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http://cafe.daum.net/bearnangman) 1. “뭐라고 하셨어요…?” “네 작은 아버지가 널 찾고 계셔. 닷새 전에 연락이 왔었단다. 널 데려가겠다고….”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정확히 7살 때였다. 부모님의 차사고로 의지할 곳 없는 홀홀단신 고아가 된 나는 여기 이곳 제주도의 보육원에 오게 되었고 그렇게 11년이 흘러 지금의 나는 이 고아원의 맡이인 18살의 소녀이다. 그렇게 11년 간, 이 곳에서 지내왔는데… 그런 내게, 지금 날 애가 타게 찾고 계시는 작은 아버지가 있다고 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던 순간이었다. “가서 잘 지내고.” “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누나 어디가는 고야? 멀리 가?” “그래. 누나 없어도 잘 지내. 먹을 거 가지고 싸우지 말고 원장님 말씀 잘 듣고. 알았지?” 고운정 미운정 다 들었던 녀석들이라고… 다시는 못 본다고 생각하자 왠지 가슴 시큰해진다. 모처럼 다정하게 웃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거의 경끼 일으키는 듯한 몸짓을 하며 말하는 영웅이. “누나 없음 싸울 일도 없쪄!” “마자, 마자.” 더불어 동요하는 여러 녀석들까지…요 새끼들이… 이별의 순간도 진지할 수 없게 만드는 구만. 혹여 빠트린 것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내 짐을 살펴주시는 원장님이 잠시 자릴 옮기신 틈을 타 빠른 속도로 녀석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하여간 마지막까지도 이뻐를 못해주겠구먼. 까불텨?” “악. 누난 마귀할멈!” “그래 인마. 마귀할멈한테 맛 좀 봐라.” 나와 보낸 나날 듯이 악몽이었을 녀석들은 마지막까지도 진지해지질 못하고 우르르 원장님 뒤로 숨는다. “애들이랑 인사는 다했니?” “그럼요. 향후 10년은 못 잊을 찐한 인사를 했어요.”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미소로 녀석들을 바라보자 표정이 썩어서는 할 말을 잃은 녀석들. “다녀올게요! 잘 지내세요, 안녕 요 녀석들아!” 조금은 젖어든 눈과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갤 돌려 빠르게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사실은…그 뒤로 이제 더 이상 고아 ‘강다희’ 가 아니라는 생각에, 또한 저 지긋지긋한 꼬맹이들과의 씨름을 벌 일 일도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얼마나 참았는지, 당신은 알랑가… 비행기에 올라타자 마자 나는 외쳤다. “드디어…탈출이다!!!! 아자아!!!!” 물론 미친 듯이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조심스럽게 다가와 진정제를 건네던 스튜어디스 언니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무렵, 내가 탄 비행기가 이륙한 순간 꼬맹이들의 기쁨 섞인 목소리가 공항안을 드높이고 있단 사실을 난 알리 없었다. “선쌩님, 선쌩님. 그믄 이제 정말 다희 누나 가쪄요? 다시 안 와요?” “으음…아마도 그렇겠지. 왜? 벌써 보고싶니?” “…….” 예의상, 형식적으로하는 그녀의 말에 그녀의 옷깃을 붙잡은 채 궁금한 듯 묻던 아이들의 표정이 썩어갔다. 그녀 역시 아이들의 표정이 썩어가는 이유를 이해하고 또 이해할 수 있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공기는 좋네.”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내린 곳은 내가 바랬던 도시의 광경은 아니었다.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고 계시다는 학교를 찾아가기 위해 온 곳은 뭐랄까… 오히려 제주도보다 더 조용하고 적막하달까.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려서 걷고 또 걸어서 학교에 간다는 하루에 딱 세 번 오가는 77번 버스를 타기 위해 몸뚱이만한 짐짝을 옆에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길 30여분 째. 때마침 저 멀리서 페인트 칠이 벗겨진 버스가 탈탈거리며 스더니 이내 자동같지 않은 버스문이 절로 열렸다. “아저씨 이거 단휴연고등학교 가죠?” 내 말에 얼추 고개를 끄덕이시는 운전기사 아저씨. 앞에 슈퍼에서 산 차표를 내고 딱 버스 안에 들어서며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한데 있다가 어디서 내려야 하는 지 좀 알려주세요.” 역시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신다. 내키시지 않아도 알려만 주시면 되는 거니까 뭐. 아무튼 아저씨의 눈치에 얼른 올라탄 버스 안. 하루에 세 번 오가는 버스라고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버스는 휑했고 내 눈에 보인 건 머리에 짐을 이고 있는 할머니와 가장 뒷좌석, 까만 머리가 이쁜 남학생 하나. “빨리 앉아요. 출발하게.” “아, 예.” 멍하니 안을 둘러보다 말고 아저씨의 핀잔을 뒤로 한 채 내가 앉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곳은 다름 아닌 이쁜 남학생 옆자리. 한적한 버스 안엔 아무도 없어 자리가 널리고 널렸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예쁜 남학생의 옆으로 향했다. 당연히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사이. 달캉달캉 거리며 버스가 달리고 창밖의 푸른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다가 슬쩍 그 시선을 그 남학생에게로 옮기면. 내가 옆에 앉았다는 사실 따윈 조금도 의식치 않고 스치는 바깥을 보고 있는 남자. 8월의 밝은 햇볕이 내리쬐어 들어오는 차안으로, 비스듬히 창을 향한 고개를 튼 남자의 얼굴이 보이는데… 까맣게 찰랑이는 새카만 머리. 창밖을 향한 눈 위로 깔린 긴 속눈썹과, 곱고 시원하게도 뻗은 콧날과 턱선. 하얀 교복 셔츠 안으로, 얼굴만큼이나 희고도 매끄러워 보이는 살결과 잘 드러난 섹시한 쇄골.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건지, 곧 짙고도 까만 흑갈색눈동자를 나를 향하여 돌리며 굳게 다물려 있던 그 볼그스름한 입술을 떼면……. “보지 마.” 란 한 마디가 흘러나온다. 그 상황에서 남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내가 무어라 하겠는가. “에? 아아…! 네.” 민망한 내가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간단히 대답할 뿐. 웬만하면…처음보는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지도 않는 나지만, 무턱대고 보지말라고 말하는 이 사람이나. 무안함에 고갤 돌리다가 문득 눈에 띈 옆자리에 놓인 구인광고 전단지. 빠삭. 소리를 내며 전단지를 펼쳐 들었고 감히 학교에 다니게 된 주제에 아르바이트 같은 건 하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 주말마다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살피는 중. 시급 2800이라…. 못해도 토요일이랑 일요일만 할 수 있어도 얼마 정도는 벌 거고. 얼마 안되더라도 원장님께 보내면 참 좋을텐데 싶어서 전화번호를 알아두려고 펜을 찾고 있는데. 별안간 내 무릎위에 놓여진 전단지로 슬그머니 올라오는 손. 당연히…놀란 눈으로 손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민망할 만큼 무안주던 아까 남자가 내 무릎 위에 놓인 전단지를 들어…접기 시작했다. 천천히. 느긋하게 전단지를 반으로 접더니 곧 추억의 종이 비행기를 만들어 냈고. 멍해진 채로 그의 손놀림을 바라만보고 있는 나에게 보란 듯이… 열린 창밖으로 멋지게 날아가는, 어느새 종이비행기가 되어버린 구인광고 전단지…. “뭐…뭐예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그런 내 반응에도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창밖의 구인광고 전단지가 어정쩡하게 날다가 떨어져 나무에 꽂히는 것 까지 보고는 싹 창문을 닫아 버렸다. “무슨 짓이예요 그게?” “내거였어 그거.” 정말이지 할말 잃게 만든다. 옆에 던져 놓고 신경도 안 썼으면서, 아니. 옆에 던져다 놓은건지 모셔다 놓은 건진 내가 알 리 없지만 적어도 정신이 말짱한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다시 가만히, 고갤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버린 그 남자. 이제야 든 생각이지만… 여기 앉은 건 잘못된 선택이었어……. “신경도 안 쓰고 있었잖아요? 치사하게 사람이 왜 그래?” 어처구니 없는 남자의 태도에 덩달아 반말이 나와버렸고 내 말은 들은 체도 안하고 주머니에서 mp3를 꺼내 이윽고 내 목소리를 더 듣기 싫다는 듯 음량을 높일 대로 높여 내게까지 들리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어떻게 이러지? 생긴 걸 배제하고 하는 행동만 보면 사실…자폐아가 아닐까…? “학생, 다왔는데 안 내려?” 어처구니 없는 남자를 지켜보고있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느새 목적지에 버스는 멈춰섰고 내리길 재촉하시는 기사아저씨의 목소리에 대충 풀어재꼈던 짐들을 챙기느라 정신없다. “아…자, 잠시만요!” 제길. 괜히 다 뒤집어놨어. 내려놨던 배낭을 대충 한쪽 어깨에 매고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급하게 일어서던 찰나였다. 우당탕―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흘러나온 옷과, 그것뿐이면 모르겠건만 어설프게 둘러맸던 다른 한쪽의 가방끈이 길게 늘어져 발에 걸려 넘어짐으로써 다른 좌석들 보다 한층 높이 있는 가장 뒷좌석에서 제대로 넘어지고야 말았다. “에구머니!! 