸늘하게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일 것이다. 감히 이 나를 거부한 죗값을 치러야지!” 목욕을 하고 나온 두조는 시롭이 입으라고 가져다 둔 옷을 보고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싸안았다. 갑자기 목욕하라고 할 때부터 느낌이 오긴 했다. 역시, 오늘 밤...... 황제 폐하를 안아야 하는 것일까! 흥분은커녕 벌써부터 고추가 오그라 붙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던 그 흉흉한 모습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오늘 그를 안지 못하면 또 그런 꼴을 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맙소사,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아오야마님! 이 위기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제기랄.........” 집에 가고 싶다. 도대체 나는 어째서 이런 곳으로 와서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일로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순간 이럴 바에야 피라밋 노역장에서 죽는 편이 나을 뻔 했다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그 혹독하던 시간을 떠올리고 곧 고개를 저었지만, 지금 이 상황도 그 못지 않게 괴롭다. 그래도 얼굴은 여자보다 예쁘잖아. 그 얼굴에 혹해서 서기도 했으니까... 잘 될지도 몰라. 바레사의 말처럼 뒤로 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힘내자, 김두조! 이런데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죽을 순 없지 않나! 하지만 아무리 용기를 끌어내보려 해도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아무 다를 바가 없었다. 나가니 시롭과 함께 바레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바레사가 지긋한 시선으로 뭔지 모를 압박감을 안겨주는 가운데 시롭이 머리며 손톱을 정리해주고 샌들을 신겨주었다. “준비 다 됐으면 따라오너라.” 울상을 하고 앞서 가는 바레사를 마지못해 따라가는 두조를 시롭이 다정하게 위로했다. “잘 해봐. 혹시 아니? 폐하의 총애를 얻어 노예로선 꿈꿀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지.” 두조는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전에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은데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게 노예 인생이잖아. 잘 될 거야. 너무 겁먹지 말고 힘내!” 허나 시롭의 응원에도 남자를 안으러 가는 일에 격려를 다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더 처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게 노예 인생이라니, 너무해. 난 원래 노예도 아닌데. 발을 질질 끌면서 복도를 나와 차가운 달빛이 내린 정원을 걸었다. 이곳의 풍경은 굉장히 이국적이었다. 담이 없는 드넓은 광장과 수많은 조각상, 푸른 밤하늘에 길게 뻗은 야자수. 잔디나 조경수 대신 큼직큼직한 돌로 만들어진 광장의 가운데엔 인공 연못들이 층층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연못 위로 연꽃이 가득 피어있었고 개구리 소리가 요란했다. 쿤 칸칸의 거처로 향하면서 바레사는 별 소용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남자를 안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느냐?” 당연히 모른다. 시롭이 기본적인 예절이며 행동거지를 가르쳐 주긴 했지만 그녀는 여자이기에 남자가 남자를 안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었다. 두조가 고개를 젓자 바레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여자를 안아본 적은 있느냐?” 이번에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바레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본 적이 없으니 모를 테지만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구멍이 한 개 뿐이다. 그곳이 어딘지는 너도 남자니까 알고 있겠지.” ......항문의 본래 용도를 떠올린 두조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동안 남자를 안는다 안는다 해도 어디로 어떻게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두조는 X을 배출하는 곳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다. 하지만 두조가 충격을 받든 말든 바레사의 날치기 강의는 계속되었다. “여자와는 달리 남자의 구멍은 스스로 젖지 않는다. 여자의 것보다 좁고 신축성도 덜해서 집어넣기도 힘들지. 폐하께서는 남자를 받아들이는데 능숙한 몸이시니 여러모로 쉽겠지만 빨리 일을 치러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냥 들이밀었다가 피를 보면 큰일 난다.” 바레사는 작은 병 하나를 두조에게 던져주었다. “향유다. 일단 그걸로 뒤를... 충분히 풀어줘야 한다. 폐하께서도 항상 향유를 상비하고 계시니 그것을 이용해도 좋고.” “풀... 풀어준다니요?” 바레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두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구멍을 만들어보였다. 그리고 다른 쪽 손가락을 그 구멍 안으로 집어넣으며 돌려보였다. “이렇게 향유를 묻힌 손가락을 하나씩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내부를 늘리는 거다. 입구 주변부터 꾹꾹 눌러주면서 들어가는 게 요령이지. 손가락이 세 개 정도 들어가면 넣어도 무리가 없다는 소리다.” 똥구멍에 손가락을............ 차마 상상하기가 힘든 장면이 떠오르려는 것을 두조는 황급히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냥 발기하면 쑤셔넣는게 아니라 중간에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까지 있다니, 아무래도 이건 불가능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당장 뒤돌아서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두조는 바레사가 후비는 손가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손가락을 넣어서 구부려 내부를 짚다보면... 폐하께서 반응이 보이는 부분이 있을 거다. 폐하께서는 그 지점이 상당히 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찾기가 어렵긴 하다마는 감도가 워낙 좋으신 분이니......” 바레사는 집어넣기만 해도 성공일 텐데 이런 테크닉까지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하고 회의를 느끼다가 두조의 멍청한 얼굴을 보고 그가 자신의 피와 살이 되는 명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쯤 넋이 나간 몰골이었다.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 두조의 혼은 어느샌가 가출 해 있었다. 바레사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정신 차려라.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잘하지 못하면 치도곤을 치르는 것은 너 뿐만이 아니다.” 이놈이 잘하지 못하면 성난 쿤 칸칸을 달래기 위해 꼼짝없이 자신이 침실로 끌려가게 되는 수가 있다. 자신마저 그의 요구를 거부하면 꼼짝없이 목이 달아날 테니까. 수행관의 능력을 인정받기까지 쿤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제와 다시 쿤의 밤 상대가 되어 수행관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깎아먹는 짓은 추호도 하기 싫었다. 바레사는 두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런 테크닉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일단... 일단 집어넣기만 하면 그 뒤는 폐하께서 전부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폐하의 얼굴만 쳐다보든지 여자라고 상상하든지 어떻게든 세워야 한다. 알겠느냐?” 두조는 울상을 해서 고개를 떨궜다. 바레사는 그런 두조를 보고 다시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쿠칸들 중에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만큼 잘나고 멋진 젊은이들이 많건만, 하필...... 설령 이 놈이 쿤을 안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는 결코 쿤 칸칸의 취향이 아니었다. 음란한 쿤 칸칸은 침실에서 자신을 지배하고 휘두르고 울려주는 자를 좋아했다. 바레사가 사랑받은 이유로 그의 기교가 대단하거나 밤새 발기해 있을 만큼 절륜해서가 아니었다. 침대위에서만큼은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창을 대하듯 거칠게 쑤셔 박고, 모욕적이고 음탕한 말들을 늘어놓고, 쾌감이 고통스러워 울 정도로 괴롭혔기 때문이다. 허나 이 숫기 없는 노예가 침대위에서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질 않았다. 뭐, 이렇든 저렇든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적어도 그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바레사는 두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황제가 머무르는 궁전은 사방이 해자처럼 연못이 자리해 있고 오직 네 개의 다리로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황제와 일부의 쿠칸들 뿐이기에 황제가 머무르는 곳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궁전의 규모는 소박했다. 그 거처 뒤쪽 인공연못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별궁은 황제가 친구나 가족 등 개인적인 용무로 누군가를 거처로 불러들일 때 이용되곤 하는 곳이었다. 물론 밤에는 바깥에서 황제의 밤시중을 들러온 자들이 불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바레사는 별궁의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두조를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말했다. “제일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방에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일단 들어가면 폐하께 예의를 갖추어 인사해라.” “저는... 저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대체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용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두조는 애원해보았다. 두조를 지그시 바라보던 바레사는, 역시나 소용없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 충고를 해주었다.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인사를 한 후엔, 상대가 황제폐하라는 사실을 잊어라.” “남자인 걸 잊는게 아니고요?” “남자라는 사실은 벗으면 보이는 것이지만 황제폐하라는 사실은 벗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그 분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쿤 칸칸이 황제폐하라는 사실을 잊을 수만 있다면, 오늘 그 분을 안지 못해도 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까의 긴 테크닉 강의보다는 훨씬 도움 되는 말인 것 같았다. 더 이상 폐하를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보라는 말에, 두조는 호랑이 굴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쿤 칸칸은 연못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을 빼곡히 메운 수련위엔 이슬대신 달빛이 굴러가고 있었고, 별들이 빛나는 새파란 밤하늘은 낮 못지않게 빛나고 있었다. 신선한 밤공기 중에 술잔을 기울이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쿤 칸칸도 그 풍경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감히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것이라면, 이쪽은 실존하는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이 지닌 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두조는 쿤의 모습을 확인하자 바닥에 엎드려 두 손과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그리고 시롭이 가르쳐 준 대로 예법에 맞는 인사말을 내뱉었다. “쿤 칸칸의 영광이 모든 하늘과 땅에 가득하기를! 미천한 노예 두조가 황제폐하를 뵙나이다.” 스륵,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황제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임을 부정할 수 없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일어나라. 나를 마주볼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노라.” “망극하옵나이다.” 두조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일어나는데 무릎이 덜덜 떨렸다. 꼴이 한심했지만 상대는 손짓 하나로 자신의 목을 꺾어버릴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다. 그가 휘두르던 채찍의 잔혹함과 그 고통을 떠올리자 온 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그의 나신- 곤두서 있던 물건이 연이어 떠오르자 속까지 안 좋아졌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거의 정면에서 마주보이는 쿤 칸칸의 감청색 눈동자를 바라보았을 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쿤 칸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몸을 돌려 침대를 향하며 명령했다. “이리 오너라.” 두조는 발을 질질 끌며 그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쿤을 보면서도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꾹 쥔 주먹 안에서는 식은땀이 솟구치고 머릿속엔 바레사의 마지막 충고만이 쩌렁쩌렁 울렸다. - 황제폐하라는 사실을 잊어라! 쿤은 멍청히 선 두조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뭘 하는 거냐?” “앗, 그......” 쿤은 자기가 도대체 이런 목석같은 놈을 데리고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져버려 혀를 찼다. 맘 같아선 당장 이놈을 뻥 차서 내쫓아버리고 쿠칸을 대신 불러들이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았다. 이 놈을 햇볕에 놔둔 치즈처럼 물렁하고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서 함락시키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불타올랐다. 쿤 칸칸은 두조의 팔을 홱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 그의 어깨에 두 팔을 감고 몸을 뉘었다. 두조가 그의 위로 쓰러지면서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황제와 맞닿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쿤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정강이를 세게 찼다. “악!”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두조는 쿤의 위로 쓰러졌다. 쿤은 그를 꽉 안은 채 강제로 키스했다. “으읍......” 두조는 자신이 깔아뭉개도 아무렇지도 않은- 몸 아래로 느껴지는 튼튼한 남자의 육체에 좌절했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도 이건 남자다. 맞닿은 가슴은 자신만큼이나 널찍하고, 배는 탄탄하며, 군살 없이 날씬한 허리와 옆구리래도 가녀리진 않다. 게다가 아직까진 물렁한 이 앞섶! 진짜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살려면 어떻게든 해야 한다. 두조는 자신의 입속을 훑어대는 쿤의 혀에 응하려고 애썼다. 최대한 혀의 움직임에만 정신을 쏟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천장을 긁는 혀끝, 혀를 부드럽게 감았다가 놓아주는 그 움직임. 쿤은 정말로 키스를 잘했다. 그것은 모든 상황을 잊고 두조가 넋을 놓을 법한 움직임이었다. 쿤 칸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얼이 빠진 두조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리고 어깨를 콱 붙들었던 손에서 힘을 빼고 뒤통수의 부드러운 머릿속과, 늘씬한 등줄기, 탄탄한 엉덩이로 손을 뻗쳤다. 목덜미를 쓸어주며 손톱으로 귀밑을 긁자, 두조의 입안에서 비음이 새어나왔다. “으음......” 두조는 입술을 떼고 자신의 아래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팔에 휘감기는 머리카락은 달빛처럼 빛났고, 반짝이는 감청색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파이어와도 같았다. 매끄러운 붉은 살결과, 그보다 더 붉은 입술. 인간이라 믿을 수 없는 미모였다. 두조는 자신이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는 잡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며 쿤의 목덜미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뭘 발랐는지 달착지근한 맛이 나는 목덜미를 핥고 씹었다. 하지만 그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자도 아니니까 가슴을 애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래를 주무르자니 자신과 같은게 달려 있을 것을 생각하니 무섭다. 어정쩡하게 옆구리만을 매만지면서 두조는 생각했다. ‘풀... 풀어주라고 했던가? 손가락을 넣으라고... 아, 씨... 똥구멍에다가 손가락을 어떻게 넣으라는 거야. 진짜 미치겠네.’ 쿤은 한숨을 쉬었다. 목덜미만을 배회하는 입술에선 눈곱만큼의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두조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만이 덱데굴 들려왔다. 이런 멍청한 노예 놈과 바보짓을 하고 있는 상황이 전부 짜증스러워져서 쿤은 두조를 확 밀쳤다. 애무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세워서 넣고 싸게 만들면 돼! 눈을 휘둥그렇게 뜬 두조를 카펫이 깔린 바닥에 쓰러트리고 쿤은 거칠게 그의 옷자락을 헤집었다. 그리고 곧장 다리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으악!” 머리위에서 울리는 외마디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쿤은 두조의 음경과 고환을 입속에 가득 담고 우물거리다가 빨아들였다. ‘황제한테 이런거 시켜도 되는 거야?’ 아래에서 느껴지는 뭉근하고 축축하고 따뜻한 감촉, 다리 사이에 자리한 아름다운 얼굴의 시각적 효과. 언제 그랬냐는 듯 페니스가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황제는 펠라치오도 잘했다. 목구멍 깊숙이 페니스가 들어갔다 나오는데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았다. 사정감을 참느라 두조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는 애꿎은 카펫을 쥐어뜯었다. 입에서 새어나가는 신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두조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폐, 폐하 비키십시오! 쌉니다...! 윽!” 그 순간 쿤은 재빨리 입술을 떼고 두조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단단하게 곤두선 두조의 것을 붙잡고는 향유도 바르지 않고 뒤를 풀어주지도 않고 억지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무리 남자의 것을 받는데 능숙한 황제라지만 힘들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빡빡했다. 두조도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쿤이 사정직전에서 멈춘 페니스를 놓아주지 않았기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쿤은 오기로 이를 악 물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두조의 것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빌어먹게 아팠다. 너무 아파서 눈물을 찔끔 흘리며 쿤은 으르렁거렸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널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를... 이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다니......” 힘들면 그만두면 될 텐데 왜...! 두조는 아연한 기분으로 자신의 위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쿤을 바라보았다. 쿤의 얼굴은 상처받은 자존심과 통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쿤이 옷을 다 벗지 않아서 그런가, 남자라는 느낌이 와 닿기보다는 자신을 받아들이려는 그 움직임이 어딘지 애처롭고 불쌍하기까지 했다. 황제임을 잊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던 바레사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랐고, 그 순간 쿤은 두조의 것을 자신의 안에 전부 집어넣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너무 아파서 도저히 스스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바닥에 댄 무릎에 힘을 주고 쿤은 어정쩡한 자세로 비지땀을 흘리며 이를 득득 갈았다. “움직여.” “......에?” “움직... 이란 말이야!” “하, 하지만... 괜찮으십니까. 폐하...” “죽고 싶지 않으면 움직...!” 두조의 멱살을 잡으려고 쿤이 몸을 움직인 순간. 두조는 허무하게 사정했다. 쿤은 자신의 안을 적시는 정액도, 흐려지는 두조의 표정도 전부 보았다. 집어넣고 사정하게 만들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두조는 자신에게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싸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쿤은 쾌감을 느끼기는커녕 고통스럽기만 했고, 두조의 사정도 순전히 물리적인 쾌감에 의해서 쿤 혼자만의 고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 결코 흥분 때문이 아니었다. 사정한 두조의 음경은 다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시식 내려앉았다. 쿤은 화가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뱃속이 뒤틀리는 울분이 솟구쳐 올랐다. 쿤은 참지 못하고 싸대기를 날렸다. 철썩! 철썩! “으윽!” “이 망할 놈의 노예가! 감히 날 우롱해! 제기랄!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면 뭔가 보답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고생하게 삽입했더니 그새 싸? 너 조루냐! 그런 거지!” “앗, 자, 잠깐...” “내가 어쩌다가 이런 빌어먹을 놈을 주워 와서 이런 모욕을 당해야만 하는 거냐! 이번에도 내가 남자라서 안 된다고 말할 참이냐! 다 필요 없어! 당장 네놈의 소금항아리에 집어넣고 말려 죽일 테다!” 철썩! 철썩! 사정없이 때리는 따귀는 남자의 힘인지라 엄청 매웠다. 금방 코피가 쏟아지고 입술이 터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두조가 떠올린 것은 이대로라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 황제폐하라는 사실을 잊어라! “잠깐만!” 두조는 황제의 두 손목을 콱 붙들었다. 쿤의 눈동자가 커졌다. 두조는 입을 열어 외치려다가 부어오른 뺨의 통증에 으윽... 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뭐?” 쿤은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황제라서 그렇다고 말할 참이냐? 아니면 네가 조루라서 그렇다고 말할 참이냐?” “그게 아닙니다. 방법이 틀렸다는 거예요!” 무슨 헛소린가 싶어서 쿤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두조는 쿤의 두 손목을 붙잡은 채 버럭버럭 외쳤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불러다가 다짜고짜 안으라니, 아무리 남자가 하반신 생물이라고 해도 쉬울 리가 없잖아요! 저는 그리 헤픈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폐하께서 황제라서, 또는 그저 남자라서 불가능한게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해야 잠자리가 가능한 겁니다!” “당신이라고 했냐, 지금?” “내가 당신을 거부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나요? 그 상처받은 자존심은 그냥 정사 한번으로 쉽사리 회복되는 값싼 겁니까? 나랑 자고 싶다면, 날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요! 내가 당신에게 미쳐서, 제발 한번만 안게 해 달라 그 다리에 매달려 애원하게 만들란 말이에요! 그게 진짜 매력 아닌가요?” 두조에게 두 손목을 붙잡힌 채 쿤 칸칸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멍청하게 있다가 쿤은 문득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두조의 두 손을 뿌리치고는 정액이 흐르는 질척한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있는 수건으로 가랑이를 대충 문질러 닦고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두조는 얼굴을 붉히며 끈적해진 자신의 사타구니를 옷자락을 끌어내려 가렸다. 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쿤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이냐?” “예?”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헛소리를 하는 거라면 잘못 생각했다... 알량한 목숨 며칠 연장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넌 노예고, 난 황제니까!” 두조는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이어가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습니다. 방금 폐하께 올린 말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폐하를 사랑하게 된다면 잠자리뿐만이 아니라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흥,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보란 말이지......” 쿤은 턱을 쓰다듬었다. 문득 잊고 있었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허리께까지 닿는 긴 검은 머리, 부드러운 회갈색 눈동자. 한때 자신이 지극히 아꼈던 사람. 소세이.....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이 세상에 자신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없는데 누굴 사랑하란 말인가? 그가 아무리 아름답다고는 하나 자신만큼은 못했다. 그러나 소세이가 자신의 권력을 등에 업고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가 자신을 사랑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걸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 쪽이었다. 침대위에서 자신을 안던 그의 등에 비수를 꽂고 잔인하게 난자해 죽였던 것은 배신감 때문이었다. 소세이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느꼈던 환희, 기쁨, 행복, 또 그 슬픔과 고통, 배신감...... 그 이후로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 없었다. 숱한 남자들에게 안기며 침대위에서 음란하고 달콤한 말들을 속삭였지만 그 모든 것은 침실에서의 일일 뿐. 침실 밖 황제로서의 자신은 누구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랑이란 얼마나 달콤한 독약이던가. 이 노예의 말이 맞았다. 물리적인 자극으로 사정 한번 하는 것으로 감히 자신을 거부한 죄를 용서할 순 없다.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처절한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트릴 테다. 그 마음을 실컷 농락하다가 잔인하게 버려줄 것이다. 쿤은 후, 하고 미소를 흘리고는 엎드린 두조에게로 다가가 손끝으로 그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경고했다. “나를 사랑하게 된다 한들 후회하지나 말아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그때, 나를 모욕 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니까.” 황제는 두조를 내버려두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두조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남은 쿤의 잔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스키한 목소리,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푸른 눈동자, 숨이 막히는 그 미모.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고통에 힘들어 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 얼굴도. 애처롭고 불쌍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두조는 확 붉어지는 얼굴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고통스러워하는 쿤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이없이 사정해 버렸던 건... 그렇게 오기를 부리는 쿤이 귀엽다고 생각했기 때문. ‘으아-! 그런걸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나 변태 아냐?!’ 설마 벌써 사랑에 빠진건 아니겠지 하고 두조는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세상에! 두조! 살아있었구나!” 바레사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쿤의 별궁에 머무르고 있던 두조는 시롭이 나타난 것을 보고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롭!” “정말 다행이야!” 시롭은 달려와 두조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 온기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저 시녀라서 자신을 돌봐줄 뿐이라고 생각했던 시롭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시롭은 두조의 팅팅 부은 얼굴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지까지 멀쩡하다니 이게 웬일이람! 어떻게든 살아있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환상적인 테크닉으로 황제폐하의 마음을 사로잡기라도 한 거야?” 두조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바레사님 충고에 따랐을 뿐이에요.” “바레사님의 충고?” “상대가 황제폐하임을 잊으라는 충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좀 자세히 말해봐.” 시롭은 두조를 끌어다가 창가에 앉히고는 자신도 그 앞에 앉아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이야기를 재촉했다. 두조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절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뭐?” “원래 잠자리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갖는 거잖아요. 그래서 폐하를 사랑하게 되면 폐하가 황제이든 남자이든 상관 않고 안을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랬더니...” “세상에! 그런 대담한 소리를! 그래서 이렇게 뺨을 맞은 거야?” “아뇨, 뺨을 맞은건 다른 이유지만... 어젯밤에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폐하를 성나게 만들었거든요. 하여간에 폐하께서는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라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셨어요. 제가 폐하께 반해서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달아날 목숨이지만... 일단은 구제한 셈이죠.” 시롭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머나, 두조 너......” 그리고는 훗훗 웃더니 말했다. “숫기는 하나 없이 순진하게 생겨가지고 완전히 고단수잖아!” 두조는 눈을 크게 떴다. “네에?” “이거이거, 폐하를 안지 않은 것도 처음부터 다 작전인거 아냐? 폐하의 눈에 들기 위한 고단수의 작전! 폐하께서는 많은 남자들을 침실로 불러들이긴 하지만, 그건 그냥 잠자리 상대일 뿐이잖아. 아무리 테크닉이 좋고 절륜해봤자 침대위에서의 일일 뿐이란 말이야. 그런데 넌 도리어 폐하를 거부함으로써 폐하의 흥미와 오기를 자극시켜 너에게 푹 빠지도록 만들 셈이지?” “예에?” 그럴 맘은 정말 없었던 두조는 시롭이 하는 말에 정신없이 고개를 내어저었다. “아니에요! 가,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발칙한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전 정말로, 상대가 황제폐하가 아니라는 바레사님의 말을 떠올리니까 황제라는 이유만으로 반 강제로 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괜찮아, 괜찮아. 정말 잘했어! 노예인 네 거처를 바레사님의 거처에서 이곳 별궁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하신걸 보면 폐하께서는 정말 널 진지하게 대할 생각이신거야. 쓰고 버릴 하룻밤 상대가 아니라! 나한테까지 내숭을 떨 필요 없어,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진짜 아닌데......” 두조는 우물우물 부정했지만 시롭은 모든 것이 두조의 작전이라 믿고 그것을 밀어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썩 달가운 오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롭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쿤 칸칸과의 지난밤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도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게 말씀드리긴 했는데...... 저, 어쩌면 좋죠? 폐하께 날 반하도록 만들어 보라고 떠들긴 했는데...... 폐하께 진짜 반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거고, 반하지 않으면 또 그것대로 문제일 거 아니에요.” 시롭은 두조의 등을 팡 두드리며 말했다. “어쩌긴! 폐하를 너에게 반하도록 만들어야지!” “에엑?” “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너에게 푹 빠지도록 해서 꼼짝할 수 없도록 만드는 수밖에는 말이야! 너도 그걸 노린 거잖아?” “그, 그렇지만 전 노예고... 귀족말도 잘 못하고...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고... 게다가...” 어젯밤 두조는 쿤에게 사정했다. 단순한 쾌감의 작용일 뿐이었든, 쿤을 귀엽다고 생각했든 간에 사정한 건 사실인 것이다. 쿤은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인데다가 최상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자신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반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쿤을 자신에게 반하도록 만드는 일 같은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시롭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정말 그렇게 자신이 없어?” “네?” “내숭이라면 그쯤 해둬. 폐하는...... 널 마음에 들어 하시잖아? 노역장에서 널 데려왔을 때부터 난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폐하가 아무리 남자를 밝히신다고는 해도 역노까지 탐할 만큼 굶주린 분은 아니시란 말이야. 게다가 넌 폐하를 거부하고도 두 번이나 살아남았어. 바레사님은 그것이 폐하의 자존심 탓이라 생각했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 “그게 무슨......” 시롭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의 육감을 우습게 보지 마. 내기든 뭐든 간에, 폐하께선 널 자신에게 반하도록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신 거잖아?” “그치만...” “냄새가 난다구, 냄새가. 아주 달달~한 냄새가 말이야.” 도대체 뭘 보고 쿤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믿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두조였다. 바레사만 해도 지난밤의 전말을 듣고 자신의 거처를 별궁으로 옮기라는 쿤 칸칸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싸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지 않는가. - 폐하의 자존심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도 오래가진 못할 거다. 그게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네 죽음도 고통스러울 것이야. 모든게 너무 위험하다. 조금만 삐긋해도 당장 목숨이 달아나는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두조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쿤 칸칸을 만난 이후로는 목숨을 반은 내놓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렵사리 지켜낸 목숨 이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두조는 시롭의 두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그럼 폐하가 절 좋아하게 되면 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가요?” “살아남다마다! 폐하께서 널 사랑하게 만든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리게 되는 것도 꿈은 아니지... 하지만 말이야.” 시롭은 두조의 손을 붙잡아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대단히 냉정하고 공과 사가 분명하신 분이야. 폐하가 지금은 널 마음에 들어하는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설령 정말 폐하의 총애가 네게 향한다고 할지라도... 넌 상대가 황제 폐하임을 잊어서는 안 돼. 바레사님이 침대 위에서는 폐하가 황제임을 잊으라고 말했다며? 하지만 침대 밖에서는 폐하가 황제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돼. 그것을 잊고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네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거야. 아무리 큰 총애를 받더라도... 설령 진짜로 폐하께서 스스로의 본분을 망각하시고 네게 이 왕국을 가져다 바친다고 하더라도 너만은 그걸 잊어선 안 돼. 그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될 테니까. 알겠니?” 두조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저 분수를 지키라는 충고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황제이든 아니든, 쿤 칸칸은 쿤 칸칸일 뿐인데 침대 위와 밖이 다르단 말인가? 시롭의 말에 따라 침대 밖에선 그가 황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 황제인 그가 노예인 자신을 사랑할 수나 있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침대 밖의 쿤 칸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침대 위에서도 사랑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다고 황제인 그를 무시하고 천한 노예 신분인 자신마냥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짜 골치가 아프다. 두조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바레사는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몸을 홱 돌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바레사를 놓치지 않고 뒤따라 와서 등 뒤에 찰싹 붙었다. “야아, 그렇잖아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우연히 마주치다니요.” “뭘 물어도 해드릴 말은 없습니다만.” “것 참. 제게 이렇게 냉정하시면 아니 되지요.” “상냥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요.” 쌀쌀맞은 바레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끈질겼다. 남자의 용모는 이 부근을 지나다니는 젊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대단히 준수했다. 화려한 적금발도, 은은한 회색 눈동자도 전부 매력적이었다. 굳이 귀에 매달고 있는 표식이 아니더라도 그 외모만으로 쿠칸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폐하께서 오늘아침 모든 쿠칸들에게 별궁의 출입을 금지시키셨어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암암리에 도는 묘한 소문과 아주 관련이 없는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묘한 소문이라고요?” 바레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폐하께서 노역장에서 웬 노예를 주워왔다는 소문 말입니다.” 바레사는 속으로 가만히 혀를 쳤다. 자신의 거처에 은밀히 데려다놓고 두조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건만... 이놈의 황궁에는 비밀이란게 없다. 하지만 바레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소문을 부인했다. “테살,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저 도도하신 폐하께서 고작 노역장의 노예를 상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변에 멋진 젊은이들이 널려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별궁에 총애하는 쿠칸들의 출입마저 금지된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그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함구를 명령하셨기 때문에 저는 무엇도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당신을 찾을 일이 계시면 직접 처소로 납시겠지요. 어젯밤에도 당신에게 가지 않으셨습니까?” 테살은 흐음, 하고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그랬죠...... 다른 사내의 냄새를 묻히시고 말입니다.” “다른 쿠칸에게 가셨다가 들리신 것이겠지요.” “제가 아는 바로는 어젯밤 폐하께선 쿠칸들을 찾지 않으신 모양이던데요?” “아니면 어설픈 시종이라도 유혹하셨다가 만족하지 못하셨든지요.” 테살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바레사 당신은 아니라는 소리군요.” 바레사는 흥, 하고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저와 그러셨다면 당신을 찾아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랬겠죠...... 그렇지만 폐하께서는 당신의 앞뿐만 아니라 뒤도 훌륭하다는 사실을 모르시지 않습니까.” 바레사는 미간을 찡그리며 엉큼하게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는 테살의 손을 쳐냈다. “뒤뿐만 아니라 앞의 절륜함도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내년, 쿠칸의 지위에서 벗어난 후 찾아오시지요. 뒤가 헐어버릴 정도로 쑤셔 드릴 테니까.” 테살은 바레사의 불쾌감을 보고도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런, 저는 당신의 앞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뒤만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바레사는 능글맞게 웃는 테살을 두고 홱 몸을 돌렸다. 진짜 피곤하다. 유혹을 거절하는 건 쿤 칸칸만으로도 벅찬데 저 쿠칸까지 달라붙음에야... 쿤이 아무리 쿠칸들의 순결에 관심이 없다한들 테살은 현재 가장 총애 받고 있는 쿠칸이었다. 쓸데없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테살은 바레사가 쿠칸이던 시절 그보다 네 살이나 어린 주제에 바레사의 뒤쪽 순결을 따먹었다. 황제폐하의 총애를 받는 그 대단한 절륜함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하다며 강제로 덮쳤던 것이다. 아니, 그게 궁금하면 덮침 당해야지 왜 덮치는 거냐고! 실컷 뒤를 꿰뚫리고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자신을 보고 테살은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바레사도 별 수 없는데?’ 그 후로 바레사가 쿠칸을 나간 뒤에도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 자신의 성질을 긁으며 추근거리곤 했다. 쿤 칸칸이 알게 되면 더 큰 피해를 입는 쪽은 자신이란 걸 뻔히 알고서 말이다. 재수 없는 새끼. 바레사는 이를 우드득 갈았다. 그때 열여섯이던 엿 같은 애송이는 지금 훌륭한 청년이 되어 폐하의 총애뿐만이 아니라 쿠칸들의 신임까지 얻고 있다. 자칫하면 쿤을 두고 암투하기 쉬운 쿠칸들임에도 친구처럼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테살의 공이 컸다. 내년이면 쿠칸의 지위에서 벗어나 영지를 물려받거나 관료가 될 테지만 그는 바레사 자신과는 달리 쿤의 총애를 십분 이용하려 들 것이다. 물론 소세이 꼴이 나지 않기 위해 테살의 건방짐은 정도를 넘지 않았지만, 테살 놈이 관료가 된 후에도 쿤 칸칸과 놀아나면 바레사 역시 그렇다는 의심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테살은 바레사와는 악연이자 천적일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바레사는 별궁을 차지하게 된 두조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고소함을 느꼈다. 그 어리숙한 노예가 만들어낸 지금의 놀라운 상황은 어느 각도로 봐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쿤의 관심에서 한걸음 밀려난 테살놈을 생각하면 통쾌했다. 그렇다고 해서 쿤이 두조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쿤의 취향은 두조같은 멍청한 놈보다는 테살처럼 오만방자한 쪽이었다. 그 노예가 쿤의 도도한 자존심을 교묘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별궁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두조가 쿤에게 반해서 안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목이 달아날 것이고, 반하지 않는다고 해도 쿤의 인내심이 바닥나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 별궁으로 들어갔다고는 해도 어떻게든 죽게 될 목숨인건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불똥이 튀지 않게 최대한 원만한 방향 -즉 황제가 두조에게 심드렁해져서 신경도 쓰지 않게 되는- 으로 해결되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죽기 전에 테살 놈 애나 좀 닳게 하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레사는 생각했다. 그날 하루의 일과를 전부 마치고, 거처로 돌아가다가 쿤은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방엔 저무는 하루를 장식하는 노을이 가득했고 공기는 아스라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늘도 뜨거웠던 태양에게 구름들이 즐거운 이별을 고하자, 서쪽하늘에 성급히 펼쳐진 밤의 이불 위로 별들이 하나씩 떨어져 내렸다. 붉게 물드는 사막- 허나 쿤은 그 모든 풍광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불쑥 말했다. “내가 그 놈의 술수에 넘어간 것일까?” 그 뒤를 묵묵히 따르던 바레사는 허리를 숙여 보이긴 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그는 쿤이 굳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레사의 짐작대로 쿤은 바레사가 감히 자신의 말을 씹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놈을 만난 이후 내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 물론 노역장에서 데리고 온 것은 내 뜻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조차 계략이 아니었나는 의문이 들 정도니까.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내가 그놈을 죽일 것이 확실한, 다 이긴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그 노예 놈에게 끌려간다는 이 느낌은 뭐지? 어째서 내가 놈을 유혹해서 잠자리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냔 말이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바레사는 그제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렇든 저렇든 그 노예를 마음에 들어 하시기 때문 아니십니까. 그래서 이런 감정의 유희를 즐기시기 위해 양보를 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내가? 놈을 마음에 들어 해?” 쿤 칸칸은 눈썹을 쓱 들어올렸다. 바레사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을 골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노역장에서 데리고 왔을 리가 없지요. 그가 어떤 방법으로든 폐하의 흥미와 관심을 끌고 있다면 그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낱 노예일 뿐이니까요. 가벼운 유흥거리일 뿐이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폐하.” 쿤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그래. 유흥거리지. 내가 이렇게 마음을 쓸 이유가 없어. 그런데 이상해.” “무엇이 말입니까?” “놈이 흥미로운건 사실이지만 그 흥미는 유쾌한 것이 아니야. 내 자존심을 긁고 오기를 곤두세운단 말이지. 놈을 생각하면 불쾌감에 가까운 즐겁지 못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데, 그냥 녀석을 죽여 버리면 간단한 것을 먼 길을 에둘러 간다는 느낌이야. 유흥이면 즐거워야지, 어째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걸까?” “내기라는 것은 일방적인 입장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바레사는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조의 목숨을 걸고 하는 이 감정의 유희에 있어서 황제와 노예란건 존재하지 않았다. 쿤이 황제라는 이유는 노예인 두조를 어렵고 두렵게만 만들 뿐이니까. 자신은 심지어 그에게 쿤이 황제임을 잊으라고 충고하기까지 했잖은가. “일방적인 입장이 아니라면, 놈과 내가 이 내기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말인가? 나는 언제든지 그놈을 죽일 수 있는데도?” “물론 그렇습니다만...... 내기의 승패는 그와는 또 다르지 않습니까? 그를 폐하께 반하게 만드느냐 아니냐의 문제지, 폐하께서 그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언제든지 두조를 죽일 수 있다는 유리한 입장을 버리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와 같은 입장이 되어 내기에 응한 것은 쿤 자신- 하지만 그것을 유도한 것은 바로 두조. 처음엔 쿤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서 왜 불쾌감을 느끼는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말을 하다 보니 무엇에 불쾌감을 느끼는지 알 것 같았다. 또한,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쿤의 입장마저도 불변한 것은 아니었다. “혹, 폐하께서 그에게 반하신다면......” 바레사는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가 걱정스러워서 말끝을 흐렸다. 쿤은 코웃음을 쳤다. “하, 내가? 노예에다가 조루인 그놈을? 날 만족시키기는커녕 부아만 돋우는 그놈을? 넌 정말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거냐?” 바레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든 저렇든 그를 마음에 들어하는게 아니냐고 아까 말해버렸으니까. 바레사는 물었다. “폐하, 그 노예 놈이 싫으십니까?” “좋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쿤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바레사는 참...... 애매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두조는 창가에서 멍하니 황홀한 빛의 마지막 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은 다시는 태양이 뜨지 않기라도 할 것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연못의 축축한 물 냄새가 간간히 섞여 들어왔고, 멀리 사막 독수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볼 수 없을 노을이었다. 차원이동을 해서 이곳에 온 이후 이 세계를 단 한 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언제나 집이 그립고 힘들기만 했기에 사막의 모래도 끝없는 하늘도 황량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변한 것은 사막일까, 자신일까. 아마도 자신이겠지? 적어도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소리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구나, 하고 창가에 기대앉은 두조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하늘에서 시선을 내리니, 언제부터 거기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쿤이 있었다. 그는 마치 노을의 정령같았다. 사막과 똑같은 빛깔로 물든 머리카락은 바람이 불 때마다 눈부신 황금빛을 퍼트렸고, 멀리서도 선명한 감청색 눈동자는 지금 시간 유일한 푸른빛이었다. 균형 잡힌 몸매와 붉은 피부는 신전이나 피라밋의 기둥을 장식하는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정말 볼 때마다 놀라운 아름다움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두조는 창가에서 뛰어내려 쿤 칸칸의 앞에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을 했다. “쿤 칸칸의 영광이 모든 하늘과 땅에 가득하기를! 미천한 노예 두조가 황제폐하를 뵙나이다.” “일어나라, 나를 마주볼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노라.” 두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뭔가 불만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보고 있었지?” “노을을 보고 있었습니다.” “노을을?” 쿤은 두조의 말에 해가 지고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것에 감탄을 느끼나?”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 저 노을의 아름다움을 영원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주었지 퇴색하도록 만들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매일 보는 것은 언젠가 질리기 마련이야. 저 노을의 아름다움이 정말 영원하다 하더라도 저 노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인간의 마음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쿤의 어조에는 쌀쌀맞은 냉소가 어려 있었다. 두조는 그런 쿤의 말에 대응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쿤은 두조의 입을 다물게 만든 스스로의 말솜씨를 내심 기특해하며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쯤 나에게 반하지 않았느냐?” “......네?” 두조는 황당해서 되물었다. 반하게 만들어보라고 제의를 내건 것이 고작 어젯밤의 일. 그 이후 지금 처음 만나는 것인데 만난지 십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반하지 않았느냐니? 반할 시간이나 있었단 말인가? 쿤은 두조의 벙한 얼굴을 손가락질 하면서 말했다. “아까 내게 넋을 잃었잖아. 내게 반한게 아니냐?” “...저는 아직 폐하에 대해 무엇도 모릅니다. 무엇도 모르는 상대에게 반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러자 쿤은 벌컥 성을 냈다. “이만큼 아름다우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냐! 노예주제에!” “무, 물론 폐하께서는 아름다우십니다...... 그 미모만 본다면 벌써 백번은 넘게 반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른데?” 아름다워 봤자 남자-라는 말을 떠올린 두조는 사색이 되었다. 이걸 곧이곧대로 내뱉었다가는 목숨 부지하기 힘들겠지. “저는 폐하께서 황제든 아니든, 남자든 아니든, 아름답든 아름답지 않든... 설령 지금 당장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가 되더라도 변치 않는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정말 반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겠지요.” 쿤은 콧방귀를 팩 꼈다. “너는 지금 나더러 불가능한 일을 가능토록 만들라는 소리냐? 네놈은 내 미모에도 지위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천하의 몹쓸 놈인데 내가 추해지더라도 변치 않을 마음 따위가 가당키나 한 소리야? 사람의 마음에 영원치 못하다는 말에 반박하지 못한 주제에 지금 내게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 네놈의 변덕스럽기 짝 없는 마음을 어찌 그런 식으로 만들란 말이야! 내가 유리한 게임이라고 착각했지만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네가 말하는 사랑이라는게 이리 거창한 것이라면 나는 이 내기에 응할 수 없어!” “거창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고요..... 폐하께서는 사랑의 존재를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랑이라는 착각의 존재는 믿지만 사랑은 믿지 않는다.” “왜요?” “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사랑 같은 일순간의 감정은 침대 밖을 벗어나면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이기적인 것이 되어버려!” 두조는 그렇게 소리치는 쿤이, 문득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 이기적인 것으로 돌변하는 배신의 순간을 목격한 것처럼 그의 어조가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두조는 담담히 대꾸했다. “보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리석은게 아니라 현명한게 아니냐! 스스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을 무작정 믿는 바보천치가 어디 있어!” “폐하께서는 바람의 움직임이 눈에 보여서 바람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쿤은 말문이 막혔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꽥 소리쳤다.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어떻게 다른데요?” “달라!” 부득부득 우기던 쿤은 팔짱을 끼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어리숙하게만 봤던 이 노예는 말문이 트이고 나자 말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자신을 반하게 만들어야 잠자리가 가능하는 둥 그런 소릴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뭔지 모르게 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쿤은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을 표출하고 화풀이를 하면 졌다는 느낌이 더 강해질 것 같아 쿤은 애써 짜증을 내리눌렀다. “됐다! 너를 반하게 만들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나 말해봐라.” “......예?” “너를 반하게 만들어 보라며?” “그렇긴 합니다만... 그, 그 방법을 제가 제시해드려야 합니까?” 쿤은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너와 이 웃기지도 않은 내기에 응해준 것으로도 모자라서 방법까지 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말이냐? 내가 생각하기에 네가 요구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아! 그런데 그 방법까지 내게 요구하다니 정말로 뻔뻔스럽구나! 너에 대해선 네놈이 가장 잘 알 테니까 네가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지도 잘 알거 아냐!”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사실 두조가 쿤에게 반하든 반하지 않든 죽일 것은 뻔한데 쿤은 그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며 방법을 찾아내라- 네 스스로 알아서 반해라 이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애초에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꽃과 보석을 안겨주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쿤은 정말로 뭐랄까, 어른스럽지 못했다. 두조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제가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누굴 사랑해본 적이 아직 없으니까요.” “뭐얏! 그럼 너도 경험한 적 없는걸 가능하다고 우긴 것이냐!” “그래도 전 폐하와는 달리 바람의 존재를 믿습니다. 신의 존재도 믿고 있고요,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섭리도 믿습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랑이 존재한다는 믿음도 그것과 같은 거라고요.” “달라!” “다르지 않습니다.” 쿤은 뭐가 어떻게 다른지 그럴듯하게 설명해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분노를 느꼈다. 두조는 온 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하악거리는 고양이처럼 성을 내는 쿤을 보고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하지만 일단 필요한 것은......” “뭐?” “데이트겠죠?” “데이트? 그게 뭐란 말이냐?” 쿤은 괴상한 단어에 미간을 찡그렸다. “남녀... 그러니까 보통 남녀가 서로 만나 무엇을 함께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는 것 말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야지 만이 무슨 감정이 생겨도 생길게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뭘 하자는 것이냐?” “보통은... 시내의 색다른 곳이나... 교외의 특별한 곳에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그러면서 이야길 하고 추억을 쌓는 거죠.” 쿤은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대꾸했다. “시시하군. 차 마시고 밥 먹는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렇지만 분위기란게 있잖아요? 차 마시고 밥 먹는 건 폐하의 말씀처럼 아무데서나 할 수 있지만 좀 더 멋지고 근사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상대에 대한 호감이 더해지지 않습니까. 같은 걸 먹어도 매일 먹는 식탁에서 먹는 것과 근사하고 멋진 곳에 앉아 먹는 게 틀리 듯이요.” “이 나라에 이 궁전처럼 근사한 곳이 어디 있다고?” “저에게야 그렇지만... 폐하께서는 매일 보는 곳이니 별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쿤은 의외로 두조의 말을 진지하게 듣더니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곧 말했다. “그럼 좋다. 넌 카후나의 야시장을 본 일이 있느냐?” “아니요... 제가 이곳에 와서 본 것이라고는 사막과 피라밋 공사장뿐입니다.” “따라오너라.” 쿤은 몸을 돌려 별궁을 나와 자신의 거처로 향하기 시작했다. 두조도 급히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쿤이 머무는 궁전은 아담하지만 아주 우아하고 실용적이면서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방의 어느 창으로 밖을 내다봐도 풍경이 아주 훌륭했으며, 거울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적은 촛불로도 안을 환히 밝힐 수 있었다. 