학생 괜찮우??” 정말이지 소리도 낼 수 없을만큼 민망하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깜짝 놀란 할머니가 머리에 이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시며 날 바라보시고 재촉하던 기사아저씨 마저도 백미러로 보는 것만으론 모자랐는지 아예 몸을 돌리신 채 날 쳐다보신다. 정말이지 그거면 충분했는데… 애처롭게도 열린 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속옷과 잡다한 물건 나부랭이하며. 솔직히 아픔 따위야 둘재였다. “많이 다친건가? 꿈쩍두 않하네 그래.” 네. 그러고 싶습니다. 콱 기절이라도 하구 싶을만큼 절실합니다, 지금 저.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상황에서 빨리 일어나 짐을 챙겨 넣을 생각보다 아주 천천히 고갤 돌려 뒤를 돌아봤을 때… 아직 한쪽 다리는 뒷좌석에 걸쳐져 있는 웃기는 꼬랑새로 넘어진 나를 보고도 그 자폐아 같던 남자, 조금의 동요조차 없는 얼굴로, 괜찮냐는 말도―아니―하다못해 내 이런 모습에 소리를 내며 웃었더라도 이만큼 창피하진 않았을 거다. 그저 묵묵히 점점 더 홍당무가 되어 닿아오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 그나마…이 버스에 사람은 나를 비롯해 네 명 뿐이고 그 중 한분은 기사 아저씨, 한분은 할머니. 마지막 하나는 자폐아란 사실에 감사할 뿐. “병원에 가봐야하는 거 아닌지 모르겄네.” “괘, 괜찮아요…….”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짐을 챙겨 넣었다. 그래. 저런 자폐아 같은 놈 때문에 민망해하고 있을 이유 없어. 그렇지만 그나마도 버스 아저씨를 제하곤 다시 만날 인연 아니라는 것과 또 차려 입은 옷이 치마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교복치마쯤이라도 됐다면 난 이미 터져버렸을지도몰라. 뻥하고. “감사합니다!!” 급하게 짐을 가지고 내렸고 백미러로 내가 완전히 내린 걸 보고서야 다시 차에 시동을 거시는 운전기사 아저씨. 걱정스러운 표정의 할머니. 그리고…버스가 떠날쯤 갑자기 뒷자석 창문이 열리며 내 얼굴로 떨어져 내린 무언가. 눈앞을 가리던 그것을 들어 무언지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창가로 다시 시선을 옮겼을 땐, 살짝 고개를 내민 채 여전히 무표정인 그 녀석의 건조한 목소리가 나지막히 말했다. “놓고갔어.” 천천히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웬수같은 보라색팬티를 재빠르게 가방에 꾸역꾸역 밀어넣으며 스스로 위로했다. 아아…괜찮아. 괜찮다, 강다희. 저런 자식, 다신 볼 일 없어. 암 그렇고 말고.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 “여긴가?” 어느새 버스에서도 내려 도착한 곳. 나무가 울창한 가운데 아주 곧게 뻗은 큰 도로. 멀기도 먼 흐릿하게 보이는 문을 앞으로 한참 걸어 나가자 [亶虧練 男子 寄宿舍 高等學敎]라는 익숙지 않은 한문으로 된 교패가 보이는데 왠지 아무리 한문에 눈이 먼 나라지만 이 한자들 중에 ‘남자’ 라는 한문이 보이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어쨌든 크고도 큰. 굳게 닫혀져 있는 교문을 살짝 밀고 안으로 들어섰고 하필이면 점심시간이었던 모양인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남자 아이들과,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마구마구 나에게로 쏠리더니 곧 우레와 같은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자다!!!!!!!!!!!!!!!!!!!!!!!!!!!!!!!!!!!!!” “여자가 왔다!!!!!!!!!!!!!!!” ※ “네가 다희구나….”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까의 소란에 적응이 안되서 멍해진 내가 대뜸 대답했다. “아, 네!” “음…큼큼.” 역시…10년이란 세월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적막하고 조용한 사이. 그토록 오랜 시간이 아니었다면 서로의 안부와 지난날들을 물을 수라도 있을텐데 그러기엔 너무 오래토록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의 뻘쭘함을 자아내고 있다. “에…그러니까, 너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지낼 곳은 이 학교 뿐이구나. 물론 아직은 남학교지만 내년부턴 공학이 된단다. 그러니까 넌 그냥 조금 일찍 들어온거라고 생각하렴.”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 못하고 되묻는 내게 제대로 설명하기조차 스스로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신 듯,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입을 떼셨다. “들어오면서도 잘 알았겠지만 여긴 남학교란다. 아직은 말야…. 내년부터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공학사립 기숙사 제단으로 바뀌겠지만 말이다. 물론 적응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너만 괜찮다면 네가 이 곳에서 지내주었으면 좋겠구나. 데리고 살 수는 없어도 이제부터라도 내 슬하에 두고싶다.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몇 달만 견디면 네 또래 친구들도 생길테고 말이다. 괜찮겠니?” 남자학교. 그것도 남자 기숙사 학교. 지금 그곳에서, 날더러 지내라고 하시는 거 맞지…?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말에 절로 당황한 표정이 되어버렸고 그것도 곧 내색치 않기 위해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럼…저 혼자만 따로 지내고 수업 받나요?” “수업이야 같이 받아야지. 물론 방은 너 혼자 따로 쓸 거고, 친구 사귀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이 수 밖에 없구나. 안전은 보장하마.” “하지만…, 아니…아녜요.” 처음부터…날 길러 줄 생각이었다면 10년이나 지난 이제와서 찾았을 거라구 생각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곱디 곱게 자란 연약한 여학생, 게다가 남도 아닌…사인데 남학교 기숙사안에 덜렁 들어오게 된 꼴이라니… 이래서야 그냥 고아원에 있던 것만 못했단 생각이 드는 건 욕심인가. “음, 근데.” “네?” “성적은 좋지 않은가 보구나. 섬에 있었다고 들어서 학생도 그리 많지 않았을 텐데.” 아. 할 말 없다. “내일이 개학이다. 지금 학교에 있는 애들은 이미 집에 다녀왔거나 그냥 학교에 남아 지내는 애들이고 개학식 날 집에 내려갔던 애들이 다 돌아 올 텐데, 그때 전교생에게 네 소개와 사정을 얘기해주마. 일단 방으로 가서 좀 쉬렴. 가면 사감선생이 방안내도 해주고 식사시간도 알려줄게다.” 정말이지 뭐 이런 생각지도 못했던 생활이. 그럼 이번년도 까지는 전교에 여자는 나 하나? 생각이 제대로 박힌 여학생이라면, 앞으로 지낼 일들에 대해 걱정을 하고 약간의 두려움도 갖겠지만 어쩌면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면부지의 작은 아버지와 단 한번 만나본적 없는 그 가족들과 어정쩡한 만남보담야. 그리고 또 내가 성격은 좋은 편이거든. “아침식사는 7시, 점심은 1시, 저녁은 6시 30분이야. 기상 시간은 6시고, 수업이 끝나고 9시서부터 저녁 11시까지는 자습시간, 12시엔 무조건 소등하고 취침이야. 뭐 지켜야 할 사항 같은건 문이랑 책상에 붙어있으니까 별로 신경 쓸 것 없고, 준비물이나 필요한 물품 같은 건 학교에서 단체로 주문하고 있으니까 토요일마다 필요한 걸 적어서 교실에서 따로 걷을 거야. 물론 외출은 특별한 사정없이는 금지고.” 무어라 말하고 있는 사감선생님. 허나 그녀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사감을 따라 학교 소개와 교정을 거닐면서 기숙사 규칙에 대해 말하는 중인데 이거야 완전 대학교 캠퍼스잖아? 울창한 나무와 아리따운 꽃밭하며 숙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구건물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허옇고 반딱 반딱한 복도와 깨끗한 바닥. “얘, 내 말 듣고 있니?” “아…예에?” “여기가 니 방이라구.” 사감의 말을 들으며 계단을 올라 어느새 건물들 중 맨 위층에 자리 잡은 내 방으로 안내되었다. “음,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아무래도 여자가 너 혼자잖니. 안전은 걱정할 거 없어. 방안에 비상벨 있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그거 누르면 되고, 항상 선생님들이 교대로 순찰 도니까. 그리고 혹시라두 연애 같은 거해서 애들한테 물의 일으키지 않는 타의 모범이 되는 여학생이 되길 바란다.” “아무렴요.” 걱정하지마쇼. 나 좋다는 남정네도 없으시었소. “그래, 그럼 좀 쉬어. 이 녀석들, 당장 안 내려가!!?” 믿는다는 듯이 내 어깨를 탁탁 두드리고 계시던 사감 선생님이, 아래에서 내가 올라오는 걸 보고 서울 역 거지 촌 때마냥 몰려든 아이들을 몰아내며 멀어지시고 처음 보는 재미난 광경에 아이들 모두가 사감 선생님께 붙들려 끌려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 때,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쟤야, 쟤. 앞으로 우리 학교 다닐건가 봐.” “아아…근데 여긴 왜 왔지? 공학 개정하는 건 내년이잖아.” “모르지. 야아, 여기 쳐다본다.” 이봐들. 보통 그런 말은 안 들리게 수군수군 하는 거라구. 그렇게 대놓고 손가락질 해대며 복도를 울리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 멀쩡하게 전학을 해온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근데…애처로울만큼 촌스럽다. 머리 봐봐. 길기만 하면 뭘 하냐고, 관리도 안해서 마포자루 같은 걸. 옷 입은 꼬라지 봐라~” 들릴 걸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애매한 소리. 어쨌거나 그 소리를 들은 이상…열던 방문은 뒤로 재쳐 두고 그대로 돌아, 대놓고 날 씹는 그들에게로 성큼 성큼 다가섰다. 앞에 다가서자 조금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 보는 키만 멀대같이 큰 녀석의 얼굴을 한번 스윽 쳐다봐 주고는, 적어도 나보다 20cm는 커 보이는 그 녀석의 마빡을 꾸욱꾸욱 누르며 말했다. “야.야.야. 내가 키 작아서 개구락지 같은데 뭐 보태줬냐? 남이사 천조각을 걸쳤든 마포자루를 뒤집어 썼든 니가 뭔 상관이야~?”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나의 손가락은 녀석의 이마에 깊숙이 박혀, 옆에 서있는 아이는 슬슬 웃음을 참지 못해가고 있었고, 자기보다 20cm는 작은 애한테서 마빡을 눌린 꼴이 되어버린 이 녀석도 점점 더 건조한 낯빛이 되어가고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 또한 그제야 느낀 거지만… 빛을 받아 일렁이는 환상적인 머릿결. 다부져 보이는 탄탄한 몸매에, 부담없게 까무잡답한 보기좋은 피부. 허나 지금 이 순간 나의 손가락이 깊게 박힌 그 이쁜 이마가 아주 심하게 꿈틀대며 나와 마주친 갈색 눈동자가 이글이글 붉게 타오르고 있는 이 자가, 얼마나 한 성깔하게 생겼는가를. 그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본 내가 슬금슬금 손가락을 뗐고 금방까지만 해도 실실거리던 그의 입에서 무거운 음성이 세어 나왔다. “지금……나 찔렀냐?” “에…?”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존댓말이 나오고. “너 2학년이지? 아님 1학년이냐?” “…18살이니까 2학년인데요.” 빠알갛게 자국이 난 이마를 문지르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짙은 한숨이 섞인 쓴웃음 소리를 토해낸다. “파하~ 아주 대놓고 까부네, 2학년이? 야! 나 3학년이야.” “야, 너 무슨……” “말리지 마봐~ 아주 선배 알길 개껌 같이 아네, 이 개코딱지가!” 개코딱지? 정말이지… 오늘 하루 일진이 대체 왜 이러냐구요. 밖에선 자폐아, 안에선 싸이코…….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세요?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건. 선배라도 제게 사과하시는게 옳다고 생각하는데요.” 맞는 말이었지만 저에겐 불리할테니 내가 한 말에 녀석의 표정이 좋을리 없다. 내 말 한자 한자에, 눈썹을 움찍거리며 눈을 번쩍이는 이 선배놈 하나, 또 그런 내가 재밌긴 재밌는지 끽끽대며 웃는 옆에 선배놈 하나. 이 자식들도 꼴에 선배라구 생색내려나보다. 오옥, 토해. 토해. 어쨌거나 내 말을 다 듣고 표정과는 다르게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는 눈치를 보인다. “그래 사과하지. 미안하다. 근데…너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냐?” “…알 리가 없잖아요.” “첫째, 못생긴 여자. 둘째, 그 못생긴 여자가 내 몸에 손대는 거. 셋째, 나이도 어린 게 반말해대는 거야. 너는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추면서 날 열 받게 하고 있단 말이지, 지금.” 그러니까…완벽하게 당신이 싫어하는 걸 다 갖췄다는 거잖아, 이 내가. 나로서는 별 감흥 없는 말 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에겐 정말 징하게 싫은 일이었는지 곧 얼굴을 굳히며 말한다. “사과해라.” 아무리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사실 이게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일이냐구. 머릿속은 강하게 나의 잘못을 부정하고 있었으나 남은 몇 달을 고달프게 보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내가 곧 짧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장난해?” “왜요, 사과 했잖아요?” “성의가 없잖아, 성의가~? 선배 이마빡을 자국이 남도록 찔러대고 그걸로 끝날 줄 알았어…?” 무얼 요구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 때문에 조금 찌푸려진 얼굴로 눈을 마주치자, 피식하고 바람 새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복창해.” “복창…?” “그래, 복창.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세 번만 해.” “그만해. 불쌍하다.” 이건 또 마른하늘에 날 벼락같은 소리랴. 벙찐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옆에서 말리는 사람 말은 들은 체 만 체, 기분 나쁘게 내리깐 시선으로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서 내려다보는 그 녀석. “왜? 못하겠냐?” 꾸욱…나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어쩌다가, 하필 어쩌다가 이런 성격 개차반 녀석한테 걸린 걸까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 새끼…한번만 더 마주치면 그땐 선배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 그냥 이 놈 죽이고 나 죽을텨. 어쨌거나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듯한 태도로 서있는 나와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으로 날 쳐다보고 골치 아프다는 듯 다시 안경을 고쳐 쓰는 옆에 있는 사람. 결국…울며 겨자 먹기로 이미 사감 선생님이 내려가시고 또 다시 몰려든 남자들의 흥미로운 시선 사이에서 외쳤다. “못생겨서……죄송합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아!!!!” “푸하하하하~ 얘봐라, 진짜하네?? 미치겠다 나. 크크크큭~~” 두 눈 꼭 감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눈을 뜨자 신나 죽겠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웃는 인상 더러운 녀석과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는 옆에 녀석. 뭐 이런 포도알같은 자식들이 다 있을까. “하래매요…….” “그래 잘했다. 큼큼, 오늘은 그냥 넘어가고 대신 담에 만나면 깍듯이 대해라. 알겠냐~?” “……예, 예.” “푸하하하 나 미친다~~” 불쌍하다는 이유로 그냥 나를 보내고 계속 뒤로 흘끗대며 궁시렁 대면서 또 돌아서선 꺽꺽대며 웃는 성격, 완전 똥통 오 분 전 개차반 놈 같으니라구. 그렇게…즐겁게 웃으며 멀어지는 두 선배님들과 또 동물원 원숭이 보듯 몰려든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하나님. 많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18년 인생이 그랬듯 저런 생양아치 놈들한테 해코지 안당하고 한 학기 좀 버티게 해주십시오, 제발!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 “알고 보면 쟤가 이 학교 이사장 딸이라는데.” “아니야, 대통령의 감춰진 딸이라는 소문도 있어.” 어이구? 놀구있네. 작은아버지께 모두 전해들은 후론 평범한 고교생활은 바라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문마저 늘어질 줄 몰랐다고!! 단휴연 기숙사고의 여름방학 개학식. 집에 내려갔던 학생들도 모두 돌아와, 그저 단상 위 교장선생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내 얘길 늘어놓고 있었다. “그럼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길고 길었던 이러 저러한 소리가 끝나고 곧 교장선생님의 말씀 차례가 되자 양복 어깨춤을 한번 들썩여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이 말을 잇는 그 순간에도 나를 향한 뜨거운 시선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에~ 그리고 소개할 학생이 한 명 있는데, 이리 앞으로 나오려무나.” 잔뜩 움츠러져 있는 날 앞으로 불러내시고, 흠칫하고도 또 빠르게 교장 선생님 옆으로 다가서자 여기저기서 환호 섞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큼, 조용조용! 다들 알다시피 우리 학교가 올해로 공학기숙사가 되어야 했다는 건 다들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상 공학 개정이 내년으로 미뤄지게 됐는데, 다른 학생과는 조금 다르게 사정상 한 학기 먼저 들어온 학생입니다. 이 많은 남학생들 가운데 여자는 혼자뿐이라 많이 서먹하고 낯설 텐데 모두들 같은 반 학우처럼 따스히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짧은 소개를 건네신 교장 선생님이 내게로 마이크를 건네시고 점점 타오르는 고구마가 되어가는 얼굴로 힘들게 입을 열어 간신히 ‘안녕하세요.’ 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우워어어어어어~~~” 그야 말로 강당은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다. 보다 못한 학생 주임 선생님과 사감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말려가며, 힘들게 짤막한 소개를 끝마치고. 