두조는 처음 보는 궁전의 내부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따랐다. 걷다보니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 궁전이 사실은 아주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복잡하다기 보다는 헷갈린다. 마주보고 있는 거울들이 모퉁이를 없앴고, 애매하게 겹쳐진 기둥들이 존재하고 있는 입구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궁전에 드나드는 사람이 적은 만큼 쿤의 안전을 위해서 그런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다. 쿤은 복도의 어느 기둥 뒤로 들어가더니, 꽃병과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비밀 문을 열었다. 곰팡내 섞인 먼지내가 가득 밀려들었다. 쿤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두조도 그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횃불이 하나 밝혀져 있었다. 쿤은 두조에게 그것을 집어 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길고 컴컴하고 좁은 통로를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통로는 나눠지기도 하고 꺾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가 어딘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똑같은 길이 계속됐다. 으스스한 느낌을 받으며 두조는 물었다. “이거... 비밀통로인 겁니까?” 쿤은 두조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 황족과 일부의 사람들밖에는 모르는 곳이지.” “그런 걸 저 같은 자에게 함부로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쿤은 코웃음을 쳤다. “상관없다. 저 입구를 알고 있는 것이 너 뿐 만인 것도 아니고, 이곳을 나갈 수 있는 길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니까.” “엑, 설마 미로라서 길을 잃어버리면 다시는 나갈 수 없다거나...” “맞아.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지하미로다. 후 칸칸이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황궁을 중심으로 지었다는 미로지. 그는 어릴 때부터 여러 번의 암살시도와 숱한 배신을 겪은 탓에 인간불신에 걸려 있었거든. 후 칸칸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났기 때문에 대신과 백성들은 그에 대한 말 한마디조차 입에 올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약한 후 칸칸은 누군가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어. 그래서 단 한 장 남아있던 미로의 지도를 태워버리고 이곳에 숨었다가 실종되고 말았다. 미라가 되지 못한 후 칸칸은 자신의 피라밋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이곳을 헤매고 있다고들 하지.” 그때 통로로 바람이 통하는 소리가 우우웅 스산하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소름이 쫙 끼쳐 오르며 두조는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는 시커먼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여기서 쿤을 잊어버리거나 횃불을 떨어트리거나 한다면... 상상하기가 싫은 느낌에 두조는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하지만 쿤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 미로의 길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알고 있는 것도 미로의 일부일 뿐이야. 하지만 역대의 황제들 중에서는 내가 이 미로를 제일 잘 알고 있을걸... 어릴 때 이곳의 길을 발견해 내는 것이 내 취미였으니까.” 두조는 무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하하핫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차, 참 간도 크시네요. 그러다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시려고...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지 않습니까.” 쿤은 찌리릿 두조를 노려보았다. “난 고양이가 아니야. 황제다. 후 칸칸처럼 얼간이가 아닌 이상 황제인 내가 이런 미로에서 길을 잃어버릴 리가 없잖아?” 아 네...... 두조는 쿤의 오만한 대꾸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자신은 황제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니까 쿤을 잊어버리면 큰일 난다. 두조는 쿤에게 바싹 붙어서 따라갔다. 그러자 쿤의 팔이나 발뒤꿈치가 그에게 자꾸만 부딪쳐서 쿤이 성질을 냈다. “좀 떨어져서 걸어라!” “떨어져서 걷다가 폐하를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두조가 머리에 닿을 듯 낮은 천정과 끝없이 시커먼 통로를 두리번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쿤은 심술궂은 마음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이 놈을 여기 내버려두고 가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겠지? 그 꼴을 보면 굉장히 고소할거라는 생각에 쿤은 걸음을 멈춰 세우고 두조에게 손을 내밀었다. “횃불 내놔.” “예?” “횃불 내놓으라고.” 두조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제...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폐하께 이런 걸 들게 할 순 없지요.” “상관없으니까 내놔.” “갑자기 횃불은 왜 빼앗아 가시려는 겁니까?” “누가 빼앗아 간대? 어디서 자꾸 말대꾸야? 잔말 말고 횃불이나 빨리 내놔.” “설마 절 두고 가시려는 건 아니죠?” 두고 갈 생각이다. 물론, 정말 두고 갈 건 아니고 좀 내버려두고 놀릴 생각이었다. 이놈이 멍청하게 제자리에 있지 않고 어둠 속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면 정말 길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사실 쿤은 두조가 그리 된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쿤은 짜증을 내면서 소리쳤다. “내놓으래도!” 두조는 엄청 내키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횃불을 그에게 내밀었다. 쿤은 횃불을 낚아채고는 몸을 홱 돌렸다. 그때, 두조가 횃불을 든 반대편 손을 꽉 붙잡았다. 쿤은 흠칫 놀랐다. 두조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뜨거웠다. 왜인지 쿤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꼈다. 고작 손을 잡혔을 뿐인데 침대에서 그 짓하는 거보다 더 창피했다. “뭐, 뭐하는 거야! 당장 이 손 놓지 못할까?” 두조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말했다. “못 놓습니다.” “뭐?” “저 버리고 가시면 어떻게 하라고요. 이런데서 불도 없이 폐하를 잊어버리면 경기 일으킬 겁니다.” “안 버려, 안 버린다고!” “정말요?” “.........” “진짜요?” 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잔뜩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조를 응시했다. 횃불에 비친 까만 눈동자가 전전긍긍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데 꼭 주인 눈치를 살피는 덩치 큰 개 같았다. 아주 오래전 어릴 적에 그런 개를 기른 적이 있었다. 밀림의 나라에서 선물로 보내온 강아지들 중 한 마리를 하사받았던 것이다. 온 몸이 새카맣고 늘씬한 개였다. 코가 매우 밝아서 사냥을 잘했고 매우 영리해서 주인인 쿤 말고는 누구도 따르지 않았다. 건드리지 않으면 얌전했지만 누가 자신의 머리라도 쓰다듬을라치면 이를 드러낼 정도로 사납고 자존심이 세기도 했다. 하지만 쿤 앞에서만큼은 배를 뒤집고 애교를 쓰고 놀아 달라 응석을 부렸다. 그 축축한 코를 손 밑에 들이밀어 자신의 머리에 얹었고 고무공을 물고와 놀아달라고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괜히 화를 내거나 하면 저쯤 떨어져서 고개만 내밀고 눈치를 봤다. 까만 눈동자를 덱데굴 굴리면서. 울면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분을 살피고 얼굴을 핥아주었다. 그 순하고 동그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끓어오르던 화도 가라앉았고 시린 슬픔에 아프던 마음도 따스해지곤 했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 애걸하는 두조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개가 생각이 났다. 약해지는 마음을 깨닫고 쿤은 얼른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황제가 한 입으로 두말 하겠느냐! 에잇, 팔 아프다. 횃불 다시 네가 들어라.” “네.” 두조는 반색하며 기쁘게 횃불을 받았다. 쿤은 성큼성큼 걸으며 괜히 툴툴거렸다. “사내자식이 이런데서 버림받지나 않을까 무서워하다니, 정말 소심하구나.” “이런데서 무서워하지 않는 쪽이 이상한 겁니다. 폐하께서는 어릴 적 부터 이곳에 드나드셨을 테니 못 느끼시는지 모르겠지만...” 두조는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순히 좁기 때문만이 아니다. 횃불을 들고 있음에도 온 몸을 짓누르는 듯한 이 어둠. 답답한데도 싸늘하고 차가운 공기. 터가 안 좋은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음침한 곳은 자주 올게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쿤은 두조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잠시 후 복도 가운데 자리한 방이라고 할까, 횃불걸이가 있는 조금 넓은 공간에 멈춰 서서 쿤은 거기 걸려있던 보퉁이에서 옷을 꺼냈다. 그리고 입고 있는 화려한 샌들과 고급스러운 옷을 벗고 적당히 평범한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엉덩이가 훤히 나오는 속옷차림이 되어 두조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긴 머리카락을 묶어 터번 안에 집어넣고 베일까지 뒤집어쓰자 빛을 발하는 듯한 미모가 가려졌다. 미복을 갖춘 쿤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특징 없어 보이는 통로의 어느 지점에 멈춰 섰다. 그는 잠시 벽을 더듬다가 어깨를 기대고 한 부분을 힘껏 밀었다. 벽이 돌아가면서 입구가 열리고 싸한 밤공기가 들이쳤다. 쿤과 두조는 통로를 나와 다시 문을 닫았다. 바깥은 자연적인 동굴이었다. 그럭저럭 넓은 내부에 비해서 간신히 한 사람이 빠져 나갈 정도로 좁은 입구를 빠져 나오자 나무들 사이 언덕 아래로 수도의 광경이 펼쳐졌다. 기린처럼 긴 목을 드리운 야자수들과, 물결 위로 반짝이는 불빛들. 보석 상자처럼 불을 밝힌 궁전아래 자리한 수도의 밤 풍경은 두조가 보던 대도시의 야경에 비하자면 무척이나 소박했지만 정취가 있었다. 두조가 감탄을 터트리자, 쿤은 으쓱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이 도시가 다 내 집이지.” “신비한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곳 같아요.” 그렇게 말하니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쿤은 궁전아래 죽 이어진 물길을 따라 불을 밝힌 천막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신의 오아시스, 카후나에 서는 야시장이다.” “신의 오아시스라고요? 그게 뭔데요?” 칸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넌 대체 아는게 뭐냐? 카후나가 뭔지도 몰라?” 두조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전 이 나라에 온지 얼마 안 되었다고요... 말을 배운지도 얼마 안 되었고요.” “무식해도 이리 무식할 수가 있을까.” “카후나가 뭔데요? 이야기 해주세요.” 쿤은 설명해주려고 입을 열다가, 문득 귀찮음을 느꼈다. 아까 미로에서도 후 칸칸 이야기를 해줬지 않는가. 자신이 길라잡이도 아니고 카후나에 데려와준 것으로도 모자라 옛날이야기까지 해주며 즐겁게 해줘야 한단 말인가. 쿤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귀찮아.” “궁금해요. 해주세요.” “내가 왜 해줘야 하는 거냐! 귀찮다니까!” 두조는 앞서 걸어가 버리는 쿤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 그 뒤를 따르며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폐하의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는 걸요. 들려주세요. 예? 궁금하다고요. 폐하께서 다스리는 곳이 어떤 곳인지.” “...재미있다고?” “예에. 아까 후 칸칸 이야기도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들었다고요.” “내가 말솜씨가 있다는 소리냐?” “그럼요!” 쿤은 아까 두조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상했던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쿤은 ‘카후나에 대해서도 모르는 무식한 놈을 데리고 다니는건 창피하니까, 이 몸이 인정을 발휘해 이야기 해주는 것이니 귓구멍 후비고 잘 들어라.’ 그렇게 빈정거리면서 카후나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기 시작했다. “궁전과 미로를 만든 후 칸칸 이야기는 아까 해줬지?” “예에. 인간불신에 걸려 있어서 그랬다면서요.” “그렇다. 하지만 누구도 믿지 않고 주도면밀했던 탓에 그는 황제로서는 훌륭했지. 그는 변방에서 활개 치던 사악한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고 악덕한 호족들을 제압해 사막을 하나로 통일시킨 인물이다. 그가 아직 젊었을 시절에... 서쪽의 도적들을 토벌하러 가다가 기습을 당해 혼자 길을 잃었다고 한다.” “사막에서 혼자요?” 사막에서 혼자 헤매본 경험이 있는 두조는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끝없는 모래언덕이 안겨주는 막막함. 목이 비틀어지는 것 같은 갈증. 쿤은 언덕을 내려가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사막에서 혼자 말이야. 길을 찾아 헤매다가 이윽고는 식량도 물도 다 떨어져 버리고 죽을 위기에 처했지. 그때 후 칸칸이 신께 기도했다. 날 살려주면 앞으로 태어나는 자식들은 전부 신께 바치겠다고. 그러자 모래가 흩어지고 그 아래 자리하고 있던 큰 바위가 갈라지며 지하수가 솟구쳤다고 하지. 후 칸칸은 그 물로 목숨을 건졌고, 거기 생겨난 오아시스의 물이 참으로 맑고 달아 초지가 생기고 동물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 칸칸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고... 자신의 장자를 제외한 아이들을 전부 신관으로 만들었어. 그 오아시스를 신의 이름을 따서 카후나라 부르는 거다. 궁전은 바로 그 카후나의 위에 지어져 있고, 수도는 물길을 따라 만들어져 있어. 카후나가 없으면 수도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건기에도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는 이 나라에서 카후나가 유일해.” “와, 신기한 이야기네요!” “물론 다 거짓말이겠지만.” “예에?” 쿤은 신비스러운 이야기에 눈을 빛내던 두조의 환상을 단숨에 박살내면서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신이 등장하는 거야 후 칸칸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거고, 카후나를 발견한 것도 우연이 아닐걸. 황족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사실 그때 수도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의 오아시스가 마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후 칸칸은 수도를 옮길 자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야.” “그렇지만 자식들을 신에게 바친다고 했던 건, 신께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된 것을 감사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아니다. 후 칸칸은 지독한 왕위쟁탈전을 겪고 왕위에 올랐지. 그가 인간불신에 걸린 것도 다 그 때문이야. 그래서 후세에 그런 악습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신 핑계를 댔던 거지. 장자를 제외한 아들들에게 칸칸의 성을 박탈하고 황위와 관련 없는 삶을 살도록 신관으로 만든 거야.” “그런 깊은 뜻이... 그래서 그 이후로 황위쟁탈은 없어졌나요?” 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있나.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아귀다툼도 있기 마련이야. 황자들이 그렇게 권력을 잃자 신관이 될 수 없는 황녀들이 권력을 쥐었거든. 황태자가 불의의 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당하면,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건 황녀뿐이다. 후 칸칸의 손녀 뻘 되는 라마 칸칸이 여황이 된 이후 황태자 다음의 계승권은 황녀가 가지게 되었다.” “어라, 그럼 한번 사제가 되면 그걸로 끝인가요? 황위 계승자가 없어도 황제가 될 수 없는 겁니까?” “신에게 한번 바쳐진 몸을 다시 속세에 되돌릴 순 없지. 영혼을 신께서 가져가니까.” “아아... 그럼 만약 지금 폐하께서 불의의...” 두조는 아무 생각 없이 궁금한 것을 묻다가 자신이 입에 올리려는 말이 얼마나 불경스런 것인가를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혀를 깨물어버리는 바람에 쑥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끙끙거렸다. 그것이 몹시 고소하다는 듯 킬킬 웃던 쿤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지금 죽으면 황위는 내 누이이자 아내인 시에 칸칸이 물려받게 된다.” “누이... 누이인데 아내라고요?!” 두조는 놀라서 소리를 꽥 치고는 우뚝 멈춰 섰다. 누이인데 아내... 누이인데 아내... “그, 근친상간.........” 쿤은 별 새삼스러운 것을 가지고 놀란다 싶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황족이 혈통을 지키기 위해 남매끼리 결혼하는 것이 뭐 그리 경악할 일이냐?” “그, 근친상간은 혈통을 지키는데 오히려 좋지 않아요! 전혀 다른 유전자가 섞일 때 더 우수한 인종이 나는 법도 몰라요? 남매나 친척끼리 결혼하면 지병 같은 게 고스란히 유전되고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도 높고 또...” “나라고 시에 칸칸 같이 빌어먹을 것과 결혼하고 싶었는 줄 알아? 원래는 밀림의 나라 공주와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당장 전쟁을 일으킬 기세라서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 아들이라도 낳으면 황위계승권을 뺏기니까 그런 것이었겠지. 대신들은 내가 남색가라 아이를 못 낳는다고 닦달하지만 이건 다 여우같은 그 년의 계략이야! 아무리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하는 몸이라고 해도 후계자 생각도 하지 않을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 쿤은 시에 칸칸의 얼굴을 떠올리고 이를 득득 갈았다. 자신과 연년생인 그 여자만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었다. 고작 한 살 위라고 어렸을 때부터 누나니 뭐니 하면서 지독하게 괴롭혀 대더니, 나이가 들어서는 황후자리를 꿰차면서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그녀와의 첫날밤을 생각하면 식은땀만 흘렀다. 침대 가득히 독사며 독 전갈을 풀어 놓고 그 위에서 교태로운 눈웃음을 치면서 ‘여보~’ 라니. 쿤은 돋아난 소름을 북북 굵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싫은 것은 그 여자의 권력에 대한 욕심도, 음흉한 성격도, 독을 사랑하는 괴팍한 취미도 아니다. 바로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고 있는 쿤으로서는 자신과 같은 얼굴이 하늘아래 또 존재한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가 아닌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봉긋한 가슴도, 가냘픈 허리도, 날씬한 다리와 부드러운 살결을 모든 지닌...... 누이만 아니라면, 아니 황후만 아니었더라도 그 얼굴을 가만 두지 않았을 텐데. 시에 칸칸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치던 쿤은, 문득 두조를 바라보고 엄청나게 불쾌한 사실을 깨달았다. - 무, 물론 폐하께서는 아름다우십니다...... 그 미모만 본다면 벌써 백번은 넘게 반했을 겁니다. 하지만 남자라서 못 안는다고 했다. 그럼...... 여자인 시에 칸칸은, 안을 수 있는 것일까? 쿤은 그런 불쾌한 생각을 하면서 두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불쾌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근친상간의 일차적인 충격이 지나가고 나자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두조의 머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쿤 칸칸이 유부남이었다니! 그럼 자신은 가정파괴범(?)이란 말인가? 그가 안아야 하는 것은 황제에다 남자일 뿐만 아니라 근친상간을 한 유부남 남색가였다! 모럴과 상식이 박살이 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꽤나 불편한 침묵을 끼고 서로를 응시했다. 하지만 곧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깊게 생각하면 다친다는 생각을 똑같이 떠올렸기 때문이다. 카후나에는 야시장만 있을뿐 낮엔 시장이 열리지 않았다. 한낮엔 덥고 일하느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고로 이곳의 시장은 해질 무렵부터 밤까지 열렸다. 크게 특이할 점은 없는 그냥 시장이지만 두조가 봐온 그 어떤 시장보다 생생하고 이국적이었다. 푸줏간에 통째로 걸려있는 커다란 돼지, 줄줄이 엮인 소시지와 내장을 온 몸에 휘감고 파는 남자, 한가득 쌓여있는 괴상한 모양의 이름 모를 과일, 기다란 작대에 비린내를 가득 풍기며 매달려 있는 생선, 목과 팔이 휘어질 정도로 무수한 장신구를 매달고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여자...... 상점보다 노점이 더 많았고, 노점보다 몸을 좌판삼아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전문적으로 장사를 하기보다는 물물교환을 하거나 직접 재배하거나 만든 것을 팔러 나온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두조는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게 바로 왕의 잠행인가 싶어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쿤은 남자나 밝히고 미모에나 신경 쓰느라 민심을 살피거나 정치를 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역시 왕은 왕이라는 것일까? 생각지도 못했던 존경심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두조는 물었다. “폐하께서는 시장에 자주 나오십니까?” 쿤은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끔.” “나오면 어딜 가시는지요? 역시... 민심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라면, 술집? 아니면 정보를 모으기 좋은 장소가 따로 있나요?” 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흥미진진해하는 두조를 힐끗 쳐다봤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여기 나오는 이유는 저것 때문이야.” “예?” 쿤은 시장 한 귀퉁이에서 작은 바구니에다가 말린 풀가루 같은 것을 팔고 있는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풀에서는 뭔지 모를 아주 자극적인 향이 났는데 어디서 맡아보았는지 낯익은 냄새였다. 쿤은 남자에게 말했다. “하나 말아줘. 너도 피울 테냐?” 담밴가? 호기심에 두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담배를 말아주는 대신 먼저 쿤에게 손을 내밀었다. 쿤은 태평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물가나 시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두조가 보기에도 고작 담배 두 개피를 사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돈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는 남자의 표정이 그랬다. 하지만 남자는 곧장 시치미를 뚝 떼고 금화를 품속에 집어넣고는 얇은 종이에다가 풀가루를 집어넣고 돌돌 말아주었다. 쿤이 그것을 입에 물자 불까지 붙여주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했다. 두조도 쿤을 따라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곧 콜록거리며 연기를 뱉어내고 말았다. “으왓! 콜록콜록!” 중학생 때부터 흥미삼아 한 두 개피 씩 얻어 피우고 해봤기 때문에 담배를 못 피운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담배는 진짜 엄청나게 독했다. 하지만 쿤은 이런 독한 것을 빠끔빠끔 잘도 피워댔다. “이, 이런 걸 어떻게 피웁니까?” 질색을 하는 두조를 보고 쿤은 혀를 끌끌 찼다. “너는 수리화도 피울 줄 모르냐?” “수리... 화요? 이거 담배 아닌가요?” “멍청한 놈, 네 눈엔 이게 담배로 보이냐?” 연기를 뿜어내며 쿤은 느릿느릿 걸었다. 어째 눈동자가 좀 몽롱하게 풀린 거 같았다. 두조는 문득 시장의 뒷골목에 모여 있는 부랑자들이나 창녀로 보이는 여자들, 술집에 무리지어 앉아있는 남자들이 쿤처럼 이런 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하면서도 자극적인 향기, 활짝 열린 동공. 두조는 혹시나 싶어서 더듬더듬 말했다. “이거... 마, 마약 아닙니까?” “마약? 그게 뭔데?” “피거나 들이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환각이 보이고... 술에 취한 것 같이 그리 되는 거요.” “그래. 수리화. 황궁에는 정제한 것밖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생 것을 맛보려면 시장에 나와야 해.” 수리화는 액체 상태로 정제하여 독을 제거하고 쓰면 중독성도 줄일 수 있고 진통을 줄이고 숙면을 도우며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말린 것을 그대로 피우는 것만큼의 환각효과는 사라지게 된다. 두조는 그제야 이 풀냄새를 어디서 맡았는지 기억이 났다. 자신이 아플 때 시롭이 방에 피워놓던 향 냄새였다. “황궁에는 정제된 것만 들어간다는 건 이대로 피우면 몸에 무척이나 나쁘다는 거죠? 중독성이 있는 건 아닙니까?” “아직 중독은 아니니까 걱정 마.” 두조는 쿤에게서 수리화를 빼앗아 바닥에 버리고는 발로 짓밟았다. 대번에 쿤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슨 짓이냐!” “폐하께서 뭐가 부족하시다고 여기까지 몰래 나와 마약중독자처럼 이런 거나 피우시는 겁니까?” “중독자는 누가 중독자라는 거냐!” “이렇게 한번 두 번 자꾸 피우다보면 중독자가 되는 거지 중독자가 뭐 별겁니까!” “감히...... 감히 나를 훈계하는 것이냐?” 두조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쿤은 이 시건방진 노예가 자신의 행동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 화가 났다. 수리화의 중독성은 익히 알고 있다. 정제된 것을 살 능력이 없는 백성들이 생 것을 그냥 피우다가 쉽사리 중독자가 된다. 하지만 쿤이 나는 중독될 리가 없어하고 생각하면서도 수리화를 몰래 피워왔던 것은 켕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리화에 중독되어 정사를 망치고 몸을 망가트린 황제는 예전에도 종종 있어왔다. 치타 칸칸은 수리화를 끊느라 갖은 고생을 한 후 수리화 재배를 전면 금지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수리화는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주요한 수출품목이기 때문이다. 수리화를 정제하는 방법은 모래왕국밖에는 없는 고유한 기술이었다. 황궁에서 몸을 빼낼 수 없을 때 남몰래 노예나 어린 시동에게 수리화를 구해오도록 시켜도 감히 폐하께서 왜 그런 것을 피우느냐 지적하는 이가 없었는데. 두조가 바로 그것을 꼬집어오자 수치심 섞인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쿤은 허리춤에서 돈 뭉치를 끄집어내어 두조에게로 던지며 소리쳤다. “당장 가서 다시 사와!” 두조는 눈 꼬리를 치켜뜨고는 말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뭣이?” 두조는 도리어 신경질을 냈다. “황제라는 분이 대체 정치를 어떻게 하면 이런 마약이 태연하게 시장엘 돌아다니는 겁니까! 그야말로 중독자를 양산해내는 꼴이 아닙니까! 이래가지고 나라가 제대로 돌아갑니까?” “수리화가 외국에서 벌어들이는 재화가 얼마나 되는 줄이나 알고 건방지게 주둥이를 놀리는 거냐! 천하고 무식한 노예니까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거겠지! 감히 네놈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일반 백성들 사이에 융통되게 저리 놔두는 건 안 되지 않습니까!” “수리화 농장이 지천인데 무슨 수로 그것의 융통을 다 막는단 말이냐!” “시도 해보기나 하셨습니까! 하셨을 리가 없죠! 당장 그리되면 폐하부터 수리화를 구하실 수 없을 테니까요!” “이 놈이!” 쿤이 분개를 참지 못하고 칼을 빼들려는 순간이었다. 시장바닥에서 꽥꽥 거리던 두조는 어느 샌가 그들이 웬 한 무리의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슬슬 그들을 피해가고, 두조가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둘러보자 사내 하나가 두조의 어깨에 팔을 올리면서 말했다. “그렇게 서로 집어던질 정도라면 그냥 나 주는게 어때?” 두조의 시선이 사내의 시선을 따라 쿤이 자신에게 던진 돈주머니로 향했다. 사내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수리화를 살 때마다 금화를 지불하는 놈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렇게 돈이 썩어 나자빠지면 기부 좀 해.”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새끼, 그냥 간단하게 말해라. 야, 가진 것 다 내놔.” 두조는 쿤을 힐끔 쳐다봤다. 이왕이면 곱게 가진 것 다 내주고 물러나는 편이 좋을 테지만...... “무슨 헛소리냐! 이 무례한 것들이!” 쿤이 그럴 리 없지. 쿤은 원래 두조 때문에 빼들었던 칼을 불량배들에게 치켜들었다. 불량배들은 척 봐도 힘쓰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쿤을 훑어보며 휘파람을 휙휙 불었다. 겉으로 보기에 위협적으로 보이는 것은 도리어 두조였지만 그는 무기가 없었다. “괜히 깝치지 말고 얌전하게 가진 것 다 내놓으면 그냥 보내준다니까?” “감히 누구에게 공갈협박을 하는 것이냐! 죽고 싶은 게로구나!” 두조는 일이 커지기 전에 얼른 이자들을 보내는 쪽이 좋겠다 생각하며 돈주머니를 그들에게 떠밀었다. “자아, 이거 줄 테니까 제발 그냥들 가세요! 진짜 경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네 이놈! 누구 맘대로 그걸 저놈들에게 주는 것이냐!” 쿤이 두조의 배신(?)에 왈칵 성을 내는 찰나, 불량배 하나가 쿤의 귀에 걸린 눈알만한 호박 귀걸이를 보고는 그것에 손을 뻗쳤다. “이것도 내놔!” 쿤이 불쾌감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몸을 틀었고, 그러자 그 불량배가 쿤의 터번을 잡아 당겼다. 스르륵, 터번이 풀려나가며 발치에 닿을 듯 길고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당혹감으로 얼굴을 물들인 것은 쿤이 아닌 불량배들 쪽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드러난 쿤의 미모에 넋을 놓았다. “우와... 미인인데?” “이거 이거, 대단히 아름다우시구만.” 쿤은 그 상황에서도 자신의 미모에 대한 칭찬에 우쭐해졌다. 불량배들의 눈동자에 음흉한 빛이 떠오른 것도 모르고 코웃음을 치면서 콧대를 세웠다. “나야 당연히 아름답지!” 사내들은 킬킬 웃으며 두조를 내버려두고 쿤의 주변을 둘러쌌다. “어디, 우리랑 좀 놀다가지 그래?” “내가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크크크.” 그제야 쿤은 이 천한 놈들이 자신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소름이 쭉 끼쳐 오르며 뱃속에서부터 아까 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분노가 치밀었다. 모욕과 불쾌감에 불량배들을 겨눈 칼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두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러다 진짜 살인나겠다! 두조는 와다닥 달려가서 쿤의 앞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돈 드렸으니까 이만 가십시오! 이 분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왜? 걔가 니 마누라라도 되냐?” 성이 확 난 쿤이 두조를 밀치고 불량배들에게 칼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두조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말리면서 소리쳤다. “제발 그냥들 가라 좀! 돈 줬으면 됐잖아!” 쿤은 펄펄 날뛰면서 자신을 말리는 두조를 마구 밀어냈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이 자식! 저 자식들을 당장 죽여 버리고 말겠다!” 불량배들은 이쁘장한 쿤의 외모나 그의 가는 팔뚝을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쿤을 우습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거니와 설령 정말 쿤의 솜씨가 훌륭하다고 해도 이쪽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복상사도 죽이는 건 죽이는 거지!” “으하하하, 구멍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보군! 죽여준다니 기분 좋은데?” “으아악!” 두조가 사타구니를 걷어차이고 주저앉고 쿤이 튀어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불량배들은 어? 했다. 순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조조차 그 광경을 멍청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로서 어릴 적부터 최고급의 검술을 익혀온 쿤의 실력은 시정잡배들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춤추듯 움직인 쿤은 순식간에 한 놈의 가슴을 베고 또 다른 한 놈의 손목을 잘랐다. 뜨끈한 피가 튀어 오른 후에야 끄아아악 하는 처참한 비명이 울렸다. 히에에엑 전의를 잃고 순식간에 물러서는 불량배들에게 다시 칼을 휘두르려는 쿤을 붙잡은 건 두조였다. 두조는 쿤의 허리를 왈칵 붙잡고 소리쳤다. “그, 그만하세요!!” “크악! 이거 놓지 못해?!” 쿤은 매달리는 두조를 질질 끌고 불량배들을 죽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불량배들은 벌써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시장통의 혼잡함 속으로 사라져버리자 쿤은 이를 갈며 홱 허리를 틀고는 애꿎은 두조에게 발길질을 했다. “가지가지 열 받게 만드는 구나! 이걸 그냥 콱!” 쿤은 피 묻은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대신 칼을 뒤집어 들고는 그걸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두조를 마구 패기 시작했다. 발길질을 하면서 칼의 옆면으로 철썩철썩 마구 때렸다. “네놈이 말하는 데이트가 이런 거냐! 엉! 노예주제에 내게 이래라 저래라 종알종알 하다못해 저 놈들을 그냥 놓아 보내주기까지 해! 저놈들이 감히 내게 음탕한 소리를 하는 건 듣지도 못했느냐! 하긴 저 놈들도 아무 쓸모없는 아랫도리를 단 네놈보단 나을지도 모르지! 도대체 얼마나 처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이 주제를 모르는 놈아!” “으악!” “망할 놈의 그 내기만 아니면 당장 네놈의 멱을 따놓는 건데!” “자, 잘못했습니다! 그만... 하세요!” “내가 어쩌다가 이런 놈을! 이런 놈을!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 숨어서 그 무지막지한 구타를 지켜보는 가운데, 멀리서 뒤늦게 연락을 받고 출동한 치안대가 나팔을 뿌뿌 불며 달려왔다. 하지만 쿤은 그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미친 소처럼 날뛰면서 두조를 줘 팼다. 치안대가 쿤에게 달라붙어 간신히 그를 뜯어말리고 난 후에야 구타가 그쳤다. 쿤은 자신의 팔을 붙든 치안대에게 왈칵 성을 내면서 소리쳤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이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그들을 뿌리치며 쿤은 악을 썼다. “이 몸은 이 나라의 황제인 쿤 칸칸이란 말이다!” 그때 귀족가의 자제인 치안대의 대장이, 쿤의 금발과 미모를 보고 그가 정말 쿤 칸칸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바닥을 부술듯이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아래로 처박으며 외쳤다. “황제폐하!” 쿤을 붙잡고 있던 차인대가 질겁을 하며 쿤을 놓아주었고 곧장 무릎을 꿇었다. 놀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전부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파도가 치듯 시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윽고 시장에 때 아닌 정적이 찾아왔을 때,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오로지 쿤 칸칸 뿐이었다. 쿤은 턱을 치켜들고는 자신에게 무릎 꿇은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바닥에 뻗어있는 두조에게 시선을 내렸다. “넌 더 맞아야 해.” 고요한 시장에는 한동안 두조가 뺨맞는 소리가 철썩 철썩 울려 퍼졌다. 바레사는 치안대의 호위를 받아 궁전으로 돌아온 쿤 칸칸과 두조를 맞이했다. 두조는 또 맞았는지 온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바레사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쿤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시장에 나가셨다가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흥, 저 멍청한 놈 때문이지.” 바레사는 슬쩍 미간을 모으고는 말했다. “호위 하나 대동하지 않고 몰래 나가는 일은 그만 두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건만...... 그들이 시정잡배였으니 망정이지 암살자이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 하셨습니까?” 쿤은 채 화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바레사에게 벌컥 소리를 질렀다. “너까지 나를 훈계하려 드는 것이냐? 저 놈이 데이트니 뭐니 하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가지 않았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두조는 무지하게 억울한 기분을 느꼈다. 데이트 하자고 한건 사실이지만 그런 자신을 시장에 데리고 나간건 쿤이었다. 쿤은 두조를 내버려두고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바레사를 지나쳐 걸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는 홱 몸을 돌리고 바레사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뭐 하는 거냐!” 바레사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덩달아 쿤의 눈동자도 조금 커졌다. 쿤은 자신이 이상한 일에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레사가 저 시건방진 노예의 뺨 좀 때렸다고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등 뒤에서 바레사가 철썩하고 두조의 뺨을 때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멱살을 잡아버리고 만 것이다. 쿤은 바레사의 멱살을 놓으면서 더듬 더듬 변명했다. “저... 저 놈은 내 노예야! 그러니까... 함부로 손대지 마.” 바레사는 구겨진 옷깃을 바로 잡고는 곁눈짓으로 두조를 쳐다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를 위험에 처하게 한 자입니다. 뺨을 맞는건 고사하고 곤장 백대를 맞아도 시원찮은 중죄를 저지른 겁니다.” “내가 억지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니까 그냥 둬. 벌써 내가 실컷 때렸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넌 저 놈의 퉁퉁 부은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거냐?” 두조를 채찍으로 반 죽여 놓을 때는 언제고...... 쿤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끄럽지? 쿤은 화닥화닥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억눌렀다. 도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쿤은 자신이 늘어놓은 말들이 두조를 보호하기 위해 늘어놓은 변명같이 들려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가 왜 저 노예를 감싸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울컥 들면서 그냥 곤장 100대 때리라고 할까 말까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렇게 말해봤자 지신의 부끄러움을 무마시키기 위한 행동으로 밖엔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여튼 저 놈이 관계되면 뭐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쿤은 구겨진 미간을 벅벅 문질렀다. 처소로 향하는 그를 바레사가 따라갔다. 그는 쿤이 벗어던진 옷을 주워들고 욕탕으로 들어가는 그의 시중을 들었다. 덥기 때문에 욕탕에는 항상 깨끗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안에 쿤이 길게 눕자, 바레사가 수건과 홑옷을 가져오면서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혹시 아직도 몰래 수리화를 피우는 치기 어리던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신 겁니까?” “그에 대한 훈계라면 저 노예 놈에게 실컷 들었다! 잔소릴 하려면 당장 나가!” “...실컷 들으셨다고요?” “그래!” 쿤은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저 놈이 내가 수리화를 피우는 걸 보더니 중독자니 뭐니 떠들어대면서 성을 내는게 아니냐!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노예주제에 감히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정신이 어찌 된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간을 어디다 꺼내놓고 다니던지!” “그런데도 저 노예의 목이 용케 붙어 있는군요.” “그 불량배 놈들만 아니었어도 벌써 죽은 목숨이야! 당장 내일 치안대에 연락해서 그 놈들을 잡아내라고 해라. 고깃덩이가 되도록 곤장을 쳐서 시장바닥에 버려 줄 테니까!” 그 놈들을 죽였어야 하는데 노예 놈 때문에 실패했다며 성을 바락바락 내는 쿤을 바라보며 바레사는 침묵을 지켰다. 이건 이상하다. 많이 이상하다. 노역장에서 그 놈을 데려올 때부터 참 의아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쿤의 호기심이거니 싶었고, 곧 변덕을 부려 그에게 질려버리면 입막음을 위해 조용히 죽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전개로 인해 그 노예는 별궁에 들어가기까지 했고, 쿤과 단 둘이 밤나들이를 나가지 않나 쿤에게 훈계를 했다지 않나 무엇보다...... 자신이 그에게 손을 대자 쿤 칸칸이 화를 냈던 것이다. 그건 틀림없이 화였다. 쿤은 자기가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고 말을 얼버무렸지만 사실 그 얼버무린 말 자체만 봐도 이상했다. 내 노예니까 건드리지 말라니, 그럼 쿤이 아니면 누구도 그 노예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두조는 아직 쿤과 잠자리를 하지조차 않았다. 쿤은 그만 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르느니 화가 난다느니 하지만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바레사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는 쿤을 불렀다. “폐하.” “왜?” 혼자 성 내다가 지쳐서 입을 다물고 얼굴을 씻던 쿤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원하신다면 오늘 밤, 폐하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쿤은 물이 떨어지는 얼굴을 들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레사를 바라보았다. “......네가 갑자기 웬일이냐? 내 유혹을 필사적으로 거부할 땐 언제고?”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말이냐, 아니면 나에게 말이냐?” 묘한 대답에 쿤이 그렇게 반문하자 바레사는 거짓말을 할까 말까 생각하는 듯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쿤이 거짓말을 하는 걸 무척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폐하께 말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겠구나.” 쿤이 미간을 모으자 바레사는 그 답지 않게 또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다. “폐하...... 그 노예를 사랑하면 아니 되십니다.” “뭐?” 경악과 황당함으로 물든 쿤은 욕탕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레사는 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그 놈을 사랑할 리가 없지 않느냐!” “소인의 걱정을 용서하십시오.” “아니 대체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냐! 내가 네 멱살을 잡은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놈을 때린 네 행동에 성이 나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냥... 그냥 노예 놈이 돋운 부아가 가라앉지 않아 화풀이를 하려 든 것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쿤은 도로 욕탕 안에 주저앉으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얼빵하게 생긴 주제에 더럽게 시건방지기만 한 그놈의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말을 잇다가 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두조에 관해서 만큼은 뭔가 의지대로 되질 않는다. 아무리 변덕스럽다고는 하나 그의 앞에서는 곧잘 감정적이 된다. 쿤은 자신이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물론 그놈에게 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호기심이든, 오기든, 흥미가 가는 것은 사실이야. 그놈은 아주 색다르게 나를 열 받게 하는 놈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절대 아니다 바레사. 나는 다신.......” 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신 소세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이라 착각한 일순간의 감정일 뿐. 그걸로 뼈저리게 아픈 교훈을 얻었다. 세상천지에 사랑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않는다. 쿤은 분노도 황당함도 의문도 전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느닷없이 두조에게 손을 잡혔을 때 느꼈던 당혹감도, 시에 칸칸이라면 안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불쾌감도, 그가 정곡으로 찔러 들어온 수치심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반하게 만들건 어쨌건 놈을 유혹해서 자신의 포로로 만들면 끝이다. 단 한번만이라도 삽입을 할 수 있게 한다면 안게 해 달라 매달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바레사는 쿤이 침착해진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쿤이 욕탕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그의 몸을 닦고 홑옷을 입혀주었다. 피곤하다며 쿤이 잠자리에 들려하자 바레사는 물었다. “수리향을 피워드릴까요?” 쿤은 두조가 꽥꽥 내뱉었던 잔소리가 생각나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됐다! 그놈의 수리향은 한동안 꼴도 보기 싫을 것 같구나.” 시롭은 또 얼굴이 퉁퉁 부어 나타난 두조를 보고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녀는 찬 수건을 가져오면서 두조의 등을 철썩 두드리고는 말했다. “넌 어째 폐하를 만날 때마다 얻어터지니? 그래가지고 목숨부지 하겠어?” “...그러게 말이에요.” “네가 폐하와 함께 말도 없이 사라져서 늦게까지 안 들어오길래 오호라, 오늘밤 새 역사를 쓰는 것인가! 하고 잔뜩 기대했더니 이게 뭔 꼴이니.” “죄송해요...” 사과할 일도 아니면서 두조는 저도 모르게 사과했다. 붉게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수건을 대고 두조는 긴 의자위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놀라서......” “뭐가?” “수리화 말이에요. 그런게 버젓이 시장에서 팔리다니 정말 놀랐어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완전히 범죄라고요.” “으음... 정제되지 않은 수리화를 파는 건 확실히 불법이지. 하지만 있으나 마나한 금지랄까... 정제된 수리화는 무지하게 비싸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거든. 수리화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이 너무 고되다 보니 잊으려고 피우다 중독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지병이 있어서 통증을 줄이기 위해 복용하다가 중독되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실제로 수리화 중독자들은 이 나라의 큰 골칫거리지만 그런게 비단 수리화 뿐만은 아니잖아? 물론 중독성 면에서 위험한건 사실이지만, 뭐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중독되는 사람이 바보인거지. 그런데 그것 가지고 뭘 어떻게 했기에 또 맞은 거야?” “그런 걸 폐하께서 피우시니까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요. 뭐가 아쉬워서 일국의 황제가 그런걸...” “뭐? 폐하께서 수리화를 피우시더라고? 시장까지 나가서?” 두조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자 시롭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사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수리화에 중독되었던 황제들은 많으니까. 그걸 입에 대보지 않은 황제가 없었을걸. 그렇지만 폐하께서는 자기애가 무척 강하신 분이라서 그런건 손 안 대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 “좀 주제넘게 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시롭은 그러고도 목이 붙어 있는 게 용하다고 생각했다. 곧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런게 네 매력인지도 모르지.” “네?” “아니... 설사 폐하께서 수리화를 피운다 하더라도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돼. 대놓고 피우지 말라고 하고 성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폐하께서 당장 그걸 대령하라고 하면 대령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넌 노예면서 아주 이상한데서 배짱을 부린단 말이야. 너 아니고서는 누가 폐하께 그러겠니?” “그건......” 자신이 신분제 사회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이곳에 끌려와서 노예이기에 굴욕과 굴종을 당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보다는 신분에 상관없는 세상에서 그는 더 오래 살았다. 이곳에 온 것은 이제 고작 다섯 달이 지났다. 다섯 달 있었다고 태어날 때부터 신분제 사회에서 줄곧 살아온 사람처럼 반응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황제라는 말 한마디에 신이라도 대하듯 몸이 얼어붙고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이곳 사람들과는 달랐다. 두조는 자신이 쿤 칸칸이 황제라는 사실을 그리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시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야 아, 그가 정말 황제구나, 대단하다, 이렇게 느꼈을 뿐. 사실 그때도 얻어맞느라 제대로 감동하지도 못했다. 쿤 칸칸을 만났던 건 대부분 그를 황제로 인식하는 타인과 함께 일 때가 아니라 단 둘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까다롭고 변덕스럽고, 성 잘 내고 화를 불같이 내는... 비위맞추기 어려운 철부지. 이나마도 그 철부지가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애쓰고 있는 거지 그와 상관이 없었다면 두조는 쿤을 어지간히 말 안 듣고 성격 더러운 조카(?) 쯤으로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야 쿤이 연상이었지만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는 응석받이 어린애니까.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없었던. “아무튼 폐하께서 널 예쁘게 봐주고 계신 것은 확실하지만 도를 넘지 않도록 해. 넌 그 분이 황제폐하라는 자각이 없어. 너에게 잘해준다고 그분을 무르게 보지 마. 내가 경고했지? 한번 돌아서면 아주 차갑고 비정하신 분이니까...” 만날 얻어맞는데 이게 잘해주는 건가. 두 번 잘해줬다간 맞아 죽겠다고 두조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시롭은 뜨끈해진 수건을 다시 찬물에 집어넣고 시원하게 만들어 건네주면서 말했다. “몰래 나간 것까진 좋았는데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들어왔으니 내일이면 온 황궁이 들썩거리겠구나.” “왜요?” “그야, 여태껏 바레사님이 필사적으로 쉬쉬 해오던 네 존재가 사방팔방에 알려졌을 테니까 말이지! 그렇잖아도 쿠칸들까지 별궁 출입이 금지되어서 대체 누가 와 있는 건가 말들이 많았는데, 네가 폐하와 단둘이 밤 나들이를 나갔다가 들어왔으니...... 내일쯤이면 별궁에 폐하의 마음을 홀랑 잡아먹은 천하절색의 미남이 있더란 소문이 돌지도 모르지.” “예엣? 폐하와 전 시장에 나가서 싸움만 하고 돌아왔어요! 매번 폐하께 얻어맞아 얼굴에 멍이 가실 날이 없는데 천하절색이 뭐란 말입니까?” “그치만 소문이란 놈은 원래 그런 걸? 한동안은 별궁 안에서 꼼짝도 않는 것이 좋을 거야. 한 발짝만 나가면 온갖 불순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벌 떼처럼 달려 들 테니까. 모레쯤이면 네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보낸 선물과 초대장에 파묻힐지도 몰라.” “목적이라뇨?” “쿤 칸칸의 총애를 한 번에 사로잡은 너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야 무궁무진 하지.” “전 고작 노예일 뿐인데도요?” 시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했다. “넌 아직도 네가 고작 노예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아니나 다를까, 당장 다음날부터 선물을 들고 온 시종들의 발길이 별궁 입구에 끊이질 않았다. 때 아닌 선물배달로 인해 심부름 값을 챙길 수 있게 된 시종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시롭은 선물 받으러 나가기도 귀찮아서 아예 입구에다가 커다란 자루를 펼쳐 놨다. 두조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은 탓에 선물로는 별의 별 것이 다 들어왔다. 두조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감이나 보석은 물론이거니와, 말도 탈줄 모르는데 말채찍과 안장세트라던가 읽지도 못하는데 외국의 귀한 서적이라든가 피지도 않는데 상아로 만든 곰방대라던가 하는 식이라 정작 두조가 쓸 만한 것은 정말로 거짓하나 보태지 않고, 단 하나도 없었다. 시롭은 그걸 보고 엄청나게 툴툴거렸다. “네게 필요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선물 받은 거니까 어디 갖다 팔아버릴 수도 없고...” 두조는 어깨를 움츠렸다. 노예라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 고급스러운 선물들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실 자신은 아무 변한 것이 없는데...... 저쪽 세계에서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이쪽 세계에서는 이제 말문이 튼 노예에 불과하다. 하지만 쿤 칸칸을 만난 이후로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쿤 칸칸과 목숨을 건 사랑의 줄타기를 하는 천하절색의 남자라니... 무슨 공길이도 아니고 자신의 이미지랑 너무 안 어울린다. 어쩌다 내 팔자가 이리 야리꾸리하게 꼬였을까, 숱한 사람들이 차원이동을 했어도 자신 같은 꼴이 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두조는 툴툴거렸다. 쿤은 시장에 다녀온 이후 나흘이 지난 오늘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예전엔 그가 언제 나타나서 자신을 잡아먹을까 전전긍긍했는데, 이젠 안 보이니까 왠지 궁금했다. 사람이 얼굴을 자주 봐야 정이라도 쌓일 텐데 이래가지고서 언제 자길 반하게 만들겠다는 건지 원. 두조는 선물들을 상자에 정리해 넣고 초대장이나 편지를 분리하는 시롭의 곁에 앉아서 말했다. “역시, 기분 나쁘시겠죠?” “뭐가?” “정작 폐하께선 절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주변 사람들은 죄다 절 무지 총애한다고 착각하고 있잖아요. 그 성격에, 틀림없이 내가 역노 따위한테 반했다는 소문이 어째서 난거냐고 펄펄 뛰고 계실 거 같아서요.” 시롭은 낄낄 웃더니 말했다. “폐하의 성격에 대해서 이제 완전히 다 파악한 걸?” “그래서 안 찾아오시는 거겠죠?” “왜, 보고 싶으니?” “아뇨! 보고 싶긴요! 그저 이런 일들 때문에 또 폐하의 심기가 뒤틀려 얻어맞지나 않을까 하고...” 두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에 주제넘게 설교를 늘어놓은 것 때문에 잔뜩 기분이 상하셨을 텐데, 저 같은 놈을 좋아한다고 오해를 사고 있으니...... 안 오시는 이유가 절 봤다간 분개를 참지 못하고 죽일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닐까 하고......” “설마 그러실라고! 와하하하!” “으악, 아파요.” 시롭은 두조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폭소를 하고는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기 전 잠시 볼일이 있다고, 시종이 저녁을 가지고 오기 전까지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그녀는 잠시 별궁을 나갔다. 혼자가 된 두조는 별궁의 카펫위에 드러누워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었다. 해가 기울어지는 시점이긴 했지만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다. 벽이 없다시피 한 방의 구조상 저녁바람이 선들선들하게 불고 있었지만 더웠다. 두조는 카펫이 깔린 방을 굴러서 벗어났다. 그리고 타일이 깔려있는 시원한 복도의 바닥 위를 뒹굴었다. 바닥위에 드러누워 있자니 그동안 몰랐었던 별궁의 복도 천정이 보였다. 복도의 천정위에는 유리 타일로 아름다운 그림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게 있었구나, 몰랐다...... 감탄하던 두조는 이왕이면 잘 보이는데 만들어 둘 것이지 왜 하필 천정에 만들어 두었을까 생각했다. 누가 본다고. 참 쓸데없네.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문득 누군가의 그림자가 머리위에 드리웠다. 바닥에 누운 채로 턱을 들어보니, 어떤 남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조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한 남자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누, 누구세요?” 여긴 시롭하고 시종 한명 말고는 아무도 못 드나드는데. 낯선 남자를 보고 두조는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별궁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게 좋을 거라 경고했던 시롭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왼쪽 귀에 커다란 귀걸이를 달고 있는 남자는 미남이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부드러운 회색 눈동자를 한 남자는 미소도 매력적이었으며 키도 컸고 신체비율도 좋았다. 두조가 체격이 좋고 단단한 몸매라면 이쪽은 날씬하면서 단단한 몸매랄까.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불쑥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주려고.” “뭐, 뭐죠?” “선물.” 남자는 당연한 듯이 반말을 썼지만 노예인 자신이 이곳에서 존댓말을 들을 일은 거의 없기에 두조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마도 선물을 전달하러 온 시종인가보다 하고 두조는 멈칫거리며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야자 잎으로 엮은 바구니에 손수건 한 장이 덮인 그 선물의 외관은 무척 소박했다. 그래도 보나마나 자신에겐 필요 없는 비싸기만 한 물건이겠지, 하고 들고만 있는데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먹는게 좋을 텐데.” “예?” “잘 녹으니까, 그거.” 두조는 무심코 손수건을 들춰봤다가 깜짝 놀랐다. 새카맣고 동그란 덩어리들이 열 개 정도 들어있는데, 이 냄새는 틀림없이...... 초콜렛! “신의 열매라고 불리는 걸로 만든 거야. 맛있어, 먹어봐.” 남자는 스스럼없이 초콜렛을 집어 두조의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두조는 얼결에 받아먹고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 맛, 이 향기. 초콜렛이 확실했다. 현실의 것처럼 달콤하진 않았지만, 안에 뭔지 모를 새콤한 과일을 넣어서 카카오의 쌉쌀한 맛과 어우러져 아주 독특한 풍미를 냈다. 입 안의 초콜렛이 부드럽게 녹아 목구멍을 넘어갔다. 뭔지 모를 향수가 왈칵 밀려들었다. 정말 맛있었다. 두조는 다시 한 개를 더 입안에 집어넣고 눈을 감은 채 그 맛을 음미했다. 끝내줬다. 그동안 받았던 그 어떤 호화로운 선물들보다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맛있어?” 남자의 질문에 두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만 먹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두조는 바구니를 그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저, 하나 드세요. 정말 맛있어요.”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쿡, 하고 뭔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느물느물한 말투로 말했다. “먹여주면 먹지.” “예?” “아~” 두조는 잠시 이놈이 미쳤나 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두조는 바구니를 더 앞으로 내밀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집어 드세요.” “흐응, 노예답지 않게 콧대가 높구나.” 그제야 두조는 상대가 그냥 시종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말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남자의 반말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종이라면 별궁에 머무는 그에게 턱턱 말을 놓진 못했을 것이다. 두조는 아까 자신이 한 질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물었다. “누구세요?” “난 테살이라고 해. 이 귀걸이 보여? 쿠칸이지.” 쿠칸이 뭔지에 대해서는 시롭에게 배웠다. 쿤 칸칸의 실질적인 후궁. 귀족가의 자제들. 두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는 테살을 보고 멍해졌다. 설마...... 나 견제당하고 있는 건가? 그런 거겠지? 후궁 간의 암투라던가 치정싸움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지나가며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이 초콜렛에 극약이라도 든 건 아니겠지? 아무 생각 없이 먹었는데! 다이나믹한 두조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읽은 테살은 아하핫 배를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 독 같은 건 들지 않았으니까. 널 암살하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지 내가 직접 독극물을 들고 찾아 올 리가 있겠어? 아하하하! 그렇게 질겁하다니, 귀엽네!” 귀엽다는 말에 두조는 울컥했다. 이렇게 덩치 큰 자신이 진짜 귀여울 리가 있는가. 놀리는 것이 분명한 그 말에 두조는 눈초리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곳 별궁에 쿠칸들의 출입은 금지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그런데 이렇게 드나드셔도 되는 겁니까?” 테살은 후... 하고 웃음을 갈무리하며 대꾸했다. “그래서 이를 거야?” “네?” “폐하께 내가 멋대로 들어왔다고 이를 거냐고.” “.........” 테살은 대답하지 못하는 두조 앞에서 불쌍한 척 눈을 빛냈다. “나는 맛있는 초콜렛을 선물하러 왔는데 기쁘게 먹어놓고서는 내가 여기 왔었다고 쪼르르 폐하께 이를 참이야? 분노하신 폐하께서 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지도 모르는데... 