또 다시 여러 무리들의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 교실로 안내 받는 중. “항상 남자 아이들만 보다가 모처럼 여학생을 보니까 너무 기분이 좋구나~ 이름이 다희라고 했지?” “예. 강다희입니다.” “우리 학교는 숙소나 교실배정을 성적순으로 하거든. 전 학교 성적을 보니까 D클래스면 될 것 같다. 앞으로 잘 지내자?” 성적순이라니…갓뎀이다. 여학생이 단 한명이라는 학교에서, 그 여학생이 D클래스란다…. 모르긴 몰라도 절대 상위권은 아니어 보이니 말이다. -_- 선생님을 따라서 D클래스의 문 앞에 다다르고 작게 숨을 고르고 딱 교실에 들어서는데, “앗. 걔 우리 반이예요!?” “어? 내 친구는 못해도 B클래스일 줄 알고 기대하던데 우리 반이라고 자랑해야지~” “공부 못하나 부다.” 어수선한 가운데 나를 보자 멋대로 지껄이는 녀석들. 내가 대체 왜 성적이 그게 그거인 놈들에게서 이런 비참함과 암담함을 맛보아야 하는 거냐고요. 아무래도 남은 한 학기, 역시 순탄치 많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끈 불끈 솟아오른다. “다들 조용해. 그럼 다희야, 같은 반 친구들이니까 자기소개 좀 하자.” “강다희입니다. 제주주일여고에서 왔구요. 조금 내성적이긴 하지만 모쪼록 잘 부탁 합니다.” “뭘 존댓말을 하냐. 늙은이 같다.” “그러게. 선생님 앞에 교탁 좀 치워줘요, 애가 안 보여요!” 요론 바퀴 벌레 같은 새끼들. 내가 어떻게든, 못해도 C클래스 되고 만다, 내가!!! “일단 앞자리가 좋겠지만 다음주가 자리 바꾸는 날이거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뒤에 앉으렴.” 선생님께서 손가락으로 교실 가운데쯤의 자리를 가리키고 또 그 부담스러운 시선들 속에 천천히 걸어 나가 내 자리로 지목된 곳을 향해 걷었다. 그런데 바로 옆 분단서, 내가 옆을 스치자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며 교과서로 얼굴을 덮는 사내가 있었으니… 헌데 한 순발력하는 나는 또… 그 사내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저거…. “자, 그럼 새친구에게 잘 해대주고 다음 수업준비 해라.” 선생님이 짧은 조례말씀과 함께 교실을 나서자 거의 모든 무리들이 내게로 다가왔고 나는 그런 그들을 스쳐지나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보고 유난히 깜짝 놀라던 교과서 덮인 얼굴 앞으로 다가섰다. 내가 다가선 걸 느꼈는지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긴가민가 싶었지만, 이 태도로 더욱 확실해 진 듯. “야…….” 내 부름에도 한참을 대답없이 교과서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인 녀석. 이 자식……. 더는 주체할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그 녀석의 얼굴을 가린 교과서를 들춰냈고 곧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빠르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나고 먼저 그의 얼굴을 확인한 내가 굳어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선배가……왜 여기 계십니까?” ※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음료수를 내미는 녀석. “일종의 자기보호라고 하지. 내가 거기서 그 말이 아니었으면 니가 나한텐 쫄았겠냐? 그리고 내가 그 선배라고 속여서 따로 이득을 본 것도……” “닥쳐!!! 넌 나한테 그딴 말 지껄일 자격 없어!!!” “아, 예.” 흥분한 나의 모습에 쉴 새 없이 지껄이던 주둥이를 닫는 녀석.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못생긴 여자를 만났고, 그 못생긴 여자가 마빡을 찔렀다. 녀석 역시 그게 마음에 안 드는데 달리 협박할 말이 없다. 그래서 선배랬댄다. 이 새끼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되네?!! “너, 저녁까지 사. 역시 점심으론 성에 안 차겠어.” “야야~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냐? 아주 두 번만 말 잘못했다간 데리구 살라하겠다?” “그러게 거짓말을 왜 하냐고, 거짓말을.” “거 참. 아까 자기 소개할 때는 내성적이니 외성적이니 그딴 말을 잘도 하더니 뭐 이러냐?” “그래서? 꼽냐?” 다시 입을 다물고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는 구라새끼 녀석. 그래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나마 이 녀석이라도 알게 됐으니 다행이지, 만약에 이 노마라도 몰랐다면 지금쯤 혼자 교실에 앉아 있었을 게야. 암 그렇고 말고. “새끼들, 열심히도 뛴다~” 늙은이 같은 어조로 운동장에서 열심히 축구 뛰는 아이들을 향해 저따구 대사를 내던지는 녀석. “너도 밥 먹었으면 가서 좀 뛰지 그래?” “야야~ 자고로 스포츠라는 건 말이지, 얼굴이 안 되는 녀석들이나 하는 거야~ 얼굴이 안되니까 몸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더 있냐? 고로 나 같은 애들은 저렇게 땀 찔찔 흘리면서 안 뛰어도 자연히 여자가 날아오게 되어 있단 말씀이지.” “아주…꼴값, 육값, 칠값. 있는 값은 지 혼자 다 맥여요.” “너 처음 본 사람한테 자꾸 이러기냐?” “그러게 날 왜 건드렸냔 말이야. 난 한번 나쁘게 뵌 놈은 끝까정 그 이미지가 가시질 않더라. 넌 나한테 이미 찍혔어. 좋은 대접 받을 생각일랑은 일체 하지두 마러.” 내게 그런 짓을 한 그 순간부터 넌 내게 인간대접 따윌 받을 생각일랑은 집어쳐야 했어……. “이름이 다희랬지?” “엉. 넌?” 내 물음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었다는 듯, 살짝 고개를 떨구고 작은 웃음을 흘리는 녀석. 이거, 이거 왠지 괜히 물어봤다 싶은 게 뭔가 자신만만한 게 있는 가 보다. “왜 이제야 묻나했다. 너 반령우라고 못 들어 봤냐~? 강진하면 반령우 딱 나오는데. 내가 사실 이 일대에서 꽤 유명하거든. 여기까지 오면서 내 이름 몇 번이나 들어봤냐?” “아니. 처음 듣는데? 그거보다 이름 참 웃긴다. 령우야? 령우? 발음도 어렵네.” “……그러냐? 넌 얼굴이 웃긴다.” 내심 들어봤다고 말하길 바랬는지 그새 얼굴색이 변한 녀석. 그냥 한번 들어봤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싶다. 괜히 시무룩한 모습 보니까 마음이 여려지긴 하는데 제주도 살던 내가 난데없이 전라남도 땅떵이에 와서 저 녀석 이름을 어찌 들어. 그냥 무시하고 막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익숙한 얼굴 하나가 나와 반령우 쪽을 향해 뛰어온다. “여기 있었냐? 한참 찾았잖아, 새꺄.” “야, 야. 말도 마라. 얘한테 딱 걸렸어, 나. 얘 우리 반인 거 아냐? 공부도 졸롱 못하나봐.” “카악!! 안 닥쳐?” 정강이를 쳐대며 불같은 성격을 토해내자 그걸 꽤 흥미 있게 지켜보는 그 아이. 심플한 무테의 안경이 무서우리만치 잘 어울리는 그 남자는, 마치 습관인 듯 안경을 고쳐 쓰고 내게 묻는다. “소개할 때 들었는데 다희라고 했지? 내 이름은 찬휘야. 서찬휘. 우리 안면 있는 사이지?” “응. 어제 얘 옆에서 본 것 같다.” “어제 일은 이해해줘. 너무 난데없던 상황이라 말릴 경황이 없었어.” “그래, 뭐. 이해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영양가 없다 싶은 말만 주고받길 한참, 뜨뜨 미지근한 8월의 바람에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있는데 그 좁은 틈을 노린 건지 반령우를 슬쩍 밀어내며 내 맞은편에 앉는 서찬휘. 뭔가 불신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나는 아랑곳 않고는 진지하게 묻는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분명 우리 학교는 아직 남고란 말이지. 그런데 난 니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 웬만한 백그라운드가 아니면 힘들 텐데. 게다가 여자 혼자서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이 곳에 올 생각은 한다는 건 쉽지 않는 결정이었을 텐데 니가 여기 오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뭔지 궁금해.” “아― 이 새끼 이거 또 시작됐다. 그놈의 궁금병.” 익숙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음료수를 들이키는 령우와 어서 대답하길 바란다는 듯 한 냉철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서찬휘. 참 별게 다 궁금하단다. 잘 모르는 녀석에게 말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다가도…감추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는 사실에 고갤 끄덕였다. “교장 선생님이 작은 아버지시거든. 그동안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작은아버지가 오라고 하신 바람에 여기서 지내게 된 거야. 딴 곳에 친척이 하나도 없거든.” 막상 나는 아무렇지 않게 술술하는 말이라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두 사람. 왜…다들 물어봐놓고 막상 말을 꺼낸 날 더 무안하게 만드는지. “아, 미안해 할 건 없어.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래. 다행이야.” 그래도 미안한 듯 어색해하는 녀석들 앞에 있는게 더 민망해져서 곧 있을 수업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나 들어갈게. 아. 식권 내놔, 반령우.” “뭐? 왜!?” “저녁까지 사기로 했잖아.” “있다가 주께. 왜 지금 내놓으라고 해. 내꺼 꺼낼 때 같이 주께, 인마.” “그럼 저녁도 너랑 같이 먹어야 한다고? 절대. 거부하고 싶어. 빨랑 지금 줘.” 빈정 상했는지 잔뜩 인상을 쓰며 마지못해 궁둥이 주머니에 고이 모셔두었던 꼬깃꼬깃 접힌 식권 한 장을 내미는 반령우. 녀석에게 긍정적인 감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내가 빠르게 그 손에서 식권을 받아 들자 어제의 사나운 인상은 어따 치웠는지 잔뜩 울컥해선 말했다. “아, 대체 넌 왜 이렇게 날 싫어하는데!? 그깟 거짓말 한번 한 게 그렇게 죄냐?” “아무렴 죄지. 어제 난 정말 갓뎀이었어. 처음으로 이곳에 왔는데 내게 이 곳 이미지를 옴팡 깨버린게 네가 두 번째거든.” “뭔 말이야 대체~ 첫 번째는 뭔데 그럼?” “자폐아.” “자폐아……? 우리 학교에 그런 놈 없어!” “여기든, 아니든 어쨌든간 있긴 그런 놈.” 순간 그때의 민망한 기억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혹여 안경제비가 더 캐묻기라도 할까, 빠르게 돌아섰다. 더 묻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암 그렇고 말고. 무튼 령우가 준 식권을 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두고 사뿐한 걸음으로 건물을 향하던 나의 다리는 곧 약간의 후들거림을 느낌과 동시에 멈춰섰다. 반경 2미터?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에서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신 건 어제 그 버스안의 자폐아님. 아직 나를 보지는 못한 듯 느긋하게 걸어오고 계시다. 뭐 이런…닝기미……. “뭐야, 왜 다시 돌아와?” 그대로 돌아, 빠르게 령우와 찬휘 옆에 고개 숙인 채 앉았다. “아, 아니 그냥…좀 더 있다 들어가고 싶네 그래.” 이제쯤 딴데로 가셨을까 슬쩍 고갤 돌렸고. 세상에나. 그 순간에야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어제 그 녀석. 깜짝 놀란 내가 다시 고갤 돌려버렸지만 어쩐지 점점 더 가까워오는 기척과 함께… 곧 내 앞으로 다가섰음을 느낀다. 확실히 나의 존재를 눈치챈 듯, 멍하니 날 바라보긴했지만 이내 령우와 찬휘에게도 시선을 돌리는 버스의 그 녀석. 설마…날 기억 못하나? “어, 원희렴. 밥은 먹었냐? 왜 이제와?” 마치…아주 잘 아는 사이라는 듯이 껄렁 껄렁대며 버스의 그 놈에게 말을 건네는 반령우. “혼자 돌아다니다가 왔지?” “응.” 찬휘의 물음에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는 그 녀석이다. 어쩐지 꽤나 친분 있어보이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대체 어떡해야 하는지 아직도 등을 돌린 채로 고민, 고민을 하다가 다시 흘끗 녀석을 바라보았지만 나와 또 다시 눈이 마주친 이 녀석은 그저 멍하니 날 바라만 볼 뿐. “어떻게 됐냐 여자친구?” 그러다 말고 대뜸 대답을 바라는 눈치는 아닌 듯한 어조로 찬휘가 물었고 원희렴은 할 말 없는 듯 묵묵부답을 유지했지만 여전히 시선만큼은 내게로 꽂혀 있다. 뻘쭘해진 내가 녀석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계속 손을 만지작대며 딴 짓만 하고 있는 중. 제길. 기억을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잊었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방학 내내 여자친구랑 즐겁게 보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일테고. 또 미친 듯이 그 기집애만 찾으러 다녔지…?”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뭐야? 왜 말을 못하는데. 또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은 왜 해?”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나는 안중에도 없이 추긍하는 서찬휘. 아까까지만 해도 서글서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안경 너머로 비추는 냉정한 눈으로 원희렴을 응시한다. 또 조용한 반령우. 힘겹게 말을 잇는 버스의 그 녀석. “아냐 있어.” “뭐……? 진짜야, 그럼? 누군데!? 어디 있어? 어느 학교야!” 버스녀석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미간을 좁힌 채로 대답을 기다리는 찬휘와 이리저리 호들갑을 떨며 ‘원희렴’ 이라는 그 녀석을 재촉하는 반령우. 나 역시 더는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고 지금만큼은 계속 고갤 숙이고 있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까지도 내 얼굴만 보고 있었던 건지 내가 고갤 들자 정확히 눈이 마주쳐 버렸고 나 역시 더는 피하지 않은 채 눈을 말똥말똥 뜨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곧, 녀석의 입에서도 어제 버스에서처럼 건조한 입술을 뗐다. “……얘야, 내 여자친구.”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 “이봐, 원희렴이. 어떻게 책임 질 거냐니깐?!!”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동자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 까만 눈덩이로 멀뚱멀뚱 바라보는데 숨이 턱 막히는 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찔해지기까지. 블라우스를 펄럭이며 타는 속에 바람 좀 넣고 있기는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지 한참만에야 입을 땐다. “내 여자 친구해 니가….” “그러니까 대체 그걸 누구 멋대로 정하냐구? 너 내 이름이나 알아?” “아니.” “그럼 어디 살던 건지? 왜 이 남학교엘 뚱하니 전학을 왔는지, 뭘 좋아하는 지 지금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그건 아니?”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래. 그런 너와 내가 어떻게 하루 아침 사이에 사귀는 사이가 돼?” 더군다나 넌 나의 망사스러운 모습을 전부 다 보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좀 이상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멀쩡한 사람이었다는게 왠지 속은 기분이야……. “그냥 하지. 귀찮은데.” “뭐가 어쩌구 어째? 그런 걸 니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 넌 귀찮아서 막 사귈 수 있는 게 여자친구 일지 모르겠지만 난 달라. 내가 여기서 고를 남자친구에 내 미래가 달렸다구!” 내 말을 듣고는 또 다시 멍하니 날 바라본다. 이 자식 이거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구 말이 안 통하는 게. 나 이상한 녀석한테 걸려버렸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이 새끼, 버스에서 내가 올라 탄 그 순간부터 내게 반한게 분명하다…. 나 혼자 잡생각을 하고 있던 동안 녀석도 뭔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듯 혼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한참만에 내뱉은 한 마디. 참 재수없는 한 마디. “돈으로 줄까.” 재수없게. “나 돈 욕심 없거든.” “부탁해.” 그다지 들어주고 싶은 부탁도 아니지만. 돈 얘기 먼저 꺼냄으로써 더욱 더 재수 없어 보인다. 그것도 부탁같지 않은 어조로 부탁을. “글쎄 별로.” “아르바이트 구하고 있었잖아.” 또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든 생각은, 그렇다면 내가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내 일자리를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날려버렸다 이거지…. 새삼 괘씸해지지만 더는 괘씸해 하고 말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확실히, 돈은 필요한데. 많지는 않더라도 보육원에 작게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러니 저 자식이 정말 돈이 많다면 이 또한 나쁜 조건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에 녀석에게 물었다. “그래, 좋아. 너 돈 많아?” “얼마 필요 한데?” “100만원.” “그런 돈 없는데.” “그러면서 그렇게 떳떳하게 돈으로 사람 사겠다는 말이 나오냐? 어제부터 생각한 건데…너 참 재수없다.” 웃기는 자세로 자빠진데다가, 팬티까지 보여줬던 주제지만 감히 그런 것들은 잊고 재수없게 말하는 내 태도에도 여전히 건조한 낯빛으로 일관하던 원희렴이 입을 뗐다. “한달에 30만원씩 일년은 줄 수 있어.” 더는 이 녀석이 어떤 말을 해도 동요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원희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달에 30만원씩 일년이면 얼마인지 게산을 해 버린 내 머리는 팽팽팽 돌면서 말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벌 수 있는 돈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대기 까지 했다. “너 부잣집 아들이야?” “아니.” “그런데…그 말, 진심이야…?” “거짓말 같은 거 안해.” “할게, 그럼. 네 여자친구, 한달에 30만원씩 일년 아르바이트. 할게.”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수십 번 머리를 굴리며 한 고민이었지만 막상 이런 아르바이트를 제의한 원희렴은 내가 좋다고 했어도 그만, 싫다고 했어도 그만인 듯한 그 놈의 무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 잘해. 오늘, 아니 이미 한달전부터 니가 내 여자친구야. 남들이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 “야야야, 잠깐…. 