시체는 들개에게 던져지겠지! 한때 소리타 귀족가의 아리따운 젊은이로써 폐하의 총애를 얻던 쿠칸의 비참한 최후가 주는 교훈- 질투하지 말지어다! 내 죽음은 그런 식으로 밖엔 기억되지 못할 거야. 그런데 이를 거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두조는 어이가 없어서 원맨쇼를 하는 테살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테살은 자신의 불쌍한 척에 심취해서 기둥을 짚고는 두조를 바라보며 뻘 짓을 계속했다. “그래, 노예의 신분으로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그것을 지켜내려면 그렇게 비정하고 음흉해야겠지! 아아 황궁이란 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던가! 애초에 나처럼 여리고 착한 젊은이가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어! 날 쿠칸으로 보낼 때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던지... 내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셨을 때에도 그만큼의 눈물을 뿌리셨을거야! 으흑흑흑.” “안 이를 테니까 그만 좀 하시죠.” 두조가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테살은 급 방긋 웃으며 두조를 덥석 끌어안았다. “정말? 와 고마워!” “이, 이거 놓으세요!” “쑥스러워하긴, 우린 이제 친구잖아?” “누가요!” 그러든가 말든가 테살은 몸부림치는 두조의 이마에 입술도장을 찍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그리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돌아섰다. “이런데 처박혀 있으면 심심할 테니까, 자주 놀러올게!” “누구 맘대로...!!” 테살은 하늘하늘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멀어져갔다. 뭐 저렇게 어이없는 인간이 다 있어. 날씨가 더워서 쿤을 비롯해서 성격 이상한 사람이 많은 건가. 때 아닌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느낌에 두조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초콜렛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초콜렛은 그새 녹아 끈적해져 있었다. 그걸 하나 더 입 안에 밀어 넣으면서 그래도 이 선물만큼은 진짜 좋다고 생각했다. “테살님을 만났단 말이야?!” 약속대로 저녁식사 전에 들어와 두조의 식사를 거들던 시롭은 두조의 말에 경악을 했다. 두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아까 잠깐... 와서 선물이라며 저걸 주고 갔어요.” 두조가 초콜렛 바구니를 가리키자 그것을 들춰본 시롭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이거 좋다고 덥석 먹은 건 아니지?” “...먹었는데......” “안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독 아니에요. 맛있던데...... 시롭도 하나 먹어볼래요?” “당장 효과가 없다고 독이 들었을지 안 들었을지 어떻게 장담해? 점차 효과가 나타나는 건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무슨 불길한 저주라도 깃든 음식이라거나......” “설마요.” 두조가 그렇게 대꾸하자 시롭은 펄펄 뛰면서 말했다. “넌 테살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라서 그래! 그분이 늘 실없이 웃고 다니는 한량처럼 보이긴 해도 얼마나 성격 고약하고 음흉한 사람인데! 그 바레사님도 맥을 못 추는 숨은 강자란 말이야! 그 분은 바레사님이 쿠칸을 나가고 난 뒤 곧장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순식간에 세를 불렸어. 정말 눈치가 빠르고 요령이 좋아서 어떻게 하면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원하는 것을 받아낼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시거든... 한마디로 지금 상황에서 너의 가장 큰 연적이라고!” 근친상간으로 결혼한 마누라가 있는 유부남에 남자 애인이라...... 마약까지 나왔으니 이제 뭐가 더 나와도 놀라지 않겠다 생각하며 두조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시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런 연적이 주는 걸 덥석덥석 받아먹고! 두조야... 난 가끔 널 보면 꼬리 달린 여우인지 아무 생각 없는 붕어인지 모르겠다. 평소엔 이렇게 멍청한데 기술(?)쓰는걸 보면 예사롭지 않으니......” 그래서 도무지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내숭 백단 눈치 천단의 불여우인가 싶다가도 이렇게 멍청할 때가 있으니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두조는 시롭의 걱정에도 남말하듯 이야기했다. “폐하께선 그런 타입의 사람을 좋아하시는 군요... 하긴 잠깐 사이에 제 정신을 쏙 빼놓고 갔어요. 경계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런 저를 뜻대로 마구 휘두르고 갔다니까요?” “그게 그분 방식이야. 상대방 얼을 빼서 자기 의도대로 이끄는 것... 별궁에 언제까지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앞으로 종종 마주칠 텐데 그때마다 넋 놓고 있으면 뒤통수 크게 맞는다.” 두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앞에 바싹 다가앉은 시롭은 검지를 곧추세워 보이며 강조했다. “네가 여기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테살, 그분이야! 조심해!” 자신 없는데... 두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시롭에게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해서 다른 걸 물었다. “조심해야 할 사람이 또 있어요?” “조심이야 모든 사람을 다 조심해야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요주의 할 인물이 테살님이라는 거야! 그리고 또 한명 지극히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황후마마셔!” “황... 황후마마...” 본처 말이지. “물론 조심해야겠죠......” 머리끄댕이 잡히지나 않도록 조심해야지......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생각 때문에 두조가 한숨을 푹 쉬자 시롭은 물러나 앉으며 팔짱을 꼈다. “으, 하긴 사실 조심한다고 해서 조심될 상대도 아니다. 넌 아직 아무런 세력도 없으니 걸고 넘어지면 넘어지는 수밖에는 없지...” 초조하다는 듯 팔을 바둥거리며 시롭은 소리쳤다. “이 넓고 무서운 황궁에서 네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제폐하 뿐이란 말이야! 얼른 그 분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텐데 이렇게 맹해가지고서야 어떻게 해?” “뭐 절 찾아오시기라도 해야 사로잡든지 말든지 하죠..... 전 이젠 그냥 만나서 좀 안 맞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태평스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구.” 시롭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말을 이었다. “음...... 테살님도 황후마마도 조심해야겠지만 사실 정말 조심해야하는 건... 바레사님인지도 몰라.” “에?” 두조는 바레사의 차갑고 냉정한 얼굴을 떠올리고는 반문했다. “그 분은 저에게 별 관심도 없던 것 같은데요. 절 돌봐주는 것도 폐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태도이고. 무엇보다 제 원래 신분도 제 원래 모습도 알고 계신 분이니 폐하께서 저에게 반할 리가 없다 장담하시고 계실 텐데요, 뭐.” “그렇지만...... 황후마마나 테살님과는 달리 바레사님은, 정말 폐하를 생각하시는 분이니까 그래. 장애가 되려면 다른 누구보다 큰 장애가 될지도 몰라. 황후마마나 테살님은 폐하와 분란을 만들고 싶어 하거나 피하고 싶어 하는 편이지만 바레사님은 분란을 일으키더라도 필요하면 한다, 는 쪽이니까. 이 황궁에서 폐하께 수리화는 나쁘니까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말고 또 있다면 그건 바로 바레사님일 걸.” “마누라에 정부에 시누이.....” “응?” 두조는 무슨 소리냐고 돌아보는 시롭의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했다. “아뇨......” 사방엔 푸른 밤이 내렸다. 쿤은 자신의 거처에서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 자리한 별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조가 머무는 별궁의 창가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아직 안자는 건가. 멍하니 그 불빛을 바라보던 쿤은 자신이 가볼까 말까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고민할 것이 대체 뭐람? 가면 가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바레사한테 그렇게 큰 소리를 탕탕 쳐놓고는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쿤은 입술을 꾹 깨물고 눈초리를 곤두세우고는 별궁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눈알이 아파 올 때쯤 어깨에 힘을 빼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맞다, 인정하자. 쿤은 그의 유일한 장점인 솔직함을 발휘해서 어렵사리 인정했다. 자신이 두조를 겁내고 있다는 사실을. 벌써 두 번이나 걷어차였다. 침대에서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유혹하며 온 몸을 내던졌는데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이 거절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또 시도했는데 실패한다면...... 쿤은 저도 모르게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런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놈을 사랑에 빠트려서 내게 매달리도록 만들겠다 마음먹지 않았던가! 하지만 쿤은 두조를 반하게 만든답시고 그의 곁에서 얼쩡거리다가 자신이 먼저 마음을 빼앗길까봐 무서웠다. 바레사의 뺨을 때린 일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놈에게 지대한 흥미를 갖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상...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세이가 죽고 난 이후 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했지만 누구도 두조같지 않았다. 그는 쿤을 유혹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외면하고 진심을 들이댔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내 모든 것을 주겠노라 그렇게...... 그 검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쿤은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가 주는 사랑이 한없이 달콤하고 행복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만이 담긴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단순히 내기 때문만이 아니다. 두조에게는 누구든 한번쯤 가져보고 싶다고 생각되어지는 진심이 있었다.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간다면 설령 그에게 마음이 없었다 하더라도 막연히 질투가 날만큼... 반짝거리는 마음이. 녀석의 진심을 넘보다가 자신이 진심이 될까봐 걱정스러웠다. 예전처럼 생각 없이 쉬이 다가갈 수 없다. 그저 호기심에 피웠던 수리화에 어느덧 중독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랑이더라, 라는 깨달음 따위 죽어도 얻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놈을 죽여 버리거나 궁전에서 쫓아내 버리기에는 도망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정작 그 노예 놈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자기만 지레 겁을 먹고 거리를 두는 꼴은 너무나 웃긴다. 하지만 생각의 한편은 차라리 그러는 쪽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속삭인다. 더 휘말리기 전에 차라리 도망가! ...혹은 그렇게 예쁜건 다시 보기 힘들어, 꽉 잡아! 라고 속삭이는지도 모르겠다. 어지러운 심사에 다시 한숨을 푸~욱 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쿤 칸칸의 영광이 모든 하늘과 땅에 가득하기를! 부족한 쿠칸 테살 스이 소리타가 황제폐하를 뵙나이다.” 쿤은 몸을 돌려 테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일어나라, 나를 마주볼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노라.” 테살은 후후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쿤에게 다가와 거리낌 없이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것은 오래된 연인들 사이에나 오갈법한 아주 친근한 행동이었다. “무엇을 생각하시기에 그리 한숨을 쉬시는 겁니까?” “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테살은 쿤이 서 있던 창가로 보이는 별궁을 힐끔 쳐다보고는 쿡쿡 웃었다. “그 노예를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저는 한동안 찾지도 않으시더니 섭섭합니다.” “섭섭할게 뭐가 있느냐. 너는 내 처소에 허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쿠칸들 중 하나인데. 별궁에 있는 것이 노예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내가 왜 쿠칸들까지 저곳의 출입을 금지시킨 건지 알고 있지 않느냐. 놈을 총애해서가 아니야!” “노역장에서 주워온 천한 노예이기에 딱히 데려다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불경한 소문이 날 것이 저어되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섭섭해 하는 것은 노예를 별궁에 모셔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바라보면서 짝사랑 하는 소녀마냥 한숨을 내리쉬는 폐하의 모습입니다.” “짝사랑은 누가 짝사랑이란 거냐?!”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테살은 고개를 가볍게 내려 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처음엔 반응이 없이 가만히 있던 쿤은 곧 테살의 등에 손을 감으며 입을 벌리고 테살의 혀를 맞아들인 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얽히던 혀가 떨어지고, 잠시 호흡을 내뱉으며 입술을 뗀 테살은 속삭였다.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라서 놀랐습니다. ......귀엽긴 하더군요. 콱 잡아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런데 그런 순진한 얼굴로 침대위에서는 폐하를 마구 농락한단 말입니까? 하긴, 바레사님도 그렇게 차갑고 냉정한 얼굴을 하고서는 침대위에선 거칠었다죠...?” 쿤은 대답하지 못했다. 두조와는 아직 한 번도 못 자봤는데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을 보고 뭔가를 짐작한 테살은 웃음을 목 안으로 삼키며 중얼거렸다. “설마, 아직까지 잠자리도 같이 못해보신 겁니까?” “닥쳐라.” 쿤이 으르렁거렸지만 테살은 킥킥 웃었다. “어쩐지...... 밤이면 밤마다 저 별궁을 드나드셨어야 할 폐하께서 그러지 않으신다 했습니다. 한숨의 이유가 거기 있으셨군요. ......대신이라도 저는 안 되겠습니까?” “웃......” 테살은 쿤을 창가의 기둥에 밀어붙이고 아랫도리를 은근하니 문질렀다. 그리고 헐렁한 그의 옷깃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옆구리를 문지르다 유두를 엄지로 꾸욱 눌렀다. 쿤이 잘 느끼는 귓전을 이로 긁어주며 이따금 혀를 내밀어 길게 핥아주었다. 곧장 파르르 떨면서 반응하는 몸이 느껴졌다. 테살은 쿤의 벨트를 풀러버리고 옷깃을 벌리고는 쿤의 한쪽 다리를 허리에 걸치고 그의 매끄러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하아.” 목울대를 빨아들이자 탄성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유두를 문질러주자 금방 뾰족하게 곤두서 올랐다. 입술이 쇄골로 내려가고 쿤은 눈을 꾹 감은 채 테살이 만져주지 않는 다른 쪽 유두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스스로를 애무하는 그 모습은 지독히도 선정적이었다. 잠시 입술을 떼고 그 모습을 감상하던 테살은, 그 시선을 느낀 쿤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뭐하는 거냐.” 하고 불만스럽게 내뱉자 그의 쇄골로 입술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아니요... 이런 폐하의 모습을 모르다니 저 노예가 불쌍해져서 말입니다.” 테살의 손이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속옷을 풀어버렸다. 한 며칠 굶주린지라 바싹 곤두선 음경을 손가락으로 모아 쥐자 그의 등이 휘었다. 테살은 내밀어진 가슴 위 동그랗게 맺힌 유두를 입술을 모아 빨아들이고 혓바닥으로 눌러가며 핥았다. 딱딱해진 그것을 흥건하게 침이 흐르도록 농락했다. 젖힌 머리를 기둥에 문지르며 쿤은 도리질을 쳤다. “아으... 하... 우응...” 음경을 가볍게 쥐었다가 훑어주는 뜨거운 손. 허벅지의 안쪽과 엉덩이를 주무르는 뜨거운 손. 그 열기. 그것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쿤은 달아오른 시선을 들어 올려 자신을 애무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는 대신 어둑한 방의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눈꺼풀을 깜박이며 방의 풍경이 아닌 좁은 통로와 낮은 천정, 그리고 검은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붙잡아왔던 뜨겁고 건조하던 손바닥. “윽!” 그 손이 갈라진 귀두의 끝을 감싸고 문지르자 신음이 튀어나갔다. 귀두위로 뜨거운 입김이 와 닿았다. 하지만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음성이 느물하게 말했다. “며칠째 굶으신 건지 벌써 새어나오고 있는데요...?” 쿤은 갑자기 찬물을 맞은 듯 흥이 싸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테살도 어쩐지 반응 없는 쿤이나 어쩐지 물렁해져 버리는 음경을 보고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지금 내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거지?쿤은 발로 테살의 어깨를 지그시 밀었다. 더 시들기 전에 입에 집어넣으려던 테살은 쿤의 음경을 쥔 채로 눈을 크게 떴다. 쿤은 벌려진 옷깃을 여미고 테살의 손을 떼어내며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너로는 안 되는 것 같다, 테살.” “......폐하?” “그만 돌아가라.” 쿤은 벨트도 하지 않은 채 옷깃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 처소를 나와 연못 사이 별궁으로 향한 길을 성큼성큼 달리듯이 걸었다. 별궁으로 들어가는데 막 자려는 참인지 여태 불이 밝혀져 있던 창가가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쿤은 문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낮은 창문의 턱을 넘어 두조의 방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잠자리에 눕던 두조가 깜짝 놀라서 흠칫 몸을 떨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는 두조를 쿤은 확 떠밀었다. 그가 침대위로 벌렁 자빠지자, 쿤은 재빨리 그의 위에 올라탔다. 두조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가득 피어올랐다. 오늘도 실패하면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하는 걱정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폐, 폐하 잠시만...” 쿤은 허둥거리는 두조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짓누르며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더러 세우라고 안 할 테니까 얌전히 있어. 한마디라도 주절거려 흥을 깼다간 가만두지 않을 테다.” 두조는 입을 합 다물었다. 쿤은 안심했다는 듯 짧은 한숨을 토하고는 두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를 짓누르던 무릎을 치웠다. 그리고는 두조의 배 위에 올라탄 채, 그저 손으로 여미고 왔던 옷깃을 벌렸다. 두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뭘 하다 왔는지 욕정이 선연한 몸이 그의 눈앞에 드러났던 것이다. 쿤은 엉덩이와 회음부, 주저앉은 음낭에 닿은 두조의 뜨거운 체온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사이로 밀려드는 열기가 기분 좋았다. 후끈 몸이 달아오르며 다시 단단해진 자신의 것에 손을 뻗쳤다. 그리고 물기 맺힌 흐려진 눈으로 두조를 바라보며 허리를 흔들면서 수음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 윽... 흐으... 읏...” 새어나온 애액이 손을 질척하게 적셨다. 찌걱찌걱 꿀쩍꿀쩍 젖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두조는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배위에서 자위하는 쿤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그의 가슴팍은 얕게 솟아난 땀으로 젖어있었고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쿤은 입술을 씹으며 어깨를 움츠리고 쾌감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한 손은 여전히 자신의 것을 붙잡고 한 손은 두조의 가슴을 가볍게 훑더니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맛이라도 보는 듯 살짝 핥았다. 그리고 젖은 손가락으로 심지가 들기라도 한 듯 곤두선 유두를 집어 올려 둥글리고 문지르며 애무했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탄성. “아... 윽, 흐읏, 하읏.” 놀라서 멀어졌던 현실의 감각이 쿤의 신음소리에 의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배위에 올라탄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유두를 문지르는 손가락도 보였고, 음경의 젖은 소리도 들렸다. 쿤이 자신에게 흥분하고 있고 그것을 주체하지 못해 자위하고 있다-는 사실이 쾅하고 두조의 머리를 때렸다. 문득, 쿤의 음모가 그의 머리색과 같은 금빛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것이 외국 살색 비디오가 생각나서인지 아니면 쿤의 모습이 지독히 자극적이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조는 달아오르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느꼈다. 근질근질 거리는 미묘한 느낌이 중심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야 될지를 알 수 없었다. 본능에 충실 한답시고 괜히 덤볐다가 또 어이없이 식어버리면 쿤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 같았고, 그냥 이러고 있기엔 너무... 너무... 두조는 시커먼 사내놈들끼리 모여 비디오를 보며 자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자마자 전혀 달라! 하고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치고 말았다. 그것이 웃지 못 할 묘한 불유쾌함을 동반하는 어쩔 수 없는 자극이라면, 이쪽은 이성의 끈을 당겼다 놓았다 한다. 누가 그렇게 자위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본 것도 처음이지만..... 누군가의 이렇게나 섹시한 모습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흥분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애가 닳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유혹하는 게 이런 모습이구나... 자위하고 있는 것은 쿤인데 두조는 자신이 자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의 음란한 상상이 그대로 튀어나와있었다. 자위를 처음 하는 소년처럼 그렇게. 두조는 떨리는 손을 뻗어, 쿤의 허벅지위에 올렸다. 쿤은 그의 뜨거운 체온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두조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는 그를 덮쳐도 되는 것인지 허락을 구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폐하......” 낮게 쉰 그 목소리가 쿤의 귓전을 파고들자, 쿤은 그 부름이 정사 중에 듣는 신음인 것만 같다는 생각에 짜르르한 쾌감을 느꼈다. 통증과 닮은 쾌감 때문에 발가락을 오므렸다. 쿤은 허리를 튕기며 등을 휘었고, 희뿌연 탁액이 음경을 붙잡은 쿤의 손가락 사이로 튀어 나갔다. “아흐윽!” 그는 짧은 신음을 뱉으며 사정했다. 정액은 전부 두조의 위에 쏟아졌다. 투두둑, 뜨끈한 체온을 품고 두조의 벗은 배와 가슴, 그리고 얼굴에까지 튀어 올랐다. 밀려왔다가 몰려가는 쾌감의 흔적을 쫓으며 쿤은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두조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쿤의 허벅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쿤이 하아하아 숨을 몰아쉬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 놈 위에 올라타 자위해버리고 만 자신의 상태가 자각이 되었다. 무엇보다 불쾌감이라도 느끼는지 미간을 찡그린 채 허벅지를 콱 붙잡고 있는 두조의 표정이 눈에 박혀 들어왔다. 남자에게 서지 않는 놈이 남자의 자위장면을 보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쿤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해서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지만 이렇게라도 자신의 욕정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채워주지 못한 뒤가 움찔거리며 빈 공간을 알려왔지만 또 볼썽사납게 애썼다가 더 창피한 상태가 되고 싶진 않았다. 쿤은 옷깃을 붙잡고는 두조의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두조가 붙잡고 뭐 어쩌고 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도망쳤다. “잠시만 폐하! 폐...! 으악!” 그를 붙잡으려고 허둥거리던 두조는 허공에 손을 뻗으며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이불에 발이 엉키는 바람에 코부터 박고 말았다. 안면이 깨지는 아픔에 빨개진 얼굴을 부여 잡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건...... “폐하...! 폐하! 으윽... 그냥 그렇게 가시면... 젠장... 난 어떻게 하라고......” 잔뜩 성이 난 자신의 물건이었다. 아픔 때문인지 아니면 아프도록 곤두서서 그를 쫓아가지도 못하게 하는 물건 때문인지 두조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안면의 통증보다 아랫도리의 통증이 더 느껴지자... 천천히 한 손으로 자신의 몸에 묻은 정액을 문질렀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그것은 미끈미끈했고... 풋내가 났다. 그건 평소 쿤에게서 나는 달착지근한 향기와는 전혀 다른, 발정한 수컷의 냄새였다. 두조는 쿤의 정액에 젖은 손으로 자신의 것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빠르고 강하게 훑었다. 탁탁탁탁. 살을 치는 그 소음이 아까 자신의 위에서 수음하던 쿤의 움직임과 겹쳐 들어갔다. 붉은 입술을 깨물던 하얀 이. 젖어있던 목덜미. 헝클어진 머리카락, 두 손으로 붙잡은 쿤의...... 페니스. “아!” 카펫위에 정액이 흩뿌려진 것은 금방이었다. 짧은 절정 뒤에 몰려오는 허무함. 대체 서로 자위만 하다니 이게 무슨 꼴이지, 하고 멍하니 생각하던 두조는... 카펫위에 쏟아진 자신의 정액을 보고는 으악!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닦아내도 예리한 시롭이라면 이게 무슨 흔적인지를 알아차릴 텐데... 망했다. 쪽팔려! 이러고도 아직까지 못했느냐며 마구 성을 낼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했다. “두조야! 일어나, 얼른 일어나!” 밤늦게까지 잠을 설치다가 간신히 잠들었던 두조는, 성급하게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부스스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희뿌연 시야로 세숫물을 챙기느니 갈아입을 옷을 꺼내느니 부산을 떠는 시롭이 보였다. 한참 방안을 왔다갔다하던 그녀는 갑자기 발걸음을 딱 멈춰 세우더니, 리드미컬하게 소리쳤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두조는, 시롭이 카펫의 흔적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을 화끈 붉혔다. 다시 잠든 척 할까. 하지만 시롭은 당연히 그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조를 보고 눈을 번쩍거리며 소리쳤다. “어쩐지! 오늘 바레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혹시?! 하고 생각했어! 장하다 두조야, 어젯밤 드디어 역사적 순간을 이루었구나! 폐하와 잠자리를 했는데도 아직까지 멀쩡한 것으로도 모자라 함께 아침식사라니! 이거야말로 폐하께서 네게 반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어?” “시롭, 저기......” “우후후후훗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침대위에서 하지 그랬니. 이 카펫이 얼마나 비싼 건데! 얼룩을 빼려면 세탁실의 시녀들이 고생할 테니까 말이야. 아니 뭐, 젊으니까 이해는 해! 폐하와 폐하의 총애하는 분이 쓰는 건데 이깟 카펫 몇 장쯤 버린다고 누가 뭐라겠어?” “너무 앞서가는 것 같은데......” “자, 얼른 얼른 일어나서 준비해! 폐하께서 널 아끼시는 이상 언제까지 별궁에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잖아? 최대한 근사하게 꾸미고 나가야지! 아침식사를 같이 들자는 건 오늘 하루 종일 함께 보내고 싶다는 의미일 테니까, 이런저런 즐거운 일을 많이 하고 와야 돼~ 물론 밤도 폐하와 함께 보내겠지? 어디서 주무시려나... 별궁으로 돌아온다면 다행이지만 거처에서 주무실 것 같으면 아무래도 전갈을 넣어놓는 쪽이......” “시롭!” 두조는 자신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혼자 들뜬 시롭을 외쳐 불렀다. 그제야 시롭이 눈을 뎅그랗게 뜨고 두조를 돌아보았다. 두조는 후아아아 한숨을 내시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이 자국은 뭐란 말이야?”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사실상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야 하나......” “뭐어?!” 시롭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낙담한 두조의 얼굴을 보고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두조는 더 이상 어젯밤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재빨리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나저나 아침식사라니, 무슨 소리에요?” “폐하께서 너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싶다고, 널 준비시키라 바레사님께 이르셨다잖아. 너와 정책을 논의하실 것도 아니고, 너와의 아침식사는 식사외의 아무런 의도를 가질 수 없는데 함께 먹고 싶다 하시는건 그만큼 폐하와 가까워졌단 소리가 아니겠어? 여태까진 네가 폐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두들겨 맞고 미운 소리만 들었으니 난 틀림없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었지. 카펫의 자국을 보고 그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진 거고. 더더군다나 폐하께선 너와 잠자리만 하고 나면 죽인다드니 만다느니 그러셨으니까 네가 멀쩡한 건 폐하께서 홀딱 빠지신 거라고 기뻐했는데.....” 맞다, 그랬지. 두조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쿤 칸칸이 지금 자신을 별궁에 두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과 잠자리를 해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시롭은 거기에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장담하지만, 두조는 그런 자신이 없었다. 총애는커녕 쥐어 터지기 일쑤니까.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쿤 칸칸이 자신에게 반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이대로 잠자리를 가지면 정말로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 나를 사랑하게 된다 한들 후회하지나 말아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그때, 나를 모욕 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니까.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자 어쩐지 선뜩해지는 느낌에 두조는 목을 쓰다듬었다. 흥분한 자신을 홀로 내버려두고 가버린 쿤이 야속하다 원망했지만... 다행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롭도 바레사도 쿤은 침대위에서의 달콤함이 밖에서도 통용되는 사람이 아니라, 비정하고 냉혹한 성격이라 경고하지 않았던가. 유혹적인 쿤의 모습에 홀려 덮치고 들었다간 그 밤은 좋을지 몰라도 날이 밝으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두조는 어제 쿤이 남자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리적인 자극 없이 흥분했고,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자위했다. 남자에게 발정하는 몸이 되다니, 완전 짐승! 두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발기부전이라 쿤에게 맞을 일은 없으니 안심이지만, 나, 이대로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안심하고 아들놈을 세워보였다가 죽는 건 아닐까.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다. 시롭의 말마따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쿤을 유혹해서 자신에게 홀라당 빠지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나 싶지만... 그런 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단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쿤을 사랑하는 척, 그를 진심으로 만들고 우롱하는 일은 아무리 생사가 걸린 일이라고 해도 썩 내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요령이 자신에게 있었다면 이런 곳에 멍청하게 끌려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으아! 몰라!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느낌에 두조는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다가 뺨을 찰싹 두들겼다. 고민해봤자 뭐하나. 어떻게든 되겠지 뭐. 시롭이 그런 두조를 보고 말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냥 이래저래 난감하다 싶어서요......” “얼른 세수하고 와! 그런데 정말, 폐하도 그렇고 바레사님도 그렇고 무심하기도 하시지!” “네?” “아침식사에 초대한 것까진 좋다 이거야, 하지만 입고 갈 옷이 없잖아!” “여자도 아니고 아무거나 대충 입고 가면 되지... 무슨 밥 먹으러 가는데 꽃단장을 해요?” “어휴, 넌 몰라서 그래. 쿠칸들을 비롯한 폐하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호화스럽게 꾸미고 다니는지. 특히 쿠칸들은 다 귀족가의 자제들이니까 아름다운 옷이나 보석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와서 자신을 꾸미는 것에 소홀하지 않는다구. 아직 네가 노예출신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초라한 모습으로 폐하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간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네 자존심이 상할 뿐만 아니라 폐하의 취향이나 안목까지 욕을 얻어먹는 문제라고. 기본적으로 폐하께 잘 보여야 할 거 아냐! 폐하께서 콩깍지가 확 씌여서 네가 넝마를 걸치고 있어도 잘생겼다 봐줄 지경이 아닌 이상!” 시롭은 그렇게 공시랑 공시랑 불평을 늘어놓으며 어렵게 공수해 온 옷과 벨트, 그리고 샌들을 내놓았다. 빌려온 거니까 가져다 줘야 해, 하고 투덜거리면서. 시롭의 눈썰미가 좋은지라 빌려온 것임에도 그것들은 그럭저럭 두조에게 어울렸다. 하지만 시롭은 쿠칸들에 비해선 터무니없이 초라한 모습이라고 잔뜩 속상해했다. 잠시 후 바레사가 두조를 데리러 가기 위해 나타났다. 두조가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것을 턱짓으로 대충 받아주더니, 곧장 몸을 돌리며 말했다. “준비 다 했으면 가자.” 두조는 바레사의 뒤를 따라 쭐레쭐레 별궁을 나와 바로 곁에 자리한 쿤의 거처인 황제전으로 들어갔다. 요전번 쿤을 따라 밤에 들어온 적이 있는 궁전은 낮이 되니 또 분위기가 사뭇 틀렸다. 이 나라의 건물들을 주로 이루는 붉은색 벽돌이 아닌 푸른색 벽돌로 이루어진지라 시원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도 그냥 타일이 아닌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역시 황제의 거처인지라 호화롭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바레사가 불쑥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둔다.” “예?” “식사를 하고 난 후에는 제깍 별궁에 돌아가라. 폐하께서 널 붙든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네가 먼저 자청하여 그 분 곁에 머물며 괜한 시간을 빼앗지 말란 말이다.” “예...” 전부터 생각했지만 바레사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별궁에 있게 된 뒤로는 유독 싸한 분위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궁전에 들어온 이후 시롭도 붙여주고 자신을 책임지고 돌봐주는 사람인데...... 줄곧 신세를 졌으니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지만,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을 좋지 못한 시선으로 보는데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한때 폐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니 질투라도 하는 것일까.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바로 바레사일 거라 말하던 시롭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가 정말 진심으로 쿤을 위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울 거라고. 하지만 쿤이 누구를 좋아하는 것을 어째서 경계해야 하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의 신분이 노예이기 때문에, 자신만은 안 된다는 것일까? 물론 쿤 칸칸은 황제폐하인데다가 버젓이 마누라도 있고 정부도 있는데 자신 같은 놈이 얼쩡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시롭의 말 속에 느껴지는 뉘앙스는 그런 것과는 좀 더 다른 것이었다. 쿤이 상처받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듯한......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던 쿤의 모습도 떠올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물어보고 싶지만 바레사의 분위기가 하도 쌀쌀맞아서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감히 노예주제에 폐하의 사생활에 대해 묻는 거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두조는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식탁이 준비되어 있는 응접실 같은 장소에 다다랐다. 바레사는 “곧 폐하께서 오실 테니까 기다려라.” 하는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휭하니 나가버렸다. 그러고 보니 전엔 데이트라고 해놓고서 데이트다운 짓은 하나도 안했지. 그렇게 생각하던 두조는 문득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앗차 싶은 기분이 되었다. 심란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어제... 어제 그런 일이 있은 뒤 처음 만나는 거잖아! 도대체 무슨 얼굴을 하고 그를 봐야하나? 모른 척하고 태연하게 구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벌건 대낮에 그의 얼굴을 보더라도 그... 그... 그... 자위하는 모습이 떠오를 텐데 표정이 수습 가능할까. 애써 무표정을 연습하고 있는데 채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쿤이 불쑥 나타났다. 두조는 화들짝 놀라서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대고는 말했다. “쿤 칸칸의 영광이 모든 하늘과 땅에 가득하기를! 미천한 노예가 황제폐하를 뵙나이다.” “.........” 그런데 쿤 칸칸은 평소처럼 일어나라고 말하는 대신 말이 없었다. 뭐지? 그도 어젯밤의 일로 내 얼굴을 보기가 민망스러운가, 하고 생각하는데 쿤은 전혀 의외의 말을 툭 하니 내뱉었다. “너는 내가 나타날 때마다 놀라는 것 같군.” 그거야 밤에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르지만 아무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단 것은 같다. 무슨 마음의 준비씩이나 필요하냐고 물으면 나름 할 말도 많다. 만날 때마다 덮치지 않으면 때리고 죽이니 살리니 하니까 그럴 만도 하지. 두조가 그러고 있는 동안 쿤은 중얼중얼 말했다. “놀라는 꼴도 웃기지만 그러고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엎드린 꼴도 웃겨. 어찌되었든 별궁의 손님인데 볼썽사납군.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굴 마주쳐도 그래야 할 거 아냐? 시종도 너보다는 신분이 위일 테니까. 안 그래?” “.....따지자면 그렇지요.” “뭐, 당장 노예 신분을 벗겨준다고 해도 그 바탕이 어딜 가는 것도 아니고 엎드려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평민 신분으로 만들어줄까, 하고 말하려던 쿤은 문득 말을 멈췄다. 지금 두조는 쿤의 노예였다. 피라밋 대 공사장의 노예들은 전부 쿤이 사들인 것이니까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쿤의 것이다. 하지만 그를 평민 신분으로 만들어주면 그는 자유인이 된다. 세금이나 병역, 노역의 의무는 지지만 엄밀히 말해서 자신의 것은 아닌 것이다. 아직 무엇도 얻어낸 것이 없는데 그렇게 놓아주긴 억울하다. 쿤은 손을 홱홱 저으면서 말했다. “됐다, 일어나.” 두조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쿤이 준비된 식탁에 가 앉고, 쿤의 손짓에 따라 두조가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곧 대체 어디 있다가 타이밍을 재고 나타난 것인지 시종이 들어와 식사를 나르기 시작했다. 식탁을 다 차리자 시종은 말없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이고는 나갔고, 쿤이 물그릇에 손을 씻고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두조도 부담 없이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황제와 같이 먹는 아침이니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식당에서 수많은 시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먹는 거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식탁이 부실하거나 초라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역시 황제의 식사라 그런지 여태껏 보지도 먹지도 못한 음식들이 잔뜩 있었다. 이곳은 수저나 포크, 나이프 등의 식기를 쓰지 않고 손으로 먹었기 때문에 어려운 식사예절이 없었다. 윗사람이 먼저 식사를 시작한 후 식사한다는 둥의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본적인 것이니까. 덕분에 두조는 눈앞에 황제가 있다는 것도 잊고 즐겁게 밥을 먹었다. 무엇보다 고기가 양껏 차려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뼈가 수북 쌓일 정도로 닭과 비슷한 새 요리며 찜이며 구이며 정체모를 고기들을 실컷 먹었다. 정신없이 먹는 두조를 보고 쿤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그동안 굶었나? 대체 음식들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군. 풍성하게 차리라고 했기 망정이지 평소 내 식탁대로 차렸으면 울 뻔 했겠구나.” 두조는 우물우물 음식을 씹다가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평소엔 어떻게 드시는데요?” “쌀과 빵 한 토막, 한 종류의 고기와 세 종류의 야채, 가벼운 술 한 잔과 과일 정도다.” “그래도 잘 드시네요, 뭐... 전 고기는 사흘에 한번밖에 못 먹는데요. 아니 불평하는 건 아닙니다. 노역장에 있을 때에 비해서야 진수성찬이죠. 폐하께선 열흘을 굶어도 노역장의 그 음식은 드시지 못할걸요.” 두조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쿤은 슬몃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노역장의 음식이 그렇게나 형편이 없나?” “평민들도 고기는 먹기 어렵다는데 하물며 역노들이야 뭐...... 희멀건 옥수수 죽이 다니까요. 일주일에 한번 고깃국이라고 나오긴 하는데 위에 기름기가 조금 떠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 차이가 없어요. 탈수 증상 일으키지 말라고 소금만 진탕 넣어서 짜기는 얼마나 짠지. 그걸 먹고 목이 타도 물도 깨끗하지 못하니까 이래저래 고역이죠. 사실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해요.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흐음.” 말하다보니 두조는 눈앞에 앉아있는 것이 황제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떠들었다. “사실 피라밋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사람을 고생 시키는가 몰라요. 뭐, 수천 년쯤 흐르면 근사한 유적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아무 쓸모가 없는데 말이에요. 피라밋 지을 그 노동력과 기술력으로 좀 건설적인 일을 하면 좋을 텐데.” 쿤은 발끈해서 소리쳤다. “피라밋은 황제의 영혼이 죽고 나면 돌아가야 할 사후 세계야! 당연히 중요하지.” “중요하다면 그 피라밋을 짓는 사람들도 중요하게 대우해줘야죠! 전 기본적으로 사후세계 같은 거 안 믿어요. 죽고 나면 그게 다 뭔 소용이람. 살아있을 때처럼 맛있는 거 먹지도 못하고 시원함도 느끼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하는데...... 설령 정말 영혼이 있다 치더라도 육체가 없으니 살아있을 때만큼은 못 느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호화스러운 무덤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사제들이 들었다면 거품을 물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구나.” 두조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전 무식한 노예니까요. 그들이 노예가 하는 말에 신경이나 쓸까요?” “그 말도 맞군.” 쿤은 ‘그래, 이런 무식한 놈이 뭘 알고 저렇게 떠드는 거겠어. 일일이 신경 쓰는게 웃기지.’ 하고 울컥하던 것을 내리눌렀다. 피라밋은 그가 죽어서 갈 곳이다.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호화롭고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 노예들이야 사오든 만들어내든 얼마든지 충당 가능한 것이고, 그것의 인권이나 생명, 소중함 따위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쿤은 새삼 눈앞에 앉아서 맹렬히 먹고 맹랑하게 떠드는 이 놈 역시 노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벌레 그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던 노예라는 사실을...... 뭔가 기분이 묘했다. 불쾌하다기 보다는, 전혀 의외의,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더 이상 못 먹겠다 싶을 정도로 배를 채운 두조는, 숨을 몰아쉬면서 음료수로 입가심을 하다가 테살이 갖고 왔었던 초콜렛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테살이 갖고 온 것과는 모양이 조금 틀렸지만, 시큼한 과일에 초콜렛을 입힌 그 과자가 맞았다. 두조는 냉큼 집어 먹어보고는, 역시 초콜렛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폐하, 이거 드셔보셨어요?” “...그 시커먼 것 말이냐?” 초콜렛은 황궁에 들어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에 칸칸이 초콜렛을 한번 먹어보고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해 황궁에 납품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쿤은 시에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초콜렛을 싫어했으며, 염소 똥처럼 시커멓고 댕글댕글하게 생겼기에 별로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토핑 안에 들어있는 과일은 시큼해서 쿤이 썩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먹을 이유가 없다. 쿤이 고개를 가로젓자, 두조는 호들갑을 떨며 초콜렛을 집어든 손가락을 그에게로 쑥 내밀었다. “이거 정말 정말 맛있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난 됐어.” “진짜 맛있다니까요!” “됐다니까.” “진짜 맛있어요! 절대 후회 안 해요. 드셔보세요.” “됐다지 않느냐!” 쿤은 왈칵 성질을 내며 두조의 손을 후려쳤다. 초콜렛이 식탁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두조가 어... 하는 표정으로 떨어진 초콜렛을 바라보다가, 곧장 상처 입은 표정이 되어버려 쿤은 뜨끔했다. 두조는 시무룩한 얼굴로, 하지만 삐친 것이 틀림없는 부루퉁한 어조로 말했다. “정 싫으시면 말고요.” “......싫다는데 왜 억지로 권하고 난리야?!” “억지로 권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소리친 두조는 ‘그러는 자기는 만날 억지로 덮치면서... ’ 하고 혼자 궁시렁댔다. 하지만 귀 밝은 쿤은 그 소리를 듣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억지로 덮치긴 누가 덮쳐! 매번 미수로 그쳤지 성공한 적도 없잖아!” 두조도 지지 않았다. “어제도 말입니다! 그렇게 다짜고짜 와서는 남의 위에다가 제멋대로 그런 걸 뿌려놓고 가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거, 유혹하는 거보다 더 질이 나빠요! 남은 나는 혼자 어떻게 하라고요?” 쿤은 얼굴을 확 붉혔다. 두조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쿤이... 부끄러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정말 의외의 모습이다. “어, 어, 어차피 넌 아무것도 못 느끼잖아! 이게... 새, 생각해서 혼자 하고 말았더니......”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는 쿤을 보고 두조는 덩달아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수줍어하는 그의 얼굴에 어젯밤의 음란한 모습이 오버랩 되자 야릇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까지 부끄러워지면서 온 몸이 다 화끈거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한동안 둘 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참지 못한 쿤이 초콜렛 하나를 덥석 집어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했다. “머, 먹으면 될 거 아냐 먹으면.........” “억지로 먹을 필요까진 없는데......” “억지로 아냐. 내가 왜 네놈의 권유 때문에 억지로 먹는단 거냐?” 앞뒤 말 안 맞는 소리를 하던 쿤은, 미간을 찌푸리고 초콜렛을 씹다가 의외라는 듯 점점 표정을 폈다. 하나를 더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보던 쿤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맛이 괜찮구나.” 두조는 그 말에 활짝 웃었다. “맛있죠? 그렇죠? 제가 설마 폐하께 맛없는 걸 드리면서 맛있겠다고 하겠어요? 아! 아까 먹어보니까 이 쿠키도 굉장히 맛있더라고요. 이것도 드세요. 이것도 맛있었고, 이것도, 이것도요.” 신이 나서 외치는 두조를 보고 쿤은 피식 웃었다. “넌 뭐든 다 맛있는게 아니냐?” 두조는 쿤에게로 그릇들을 내밀던 움직임을 멈추고는, 계면쩍음에 뒤통수를 긁으면서 말했다. “......그런가... 그렇지만 정말, 그런 노역장에 사흘만 있어보세요! 뭔들 안 맛있나...... 입맛 없을 때 극약처방으로 적극 추천입니다.” 쿤은 문득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곧, 시원스러운 웃음이 거처 안팎으로 퍼져 나갔다. 응접실 바깥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시종도, 쿤 칸칸의 잠자리를 치우고 있던 시녀도, 오늘밤 두조가 황제폐하의 침소에 갈지도 모르겠다고 언질을 주러 들린 시롭도 그 웃음소리를 들었다. 쿤의 서재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바레사도 쿤의 웃음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 응접실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곤란한데.........” “식사를 하고 나니까 또 졸립군. 모처럼 한가해서 말이야.” “아... 그럼 그동안 못 들리셨던 것이, 바쁘셨기 때문입니까?” 물론 쿤이 두조를 찾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일엔 정무를 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이 나라의 황제인 내가 한가할 줄 알았어? 오늘이 신의 날이니까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는 거지 평일이었다면 어림도 없어. 신의 날에도 보통 야유회니 연회니 빙자한 행사 때문에 바쁜데 오늘은 여유가 있는 것뿐이야.” 일요일이라는 거구나, 하고 두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곳에서도 일주일은 칠일로 나뉘어져 있어 신의 날이라 불리는 칠일 째에는 노예를 빼고 모두가 쉰다. 보통은 신전에 나가 공양을 하고 설탕을 넣은 빵을 구워 먹는다. “그렇군요... 그럼 모처럼 쉬는 날인데 낮잠이라도 한숨 주무십시오. 저는 이만 별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왜? 별궁에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주제에 네가 바쁜 일이 뭐가 있다고 건방지게 돌아가느니 마느니......” 두조는 밥 먹으면 잽싸게 꺼지라던 바레사의 말도 있고 해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가 쿤의 눈총만 진탕 받고 말았다. “감히 내가 물러가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어딜 돌아가? 밥 다 먹었으니 볼일은 끝났다 이거지?”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나랑 같이 있기 싫다 이거냐? 서로를 알아가자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발뺌을 하려 해? 네놈을 반하게 만들어 보라며!” “그럼 뭘 하실 겁니까?” “데이트 하자구 데이트! 밥은 먹었으니 이제 뭘 하면 되나! 차 마시면 되나?” 분위기는 쥐뿔도 없는데 데이트는 무슨...... “아뇨, 됐습니다.” 하고 두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쿤은 인상을 잔뜩 썼다. “그럼 황궁 구경이라도 시켜주리?” “네?” “내도록 별궁에만 처박혀 있으니 답답하지 않느냐? 시장도 좋지만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이 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고 근사한건 이 궁전이니까.” 그치만 별궁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시롭이 경고했다. 나가는 이상 불순한 목적을 가진 이들이 개떼처럼 몰려들 거라고... 게다가 노예인 자신이 궁전 안을 멋대로 돌아다녔다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라도 하면 안 되기에 그 말을 충실히 지켜왔다. 두조가 머뭇거리자 쿤이 대번에 눈썹을 치켜 올라갔다. “왜?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아뇨, 황궁 구경은 저도 하고 싶습니다만... 폐하께선 상관없으신 겁니까?” “뭐가 말이냐?” “제가 노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를 총애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고 계신데, 저와 같이 황궁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난처하지 않으신가 하고.” 쿤은 콧방귀를 패앵 거창하게 뀌었다. “네가 노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으면 그 시건방진 행동부터 고쳐라! 내 앞에선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도 까먹고 천지 모르고 까부는 주제에 별 웃기는 걱정을 새삼...... 이 나라의 황제인 내가 누구와 뭔 일을 하든 난처할 게 뭐가 있어! 가만히 생각하니까 참으로 괘씸하군. 내 앞에서는 노예인 것이 자각되지 않으면서 남들 앞에선 노예인게 자각이 되느냐? 그만큼 날 깔보고 있는 것이야?” 두조는 필사적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만?” 두조는 뒤통수를 긁었다. 쿤이 하도 철이 없고 제멋대로 굴기 일쑤라서 자신을 무섭게 때릴 때가 아니면 황제라는 사실을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다, 그냥 조카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간 경을 칠게 뻔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것은 두조가 쿤을 그만큼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두조는 어떻게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깔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확실히 폐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말이 시건방지고 불쾌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그만큼 폐하께선 제게 가까워지신 겁니다.” “뭐?” “전 이 나라에 와서 고생만 했습니다. 원래 노예 신분이 아닌데 말을 몰라서 노예가 되었고, 덩치가 좋다고 노역장으로 팔려가서 죽자고 일만 했지요. 그 와중에 누군가와 대화하고 친하게 지내는 일 따윈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폐하께서 저를 데리고 와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공사장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래서 전 폐하께서 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때리고 구박하셨어도 원망스럽지 않았어요.” “그게 어째서 말도 안 되는 이유야! 이 나를 거부하다니 쳐 죽어도 시원치 않을 죄였다!” “제, 제겐 그랬다고요...... 전 남자와 남자가 그... 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몰랐는걸요. 아무튼 이곳에서 제대로 된 대화란 걸 하고 이만큼 가까워진 것은 폐하나 시롭이 처음이에요. 제가 노예라는 사실을 못 느끼는 건 제 탓만은 아닙니다. 그만큼 저를 친근하게 대하는 폐하의 태도 탓도 있어요. 사실 어느 노예가 감히 폐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하겠습니까?” 정말 노예답지 않은 두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쿤은 갖은 방법으로 모욕을 안겨주고 굴종을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보다는 도리어 바닥에 엎드려 노예의 도리를 하는 그를 볼썽사납다 여기지 않았는가. 그것이야말로 쿤이 두조를 단순히 노예나 아랫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대한다는 증거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두조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말았다. 쿤은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떨었다. “흥, 그래. 노예라면 이 몸의 발끝조차 바라볼 수 없는게 당연하지. 네놈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있는지 알겠느냐? 좀 고마워 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더 고마워하란 말이야! 어쩔 줄 몰라 해야지, 그게 고마워하는 거냐?” 쿤은 연신 툴툴거렸지만 두조는 어렴풋이 그게 쑥스러움을 만회하기 위한 행동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데다가 뻔뻔스러운 성격이라 부끄러움 같은 것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그는 생각 외로 솔직하고, 소탈하며, 순진하고 수줍었다. 황제라는 입장과 떠받들려지는 환경, 본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허영과 자존심에 대한 허세 때문에 그런 모습들이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두조가 계속 싱긋이 웃고 있자, 쿤은 미미하게 붉어진 콧대를 애써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마음이 넓고 자애로운지 이제 깨달았다면, 어떠냐. 지금쯤 나에게 반하지 않았어?” 두조는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네에, 절반쯤은 넘어간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직 절반뿐이냐!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두조는 웃음을 갈무리하면서 쿤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끌었다. 쿤은 막 사람을 따르기 시작한 새끼고양이처럼 흠칫흠칫 놀라면서도 두조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황궁 구경 시켜주신다면, 더 넘어갈 것 같은데요?” “가자고 할 때 냉큼 따라올 것이지...” 쿤은 조심스럽게 두조의 손에서 손을 비틀어 빼며 자연스럽게 앞장을 섰다. 붙잡혔던 손이 불에 덴 듯 뜨거워 마구 문지르고 싶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쿤은 두조가 다시 손을 잡아오지 않는 것에 섭섭함을 느꼈다. 아니, 상상해보니까 황제와 노예가 나란히 손을 잡고 황궁을 걸어 다니는 건 너무 웃기다. 말이 안 되는 광경이야. 저 놈이 아무 때나 내 손을 덥석덥석 잡는 것에 주의를 줘야지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거처를 나서자, 양산과 부채를 든 시종이 곧장 쿤 칸칸을 따라붙었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가마를 대령하오리까?” “아니, 됐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들었다. “폐하.” 서재에 있었던 바레사였다. 두조는 그를 보자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바레사는 그에게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쿤을 보고 허리를 숙였다. “나가시는 겁니까? 곧 날이 뜨거워질 텐데요. 내일 의회에 나가시려면 대충이라도 훑어볼 안건도 여럿 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저녁에 보면 돼. 이놈을 데리고 잠시 황궁을 거닐다 오겠다.” “......저 노예를 데리고 말입니까?” 바레사는 ‘노예’ 라는 말을 강조했지만 쿤은 모른 척 했다. “그래.” “......걷고 싶으시다면 햇빛 가리개와 음료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됐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붙어 오는 것은 귀찮다. 황궁 안인데 위험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녀오마.” “하지만......” 쿤은 찌리릿 바레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요즘 자꾸 내 말에 꼬리를 다는구나.” “송구합니다.” “가자.” 쿤은 파리 쫓듯 손을 내저어 바레사와 시종들을 물리치고는, 자신이 머무르는 궁전을 나와 내궁의 정원을 향했다. 두조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니 바레사가 마뜩찮은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우려가 무엇인지 두조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황제의 거처와 내궁의 다른 건물들을 나누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곳의 정원에는 나무도, 잔디도 없다. 연못과 수련이 그것들을 대신하고 있다. 아주 독특한 분위기의 특이한 정원이었다. 키가 낮고 자그마한 연꽃에서부터, 숲을 이루듯 크고 화려한 수련들까지. 우산대용으로 써도 될 듯 크게 차양을 드리운 연잎들도 있었다. 수련의 숲 사이로, 혹은 그 위로 돌다리들이 길을 놓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꽃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하던 두조는 불쑥 말했다. “이 연꽃들, 폐하와 닮았어요.” “뭐?” “크고 화려하고 생명력 넘치면서 오만한 모습이... 