너 내 이름은 알어?” “아니.” “그러면서 무슨 여자친구야? 적어도 기본 적인 건 있어야 입을 맞추던지 할 거 아니야?” “너 좋을 대로 둘러대고 나중에 말해줘.” 몹시나 피곤한 듯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는 원희렴. 말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 슬슬 멀어져가는 녀석을 보며, 기분 상할 만도 하지만 지금 내가 그런 거에 연연할 세냐 싶다. 저 녀석이 걸어 다니는 수표로 보였으면 보였지, 기분 상하기는커녕 얼렁 잡아야겠다는 생각 외엔 안 드는데. 긴 다리로 한참이나 앞서나간 녀석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이름은 강다희야. 근데 나 오늘 여기 온 건데 한달 전부터 사겼다 그러면 믿을래나? 역시 거짓말 하는 게 좋겠지?” “좋을대로.” “그리고 내가 어떻게 여기 지내게 됐는지는 안 물어봐? 나 제주도에 살았었어, 보육원에.” “천천히 말해도 돼.” 별로…보육원에서 지냈다는 말에 놀라한다거나, 또는 안되보인다는 듯한 말이나 표정을 바라면서 한 말이 아니었고 언제나 주위에서 먼저 그랬으니까 나도 모르게 어쩌면 그렇게 ‘안됐다’ 고 생각하는게 당연한 거라고,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또…그걸 깨버리는 게 이 남자, 원희렴. 그다지 놀랍다는 기색도 안되보인다는 기색도 없이 언제나와 똑같은 표정과 자연스러운 말투. 하여간 알 수가 없는 놈이다……. “아, 그리고 니가 너무 급해보여서 내가 여자친구라고 하긴 하겠는데…… 육체관계 같은 건 꿈도 꾸지 마.-_-” 확고한 표정으로 말하는 나를, 여태껏 옆에 있었는데 단 한번도 눈길도 주지 않다가 갑자기 훽하고 고개를 돌리며 나를 쳐다본다. 나름대로 진지한 눈을 하구선 녀석에게 뺀초롬하니 대해 보인 나인데, 그런 나를 보고 갑자기 웃는 원희렴. “풋…….” 절대 소리 내며 웃지 않되, 어떻게든 웃음을 참아 보이려 애쓰던 그 애틋함이란…. 보는 내가 다 애처로워 보인다. “뭘 그렇게 웃냐? 사실을 말 한 거지. 내가 뭐 잘못 된 말 했어?”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제야 웃음이 멎은 건지 고개를 들어 보이는 녀석. 나는 또 그제야 알았다. 아, 이 녀석. 생각했었던 것만큼, 아니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예쁘게 생긴 녀석이구나라고. “이름이 뭐라고?” 피식. 마지막 웃음을 흘리고는 묻는 녀석. 또렷이 뜬 까만 눈동자가 마주치고, 이번에 내가 잠시 멍해지다 말고 고개를 내저어가며 정신을 차리고 또박 또박 말했다. “강다희.” “좋아…잘 부탁해.” “아, 참. 그리구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그…, 어제 버스에서 있었던 일은 애들한테 말하지 않았으면…하는 소망이 있네……?”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지만 오히려 이건 생각 않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가에 살짝 웃음을 띠운 체 대답한다. “알았어.” “참, 그리고 있다가 애들 앞에서도 난 내 성격상 애교 같은 건 못 떠니까 기대 마. 난 그저 네게 여자친구라는 이름표를 단 남일 뿐이니까. 알았지!?” ※ “어우, 너 왜 그렇게 쳐다봐? 희렴이 얼굴이랑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렇게 쳐다보면 민망하잖니~” “원희렴…. 다시 생각해라. 이건 절대 아니야! 꿈이라고 말해줘, 어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사실을 거부하는 반령우. 서찬휘는 쉴 새 없이 원희렴에게 질문을 해대고 난 아직도 인정치 않으려는 반령우에게 이맛살을 찌푸려 보인다. “꿈은 무슨 얼어 죽을! 사실이야. 받아들여, 인마.” “말도 안된다고! 강다희 너 원래 여기 살던 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근데 어떻게 한달전부터 희렴이 여자친구 일 수가 있어, 네가?!” 령우의 말을 듣고서야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란 걸 깨닫고 아차 싶었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더럭 변명해버리는 원희렴. “방학 때 봉사활동 갔다가 만났어.” “봉사…활동…? 원희렴 니가……?” 더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령우. 말을 듣고 있기만 하던 찬휘 얼굴에도 약간 표정 변화가 생기고… 또 이 놈을 잘 알지 못하는 나지만, 여태껏 봐 온 것들로만 판단하더라도 도무지 상상도 안되는 거짓말. 거짓말 좀 하려면 잘 좀 할 것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순 없어! 아무리 여자가 궁해도 어떻게 하필 얘냐, 희렴아??!!” “나도 모르겠어.” 장난기는 없는데…마냥 진심 같은 말로 고개를 내저어 보이며 대꾸하는 원희렴.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네, 정말. 녀석들의 태도를 보고 있자 마빡에 선 혈관이 움찍움찍 거리고야 마는…잠시 그렇게 있으니 곧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이 치고 미친 듯이 식당으로 뛰어가는 반령우와 유유히 그의 뒤를 따르는 서찬휘. 사람 많을 텐데 나도 빨랑 뛰어가야겠다 싶어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서는데……. “뭐니. 지금 안 가면 30분은 기다려야 해. 아까도 점심 40분이나 늦게 먹었단 말이야.” “갈 때 가더라도 계약은 하고 가.” 대체 언제 준비한건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종이를 펴서 팔락이는 원희렴. “그게 뭔데?” “계약서.” “계약서?” 녀석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아 대충 훑어보고… 이거야 말로 기겁할 노릇이다. 자연스럽게 이 종이를 우그러트리고 있는 것은 본능이라 해야 옳지 않을지. ――――――――――――――――――――――――――――――――――――――――――――――――――――――――――‥…? ※계약서※ 1. 바른 말, 고운 말을 쓰도록 노력한다. 혹여, 상스러운 말을 쓰다가 적발될 시, 한번 걸릴 때 마다 천 원씩 깎인다. 2. 못해도 전교 50등 안에 들어 B클래스로 옮길 수 있도록 노력한다. 3. 여자친구가 필요한 자리에선, 절대적으로 참석한다. 강다희(갑)는 원희렴(을)에게서 매달 30만원의 보수를 받는 대신 위의 사항을 엄수할 것을 규정한다. 계약기간은 1년으로 하고, 만약 위의 사항을 어길 시 만원씩 계약금을 제한다. 갑; 강 다 희 認 을; 원 희 렴 認 ――――――――――――――――――――――――――――――――――――――――――――――――――――――――――‥…? “야…….” “싸인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말투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이미 18년을 이렇게 자랐다구!그리고 뭐? 내가 대체 왜 전교 50등 안에 들어야 하는 건데? 나라고 50등 밖으로 밀려나구 싶어서 밀려난 줄 알어? 그게 자의로 되는 거였으면 난 벌써 전국 1등이었어!! 그리고 치사하게…돈은 왜 깎아!!”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흥분하는 날 보더니, 알게 모르게 재수 없어 보이는 작음 웃음을 흘리는 원희렴. 이 자식 처음에 생각했던 무뚝뚝이고 나발이고 다 어디다 갖다 버리고 요로코롬 재수 없는 거야? 내가 말을 끝마치자, 또 다시 그 생각 없어 보이는 멍하고 흐리멍텅한 얼굴로 뒷목 잡고 쓰러지게 만든다. “지금 그 반에 있고 싶어?” “아니…절대 그건 아니지만…그게 노력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구~” 생각해보면 어제 처음부터 절대 마음에 드는 반은 아니었어. 반령우를 시작해서. “그래, 아무튼. 노력은 해볼게.” 사실은 돈에 못이긴 거지만 말만큼은 계약서를 못 이긴 듯 싸인을 한 계약서를 한 장은 그 녀석이, 또 다른 한 장은 내가. “그리고 애교 같은 거 못 떤다 그래놓고 아까 왜 그랬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냐는 듯 책망하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는 원희렴. 덕분에 아까 령우 앞에서 주절대던 내 웃기는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건 나도 모르게…그 녀석 앞에만 서면 오바가 되드라구. 싫으면 안할게. 그래도 내 딴엔…!!” “잘했어.” 내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의 큰 손이 내 머릴 부비고. 옅은 미소와 함께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스쳐지나간다. 아따 심장이 발랑 발랑 해지는구먼. 코끝이 싸해지는 알싸한 향기가 주위를 감싸는 바람에 머쓱해져선 멍해졌다가 이미 내 옆을 지나쳐 한참이나 앞서 복도를 걷고 있는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어, 어디가!?” 길고 긴 복도 한 가운데서 녀석이 잠시나마 고갤 돌려 말한다. “밥 먹으러.” “이러언!! 나도 데려가아!!!!”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 뭔가, 좀 이상하단 말이야. 꺼림칙해. 인간 강다희, 분명 뭔가 실수한 것 같단 말이야. 월 30만원에 팔려간 것 같은 느낌도 들고…뭔가 이상해. 속은 것 같기도 하고, 역시 괜히 한다구 했나…? 눈앞에 계약서를 놓고 눈싸움하기를 장장 1시간. 깨끗한 A4 용지에 적힌 계약서는 내 따사로운 눈빛에 홀린 듯 연신 팔랑거리고 있었다. “진짜 뭔가 이상한데….” 저녁을 먹고 자습시간도 지나 이미 취침하고 있어야 옳지만, 내 마음속의 아우성은 장장 1시간동안 그칠 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달칵― “엄마야……!!” 그때였다. 조용하던 실내에 갑자기 창문이 진동하는 듯한 소음이 들려오고, 놀라 들고 있던 계약서를 들이대며 창문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연신 덜컹이는 창문은 지금까지 흔들림 하나 없었던 것이 거짓이라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무서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뭐…, 뭐냐…. 바람이면 계속 흔들리고 이상한거면 사라져라….” 내가 생각해도 웃긴 말을 내뱉고, 한참을 창문을 주시했지만 창문의 덜컹임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마치 밖에서 누군가가 흔드는 것처럼. 하지만 내 기숙사 방은 3층, 누가 밖에서 창문을 흔든다는 발상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근데 왜, 계속 흔들리는 거냐고오!? 창문을 바라보고 있기를 한참, 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누…, 누구세요?” 자, 강다희 진정하고. 바람일 테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열어 보는 거야.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창문 쪽으로 손을 뻗는 순간……. “으아아아아아!!”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창문은 커다란 덜컹임과 함께 마치 책장이 펼쳐지듯이 그렇게 활짝 열리고 있었다. 검은색의 짙은 그림자와 함께. 본능적으로 창문가에서 떨어지고, 침대 구석탱이로 몸을 숨긴 뒤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자…잘못했어요!! 도, 돈 없으니 아무거나 가지고 갈 거 있으면 그냥 가지고 가세요!!” 대꾸 없이 내 앞에 서리는 그림자. 마음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불을 키곤 이 놈의 정체를 파악하구선, 혹여 내게 반해 날 범하려는 것이면, 이 자식 머리털도 다 뜯어뿔고 두들겨 패는 건데… 분명 지금 불 키면 사감이 들어올 테고, 이상한 오해라도 하면 그건 끝장이니, 일단은 비는 수밖에 없겠다. 강다희, 순결 지켜서 이 학교 졸업하게 해달라구! “흑흑, 저기요. 전 키도 작구, 살도 쪘고요. 또 이쁘지도 않아요! 한순간의 감정 때문에 이러시면 안되는 거예요, 제발 절개를 지키시어요.” “누가 뭐래?” 당연하다는 듯 들려오는 한 마디. 절로 입이 뜨억 벌어지고, 너무나 낯익은 목소리의 아직도 떨리는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느라 옷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며 서있는 것은…원희렴? “뭐…, 뭐야! 너 여긴 왜 왔어? 미쳤어 이 시간에…이러다가 사감한테 걸리면 어쩔라구 그래? 빨리 나가. 나 전학 온 지 아직 이틀 밖에 안됐어. 문제아 취급당하긴 싫다구우!!” “너나 조용해, 너나.” 키 크다고 째는 건가. 손가락으로 내 마빡을 꾹꾹 누르며 방을 둘러보는 녀석. 사내자식이 오밤중에 아녀자 혼자 있는 방에 와서 뭐하는 거여. “방도 혼자 쓰고 좋겠네.” “대체 여긴 왜 올라왔어? 응?” 내 다그침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한다. “친구들이…너 환영식하자고 하길래.” “됐어. 환영식은 무슨 환영식이야. 빨리 나가~” “4번 문항을 잊었나보네.” 말과 함께 주머니에 고이 접혀져 있던 계약서를 펼쳐 내 눈앞에 내민다. 으윽, 이렇게 눈에 들여대지 않아도 이미 내 머릿속에 다 외어져 있다고!(정말?-_-) 갑자기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살짝 문을 열고 사감선생님이 아래층 건물을 순찰 돌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문자를 보내고는 다시 침대로 올라와 앉는다. “나 정말 자야하는데…….” “그럼 만원 깎을까?” “애들 언제 온대니? 다함께 모여 이 밤을 불살라 보자꾸나.” 제길. 어쩌다 만원에 이렇게 몸이 매인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새낀 돈도 많아 보이는 게 왜 자꾸 만원, 만원 거리면서 사람을 위협하는 건지.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하다. 퉁퉁― “뭐야 이 소리.” 한 쪽 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썹을 치켜뜨고 묻는 원희렴. 그런 표정지어보일 거 없다, 임마. “아아, 그거. 어제두 그랬어. 그냥 여자 혼자 있는 게 신기해서 그런 가봐. 옆에서 두드리는 거 같던데….” “이 시간에?” “응. 어젠 더 심했는걸 뭐. 아예 잠도 못 잤어. 더 짓궂은 사람들은 막 문 열어 놓고 도망가기두 하구, 노크하고 사라져.” “문…….단속 잘해.” “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녀석. 짜식, 니가 그러지 않아도 내 몸은 내가 지켜~ 너같이 무대뽀로 창문 뜯고 들어오는 인간들만 아니라면야. 또 잠시 동안 침묵이 오갈 무렵, 거칠게 숨을 들이키며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으니…. “아후. 간 떨려 죽을 뻔 했네.” 차마 불은 킬 수 없고. 작은 손전등을 가운데 모아놓고 옹기종기 모여서 자리를 잡은 순간에서야 두 남장네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원희렴 넌 친구라는 게 이런 놈들 밖에 없냐? 난 또 괜히 긴장했잖아?” “그러게.” “이런 놈들이라니!” “조용히 해.” 진지하게 대답하는 희렴이와 울컥하는 반령우. 그리고 품에 안아오던 비닐 봉다루에서 차곡차곡 꺼내는 서찬휘. 뭔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비닐 봉다루에서 나오는 것은 8개의 캔 맥주와 과자 몇 봉지. “야…, 술을 어떻게 구했어?” “말도 마. 이거 구할라구 얘랑 나랑 모험을 하지 않았겠냐.” “그럼 어차피 구해오는 거 좀 많이 사오지 쩨쩨하게 이게 뭐야 남자가.” “니가 돈 보탰냐? 엉?” 이러 저래 말이 많았다가도 앞에 술판이 차려지자 다들 눈이 반짝인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편도, 그리 많이 마셔본 것도 아니지만. 아주 간혹…보육원 신세라는게 뼈 져리게 서러울 때마다 주머니 쌈짓돈 털어 원장님 모르게 한병 사서 화장실에서 마시던 소주가 아주아주 달게만 느껴졌다는 것 밖엔. 사무치게 그리운…그런날엔. “자자, 마셔~” 령우가 각자 앞에 두 개씩의 캔 맥주를 내려다 놓았을 때. 내 앞에 있던 캔 맥주를 모두 제 앞으로 끌어당기고 내 앞엔 꼬까콜라 한 캔을 내미는…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원희렴. “뭐여?” 벙찐 내가 묻고, 반령우와 서찬휘 마저도 멍하게 바라보자 언제나 그랬듯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한다. “여자는 술 마시는 거 아니야.” 이 자식 이거…고리짝 시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구나. 물론 내가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맥주 두 캔을 못 마시겠어? 원희렴 앞으로 가 있는 맥주 캔을 다시 내 앞에 끌어다놓고 별로 지어지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린 채 말했다. “걱정 마, 희렴아. 난 맥주 두 캔엔 끄떡도 않는 튼실한 몸을 지녔단다.” 사실 맥주는 비싸서 먹어본 적도 없지만 말이다. “……바보 같아.” 이 남자, 첫날의 자폐아 같던 인상은 어딜가고 왜 자꾸 태클일까. 어쨌거나 다시 내 앞으로 당겨진 캔 맥주를 보고는 그냥 고개를 돌려 버리는 원희렴. 조용한 어둠 속에서 모두 홀짝 홀짝 캔을 비우고 있었고… 한 입 마시고 또 한 입마시고… 두 캔 정도를 다 마시니 해롱해롱한 게, 취기가 온 듯 얼굴이 붉어져 오른다. 내 환영식이라면서, 그런 난 무시하고 지들끼리 신나서 킬킬대던 와중 내게 묻는 령우. “근데 누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거야?” “희렴이가.” “쟤가.” 동시에 나온 대답이었지만 다른 대답. 당연히 원희렴과 나의 눈이 마주치고…. “멍청하긴.” 이란 말과 함께 마주친 눈을 돌려 버리는 원희렴이다. 이 자식이 누구 인간성 시험하나? 앙? 다시 고개를 돌려버린 녀석과 잔뜩 우그러진 내 인상. 조용히 오도독 오도독 과자를 먹는 찬휘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얼굴 가득 혼란의 기색이 역력한 령우에게 말했다. “내가 빨래하고 있언는데…막 내 옆으로 오더니 도아준다구우… 그러면서 막 늑대같이 손 잡으면서 그랬어, 쟤가아~” 나의 거짓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에 콧방귀도 안 뀌고 대뜸 말하는 령우. “얘 단단히 맛이 간 거 같은데?” “맥주 두 캔도 끄떡없다고 할 땐 언제더니…야, 내일까지 정신 못 차리면 어떡해?” 자기들끼리 속닥속닥 대는 녀석들. 아쒸, 이 자식들이 사람을 앞에 놓고 따를 시키네 이거. “아후 벌써 4시다. 씻을라면 이제 접어야지?” “그러자.” “야아! 접긴 뭐얼 접어~?주글래~?! 아직 시작도 안해써~” 꼬장 같지도 않은 꼬장을 해대며 언성을 높이는 나 때문에 깜짝 놀라선 내 입을 막는 원희렴과 일사불란하게 뒤처리를 하는 령우와 찬휘. 쓰레기를 전부 챙긴 서찬휘가, 역시 습관대로 안경을 한번 고쳐 쓰고 조그맣게 말한다. “사감 안 보이게 조심히들 나와. 나 먼저 간다.” 작게 문을 열고 주위를 두리번대다 후다다닥 뛰어나가는 서찬휘. 여전히 내 주둥이를 막고 있는 원희렴과 그 광경을 재밌게 지켜보는 반령우. “너도 얘 대충 정신 차리게 하고 나와. 금 나도 나간다~?” 오두방정을 떨어대며 문을 박차고 나간 반령우. 아마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으랴. “너 이 자식! 꼭두새벽에 어딜 돌아다니고 있어!!?!?” “아아, 아앗 샘~ 그게 아니라~~ 아아악!!” 서찬휘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나갔는데 하필이면 그 녀석이 문을 열고 나가 복도로 걸음을 내딛던 순간, 딱 올라오던 사감선생님. 