닮았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내 이름인 쿤은 연꽃을 뜻하는 신성어에서 따왔다. 연꽃은 고대부터 왕에게 바쳐진 식물이야. 신이 왕에게 내렸고 백성들이 길러 바치는 꽃이지. 백성이 죽으면 곡물로 공양하는데 왕이 죽으면 연꽃으로 공양을 한다. 바로 이 정원에서 기른 연꽃들로 말이야. 그땐 신전에 연꽃들이 넘쳐나지.” “그렇군요...” “네 이름은 뭐지?” 두조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까지 제 이름도 모르십니까?” 쿤은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듣긴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군. 내 주변에 있는 노예놈이라곤 너밖에 없는데 굳이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없었잖아. 내가 왜 하찮은 네놈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냐?” 이러고서는 어떻게 자신을 반하게 만들겠다는 건지! 아까까지 쿤에게 품어왔던 친근하고 좋은 마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두조는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말했다. “김두조입니다.” “괴상한 이름이야.” “그냥 두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제 고향에서는 성이 앞에 붙거든요.” “그냥 발음이나 글자가 괴상하다는게 아니야. 네 이름이 신성어로 뭘 뜻하는지 아느냐?” 두조가 고개를 가로젓자 쿤은 네가 알 리가 없지, 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더니 엣헴, 하고 말했다. “두-뎃세아, 두는 밤을 뜻한다. 밤은 밤인데 달조차 뜨지 않는 검은 밤을 말하지. 죽음의 신이 그 이름을 써.” “에에? 죽음의 신이요?” “그리고 조-카말파의 조는 우기와 범람이 끝난 뒤의 태양을 뜻해. 마침내 비가 그치고 한해의 가장 풍요로운 시절의 시작을 알림이지. 곡물을 키우고 진흙을 말리는 그런 태양빛이야. 즉 네 이름은 전혀 상반되는 신성어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어. 보통은 서로 어울리는 것들끼리 붙여서 이름을 짓곤 하는데 네 이름은 전혀 다른 것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괴상하다는 거야. 뭐, 황족이 아니라면 신성어로 이름을 지을 일도 없지만... 전혀 상반된 뜻을 가진 말을 합쳐서 이름을 짓는 아이들은 아주 극소수지.” “따로 그런 이름을 짓는 아이들이 있나요?” “그래.” 쿤은 두조를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한 해에서 다음 해로 넘어가는, 어느 해에도 속하지 않는 날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 그런 아이들은 저승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해. 왕이 죽으면 생전에 한 일들에 대해서 시험에 들게 된다고 한다. 영원한 안식과 불멸의 왕국으로 가기 위해선 무사히 저승에 들어야만 하지. 그럴 때 그런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왕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를 해준다.” 아~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조는 곧 이어진 모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왕이 죽으면 그런 아이들을 순장한다.” “순장요?” “죽여서 같이 묻는다 이 말이야. 왕의 저승길을 인도할 수 있도록.”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두조는 금방 새하얗게 질렸다. 쿤은 그런 두조의 얼굴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느 해에도 속하지 않는 날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아주 드물어. 그 날에 태어난 아이가 없으면 왕의 미라를 안치하지 않고 장례식을 미뤘다가 아이가 태어난 후에야 장례식을 치른다.” “그럼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는 거잖아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 그럼 나도......” “내가 죽으면 같이 묻히게 될 가능성이 높지. 더군다나 넌 내가 총애하던 몸이었으니까 가장 먼저 미라가 될 거야.” 끄악. 피라밋 같은걸 만드느라 사람을 죽자고 고생시키는 곳이니 그런 악습도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미개한 풍습이라니 머리가 쩔레쩔레 흔들렸다. 두조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부디 만수무강하셔서 저보다 훨씬 더 오래 사셔야 합니다.” 쿤은 놀리 듯 말했다. “글쎄다? 칸칸은 요절하기로 유명한데.” “그게 다 근친상간 때문에 그렇잖아요!” 두조는 그렇게 꽥 외치고는 그게 어째서 근친상간 때문이냐고 묻는 쿤에게 유전자니 유전병이니 설명하려다가 스스로의 짧은 어휘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좌절했다. 쿤이 머무르는 궁전과 두조가 머무르고 있는 별궁은 그 규모가 작고 소박하지만 내궁에서도 고립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을 지나 내궁의 중심부로 다가가니 황후전과 후궁전, 쿠칸들의 거처와 귀족들의 거처를 비롯하여 크고 멋진 건물들이 열주가 늘어선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었다. 붉은 돌들로 만들어진 건물은 유럽이나 지중해의 어느 곳과도 분위기가 틀렸다. 굳이 말하자면 무굴제국이나 페르시아와 비슷한 분위기지만 그보다 훨씬 단조로우면서도 장엄했다. 일단 이게 지금 기술로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포석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깔린 광장만 해도 축구경기장 두 개는 들어갈 것 같다.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 만해도 노가다이리라. 시간은 아침을 지나 정오를 달리고 있었기에 태양빛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고, 두조는 광장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 쿤을 보고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괜히 구경 나오자고 했나. 쿤 역시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이렇게 넓었나. 그가 걸어서 다니는 곳 이래봤자 자신의 처소 근처였고, 정무를 보러 외궁에 나갈 때나 설령 볼일이 있어 내궁에 간다고는 해도 늘 가마를 이용했다. 지금이라도 가마를 대령하라고 할까... 싶었지만 자신은 가마를 탄다 치더라도 노예인 두조를 황제와 같이 가마에 태울 수는 없었다. 황제가 가마를 타면 설령 귀족이라 하더라도 말에 타거나 걸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만 가마를 타고 두조를 걷게 하는 건 같이 나온 의미가 없는 것 같고...... 그때 마치 여기 와보세요~ 하고 쿤을 부르듯 와와 하는 소란스런 함성소리가 들렸다. 쿠칸들의 처소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쿤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고, 두조도 따라갔다. 쿠칸들의 처소 앞, 모래를 깔아놓은 운동장에서 벌거벗은 젊은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속옷만 입은 청년들이 공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격렬하게 땀을 흩뿌리고 있었다. 심히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들의 탄탄한 가슴이며 탱탱한 엉덩이를 구경하다가 옆에서 빤히 느껴지는 두조의 시선에 얼른 침을 닦았다. 그늘에 서 있던 그들을 발견한건, 그 젊은이들 속에 섞여서 뛰고 있던 테살이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이나 햇볕에 그을린 피부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매력적이었다. “폐하!” 쿠칸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쿤에게 일단 한번 머물렀던 시선은 곧 두조에게로 꽂혀들었다. 호기심, 의아함, 적의와 경계심, 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섞인 그들의 이글이글한 시선을 받고 있노라니 몸에 털들이 죄다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잘못 왔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테살과 쿠칸들이 무릎을 꿇으려 하자 쿤이 만류했다. “아아, 됐다. 즐겁게들 놀고 있는데 내가 방해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군.” “방해라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리 낮에 저희를 찾아주시다니 정말 기쁩니다. 게임 중이었는데, 폐하께서도 같이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거기, 별궁의 손님께서도 말입니다.” 테살이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쿠칸들 사이에 일순 술렁임이 일었다. 저게 별궁의 그 ‘손님’ 이란 말인가? 다들 이런 눈치였다. “어떠냐? 흥미 있느냐?” 예부터 ‘공’ 이라는 도구는 개와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기 딱 좋은 물건이다. 이곳에서도 공으로 하는 스포츠가 있구나 싶어서, 축구나 농구를 비롯한 구기 종목에 나름 자신이 있던 두조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테살을 힐끔 쳐다보고는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겁니까?” 대답을 한 것은 테살이었다. 그는 가죽공을 두조에게로 휙 던지며 말했다. “두 팀으로 나눠서 하는 게임인데, 팀의 지정된 선수가 그 공을 들고 라인 밖에 골인 시키면 점수를 따는 거지. 3골을 먼저 넣는 팀이 승리하는데 동점이 되면 그때까지의 점수는 무효화되지. 간단하긴 하지만 아주 거칠고 힘든 운동이야. 부상자도 심심찮게 나오는 편이고. 하지만 재미있어. 폐하께서도 한때 이 게임을 즐겨 하셨지.” 들어보니 미식축구랑 비슷한 공놀인 거 같았다. 두조는 쿤도 이런 게임을 즐긴단 말인가 싶어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쿤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사실 그는 공놀이보다는 게임을 빙자해 벌거벗은 사내들이랑 뒹구는게 더 좋았다. 무엇보다 그런 오락은 쿤이 열을 올릴 만큼 흥미롭지 못했다. 뭘 해도 손쉽게 이기기 때문이다. 쿤은 그게 자신이 잘난 탓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쿠칸들은 거친 몸싸움을 해야 하는데 진심으로 그에게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했고, 엎치락뒤치락 해봤자 쿤이 낀 팀이 결국 승리했다. 스포츠 정신이 땅을 치고 울 일이지만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며 고작 공놀이에 이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조는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하는 것 말고 이런 게임을 하면서 땀을 흘려본지도 오래되었고, 쿤도 즐기는 게임이라니 함께 뛰어도 좋을 것 같았다. 별궁에 숨어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도 아니니 이참에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재미있겠는데요.” “그래? 좋아. 그럼 같이 해보지.” 그렇지 않아도 두조 때문에 욕구불만에 쌓여있던 쿤은 알몸(이나 다름없는)의 두조와 알몸(역시 그와 다름없는)의 쿠칸들과 이런 식으로라도(?)땀을 흘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을 다소 우습게 보는 것이 틀림없는 두조에게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내 실력을 보여주지! 란 우쭐한 기분이 되어 쿤은 벨트를 풀어버리고 옷을 확 벗었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속옷차림이 되어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쿤은 마르긴 했지만 의외로 짜임새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젊은 사람치고 비만이 없다. 현대처럼 인스턴트식품을 먹는 것도 아니고 이동수단이 발달된 것도 아니고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는지라 몸을 움직일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한창때라 에너지 소비가 많은 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덕분에 쿠칸들도 전부 멋진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두조는 속으로 노역장에서 본의 아니게 군살이 빠지고 근육이 생긴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예전의 물렁물렁한 몸매였더라면 창피해서 도저히 옷을 벗지 못했을 테니까. 엉덩이가 훤히 나와서 다소 쪽팔리긴 했지만 다 남자들이고 벗고 있으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두조는 모래밭으로 내려왔다. 테살은 늘씬하고 탄탄한 두조의 몸매를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몇몇 쿠칸들의 시선이 음흉하게 변했다. 쿤 역시 햇살아래 드러난 두조의 몸매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여태껏 그의 나신을 몇 번 보긴 했지만 매번 컴컴한 어둠속에서 훔쳐봤던 것이 전부인지라 새삼 멋있었다.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쿤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리는 어느 팀에 들어가면 되지?” “폐하께선 키져의 팀에 들어가십시오. 두조 넌 우리 팀에 들어오고. 두 사람 다 한 팀으로 들어가면 인원수가 안 맞지 않습니까.” 쿤은 씩 웃으며 두조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있는 이상 안타깝지만 우리 팀이 이길 거야.” 두조 역시 씩 웃으며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골을 넣는 러너로 뽑힌 쿤과 테살이 모래밭의 한가운데 마주 섰다. 심판을 보는 쿠칸이 휘파람을 휙 불며 공을 집어던지자 쿤이 날쌘 동작으로 공을 채갔다. 그리고 곧장 다른 놈에게 패스 했다. 쿤이 패스한 공을 받아든 더티 블론드가 그걸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테살 팀의 갈색 곱슬머리가 왈칵 덮쳐들기 전에 다시 쿤에게 패스했다. 더티 블론드를 갈색 곱슬머리가 사정없이 깔아뭉갰고, 컥, 하는 신음이 울렸다. 쿤은 공을 들고 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쿤을 테살과 두조가 쫓고 있었다. 두조가 쿤을 붙잡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놓치고 말았다. 반대편으로 몸을 튼 쿤의 앞을 테살이 가로막았다. 쿤이 어깨와 머리로 사정없이 테살을 들이밀었고, 테살은 윽 소리를 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쿤이 라인 너머로 공을 안고 뛰어 들어갔고, 휘파람 소리와 함께 쿤의 팀이 1점을 올렸다. 쿤이 키져와 하이파이브를 쳤고, 쿠칸들이 전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쿤의 득점을 축하했다. 심지어는 테살과 테살의 팀마저도 그리하여 두조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다. 보통은 분해할 텐데. 스포츠 정신이 뛰어나서 그런가. 하지만 아까 쿤이 테살을 밀어붙였을 때 충분히 버틸 수 있음에도 그냥 나동그라진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혹시 쿤이 황제라서 일부러 져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은 쿤이 공만 잡았다 하면 일방적으로 흘러가버리는 게임의 분위기에 확신으로 굳어졌다. 쿤이 또 1점을 넣었고, 의기양양해하는 그에게 쿠칸들이 박수를 보냈다. 두조는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이게 무슨 웃기는 짓인지, 고작 게임일 뿐인데! 쿤의 성격이 저렇게나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이고 철딱서니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었다. 주변에서 이렇게나 그의 비위를 맞춰주지 못해 안달이니...... 엄마 치마폭에 싸인 아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두조는 심히 불쾌해졌다. 네놈들이 이렇게 치사한 방법으로 싸고도니까, 쿤이 마약 같은 것을 하는 거라고! 세 번째 세트가 시작되고, 또다시 쿤이 공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건장한 남자들이 쿤만 앞에 오면 쭉정이처럼 넘어지거나 엎어졌다. 그냥 이기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두조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리고 몸을 날려 쿤의 허리를 콱 잡았다. “억?” 쿤이 모래밭에 넘어지며 공을 놓쳤고, 그것을 테살이 주워들었다. 눈을 뎅그랗게 뜬 테살을 보고 두조는 윽박질렀다. “달리지 않고 뭐해?!” 그 말에 스위치라도 켜진 듯 테살은 반대편 골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공을 잡자 쿤의 팀에 속한 쿠칸들이 기를 쓰고 쫓아가기 시작했다. 곧 테살의 위로 세 명의 남자들이 덤벼들었고, 테살은 짜부러진 개구리처럼 비명소리를 내며 공을 던졌다. 공을 빼앗기 위해 난투극에 가까운 난리가 벌어졌다. 한편, 모래밭에 얼굴을 처박는 바람에 모래를 가득 씹은 쿤은 에퉤퉤 그것들을 뱉어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조에게 고개를 홱 돌리고는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두조는 공을 차지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난리법석 속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게임이지 않습니까. 어라, 설마 게임인데 태클 좀 받았다고 화내시는 겁니까?” 쿤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두조가 피식 웃자 그 와중에도 쿤의 심장이 크게 뛰어 올랐다. 잘 구운 빵처럼 고루 그을린 나체 위를 흘러내리는 땀이 핥고 싶을 만큼 섹시했다. 노역장에서 노예감독의 귀를 물어뜯고 피를 뱉어내던, 한눈에 쿤을 사로잡은 그 사내다움과 야성미가 풀풀 풍겼다. 평소엔 맹하니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던 그가 도리어 그렇게 빈정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더 그랬다. “실력을 보여주신다더니, 지금 보니 별 것 아니군요. 하긴, 다들 봐주면서 하는 게임에 실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쿤은 혀로 입안에서 모래를 골라 바닥에 뱉어내며 으르렁거렸다. “봐준다고?” 두조는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쿤은 이를 갈며 두조를 밀치고 난장판 속에 끼어들었다. 쿤은 정신없이 밀치고 깔아뭉개고 두들기던 손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나자 슬그머니 물러나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느꼈다. 두조가 지적해주기 전까진 자각하지 못했다. 팀플레이기에 자신 때문에 이기는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 게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러너 자리를 그에게 내주는 것도 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쿠칸들은 그가 황제이기에 러너자리를 양보하고 승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쿤의 실력이 아주 형편없는 것도 아니었고, 테살과 쿠칸들이 요령 좋게 그의 비위를 맞춘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으스대었던 것이 한심했고, 자신을 우롱한 쿠칸들에게 화가 났다. 거식과 거짓을 싫어하는 성격을 잘 알면서 꼬장꼬장한 노인네 비위맞춰주듯 굴다니... 자존심이 금이 가는 소리가 쩌저적하고 들렸다. 손쉽게 품안에 들어온 공을 바닥에 내팽겨 치며 쿤은 소리를 꽥 질렀다. “이 놈들이! 감히 나를 우습게 봐?” 테살이 두조가 뭔 소릴 했구나 싶어서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쿤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테살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날 봐주거나 손쉽게 대한다는 느낌이 들면, 당장 네놈들의 목을 잘라버리겠다. 죽고 싶지 않으면 진심으로 해!” 다시 공을 주워들고 키져에게 패스했다. 쿠칸들은 멈칫거리면서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망설이는 쿠칸들을 대신해 두조가 쿤을 적극적으로 마크하기 시작했다. 힘을 빼지 않고 매달리고, 사정을 봐주지 않고 깔아뭉갰다. 테살까지 그에 합세하여 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자, 다른 쿠칸들도 점차 쿤이 황제라는 사실을 잊기 시작했다. 게임이 격렬해지면 격렬해질수록, 몸싸움이 거칠어지면 거칠어질수록, 날아다니는 공에 몰두하여 상대를 잊었다. 그들은 전부 달랑 샅만을 가린 속옷차림이었고 너나 할 것 없이 땀투성이였다. 땀 때문에 상대를 붙잡는 손이 미끄러지고, 온 몸에 까슬까슬한 모래가 달라붙고 푹 젖은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다. 쿤은 죽자고 달렸다. 전엔 이 게임이 이렇게 힘든 게임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모래밭이었기 때문에 발이 푹푹 빠졌으며 그늘이 아니라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테살이 동점으로 2골을 넣어 게임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온 몸의 근육이 뜨끈하게 달아올라 흐물흐물 풀어졌다. 가볍던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며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기운이 쭉쭉 빠졌다. 그런 상태가 된 것은 쿤만이 아니었다. 노역장에서 죽자고 일하던 두조도 지치긴 마찬가지였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자 도저히 게임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이윽고는 모두가 지쳐버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고 비틀거리며 모래밭 위를 기듯이 움직이다가, 완전히 뻗어버리고 말았다. “이얏호!” “크와앗! 시원하다!” 물소 떼가 강을 건너듯 쿠칸들은 일제히 물속으로 돌진했다. 땀냄새를 풀풀 풍겨대는 사내들은 시체처럼 늘어져 있을 때는 언제고 금방 팔팔해져서 물장구를 쳐댔다. 땀을 있는 대로 흘리고 꾸역꾸역 몰려든 쿠칸들로 인해 쿠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커다란 욕탕은 금방 사람 반 물 반이 되었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지고, 그들은 태연하게 불알을 드러낸 채 땀을 씻어 내렸다. 검게 그을리거나 붉게 달아오른 피부위로 찬물이 쏟아지자 후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귀족가의 자제들이라지만 물장난을 치고 서로의 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는 모습이 강가에 몰려나온 소년들과 아무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 사이엔 황제 쿤 칸칸도 끼어 있었다. 보통 때라면 새침을 떨며 혼자 우아하게 욕탕을 사용하거나 게임을 빙자한 성희롱을 하며 눈여겨 봐뒀던 쿠칸을 끌고 침대위로 갔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여력도 없었다. 부끄러움도 잊고 알몸이 되어 그저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에 바빴다. 모래와 먼지가 꺼끌꺼끌한 입안을 헹궈내며 쿤은 녹진녹진 해진 근육을 주물렀다. 고작 공놀이 따윌 하며 이렇게 미친듯이 몸을 움직이다니. 누군가에게 얻어맞았을지 모를 광대뼈가 욱신거렸고 채인 허리며 허벅지가 아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쾌했다. 쿤은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쿤에게 테살이 물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쿤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괜찮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네 아래 깔리는 걸 좋아한다고는 해도 나 역시 달릴 거 다 달린 사내이다! 날 우습게 보는 것도 작작 해라.” “하하, 죄송합니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사과하는 테살에게 쿤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딱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충격이었다. 테살, 머리 굳은 나이 많은 대신들도 아니고,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네놈들이 고작 그런 게임하나에 내 눈치를 보다니. 내가 황제인 것은 사실이니까, 나를 황제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런 게임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침대위에서만큼은 폐하가 황제임을 생각할 필요가 없듯이 말입니까?” “뭐냐, 그 말은. 침대 밖에서의 나는 항상 내가 황제임을 강조해왔다는 소리냐?” “강조해왔다기 보다는......” 테살은 어깨를 들썩이곤 말을 이었다. “침대위에서도 폐하께서 황제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침대 밖에서 폐하를 편히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폐하께선 황제시기에, 황제일 수밖에 없으십니다. 그러니 어찌 저희들이 폐하의 심기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호감을 사고 싶은 상대의 앞에서도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그것이 황제폐하의 앞임에야...... 너무 원망하지 마시옵소서.” 쿤은 테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황제다. 그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게 당연하니까. 아무리 자신이 거짓말과 의뭉 떠는 짓을 싫어한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흉한 마음으로 뒷 수작을 부리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누구나 자신을 옆집 총각 대하듯 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저 놈 때문인가......” 쿤은 정신없이 머리를 씻고 있는 두조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 놈은 아주 손쉽게, 자신을 황제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주 가벼운 접촉, 사소한 말 한마디, 거리낌 없는 행동 하나로 황제의 모습을 걷어버리고 제멋대로에 성 잘 내고 자존심만 강한 쿤을 꺼내놓는 것이다. 만일 쿠칸들이 봐주면서 게임을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심 눈치 채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실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두조가 긁지만 않았어도 무의식중에 나는 황제니까 이기는게 당연하지, 하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이기 이전에 사내이고, 사람이니까 당연하지 않다. 누구나가 황제이기에 그를 봐준다면, 황제여도 봐주지 않는 무언가를 만났을 땐 어쩔 것인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황제이기에 도와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거라면... 황제가 아닌 자신의 곁엔 뭐가 있겠는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아니, 단 한 가지. 두조만은, 자신이 황제든 아니든 간에 지금과 똑같을 것 같았다. 테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어째서 폐하께서 저 놈이 아니면 안 된다 하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 놈은 그저 뭘 모르기 때문에 저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천한 노예니까요. 끝끝내 그가 폐하께서 황제라는 사실을 모른 척 하고 굴복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으실 수 있겠습니까?” 머리를 다 감고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조를 바라보며 쿤은 테살의 말을 곱씹었다. 그는 벌써 한번 그랬다. ‘황제라도 남자라서 안 됩니다.’ 라고. 또다시 그렇게 거부당하고도 자신은... 황제라도 소용없는 그를 살려둘 수 있을까. 모르겠다. 쿤은 문득 물벼락을 맞고는 인상을 썼다. 더티 블론드, 에메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쿠칸이 키져에게 물을 끼얹는데 정신이 팔려 쿤에게 물이 튀겨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쿤은 물밑으로 에메힌에게 다리를 걸었다. 에메힌이 물속으로 자빠지자 키져가 “잘하셨습니다!” 를 외치며 곧장 그에게로 달려들었고, 물속을 엉금엉금 기어 도망친 에메힌이 자신의 다리를 건 쿤의 다리를 잡아 물속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을 잡아주려다가 두조가 같이 넘어졌고, 두조의 머리를 테살이 누르고 놓아주지 않았다. 욕탕에서 2차전이 이루어졌다. 누구에게 끼얹어지는지 모를 물을 정신없이 튀기고 퍼 올리며 욕탕의 물이 바닥나도록 사내들은 뒤엉켰다. 큰 고함소리와 웃음소리가 물 대신 욕탕을 가득 메웠다. 차양이 길게 만들어준 그늘에 나체로 드러누운 쿠칸들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몸에 묻은 물기를 말렸다. 서로를 베개 삼아 낮잠을 자거나,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쿠칸들 사이에 앉아있던 두조는 자신에게 기대있던 쿤의 머리가 꾸벅거리는 것을 보고 몸을 뒤로 빼 그를 눕혔다. 허벅지를 내주자 쿤은 금방 입을 벌리고 알몸을 펼친 채 푸하 푸하 잠이 들었다. 어린애같은 모습에 두조는 킥킥 웃다가, 그의 다리 사이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얼른 위로 올렸다. 색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이었지만 두조는 자꾸만 생각나려는 지난밤의 일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공중목욕탕과 다름없이 전부 홀딱 벗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물건을 세웠다간 그것만큼 꼴사나운 것이 따로 없다. 머릿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음흉한 생각을 지우려는데 두조의 곁으로 에메힌과 키져가 다가앉았다. 에메힌은 더티 블론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아직은 어려보이는 소년이었고 키져는 갈색의 긴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선이 가는 미남이었다. 그들은 두조에게 음료수를 권하며 말했다. “이름이... 두조라고 했나?” 두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난 에메힌, 이쪽은 키져. 외국인인 것 같은데... 어디서 왔어?” “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아주 먼 곳에서 왔습니다.” “황궁에 이국의 방문자가 왔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폐하와는 어떻게 만난거지?” 피라밋 공사장에서 만났다고 대답해야 하나, 어쩌지 하고 고민하는 두조의 말을 가로막으며 테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는 전 세계를 오가며 진귀한 보물들을 수집하고 또 되파는 대 상인의 아들이야. 폐하께서 피라밋을 만들기 위해 꺼낸 보물을 사들이기 위해 이 나라를 방문했던 것이지. 다른 상인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은밀히 말이야. 그렇지?” 순순히 그렇다고 해라, 라고 말하는 듯한 테살의 눈빛을 보고 두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폐하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겠지. 전부가 귀족가의 자제들인데 노예라고 솔직하게 밝혀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두조를 보고 한눈에 반한 폐하께서 그를 이곳에 붙들어둔 거야. 보다시피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유순해보이면서도 사내다운 얼굴이 매력적이지 않는가? 폐하의 것이 아니라면 한번쯤 흑심을 품어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두조는 낯 뜨거운 테살의 칭찬에 얼굴을 화끈 붉혔다. 한 술 더 떠서 에메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별궁의 손님이 기가 막힌 미남이라 폐하께서 정신을 못 차린다 하시더니...” “이제 테살의 천하도 간 건가? 폐하의 총애를 빼앗겨서 어떻게 하냐, 테살.” 키져가 그렇게 농을 던지자 테살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던지며 말했다. “뭐, 폐하께선 변덕이 심하시니 좀 더 기술을 갈고 닦으면 다시 날 찾아주시지 않겠나? 언제 폐하께서 한 남자에게 만족하실 수 있는 분이시던가?” “그건 그래, 하하하! 두조, 폐하께서 자넬 두고 우리를 찾더라도 너무 원망하지 마시게. 정 원망스러우면 셋은 어떠냐고 폐하께 제의해봐.” 셋은 어떠냐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말에 두조는 쿤의 실질적인 첩이라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침대위에서의 총애를 밖에까지 끌어내지 않는 쿤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남자들이라서 그런지 투기와는 거리가 먼 화기애애하기까지 한 분위기였지만... 아까 쿠칸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 긴장했던 이유는, 자신이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두조는 외려 자신이 그들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 자들이 전부 쿤과 뒹군 적 있는 놈들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분이 묘해진 것이다. 헐벗은 그들의 몸이 쿤과 엉켜있는 상상이 들자 불쾌감이랄까 찝찝함이랄까, 그런게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여자 쪽이라면 태연할 수 있을까? 허나 남자와 엉켜있는 쿤은 상상할 수 있어도 여자와 엉켜있는 쿤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상상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더 기분 나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인지... 드디어 호모의 사고방식에 물든 건가! 혼자 인상을 폈다 찡그렸다 하는데 키져가 그의 어깨에 팔을 척하니 두르며 말했다. “게임하는 것 보니까, 제법 사내답던데? 이렇게 알몸으로 뒹굴게 된 인연이니, 저녁까지 놀다가 가라! 오늘 게임에서 진 쪽이 술을 사기로 했었거든. 거하니 한판 벌릴 예정이야. 폐하와 함께 있으면 좋겠지만, 혼자라도 상관없어.” “이제 거리낄 것 없이 언제든지 놀러와! 우리는 폐하의 질투가 겁나서 별궁에 드나들지 못하지만, 자네는 다르잖아?” 왁자하게 웃음이 터지자, 소란에 깨었는지 쿤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질투는 누가 질투 따윌......” 그러자 테살이 냉큼 말했다. “어라, 질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별궁에 꼭꼭 숨겨두기에 저희는 그가 다른 남자와 얼굴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쿤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앉고는 소리쳤다. “전혀 그렇지 않아! 뭣 모르는 이놈이 처신을 제대로 못하고 사고칠게 걱정 되서 그런 것뿐이야!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이니까.” “그럼 이제 별궁의 출입금지령은 풀리는 것입니까? 사실, 저희 쿠칸들이 아니라면 별궁에 멋대로 드나들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두조 혼자 지내기도 심심할 테니 출입 금지령은 그만 풀어주시지요? 아, 혹시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기 싫어서 그러시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시끄러워! 멋대로들 해라! 네놈들과 같이 놀았더니 피곤해 죽겠다. 이만 처소로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어.” 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테살이 옷을 집어 그에게 둘러주며 말했다. “그럼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두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하고 묻자 쿤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됐다, 새로 사귄 놈들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는 주제에......” “두조 너는 이곳의 길도 잘 모르지 않느냐. 내가 모셔다 드리지.” 쿤은 테살과 함께 사라졌다. 쿤도 없이 쿠칸들과 함께 있는게 좀 불안하긴 했지만 키져가 하는 말에 들썩거리던 엉덩이를 붙였다. “폐하를 모시는 것은 언제나 테살의 역할이야.” “언제나?” “네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가 가장 총애 받는 쿠칸이었으니까. 단순히 잠자리뿐만이 아니라 그는 황제 다음가는 세력을 지닌 옵시타 대귀족중 하나인 소리타 가의 자제이고, 눈치가 빠르고 처세술이 좋아 변덕스러운 폐하의 심기를 잘 맞추거든.” 키져의 말에 이어 에메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 “뭐, 그렇다고 해서 테살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 아무리 우리가 폐하의 밤 시중을 든다고는 해도 그냥 그건 그것뿐이니까.” “여자라서 후계자를 낳아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폐하가 베갯밑송사를 들어줄 성격도 아니고... 그런 건 질색하는 분이시거든.” “혹시 그런 목적으로 별궁에 들어온 거라면 관두는게 좋아. 폐하께선 결코 누구에게 집착하거나 마음을 주는 분이 아니야. 지금 받는 총애도 일순간의 바람과 같은 것일 뿐이라구.” 은근한 충고에 두조는 불쑥 바레사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생각났다. “폐하께선 왜 사랑을 믿지 않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과 잠자리를 가지면서도 마음은 주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에메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소세이 때문이야.” “소세이?” “소세이라고, 폐하가 막 황제가 되었을 때 총애를 독차지한 쿠칸이 있었어.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그 총애를 등에 업고 뇌물을 받고 인사에 관여하다가 목이 잘리고 말았지.” “페하의 몸에 자신을 묻은 채 말이야. 한참 정사도중 폐하께서 그의 목을 손수 잘랐거든.” “그리고 그 수급을 쿠칸들이 전부 돌려보았어. 그 이후론 누구도 감히 폐하께 사감을 품을 생각을 하지 못해. 도리어 총애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권력자의 총애란 건 그런 거니까. 설령 본인에게 어떠한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노릇이잖아.” “테살같은 능구렁이가 아닌 이상은... 아무리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너나할 것 없이 한마디씩 말하는 와중에, 두조는 다른 쿠칸들이 우려하는 것과는 영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쿤이, 오만하고 자존심이 태산 같은 쿤이.......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니...... 두조는 그것에 충격을 받은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쿤은 사랑이 착각이라 했지만 사랑했으니까 굳이 침대위에서 죽인 것이다. 좋아한 만큼 배신감이 컸을 테니까. 그 때문에 사랑 따윈 거짓이라 생각하고, 육체는 섞되 마음은 섞지 않고, 원나잇 스탠드와 다름없는 애정행각만을 쿠칸들과 즐겨온 건가...... - 나를 사랑하게 된다 한들 후회하지나 말아라.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그때, 나를 모욕 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니까. 그 말이 묵직하니 두조의 심장을 내리눌렀다. 쿤이 자신을 사랑할리 없다, 자신 없다 말해왔지만 사실은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태도조차 다른 쿠칸들을 대하는 태도와 하등 다를 바 없을지 모르는데... 다른 남자와 있을 때에도 그렇게 쑥스러움을 숨기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붉어진 뺨을 할지 모른다. 묵직하던 심장이 이번엔 욱신 아파왔다. 내가 왜 이러지?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순간, 목이 달아나게 될 텐데......! 쿤이 자신을 살려두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생사를 건 게임 때문...... 나는 무슨 착각을 할 뻔한 걸까? 등골이 싸하니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같이 술 마시고 갈 거지?” 두조는 그렇게 말하는 키져를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땡볕에서 갑자기 뛰었더니 피곤하네요. 일단 돌아갔다가 나중에라도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 꼭 와.” 두조는 쿠칸들에게 인사를 하고 별궁으로 향했다. 걷는 걸음이 어쩐지 초조하니 빨라졌다. 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와 대화해야지 이 불안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러니했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은 쿤인데, 그에게서 위안을 얻으려 하다니! 종종걸음을 쳐서 연꽃 숲을 가로지르는데, 저만치 느긋하니 걷고 있던 테살과 쿤이 보였다. 쿤을 소리쳐 부르며 가까이 가려던 두조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뭐가 말이냐.” “두조를 계속 별궁에 두실 겁니까? 일단 이국에서 온 대 상인의 아들이라 말해두긴 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폐하가 그를 아끼면 아낄수록 그의 배경에 대한 의혹도 커지겠지요. 금방 노예라는 것이 들통 날 텐데......” “노예인 것이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황제인 내가 노예하나 마음대로 곁에 두지 못한다는 것이냐?” “하지만 굳이 노예를 곁에 두려는 행동은 의혹을 사기에 딱 좋지 않습니까.” “무슨 의혹?” “폐하께서 그를 사랑하는지도 모른다는 의혹 말입니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춰 세웠고, 두조는 숨도 쉬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쿤은 곧 입을 열었다. “그저 잠깐의 유흥거리일 뿐이야. 놈이 노예라는 것이 문제되기 전에 질려버릴 텐데 뭐가 걱정이냐? 나를 잘 알고 있는 놈이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이야? 쿠칸들 말마따나 나는 변덕이 심하고 한 남자로는 만족 못하는 몸이다! 사랑이라니, 말도 안 돼! 놈과 한번... 아니, 몇 번쯤 잠자리를 갖고 나면 녀석도 다른 남자들과 아무 다를 바 없어지겠지. 그럴 거야.” 그렇게 말하는 어조는 마치 스스로에게 이르듯 했지만 두조는 그런 것까지 파악하진 못했다. 잠깐의 유흥거리일 뿐이라는 말만이 두조의 뇌리를 맴돌았다. 자신의 마음 따윈... 아니 목숨마저도 황제인 그에겐 그저 유희거리일 뿐. 쿤 칸칸은 냉혹하고 비정한 성격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철딱서니 없어 보여서 귀엽고, 괜한 허세로 허술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는 황제였다. 귀족인 쿠칸들마저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두려워하는데, 무슨 똥배짱으로 노예인 내가......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두조는 자조했다. 쿤을 원망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 보라 외쳤던 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지 않는가? 구차한 목숨 연명하고자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말했었지만, 그쪽이 더 진실에 가까웠다. 오늘 아침 어젯밤 일을 떠올렸을 때 쿤을 안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 역시 쿤을 사랑하면 안 된다. 죽을 테니까. 이 와중에 사랑은 무슨 사랑? 두조는 쿤에게 진심이 되려 했던 자신을 깨닫고 우울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깨닫자마자 부정부터 해야 하는 현실을 깨닫고 더욱 우울해졌다. 이런 게임 따위, 때려 쳤으면 좋겠다. 다시 노역장으로 돌아가도 좋으니까 진심을 시험하는 이런 짓은 관두고 싶다. 두조는 연꽃 숲 한가운데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 그저 유흥거리일 뿐이다. 잠자리에 누운 쿤은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놈은 노예야, 벌레만큼 하찮은 놈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지 놈과 자지 못했기 때문에, 거부당했기 때문에 거슬릴 뿐이야...... 그동안 잠자리를 함께 해왔던 숱한 쿠칸이나 남자들과 아무 다를 바 없어.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나지? 잠도 자지 못할 만큼! 볼이 미어터지도록 음식을 우겨넣는 모습이 떠올랐다. 초콜렛을 권하던 모습도 떠올랐고, 그것을 거절하자 부루퉁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순장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던 모습도 떠올랐고, 햇빛아래 근사하게 빛나던 나체도 떠올랐고, 땀에 젖어 빙긋 웃던 미소도 떠올랐다. 쿤은 그런 모습들을 회상하며 슬그머니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더위라도 먹은 걸까, 왜 머릿속에서 그놈이 떠나질 않는 거야! 쿤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멍한 방심상태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별궁을 바라보았다. 사실 두조는 어지러운 심사를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러 갔지만 그것을 모르는 쿤은 두조가 태평하게 자고 있다 생각하고 원망했다. 두조 그 놈은 내가 이렇게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겠지. 어쩌면 남몰래 여자를 상상하며 자위라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울컥했다. 동정인 것 같긴 했는데... 여자랑은 어디까지 해봤을까? 쑥맥인 척 해도 의외로 경험이 많을지도 모른다.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할까. 풍만한 타입? 늘씬한 타입? 아니... 틀림없이 품에 쏙 들어오는 자그맣고 가녀린 타입을 좋아할 것 같았다. 성격은 밝고 명랑한 그런 여자를. 쿤은 두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자신의 키며 남자임을 숨길 수 없는 어깨, 당당한 상징 등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놈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겠지. 여자가 밉고 싫다고 생각해본 적은 무수했는데, 부럽다고 여긴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여자였다면...... 황제라도 안 된다고 하진 않았겠지? 웬 떡이냐 하고 덤볐을지도 몰라. 급격히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당연하다는 듯 시에 칸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를 보면 두조는 뭐라고 생각할까. 만일 그녀가 두조를 유혹하기라도 한다면...... 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상황이 두려워지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오만함으로는 자신과 쌍벽을 이루는 시에가, 지독한 남성 혐오증인 시에가 두조에게 관심을 가질리 없잖아? 침대위에서조차 남자는 미개하고 천하다고 생각하는 그녀이니 노예인 그를 꼬실 리는 절대 없어!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져서 두조가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한다면...... 쿤은 눈을 부릅떴다.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번쩍였다. 용서할 수 없어. 죽여 버릴 테다. 그 시각. “두조라고......?”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주 신비로운 외모의 사내였습니다. 먼 이국에서 보물을 사들이기 위해 찾아온 대 상인의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두조라...... 특이한 이름이네.” 수리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길게 드리워진 휘장을 타고 뱀이 기어 올라갔다. 어슴푸레한 촛불 빛에 뱀의 비늘이 반짝였고. 그 섬뜩한 빛에 무릎을 꿇은 남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남자는 쿠칸 중 한 명이었다. 쿠칸이 황제의 일을 발설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그 말은 증거로서의 효력을 가지지 못하지만 황제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해 수는 있었다. 남자는 황제의 일과를 알려주는 대가로 연줄을 약속받았다. 오고 가는 정보 속에 싹트는 훈훈한 인정이라 할 수 있겠다. 별 볼 것 없는 귀족가의 자제 하나쯤은 떡 주무르듯 할 수 있는 여자는, 고혹적인 눈썹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먼 이국에서 온 대 상인일 리가 없어. 틀림없이 거짓말이야...... 그 자의 정체에 대해 좀 더 소상히 알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모래빛 금발머리, 감청색의 눈동자, 진흙처럼 붉은 피부... 쿤과 쌍둥이라 해도 믿을 만큼 똑같이 생긴 그 여자는 바로 쿤 칸칸의 누이이자 부인이자 숙적인, 시에 칸칸이었다. 쿠칸더러 물러가라 손짓하고 침상위에 길게 드러누운 시에는 자신에게로 기어오는 독사의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쿤의 마음을 사로잡은 별궁의 손님이라...... 네 생각엔 그가 정말 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니? 그는 겁쟁이라 사랑같은건 못하는데 말이야... 후후후......” “마셔마셔마셔! 자알 마신다~” 와-하하하! “오늘밤 내 이 멋진 거시기에 봉사해주실 부운~” 콰장창창창!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한참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떼로 모여 미친듯 퍼마시니 남아나는게 있을 리 없었다. 이곳은 도성에서도 가장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술집이었지만 값나가는 물건은 전부 대피한지 오래였다. 술집의 홀과 그에 딸린 정원을 통째로 쿠칸들은 부어주는 대로 마시고 안 부어주면 부어서 마시고 술독에 들어가 마셨다. 원래 쿠칸들의 황궁 밖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쿤은 유희에 너그러운 편이었기에 쿠칸들은 이따금 황궁 뒷문으로 몰래 나와 한 번씩 떠들썩하니 놀다 들어가곤 했다. 말이 떠들썩한 것이지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두조도 그 가운데 섞여 있었다. 두조는 술독에 들어가 곤드레만드레 뻗어버린 에메힌의 얼굴을 과녁삼아 음식들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신나게 웃었다. 바닥을 구르며 웃다보니 들이부은 알콜이 뱃속에서 요동을 쳤다. 결국 벌떡 일어나서 바깥으로 뛰쳐나가 피자를 한판 구웠다. “으윽... 콜록콜록.” 입가를 닦으며 몸을 일으키고는 비틀거리며 흙을 끌어와 토사물을 덮었다. 오바이트를 하고나니 술기운으로 억지로 불러일으켰던 유쾌한 기분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자리를 피곤함과 우울함이 대신 메웠다. 나무에 기대어 한숨을 쉬는데 키져가 다가왔다. 그는 두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물을 건넸다. “괜찮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군.” “예...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물로 입안을 헹궈내고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속이 비어버리니 어째 술이 더 취하는 기분이었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것이 무척 피곤했다. 그런 두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키져가 친절하게 말했다. “많이 졸려? 2층에서 잠시 눈을 붙이도록 해.” “아... 그, 그래도 될까요.” 두조는 휘청거리며 키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뭘 둘러보고 할 겨를도 없이 침대를 확인하자마자 두조는 쓰러졌다. 침대위에 엎어지자마자 까무룩 정신이 멀어져갔다. 키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봐, 샌들은 벗고 자야지.” 키져는 목안으로 웃으면서 두조의 샌들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의 종아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미끈한 허벅지를 따라 올라가 탄탄해 보이는 두 엉덩이를 꽉 쥐어 봐도 두조는 인사불성이었다. 키져는 대담해졌다. 옷을 여미고 있는 벨트를 풀어버리고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두조는 금방 속옷차림이 되었다. 그의 위에 올라탄 키져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늘씬한 등줄기와 꽉 짜인 옆구리를 더듬어 속옷에까지 손을 뻗쳤다. 엉덩이를 주무르며 속옷을 벗겨내자, 샅이 쓸리는 느낌에 으응...하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인다. 두조가 옆으로 누우며 검은 음모 사이에 얌전히 누운 아랫도리가 눈에 들어오자 키져는 군침을 삼켰다. 흉터하나 없이 껍데기를 벗겨놓은 그 물건은 탐스럽기까지 했다. 이곳에선 포경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멋 부리기 좋아하고 돈 많은 남자들이나 고통을 참으면서 포경을 하고 구슬을 박거나 링을 끼우거나 했다. 쿤의 취미 탓에 쿠칸들은 전부 포경을 했지만 두조는 이 나라 사람도 귀족도 아니니 포경이 당연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키져는 훗훗 웃으며 늘어진 음경을 만지작거리다가 그것을 덥석 삼켰다. 능수능란하게 그것을 핥고 빨았다. 두조의 것은 금방 곤두섰다. 잠결에 신음을 억누르며 뒤척이는 두조를 억누르고 탱탱하게 솟아난 음경을 빠는데 몰두하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관둬.” 테살이었다. 키져는 깜짝 놀라 입을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야, 테살이잖아. 폐하께서 아끼는 놈이라니, 맛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 같이 하지 그래.” 테살은 빙긋 웃었다. “그만 두는게 좋아.” “어째서? 너도 이런 것 좋아하잖아? 바레사님의 뒤도 따먹었던 네가 아니었어? 그런데 이놈만 예외로 둘 필요는 없지. 이렇게 잡아 잡수시오, 하고 뻗어있는데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잖아. 폐하께서 남자들의 뒷구멍 순결에 연연하시는 분도 아니고. 직접 몸으로 체험하면 이 놈도 좀 더 폐하를 즐겁게 해드릴 수 있지 않겠어?” “아, 물론. 나도 홀라당 잡아먹고 싶지만...... 널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폐하께서 수저도 들지 않은 밥상에 먼저 숟가락을 올렸다간 손목이 뎅강 날아갈걸?” “뭐?” 키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이놈, 아직......” “아마도.”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테살을 보고 키져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뻗어있는 두조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우뚝 솟아 있는 훌륭한 물건으로 봐서는 고자는 아닌데. 키져는 의심에 찬 눈으로 테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놈을 점찍어둬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관 둬. 잠자리도 못하는 놈을 폐하께서 곁에 둘리가 없잖아.” “글쎄다......” 테살은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이놈과는 그 짓 말고도 좀 더 다른 걸 하고 싶으신가 보지.” “다른 거?” “예를 들면~ 연애라던가.” 키져는 깜짝 놀라며 부정했다. “말도 안 돼! 폐하께선 누굴 사랑하실 분이 아니야, 그렇기에 우리들도 사이좋게 폐하를 공유할 수 있었던 거잖아?” 테살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방해를 해줘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냐? 어디서 굴러 들어온 쑥맥에게 폐하를 그냥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으으으.........”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두조는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뒤척였다. 무엇인가가 몸을 휘감고 있어 자세를 바꾸기가 어려웠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는데,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이나 허벅지위를 스치는 살결이나 귓전에 나지막이 들려오는 숨소리 같은 것이 뭔가 이상했다. 두조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눈을 깜박였다. 낯선 천정에 의아함을 먼저 느꼈다. 아, 어제 술 마시고 뻗었지... 별궁으로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외박을 해버리다니...... 큰일 났다. 깨질 것 같이 아픈 머리를 붙잡고 몸을 벌떡 일으키는데, 가슴위에서 팔 하나가 툭 떨어졌다. 두조는 눈을 크게 떴다. 크게 뜨다 못해 눈알이 빠질 정도로 크게 떴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침대 밖으로 구르듯이 뛰쳐나갔다. “으아아아악!” 괴성에 놀란 여자들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녀들은 전부 너무나도 당연한 듯 알몸이었다. 두조 역시 알몸이었다. 두조의 가슴에 팔을 올리고 자던 금발머리의 고혹적인 미인이 하나, 두조의 오른팔을 끌어안고 자던 밤색 머리칼의 섹시한 미인이 또 하나, 다리 사이에 누워 자던 빨간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있는 개성적인 미인까지 셋...... 두조는 침대위에 무려 세 명의 알몸 여인들과 나체로 엉켜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기뻐해야 할 상황인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두조는 후닥닥 이불을 끌어 와 아랫도리를 가렸다. 이, 이, 이게 어찌 된 거지? 문득 금발머리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어머머, 어젯밤엔 그렇게나 열정적이더니 아침이 되니까 순진한 도련님으로 변신을 하네!” “우리 세 명을 자지러지게 만들 때는 언제고......” “아앙, 자기 정말 굉장했어. 한판 더 할래?” 뭐, 뭐, 뭐, 뭐야. 그럼 내가 무려 세 명의 여자들과...... 뒹굴었단 말인가! 두조는 저도 모르게 꽥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어!” 여자들이 까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키져에게 이끌려 침대에 누웠던 것 까지는 생각나는데... 대체 이 여자들은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어무래도 어제 술을 마셨던 술집이 아닌 것 같았다. 어찌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이 사실이 쿤의 귀에 들어갔다간 난 끝장이야! 두조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제, 제 옷은 어디 있죠?” 두조는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옷과 벨트를 발견했다. 허둥지둥 그것을 걸치고 샌들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고 두조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아래층으로 구르듯 뛰어 내려가니 어젯밤의 술집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핑크빛의 야리꾸리한 인테리어나 카운터에 앉아있는 야한 차림의 여자나 입구를 지키고 선 건장한 남자들이나... 여기, 20세 미만의 청소년은 출입할 수 없는 그곳 맞는 거지? 틀림없이 술집의 2층에서 잠들었는데 어째서 식육점 2층에서 잠들어 있는 거냐고! 속으로 절규하던 두조는 일단 여길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걸었다. 하지만 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근육이 풍선처럼 부푼 램프의 요정처럼 생긴 사내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 왜 이러세요.” 대답은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여자가 대신했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앞에 끌려온 두조에게 말했다. “우리 가게 최고의 미녀들을 셋씩이나 밤새 끼고 있으셨잖아요.” “저, 전 그러자고 한 적 없어요!” “하지만 어젯밤 손님을 여기에 데려다 놓고 가신 분이 손님이 그걸 원한다고 말씀하셨는걸요?” “누가요!!!” 두조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지만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려 쿠칸이자 옵시타 대귀족의 자제이신 테살님이요.” “테, 테살이......” 싸하니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고의적인 냄새가 난다. 테살을 조심하라던 시롭의 말이 머릿속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테살님 소개로 오셨으니 할인해 드릴게요. 금화 30개만 주시면 되겠네요. 계산은... 어떻게 하실 거죠?” 이곳의 금전감각에 대해 무엇도 모르지만 금화 30개라니 어마어마한 돈이 틀림없다. 그런 돈이 있을 리가! 금화는커녕 십 원짜리 한 장 없는데! 이일을 어쩌면 좋아. 두조는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싸안고 말았다. 오늘 쿤은 바빴다. 국정회의에도 가고 의회에도 출석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새 잠을 설친 쿤은 늦잠을 잤고, 바레사의 말없는 질책에 떠밀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처소를 나섰다. 서류를 가지고 그 뒤를 따르던 바레사는, 문득 시롭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쿤이 곁에 있어서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폼이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폐하.” “응?” “송구하지만 먼저 외궁으로 가시지요. 저는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알겠다.” 쿤을 가마를 태워 먼저 보내고 바레사는 시롭에게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황급히 머리를 조아린 시롭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소리쳤다. “두조가 어젯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어요...” “뭐?” 바레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딜 갔는지는 알고 있느냐?” “쿠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러 갔다고 들었는데... 다른 쿠칸들은 다 돌아왔다는데 두조만 행방이 묘연해요! 소식을 묻기 위해 테살님의 방에 시종을 보내봤지만 아직 주무시고 계셔서 어쩌질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쿤이 두조를 데리고 쿠칸들의 처소에 다녀왔다고 할 때부터 느낌이 안 좋았다. 테살이 얼핏 보기에는 빙글빙글 웃고 다니는게 속없어 보이지만 성격이 꽤 고약한 것이다. 그가 쿤을 연모하거나 할 리는 없겠지만 폐하의 총애를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었다. 내키지 않아도 쿤이 이 사실을 알기 전에 데려다 놓아야겠지, 하고 생각한 바레사는 시롭에게 말했다. “내가 직접 테살님에게 가서 두조를 찾아오겠다. 너는 이 서류를 폐하께서 국정회의에 들어가시기 전에 드려라. 아, 폐하께선 여자를 싫어하시니 직접 드리진 말고 남자 시종을 시키도록 하고, 내가 국정회의가 끝나기 전에 돌아오겠다 했다고도 전해라. 중요한 서류니 폐하의 손에 전해지는 걸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서류를 건네주고 바레사는 잰걸음으로 쿠칸의 처소로 향했다. 어제 얼마나 퍼마셨는지 처소에서 마신 것도 아닌데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곧장 테살의 방으로 쳐 들어간 바레사는 침대위에 알몸으로 엎어져 있는 테살의 궁둥이를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쳤다. 짝-! 하는 꽤나 따끔한 소리가 울리자 테살이 파드득 몸을 떨더니 부스스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바레사?” “일어나십시오.” 테살은 일어나는 대신 몸을 데굴 굴렸다. 그러자 벌떡 일어서 있는 커다란 성기가 눈에 들어왔고, 바레사는 눈 버렸다는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걸 보고 테살은 키득거렸다. “아라라? 이렇게 훌륭한 물건을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시면 섭섭합니다. 제가 음흉한 마음으로 세운 것도 아니고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하는 아침의 생리적인 반응인걸요. 설마 바레사님께서는 벌써 이런 반응과는 거리가 먼 아침을 맞이하시고 계신 겁니까?” 테살은 바레사가 눈초리를 곤두세우는 것을 본 척 만 척 했다. 그의 성기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굵고 길었다. 게다가 귀두 밑에는 구슬까지 박혀 있었다. 저것에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킬 지경인데 눈앞에서 꺼덕거리고 있으니 아침부터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너무 수행관 일에만 열심히라 건강에는 소홀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이 물건도 자꾸 운동시키고 단련하지 않으면 게을러지는 겁니다.” “그 흉물스러운 것 좀 가리고 제대로 일어나 앉으시지요!” 참지 못한 바레사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지만 테살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는 도리어 흐응~ 하는 느물한 웃음을 흘리더니 흑흑 우는 척 하며 말했다. “이것에 꿰뚫려 좋다고 신음하실 땐 언제고...... 흉물스럽다 하시니 정말 슬픕니다. 설마 너무 오래되어서 제가 드리는 즐거움을 까맣게 잊어버리신 겁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상기시켜드릴 수 있는데......” 이윽고 울긋불긋하던 바레사의 얼굴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재깍 치우지 않으면 잘라버릴 겁니다.”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테살은 아이쿠, 무서워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잡히는 쿠션으로 성의 없이 앞을 가렸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가장 총애 받는 쿠칸인데 제 물건을 자르시면 폐하께 불충을 저지르는 겁니다. 보아하니 절 유혹하러 온 것은 아닌 듯 싶고...... 제 처소엔 웬일이십니까?” “두조 어디 있습니까.” “에에? 두조라뇨?”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는 테살을 보고 바레사는 화를 눌러 참느라 미간을 꾹꾹 눌렀다. “제가 뭣 때문에 평생 찾아올 리 없는 당신을 찾아왔는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제 두조와 함께 술을 마시러 황궁밖에 나갔다면서요. 어디다 버리고 온 겁니까?” “버리고 오다뇨~ 폐하의 귀중한 별궁 손님이 쓰레기라도 되는 것 마냥......” “빨리 대답하십시오.” “공짜로는 안 되겠는데요. 키스라도 한번 찐하게 해주신다면 모를......” 침묵은 잠깐이었다. 하지만 강렬했다. 테살은 바레사의 옷깃에 매달려 신음했다. 헐떡이며 살과 침이 섞이는 소리가 짧은 침묵을 뒤이었다. 그의 뒤통수를 잡아당겨 목을 꺾은 손이 풀리고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 테살은 반쯤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바레사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 닦고는 말했다. “어딥니까.” “.......고급 무희촌, 카레라라는 여자가 운영하는 가게에......” 바레사는 바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테살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곧 다리 사이의 쿠션을 물어뜯으며 절규했다. “젠장! 키스는 왜 이렇게 잘해?” 바레사가 카레라의 가게에 도착했을 때 두조는 건장한 두 명의 사내들과 씨름을 하며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인사불성이었고 아가씨들이 필요하다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 돈은 테살에게 받아내시라고요!” “누구든 돈을 들고 올 때까지 당신은 여길 못나가! 믿는 것도 없이 당신을 놓아 보내줬다가 테살님이 나 몰라라 하면 우린 어쩌라고? 엉?” “그쪽이야 대 귀족이니 금화 30전쯤 아무렇지도 않게 내줄 거라고요! 난 얼른 돌아가 봐야 해요!” “아 진짜 이 양반이! 알 만할 텐데 이러네! 쿠칸들과 어울려 다닐 정도면 쿠칸이거나 적어도 귀족집 도령일 텐데 구차하게 왜 이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바레사는 그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천박한 곳에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창피한 줄 모르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니. 인력거에서 내려 잠시 기다리라고 이른 그는 홀 입구에서 옥신각신하는 두조에게 다가갔다. 난 아가씨들을 달라 한 적이 없다, 그럼 그 돈은 누가 내느냐, 테살에게 받아라, 테살님이 안 주면 어쩔 거냐, 그렇다고 여기 날 붙잡아두면 돈이 나오느냐, 적어도 테살님이 올 때까진 잡아두겠다, 얼른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되느냐, 그거야 당신 사정이고 내 알 바 아니다, 똑같은 입씨름을 계속 반복하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앞을 가로막는 낯선 남자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두조는 터번으로 머리카락을 감추고 두건까지 쓴 바레사를 쉬이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 했다가 두건 사이로 드러난 눈이 자신을 찌리릿 노려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가 바레사임을 알아차렸다. 깨갱, 하고 고개를 숙이자 바레사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맙니까.” “당신이 이 사람 보호자예요?” “얼맙니까.” “금화 30전이에요! 우리 가게 최고의 애들을 밤새 끼고 놀았으니까!” “놀긴 누가 놀았다는 거예요?! 난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바레사는 다시 두조를 노려보았다. 금화 30전이면 일가 하나를 석 달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억울해서 소리치던 두조가 잘한 것 없다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숙이자 바레사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금화 30개를 계산해 주었다. 그제야 두조를 붙잡고 있던 사내들이 팔을 놓아주었고, 바레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력거로 돌아갔다. 풀이 죽은 두조는 그를 따라 인력거에 올라탔고, 인력거는 신속하게 출발했다. 인력거는 좁았기 때문에 두조와 바레사는 어깨를 딱 붙이고 앉아있어야 했다. 바레사와는 그냥 있어도 불편한데, 잘못을 저지른데다 좁은 곳에 나란히 앉아있으려니 진땀이 났다. 두조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 합니다. 본의가 아니었어요. 다 테살의 음모라고요! 제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절 이런 곳에 던져두고 가는 바람에 전 별 수 없이......” “쿠칸들과 술을 마신 것으로도 모자라 인사불성이 된 것부터가 잘못된 거다. 그들이 대체 너의 무엇을 보고 마음 좋게만 대해줄 줄 알았느냐? 자신의 입장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진짜 네가 별궁의 손님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게 아니냐?” “.........” “너는 천한 노예야! 폐하의 변덕 하나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그런데 어떻게든 행동을 조심할 생각을 않고 이리 생각 없이 부주의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세 명의 아가씨라, 폐하께서 아시면 퍽이나 좋아하시겠어. 금화 30 전을 괜히 썼구나. 이렇게 알려지든 저렇게 알려지든 네 목숨이 오늘로서 끝인 건 마찬가지인데, 곧 죽을 녀석을 데려오느라 그렇게 큰돈을 쓰다니!” “폐, 폐하께 알리실 겁니까?”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널 고의적으로 저곳에 보낸 테살이 입을 다물고 있을 것 같으냐?” 두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왕궁의 뒷담에 인력거를 멈춰 세우고 내린 두 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들어갔다. 시녀와 시종들이 쓰는 복잡한 뒷길을 빠져나온 뒤에야 바레사는 터번과 두건을 벗어버렸고, 망토와 함께 그것을 두조에게 던졌다. “나는 지금 바로 외궁으로 가야하니 넌 혼자 별궁으로 돌아가라. 이 길을 쭉 따라가다가 황궁전이 보이면 오른쪽으로 꺾어서 가면 된다. 쿠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라. 지금 그들과 마주쳐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예......” 바레사가 성큼성큼 걸어 기둥 저 편으로 사라져버리자 두조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어리숙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그들이 편하게 생각해라며 친절하게 대해주고 즐거웠다 하더라도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것도 황궁의 바깥에서. 테살이 무희촌에 버려두고 가지 않았더라도 술에 취해 혼자 남았더라면 황궁으로 돌아올 방법조차 모르지 않는가. 테살이나 누굴 탓할 것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조심했어야 했다. 스스로가 노예라는 걸 잊고, 노예임에도 별궁에 머무르고 있는 입장을 잊고 경솔하게 행동한 자신의 불찰이다. 폐하께 맞아도 할 말이 없어. 두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딜 다녀오는 거냐?” 국정회의를 마치고 의회 건물로 향하던 쿤은 바레사가 뒤늦게 나타난 것을 보고 말했다. 어디서 뭘 하다 급히 왔는지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바레사는 얼른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좀처럼 자리를 비우는 네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아닙니다.” 쿤은 의아하게 바레사를 훑어보다가 그의 샌들에서 시선을 멈췄다. 바레사는 오늘따라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다. 평소에 그의 차림이 호사스러운 건 아니지만 샌들과 벨트의 장식은 신분과 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황제의 수행관 쯤 되는 바레사 정도라면 아무리 못해도 보석 한 두개는 샌들에 달려 있어야 정상이었다. 멋이 문제가 아니라 체면이 문제인 것이다. 쿤은 반사적으로 그가 황궁밖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남몰래. 아무 장식 없는 샌들은 변복의 흔적이었다. 쿤은 바레사에게로 몸을 돌리고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추궁했다. “무슨 일로 황궁밖엘 다녀온 것이냐? 네가 은밀히 다녀올 정도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잖아!” “......일신상의 문제였습니다, 폐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야? 내가 네 집안에 직접 사람을 보내 알아보도록 만들지 말고 바른대로 고해라. 무슨 일이냐!” 바레사는 더 이상 말을 돌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는 쿤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두조 때문입니다.” “뭐?” 의외의 인물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쿤은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가 어제 쿠칸들과 술을 마시러 황궁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에 데리러 갔었습니다.” 그저 황궁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거라면 시종을 보내든지 했어도 될 일이다. 하지만 바레사가 직접 나갔다는 것은...... 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고급 무희촌에 금화 30전으로 매여 있는 것을 데려왔습니다.” “고급... 고급 무희촌이라고?” 고급 무희촌에서 금화를 30전이나 쓸 일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다. 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레사가 그를 쫓아가며 만류했다. “폐하! 어디가시는 겁니까? 의회에 출석하셔야......” 쿤은 그 말을 씹어버리고는 외궁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의 허리춤에서 몽둥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가마를 탈 생각도 하지 않고 뛰다시피 걸어 별궁까지 달려갔다. “폐하! 폐하!” 바레사는 쫓아가면서 쿤을 말리는 척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쿤이 놈을 흠씬 두들겨 패고 마음을 접었으면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밤새 세 명의 여자들을 끼고 놀 수는 있어도 남자와는 할 수 없는 게 두조란 놈이다. 그는 출신도 알 수 없는 외국인에다 노예이고, 얼빵하고 멍청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봐도 쿤과 어울리는 상대라곤 할 수 없었다. 쿤이 남색가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후계자를 낳아줄 수도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도 없다지만 황제의 총애는 곧 권력이 된다. 그건 일개의 노예가 가지기에는 너무 큰 것이었다. 소세이처럼 스스로가 가눌 수 없는 권력은 불행이 된다. 설사 두조가 아무런 욕심이 없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쿤 칸칸이 진심이 되려는 상대가 테살이라면 괜찮다. 그는 쿤의 진심을 이용하겠지만 그 한도를 모를 만큼 멍청이는 아닌 것이다. 어쩌면 쿤이 미처 모르는 이런저런 뒷일을 도맡아 그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조 그 녀석은...... 애첩이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조차 못하고 있지 않는가. 바레사가 보기에 그는 정말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쓸모는커녕 장애만 된다. 한 나라의 황제가 일개 노예에게 진심이 되어서 좋을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쿤이 별궁에 들이닥쳐 입구에 드리워져 있는 햇빛가리개를 찢어버리다시피 걷고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두조는 나 죽었소 하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쿤은 입술을 씹었다. 입에서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갔다. “밤새 여자들을 품에 안고 즐기니까 좋더냐? 하긴, 노예인 네가 언제 그런 여자들을 품에 안아 보았겠느냐? 고급 무희라니, 아주 넋이 빠졌겠구나.” “폐하...... 아닙니다. 결단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남자에게는 기능하지 못하는 네가 아니더냐? 황궁에 들어와서 나 같은 사내놈을 상대하려니 죽을 맛이었겠지. 남자와는 다른 풍만한 가슴과, 매끈한 다리사이에 황홀해 했겠지? 징그러운 음경을 보고 시들어버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 아니냐!” “오해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눈을 떠보니 그곳이었을 뿐... 제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희한했다. 쿤이 내뱉는 가시 돋친 말은 두조를 상처 입히기 보다는 그를 상처 입혔다. 자의가 아니었다는 말이 쿤을 더욱 괴롭게 했다. 노력해도 남자인 자신은 안 되고, 노력하지 않아도 여자는 된다는 사실 때문에 미치도록 화가 났다. 두조의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눌 수가 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테살 놈이 장난을 친 거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테살이 노린 것처럼 그의 분노는 그것과는 별개였다. 설령 테살이 무희촌에 그를 묶어두었다 하더라도 두조는 그곳에 있어선 안 되었다. 아무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여자들과 밤을 보냈다는 사실 그 단 한 가지 때문에 화가 주체가 되질 않았다. 쿤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그렇게 우스우냐? 아무렴, 고작 너에게 한번 안겨보려 발버둥치는 내가 우스웠겠지! 너 뿐만이 아니라 세상천지가 다 비웃을 일이다! 고작 너 같은 놈에게 내가!” 몽둥이가 허공을 날았다. 고무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의 단단함은 돌덩이 못지않았다. 그것이 두조의 엎드린 등짝을 후려쳤다. 퍽! 퍽! 두조가 변명조차 하지 않고 매를 맞는 모습이 쿤의 거친 심사를 더욱 돋웠다. “오늘에야 말로 네놈을 죽여 버릴 테다! 흠씬 두들겨 사막에 내다 버릴 거라고! 어째서 내가 너 같은 놈을 신경 써야 하는 거냐! 어째서 내가 지금 화를 내야 하는 거냐! 어째서 내가 너를 두들겨 패야 하는 거냐! 이제 너에게 전전긍긍 하는 일 따위는 지긋지긋하다! 말도 안 되는 내기핑계로 나를 농락하는 것은 작작 해라! 사랑? 남자에게 기능하지도 못하는 네가 남자인 나를 사랑할 리가 있겠느냐!” 퍽! 퍽! “으윽! 우욱!”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빌어보시지! 너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보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남자에게 무슨 사랑이냐고 비웃어 보란 말이다! 남자주제에 네놈에게 침 흘리는 내가 혐오스럽진 않았느냐? 어젯밤 그 여자들과 뒹굴면서 내 흉을 보지는 않았느냐고! 이 몸이 남자마저도 홀리는 몸인지라, 내 물건이 훌륭하여 황제조차 바란다고 떠들지 그랬느냐!” “으윽...! 으악...!” 두조를 벽으로 몰아붙여놓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며 사정없이 팼다. 몽둥이가 살을 찢고 혈관을 터트렸다. 몽둥이의 끝은 금세 피로 물들었다. 고통 때문에 눈에서 불똥이 튀고 악 다문 어금니가 부서질 것 같았지만 두조는 그런 적 없다거나, 잘못했다거나, 살려달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건 전부 변명일 테고, 무슨 말을 해도 구차하게 들릴 테니까. 쿤은 갖은 비난을 쏟아 부으며 화를 내고 있었지만 정작 진짜 화가 난 이유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쿤은 두조가 여자와 밤을 보냈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 있는 진짜 분노는 그것을 질투하는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네놈을 죽이고 편해지겠어! 네놈의 그 매끄러운 혀 놀림에 넘어갔었지만, 이제야 알겠다! 너를 죽이는 방법만이 내 자존심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란 걸 말이다!” 쿤은 씩씩거리며 핏발서린 눈을 홱 돌려 바레사를 쳐다보았다. 그 기세가 하도 흉흉하여 바레사조차 움찔 놀라고 말았다. “칼을 내놔라!” “폐하.” “칼을 내 놓으라지 않느냐!” 바레사는 망설였다. 두조가 불쌍해서라거나 그가 여자와 밤을 보냈다는 것을 일러바친게 찔려서가 아니었다. 맞는 것은 두조인데 그를 때리는 쿤이 더 아파보였기 때문이다. 바레사가 우물쭈물하자 쿤은 그를 확 밀치고 복도로 뛰어나가 장식용으로 걸려 있던 칼을 빼내었다. 무기라기보다는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칼은 칼이기에 사람 하나쯤은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쿤은 몽둥이를 내팽겨 치고 그것을 두 손으로 쥐고 달려와 피투성이로 꿈틀거리고 있는 두조의 앞에 섰다. “으아앗!” 소리를 지르며 힘껏 칼을 치켜든 쿤의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노역장에서 그를 보고 끌렸던 일, 침대위에서 거부당하여 코피를 흘렸던 일, 죽이더라도 하고 죽여야겠다고 이를 갈았던 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보라는 대담한 제의를 오기삼아 받아들였던 일, 비밀통로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왔던 일, 시장에서 자신에게 두들겨 맞았던 일, 그의 위에서 자위했던 일, 같이 식사를 했던 일, 연못 숲에서 대화를 나눴던 일...... 생각해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고작 며칠일 뿐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할 만큼 충분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뜨겁게 몸을 섞었던 것도 아니고, 벼락을 맞은 것처럼 운명을 느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쿤은 깨달았다. 그때, 노역장에서 노예감독의 귀를 물어뜯고 바닥에 피를 뱉어내던 두조를 처음 보았던 그때. 모든 것이 이렇게 되리라 정해졌던 것이다. 장난기 많은 정령의 심술이었을까? 아니면 잔혹한 신의 형벌이었을까? 그 단 한순간 자신은 이 남자에게 영혼을 뺏겼다.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져 버렸다. 노예인데, 황제라도 남자는 안 된다는데,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바레사는 눈을 크게 떴다. 쿤의 손에 들린 칼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쩔그렁! 쿤은 이윽고 칼을 떨어트려버렸다. 일그러진 얼굴로 떨리는 손과, 쓰러진 두조를 바라보더니 몸을 홱 돌려 멍청하게 서 있는 바레사를 밀치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바레사는 그러고도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었다. 가까스로 반쯤 가출한 정신을 챙기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쿤을 따라갔다. 남들의 눈을 피해 연꽃 숲으로 숨어든 쿤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바레사의 기척을 느끼고는 중얼거렸다. “바레사.........” “폐하.” “네가 그렇게 충고를 했거늘. 내 본의가 아니다. 나는 충분히 경계했다. 정말로 그놈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고, 잠자리를 가지고 나면 질려 버릴 거라 생각했다.” “폐하......” “헌데 아니야.........” 쿤은 두 손을 들어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바레사는 그의 뒤에서 허리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쿤은 말했다. “혼자 있고 싶다.” 바레사는 깊이 머리를 조아리고 돌아섰다. 두조는 사막 한가운데를 헤매고 있었다. 사막은 너무 넓었다. 태양은 잔인하게 살갗을 지지고 있었으며, 끝없는 모래밭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너무 더워서 이마를 쓸어보았지만 땀조차 나지 않았다. 종이처럼 건조한 피부만이 손등에 쓸렸다. 갑자기 저 멀리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두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몇 발짝을 걷자 그것이 쑥 가까워졌다. 이번엔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저건... 저건...... 냉장고다! 두조는 미친 듯 달려갔다. 하지만 모래에 발이 푹푹 빠져서 냉장고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다리가 내 마음대로 안 움직이지? 무릎까지 파묻히는 다리를 끄집어내려고 했지만 어느새 자신은 커다란 모래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구덩이 저 위에 있는 냉장고를 향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헤엄치다시피 모래를 헤치는데 냉장고 문이 벌컥 열리는게 보였다. 싸한 냉기가 두조의 코끝까지 닿아왔다.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콜라가 보였다. 두조는 냉장고로 가기 위해 발악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콜라냐, 나냐? 헉! 두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의 반대편에서 쿤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금발머리가 뜨거운 뙤약볕에 금속 빛으로 번쩍였다. 역광이 드리운 어두운 얼굴임에도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지나치게 또렷이 보였다. - 콜라냐, 나냐! 두조는 황망한 시선으로 콜라와 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쿤을 선택하고 싶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당장 콜라를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이 콜라를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는데!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쿤이 버럭 소리쳤다. - 날 선택하지 않으면 죽는다! 콜라냐! 쿤이냐! 두조가 망설이는 사이, 모래는 점점 두조를 아래로 아래로 끌어들였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땐 모래가 턱까지 들어찼다. - 으아아! 사람 살려! 모래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입속에 들어차는 까끌까끌한 모래에 목이 턱하니 막히는 것을 느끼며 두조는 눈을 감았다. “헉!” 두조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머리를 젖히고 가슴을 열고 숨을 들이쉬려 몸부림치자 깜짝 놀란 시롭이 그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어머나! 왜 이러는 거니? 진, 진정해!” 허억-! 허억-! “숨, 천천히 쉬어, 천천히 쉬어!” 계속 공기를 들이마셔도 숨을 쉴 수 없다는 착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폐가 터지도록 공기를 집어넣으며 한참동안 몸부림을 쳤다. 생리적인 고통으로 인해 눈물이 맺히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보다 못한 시롭이 명치를 팔꿈치로 콱 짓누르고 나서야 발작하던 호흡이 가라앉았다. 두조는 어지러운 눈동자로 진땀을 흘리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낯선 천정, 낯선 방, 낯선 사람, 낯선 언어. 빳빳하게 굳어있던 등골에서 싸늘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난 후에야 두조는 모든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여기는 쿤 칸칸의 별궁이다. 콜라나 모래 구덩이 따위는 다 악몽이었어. 나는......... “시...... 시롭?” “어휴, 괜찮니? 정말 깜짝 놀랐잖아.” 시롭의 얼굴을 확인하고 긴장을 풀자... 침대에 닿은 등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두조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집었다. 등이 불로 지지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리며 뜨끈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자신을 때리며 일그러져있던 쿤의 얼굴이...... “폐, 폐하께선......” “이 정도로 끝난게 다행인줄 알아. 얼마나 폐하의 기세가 무시무시하던지, 난 정말 너 꼼짝없이 죽는 줄 알고...... 그러게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내가 그렇게나 경고했는데 쿠칸들과 같이 있으면서 방심하다니!” 두조는 등의 상처를 피해 엎드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덕분에 이렇게 맞았으니...... 폐하께서도 정말, 병주고 약주고 하실 거면 때리지나 말든가. 네가 아무리 덩치가 크고 패기 좋게 생겼다 해도 그렇지, 성질 좀 죽이시면 좀 좋아.” “...폐하께선 어떠세요?” 두조의 물음에 시롭은 잠시 그를 응시하다 긴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평정을 찾으신 모양이야. 네게 주술사와 치료사도 보내주시고, 널 잘 돌보라고 당부하셨대. 오늘은 정상적으로 국정도 보러가셨다고 하니까...... 당장 뭔 일 벌어질 것은 걱정 안 해도 같다.” “그렇군요.” 두조는 쿤의 화가 가라앉았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꼈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했다. 이렇게나 맞았으면 쿤을 원망할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미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실은 이보다 더 심한 짓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일까? 이만한 것에 그친 것도 그가 인내심의 한계까지 참았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흉터는 남지 않을 거야. 치료 잘 받으면 일주일이면 다 아물겠네.” “네.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하...” “웃을 일이 아냐. 정말, 다시는 이런 식으로 폐하의 진심을 확인하지 마.” “네?” “너에게 정말로 진심이니까 그렇게 화를 내신 거잖아.” “진심.........” 두조는 확인이라도 하듯 뇌까렸고, 시롭은 확답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래, 진심.” 마음의 한편은 고작 여자들이랑 하룻밤 있었다고 이렇게 때리냐, 진짜 성질 더럽다, 황제면 다야, 왜 사람 말은 믿지도 않고 그러냐고, 이런 목소리들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쿤이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다 널 진짜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널 질투하니까 그런 거라고! 자신은 남자라서 안 되는데 여자들하고는 손쉽게 놀아나는 네가 밉지 않았겠어? 너라면 그걸 그냥 참을 수 있었겠냐! 하는 목소리가 떠들었다. 어느 쪽이 옳은 목소리인걸까. “그러니까 그렇게 화를 내시고도 너를 죽이지 못한 거지. 총애하던 바레사님이 쿠칸을 나가고 나서 폐하의 유혹을 뿌리쳐도, 테살님이 은근히 다른 쿠칸들과 놀아나도 질투는커녕, 화조차 낸 적 없으신 분이야. 네가 원한 것도 아니고 고작 테살님의 음모로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낸 것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다니... 난 정말 놀랐어. 폐하께서 칼까지 빼들고 들어갔을 땐 진짜 너 죽는구나 싶었는데, 차마 못 죽이시는걸 보고 와, 정말 폐하께서 널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자신을 죽이고 편해지겠다 외치던 쿤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심이니까 힘들었던 거다. 진심이니까 감당하기 힘들어서 편해지고 싶다 외친 거다. 쿤에게 맞으면서 그의 진심을 보았다. 두조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질투하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던 모습을. 그 말에 두조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그저 유흥거리일 뿐이라고 말하던 쿤의 말에,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며 생기려던 마음을 황급히 접어버렸다. 그는 어차피 날 죽일 테니까, 나도 그를 좋아할 순 없어하고 진심을 챙겼다. 정말로 쿤을 사랑했다면 쿤이 자길 어떻게 생각하던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건 두조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 “제가 폐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래서 폐하의 진심이 두려워요. 그분이 정말로 저를 좋아하면,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전 제 마음도 잘 모르겠는데.” 쿤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의 자존심을 긁으며 오기를 돋워 농락할 수도, 살려주겠다고 약속하면 살기위해 그를 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심이라면 안 된다. 진심인 그에게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쿤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할 것이다. 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육체적인 만족이 아닌 두조의 마음일 테니까...... 마음 없는 관계는 무엇보다도 큰 상처를 안길 것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지금 폐하를 거스를 입장이니?” “거스르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폐하가 정말 저에게 진심이라면 저 역시 진심이 아니면 안을 수 없다는 소리에요. 거짓으로 몸만을 내주는 것은 폐하에 대한 모욕이에요.” “폐하께서 널 진짜로 좋아하니까 쉽사리 널 죽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네 마음을 모르겠다니...... 질투심 때문에 널 이렇게 두들겨 패는 분인데 걷어차였다간 무슨 억하심정을 품으실지 모른다구! 애정과 증오는 한 겹 차이다 너?” 두조는 분위기 전환삼아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두 번만 질투하셨다간 남아나는 곳이 없겠는데요.” “폐하계선 한번 욱 하면 보이는게 없으시니까. 황제폐하니까 그 성질을 참을 이유도 없으시고... 노예인 네가 비위를 맞춰드려야지, 폐하께서 네 비위를 맞추겠니?” “그것도 그러네요.” 남일 말하듯 대꾸할 때가 아니야, 라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두조를 바라보던 시롭은 곧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깨어난 김에 붕대나 갈자. 그리고 뭐 좀 먹도록 해.”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갈고 요기를 하고 나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또 악몽을 꿀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시롭이 수리화 향을 피우면서 숙면 할 수 있을 거라 말해주었다. 한 숨 더 자라고 그녀가 자리를 비켜주자, 두조는 아픈 등 때문에 침대위에 엎드려서 눈을 감았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다시 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 자신을 때리면서 괴로워하던 그. 자신이 어떻게 하면 목숨 부지 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쿤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두조는 그제야 그저 유흥거리일 뿐이라고 말했던 쿤의 말 속에 숨은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노예인 자신을 황제폐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지, 하고 고민해왔지만 노예인 자신에게 진심이 되려는 쿤의 심사 역시 복잡했을 것이다. 그러니 쉬이 솔직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성격에 자존심도 몹시 상했을 것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계략에 넘어가 그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으니...... 두조는 한숨을 쉬었다. 쿤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원할 테지만, 만약 진심을 물어온다면 할 말이 없었다. 좋아하고 있다. 귀엽다고 느낀다. 서로를 좀 더 알아가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품에 안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남자이고, 같이 지낸 기간도 짧고, 신분 차이도 크고, 살아온 배경도 너무나 틀리고...... 그런 걸 다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그런 애매한 대답은 쿤을 더 힘들게, 혹은 화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두조는 베개에 마구 얼굴을 비비면서 자학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기적인 계산이 돌아간다. 솔직하게 말해서 또 맞기는 싫으니까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이제는 그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속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다보면 진짜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마는 스스로가 싫었다. ‘.........’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그 시선 때문에 잠속에서 의식이 떠올랐다. 뭔가... 멈칫거리는 느낌이 앞머리 쪽에서 느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기색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두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눈을 깜박였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기척이 화다닥 물러가고, 눈앞의 대상을 확인했을 때에는 뭔가 믿기지 않는 느낌이었다. 쿤이었다. 사위가 어둑한걸 보니 하루 종일 잔 모양이었다. 멀찍이 희미하게 밝혀진 램프불빛에 괜히 팔짱을 끼고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어딜 다녀온 것인지, 아니면 외궁에 나갔다가 거처에 들리지 않고 바로 온 것인지, 그는 긴 머리카락을 땋아 내리고 짧은 망토를 두르고 어깨와 허리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벨트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서 예를 차려야겠지만 두조는 그것도 잊어버리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 그 부름에야 그가 깬 것을 모른 척 하고 있던 쿤이 가까스로 두조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으냐?” 두조는 대답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쿤의 가슴이 지끈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별로 안 괜찮습니다. 아파요.” “사, 사내자식이 고작 그것가지고 엄살은......” 폐하께서 맞아보세요, 엄살인가 아닌가...... 두조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쿤이 화를 낼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두조가 별 말이 없자 조금 용기를 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쿤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두조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폐하를 화나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 여자들과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 죽은 듯이 자기만 했는걸요.” “정말이냐?” “저 여자 사귀어 본 적도 없는 쑥맥이라고요. 키스도 폐하가 처음이었어요. 손을 잡아본 것도 폐하가 처음이고, 자위하는 모습을 본 것도 폐하가 처음이고......” 잘 나가다가 자위 이야기가 나와서 쿤은 얼굴을 화끈 붉혔다. 그는 또 애써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처음인지 아닌지 알게 뭐야. 두 번째 경험, 세 번째 경험이라고 몸에 흔적이 남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에요.” 억울하다는 듯 대꾸하고 후후후... 나지막하게 웃는 그 목소리가 어쩐지 쿤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붕대에 칭칭 감긴 등을 보니 일순 질투심과 분노를 참지 못해 그에게 매질을 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사실 그것은 화풀이였다. 노예 따위에게 진심이 되어 여자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자신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애꿎은 두조를 잡았던 것이다. “미안하다.” 두조는 눈을 깜박였다. 사과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느꼈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말 해올 줄은 몰랐다. 뭐라 대꾸하지 못해 가만히 있자 쿤이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를 누구보다 귀히 여기며 아껴줘야 하는데...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너를 다치게만 했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 “폐하......” “속 좁고 옹졸하고 잔인한 놈이라 욕해도 좋아. 하지만.........” 쿤은 쥐어짜내듯 말을 이었다. “미워하지 말아다오.” 사랑한다 말할 순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황제였고, 자존심과 자부심을 빼면 시체인 쿤 칸칸이었다. 두조는 자신을 사랑하기는커녕 남자라 안지도 못하는데 그 자존심에 사랑한다 말할 순 없었다. 아니, 그동안 생겼을지도 모를 정이나 좋은 감정마저 혹독한 매질로 다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애원밖에 없었다. 입 밖에 내뱉고 나서야 그게 애원이란 걸 뒤늦게 깨달은 쿤은 뭐라 할 수 없이 비참하고 서글픈 기분이 되었다. 사랑을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이라니. 두조는 그런 쿤을 보며 뭐라 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의 고백은 달빛에 꽃잎을 오므린 연꽃처럼 수줍고 애처로웠다. 파르르, 가늘게 떨리는 그의 금빛 속눈썹을 보다가, 두조는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고 쿤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등의 상처 때문에 윽, 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쿤은 축축한 혀도, 거친 호흡도, 달뜨는 신음도 느끼지 못했다. 느낄 수 있었던 것이라곤 오로지 인두로 지지는 듯 뜨겁고 건조한 체온이었다. 팔에서 전해지는 그 체온. 입술에서 전해지는 그 체온. 그 체온만큼 심장의 온도도 올라간다. 도장을 찍듯 소박하고 뜨겁게 와 닿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두조의 검은 눈동자가 쿤의 감청색 눈동자와 얽혔다. 스르륵, 쿤의 팔을 놓은 두조는 “아......” 하는 신음 비스무리한 소리를 흘리더니 곧 허둥거리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 이, 이건 그러니까......” “그만.” 쿤은 팔에 남은 두조의 체온을 털어버리듯 돌아서며 말했다. “듣지 않는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휑하니 나가버렸다. 쿤의 잔상을 쫓아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두조는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보드랍고 따뜻하고 말랑하고 촉촉했다. 한마디로 애틋했다. 두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지?” 나 왜 키스한 걸까. 며칠 뒤. 바레사는 쿤이 부탁한 자료를 가지고 서재로 들어가다가 문득 그가 서류를 들여다보다 말고 방심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레사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시선을 멍하니 허공에 멈춰 세우고 있었다. 곧 뭐가 입술에 묻기라도 한 듯 손을 들어 만지작거리다가 머리를 부르르 흔들었다. 바레사가 미간을 모으면서 “폐하...?” 하고 부르자 물 맞은 고양이처럼 깜짝 놀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얼굴까지 화끈 붉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기에 제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아, 그냥, 좀. 부탁한 것은 가져왔느냐?” 바레사는 문서보관실에서 빌려온 자료들을 책상위에 내려놓았지만 쿤은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다. 팔짱을 끼고 뭔가를 고민하던 그는 불쑥 질문했다. “바레사, 보통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는 뭘 하지?” “...예?” “아니 그...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는 뭔가 말이야. 환심을 산다고 해야해나.” “글쎄요...... 선물... 같은 거 말입니까?” 쿤은 주먹을 손바닥에 탁 치면서 말했다. “그래! 선물, 그게 있었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럼 뭐가 좋은 선물이지?” “......자신이 받아서 좋은건 상대도 받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오! 역시 내 바레사야. 자네는 정말로 현명하군.” 쿤의 칭찬에도 바레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정신없이 그에게 명령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내 재단사를 불러와! 비단장수와 보석세공사도 불러오고... 아, 이미 만들어진 좋은 물건이 있으면 그것도 가지고 와보라고 해.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아닌 벨트나 샌들에 달 보석 같은 실용적인 것들로. 어떤 것이 좋으려나......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검으니 뭘 해도 잘 어울리겠지? 자네 생각은 어때?” “두조에게 선물하실 참이십니까?” “그래. 생각해보니 가진 것 하나 없을 텐데 변변찮은 옷 한 벌 지어준 적이 없군. 말도 한필 필요할 텐데. 요전에 초원의 나라에서 좋은 말 열 필을 보내오지 않았나? 응, 그에게 딱 어울릴만한 흑마가 한 마리 있었어. 그에 어울리는 마구도 구하고 싶은데. 또 뭐가 필요하지? 뭘 받으면 좋아할까?” “폐하...... 그 노예는 그런 값진 것들을 받아봤자 아무 소용없을 겁니다. 말을 탈 줄이나 아는지 의심스럽군요.” “그런가? 그럼 말 타는 법을 가르쳐줄 선생도 하나 붙여줘야겠군.” “폐하.” 바레사가 정색을 하고 부르자 두조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들떠있던 쿤이 돌아보았다. “지금 그자를 계속 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남자에다가, 노예인 그를 무슨 명분으로요? 지금 별궁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대신들이 알면 난리가 날 일인데, 옷이며 보석 따위를 선물하시겠다니...... 그에게 필요한게 뭔지 아십니까? 고귀한 출신성분과 그에 따른 품위와 지식입니다. 허나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그 천한 것에게 정말로 필요한건 폐하의 무관심이지요! 두조를 저대로 별궁에 둘 수는 없습니다. 이런 폐하의 총애는 저 노예뿐만 아니라 폐하의 권위와 영광까지 죽이는 겁니다! 하늘같은 황제폐하께서 남색에 눈이 멀어 천한 노예를 데려다놓고 신처럼 모신다는 소리를 듣고 싶으신 겁니까?” 쿤은 버럭 소리를 치며 바레사의 어깨를 밀쳤다. “내 본의가 아니었다고 그랬지!” “폐하!” “두조가 노예인게 그 녀석의 잘못이냐? 아니면 내 잘못이냐! 사랑하게 된 것이 노예일 뿐이야! 한 나라의 황제인 내가 고작 노예 하나를 갖지 못한다는 거냐!” “그 노예가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해야 할 가치가 있는 놈입니까? 그는 폐하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그는 폐하가 남자라서 안지도 못하는 자입니다!” 바레사의 직언에 쿤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쿤은 바레사를 당장 때려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바레사의 침착한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쿤은 바레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어떻게 하면 두조가 나를 사랑해줄까? 바레사는 쿤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세이를 생각하십시오.” “바레사 네 이놈...!” 소세이의 이름에 쿤의 분노한 일갈이 바레사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바레사는 머리를 더욱 더 깊이 숙일 뿐이었다. “폐하의 총애는 일개 노예가 갖기에는 너무 큰 은혜입니다. 소세이에게 마음을 주심으로서 폐하가 치러야 했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상기하시옵소서. 그렇게 잃었던 것을 되찾기 위해 폐하께서 손수 하셔야만 했던 일을 기억하시옵소서. 그 노예라고 무엇인가가 다를 것 같습니까?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가 맛본 크나큰 권력은 그놈을 타락시키고 폐하를 상처 입힐 겁니다.” “그리되지 않게 내가 막을 것이야! 난 쿤 칸칸이다! 이 나라의 황제이고, 신 다음가는 자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쿤이 그대로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간 후에도 바레사는 한참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십 오세에 손수 모친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던 쿤은, 십 육세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또 죽여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가 냉혹하고 비정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라 그렇게들 수군거리며 두려워했지만 바레사는 알고 있었다. 쿤이 소세이를 죽이고 힘들어하던 시절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이 본인이기 때문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쿤을 바라보았기에 자신은 그 대상이 될 수 없었지만, 언젠가 쿤이 진정 사랑하는 이를 만나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남자이기에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는 없겠지만 쿤의 곁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좋을 거라고... 진실 되고 충성스럽고 그를 한없이 흠모하는 그런 신하이길 바랐다. 헌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에 순진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장점도 없는, 아니 그것조차 장점이라 생각할 수 없는 놈을 두고 짝사랑이라니. 그 하늘같은 자존심에 일방적인 감정 따위, 쿤을 무너지게만 만들 것이다. 다음날. 상처가 어느 정도 나아 거동이 편안해진 두조는 갑작스럽게 별궁에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혼이 빠졌다. 제일 처음에 찾아온 것은 재단사였다. 노예 열 명에게 갖은 옷감을 들게 하고 별궁을 방문한 그는 황제의 명이라면서 두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신체 치수를 재고 들고 온 모든 옷감을 대어보며 옷을 지을 것을 골랐다. 이목구비가 고아하여 색깔은 짙더라도 무늬는 화려하지 않는 것이 어울린다고 칭찬을 늘어놓으며 자수는 이것이 어떻느냐 장식은 이게 좋지 않으냐 두조를 정신없게 했다. 결국 그런 세부사항을 까다롭게 고른 것은 시롭이었다. 멍한 두조는 살아있는 마네킹 이상의 역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재단사가 물러가고 이제 한숨 놓았다, 싶었을 땐 가죽세공사가 찾아와서 두조의 발과 발목, 종아리 치수를 재고 최신 유행하는 샌들이 이런 모양이라느니, 이런 끈의 꼬임이 근사하게 보인다느니, 술을 늘어트리는 디자인은 어떻냐느니 얼을 빼놓았다. 역시 그 모든 것들을 결정한 것은 시롭이었고, 보석세공사까지 찾아왔을 때 “드디어 보석이구나!” 라며 눈을 반짝반짝 황홀해하는 그녀와는 달리 두조는 피곤하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주먹만 한 보석은 사람의 눈을 헉 뜨이게 만들었지만 그 휘황찬란함에 대한 감탄도 잠깐이고, 끝도 없이 도안들을 늘어놓고 골라보라는데 도대체 뭘 기준으로 골라야 할지 눈곱만큼도 알 수 없었다. 보석세공사와 시롭만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사파이어가 딱 어울리실 듯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런 보석 물림으로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아 끈을 만드는 게 어떨까요?” “오오, 그거 참 작품하나 나오겠는데요! 그것과 어울릴만한 샌들장식으로는 청금석이 어떻습니까?” “이렇게 검 집을 끼울 수 있는 모양도 멋지네요. 샌들과 세트로 청금석을 달면 아주 우아할 거예요!” 그런 말들을 배경음악삼아 지루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꼬는데 여러 가지 의미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이! 친구, 왜 그렇게 무료한 얼굴인가?” 테살이었다. 그는 능글능글한 얼굴로 예의 그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천연덕스럽게 손을 척하니 들어보였다. 두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당신...! 도대체 나를 그렇게 곤경에 처하도록 만들어놓고 뻔뻔스럽게 무슨 낯짝으로 찾아온 겁니까?” “여자들하고 재미는 좋았어? 내가 손수 그 가게 최고의 미인들만 골라 봤는데, 테크닉도 훌륭하지? 최고급 무희들이니 몹시 유연했을거야. 뻣뻣한 남자들과는 달리 무슨 체위든 가능하다는게 그녀들의 강점이지!” “재미는 무슨...! 술에 곯아떨어졌다가 눈떠보니 아침이었는데요!” “오! 하룻밤에 금화 10전이나 하는 여자들을 두고 그냥 잤단 말이야? 안타까워라~!” “그렇게 안타까우면 테살님이 즐기시지 그러셨습니까! 그 여자들 때문에 얻은 거라곤 폐하의 진노뿐이었습니다! 몸에 감긴 이 붕대가 보이지도 않으십니까!” “폐하의 총애를 받으니 그 정도의 아픔은 감수해야지~ 뭐 어쩌겠어? 다 폐하의 넘치는 애정 때문인 걸. 자네가 부러워, 그렇게나 폐하의 사랑을 받다니!” 미안한 기색은커녕 능글능글한 그 태도에 두조는 좀처럼 나지 않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진짜 한 대만 딱 후려쳤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쿤이 아닌 것이 원망스러워졌다. 쿤이었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볼기짝을 걸레짝으로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휘유~ 그런데 자네는 황제폐하의 보석세공사가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테살님.” 시롭과 신나게 떠들다가 테살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난 보석세공사가 허리를 숙여 보였고, 시롭도 바닥에 무릎을 대고 머리를 숙였다. 시롭은 예를 차리고는 있었지만 뻔뻔스럽기 짝 없는 테살 때문에 심기가 썩 편치 않아보였다. 허나 옵시타 대 귀족의 자제인다가 쿠칸인 그를 나무랄 수 있는 건 이 방에서 아무도 없었다. “폐하께서 보석세공사를 손수 보내시다니... 놀랠 노자인데. 자신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에 이 나라 최고의 장인들은 폐하의 것밖엔 만들 수 없어. 그런데 폐하의 보석세공사가 직접... 대단해! 폐하께선 정말 자네에게 홀딱 빠진 모양이야. 나에게 고마워 하라구. 그런 해프닝이 없었다면 초조해진 폐하께서 이리 환심을 사려 노력하실 일은 없지 않았겠는가?” 뻔뻔스러워도 어쩜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방해공작을 펼쳤다가 실패했으면서도 테살은 속상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두조를 생각해서 그랬을 리는 절대 없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테살님께 고마워할 일 같은 건 하나도 없으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어라라? 지금 노예주제에 감히 이 테살님에게 꺼지라고 명령하는 거야?” 두조는 움찔했다. 테살은 갑자기 웃던 낯을 싹 바꾸더니 외쳤다. “쿠칸이자 옵시타 대귀족의 자제, 테살 살마힌 소리타를 보고 예조차 취하지 않고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으니 불손하기 짝이 없군! 당장 끌고 가 죽도록 곤장을 맞는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야!” 두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테살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지만 분하게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는 대귀족의 신분이고 자신은 노예일 뿐이니, 설령 정말 곤장을 맞는다 해도 철저한 신분제사회인 이곳에선 억울함을 알아줄 이조차 없었다. 노예의 신분이라는 입장이 절감되며 가슴에서 울분이 솟아올랐다. 다 같은 사람이거늘, 어째서 태생의 이유만으로 자신을 골탕 먹인 놈을 한방 때려주기는커녕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그놈의 노예타령, 지겹다. 노예라서 전전긍긍해야하는 것은 쿤의 일만으로도 족하다. 노예만 아니었더라면 명줄 아끼느라 쿤의 진심에 대해 돌아볼 겨를도 없는 지경까진 아니었을 텐데.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으름장을 쳐도 두조가 몸을 낮출 생각을 하지 않자, 테살은 이렇게 말했다. “흐응, 황제폐하의 총애를 받는 몸이라고 대 귀족도 거리낄 것 없다 이건가? 이런 하극상이라니! 통탄할 데가! 나중에는 황제폐하의 머리꼭대기까지 앉아 놀려고 들겠구나!” 말 함부로 하지 말고 그 입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폐하의 총애를 업고 한낱 노예의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더라는 소문에 두조 뿐만이 아닌 쿤 칸칸까지 욕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건방지고 무례하다는 소리 따위 백만 번 쯤 들어도 상관없지만, 자신의 그런 태도로 인해 쿤이 피해를 보도록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그런 말들에 타격을 입는 것은 두조가 아닌 쿤이기 때문에...... 그는 이 나라의 황제니까. 두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렵사리 무릎을 꺾으려는 찰나. 테살이 두조의 어깨를 꽉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 의아한 눈초리로 두조가 바라보자 테살은 갑자기 와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우스워 죽을 것 같다는 듯 배를 움켜잡은 그는 손을 마구 휘저으며 말했다. “으하하하, 장난 좀 친걸 가지고 정색하기는!” “.........장난......” “우린 친구라고 말했잖아? 그깟 예의쯤 안 차리면 어때. 내가 좀 짓궂긴 하지만 거짓말은 안한다구. 이 테살님이 노예와 친구를 먹는 것도 웃기지만, 노예와 친구하지 말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테살은 “순진해서 귀엽네!” 이따위 소리나 주절거리며 쿠션에 털썩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바구니를 열어 보이며 말했다. “쨔잔~ 오늘도 맛있는 걸 가지고 왔지! 대추하고 살구과자인데 아주 맛있어. 씨를 빼고 설탕을 녹여 굳힌 거라 달콤해. 자, 먹어봐.” 두조는 어깨를 굳히고 바르르 떨었다. 안면을 싹 바꾸고 으름장을 놓을 땐 언제고 장난이었다고? 친구 좋아하시네! “그게 장난이었다고요? 그렇게 불쾌한 것도 장난입니까! 맛있는 것 따위 필요 없어요! 당장 돌아가 주......” 버럭버럭 소리치던 두조는 테살이 과자 하나를 입에 쏙 밀어 넣는 바람에 엉겁결에 입을 다물었다. 계속 사람 우습게 볼 거냐고 다시 소리치려는데 테살이 자기도 과자 하나를 씹어 먹으며 말했다. “나야 장난이지만 다른 자들에겐 장난이 아닐걸.” “그...!” “네가 그래서 폐하의 총애를 받으면 곤란하다는 거야. 폐하께서 너를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수는 있겠지만 귀족으로 앉힐 수는 없어. 설령, 정말 억지를 써서 앉힌다 하더라도 그건 절대 안 될 일이고 네가 계속 노예로 남아있는 것보다 더 좋지 못한 상황을 불러일으킬 거야. 여태까지의 폐하는 남색과 사치를 좋아하고 제멋대로이기 그지없는 성격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분이셨으니까. 너라는 존재는 폐하의 황권을 흔들리게도 만들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요소야. 내 말, 이해하겠어?” “.........” 두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입안에서 달착지근하고 끈적끈적한 과자가 녹아내렸다. 과자는 아주 맛있었다. 꿀타래를 씹는 식감이면서도 지나치게 달지 않은 풍미를 자랑했다. “그러니까 너무 원망 마. 방해를 할 수밖에 없어. 더군다나 네가 진심이 아니라면... 폐하를 빨리 단념시키도록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일 아니겠어?” “대체 어떻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마음 같아서는 널 빼돌려 고향에라도 돌려보내주고 싶지만... 폐하 성질 알잖냐. 그리 되면 눈이 뒤집히실 거 같고, 뭐, 그에 대한 방법은 네 몫으로 남겨둘게.” 두조는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단념밖에는 없는 건가요?” “왜? 아쉬워?” “폐하가 가엾지도 않습니까.” 두조가 노려보면서 하는 말에 테살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쩔 수 없어. 그분은 황제폐하이신걸.” “제가 진심이라면요? 저도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폐하도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요? 제가 정말... 설령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폐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면, 그래도 안 됩니까?” 테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된다 안 된다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지. 황제는 노예를 사랑하면 절대 안 된다는 법 역시 어디 적혀 있는게 아니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래도 안 됩니까? 하고 내게 반문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글렀다구.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라고 소리쳐야 진짜인거지.” 두조는 멍해졌다. 그런 건가. 난 역시, 쿤을 사랑하는게 아닌 건가. 어젯밤, 미워하지 말아 달라 말하는 그에게 충동적으로 키스했다. 진심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의 모든 걸 알고 가지고 싶다고 느꼈다. 그 순간 끓어오른 감정만큼은 진실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은 쿤을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무언가의 확신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결국, 사랑은 아닌 것일까. 고뇌에 빠져있는 두조의 입에 과자 하나를 더 밀어 넣고 테살은 물었다. “맛있지?” 두조는 툴툴거리면서 대꾸했다. “예에, 맛있습니다.” “봐, 얼마나 좋은 친구냐? 아프다고 맛있는 거 들고 병문안까지 오고. 응? 그러니까 내가 어쩔 수 없는 심술 좀 부렸다고 나한테 화내고 그러면 안 된다?” 두조는 싱글거리는 테살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적이야 아군이야. 두조를 실컷 놀리고 별궁을 나온 테살은 쿠칸의 처소로 가지 않고 황궁 안에 있는 바레사를 찾아갔다. 근심이 가득 낀 얼굴로 바닥을 보면서 걷고 있던 그는 멀리서 테살을 발견하고 움찔, 하더니 곧장 몸을 돌려 그를 못 본 척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테살은 킬킬 웃었다. 질겁하는 저 모습이 엄-청 귀엽다는 걸 그는 모른단 말이지. 냐~하하하하 괴상망측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를 쫓아가 등 뒤에 찰싹 들러붙은 테살은 우후훗 그의 귀에 바람을 불어 넣으면서 말했다. “바닥에 금화라도 떨어졌나요? 뭘 그리 세상 걱정근심 다 짊어진 표정으로 걷고 계신 겁니까?” 진저리를 치면서 테살을 떼어낸 바레사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귀를 마구 문질렀다. “제가 걱정을 하든 근심을 하든 테살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제발 길가는 사람에게 달라붙는 짓 좀 하지 마십시오!” “어라라? 그런 말씀 섭합니다~ 왕년에 바레사님과 제가...” “뜨거운 밤을 보냈다느니 속궁합이 찰떡같다느니 하는 소리는 지긋지긋합니다!” 테살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레사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지나가던 시녀들이 바레사가 외친 소리에 깜짝 놀라 바라보다가 테살의 시선에 후다닥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테살은 느물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도 이렇게 크게 소리치실 필요까지야...... 남들이 다 듣지 않습니까.” 바레사는 안 그래도 심사 복잡해 죽겠는데 테살의 능글한 얼굴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니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바레사는 평소 그 냉정하고 점잖은 사람이라고 생각 할 수 없는 거친 동작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으르렁거렸다. “대체 언제까지! 그 일을 왈가왈부 할 참입니까! 수리화를 써서 비겁하게 딱 한번 쓰러트려 놓고서는......! 제 인내심에도 한계란게 있습니다. 뒤가 헐어 볼일도 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시지요!” 그래도 겁을 상실한 테살은 몸을 비틀면서 콧소리를 냈다. “아흥~ 무섭습니다, 바레사님. 저, 앞은 자신 있지만 뒤는 처음이라서요...... 침대위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다는 바레사님이 인내심의 한계가 끊어지면 얼마나 거치시려나~ 저, 감당할 수 있을까요?” 바레사는 울컥했다. 하마터면 뺀질뺀질한 얼굴을 정말 후려칠 뻔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으드득 갈면서 참았다. 이런 놈을 상대해봤자 손해나는 건 이쪽이다. 최대한 말을 섞지 않는 것만이 최선책이야. 바레사는 훅훅 호흡을 고르고 테살을 놓아주었다. 그는 잠시 꾹 쥔 주먹을 바르르 떨다가, 흐으으으으 하는 신음 비슷한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시 무표정이 되고 나서야 바레사는 테살을 응시했다. “무슨 볼일입니까.” 테살이 만날 때마다 복장을 뒤집어놓긴 해도 볼일이 없으면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테살은 히죽 웃고는 말했다. “볼일이 있느냐는 그런 차가운 어조는 슬픕니다. 바레사님의 근심을 조심이나마 덜어드리려는 제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두조에게서 폐하의 마음을 멀어지게 만들 수 있는 흉계라도 있다는 소리십니까? 보다시피 요전 당신의 계략은 폐하께서 본심을 깨닫게 하는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만?” “와, 흉계니 계략이니, 너무 하시네. 저를 그렇게 나쁜 놈으로 몰아가지 마십시오. 그냐앙~ 좀 짓궂은 장난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귀여운 훼방이지요.” 귀여운게 다 얼어 죽었군. 바레사는 속으로 그렇게 욕을 했지만 무표정을 깨트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좋은 방도라고 해두지요. 좋은 방도라도 있는 겁니까?” 테살은 후후 웃고 말을 이었다. “사실 말입니다, 저희가 노예는 아니 됩니다! 이렇게 깽깽거려봤자 사랑에 빠진 폐하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릴 리 있겠습니까? 엄청나게 두꺼운 야자껍질이 눈에 확 씌여 있을 텐데 말이지요. 몸이 달아하는 것은 폐하이니 그분을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폐하를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폐하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 마음의 행방을 추궁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폐하와 똑같은 외모를 가지고 여자의 성별을 가지고 있지요.” 바레사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황후마마 말씀이십니까?” 테살은 대답대신 씩 웃었다. 바레사는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건 폐하에게 너무 위험합니다. 두 분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숙적인데, 황후마마에게 폐하의 약점을 넘기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허나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이용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두조를 별궁에 데려다놓고 옷이니 보석이니 바치고 있는데 황후마마께서 두조를 가만 놔두시려고요. 천만에요. 벌써 그가 노예라는 것도, 폐하께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다 꿰고 있을 겁니다. 지금쯤 이걸 어떻게 이용해먹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계실 테지요.” “그러니까...... 그 이용을 폐하의 마음을 단념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자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폐하가 두조에게 휘둘리도록 내버려둔다면 후일 정치적으로야 이용해먹을 수도 있겠지만, 황후께서 어디까지나 폐하의 부인인 이상 폐하께서 고작 노예를 총애하는 것은 황후마마의 체면과 권위에도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폐하를 휘두를 수 있는 결정적인 카드를 손쉽게 사용하려 들겠습니까?” “참 우스운 일이지만 황후께서는 폐하께서 단지 남자라서 황위를 차지하셨다는 이유로, 폐하께서는 황후께서 여자라는 이유로 열등감을 품고 계시지요. 두 분은 거울에 비춰보듯 똑 닮았습니다. 외모뿐만이 아닌 성격까지도, 칸칸이 아니랄까봐 말이지요. 애초에 폐하께서 그러시듯 황후의 성격상 이런저런 계산보다 폐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쪽을 더 원하실 겁니다. 정치적인 일을 하려면 골치가 아프기 마련이죠. 이것저것 다 따져야 하니 재미도 없고요.” 바레사는 망설였다. 시에 칸칸을 이용해서까지 쿤의 마음을 접게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일까? 폐하의 진심을 짓밟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모든 일이 잘되어 쿤이 그저 육욕으로만 남자들을 침대위로 끌어들이는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상처받은 나머지 더 엇나간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바레사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래도 상처받고 저래도 상처받을 거라면 지금 상처받는게 낫다. 더 깊은 관계가 되었다가 사랑하는 이가 변질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야, 아직 짝사랑일 때 끝나는 쪽이 더...... “그럼 어찌 황후마마를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결심을 굳힌 바레사의 질문에 테살은 대꾸했다. “간단합니다. 제게 편지 한통만 쓰십시오. 두조와 폐하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고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상의의 편지를 말입니다. 황후께서 호기심에라도 두조를 불러들이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될 겁니다. 제가 그리 만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낯모르는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리 질투심을 불태우던 폐하가 아니십니까. 똑같은 얼굴이지만 여자인 황후께 열등감을 품고 있는 폐하께선 두조가 황후와 시선만 마주쳤다고 해도 배신감을 느낄 겁니다. 그에 황후께서 가벼운 자극만 조금 첨가해주신다면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을 테지요.” 쿤의 열등감과 자존심을 이용하는 것이기에 썩 내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테살놈과 함께 일을 꾸민다는 것이 무척 찝찝했다.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수 없이 바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폐하가 자신에게 진노한다 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 각오하면서. 그날 저녁, 바레사는 자신의 처소에서 테살에게 편지를 썼고 시종에게 그것을 바로 전하라 일렀다. 테살은 다른 쿠칸들이 있는 앞에서 바레사의 편지를 받고 “바레사님이 내게 무슨 일이시지? 황제폐하의 일로 긴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건가?” 하고 호들갑을 떨었으며 읽은 후엔 보란 듯이 자신의 방 탁자위에 놓아두고 다른 쿠칸의 방에서 잤다. 그 편지는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은 시에 칸칸이 느긋하니 몸치장을 할 무렵 그녀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는 뭐가 재미있는지 연신 쿡쿡거렸다. 다 읽은 편지를 램프의 불꽃으로 태워버리고 시에 칸칸은 수석시녀 아멘치타에게 말했다. “지금 폐하의 별궁에 좀 다녀와야겠구나.” “네? 별궁에요?” 그녀는 기분 좋은 듯 긴 금발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 넌 소문도 듣지 못했느냐? 그곳에 폐하께서 귀히 여기시는 손님이 묶고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듣긴 했습니다만......” “가서 내가 폐하의 부인된 도리로 부군의 귀한 손님접대를 소홀했다 사과드리고, 오늘 차라도 한잔 같이 마시기를 청한다 전해라. 내 황후전의 테라스에서 기다리겠다고......” 아멘치타는 미간을 모았다. 그 초대는 거절당할 것이 뻔했다. 그는 쿤 칸칸이 한눈에 반하여 애지중지하고 있는 외국인이라는 소문이 짜했기 때문에, 그의 마누라인 시에 칸칸의 초대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멘치타가 망설이는 분위기에 시에 칸칸은 홀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는 말했다. “으응... 그래, 내 호위무사들을 데려가렴. 내 초대를 거절하시거들랑 정중히 모셔오도록 해.” 말이 정중히지 강제로 데려오란 소리다. 그녀의 말에 토를 달고 싶진 않았지만 폐하의 손님을 잘못 건드렸다가 경을 치를 것이 두려워 아멘치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나 이 사실이 폐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시에 칸칸은 씨익 웃었다. 고양이가 웃듯이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오싹한 미소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제 아무리 폐하께서 아끼는 손님이라 해봤자...... 노예니까. 감히 황후의 초대를 거절하고 주제를 모르거들랑 목만이라도 데리고 와!” 그날 두조도 늦게 일어났다. 어제 쿤이 보낸 사람들에게 잔뜩 시달리고 테살에게 휘둘리고 고민하느라 잠을 설친 탓이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시롭과 함께 “테살은 적인가, 아군인가.” 를 놓고 심도 깊은 토론을 나누던 중이었다. 시롭이 뭘 당연한 걸 고민하느냐며, 테살은 당연히 적이다! 믿을 건 나뿐이다! 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바깥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폐하의 별궁에 기거하고 있는 손님께서는 속히 나와 황후마마의 전갈을 받으시오!” “!” 두조도 놀랐고, 시롭도 놀랐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빠르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두조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어, 어쩌지? 나가봐야 하나? 나가면 예는 어디까지 차려야 하죠?” 시롭이 기겁을 하면서 말했다. “나가긴 어딜 나가? 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없는 척, 아예 죽은 척 하고 있으라고! 밖에서 무슨 난리가 나도 나오면 안 돼!” 그 당찬 시롭이 침을 꿀꺽 삼키고 전쟁터에 나가기라도 하는 듯 비장한 얼굴로 일어섰다. 덩달아 두조도 침을 꿀꺽 삼켰다. 시롭의 모습이 바깥으로 사라지자 두조는 숨을 죽였다. 문이 없었기에 바깥에서 나누는 대화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시에 칸칸의 은혜가 모든 백성들에게 가득하기를! 별궁의 시녀 시롭 아드레이가 황후마마의 전갈을 대신 받잡나이다. 지금 별궁의 손님께서는 몸소 황후마마의 전갈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시옵니다.” “어찌 감히 황후마마께서 찾으시는데 받지 못한다는 말이냐!” “몸이 무척 편찮으셔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는 상황이오니 황후마마의 전갈은 제가 대신 받아 전해드리겠나이다.” “황후마마께선 그동안 부군의 귀한 손님께 변변찮은 접대한번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오늘 꼭 별궁의 손님을 황후전에 모시고 싶다하셨다. 당장 그 분을 모셔갈 터이니 채비토록 해라!” “말씀드렸다시피 전갈조차 직접 받을 수 없는 상태이시옵니다. 지금의 건강상태로는 억지로 황후마마를 뵙는 것조차 송구하오니 건강을 되찾으신 후에 방문하실 것입니다.” “황후마마께서는 꼭 오늘 손님을 뵙자 하셨다! 황후마마께서 다른 이에게 맞춰 일정을 바꾸셔야겠느냐? 듣자하니 괘씸하구나! 당장 나와서 황후마마의 전갈을 받으라고 고하지 못할까?” 두조는 자신이 나가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안절부절 했다. 의연한 모습으로 나가 시롭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싶었지만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시롭의 말이 떠올라서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깥은 별궁을 지키는 병사들과 시롭, 아멘치타와 무사들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시롭은 어지간해서는 물러서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숙이고 있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이대로라면 끌고라도 갈 기세였다. 지금 두조를 지켜줄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빨리 누구든 이 상황을 폐하께 알려 이들을 막아줬으면 싶었지만 그러자면 적어도 폐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아무리 황후마마의 전갈을 들고 온 자들이라도 이리 무례할 수가 있는 노릇이오? 이곳은 폐하의 손님이 묶고 계신 별궁이오! 아픈 손님을 이리 끌어내라는 법이 어디 있소! 손님을 대접하기도 전에 욕보이는 것이 황후전의 법도요? 나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그런 법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소!” 시롭의 말에 아멘치타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 시녀주제에 황후마마를 직접 모시는 자신에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대들다니. 같은 시녀라도 그들은 급이 달랐다. 시롭은 평민으로 본디는 바레사의 처소에서 일하던 시녀였고, 아멘치타는 귀족가문의 여식으로서 집안 대대로 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셔왔던 것이다. 본래라면 시롭은 말대답은커녕 아멘치타를 정면으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아멘치타는 시롭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일갈했다. “그렇다면 고작 노예가 황후마마의 전갈을 무시하는 법도는 어디 법도라는 거냐! 제 아무리 별궁의 손님이라 해도 피라밋 공사장에서 일하던 벌레만도 못한 역노가 아니더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폐하의 손님임을 생각해서 예우를 갖춰 청했거늘 황후마마의 전갈을 개 짖는 소리만도 못하게 여기다니! 용서할 수 없다! 당장 저 노예를 끌어내라!” 시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조가 노예란 걸 알고 온 거라면 쫓아낼 방도가 없었다. 별궁의 병사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자가 노예라는 말에 주춤하는 사이, 아멘치타가 끌고 온 황후의 호위무사들이 별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멘치타는 시롭의 뺨을 매섭게 후려쳤다. 시롭이 넘어지자 그녀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시롭의 발을 밟았다. “건방지게...... 고작 노예를 모시고 있는 시녀 주제에, 네 주인이 폐하의 총애를 입었다니 너까지 뵈는게 없는 거냐?” 시롭은 아멘치타를 노려보았고, 아멘치타는 시롭의 뺨을 또 때렸다. “감히 어디서 눈을 치켜뜨는 거냐! 눈을 파내버릴 줄 알아라!” 곧 두조는 호위무사들에게 짐짝처럼 질질 끌려 나왔다. 아멘치타는 두조에게 다가가서 그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존귀하신 황후마마를 두고 이런 보잘것없는 사내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단 말이냐?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구나!” 그때였다. 싸늘한 목소리가 두조를 비웃던 아멘치타의 귀로 날아들었다. “이 나를 지나가던 개가 비웃는단 말이냐?” 아멘치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삭 가셨다. 그녀는 곧장 몸을 돌리고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그 전에 칼날 같은 채찍이 그녀를 후려쳤다. 짜악! 아멘치타의 뺨을 할퀴고 치마를 길게 찢고 튕긴 채찍은 쿤에게로 되돌아갔다. 다시 한 번 맹수의 발톱 같은 채찍이 바닥을 후려치자 아멘치타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무표정한 쿤 칸칸이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감히 내 취향을 모욕하는구나.” “폐...폐하.” “폐하!” 시롭이 반색하며 머리를 조아렸고 그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예를 취했다. 두조를 붙잡고 있던 호위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두조 역시 엎드려서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쿤은 신분의 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이마를 바닥까지 붙인 것은 두조 뿐이었던 것이다. “두조, 일어나라.” 명령을 받은 두조는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만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엉거주춤 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 모습에 쿤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라지 않느냐!” 두조가 일어나자 쿤은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아멘치타의 턱을 채찍자루를 이용해서 들어올렸다. 눈꺼풀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한 그녀를 보고 쿤은 냉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지 네가 설명해봐라.” “폐, 폐하......” 아멘치타의 입술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하지만 여기서 쿤에게 터지나 돌아가서 시에에게 터지나 그게 그거였다. 적어도 자신의 주인에게 터지는게 낫겠지 싶어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화, 황후마마께서 별궁의 손님을 뵙기 원하시어... 모, 모시러 온 것뿐입니다.” 쿤은 호위무사들을 눈으로 스윽 훑어보고는 말했다. “모시러 온게 아니라 끌고 가려는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리느냐? 감히 황제의 손님을 허락도 없이 끌어내어 가려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아멘치타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저는 황후마마의 전갈을 전하려 한 것뿐입니다. 헌데 저 자가 노예주제에 황후마마의 명을 받들기는커녕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황후마마께서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부군의 손님이시니 한번 뵙자는 것인데 무례하지 않습니까.” “그런 초대는 저 놈이 허락한다 해도 내가 허락할 수 없어. 비록 노예라고 할지라도 저건 내 노예야! 시에 칸칸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폐하! 저 자는 노예주제에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감히 황후마마의 전갈을 무시했습니다. 아무리 저 노예가 폐하의 것이라고는 하나 그런 불경을 저질렀는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내 노예이니... 처벌을 해도 내가 하고, 죽여도 내가 죽인다. 무례를 저지른 것의 처벌을 하자고 한다면 네년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 개소리 운운하며 나를 모욕했으니 여기서 네 목을 잘라 벌해야겠느냐? 애초에 내 소유인 것을 내 허락부터 먼저 받고 청했어야지 제멋대로 끌어가려 한 네년의 잘못이다! 황후에게 전해! 저 노예를 만나고 싶거들랑 내 허락부터 받으라고! 물론 내 발치에 와서 엎드려 빈다면 또 모를까, 절대 허락해주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서 자루로 아멘치타의 얼굴을 후려쳤다. 악, 하는 짧은 비명이 터지자 두조는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은 남자라서 좀 패도 된다지만 여자를 그리 때리는 걸 보니 새삼 쿤의 성격이 엄청 더러워 보였다. 한국에서라면 인간 말종이다. 아멘치타는 코피를 흘리면서 이를 갈았다. “황후마마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쿤의 눈썹이 씰룩였다. “협박하는 것이냐?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저 노예를 보내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거라 생각하시게 될 것이란... 악!” “이리 혀를 놀리다니 겁을 상실했구나! 내 네 년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어도 내 말을 전하라고 애써 참고 있었는데, 시에에게 따로 시종을 보내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네 년을 죽여 놓고 봐야겠다!” “아악!” 머리끝까지 화가 난 쿤이 채찍을 크게 휘두르려는데 그런 그의 팔을 두조가 달려가서 붙잡았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변했다. 두조는 쿤에게 매달려서 아멘치타를 가로막고는 말했다. “폐하! 참으세요! 때릴데도 없는 여자를 때려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왜 말리는 것이냐! 너를 끌고 가려고 한 년이다! 나를 모욕 준 년이고! 감히 시에를 믿고 시녀주제에 나를 협박하는 것을 너도 듣지 않았느냐!” “그, 그래도 참으세요! 좋은게 좋은 거라고...” “무슨 헛소리야! 비켜!” “으아아! 이, 이봐요. 빨리 가요! 폐하는 내가 말릴 테니까 폐하 화 그만 돋우고 얼른 가라고요!” 아멘치타는 쿤과 옥신각신하며 그렇게 말하는 두조를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허락 없이 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말리다니... 쿤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눈을 시퍼렇게 빛내는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 같은데 저 놈이야 말로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싶었다. “이놈이! 네가 대신 맞기라도 할 참이냐?” “차라리 절 때리세요!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황후마마와 싸워서 뭘 어쩌시겠다고...... 그리고 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명색이 황제이신데 이렇게 감정 따라 사람을 때리고 그러시면 안 되죠!” “네놈이 주제를 모르고 또 나에게 훈계를 하려 해? 네놈은 괴상한 취미라도 있는 것이냐? 그렇게 맞고도 또 맞고 싶어!” “빨리 좀 가라니까요!” “아니면 저 계집에게 반하기라도 한 것이야?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놈이 아니더냐!” 그렇게 쿤과 두조가 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씨름을 하는 사이 아멘치타는 이왕 말려 주는거 얼른 몸을 피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손짓으로 호위무사들을 불러 별궁을 빠져나갔다. 그걸 보고 쿤이 두조 보고 비키라는 둥, 비키지 않으면 네놈부터 썰어 죽일 거라는 둥, 그리 도망간다고 내가 네년을 못 죽일 것 같냐는 둥, 갖은 험악한 소리를 퍼부어댔다. 아멘치타가 모습을 감추자 두조는 두 손으로 붙잡고 있던 쿤의 손목을 놓아주었고, 얼른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다. 보나마나 이성을 잃은 쿤의 채찍이 날아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은 씩씩거리면서 채찍을 손에 들고만 있었다. 악을 쓰며 우는 어린애들이 그러듯이 분이 안 풀린다는 듯 발을 마구 구르더니 채찍으로 괜한 바닥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에이잇! 젠장! 젠장!” 바닥에 미친 듯 채찍질을 하며 화풀이를 하는 쿤을 별궁의 병사들과 시롭이 죄다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란 건 두조였다. 뻑하면 폭력쓰기를 서슴지 않던 쿤이 마음 같아선 자신을 개 잡듯 두들겨도 시원치 않을 텐데...... 참고 있다니. 지난번 자신을 때린 일을 후회하고 있다며, 미워하지 말아달라더니 진심이었구나. 그런 생각 때문에 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발작하고 있는데도 그 모습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분이 풀려서가 아니라 지쳐서 채찍을 바닥에 내던진 쿤은, 숨을 몰아쉬며 움직임을 멈췄다. 애꿎은 채찍질로 하얗게 속살을 드러난 포석을 바라보는데 시에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려선 안 되었다. 두조가 황후전에 끌려가도 태연한 척 했어야 하는 건데...... 두조가 말리는 바람에 그 요망할 시녀까지 그냥 보내주고 말았으니 대체 시에가 어떤 생각을 할지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리되면 시에는 절대 두조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알력 싸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가지려 들 것이다. 외모만큼이나 비슷한 성격이기에 쿤은 시에의 사고방식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자신 역시 시에가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있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을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죽이기라도 할 테니까. 왈칵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쿤은 몸을 홱 돌려 두조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손을 낚아채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폐하?” 별궁의 다리를 가로질러 곧장 자신의 처소로 간 쿤은 거처를 지키고 있던 친위대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모든 친위대원들을 소집하여 내궁의 경계를 강화해라! 특히 내 처소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감시해야한다, 알겠느냐! 이 자에게 눈곱만큼이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예!” 쿤은 두조를 끌고 전에 두 사람이 식사를 했던 응접실과 서재를 너머 황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침소에까지 이르렀다. 두조는 몰랐지만 사실 황제의 애첩이든 후궁이든 황후조차 이 침소에서 잘 수 없었다. 보통은 황제가 상대의 처소로 가거나 별궁에서 만나기 마련이고, 설령 침소까지 불러들인다 해도 관계가 끝나면 즉시 물러가야 했다. 이곳은 황제가 무방비하게 잠들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두조를 데려다 놓은 쿤은 그를 침대에 앉혀놓고 한참을 불안한 듯 왔다갔다했다. 시에가 황제께서 노예에게 넋이 나갔느니 별궁에 모셔두고 자신을 무시했느니 떠들 것은 뻔한 일이고, 대신들의 상소문이 줄을 이을 것이다. 차라리 바레사에게 사가를 한 채 마련하라고 해서 그곳에 두조를 빼돌릴까 싶었지만, 황제인 자신이 연애 좀 하자는데 상대를 숨기고 은밀히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두조를 그리 바깥에 내놓았다가 자신 몰래 여자랑 놀아나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무엇보다 사가에 보낸다고 그곳을 찾지 못할 시에가 아니었다. 시에는 수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어느 가게의 무희가 무슨 색깔의 속옷을 잃어버렸는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뿐이랴, 그것을 어느 귀족집 자제가 훔쳐가 무엇을 했고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도 맘 내키면 전부 알아 볼 수 있었다. 황제인 쿤의 주변에 대한 것만큼은 꿰뚫고 있을 수야 없겠지만 사가에 드나들 바레사의 움직임까지 다 숨길 순 없는 것이다. 그녀가 자객이라도 보내 두조가 허망하게 죽기라도 한다면...... 아직 한번 해보지도 못했는데 몇 번이고 죽이지 않고 아껴(?)두었던게 억울해서라도 미쳐버릴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곳을 찾으라면 지금으로선 이 곳 뿐이다. 황제의 침소에 어찌 감히 노예가! 라면서 바레사부터 거품을 물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쿤은 근심하다가 홱 몸을 돌려 두조의 어깨를 와락 붙잡고 말했다. “한동안은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야 한다. 수틀리면 욱한 나머지 시에가 널 죽이려 들 수도 있으니까......” 별궁에서도 한참을 갇혀있다 시피 했는데 또 나가면 안 된다는 말에 두조는 미간을 모았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시에가 네게 흥미가 떨어졌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쿤이 두조를 사랑하는 이상 시에의 흥미가 떨어질 리가 없다. 이렇게 그를 침소에 가둬둔다고 하더라도 대체 언제까지 시에를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두조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쪽이 이용가치가 훨씬 높기에 시에가 두조를 죽이려 들 가능성은 낮았다. 그가 쿤에게 한 것처럼 잠자리에서 창피라도 준다면 모를까, 성격상 살려두고 쿤의 애간장을 이리 태우고 저리 태우고 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두조가 시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쿤이 두조에게 관심을 끊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두조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 쿤은 의연할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다 해도 참을 수 없는데, 시에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고 털이 곤두섰다. 자신이 봐도 시에는 지극히 아름다웠다. 본인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여자고,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유일하다시피 한 존재였다. 어째서일까. 시에를 만나는 순간 두조가 그녀에게 반할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확신에 가까웠다. 쿤은 한참동안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국적인 부드러운 얼굴생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체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정갈하게 느껴지는 몸. 하지만 여자에게 발정할 수밖에 없는 사내이고 출신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천한 노예이다. 멍청하고 눈치도 없고 겁마저 상실한...... 남들이 보기엔 아무런 가치도 없을 하찮은 육체와 한줌의 영혼. 그런데 이 자를 빼앗길까 두렵다. “두조.........” 이름만 불러놓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쿤을 두조는 가만히 불렀다. “폐하. 왜 그러시는지요?” “.........” 한참을 망설이던 쿤은 결국 두조의 어깨를 놓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침소를 나가버렸다. 그렇게 나간 쿤이 다시 돌아온 것은 깊은 밤이었다. 두조는 나가지 말라는 말 때문에 무료하게 침소에서 뒹굴다가, 시종이 가져다 준 저녁을 먹고 으리으리한 침대가 부담스러워 긴 의자위에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잠결에 돌아온 쿤의 기척이 느껴지긴 했지만, 잠이 깊이 든 탓일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만이 어렴풋이 깨어있는데, 문득 낯익은 향기가 났다. 수리화였다. 보통 피우는 것보다 냄새가 훨씬 짙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고 있는데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무엇인가가 입술로 와 닿았다. ‘.........’ 그것은 무척 보드랍고 촉촉했다. 손가락이 가볍게 잠든 미동 없는 두조의 턱 끝을 들어 올렸고, 고개가 젖혀지며 입술이 열리자 체온처럼 미지근한 액체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별 맛은 없는데 독한 향기가 콧속을 확 찔렀다.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 뒤를 이어 미끈한 살덩이가 밀려들어와 저도 모르게 그것을 삼키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치열을 훑던 혀는 두조의 늘어진 혀를 부드럽게 감아 올렸다가, 살짝 강하게 빨아 당겼다. 묻어나온 침을 꼴깍 삼키고 혀를 놓아주면서 입천장을 스윽 핥아 올렸다. 그 간지러움에 두조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입술에 닿았던 입술이 멀어지자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눈에 반투명한 막이라도 씌인 것처럼 뭔가 잘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이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쿤이 보였다. 묘하게 주변이 흐릿했지만 그 서글픈 표정만은 선명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근육이 다 풀린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감기약을 먹었을 때처럼 온 몸이 붕 뜬 감각이었다. 멍한 표정의 두조에게 쿤은 쪽, 쪽, 입을 맞췄다. 어린애가 뽀뽀하듯 부드러운 입술에 입술도장을 내리찍던 쿤은 두조의 코끝과 이마와 눈꺼풀과 뺨과 귓전에까지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숙이 입을 맞췄다. 달착지근한 쿤의 향기와 함께 혀가 밀려들자 두조는 눈을 감았다. 아랫입술을 빨고 혀끝을 살짝 깨무는 그 움직임이 기분 좋았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끝도 기분 좋았고,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에 가슴을 붙이는 움직임도 기분 좋았고, 허벅지위로 느껴지는 두툼한 앞섶의 열기나 다리를 감는 그의 다리도 기분 좋았다. 그의 밋밋한 가슴이나 단단해져가는 다리 사이도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조의 입술을 탐하던 쿤이 가는 신음을 흘렸다. 하아, 하는 달아오른 한숨이 그의 젖은 입술을 스치고 지나쳤다. 그 입김이 온 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불이 붙듯 다리 사이가 뜨끈해졌다. 쾌감을 자각하자 온 전신이 민감해졌다. 옷깃 사이로 쿤의 손길이 헤치고 들어오자 느껴지는 피부의 예민함에 두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조의 위에 올라탄 쿤은 느릿하게 두조의 복부와 가슴을 쓸었다. 탁해진 두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는 망설였다. 하지만 곧 결심을 굳힌 듯 재빨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둑, 하고 묵직한 벨트를 풀어 버리고 다리 사이를 단단히 죄고 있는 속옷을 풀어 내렸다. 약의 효력이 다 하기 전에 해치워야 된다는 성급한 마음 때문에 손이 자꾸만 엇갈렸다. 평소라면 한손으로라도 풀어버렸을 속옷인데 오늘따라 말을 듣지 않았다. 볼일은 어찌 보려고 이리 단단히 묶어놨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쿤은 욕설을 씹었다. 매듭 사이로 손가락을 끼우고 입술을 깨문 채 안간힘을 쓰는데 두 손을 두조가 붙잡아 왔다. 그가 자신을 말리려 한다 생각한 쿤은 두조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부술 듯 세게 쥐어오는 그 힘에 놀라 시선을 들었다. 흔들리는 쿤의 눈동자를 두조의 까만 눈동자가 얽어 들어갔다. 한 호흡 다음의 순간. 두조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입술을 거세게 부딪쳐왔다. 잡아먹을 듯한 기세에 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읍...!” 쿤이 아무리 핥고 빨아도 물렁하게 쳐져만 있던 혀가 날카로운 기세로 입안을 침범해 들어왔다. 쿤의 혀를 제 것처럼 빼앗아간 두조는 혀뿌리를 뽑을 기세로 빨면서 거칠게 입술을 문질렀다. 격렬한 키스에 숨이 막혔다. 심장이 폭발할 듯 뛰었다. 쿤은 눈을 질끈 감고는 두조에게 붙잡힌 손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키스에 몰입한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쿤이 손목을 비틀며 신음하자 그제야 손아귀의 힘을 조금 풀었다. 다가들었던 것만큼이나 거칠게 입술이 떨어졌다. 얽혔던 혀가 입술보다 나중에 떨어졌다. 덕분에 툭, 하고 침 한 줄기가 쿤의 턱으로 떨어졌다. 두조는 흐를 새라 곧장 혀를 내밀어 턱을 길게 핥아 올렸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라도 핥아 올리는 모양새였다. 그러자 키스를 하는 동안 숨이 찼는지 아니면 흥분 때문인지 쿤이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조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으스러져라 붙잡고 있던 쿤의 손목을 놓아주고 한 손으로는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한 손으로는 뒤로 접혀있던 쿤의 다리를 펼쳤다. 그대로 쿤의 몸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긴 의자의 길이가 채 미치지 못해 쿤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미끈한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의 상징인 울대가 헐떡이면서 위아래로 오르내리는데 그것이 엄청나게 섹시했다. 쿤의 턱을 핥아대던 두조는 곧이어 그 울대를 삼켰다. 울대를 따라 솟아난 목줄기를 이빨로 긁으며 빗장뼈를 씹었다. 벨트 말고는 별다른 여밈이 없는 허술한 옷깃을 열고 그의 어깨를 벗겼다. 쿤의 몸은 두조가 반찬삼아 보던 성인 잡지나 비디오의 그 어느 여자들과도 틀렸다. 단단하고 긴 목이나, 솟아난 울대나, 판판한 가슴이나, 작은 유두나, 미끈한 허리나 전부 숨길 수 없는 남자의 몸이었다. 시기심과 동경이 어린 시선으로 애써 외면하던 광고나 포스터 속 남자들처럼 근사한 육체였다. 품에 안기보다는, 내가 저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이상적인 몸매였다. 하지만 이 순간 가슴이 벅차도록 눈앞에 자리한 남자의 육체를 원했다. 풍만한 가슴을 하고 허리를 비틀던 영상 속 그 어느 여자들보다 눈앞에서 움찔거리는 근육이 더 탐스러웠다. 탄력 넘치는 붉은 피부는 살짝 젖어들어 램프의 불빛을 황홀하게 반사했으며 바닥까지 쏟아진 숱 많은 금빛 머리카락은 그 어떤 장신구보다 아름답게 그를 장식했다. 남자라는 성별을 먼저 가늠해보기 보다는, 그냥 눈부시게 아름다운 인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떤 아름다운 존재라는 생각에 넋이 나갔다. 두조는 쿤의 몸을 탐욕스럽게 훑어 내렸다. 머리를 받치는 것이 없어서 쿤은 목에 힘을 준 채 그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두조가 손을 뻗어 유두를 만지작거리자 휘청하고 턱이 젖혀지고 말아버린다. 그 모습이 또 지극히 자극적이었다. 두조는 신기한 기분으로 쿤의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곤두서서 탱글거리며 손가락에 걸리는 그 느낌이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감촉에 입술을 깨문 쿤의 떨리는 눈썹이나 긴장한 턱의 모양 같은 것이 보기 좋았다. 유두를 손으로만 가지고 놀기 부족한 감이 있어 두조는 입술을 내렸다. 혀를 내밀어 유륜과 유두를 한꺼번에 핥았다가 지그시 짓누르며 둥글렸다. 쿤의 붉은 입술에서 달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읏...!” 그 목소리가 오싹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두조는 저도 모르게 쿤을 안은 허리에 손톱을 세웠다. 옆구리를 긁어내려 엉덩이를 쥐었다. 쿤의 엉덩이는 한손에 들어올 만큼 자그마하면서도 굉장히 탄력 있었다. 손바닥에 휘감기듯 찰진 살덩이를 무례하리만큼 마구 주물렀다. 터트리고 싶은 그 손안의 감촉을 참지 못해 두조는 유두에 이를 세웠다. “아앗!” 다소 고통이 섞인 신음에 두조는 부드럽게 입술을 모아 유두를 빨아들였다. 이번엔 달콤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사소한 움직임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몸짓이나 음성이 신기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누군가가 섹스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좀 더 듣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날씬한 배를 훑어 내려가 배꼽에 혀를 박고, 한 번에 쿤의 속옷을 풀어 내렸다. 쿤이 두조의 속옷을 붙잡고 씨름을 했던 것에 비하자면 손쉽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속옷이 치워지자 곤두선 음경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어 시큼한 수컷 냄새를 흘렸다. 부드럽고 달콤한 체향과는 달리 거칠고 본능적인 냄새였다. 언젠가......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그가 제멋대로 자신의 위에 뿌렸던 정액에서 이토록 음탕한 향기가 났다. 어이없게도, 그 냄새를 맡고 침이 고였다. 동양인들과는 달리 금빛 음모 사이에서 솟아난 그건 남자의 성기라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니, 성기는 성기지만...... 맛있는 음식에 가까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두조는 주저 없이 머리를 다리 사이에 묻었다.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쿤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두조...!” 외마디 부름은 귀두를 혀로 말아 빨아들이는 순간 꺼져 버렸다. 쿤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두조는 그것을 억지로 붙잡아 벌리고 금빛 수풀 속에 코를 묻었다. 죽 빨아주자 음경이 별개의 생물이기라도 하는 양 수축하며 입안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것이 또 끝내주게 귀여웠다. 힐끔 시선을 들어 올리니 미간을 찡그리고 손톱을 씹으며 눈을 감고 있는 쿤의 모습이 보였다. 쾌감을 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음미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움츠러든 어깨나 긴장하고 있는 배나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 같은 것들이...... 신음을 내. 두조는 쿤의 성기를 우물우물 먹었다. 쿤이 눈을 질끈 감더니 “히읏!”하는 묘한 비음을 흘렸다. 엉덩이를 같이 주무르자 신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즉각 머리위에서 터지는 그 신음이 흥겹기까지 했다. “으읏, 하아, 아으...... 으응!” 귀두 끝에서 애액이 나오는지 미묘한 맛이 느껴졌다. 쿤이 사정감을 참느라 몸부림을 치며 두조의 어깨를 발로 밀어댔다. 하지만 두조는 꿋꿋이 버티며 쿤의 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흐윽!” 소리 높은 울먹임이 터졌다. 두조의 어깨위에서 발가락이 오므라들며 발톱이 살갗을 긁었다. 음경이 요동치며 사정했다. 입안에서 정액이 뿜어졌다. 두조가 입술을 떼자 침과 섞인 정액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두조는 다소 생소한 감각으로 입가에 묻은 정액을 문질렀다. 강렬한 풋내가 났다. 눈 꼬리를 축축하게 적시고 얼굴을 붉게 물들인 쿤이 그러는 그를 보고 시선을 외면했다. 귓불까지 검붉어지는 것이 엄청나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넌 나, 남자 싫어하잖아.” 두조는 입가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 쿤의 배위에 흩어진 정액을 문질렀다. 미끈미끈하게 젖은 손끝을 유두에 뻗쳤다. 그것을 문질러 유두를 곤두세우며 두조는 뇌까렸다. “남자는... 싫어한다고요?” “그래! 너! 남자 싫어하잖아!” 쿤이 빽 소리치며 두조의 손을 쳐냈다. 두조는 쳐내진 그 손으로 천천히 자신의 속옷을 풀어 내렸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은 아까부터... 조여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요.” 엄청난 크기로 불거져 나온 음경을 보고 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검은 수풀사이에 우뚝 일어선 그것은 기둥을 뽑아다 박아놓은 것처럼 매끄럽고 굵었다. 귀두는 아까부터 흘리고 있던 액으로 젖어 축축했다. 번들거리면서 머리를 치켜든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두조는 신음을 흘렸다. “이상해요, 도대체 어떻게...... 제가 폐하를 거절할 수 있었는지. 이렇게나 당신을 가지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는데.........” “.........” 쿤은 다리를 벌리며 두조를 끌어당겼다. 그의 머리를 붙잡은 채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져. 나도 네 욕망이나마 가질 테니까.........” “......?” 푸른 눈동자가 처연하게 반짝였다. 두조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 가져, 나도 네 ‘욕망이나마’ 가질 테니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쿤은 두조에게 키스를 하려고 다가왔지만 두조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의혹에 싸인 얼굴로 말했다. “......아까...... 먹였던 거 뭐였죠?” 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두조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비껴 내렸을 뿐이다. 방안이 자욱하도록 피어 있는 수리화향. 콧속을 찌르던 그 독한 향기......... “뭔가, 뭔가 먹였군요. 어째서......” 두조가 망연히 중얼거리자 쿤은 그의 머리칼을 확 잡아 끌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쿤의 푸른 눈동자가 아까와는 달리 짐승처럼 번뜩였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이런 애무 따위 필요 없어...... 그냥 날 안으란 말이야! 박고 흔들어서 싸! 약으로 불러일으킨 거짓 욕망으로라도 널 가져야 견딜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왜 이러느냐구?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넌 날 사랑하지도 않고, 내가 남자라서 하지도 못하잖아! 이런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널 가지라는 거지?” 두조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전 물건이 아닙니다... 노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라고요! 아무리 폐하라도 종마처럼 이런 식으로 관계를 갖기는 싫습니다!” “네 마음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네 육신은 달라! 내 노예야! 내거라고! 그러니까 날 안으란 말이야!” 쿤은 악다구니를 쓰며 두조의 뺨을 후려치고 그를 발로 밀어 넘어트렸다. 두조는 긴 의자위에서 굴러 떨어졌고, 쿤은 그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짓누르며 목에 걸고 있던 향유를 음경위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강제로 삽입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 모습에 두조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이라도 가져야겠다는 발상도 화가 났고 이리 무모한 행동에도 화가 났다. 두조는 쿤의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외쳤다. “싫어요! 절대로 안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진심이시니까요!!” 쿤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 두조는 울컥한 마음에 거침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게 폐하의 총애입니까? 절 물건취급하며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짓이요? 이런 식의 관계가 상처 말고 남기는게 또 뭐가 있습니까! 어째서 이렇게 자부심 높으신 분이 제가 당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날이 올 거라곤 자신하지 못하는 겁니까! 고작 이것이 모욕을 당하면서도 절 살려두고 저를 사랑하면서도 지켜야 할 폐하의 자존심입니까!” “닥쳐라!” “폐하의 마음이 고작 이런 거였다면 정말로 실망입니다. 폐하의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생각했던 제가 어리석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저는......” 두조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괴로운 듯 눈을 감고 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저는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폐하를 진실로 안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사랑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매몰차게 내쳤던 만큼 누구보다 뜨겁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마음을 단정하지 못했다. 그가 진심이란 걸 알기에 망설이고 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지러운 주변 때문에 더 알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돌아가는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리듯 이게 진심이다, 하고 단정 짓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헌데 쿤이 여전히 자신의 육체만을 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몸뚱아릴 가지는 것으로 만족할 줄은 몰랐다......... 짙은 실망감이 스며들었다. 침통해하던 두조는 문득 쿤의 가슴이 들썩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그리고 얼어붙었다. 쿤 칸칸이......... 울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투둑투둑 흘러내렸다. 넘치는 눈물이 너무 많아 고일 새가 없었다. 마치 그의 눈에서 홍수가 난 듯 했다. 물이 범람하듯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폐, 폐하.” 두조는 당황해버렸다. 쿤이... 쿤이...... 제멋대로에 오만하고 자존심 빼면 시체인 쿤이... 운다. 자신이 울렸다. 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조가 쿤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그는 그 손을 사정없이 걷어차고 밟았다. “악!” 하는 두조의 비명에도 신경 쓰지 않고 도망치듯 알몸으로 뛰쳐나갔다. 두조 역시 아픈 손의 고통도,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도 잊고 쿤을 쫓아갔다. “폐하! 폐하!” 자신을 부르는 두조의 외침을 무시하고 침소를 나와 달렸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는 모습 따윌 보였다는 생각에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었다. 열 살 이후로는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았는데. 고작 그깟 소리 좀 들었다고 이렇게나 가슴이 아프다니! 자신을 비난하는 두조가 원망스러웠다. 허나 그가 밉기보다 앞뒤 생각 않고 초조한 마음에 일을 친 자신이 더 미웠다. 미운 와중에도 불쌍했다. 천하의 쿤 칸칸이! 모친의 목을 자를 때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총애하던 이를 죽일 때에도 망설이지 않았던 쿤 칸칸이! 하늘 아래 더 높은 자 없으며 더 아름다운 이 없는 쿤 칸칸이! 고작 노예에게 걷어차이고 질질 짜고 있는 꼴이라니! 그는 비밀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화병을 던져서 깨버리고 문을 열었다. 비밀통로의 탁한 먼지와 곰팡내가 훅 밀려들어왔다. 쨍강!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에 쿤을 따라가던 두조는 깜짝 놀랐다. 구르듯이 달려갔지만 기둥들이 얽힌 처소의 한가운데에서 쿤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깨진 화병 조각 때문에 비밀문의 존재를 떠올린 두조는 급히 그곳을 살펴보았지만......... 비밀통로가 속을 알 수 없는 시커먼 어둠만을 쩍 벌리고 있을 뿐, 횃불을 들고 사라진 쿤의 자취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두조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깨진 화병 조각이 무릎을 찔렀지만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울렸다. 그 쿤 칸칸을 울렸다! 자신이 상처 입혔다!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군 것은 다 확실하지 않은 마음으로 믿음을 주지 못한 자신의 탓인데......... 무슨 비난할 주제가 있다고 홧김에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으아아아아! 이 멍청이! 나가 죽어라!” 두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치면서 바닥에다 머리를 쿵쿵 박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혼자 백날 자책해봤자 소용없을 터였다. 사과해야 해, 실언이었다고, 잘못했다고 말해야 해! 당장 쫓아가고 싶었지만 비밀통로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우우우우웅- 울음소리와도 닮은 음산한 바람소리가 비밀통로의 어둠속에서 들려왔다. 이곳에서 길을 잃고 영영 빠져 나오지 못했다는 후 칸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칫 잘못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허나 두조의 기억으론 한동안 꼬불꼬불하긴 해도 갈림길은 없었던 것 같았다. 갈림길이 나오면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지금 빨리 쫓아가면 갈림길 전에 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쿤이 이 비밀통로로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레사나 테살의 품에서, 혹은 혼자 그 눈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쫓아가서 자신이 그 눈물을 닦아줘야 했다. 울린 것도 자신이니까, 달래는 것도 자신이어야만 한다.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쿤은 멀어질 것이고, 사과할 때 역시 멀어질 테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두조는 결심을 굳혔다. 협탁 위를 덮고 있는 천을 끌어당겨 허리에 두르고 벽에 걸려있는 램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바레사는 한숨을 내쉬고 뻑뻑한 눈꺼풀을 문질렀다. 그는 요새 쿤이 심란한 나머지 제대로 결제되지 않고 있는 안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단 당장 처리해야 할 급한 것들만 모아 쿤을 재촉할 생각이었다.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는 쿤 때문에 날이 갈수록 지방의 호족들이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의회에서 싸움질하기 바빴으며 행정부는 피라밋 대 공사의 일만으로도 벅차 죽으려고 하니, 정작 중요한 민생문제나 개선해야 할 세금과 토지제도 같은 것들은 뒷전이었다. 피라밋 같은 것을 지을 때가 아니건만 사후세계에 대한 집착은 황제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특히 쿤 칸칸은 특유의 허영심과 그 집착이 맞물려 황실의 보물을 끌어낼 만큼 피라밋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어쩌면 그의 부친 카이 칸칸이 피라밋의 기초도 채 닦기 전에 요절하여 시신이 안치될 곳을 찾지 못해 한참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신전에 모셔진 것이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쿤의 선대이자 그가 손수 목을 잘랐던 모친 수디 키탄은 카이 칸칸의 사후세계에 대해선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카이 칸칸이 피라밋을 지으려고 모아두었던 자금을 흥청망청 썼다. 쿤이 피라밋을 짓기 위해 황실의 보물창고까지 열어야 했던 것도 그녀의 사치가 너무 심해 황실의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쿤의 허영심은 수디의 허영심을 닮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디처럼 미친듯 사치하지는 않았다. 수디는 역대의 황제들 중 가장 못생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추녀였다. 쿤과 시에가 그녀를 조금도 닮지 않은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그것은 그녀에게 내려진 축복이자 불행이었다. 수디는 임신했을 때 아이들이 자신을 닮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기도를 드리느라 신전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결과로 쿤과 시에는 칸칸의 핏줄답게 아름다웠지만 그녀 자신의 추함은 더 두드러졌다. 그래서 사치로 그 허물을 가리려 했던 것이다. 결국 쿤이 섭정을 하던 그녀를 죽이고 황위에 올라야했고......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피라밋에 집착하고 여자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것만 뺀다면 쿤은 훌륭한 군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황궁에서 자란 사람답지 않은 솔직함에, 수디조차 건드리지 못했던 황실의 보물창고를 터는 과감함에, 피라밋 대 공사를 추진하는 행동력이며 진실과 허울을 가려낼 줄 아는 현명함까지. 정치에 관심이 없다뿐이지 쿤은 결코 우둔하고 어리석지 않았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영민하진 않았지만 정치는 단순히 똑똑하다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어떻게 그를 이끌어주느냐에 따라 역대 황제 누구도 이루지 못한 태평성대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은 젊으시니까... 바레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움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야겠군... 하고 침소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창가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누군가의 인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들어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쉬이 알 수 있었다. 벌거벗은 나신을 가리고 있는 긴 금발만 봐도 그렇다. 바레사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폐하, 이 야심한 밤에 어인일로...... 비밀통로로 오셨습니까?” 바레사는 수행관의 처소가 황제의 비밀통로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쿤은 가끔 소리 소문 없이 그 통로를 통해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알몸으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낮의 소란에 대해서 들은 바도 있고, 두조가 쿤의 침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레사로서는 어떤 일일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쿤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걸칠 것을 다오.” 바레사는 옷가지를 들고 와 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으십니까.” 라고 물으니 “되었다.” 고 고개를 젓는데, 어쩐지 얼굴이 축축한 것 같았다. 멀쩡한 표정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우셨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바레사는 쿤의 어깨에 옷을 둘러주느라 걸친 손을 치우지 못했다. 문득 쿤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바레사의 얼굴이 가까웠고, 그는 가만히 쿤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입맞춤이었다. 쿤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요전에도 자진해서 밤 시중을 들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유혹까지 하는 거냐?” 바레사는 잠깐 생각했다. 굳이 유혹하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리하면 아니 됩니까?” “여태껏 쌓아온 수행관으로서의 네 이미지는 어떻게 하고?” “그런 노예 놈은 잊으십시오. 제가 위로해드리겠습니다.” 쿤은 그리 말하는 바레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바레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바레사, 나를 사랑하느냐?” 바레사는 조금 놀랐다. 그는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경애... 경애하고 있습니다.” 쿤은 후...... 웃고는 바레사의 손을 떼어냈다. “그래. 나도 너를 친애하고 있다.” 바레사는 그것이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레사는 신하의 자세로 되돌아가 한걸음 물러서서 살짝 허리를 굽혔다. 쿤은 밝혀진 램프의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이상한가?”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강요한 내 태도겠지. 그 놈은 언제나 진지했다. 달콤한 입발림으로 나를 꼬드기고 몸으로 간단히 환심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는지 깊이 생각지 않았어. 그냥 내가 남자라서 안 된다는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하기만 했었지.” “폐하.........” 예전의 쿤은 자신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황제의 총애가 안겨주는 권력이 탐나서든, 그의 몸이 주는 쾌락이 좋아서든,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말의 진실 여부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둔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 진실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잊고 말았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그 진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두조의 비난은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쿤은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힘들다, 바레사. 소세이를 죽였을 때에도 그가 살아있을 적엔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기에 이런 괴로움은 맛보지 못했어. 내 권력을 이용하고 거짓말로 나를 우롱한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컸지. 하지만 지금은 두조가 나를 외면하고 입 발린 소리마저 하지 못해 성나게 해도 밉지 않다. 무슨 행동을 해도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 노예가 혹여 다른 여자에게 시선이라도 줄까봐, 마음 한 자락이라도 비출까봐 전전긍긍...... 덕분에 그를 사랑하면서도 몸만을 원하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해버렸어. 그 녀석에게 관계된 일이라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내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는다. 사소한 행동과 별 것 아닌 말 한마디에 날아오를 듯 기뻤다가 죽어버릴 듯 괴로웠다가...... 힘들어.” “.........” 절절한 토로가 바레사의 가슴을 찔러 들어왔다. 이렇게나 그의 마음이 깊은데...... 상대가 천하고 부족한 노예라는 이유만으로 잘라내야 하는 건가 하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레사가 숙인 허리가 아프다고 느낄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바레사.........” “예, 폐하.” 말을 잇는 쿤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두조를 평민으로 만들어 황궁 밖으로 내보내야겠다. 언제까지 내 침소에 가둬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말씀은......” 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조를 평민으로 만들어 황궁 밖으로 내보내야겠다. 그를 잊게 될 수 있을 런지 자신은 없어. 하지만 이대로 곁에 두었다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두렵다. 두조에게 집착하다가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그를 죽이게라도 될까봐 무섭다. 두조를 보면 또 무너져 내릴 결심인지도 모르지만...” 바레사는 쿤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말했다. “어려운 결정을 하셨으나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눈에서도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것입니다, 폐하.” “내일 대신들에게서 상소문이 올라오고 그 일로 인해 나를 만나자 청하는 이가 있거들랑 네가 알아서 답하도록 해라.” “알겠사옵니다.” 쿤은 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가겠다, 피곤하구나.”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왔던 통로로 돌아가면 된다. 혼자서 생각 좀 정리하고 두조에게 이 사실을 통보해야겠다.” 바레사를 두고 비밀통로를 홀로 걸어가며 쿤은 두조를 평민으로 풀어주자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라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기뻐하겠지. 역노로 죽도록 고생하다 황궁에 끌려와 난처한 꼴만 당했으니...... 평민이 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 하면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걸 반겨할 그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황궁 밖에 내다두고 거리를 두다보면... 두조에게 마구 휘둘리는 이 힘겨운 감정도 수습이 될 것이다.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붙잡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모습이 아니다. 이렇게라도 내 자신을 지켜야지...... 난 도망치려는게 아니야. 되도록 태연하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기뻐하는 두조 앞에서 역정을 내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도 했다. 너무 좋아하면 욱해서 또 때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니야, 내가 이렇게 가슴 아프게 결단을 내렸는데 주책 맞게 좋아하면 좀 때려도 돼! 나쁜 자식, 감히 날 울렸으니 곤장 수백 대를 때려도 시원치 않아! 아무리 약을 먹였다지만 그렇게까지 뜨겁게 애무해놓고서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서다니, 그 새끼 사내 맞아? 그냥 모른 척 하고 계속 할 것이지... 고집은 부려가지고 나를 창피주다니! 앞 뒤 꽉 막힌 새끼 같으니라고! 생각하다보니 열 받아서 이를 득득 갈던 쿤은 심호흡을 하며 애써 분을 가라앉혔다. 때리지 않기로 했잖아. 놓아 보내주기로 했잖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해. 하지만 비밀통로의 문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그 눈동자, 그 얼굴, 그 표정...... 떼놓을 수 있을까. 보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냥 그렇게 시시하게 잊혀질 수 있을까......... 문은 열린 채 그대로였다. 밖으로 나오니 자신이 깨트린 화병조각도 그대로 있었고...... 틀림없이 이 앞에서 안절부절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인기척도 없다. 쿤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횃불을 자리에 걸어놓고 침소로 향했다. 하지만 침소에도 두조는 없었다. 설마 나간건가, 싶었지만 옷도 벨트도 벗어둔 그대로였다. 쿤은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바깥으로 나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친위대에게 말했다. 무릎을 꿇는 그들에게 쿤은 물었다. “누가 침소를 빠져 나가거나, 혹은 들어오거나 했느냐?” “아니옵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사옵니다.” “확실해? 존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쿤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만일 아니라면 오늘밤 이 처소를 지키고 있던 친위대원들은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예!” 쿤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비밀문 앞에 섰다. 깨진 화병조각들을 훑어보는데 문득 핏방울 같은 것이 보였다. 쿤은 피가 묻은 화병조각을 들고 의혹에 찬 눈으로 비밀통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 바보가......... 날 쫓아서 비밀통로로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았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쿤은 다시 횃불을 들고 통로 안으로 들어가며 욕설을 터트렸다. “이 바보천치가!” “다 썼느냐?” “예에, 예.........” 아멘치타는 드디어 끝났는가, 싶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았다. 오늘 두조를 데려오는 것을 실패한 그녀는 쿤에게서는 운 좋게 벗어났지만 시에까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밤이 깊도록 엎드린 채로 시에가 불러주는 편지를 받아쓰면서 발바닥에 매를 맞아야 했다. 아픔에 손이 흔들려 글자가 틀리거나 얼룩질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써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편지 한 장을 다 작성하고 났을 땐 한밤중이었다. 하루 종일 엎드려 있었던지라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에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아멘치타를 불렀다. “이리 들고 오너라.” 하루 종일 발바닥에 매를 맞은 탓에 일어서서 발을 딛자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퉁퉁 붓고 헤져있던 발바닥은 아멘치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터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하나 내지 않고 멀쩡한 걸음걸이로 시에에게 다가가 편지를 건넸다. 실로 초인적인 모습이었지만 이정도 깡이 없으면 시에의 수석 시녀 같은 것은 될 수 없었다. 여기서 아픈 꼴을 보였다간 엄살을 부린다며 더 호된 매질을 당할 테니까. 발바닥에 매질을 하는 건 시에만의 고약한 습성이었다. 여자의 얼굴이나 손을 흉지게 할 순 없다며 나름의 배려를 하는 것이라 우겼지만 일하는 시녀로선 쉬게 할 수 없는 부위기에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걸을 때마다 아프니까. 깨끗하게 작성된 편지를 말아 편지통에 넣으며 시에는 말했다. “내일 이것을 대 신관님께 전해라. 내가 폐하의 부인으로서 이런 취급을 당하고, 비참한 나머지 삶을 이어가는 것에조차 회의를 느껴 끼니를 거부한다고 고하면서. 알겠느냐?” “예, 알겠사옵니다.” 그 편지는 오늘 쿤의 만행에 대해서 느낀 비통함을 구구절절 적은 것이었다. 시에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서는 절대 동일인물이 적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눈물 젖은 호소문이었다. 황제의 사생활에 태클을 걸 수 있는 것은 윤리와 도덕의 정수에 서 있는 대신관만한 사람이 없었다. 물론 윤리와 도덕 운운은 겉으로만 그랬다. 평생 신에 대한 정절을 지켜야 하는 대신관인 주제에 아름답고 어린 소년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쿤이 어릴 적에는 그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곤 했다. 덕분에 쿤은 대신관을 벌레 보듯 싫어했다. 지금은 다 자란 성인인지라 전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알현을 청한 대신관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느니 부부에 대한 도리가 어떻느니 떠들어대며 그를 음탕한 눈으로 쳐다보면 퍽이나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 구해다 줄 것이 있다.” 시에는 아멘치타가 구해야 할 물건이 무엇인지 말해주고는 그녀가 물러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멘치타가 어기적거리는 걸음을 억누르며 사라지자 시에는 팔짱을 끼고 창밖을 쏘아보았다. 황제전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며 그녀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내게는 그 노예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여줄 수 없다...... 이거지? 그렇게 나온다면 가만있을 수 없지... 쿤. 네가 그렇게 해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쿤의 절망에 찬 표정을 상상하며 한참을 킥킥 웃다가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던지고 침소로 향했다. 황후의 침소로 들어간 그녀는 그곳에서 비밀문을 열고 또 다른 침소로 향했다. 황제에게 비밀통로가 있다면 황후에겐 비밀의 방이 있다. 황제들은 흔히 황후에게만 만족하지 못하고 숱한 후궁들을 거느리기 마련이고, 혼자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야만 하는 황후의 정신건강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라 하겠다. 황후 라테 디타는 잘생기고 정력 넘치는 후 칸칸의 부인이었지만 많은 황후들이 그러했듯 독수공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주는 황제 때문에. 그녀는 십년 만에야 간신히 아들을 보았다. 하지만 후 칸칸을 닮지 않은 아들의 외모 때문에 그녀는 죽을 때까지 황제의 외면을 받아야만 했다. 자주 찾아주지 않은 탓이면서 후 칸칸은 그녀가 뒤늦게 임신을 하자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냐 의심을 했던 것이다. 덕분에 장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챠 칸칸은 숱한 구설수속에서 황위에 올랐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자신이 후 칸칸의 아들이 아님을 의심했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것은 챠 칸칸이 스스로가 아버지의 핏줄이라 믿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핏줄이 아니라서 진실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에는 황후가 되어 이 방의 존재를 알고 나서 챠 칸칸이 후 칸칸의 핏줄이 아님을 확신 수 있었다. 라테 디타는 이 황궁이 건축될 당시 은밀하게 이 방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방의 위치는 황후와 대대로 황후전에서 일해 온 극소수의 시녀들만이 알고 있었다. 시에는 반투명한 천개가 드리워진 침대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곳엔 아주 잘생기고 근사한 몸을 가진 남자가 눈이 가려진 채 묶여 있었다. 그는 시에가 풀어놓은 뱀이 가슴 위를 지나가는 느낌에 진저리를 치다가 들려온 인기척에 버둥거리며 외쳤다. “거기 누가 있소? 푸, 풀어주시오. 이게 무슨 짓이오...! 뭣 때문에 이러는 거요?” 황후는 목 안으로 웃고는 침대 옆 쟁반에서 투명한 액체를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위에 올라타 입술에 키스하며 그것을 먹였다. 바로 오늘 쿤이 두조에게 썼던 미약이었다. 입가로 흐르는 액체를 핥아 올리며 시에는 준비되어 있던 부드러운 채찍을 꺼내들었다. 올라탄 여자의 감촉에 당황한 남자가 물었다. “누, 누구요?” 시에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장 황홀하고 고통스러운 밤을 선사해줄 요정이지. 평생 잊지 못할 밤이 될 거야, 자기.” “폐~하~ 폐....... 으윽.” 두조는 또 몇 발짝 걷지 못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진짜 미치겠다. 도대체 무슨 약을 먹였기에...... 가라앉지가 않아-! 두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몸을 가린 천을 들쑤시는 아들놈을 바라보았다. 비밀통로에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얼른 쫓아가야지, 하는 마음과는 달리 아프도록 발기한 물건 때문에 서두를 수가 없었다. 결국 어기적거리며 걷다가 참지 못하고 수음을 했다. 한번 방출하고 나니 훨씬 편해졌지만 얼마를 걷지 못해 또 발기했다.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남자의 신체구조상 앞에서 꺼덕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또 한 번 내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양이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자꾸만 발기하는 페니스 때문에 이러고 있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꼴로는 쿤을 쫓아가기도 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사이를 벌떡 세우고 잘못했다는 소리 따위 통할 리가 없지. 두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야겠다.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일어선 앞을 애써 무시하고 얼마나 걸었을까...... 두조는 문득 자신이 갈림길 중 한 곳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응? 이상하다? 갈림길로 들어온 적이 없는데?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두조는 걸음을 빨리했다. 자꾸만 꺾어지는 코너를 돌아 걷다보니 또 갈림길에 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맙소사, 이게 뭐지. 길이 너무 꼬여서 못보고 들어온 건가. 식은땀이 솟으며 거짓말처럼 발기가 가라앉았다. 이리저리 램프를 들고 비춰 봐도 그 통로가 그 통로다. 앞을 봐도 어둠이요 뒤를 봐도 어둠. 눈을 씻고 찾아봐도 특징이라곤 없었다. 여기가 아까 지나온 곳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 단 한 장 남아있던 미로의 지도를 태워버리고 이곳에 숨었다가 실종되고 말았다. 미라가 되지 못한 후 칸칸은 자신의 피라밋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이곳을 헤매고 있다고들 하지. 이 미로의 길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헉. 나, 기...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여기서 못 나가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휘이이이잉- 하고 음침하기 짝이 없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바람소리는 들리는데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워낙 다각도로 꼬여있기에 소리만 들려오고 바람은 두조가 있는 곳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바람이 분다면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걸어서 어느 문으로든지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큰일 났다. 이대로 되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역시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나!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건데! 아니야, 폐, 폐하께서 내가 이곳으로 들어온 걸 알아차리실 거야. 문을 열어두고 왔으니까... 차, 찾으러 오실 거라고. - 내가 알고 있는 것도 미로의 일부일 뿐이야. 폐하께서도 날 못 찾으면 어떻게 하지. 역대 황제들 중에서 제일 잘 아신다고 하셨으니 그럴 리가 없어....하지만 대부분이 아닌 일부라셨잖아! 게다가 폐하께선 지금 나에게 화가 나셨을 테니 안 찾으러 오실 지도...... 으아악! 두조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문을 찾아봐야 할지 아니면 제자리에서 쿤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쿤을 울린 벌을 받는 건가 싶었다. 두조는 두려움에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를 쪼그렸지만 좁은 통로는 더 좁아지는 것 같았다. 폐소공포증 같은 것은 없는데도 숨이 턱하니 막혔다. 짙은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나 진짜 여기서 뼈만 남는건 아니겠지? 그렇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시간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밤이 몽땅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거기 그러고 있자니 시간 감각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오줌이 마려워왔지만 누고 싶지 않았다. 언제 다시 물을 마시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꾹꾹 참아 수분을 지켜야 한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극한 상황이 되면 오줌을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흐르는 빗물로 입술을 축이고 박스를 뜯어먹으며 버텼다지만 여긴 먼지밖엔 없으니까. 욕실에 가둬두면 비누를 먹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둬두면 먼지를 먹고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에 가둬두면 몸을 뜯어먹는다는 바퀴생각이 떠올랐다. 으으윽! 그런 바퀴벌레가 되기는 싫어! 두조는 고개를 들고 허어어엉 울었다. “살려줘요, 폐하...! 바퀴벌레는 싫어! 제가 잘못 했어요~ 다신 심한 소리 안 할 테니까 제발 찾으러 와 줘요!” 그렇게 소리치긴 했지만,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답이 들려왔을 때는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 이 얼빠진 녀석! 바퀴벌레는 대체 뭐냐! 펄쩍 뛰어 자리에서 일어난 두조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고래고래 외쳤다. “폐하! 폐하신거죠! 그런 거죠! 지금 제가 들은게 환청이나 그런 거라면 저 혀 깨물고 콱 죽어버릴 겁니다!” -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이 미친 자식아! 길도 모르면서 어딜 기어들어와 사람을 고생시키고 난리야? “폐하-!” 두조는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다 날 뻔했다. 하지만 쿤의 목소리는 아주아주 멀리서 들려왔다. 바람소리처럼 아득했다. “폐하! 지금 어디 계신 거예요?” - 그러는 네놈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쫄랑쫄랑 멀리도 갔군! “헉! 설마 저 찾지 못 하시는 건 아니죠?” - ............ 대답이 없었다. 두조는 사색이 되었다. “으악!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저 찾으실 수 있는 거죠?” - 안타깝게도 확답은 못해주겠군.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에 두조는 비명을 올렸다. “싫어요! 절 바퀴벌레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저 꼭 찾아주셔야 돼요! 지금도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제가 여기서 혼자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알고 계세요?” - 그러니까 바퀴벌레가 대체 뭔데? “바퀴벌레를 모르세요? 고대에서부터 살아남아 현대에 이르기까지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그 징그러운 벌레를요? 설령 인간이 몽땅 멸망해도 바퀴벌레는 죽지 않는다고들 말하잖아요...... 이 통로에서 살아남으려면 바퀴벌레가 되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건 싫단 말이에요!” - 불멸의 존재라니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긴요! 농담이 아니라고요! 으허엉!” - 그러게 무슨 간담으로 이곳엔 기어 들어온 거냐. 길도 모르는 주제에...... “금방 쫓아가면 폐하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 흥, 미약을 먹였는데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지. 두조는 쿤이 그 약의 대단한 효과를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을 화끈 붉혔다. 하지만 쿤은 두조가 쪽팔림에 침묵하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 했다. - 여긴 목소리로 방향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상당히 찾기 힘들다. 지금 있는 곳의 특징을 말해봐라. “에에? 다 똑같이 생겼는데 특징이 뭐가 있어요?” - 멍청한 녀석. 적어도 길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거 아냐! 그치만 모르겠다. 통로가 좁고 짧아서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두조가 잔뜩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모르겠는데요.” 하고 대답하자 쿤은 고래고래 욕설을 했다. - 침이라도 가득 모아서 뱉어봐! 어느 쪽으로 고이는지 보면 되잖아! “아, 그렇구나!” 두조는 침을 뱉는 대신 얼른 천 자락을 걷고 오줌을 뒀다.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는 오줌이 자신 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두조는 외쳤다. “오르막이에요! 아... 내리막인가?” 서는 방향에 따라 오르막일수도 내리막일수도 있는 것이다. 쿤은 답답해 죽겠다는 어조로 소리쳤다. - 둔한 놈... 벽돌의 방향을 잘 봐라! “에? 벽돌에 방향이 있어요?” - 잘 봐! 그러고 보니 벽돌의 표면에 미세한 빗살무늬가 있었다. 벽돌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은 무늬였다. 그냥 특징 없는 벽돌이라 생각했는데, 놀랍다 생각하며 두조는 탄성을 터트렸다. - 아무리 나라도 그런 방향 표시도 없이 이 복잡한 미로의 길을 돌아다닐 수 있겠냐! 워낙 헷갈리는 구조라 갈림길을 갈림길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맞아요! 그랬어요! 저 갈림길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나가니까 갈림길이잖아요!” - 어느 방향이야? “무늬가 내리막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 그럼 남쪽인가.........무늬가 잔잔하냐 굵으냐? “잔잔해요!” - 대충 어디인지 알겠다.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라. 그리고 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두조는 자신이 눈 오줌을 피해 조금 자리를 옮긴 채로 서 있다가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불안해서 소리쳤다. “폐하.”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두조는 놀라서 연거푸 소리쳤다. “폐하! 폐하!” - 시끄럽게 왜 부르고 난리냐! “아, 아무 말도 안하시니까 무섭잖아요.” - 사내자식이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치만 여기서 혼자라서 생각하면 정말로 끔찍한걸요......” - 그러니까 들어오기를 왜 들어와! “사과하려고 그랬죠...... 원래는 얼굴을 보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거 지금 사과드릴게요. 제가 죄송해요. 막말한 거... 정말 미안해요. 그냥 열 받아서 말한 건데 폐하께서 그렇게 상처받으실 줄은......” 쿤은 대꾸가 없었다. 두조는 자기가 작게 말해서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크게 외쳤다. “제가 잘못 했어요-! 많이 우셨어요?” - ......... “많이 우셨냐고요!” -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입 닥쳐! 버럭 소리치는 것을 듣고 두조는 찔끔했다. 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 그렇게 펑펑 울어놓고 운 것을 부정하는 그가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우는 모습도 진짜 귀여웠지. 우는 쿤의 얼굴을 상기하다가 두조는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당황했다. 자신의 아래에서 그렇게 우는 쿤을 보면 기분이 어떨까? 아까 신음을 흘리던 모습과 울던 모습이 겹쳐지면서 상상이 되었다. 순식간에 야릇한 느낌이 중심을 직격했다. 놀라움과 두려움에 풀죽어 있었던 페니스가 단번에 일어났다. 아니 이 놈이! 약기운이 아직 덜 빠진 건가? 두조는 묘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써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에이~ 펑펑 우셔놓고는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우시면 어떻게 해요. 저 깜짝 놀랐잖아요. 진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고요.” - 안 울었다니까! 안 울었어! 네놈이 약에 취해 헛 걸 본게 틀림없다! “울었잖아요!” - 안 울었다고! “신음도 잔뜩 흘리고.........” 안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튄다. 두조는 꿈틀거리는 아랫도리를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자신의 것을 쥐었다. 쑥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가 버럭버럭 신경질을 냈다. - 그 입 닥쳐라! 안 그러면 안 구해준다! 두조는 자신의 것을 훑으며 흔들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아까 폐하...... 굉장히 야했어요. 사실 폐하 쫓아서 여기 들어와서도 그 모습 자꾸만 생각나서 걷기 힘들었다고요. 나 막 자신이 싫어지려고 했다고요. 내가 너무 짐승 같아서......” - 약 때문이잖아. 어라,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아니에요! 사실 그런 약 같은 거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전에 폐하께서 자위하셨던 그때도, 저 실은 하고 싶었다고요. 그냥 저 내버려두고 가서 원망했단 말이에요. 결국 혼자 위로해야했다고요...... 지금처럼.” 마지막 목소리는 작았다. 두조는 고개를 젖히고 뒤통수를 벽에 기댄 채 음경을 붙잡은 손의 움직임을 빨리했다. 손바닥에 감기던 피부의 감촉, 곤두섰던 유두, 색스러운 신음...... 두조는 허리를 비틀었다. 당장 눈앞에 그가 있다면 바로 그를 안고 싶었다. 그 관능적인 살 속으로 자신을 파묻고 마구 뒤흔들고 싶었다. 아까 그때 그냥 모른 척 하고 해버릴 껄 하는 후회가 들었다. 두조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 울면서 신음하는 쿤의 모습을 상상하며 사정했다. 혼자 너무 많이 빼낸 나머지 쏟아진 정액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절정에 달하고 나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쿤이 자신을 원하고, 자신도 그를 원하는데 이게 무슨 꼴이지. 남자가 진실한 사랑 운운하기엔 하반신의 사정이 너무 애처롭구나. 그렇게 한숨을 쉬는데 문득 쿤이 말했다. - 변명할 필요 없다. 네 말이 다 옳아. 섣부른 행동은 나도 반성하고 있다. 곧...... 바레사가 사가를......... 쿤의 뒷말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두조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싶은 마음에 목소리를 돋웠다. “잘 안 들려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 내가 너를! 놓아............ “뭐라고요?” 쿤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두조가 다시 “못 들었어요! 다시 한 번만 더 말해주세요!” 라고 외치자 그는 “못 들었으면 됐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주마!”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외치는 쿤의 목소리가 한결 가까운 것이 느껴졌다. 두조는 퍼뜩 바닥에 쏟아진 오줌이며 정액의 흔적을 보고 얼른 바닥에 깔린 흙으로 그것들을 덮었다. “폐하.” “엄마 잃은 애새끼냐! 왜 자꾸 부르고 난리야?” 목소리가 가깝다. 두조는 피식 웃었다. “아뇨...... 그냥 제가 말이죠.” “뭐?” 그 소리와 함께 통로 저편에서 빛이 밀려들었다. 쿤이었다. 그는 횃불을 들고 대충 옷을 걸친 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두조는 미소를 지은 채 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폐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구사일생으로 구해주니 입 발린 소리도 하는구나.” 쿤은 딱딱하게 말했다. 두조는 쿤의 손목을 붙잡으며 짐짓 미간을 모으며 대꾸했다. “정말이에요!” “됐다!” 쿤은 매몰차게 두조의 손을 뿌리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조는 혼자 가시면 안돼요! 라면서 냉큼 그에게 따라붙어 다시 손을 붙잡았다. 쿤이 쑥스러워한다고 생각한 두조는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폐하를 이렇게 좋아한다는데 기쁘지 않으세요? 섭섭하네.” 하지만 쿤은 두조의 손을 다시 뿌리쳤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두조.” “예?” 그 표정을 보고서야 두조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쿤의 눈동자가 차가웠다. “아까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이다. ......바레사에게 황궁 밖에 집을 구해놓으라 일렀다. 널 평민으로 풀어주고 자유롭게 해주겠다. 너를 보러가지 않겠다고 약속할 순 없겠지만...... 귀찮을 정도로 자주 방문하진 않을 거다. 황제라서 할 일이 많으니 그럴 수도 없겠지.” “예?”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두조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얼굴을 보고 쿤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평민으로 만들어준다는데 너야말로 기쁘지 않은 거냐? 섭섭하구나.” “아뇨... 기, 기쁘지 않다기 보다는....갑자기 왜.........” “내 변덕이라 생각해라.” 쿤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반문 따위 하지 마라. 내가 변덕을 부려 널 놓아줄 생각이 들 때......... 재빨리 그러겠노라고 해. 할 수 있다면 도망이라도 쳐라. 널 잊을 수 있도록.” 왜 일까. 그 말을 들은 두조는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쿤은 두조가 따라올 생각을 않고 걸음을 멈춘 것을 보고 돌아보았다. “뭐하는 거냐?” “절... 포기하시는 겁니까?” “빨리 오기나 해라. 또 길을 잃어버리면 찾으러 오지 않을 테다.” “포기하시는 겁니까? 도망치시는 겁니까? 그런 거예요?” “빨리... 오라고 했다.” 두조는 주먹을 꾹 쥐고 말했다. “제가... 폐하를 거절해서 그렇습니까? 아까 제가 한 말에 상처받아서 이러시는 거라면, 실언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시끄러워! 그래! 널 포기할 생각이다! 도망친다고 생각하든 말든 네 맘대로 해!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대 따위 지쳤어! 마음 같아서는 그냥 콱 죽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으니까 들쑤시지 마!” 왈칵 성을 낸 쿤은 두조가 따라오든가 말든가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쿤의 뒷모습을 쫓아가며 두조는 망연자실해졌다. 변덕이라고? 이제 나에게 질린 건가? 내가 폐하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그냥 콱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싫어져버린 것인가? 애정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하던 시롭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비밀통로를 나왔을 때는 어느새 사위가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쿤은 두조를 침소에 버려두고 또 혼자 어디로 나가버렸다. 두조가 “어디가세요?” 하고 애처롭게 물었지만 쿤은 “내가 어딜 가는지 네게 일일이 보고해야할 이유라도 있느냐!” 라고 소리치고는 매몰차게 나가버렸다. 말이야 매번 버럭버럭 하지만 행동은 상냥하던 쿤이 그렇게 나몰라라 외면하는 것을 보니 정말 자신이 싫어졌나 싶었다. 사람 마음이 어찌 그리 금방 바뀔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쿤 치고도 오래 참았다 싶은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지도 않고 평민으로 만들어 내보내주겠다니...... 철들었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쿤이 계속 철딱서니가 없었으면 좋겠다. 왜 날 안 좋아하느냐고 펄펄 성을 냈으면 좋겠다. 차라리 너 밉다고 패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저리 이성적으로 구는 쿤의 모습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밤새 이런저런 일들이 하도 많았던지라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기도 하고 해서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시종이 가져다주는 아침을 먹고는 멍청하게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시롭에게 속내라도 털어놓고 싶었지만 여기엔 시롭도 없었다. 그녀는 아직 별궁에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라도 시롭을 좀 불러달라고 말하면 안 될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 침소에 있는 두조를 방문했다. 시롭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바레사였다. 그는 언제나와 똑같은 냉랭한 표정으로 예를 취하여 바닥에 엎드리는 두조를 보고 말했다. “일어나라. 이제는 평민이니 엎드려 예를 취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무릎을 꿇는 것으로 족해.” 바레사는 고개를 든 두조의 얼굴이 죽상인 것을 보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평민이 될 수 있다는데 표정이 왜 그렇지? 노예들의 평생 숙원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평민이 되는 것 아니었나? 폐하께서 네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재산까지 마련해주라 했으니 네게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있겠느냐?” “바레사님은 아세요?” “뭘 말이냐.” “폐하께서... 왜 갑자기 저를 포기하겠다 하시는지......” “너를 내보내겠다 마음먹으신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분 입장에서 보자면 죽여 버리는 것이 널 포기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두조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바레사는 차갑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어제 쿤이 그리 말하는 것을 듣고 많이 놀랬다. 쿤이 두조를 포기하길 바란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놓아줄 바에야 시체로 만들어버리는 쪽이 훨씬 더 쿤 다웠기 때문이다. 두조를 내보내려는 것도 사실은 쿤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두조를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이대로 쿤의 곁에 두면 이런저런 말썽이 일어날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에의 위협과 자제력이 닳은 쿤의 분노에서도 안전하지 못 할 테니까 말이다. 쿤이 정말로 이 노예를 사랑하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착잡했다. 한편으로는 사랑을 하더니 달라지셨구나 싶은 생각에 쿤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적당한 사가가 마련 되는대로 곧 나가게 될 것이다. 시롭이 함께 나가게 될 터이니 쓸쓸하진 않을 것이다. 맨 몸으로 들어왔으니 짐이랄 것도 없겠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게 말해라. 시롭에게 전해줄 터이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나가지 않을 겁니다.” 바레사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두조 때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뭐라고?” “나가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 폐하와 멀어질 순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왜 나가지 않겠다는 거지? 이제 와서 새삼 아쉬워지기라도 한 것이냐? 폐하의 마음을 가지고 농락할 때는 언제고 폐하께서 단념하시겠다니까 그건 또 싫으시다?” “그런게 아닙니다! 전!” “그런게 아니라면 폐하의 마음이 아쉬운게 아니라 그 분의 권력이 아쉽기라도 한 것이 아니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전 폐하의 권력따위 한 번도 바래본 적 없어요! 폐하가 황제라서 힘들고 어려운 적은 있었지... 그 사실이 좋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요! 제가 제 마음을 가늠하기도 전에 폐하께선 황제고 저는 노예라는 사실 때문에 이리저리 떠밀리기만 했습니다! 다들 안 된다 안 된다 소리치기만 했지 진심이 뭔지 생각해볼 시간을 주기나 했습니까!” 두조와 바레사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바레사는 후, 하고 짧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주변에서 안 된다 안 된다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어렵사리 결정하신 일이니 네가 정말 폐하를 위한다면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이제와 폐하를 사랑하느니 마느니 하는 그런 소리를 한다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겠다.” “어째서요? 시롭의 말은 다 거짓이었군요!” “뭐?” 두조는 두 주먹을 꾹 쥐고 버럭버럭 소리쳤다. “아무리 바레사가 폐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이러실 수는 없는 겁니다! 당신이 폐하를 정말로 위하는 사람이라면 제게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하실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사랑하는 사람인 저를 이렇게 모욕주고 정나미 떨어지게 만들어 쫓아 보내면 속이 시원하십니까? 폐하의 마음이 진심이란걸 뻔히 아신다면 세상 모두가 다 반대해도 바레사님은 도와줘야 하는 거잖아요! 바레사님이야 말로 폐하의 권력을 탐하는게 아닙니까! 폐하가 황제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니까 노예인 저따윌 사랑하는 걸 용납할 수 없으신 거겠죠!” 바레사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 그 입 닥치라고 소리치려 했다. 나는 정말 폐하를 위하노라고... 진정 그분을 아끼기에 반대하는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두조를 사랑하기에 힘들다고 하는 쿤의 목소리가 떠올라 그의 말문을 막았다. 만일 쿤이...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쿤이 황제이든 아니든 쿤만을 생각한다면, 상대가 노예라는 이유로 반대했을까? 바레사는 충격을 받았다. 대답은 아니오, 였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제가 정말... 정말 싫으신 거라면 납득하겠습니다. 하지만 포기라니, 그건 당치도 않아요. 포기라는 단어를 쓸 만큼 우리는... 아니 저는 어떤 노력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폐하를 더 잘 아시는 바레사님이니 대답해보세요.” 묻는 두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말로 폐하께선... 제게 싫어지신 겁니까? 변덕스러운 그분인지라, 진심마저도 한순간에 바뀌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까? 정말 그렇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폐하께 매달리며 폐하를 피곤하게 하고 스스로를 추하게 만들기 전에......” 바레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선 이제 너 같은 놈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거짓말을 해야 할지, 아니다 그분이 너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이러시는 거다 진실을 말해야할지. 소세이를 죽이고 힘들어 하는 그를 안았다. 자신이 힘들어 하는 지도 모르고 괴로워하는 그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위로하며, 그가 애처롭다 느꼈다. 소세이같은 그런 얄팍한 자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아껴줄 진실 된 사랑을 만나 행복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 진실 된 사랑을... 내 척도로만 재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마음 없이 남자들과 놀아나며 침대 위 하룻밤만의 애정을 물쓰듯 쓰던 쿤이 진짜 사랑을 느꼈는데...... 자신이 그건 아냐, 하고 단정 내려버릴 권리가 있는 것일까? 쿤이 얼마나 시에를 싫어하고 그녀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녀를 이용해 쿤을 힘들게 만들고... 이윽고는 두조를 단념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피어난 사랑의 싹을 제 손으로 뽑아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체념까지 하도록 만들다니...... 나는 정녕 폐하를 위한 일을 한 것인가? 자신할 수 없었다. 나는 쿤을 위한 일을 한게 아니다. 황제를 위한 일을 했을 뿐이다. 바레사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니...... 폐하께선 네가 싫어지신게 아니다.” “정말... 입니까?” “그래. 정말 네가 싫어지셨다면 널 살려둘 리가 없지.” 잔뜩 흐려졌던 두조의 얼굴이 밝아졌다. 바레사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올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정말 폐하가 자신이 싫어졌다면 궁전에 남을 방법이 없는 자신이었다. 사랑이 뭔지는 모른다. 이 마음이 사랑이다, 하고 누가 확인도장을 찍어주는 것도 아니니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쿤이 자신을 포기하겠노라 말했을 때 충격적이었다. 그를 미칠 듯 안고 싶은 욕망을 물리칠 만큼 진심으로 그를 대하고 싶었다. 자신을 그렇게 때리고 죽이겠다 으르렁거려도 싫지 않았다. 버럭버럭 화를 내는 그 목소리 뒤에 숨은 쑥스러움이 사랑스러웠고, 어린애 같은 솔직함과 서투름이 귀여웠다. 이대로 그의 곁에 있고 싶다. 이 마음이 사랑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백번이고 천 번이고 데이트하고 싶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쿤을 잘 아는 사람은 없노라고 자신할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해 알고 싶다. 그러니 이제는 쿤이 자신을 멀리하려고 해도 자신이 그러기 싫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준 바레사가 고마웠다. 정말 바레사가 확신어린 어조로 “폐하께선 네가 싫어졌으니 언감생심 매달릴 생각하지 말고 꺼져라.” 고 했더라면 자신감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저... 폐하만큼 제가 폐하를 좋아하는지 아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 그게 폐하를 싫어한다는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제가 폐하가 아니니까 제 마음과 빗대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죠. 하지만 저 폐하를 좋아하고 있어요. 노예라서 이대로 모른 척 폐하의 명을 따르는게 좋을지 모르지만... 전 나쁜 놈이라서 폐하보다 절 먼저 생각하거든요. 폐하께 저 포기하지 말라고 부탁드려보고 싶어요. 저 노력해보겠노라..... 정말로 폐하를 진심으로 안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이젠 화내거나 우는 모습 대신 웃는 모습... 보고 싶어요.” 바레사는 가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처음으로 편견을 벗은 눈으로 두조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정말로 이상하구나.” “예?” “어째서... 폐하께서 네게 반했는지 알 것 같다는 소리다.” “치, 칭찬이신가요?”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두조가 뒤통수를 긁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바레사는 무표정했다.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지 않는다. 비굴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굽히거나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다. 겁 대가리를 상실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선입견이 없을 뿐이었다. 그에게 쿤은 그냥 쿤이다. 그가 황제라서, 혹은 자신이 노예라서 주변이 이런 행동이 어떻게 비칠 것이다... 그런 계산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지나치리라만치 자신의 마음에 진솔해서 쿤을 애태우고 있지만 거짓으로 그를 농락하진 않는다. 바레사는 불쑥 물었다. “폐하께서 행복하시길 바라느냐?” 두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좀 질문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부모님이 딸이 데려온 사윗감을 소개시킬 때나 묻는 질문과 비슷한 뉘앙스인데, 어째서 ‘폐하를 행복하게 해주겠느냐?’는 질문이 아닌 걸까. 노예라서 그럴 재주는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꼬인 심사로 그렇게 물은 것은 아닌 듯 했다. 바레사는 후...... 하고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바레사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본 두조는 깜짝 놀랐다. “그렇군.” 그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바레사는 곧 언제 웃었느냐는 듯 표정을 지우고 돌아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폐하께서 침소에 돌아오시도록 말을 해보겠다. 재주껏 폐하의 마음을 돌려봐라. 내일도 폐하께서 널 내보내라 말씀하신다면 주저 없이 그리 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고마워 할 필요 없다. 너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은 폐하시니까!” 바레사는 쌀쌀맞게 내뱉고는 침소를 나갔다. 두조는 해의 기울기를 가늠하며 언제쯤 쿤이 돌아올 것인가 기다리기 시작했다. 또 오해를 하시게끔 만들면 안 되니까 말을 잘 해야 한다. 어차피 너 나 사랑하지 않잖아! 하고 화를 낼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역시, 시롭의 상담이 필요 하다고 생각하며 두조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사실 두조의 곁에 시롭이 없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시롭이 두조의 심경에 대해 알았더라면...... 그게 사랑이지 그럼 뭐냐! 라고 호쾌하게 말해주었을 텐데 말이다. 진심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묶인 탓에 두조는 ‘이건 사랑이 확실함’ 이라는 확인 도장을 기다리며 진짜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에는 아멘치타가 가져온 물건을 보고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똑같은 것이겠지?” “완벽하진 않으나 오늘 폐하께서 차리신 차림과 거의 똑같은 물건들이옵니다. 망토는 진짜 폐하의 것이오니 변장에는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시에는 재빨리 입고 있던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남장을 했다. 벨트 하나로 옷깃을 여미고 남성용 샌들을 신고 망토를 둘러 호리호리한 여자의 몸을 감췄다. 속옷은 입지 않았다. 머리를 땋아 내리고 짙은 화장을 지우니 그녀는 누가 봐도 쿤 칸칸이었다. 쿤 칸칸이 봐도 거울인가? 싶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었다. 시에는 자신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완벽하구나. 남자는 안을 수 없다고 하는 그 노예가 꽤나 놀라겠는 걸?” “황후마마,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렴. 다녀오겠다.” 시에는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후전을 나섰다. 쿤이 황후전에 온 것인가 싶어서 놀라는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쿤 특유의 무뚝뚝하고 부루퉁한 표정을 가장하며 광장을 가로질렀다. 연못을 지나 황제전의 앞에 다다르니, 친위대가 빈틈없이 빼곡하게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난 줄 알겠구나, 하고 속으로 비웃던 시에는 당당한 걸음으로 그곳에 다가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친위대가 그녀를 가로막기는커녕 척하니 무릎을 꿇었다. 쿤 칸칸인 줄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시에는 웃음을 참느라 애쓰며 아무 제재 없이 수월하게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궁전 안에서도 두 명인가의 시종이 마주쳤지만 그들 역시 바닥에 무릎을 꿇을 뿐 누구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시에는 들뜨는 마음으로 침소로 들어갔다. 황제전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황후전과 구조가 비슷해서 침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입구를 가리고 있는 몇 겹의 커튼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쭈그리고 앉아 입을 헤 벌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시에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소문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매끄러워 보이는 밀빛 피부를 한 부드러운 이목구비의 남자였다. 시에가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끼고 퍼뜩 고개를 든 두조는, 침이라도 흘렀을까봐 얼른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는 눈을 깜박였다. “폐, 폐하? 언제... 언제 오셨습니까?” 어머나, 귀엽네. 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흘렸다. 강아지같이 순진무구하게 보이는 검은 눈동자였다. 두조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쿤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쿤은 쿤인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튼 화난 표정이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바레사가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해줘서 기분이 풀린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두조는 입을 열었다. “폐.........” 하지만 곧 그 입술을 입술이 가로막았다. 아찔한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입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혀를 받으면서 두조는 뭔가 미심쩍은 기분을 느꼈다. 평소 쿤에게서 나는 향기와 다르다. 보통은 사탕냄새 같은 달착지근한 향기가 나는데 지금은 인공적인 향수를 뿌린 것처럼 독한 꽃향기가 났다. 하지만 촉촉하고 부드럽고 관능적으로 혀를 감아오는 혀와 입술의 움직임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제 불발로 끝나버린 행위가 떠오르며 다리 사이가 후끈 달아올랐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쿤을 거절하는 것은 정말 몹쓸 짓 같았다. 차라리 뜨겁게 안아주는 쪽이 더 설득력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오늘은 정말 못 참겠다. 두조는 쿤이 멱살을 붙잡아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가볍게 어깨를 미는 손길에 풀썩 침대위로 쓰러졌다. 함께 침대위로 넘어지면서 이빨이 입술에 부딪쳤지만 아픈 줄을 몰랐다. 쾌감 때문이 아니었다. 순간 가슴에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 때문이었다. 두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허리를 붙잡았다가 깜짝 놀랐다. 남자의 탄탄한 허리가 아니었다. 한손에 쏙 들어올 만큼 가냘픈 허리... 여자! 여자였다! 시에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 후후훗 웃었다. “쿤인 줄 알았지?” 명백한 여성의 음성에 두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쿠, 쿤과 똑같은 얼굴이라니! 도플갱어? “누, 누구세요!”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시에는 킬킬 웃으며 혀로 입술을 스윽 핥았다. “시에 칸칸.” “시, 시, 시, 시, 시에........” 두조가 목 졸린 소리 비슷한 음성으로 그렇게 내뱉자 시에는 귀여운 척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말했다. “응, 시에 칸칸. 어때? 놀랐지?” 놀랐다. 너무 놀랐다. 놀라서 딸꾹질이 다 나온다. 시에는 딸꾹질을 깔딱깔딱 하는 두조를 보며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리 사이로 말려들어간 옷자락을 끄집어냈다. 두조의 눈이 튀어나갈 듯 커졌다. 시에는...... 아래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묵직한 벨트를 풀어버리고 옷깃을 헤쳐 빵빵한 가슴을 자신 있게 드러내었다. 시에는 자신의 몸 모든 곳이 다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가슴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쿤에게는 없는 이 가슴이. 시에는 두조의 손을 턱하니 잡아 자신의 가슴위에 올리고는 말했다. “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남자기에 안 되었겠지...... 하지만 이리 아름다운 얼굴에 여자의 몸을 하고 있는 완벽한 내가 찾아왔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그, 그게 무슨!” “이게 꿈인가 생신가 의심하지 않아도 좋아. 난 네 꿈의 여자니까.” 꿈의 여자? 그 말을 곱씹느라 두조는 멍해졌다. 그의 눈동자에 여자의 모습을 한 쿤이 들어찼다. 가냘픈 어깨,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부드러운 하체...... 덕분에 시에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데도 시에의 가슴을 손에 쥔 채 멍청하게 있었다. 두조의 건장한 음경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에는 헐떡이기 시작했다. 쿤이 간절히 바라는 육체라고 생각하니 오싹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다. 시에는 아직은 물렁한 음경위에 주저앉아 벌써 흥분으로 축축하게 젖은 비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당연한 반응으로 아랫도리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시에는 부피를 늘려가며 뜨겁고 딱딱해지는 음경에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두조도 뭔지 모를 신음을 흘렸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아니, 이상한 세계로 오긴 했지만 여긴 그보다 더 이상하다. 여자인 쿤이 있는. 하악하악 거친 신음을 내뱉으며 시에가 귀를 핥아대었다. 축축하고 까끌한 혀가 귓전을 마구 드나들었다. 시에가 쏟아내는 애액으로 음모가 흥건하게 젖었다. 몸에 달라붙은 여자의 육체가 너무나도 나긋나긋 했다. 시에의 다리 사이는 너무나 좁고 단단하게 느껴지던 쿤의 그곳에 비해서 구멍이 뻥 뚫린 듯 했다. 금방이라도 음경이 그곳으로 빨려갈 듯한 느낌에 두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 몸을 달구는 성욕으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쿤의 얼굴만이 가득 생각났다. 억지로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고통에 신음 흘리던 그 얼굴이, 자위하면서 달뜬 신음을 내뱉던 그 얼굴이, 쾌감을 참느라 손톱을 뜯으며 눈을 꾹 감고 있던 얼굴이, 통로 안에서 상상했었던 자신의 아래에서 울먹이던 그 얼굴이...... 눈을 뜨자 그 얼굴이 보였다. 흥분한 쿤의 모습이었다. 하고싶다, 하고싶다, 하고싶다하고싶다하고싶다하고싶다하고싶다......... - 저는 그리 헤픈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폐하께서 황제라서, 또는 그저 남자라서 불가능한게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해야 잠자리가 가능한 겁니다! -폐하의 마음이 고작 이런 거였다면 정말로 실망입니다. 폐하의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생각했던 제가 어리석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저는......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폐하를 진실로 안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쿤을, 진실로, 안을 수 있는 날이......... 두조는 시에의 어깨를 잡고 확 떠밀었다. 두조의 목덜미를 할짝이던 시에가 혀를 빼물고 있던 그대로 눈을 크게 떴다. 두조는 눈을 똑똑히 뜨고 보았다. 큰 손으로 그 몸을 거침없이 더듬어 보았다. 가냘픈 목덜미와 부풀어 오른 가슴과 날씬한 배와 다리사이 솟아난 것이 없는 그 몸을. 두조는 “하.........” 하고 다소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하하... 하하.........” 시에는 난데없이 웃기 시작하는 두조를 보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너무 좋아서 실성을 했나? 하지만 실성을 한 탓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지던 깨달음을... 지금 이 순간 너무도 한순간에 얻었기 때문이었다. 달랐다. 너무 달랐다. 자신이 갖고 싶어 죽을 뻔 했던 그 육체가 아니었다. 지난번...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울대가 솟은 목과, 굵은 빗장뼈와, 넓은 가슴과, 단단한 배와, 탄력 있는 허벅지를. 그의 남성을 입안에 품기까지 했다. 그 남자의 육체, 사내의 냄새, 자신을 홀리고 미치게 만들던 그 모든 것은 ‘남자’ 였다. 하지만 눈앞의 이것은 여자다. 아니... 사실 남자든 여자든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안고 싶은 것은 쿤이었다. 그냥 눈앞의 이 사람이 쿤이 아닐 뿐이었다. 곁에 있고 싶은 것도, 서로를 알아가고 싶은 것도, 손을 잡고 싶은 것도 키스를 하고 싶은 것도, 쾌락을 나누고 싶은 것도 전부... 전부... 그것은 쿤이기 때문. 두조는 쿡쿡 애써 웃음을 삼키더니 웃느라 가늘게 뜬 시선 그대로 시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절 유혹하려 해도 소용없어요.” “뭣이?” “어쩌면 저 자신도 그걸...... 그저 살아남기 위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남자이기 때문에 아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안을 수 없다... 남자는 어쩔 수 없는 하반신 생물이라, 남자에게는 반응하지 못하는 내 몸이 너무나 솔직해서 변명이 아니었나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하지만 그게 진실이란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시에는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쿤을 사랑한다는 소리야?” 두조는 기쁘게 대답했다. 정말로 너무 기뻤다. 그 대답에 이토록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네. 쿤을 사랑해요.” 시에는 두조가 쿤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뭔가 계획이 살짝 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다. 시에는 두조에게로 몸을 숙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 어느 남자도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을 담아서. “그를 사랑한다니 다행이야. 그렇기에 난 당신을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온 거야. 쿤을 사랑하지만 남자로는 만족할 수 없는 진정 사내인 당신을 위해서...... 날 안아, 나만이 데려가 줄 수 있는 천국을 보여줄게.” 하지만 두조는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당신에겐 서지 않는걸요?” 시에는 물렁해진 두조의 물건을 자각했다. 그녀는 힘없이 늘어진 그것을 보드랍게 손안에 쥐면서 말했다. “내가 다시 너의 물건을 단단하고 뜨겁게......” “아까 반응했던건 단지 쿤과 똑같은 얼굴이라 착각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아무리 해도 쿤이 될 수 없어요. 쿤은 남자에요. 그리고 난 남자인 그를 원해요. 당신하고는...... 하고 싶지 않아요.” 시에는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여자인 나보다, 남자인 그가 더 좋다는 거야?” “네.” “얼굴이 똑같아도?” “네.” “내 쪽이 여자라도?” 시에의 웃는 얼굴이 굳었다. 만약 그녀의 얼굴이 거울이었다면 쩌저적, 깨지기라도 했을 것이다. “네. 몇 번이나 물으셔도 똑같아요. 그러니 비켜주세요. 무거우니......으악!” 두조는 갑자기 중심을 꽉 잡는 시에 때문에 비명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 천사처럼 미소 짓고 있던 여자는 어딜 가고, 악마처럼 잔인한 미소를 띈 여자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거부하니까 똑같이 음경을 쥐어뜯는다. “흐응, 애초에 네가 선택권 따위가 있다고 생각했어? 쿤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로 속아 넘겼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냐. 내 목적은 말이지...... 네가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게 아니라!” “아악!” 시에가 손에 힘을 불끈 쥐자 눈물이 쑥 빠졌다. 부들부들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두조의 턱에 키스하며 시에는 섬뜩하게 웃었다. “그냥 너와 자는 거니까 말이지!” “으아악!” 시에는 손아귀에서 슬쩍 힘을 빼면서 두조에게 농염하게 키스했다. 그리고 능수능란한 손길로 고통에 움츠러든 음경을 살살 달래며 두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삽입이라도 한 것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문지르며 음험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강제로 당하기전에 순순히 하는 쪽이 훨씬 기분 좋을 거야, 자기~” 두조는 시에를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의 손톱에 고환이 긁히는 고통을 감수하고 팔을 붙잡아 밀치고는 저도 모르게 힘껏 침대 밖으로 떠밀어 버리고 말았다. 시에는 “꺅!” 소리를 지르며 뒤로 훌떡 넘어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잠깐 눈앞에 별이 번쩍였고, 바닥에 뻗어서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다. 저 노예 놈이 지금...... 나를 거부하다 못해, 밀었나? 순간 계획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살기가 치솟았다. 그냥 이 놈의 목을 잘라 쿤에게 던져주겠어! 이를 우드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저 노예를 죽이라고 소리치려던 시에는 문득 침소 입구에 우뚝 서 있던 사람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분노를 가라앉혔다. 두조 역시 침으로 범벅이 된 입가를 닦으며 당장 돌아가라고 화를 내려다가...... 도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장승마냥 서 있는 쿤을 보고 힉, 숨을 들이켰다. 원래 모든 일이 그렇다. 좋지 못한 상황에는 좋지 못한 우연이 겹친다. 늦잠을 잔 날에는 꼭 지갑이나 휴대폰을 두고 나온다거나, 그날따라 내가 타야할 버스만 안온다거나, 꼭 탄 버스가 고장이 난다거나, 하필이면 휴대폰 배터리도 떨어져 늦는다는 연락도 못하게 되는 그런 일말이다. 그래서 좋지 못한 상황을 악화일로로 만든다. 쿤은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점점 그 눈에 핏발이 돋았고, 이마에도 힘줄이 툭 하니 붉어져 나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악 다문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 몸이 새빨갛게 변한 것이 꼭...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을 보는 것 같았다. 시에는 비록 침대에서 떠밀려 바닥에 자빠지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지만 쿤의 표정을 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재빨리 다시 침대위로 기어 올라가 두조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쿤을 보고 말했다. “별궁의 손님이 고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 아니더군. 이 물건은 정말로 훌륭하게 기능했어. 어찌나 격렬하고 뜨겁게 내 안을 누비던지~ 아아 황홀했다구.” “무, 무슨 헛소리예요!” 두조는 시에를 다시 확 떠밀면서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하지도 않아놓고서는 무슨 망발을 하는 거예요! 누구 죽일 일 있어요!” “흐응, 안했다는 증거라도 있어? 여기 여기, 음모가 이렇게나 젖었는 걸? 내 것으로 말이야~ 아이, 쿤이 화낼 것이 겁나서 그러는 거라면 걱정 마. 나한테 오면 내가 잘해줄 테니까.” 두조는 하도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는 다시 자신을 끌어안으려 드는 시에를 피해 바닥으로 후다닥 내려와서는 쿤에게 외쳤다. “거짓말이에요! 정말, 진짜 진짜로 거짓말이에요! 전 결백합니다, 폐하! 저 여자가 폐하를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 저런 소릴...... 히이익, 폐하!” 두조는 순간 자신의 귀를 휙 스치는 시퍼런 단도의 날에 비명을 질렀다. 쿤이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쿤은 두조에게 단도를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죽엇-!” “꺄아악!” 시에는 비명을 지르며 쿤의 단도를 피해 침대 위를 굴렀다. 피하는 그녀를 쫓아가는 단도가 푹, 푹, 푹, 침대에 몇 번이고 꽂혔다. 아수라장이었다. 단도의 날에 깃털이 딸려 나와 사방을 날았다. 침대 머리까지 몰린 시에는 야차 같은 쿤의 표정을 보고 그가 정말 자신을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하니 황후인 자신을 노예하나 때문에 죽이려고, 그렇게까지 생각 없는 놈은 아니야, 라고 마음 한 구석을 놓고 있었던 시에는 이러다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푹! 단도가 시에의 바로 귀 옆에 꽂혔다. 시에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쿤의 얼굴이 코앞까지 와 있어도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정말로 보고 싶던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쿤의 얼굴에 서린 절망을. “오호호호호호!” 시에는 소리 높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쿤의 얼굴이 더욱 더 일그러졌다. 그녀는 승리자의 표정을 하고 손을 들어 올려 쿤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죽일 테면 죽여 봐! 그래서 영원히 패배자로 남아!” 쿤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올랐다. 그녀를 죽이려 드는 것은 쿤이고, 수세에 몰린 것은 시에인데도 두 사람은 마치 반대의 입장인 것처럼 보였다. 얼어붙어 차마 쿤을 말리지도 못하고 있던 두조는 쿤이 단도를 치켜들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다음 순간 바레사가 침소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뚝, 뚝. 핏방울이 시트위로 떨어졌다. 쿤은 칼을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싸늘한 표정으로 침대위로 쓰러진 시에를 바라보았다. 두조는 창백하게 질렸다. 소름이 쫙 끼쳤다. 엎어진 그녀의 얼굴에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바레사가 그 참상을 보고 새파래져서는 더듬더듬 말했다. “폐, 폐하. 서, 서, 설마......” 쿤은 소금기둥이 된 두조와 바레사를 내버려두고 몸을 홱 돌렸다. 피가 묻은 손을 옷자락에 비벼 닦으며 침소를 나갔다.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가냘픈 신음소리가 침대위에서 들렸다. 시에는 꿈틀거리며 얼굴을 붙잡고 일어났다. 얼굴이 피투성이었다...... 시에는 얼굴에서 손을 잠깐 뗐다. 그것을 보고 두조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입가에서 뺨까지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시에는 손으로 상처를 더듬어 보더니, 새파래져서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올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 내 얼굴! 내 얼굴이!” 바레사가 그녀에게로 달려가며 두조에게 말했다. “시종에게 얼른 치료사를 불러오라고 해라!” 두조는 반사적으로 침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란에 달려왔다가 침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던 병사들에게 치료사를 불러달라고 소리치던 두조는 빠른 걸음으로 궁전을 빠져나가고 있는 쿤을 보았다. 시에의 얼굴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놓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서슬 퍼런 기세였다. 솔직히 너무 무서웠지만 두조는 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자, 잠깐만요......! 오해십니다, 그녀가 폐하와 똑같이 닮아서 폐하라고 착각하고 그만... 폐하! 폐...!” 두조는 쿤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자 자신도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쿤이 홱 뒤를 돌아보았을 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했다. 쿤은 저벅저벅 걸어 두조에게로 왔다. 두조의 코앞에까지 다다른 쿤은 큿, 하고 일그러진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알몸이었어. 너도 알몸이었고. 그런데도 나로 착각했었다고? 착각하길 바란 것이겠지......” 두조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그녀를 거절하려고 했었습니다, 억지로 덤비는 그 여자를 제가 물리치는 것을 폐하께서도 보셨잖습니까!” “내 기척을 알아차려서 그런 것이 아니고?” 두조는 쿤이 있는 것을 몰랐다. 시에를 밀치고 나서야 그를 발견했다. 하지만 쿤은 두조가 자신을 보고 뒤늦게 그리 행동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해라고 말하기에는 두조 자신이 생각해도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쿤은 큭, 큭큭큭큭...... 정상인의 것으로 들리지 않는 웃음을 한참 흘리더니 말했다. “네가 말하는 진심이...... 이런 것이냐?” “폐하! 아닙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내기였어. 말이 안 되는 감정이었지. 하! 그동안의 내 모습은 상당히 우스웠다. 너와 만난 후 내 이 말을 수백 번은 외친 것 같구나. 고작... 고작 노예 따위에게!” “폐하.........”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상태가 아닌 듯 했다. 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시에와 엉겨 붙어 있는 두조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 사실 너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어. 네가 나를 거절할 때마다 이런 충동을 느끼곤 했다.........” 쿤은 두조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두조의 남자다운 턱 선을 쓸며 목덜미를 어루만진 후 살짝 키스했다. 가볍게 그의 목을 졸랐다가 놓으면서 외쳤다. “당장 이 노예를 붙잡아라!” “폐, 폐하?” “끌고 오너라!” 쿤이 몸을 돌리기 가 무섭게 병사들이 달려와 두조를 붙들었다. 그리고 쿤의 뒤를 따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폐하, 이러지 마십시오. 대화로 풀어요, 대화로... 다 오해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하시면 제 말을 믿어주실 겁니까? 네? 폐하! 폐하!” 쿤은 대꾸하지 않았다.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쿤은 꽤 멀리까지 걸었다. 끌려가는 동안 두조는 사정도 해보고 애원도해보고 도대체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것이냐 물어도 보았다. 하지만 쿤은 말없이 황궁의 가장 외곽,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으슥하고 음침한 곳까지 두조를 끌고 갔다. 높다랗게 자란 야자수와 뭔지 모를 잡풀이 어둠을 자아내고 있는 그 장소는 겉으로 봐선 무얼 하는 곳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밖에 우물과 화덕이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낡은 입구와 뭔가의 기계장치처럼 보이는 목조 건물이 있었다. 쿤은 벽에 걸려있던 횃불을 낚아채고 지하로 내려갔다. 두조는 어느새 변명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나선형의 계단으로 내려갈수록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혀가 굳었기 때문이었다. 안에는 뭔지 모를 독한 약초냄새가 진동을 했다. 목조로 만들어진 기계장치가 지하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구조가 어쩐지 엘리베이터와 비슷한 그 물건은 공사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무거운 것을 위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기계였다. 대체 여기가 뭘 하는 곳인가 싶어서 두조는 불안에 떨었다. 쿤은 세 방향으로 뚫린 입구 중 가장 왼편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방안의 풍경은 꼭......... 실험실 분위기가 났다. 선반위에 불투명한 유리병들이 주욱 늘어서 있고 작업대처럼 보이는 커다란 석판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검은 석판의 표면은 번들번들하게 빛나며 매끄러웠다. 그 석판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커다란 그릇이 놓여 있었다. 뭔가 아주... 아주 불길한 것을 연상시키는 물건이었다. 선반 앞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던 노인과 소년은 갑자기 쿤이 들이닥치자 화들짝 놀랐다. 소년은 재빨리 무릎을 꿇었지만 노인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굽히느라 예를 차리는데 한참이 걸렸다. 쿤은 노인이 무릎을 꿇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이놈을 위에 눕혀라!” “폐, 폐하!” 누... 눕고 싶지 않다! 절대로! 그때까지 크게 반항을 하지 않고 끌려왔던 두조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건장한 남자가 필사적으로 반항을 하니 제압하는게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두조의 팔다리를 붙드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었다. “폐하! 제발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진짜 아니라니까요! 폐하가 1분, 1초만 빨리, 아니면 늦게 오셨어도 그런 오해는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아 놔 진짜 미치겠네! 놓아주세요...! 대체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제 이야기 좀 한번만 들어주시라고요!” 쿤은 두조의 말을 깨끗이 씹어버리고는 두조를 석판위에 눕히려 용을 쓰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피죽도 못 먹었느냐! 내 친위대라는 놈들이 노예 하나를 손쉽게 못 다뤄! 놈의 상체만이라도 석판에 뉘여라!”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두조의 어깨와 팔을 붙잡아 석판에 깔아뭉갰다. 상체만이 뒤로 젖혀져 석판위에 눕게 된 두조는 다리를 마구 버둥거리며 악다구니를 썼다. “대체 뭘 어쩌시려고... 제발 저 겁 좀 그만 주시고 놓아주세요! 하, 한순간이라도 황후마마께 혹했다면 제가 손에 장을 지집니다! 정말 아니었다니까요!” “칼을 다오.” 냉랭한 쿤의 말에 두조는 기겁을 했다. 으와아아아악 비명을 올리고 두조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서, 설마 절 죽이시려는 건 아니죠! 그렇죠! 이건 정말 너무하세요! 억울하다고요! 아까의 일 때문에 화가 나신 거라면 제발 욱해서 이러시지 마세요! 절 귀하게 여겨주신다고 그랬잖아요! 어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아니면 제가 콱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싫어 졌다는게 진심이셨습니까? 바레사님이 제게 거짓말을 하신 거예요?” 쿤은 두조가 입을 다물 때까지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소리쳐도 쿤이 미동도 하지 않자 두조는 진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입에서 나 죽소 우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난데없는 소란을 벙하니 지켜보던 노인이 칼을 내미면서 쿤에게 말했다. “폐하.....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칼을 달라 하심은......” “내가 이 자의 심장을 직접 도려낼 테니, 미라로 만들어라.” “에에에에엑?!”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경악하는 두조의 비명과 노인의 의아한 물음이 동시에 울렸다. 쿤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두조가 도리질을 치며 외쳤다. “미, 미라라뇨! 미라라뇨! 그, 그게 무슨 끔찍한 말씀이세요!” 쿤은 뒤로 누운 두조에게 스윽 허리를 숙였다. 그의 금발머리가 쏟아져서 벗은 두조의 가슴을 간질였다. 어느 별보다 빛나던 감청색 눈동자가 한없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쿤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두조가 익히 보아오던, 화 잘 내고 사실은 쑥스러움을 많이 타며 쉽사리 얼굴을 붉히던 그 남자는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황제였다. “이곳은 황궁에서 나오는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곳이다. 황족을 비롯하여 황궁에서 죽는 귀족의 시신이 이 방을 방문하지. 미라를 만드는 과정이 어떠한지 알고 있느냐?” “예에에?” 두조는 선뜩한 쿤의 표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설명해봐라.” 황제의 명령으로 노인은 얼결에 입을 열었다. “머, 먼저... 시신을 깨끗하게 씻긴 다음 향유를 바릅니다. 그 다음 각 혈관의 주요부위에 칼집을 내어 피를 깨끗하게 빼냅니다.” “히에에에엑-” 역시! 이 석판에 있는 구멍은 피를 빼내는 곳이었어! “콧속에 뾰족한 갈고리를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 낸 다음, 갈비뼈 밑을 잘라서 심장을 제외한 장기들을 꺼내지요. 그 장기들은 방부 처리하여 항아리 속에 담습니다. 장기가 빈자리에는 방부소금을 채워 넣어 모양을 바로 잡습니다. 그리고 몸 전체에 방부 소금을 발라 때를 맞춰 잘 뒤집어가며 말립니다. 40일이 지나면 소금을 걷어내고 향유를 바른 뒤 송진으로 문지르고 다시 한 번 시신의 모양을 가다듬지요. 그리고 몸을 갈랐던 부분을 깨끗하게 꿰매고... 붕대를 잘 감습니다. 송진을 발라가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전의 모습을 본 따 만든 마스크를 씌우면 미라가 완성됩니다.” “그렇게 만든 미라는 어찌 되나?” “마찬가지로 생전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관에 안치됩니다.” “그래, 보통은 그 관에 무엇을 같이 묻지?” “생전에 즐겨 사용하셨던 물건이나... 보물 같은 것을 껴묻지요.” “그럼 황제의 관에는 무엇을 같이 묻나?” “네 개의 장기가 담겨있는 항아리와 함께... 황제폐하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해줄 그 어느 해에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심장 항아리가 묻힙니다.” “으하으으으으아아악!” “잘 들었느냐, 두조?” 쿤은 반쯤 울고 있는 두조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네가 될 것이다. 네가 내 저승길을 안내해 줄 테니까... 이걸 알고 있느냐? 황제의 피라밋에는 황제만 묻히는게 아니다. 살아생전 아꼈던 신하들과 황후, 후궁과 애첩의 미라도 보관되어 있다가 함께 묻히지. 그것만큼은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가 있어. 살아서는 백성을 위해야 하지만, 죽어서는 자신만을 위할 수 있거든. 황후라도 같이 묻힐 필요가 없고, 노예라도 묻히지 못할 이유가 없지. 두조...... 네가 싫어질 리가 있겠느냐?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렇게 상냥하게 말하는데도 조금도 안심이 안 된다. 더 무서웠다. 표정 없이 그리 뇌까리는게 쿤 같지가 않았다. 눈을 보니까 완전히 헤까닥 한 것 같았다. “폐, 폐하... 그, 그런데 왜 절 죽이시려는 겁니까..... 제, 제가 죽으면 미라로 만드시든지 길잡이로 만드시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아니면 적어도 폐하가 죽기라도 하실 때쯤에... 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으와악!” 쿤의 손톱이 두조의 목을 긁고 가슴으로 내려갔다. 두조의 유두를 비틀며 쿤은 대꾸했다. “내가 널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너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나머지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어지는 내가 무서웠다. 그래서 널 내보내자고 마음먹었어. 허나 시에와 얽혀있는 널 보는 순간 나는 그 결단이 지극히 어리석음을 자각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미칠듯한 증오가 끓어올랐지.” 그 순간의 느낌이 떠오르는 듯 쿤은 잠시 말을 끊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너에게 분노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에만이 미웠지 너는 밉지 않았다. 이렇게 나를 상처 줘도 너를 증오할 수 없으니...... 더한 일로 네가 내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는다 하더라도 너를 미워할 수 없어. 너를 포기할 수도, 이 마음을 없앨 수도 없어. 이건 내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황제인 내게... 쿤 칸칸인 내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폐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살려주세요...허으엉.” 쿤의 마지막 말은 흡사 신음 같았다. 곧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조는 그 표정을 보고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았다. 진짜 죽이려는 거야! 이건 진짜다! 으와! 나 미쳐! 사람 살려어어! 그는 천천히 칼을 들어올렸다. 사람을 자르기 위한 그 칼은 단도처럼 폭이 좁고 송곳처럼 끝이 뾰족했다. 두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검은 동공에 칼을 치켜든 쿤의 모습이 가득 들어찼다. 쿤은 고통스럽게 외쳤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으니까! 죽여서라도 너를 갖겠다!” “폐, 폐하!! 으아아아! 살려주세요!” “비록 이승에서는 아니더라도 사후세계에서는 네 심장을 가진 날 사랑해주겠지!” 칼이 날아들었다. 두조는 눈을 질근 감았다. 그리고 비명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을 소리쳤다. “와으아아아아악! 사랑합니다-!” 아주 한순간. 인생의 주마등이 지나쳤다. 두조는 아, 이게 그 주마등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짧은 한순간 자신의 생이 전부 지나쳤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사랑하는 아우야. 이 형님은 이렇게 죽는구나. 죽어서도 저승길 인도하느라 현실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아니... 칼에 찔린 탓에 아픈 것인가? 두조는 자신이 칼에 찔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칼끝은 두조의 가슴을 살짝 찌른 채 멈춰있었다. 두조가 외친 말에 잠시 칼을 멈췄던 쿤은 다시 지그시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지땀을 흘리며 헐떡거리는 두조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슬프구나. 살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하는 네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다. 내가 자비를 베풀어 너를 편안하게 죽일 수 있도록 거짓말 따위는 하지 마라.” “진심입니다... 왜 몰라주는 겁니까! 제기랄,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구요! 사랑한다고 쿤!” 두조는 순간 괴력을 발휘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왔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병사들의 손아귀에서 어깨와 팔을 빼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쿤은 두조의 가슴을 찌르고 있던 칼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두조는 살 속으로 밀려드는 칼끝을 느꼈다. 코끝을 들이밀고 있던 칼이 머리까지 들어왔다. 고통이 퍼졌지만 두조는 아랑곳 않고 가슴을 내밀고 팔을 뻗어 칼을 떨어트리고 물러서는 쿤을 붙잡았다. 딸그당, 하고 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두조의 손아귀에 잡힌 것은 쿤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두조는 그것을 휘어잡고 쿤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벌어진 그 입술 사이로 혀를 들이밀고 한 번에 그를 휘어잡았다. 머리카락을 놓고 쿤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등을 안고 고개를 기울이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뺨에 부딪친 쿤의 속눈썹이 떨리는게 느껴졌다. 침묵이 흘렀다. 사랑싸움임을 알아차린 노인네가 벙쪄 있는 병사들에게 휙휙 손짓을 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방을 나갔으며, 노인은 문까지 닫아주는 친절함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들이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쿤과 두조 두 사람 중 누구도 그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엇갈림에 비해선 너무나도 짧은 키스였다. 쿤의 아랫입술을 빨며 잠시 호흡을 고른 두조는 다시 입술을 겹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드는 수밖에는 없었다. 쿤의 입술을 축축하고 짭짤하게 적시는 눈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쿤은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는 두조의 팔뚝에 손톱을 박으며 으르렁거렸다. “거짓말 하지 마라.” “거짓말로 들리세요?” “거짓... 말 하지 마라! 살기 위해 또 나를 우롱하려 드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두조는 그리 바락 외치는 쿤의 허리를 붙잡고 몸을 틀었다. 그리고 쿤을 석판위에 눕히고는 그 위로 몸을 기울였다. 쿤의 위에서 두조는 그의 손을 붙잡아 다리 사이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걸 봐도 모르시겠습니까?” 시선을 아래로 내린 쿤의 눈동자가 커졌다. 두조의 것은...... 팽팽하고 뜨겁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방금 전까지 죽을 뻔 했는데도 불구하고 키스 한 번에 벌떡 일어선 것이다. 쿤의 손이 와 닿은 것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여태까지 실물을 두고서는 자위만 너무 많이 해서 중심에 와 닿은 그 체온이 지나치리라 만큼 자극적이었다. 두조는 꿈틀거리며 핏줄이 터지기라도 할 만큼 부피를 더욱 더 늘려가는 자신의 것을 느꼈다. 불기둥처럼 단단하고 뜨거운 그것을 손에 쥐고 쿤은 두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라서......... 하지 못했던 몸입니다. 하지만 이젠 폐하를...... 상상만 해도 이렇게 됩니다. 황후마마와 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폐하를 생각하고 발기했었지만, 처음 폐하가 남자인 것을 알고 실망했던 것처럼 그녀가 여자임에 폐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시들어버렸거든요.” 두조는 하아, 흥분한 한숨을 쿤의 목덜미에 토해내고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지나치게 솔직한 제 몸뚱이는...... 이제 폐하가 아니면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두조는 쿤을 완전히 쓰러트리고 다리 속으로 손을 넣어 속옷의 매듭을 붙잡았다. 힘을 주어 그것을 풀어버리고 끌어내렸다. 천이 음경을 쓸어내리는 느낌에 쿤이 어깨를 떨었다. 두조는 쿤의 다리를 벌리고 옷자락을 치워버리며 말을 이었다. “미로에서도 말씀드렸었지요. 그땐 그저 사과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약 같은 건 없었어도 됐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반쯤 일어선 쿤의 것이 두조의 눈에 들어왔다. 두조는 그것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지금... 폐하의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저와 똑같이 음모 사이에 돋아난 남자의 성기를요.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무엇하나 빠짐없는 훌륭한 남자의 것입니다. 하지만 전... 지금 이걸 보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씹어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습니다.” 두조는 정말 그러기라도 할 듯 쿤의 음경을 쏘아보며 침을 삼켰다. 시선에 물리적인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쿤은 자신의 음경을 훑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조는 자신의 물건을 쿤의 것에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것이 뜨거운 것과 만나니 불길처럼 타올랐다. 두조는 그것을 맞잡고 천천히 비비기 시작했다. 스며 나오는 애액 때문에 금방 두 개의 성기는 미끌미끌하게 젖었다. 쿤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허리를 비틀었다. 성기를 붙잡은 두조의 손도, 비벼지는 두조의 성기도 지나치게 뜨거웠다. 다리 사이에서 활활 타는 열기가 그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쾌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 줄줄 흐르고 있는 눈물도 슬픔 때문인지 쾌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흣...” “우......응...!” 두조의 것이 먼저 방출했고, 쿤도 곧 정액을 쏟아냈다. 흥건한 정액이 음모와 고환, 그리고 엉덩이의 골짝까지 흘러내렸다. 두조는 울먹임을 멈추지 못하는 쿤을 보고 안타깝게 말했다. “잘 모르시겠다면 폐하의 마음을 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뜨겁고 간절한지...... 그 마음에 목석처럼 굳어있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있을 수 있는지......” 쿤은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면서 두조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 눈에 고여 있던 분노와 절망을 씻어 내려주었다. 시야가 맑아지고 또 맑아지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조를 보았다. 그런 두조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두조는 거짓말 같은 것은 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진심이었다. 두조는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 있는 바레사의 말을 상기하며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두조가 엄지를 회음부로 문지르자 쿤의 허리가 펄쩍 튀었다. 그 틈에 두조는 검지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예전 막연히 상상했던 팍팍함이나 찝찝함 같은 것은 없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손가락을 꽉 물어오는 느낌에 깜짝 놀랐을 뿐이다. 두조는 검지를 깊게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이 내벽을 툭툭 두들길 때마다 쿤의 흐느낌이 커졌다. 내부의 살이 너무 찰지고 부드러워서 어쩐지 움직이기가 겁이 났다. 쿤이 가슴을 헐떡이는 모습이 힘들어 보여서 손가락을 성급하게 빼내려다가 구부린 채로 내벽을 주욱 긁고 말았다. 그러자 쿤의 입에서 색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어 꾸욱 누르자 엉덩이가 뜨면서 허리가 휘었다. 눈물이 흐르는 눈가가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귓가로 처량 맞게 눈물을 흘리면서 쾌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약한 몸짓에 몸이 화악 달았다. 두조는 쿤의 무릎을 들어 올려 굽혔다. 다리가 크게 벌어졌고, 손가락을 빼고 구멍에 귀두의 끝을 가져다 대었다. 사실은 한 번에 쑤셔 넣고 싶었지만, 아플 정도로 당겨오는 아랫도리의 압박을 참으며 두조는 허락을 구했다. “증명... 해도 되겠습니까?” 쿤이 석판의 가장자리를 비틀어 잡는 것이 보였다. “몸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두조는 부드럽게, 하지만 망설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쿤이 눈을 감자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혼까지 딸려갈 듯한 느낌에 두조는 흐으으으, 하는 긴 신음을 흘렸다. 쿤은 흐읏, 흐읏, 짧게 숨을 뱉어내며 헐떡였다. 두조는 벌써부터 밀려오는 사정감을 참느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쿤의 머리 양 옆에 손을 짚은 채 가만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쿤도 축축하기 짝 없는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두조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결합한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그렇게 서로를 응시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쿤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이냐...? 정말로...... 날 사랑하느냐?” 두조는 고개를 숙여 쿤의 눈가를 입술로 닦으며 말했다. “천하의 쿤 칸칸이 저를 진실로 사랑해주시는데 어찌 못난 제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서, 폐하께서 절 사랑하신 순간부터 저 역시 폐하를 사랑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제 고백에 놀라지 마세요. 기뻐하지도 마세요. 이제야 그걸 깨달았냐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둔팅아, 하고 차라리 욕을 하세요.” “정말이냐?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이 순간 폐하를 원하는 만큼 폐하를 사랑해요.” “다시 한 번 말해다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쿤.” 쿤은 왈칵 두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두조도 쿤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쿤의 다리가 두조의 허리가 감겼다. 두조는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쿤을 꽉 끌어안아 고정시킨 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천천히 부드럽게 시작된 움직임이 석판 끝까지 밀려간 쿤의 머리가 뒤로 젖혀질 만큼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방안에 두 사람의 신음소리 역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아! 으! 하아...하으, 으읏!” “아, 응... 하아! 으읏, 으응...!”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탓에 움직임을 크게 할 수가 없었다. 두조는 거칠게 쿤의 팔을 풀어버리고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발목을 잡아 벌리고서 무릎을 일으켰다. 쿤의 엉덩이가 휙 딸려 위로 올라갔다. 쿤의 종아리를 옆구리에 끼고 허벅지를 붙잡고는 바닥에서 떠오른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것을 힘껏 박아 넣었다. 귀두 끝까지 빼었다가 한 번에 집어넣었다. 비명처럼 드높은 쿤의 신음소리가 터졌다. “하윽-! 아! 아! 아!” 퍽퍽퍽, 포동포동 탄력 있는 쿤의 엉덩이가 흘러내린 정액과 애액으로 끈적하게 젖어 두조의 고환에 부딪쳤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여린 허벅지살에 마구 문질러졌다. 쿤은 석판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하체가 완전히 들어 올려지는 바람에 묵직한 벨트가 가슴까지 흘러내려가 있었고 옷깃이 딸려 올라가 배꼽과 치골이 훤히 보였다. 부딪칠 때마다 고환과 솟아난 음경이 배꼽을 향해 털렁거렸다. “하아! 하으...! 배, 배꼽이 예뻐요...” “아흑! 아아!” “유두.........” 두조는 거칠게 벨트를 잡아당겼다. 고리가 익숙지 않은 거라서 좀처럼 풀리지가 않았다. 결국, 투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두조는 벨트를 뜯어내어 버렸다. 벨트에 꿰어져 있던 진주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옷깃이 열리고 두조는 그대로 몸을 숙여 쿤을 짓누르며 유두를 씹었다.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안 쿤이 억눌린 비명을 질렀지만 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배가 완전히 접힌 채로 쿤은 거칠게 삽입하는 두조를 받아야만 했다. 그동안 하지 못해 이놈 고자 아냐? 하고 의심했던 것이 우스울 만큼 두조는 격렬하고 거칠었다. 유두를 씹고 혀로 굴리고 마구 핥으며 두조는 중얼거렸다. “유두, 부드러워... 말랑말랑해요. 아니, 하아... 이제 딱딱해.” “으응, 아앗! 아흐앗...! 아아! 아앗!” “흐으, 좋아... 미치도록 좋아요. 아아! 계속 이렇게 하고 싶어!” “두, 두조!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요... 사랑해! 아!” 두조는 쿤의 머리 옆에 팔꿈치를 괴고 정신없이 뒤흔들었다. 두조의 탄탄한 아랫배에 쿤의 성기가 비벼졌다. 까끌까끌한 음모에서부터 잘 쪼개진 배의 근육과 명치까지 흥건하게 적시며 쿤의 성기가 오르내렸다. 거칠게 내리찍던 두조의 움직임이 잘아졌다. 사정감을 참느라 두조는 이를 악 물어야했다. 여자와 해본 적이 없어 뭐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쿤의 속은 두조의 것을 완전히 쥐어짜는 듯 했다. 빨리 사정해버리라고 으름장을 놓듯이 뜨겁고 사나웠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목덜미를 마찬가지로 땀에 흥건하게 젖은 쿤의 목덜미에 겹치며 두조는 중얼거렸다. “너무 조이지 말아...요...! 으흣! 아, 쌀 것 같아...!” “아직 싸지 마... 좀 더 하고 싶어... 더, 더, 그동안 애태운 만큼...!” 쿤이 두조의 엉덩이를 그러모아 쥔 손에 힘을 쥐며 그렇게 말했다. 쿤의 귀를 반찬삼아 씹던 두조는 그 애원을 듣자 털끝만큼 남아있던 이성이 확 날아가는 것 같았다. 두조는 안을 한번 쾅, 때려 박은 성기를 쑥 빼냈다. 귀두 끝에서 질척한 애액이 흘렀다. 두조는 쿤의 다리를 붙잡아 뒤집어 석판 아래로 끌어내렸다. 가장자리에 걸쳐져 봉긋하게 솟아오른 엉덩이를 주무르며 다리를 벌리고 선 두조는 엉덩이 살을 벌려 자신을 잡아먹고 있던 입구를 확인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곳이 눈물을 찔찔 흘리며 벌름거리고 있었다. 미칠 것 같다. 두조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을 방치하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미친 듯 항의하는 성기를 입구에 대고 다시 한 번에 박아 넣었다. 쿤의 등의 휙 휘었다. “아흐으윽!” 그 휘는 등골을 타고 땀이 반짝이며 흘렀다. 두조는 혀를 내밀어 그 땀을 길게 쓸어 올려 핥았다. 그 혀의 까칠함에 쿤은 신음했다. 쾅! 다시 정점을 때려 박은 두조의 성기에 쿤은 크게 울었다. 두조는 쿤의 등에 가슴을 딱 붙인 채 손을 뻗어 그의 유두를 둥글렸다. 흐느끼는 쿤의 귓전에 더운 숨을 뱉어내며 속삭였다. “아직도 더 원해요?” “더...! 더! 아직... 아직 멀었어!” “하아! 이 몸을 다른 남자들도 수십 번... 안았겠죠!” “아아앗-!” 분풀이를 하듯 내벽을 찧는 느낌에 머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쾌감이 작렬하여 쿤은 사실 두조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두조는 너무나도 잘 느끼는 쿤 때문에 분했다. 이 몸을 아는 사람이 자신 뿐 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각되어 질투심으로 가슴이 끓었던 것이다. 두조는 다시 한 번 깊숙이 찔러 넣으며 외쳤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제 나 아니면 느끼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겠어! 원한다고 말해요!” “아아! 원해... 더 해줘... 좀 더... 으흑!” “그만하라고 애원할 때까지! 해드릴 테니까! 계속 말해!” “아으! 아아! 아아아!” “아직도? 아직도!” “아! 더! 더! 아으...응... 하아아앗-!” 쿤의 정액이 분출하여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사정감으로 쿤이 온 몸을 긴장시키자 내벽 역시 두조를 꽉꽉 조였다. 두조는 절정에 달한 쾌감을 느끼며 사정의 여운에 진저리치는 쿤의 내부를 빠르게 두들겼다. 여린 살 속에 거친 자신의 것을 묻고 용두칠을 쳤다. 곧 뜨거운 탁액이 분출되며 쿤의 내부를 흥건히 적셨다. 사정하고도 쉽사리 부피를 줄이지 못하는 두조의 물건 때문에 밀려난 정액이 다리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두조가 자신의 것을 뽑아내자 엄청난 양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두조는 자신의 것을 빨아 들이다시피하는 내부로 다시금 삽입했다. 입구의 도톰한 살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며 엉덩이가 움찔움찔 떨었다. 다시 두조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다 탈력감에 늘어져 있던 쿤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으으응, 으응...” “싫어... 싫어요?” “하아, 으응, 아앗.” 대답을 하지 못하는 쿤의 유두를 길게 핥으며 두조는 음탕하게 속삭였다. “싫다고 해도 소용없으니 대답 안 해도 괜찮아...... 그동안 애가 닳았던건 저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자아, 어떤 자세가 좋아요...?” 약속대로 두조는 쿤이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울고불고 할 때까지 박았다. 쿤은 두조가 사랑한다는 말을 목이 쉴 때까지 외치도록 그를 쥐어짰다. 결국 침소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은 시체를 눕히는 그곳에서 밤새도록 했다. 다섯 번이나 사정하고 난 후에는 다리가 후들거려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다. 날이 훤하게 밝을 무렵, 미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는 노인의 수제자에게서 전갈을 듣고 바레사가 가마와 모포를 들고 왔다. 석판위에서 알몸인 채로 서로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두 사람에게 그것을 둘러주고 그는 가마위로 쿤을 옮겼다. 두조를 옮길 때는 사실 좀 갈등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바레사는 두조도 함께 가마에 태웠고 그들을 침소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사흘간 쿤의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황제전에 타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했다. 친위대에게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쩡거리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 후 바레사는 자신의 집무실과 처소를 걸어 잠갔다. 이왕 이리된 거 사흘 간 어디 가서 좀 쉬다 올 참이었다. 사흘 뒤 돌아오면 대신들의 상소문이 산을 이룰지도 모르고 시에가 보내는 암살자들이며 독극물에 하얗게 밤을 지새울지도 모르고 신관과 사제들의 끊임없는 방문에 넌더리가 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쿤이 행복을 만끽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뒷일을 생각하면 물도 마시다 체할 지경이지만, 그건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그렇게 애써 자신과는 떨어트려서 생각하고 싶은 바레사였다. 사흘 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바레사는 평소보다 약간 늦은 시간 쿤의 침소 앞으로 갔다. 아직까지도 하악하악헐떡헐떡 낯 뜨거운 신음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안으로 들라.” 하는 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레사는 입구를 가린 천개를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쿤이 두조의 도움으로 의복을 갖추고 있었다. “아, 왔느냐 바레사.” 하며 쿤이 고개를 삭 돌리는데 순간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자라 엑기스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탱글탱글 윤이 나는 얼굴을 하고 쿤은 말했다. “그래, 모처럼의 휴식은 어땠느냐.” “아주...... 좋았습니다. 폐하께서도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하하, 그래. 덕분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실컷 즐길 수 있었다. 그렇지 두조?” 바레사는 이번엔 핼쑥해진 두조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는 사흘 동안 막노동이라도 뛰다 온 사람처럼 뺨이 푹 들어가 있었다. 까칠한 얼굴을 하고 두조는 노래방에 72시간 갇혀있었던 사람처럼 쉰 목소리로 말했다. “예, 예에. 돌아오셔서 정말로 기쁩니다, 바레사... 크흑.” 어찌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남자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보통은 받는 쪽은 힘겹기만 하고 느끼기는 어렵다지만 어릴 때부터 남색에 도가 트여있던 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타고났다. 바레사도 쿤의 총애를 받을 시절에는 낮에 제대로 깨어있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밤이면 밤마다 쿤을 상대하느라 지쳐서...... 헌데 쿤은 ‘한번 당해봐라.’ 는 심정으로 아무리 박아대도 다음날이면 멀쩡한 모습으로 정무를 보러 나갔다. 아니 지난밤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더 정력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쿤은 닳을수록 더 불타오르는 심지와도 같았다. 첫날밤 쿤이 그만하라고 애걸복걸하게 만드는데 재미가 들린 두조는 사흘간 죽어라고 쿤을 괴롭혔다. 쉽사리 사정하지 못하도록 만들며 애를 태우고 몸의 수분이란 수분은 다 정액으로 쏟아져 나오게 만들만큼 쥐어짰다. 하지만 쥐어짜진 것은 두조 쪽이었다. 쿤은 하면 할수록 어찌된게 더! 더! 더!를 외쳐대었고 좋아서 죽을 것 같다고 도리질을 치는 그의 위에서 두조야 말로 복상사 할 뻔 했다. 이제 그만해야지, 싶다가도 별 의미 없는 손짓하나에 금세 비음을 흘려대는 쿤 때문에 정신 나간 아들놈은 벌떡벌떡 일어섰고 참지 못하고 또 해대고...... 두조는 노역장에서 일했던 지난 고된 세월을 감사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 나날들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쿤을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까. 바레사는 퀭한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두조를 보고 시롭을 시켜 정력제라도 좀 가져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두조가 사흘만의 휴식을 만끽하도록 내버려두고 두 사람은 외궁으로 향했다. 외궁으로 가는 가마위에서 쿤은 바레사가 산더미처럼 쌓인 상소문에서 꼭 읽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은 몇 개만을 대충 훑어보았다. 옵시타 대 귀족들이 보낸 세 개의 상소문과 의회장이 보낸 의원들의 서명문, 그리고 쿤의 숙부인 황족 출신 대신관이 보낸 서찰이었다. 대부분 황후에게 칼부림할 한 황제를 지탄, 통탄 내지는 위협하고 협박하는 내용들이었다. 외궁의 집무실에 도착해서 그 두루마리들을 던져버리며 쿤은 코웃음을 쳤다. “이것들이 나를 협박하려 드는군!” 하지만 바레사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뭐가 말이냐.” “보시다시피 온 나라가 난리입니다. 후궁들의 얼굴에 낙인을 찍어 가둬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황후의 얼굴에 칼부림을 하셨으니.........” “잘되었지 않느냐?” “예?” “그걸로 인해 두조를 별궁에서 쫓아내니 마니 하는 사소한 문제는 묻히고 말았잖아.” “그거야 그 노예 때문에 황후에게 칼부림까지 하셨으니 별궁에서 쫓아내라마라 한다고 곧이 들을 지경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제 두조를 별궁에서 쫓아 보내는 정도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그 노예의 목을 내놓으라 다들 목소리가 높습니다.” “물론 그것을 부추기는건 시에겠지?” “그렇습니다.” 쿤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에에게 전해라. 당장 이놈들의 아가리를 닥치게 만들지 않는다면 오늘밤부터 후궁전에 행차하는 수가 있다고.” 바레사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여태까지는 쿤이 남색만을 즐기며 후계자를 만들지 않았기에 칸칸인 시에의 계승권이 지켜져 왔다. 하지만 쿤이 아들을 얻는 순간 시에의 계승권은 박탈되고 계승권은 그 아이가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짓은 시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바레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그런 협박은 황후마마께서도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황후마마께서 아이를 수태하셔도 그 아이가 폐하의 아이가 아님을 증명하기는 힘들 것이옵니다. 두조 때문이라는 것을 세상천지가 다 알고 있습니다만 황후마마께서 폐하의 침소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녀와 나는 남매다. 똑같은 금발머리에 보기 드문 푸른 눈을 가지고 있지. 나와 똑같이 생긴 사내놈을 그세 구했다면 모를까...... 아이의 모든 것이 시에를 닮지 않는 이상 그 아이가 내 아이란 걸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울 거야. 내 아버님과 어머님도 남매가 아니셨던가? 칸칸은 대대로 금발에 푸른 눈을 지녀왔다. 그러니 다른 머리칼이나 눈동자 색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확률은 아주 희박하지. 시에에게 더 불리해. 그 영악한 여자가 그런 위험한 짓을 시도할 리가 없어.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자식을 황제에 앉히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다. 설령 다른 자의 아이를 황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려 든다고 해도 내가 죽어야 가능한 일이야.” “황후마마께 이 협박이 들어 먹힐까요?” 쿤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고는 말했다. “이 말도 함께 전해라. 나와 두조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녀의 계승권은 지켜지게 될 거라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죽으면 그녀를 황제로 만들어주겠다.” “황후마마께서 그 시기를 앞당기려 암살을 시도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쯤 폐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 터인데......” 쿤은 문득 웃었다. “후후... 바레사.” “예?” “그걸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요전에 두조가 비밀통로에서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 그 녀석을 찾느라 전에 들어가 보지 못했던 곳까지 헤매야만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후 칸칸은 말이지, 사실 챠 칸칸이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의심하지 않았어. 확신하고 있었지. 사실 그는 얼마든지 챠 칸칸이 자신의 자식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하지 않았던 것은 황후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황후는 십년 만에 어렵사리 얻은 챠 칸칸을 끔찍하게 아꼈으니까. 황후 라테 디타는 황궁을 축조하면서 자신이 은밀히 만들라고 지시한 것의 존재를 황제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후 칸칸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예에?” 바레사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지만 쿤은 웃어 보이기만 했다. 후 칸칸은 황후가 지은 비밀의 방의 존재를 묵인하는 대신, 비밀통로를 그곳으로 이었다. 그리고 비밀의 방을 은밀히 관찰할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두조가 길을 잃었던 그날 밤. 쿤은 그를 찾아 비밀통로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곳을 발견했고, 시에가 눈을 가린 남자를 농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자는 쿤도 알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귀족으로 이미 유부남이었고 아이까지 둘이나 있었다. 시에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남자를 점찍어 두었다가 소문이 나지 않도록 은밀히 잡아서 눈을 가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고는 가지고 논 후 수도밖에 멀리 버려두곤 했던 것이다. 당한 남자들로서는 귀신에게 홀렸다고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방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시에의 부정을 적발하고 그녀를 황후에서 축출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덕분에 요전번 그녀를 콱 죽여 버리고 그 방의 비밀을 까발릴까 하는 충동을 참느라 크게 애먹었다. “그래, 후 칸칸은 사실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 역시 그녀를 건드리지 않겠어. 그녀의 은밀한 취미 역시 그냥 내버려둬 주겠다 약속한다고 전해라. 이정도면 내가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에 가까우니 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쿤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쿤이 시에를 휘두를 수 있는 결정적인 카드를 손에 쥐었음을 깨달은 바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염려되는 것이 그 성질에 얼굴까지 그 모양이 되었으니 미치기 일보 직전일 텐데 이성적으로 쿤의 전갈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욱해서 칼 물고 찾아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한편. 황후전에서는......... “거울, 거울을 가져와......” 아멘치타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고했다. “황후마마...... 거, 거울은 상처가 좀 나으신 뒤에 보는 게 어떠신지...” “거울을 가져오라니까-!” 히스테릭한 시에의 외침에 아멘치타는 결국 거울을 그녀 앞에 대령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시에는 한동안 자신의 얼굴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연고와 엉겨 상처위에 붙어있는 거즈를 천천히 떼어냈다. 광대뼈 아래에서부터 정확히 입 꼬리까지가......... 찢어져 있었다. 벌레라도 기어가듯 꿰매져 있는 그 상처를 보고 시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눈썹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녀는 외마디 고함을 치며 물병을 집어 들어 거울을 깨버렸다.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그녀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쿠우우우운! 죽여버리겠어어어어어어-!!!!!!” 하지만 그 분노는 시작에 불과했다. 쿤의 전갈을 받아들고 시에는 그것을 씹어 삼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탈모 증세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덩달아 죽어나는 것은 황후전의 시녀들이었다. 한동안은 쿤을 저주하는 무시무시한 황후의 비명소리에, 황후전의 사람들은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며 깨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고 한다. 그리고......... 황후가 어떻게 했는지 상소문이 뚝 끊겨 드디어 집무실에 발 디딜 틈이 생기기 시작한 어느 날의 저녁. 쿤을 먼저 처소로 돌려보내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눈이 침침함을 느낀 바레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조용히 일이 해결되어 천만다행이었다. 황궁에 한바탕 피보라가 불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렸는데...... 게다가 요즘에 쿤은 두조에게 무슨 소릴 들었는지 민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엔 피라밋 대 공사를 담당한 추에립의 횡령사실을 털어 피라밋 공사장 노예들의 식생활을 제대로 돌봐주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잖아도 아무리 노예를 사온다 한들 척박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족족 죽어나가니 시체를 처리하는 일만해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쿤이 피라밋을 빨리 지으라 닦달하는 대신 노예나 백성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덩달아 열심히 일하다 보니 요즘은 매번 밤늦게 잠들어 새벽같이 일어나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 종일 서류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일했구나 싶은 바레사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내일은 오전에 일정이 없어 폐하께서도 늦게까지 두조를 붙잡고 침소에 계실 터이니 늦잠을 자도 될 것이다.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무실을 정돈하는데 문득 테살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야 처소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테살... 집무실까진 무슨 일로?” 바레사는 피곤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밤은 저 능글맞은 놈을 상대할 여력이 없다. 테살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대답했다. “아니, 처소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니까 도무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으시기에 과로사하기라도 하셨나 싶어서 와보았지요.”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밤은 돌아가 주시지요. 피곤해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 “정말 그래 보이는 군요. 왜 이리 무리를 하시는 겁니까?” 테살이 다가와 슥 손을 내밀었다. 바레사는 반사적으로 흠칫 물러났지만 테살은 바레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테살 답지 않은 상냥한 행동에 도대체 무슨 속셈인가 싶었지만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풀어주는 손길이 너무 기분 좋았다. 결국 바레사는 테살에게 어깨를 맡긴 채 늘어졌다. “요새 저희 쿠칸들은 풀이 팍 죽었습니다.” “왜요?” “왜긴요. 폐하께선 저희 모두의 꽃이신데 한사람의 것이 되셨으니... 바레사께서도 적잖이 서운하시지 않습니까. 새끼 오리를 품고 있는 것처럼 싸안고 있던 존재가 훨훨 날아가 버렸잖아요.” “새끼 오리는 누가 새끼 오립니까? 폐하를 두고 그런 망발을 하다니... 전 조금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제 짝을 찾으셨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다 싶을 뿐입니다.” “그렇게 반대하실 때는 언제고요.” “그것도 제 나름대로는 폐하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행복하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래도 외롭지 않으십니까?” “외로울 새가 어디 있습니까? 바빠 죽지 않으면 다행이거늘......” “에이, 외롭지 않으십니까아~ 새끼 오리가 품에서 떠나간 기념으로 어떻습니까? 저희도 연애한번 해볼까요?” “무슨 미친 소립니까!” 테살의 손을 확 쳐내려다가 바레사는 도로 붙잡히고 말았다. 테살은 바레사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며 능글맞게 속삭였다. “그동안 저를 그렇게나 거절하셔도 폐하 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면서 참았습니다만, 폐하께서 제 짝을 찾으셨으니 이제 모른 척은 안 됩니다.” “뭘 모른 척 했다는 겁니까?” “바레사님을 사모하는 제 마음 말입니다~ 어라라? 제가 말 안했습니까? 저, 바레사님을 사랑한다고? 사실 예전에 얼마나 절륜한지 보자고 덮쳤던 것도 핑계였습니다. 그냥 바레사님을 먹어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오~” 말꼬리를 길게 끌며 웃는데 소름이 쫙 끼쳤다. 그동안의 장난질이 장난질이 아니라 진심이었단 말인가? 장난질은 장난질대로 기분 나빴지만 진심이라면 더 기분 나쁘다! 바레사는 붙잡힌 팔을 비틀며 소리쳤다. “절 사, 사, 사랑한다는 그런 끔찍한 소리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그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와서 무슨 속셈으로 이러십니까!” “그동안은 폐하의 총애를 잃을까봐 솔직하지 못했지만 이젠 뭐 저도 상관없고 바레사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뜨겁게 사랑을 불태워 보자구요. 아핫핫핫.” “누구 마음대로......!!” “후후, 뭐 지나간 일이긴 합니다만 시에에게 두조의 이야기를 떠벌리고 여자가 아니면 못 안는다느니 폐하께서 두조에게 걷어차였다느니 하는 굴욕적인 이야기를 바레사가 알려주었다는 사실을 폐하께서 알면 어찌 생각하실까요?” “당신도 가담했지 않습니까!” “그 편지는 당신이 쓴 거지 않습니까~” “증거 있습니까! 증거! 그 편지는 벌써 황후마마의 손에 들어가 없어진지 오래일 텐데!” “증거가 왜 없겠습니까~” 테살은 히죽 웃었다. “황후마마의 첩자가 집어간 것은 가짜입니다. 바레사 당신의 편지를 당신의 글씨체로 똑같이 베껴 쓴 것에 불과하지요. 원본은 제가 아직 자~알 가지고 있답니다.” “테사아아알!” 이래서 이놈과 음모같은걸 꾸미면 안 되는 거다! 뒤통수 맞으니까! 바레사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든 말든 테살은 그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기며 말했다. “자아, 그럼 맛보게 해주실까요오? 당신의 쫄깃쫄깃한 그곳을요. 아아, 정말 오래 참았지 뭡니까!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상상하며 자위만 하는건 너무 서글펐어요.” “크아아악!” 바레사는 귀가 썩는다 생각하며 괴성을 질렀다. 테살은 그 경악하는 입술을 입술로 틀어막으며 진득하게 키스했다. 바레사의 꿈에 그리던 엉덩이를 손아귀에 붙잡고 주무르며 테살은 각도를 바꿔 다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당신의 실력을 다시 보여줘요. 날 넋 나가게 만들었던 그 키스를...” 바레사가 붙잡힌 손목에 힘을 주자 테살은 훗훗 웃었다. “어라? 반항하깁니까? 폐하에게 진실이 알려져도 상관 없............” 테살은 허리가 휙 꺾이고 고개가 젖혀지는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눈동자가 헤실헤실 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느새 테살은 서류가 흩어져 있는 바레사의 책상위에 드러누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테살은 몽롱해진 눈으로 더운 숨을 뱉어냈다. 다시 해봐도 바레사는 키스를 끝내주게 잘했다. 테살은 화끈하게 옷을 벗어제끼는 바레사를 탁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몸 안을 누빌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랫도리에 전율이 몰려온다. 하지만 바레사는 그의 중심으로 슬슬 다가오던 테살의 두 손을 꽉 잡아 위로 확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이를 콱 박으며 무릎으로 테살의 다리를 벌렸다. “그렇게 저와 하는게 소원이라면 들어드리지요. 처음이라고 하셨지요?” “어, 어라?” 이게 아닌데. “바레사... 뭔가 제 의도를 잘 못 아신 듯 싶습니다만 제가 느끼고 싶은 것은 바레사님의 뒤이지 앞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팔을 비틀어보지만 붙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날 쿤의 뒤만 쫓아다니면서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는지라 말랐을 거라고 생각했던 몸은 몇 년 전 쿠칸에 있을 때와 하나 다를 바 없이 탄탄했다. 불길한 예감에 테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바레사는 도무지 평소의 그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음험한 미소를 떠올리며 으르렁, 이를 드러냈다. “저도 테살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러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살려달라고 펑펑 울면서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말이지요! 당신이 그랬듯이 처음이라도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테살은 달군 쇠기둥처럼 뭔가 무시무시한 것이 엉덩이 사이로 와 닿는 것을 느끼고 새파랗게 질렸다. 곧, 처참한 비명소리가 집무실 밖으로 터져나갔다. 바레사는 그 소리에 희열을 느끼면서, 진작 이럴 것을 왜 자신이 테살을 피하기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제 앞에서 깐죽거리면 더 호된 꼴을 당하게 될 겁니다!” “으아아아! 잘못했어요!" “아직 멀었습니다! 진심으로 반성하십시오!” “한번만 봐주세요! 아으... 너무 아프다구요! 으아악!” “테살님의 안도 저 못지않게 쫄깃쫄깃하군요!” “와아아아악! 으허어어엉!” “테살님의 우는 모습이 절 더 흥분시키는데요!” “히에에에엑-!” 그 후로 바레사만 보면 십리 밖으로 달아나는 테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아무튼 간에......... 갖은 오해와 역경(?) 끝에 쿤 칸칸은 두조라는 노예를 얻을 수 있었고, 두조는 차원이동으로 인생역전(?)을 일구어냈다. 이후로도 쿤은 왕왕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두조를 두들겨 팼고, 두조는 멍청하기 짝 없는 행동으로 두드려 맞기 일쑤였지만 모두들 사랑싸움이려니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그 폭력사태를 지켜봤다. 아무리 맞아도 걱정을 해주지 않아 섭섭한 마음에 두조는 슬그머니 “저 맞아 죽을까봐 걱정도 안돼요?” 하고 시롭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시롭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라? 즐기는 거 아녔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가 차라리 개척(?)해보라는 시롭의 말에 두조는 내가 어쩌다 호모로도 모자라서 변태가...... 하고 땅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호모가 되었든 변태가 되었든 행복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쿤 칸칸의 유일한 남자가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