당연히 반령우의 귀를 끌어당기며 들고 계시던 소설책 모서리로 반령우 머리통을 쬐어댄다. 문 틈 사이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저절로 몸서리 쳐지는 원희렴과 나. “거기 누구 있어?” 령우에게 응징을 하시다말고 내 방 쪽을 향해 말씀하시는 선생님. 우람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절로 정신이 바짝 든다. “아직 안 자나?” 내 방문을 활짝 여시며 물으시는 선생님. 이미 침대위로 올라가 이불을 쓰고 있던 내가 마치 잠에서 막 깬 듯 부시시한 몰골을 하구선 태연하게 대답한다. “자구 있었는데요….” “아, 미안하다. 잘 자라.” 실로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몰골과 취기로 인한 억양을 직접 보고 들으시곤 깨운 것이 못내 미안하셨는지 문을 닫고 나가시는 선생님.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이 반령우의 귀때기를 끌고-_-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내 이불 밑에 숨어있던 원희렴이 고갤 내밀었다. “하…죽는 줄 알았네.” 그래. 우리는 살았어. 우리 모둘 대신해 령우 혼자 죽겠지만….-_- 막상 정신이 들자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내가 희렴이에게 다가서 물었다. “어떡하지? 선생님 계속 돌아다니실 것 같은데.” “곧 있으면 기상 시간이야. 그때까지만 있을게.” “뭐어!?” 의심의 눈초리로 스스로의 몸을 감싸 안으며 마하의 속도로 녀석에게서 파바바박 멀어진 나. 아니나 다를까 정나미 떨어진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날 외면해 버린 원희렴. 이 자식이 아까부터 자꾸만 사람 무안하게 하구 있어…. “걱정하지 마. 이상한 짓 안 해. 기상 벨 울릴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 잠이 오는지 자꾸만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 한 구석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어찌 그리 아리땁더냐. 어두워서 잘 보이지두 않지만 은은한 붉은 빛의 조명등 아래 비추는 녀석의 얼굴은 그야말로 환상이라. 이거 이러다 내가 덮치는 거 아니야…? 어쩐지 자꾸만 감겨오는 눈에 다시 침대 쪽으로 다가가 베개를 끌어앉구 누웠는데… 나지막이 말하는 희렴이. “신경 쓰이면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까?” 그건 인간적으로 시킬 짓이 못된다 얘야. 웅크리고 누워있던 내가 몸을 일으키며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앉어.” 내 말에 비식 웃으며 옆에 걸터앉는다. “저, 근데 희렴아….” 단 둘뿐인 가운데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녀석은 마저 말을 이으라는 식으로 고갤 까딱인다. “지금 우리 단 둘 뿐이잖어….” 내가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서 앉고. 녀석은 어쩐지 불길하다는 듯 주춤거리며 슬쩍 뒤로 멀어지고 내가 다시 가까이가 앉고를 두어 번 반복하다가 침묵 속에 입을 뗐다. “근데 이렇게 가까이서 네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웬지, 음…우…웨에에엑…….”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6. “아아…머리 아퍼.” “하! 너는 머리가 아프지? 난 궁둥짝에 불이난다. 엉?” “시끄러. 토 나올 거 같어.” “뭐? 너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토 나올 거 같다구 했냐? 어!? 하. 세상 참 말세야.” 아니 이 자식은…좀 조용히 하라는데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누가 지더러 걸리라고 했나. 지가 재수 없는 걸 가지구 사람 참 귀찮게 만들고 있어. 내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한 반령우가 어이없어 하고 있을 쯤, 우리 앞에 서는 커다란 그림자. 뭔가 불길함을 눈치 챈 령우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보였다. “그러게 말이다. 세상 참 말세야. 수업 시간에 이렇게 당당히 떠드는 녀석들도 있고. 당장 복도로 나갓!!!!!!!” 못살아 정말…. 전학 온 지 얼마나 됐다구 이런 쌉쌉한 녀석과 말 같잖은 말을 나누다 교실 밖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냐구, 강다희~? 교실 밖으로 쫓겨나 지나가시는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며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울리는 종소리. 교실에서 나오신 선생님께서 반령우와 내 머릴 한대씩 쥐어박고 걸음을 옮기셨다. “아, 죽겠네. 잠도 못자구.” “아이구 내 엉덩이야. 마누라한테 제일 먼저 만지게 해줄라구 여지껏 지켜온 엉덩이었는데, 고사감이 먼저 만져버린 불쌍한 내 엉덩이야…….” “에씨, 머리 아프다니까 자꾸 옆에서 궁둥짝 타령할래!?” 옆에 있으면 머리만 계속 아플 듯해, 녀석을 피해 5층 여자 화장실로 올라왔다. 제길 왜 여자 화장실은 3학년 교실 있는 곳에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언제나 시선을 몰고 다니는 나지만, 5층으로 올라오자 또 다시 익숙지 않은 남정네들의 시선을 피해 세수를 하고 문 앞을 나서는데…. “얘야, 그 여자애?” “그럼 얘가 여자지 남자냐. 화장실 급했나 부다. 빨빨빨 잘도 돌아다니네, ㅋㅋㅋ” 대놓고 남의 면전 앞에서 빨빨빨이 뭐야, 이 쌉쌉들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려 함에도 불구하구 자꾸만 내 신경을 건드리는 소리를 하고야 마는 늙은이들. “안으면 쏙 들어오겠다. 함 안아볼까?” “야, 이름이 뭐야?” 그냥 지나치려 했건만, 앞을 가로 막아선다. “어? 씹네?” “야. 선배가 묻는데 대답을 해야지.” 어깨에 슬그머니 손을 올리며 느글느글 거리는 녀석들을 향해 한번 강하게 쏘아봐주고, “치우세요.” 이 한마디와…달렸다. 우연이라 하더라도 다시는 마주치지 않길 기도하며 무작정 뛰어 2학년 복도를 달렸다. 앞도 안보고 다다다 뛰다가 곧 무언가에 강하게 무딪히고 나서야 걸음을 멈춰섰다. 찡한 아픔과 함께. “아이쿠 내 코야…….” 찡한 아픔에 얼굴을 찌푸린 채로 가늘게 눈을 뜨자 역시 저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 원희렴….엄마야, 세상에. 놀라서 입을 뻐끔 뻐끔 거리는 날 보다가 이내 나의 콧물이 묻은 마이로 눈길을 돌린다. “저, 저기 아까 있었던 일은 내가 절대 고의적으로 그런 게 아니었거든? 함 참아 볼라 했는데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이런 콧물이 묻었네!” 미안한 마음에 콧물이라두 손수 닦아주려고 했는데 괜찮다는 듯, 그리 나쁘게 느껴지진 않도록 조심히 손을 저지시킨다. “됐어.” 별로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일단 거절은 했다 이거지? 그래도 뭐 일단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빠 보이진 않은 녀석의 기분에 배시시 웃었다. “화난 건 아니지?” “응.” “다행이다. 으헤헤….” 계속 배실 배실 웃어 보이는 날 향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쇼핑백을 내미는 녀석. 뭔가 하고 슬쩍 들여다보다 말고는 물었다. “뭐야, 이게?” “가서 열어. 이거 먹고 술 깨고.” 쇼핑백을 내 손목에 걸치게 하고는 내 손에 쥐여준 건……박카스. 이 녀석, 설마 박카스의 용도를 술 깨는 약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렴 설마. 아닐 거야. “너는…, 술 먹고 나선 항상 이걸 마시니…?” “응.” “술이 깨…?” “응. 왜?” “아니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쳐다보는데… 여기서 박카스는 술 깨는 약이 아니라고 한다면, 박카스는 술 깨는 음료가 아니라 그저 피로회복제라고 한다면 정말 많이 놀랄 거야. 상처 받을 거야. 모르는 척 넘어가자, 강다희…. “공부 열심히 해서 B클래스로 옮겨.” “알았어, 재촉하지 마. 때 되면 열심히 하께.” 흐흐. 아까도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쫓겨났다는 걸 알면 화 낼 테지…. 아까의 일은 꼭 묻어둘 것을 다짐하고 녀석을 향해 씩 웃어 보이고 있는데 내 앞에 나타나고야만 웬수 새끼. “야, 어디 있었냐.” 반령우…저 자식은 왜 또 나온 거야. “궁둥이 질질 끌면서 나오지 마러.-_-” “간다. 그거, 점심 먹기 전에 열어봐.” “응, 응, 응!” 녀석이 사라지기까지 마구 손을 흔들어주다가…선생님이 오시구 계시는 걸 보고서야 돌아섰다. “그게 뭐야?” 흘끗 흘끗 쇼핑백 안을 쳐다보며 묻는 반령우. “시꺼, 넌 몰라도 돼.” “야. 먹을 거면 같이 먹자.” “싫지롱~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저 녀석 분명 이걸 노리는 것임이 틀림없어. 자꾸만 나의 쇼핑백을 탐내는 반령우를 향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떠보이고는 쇼핑백을 가슴에 안고 교실로 들어섰다. 원희렴…. 역시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란 말이지? 움하하하~ ※ 벅벅벅― “뭐…? 좋아? 그 자식이 좋은 녀석? 하이고!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점심시간 종이치고…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쇼핑백을 딱 펼쳤는데……. ‘컥!’ 엄청난 냄새와 함께 눈을 괴롭게 하던 그것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제길, 내가 그 자식 때문에 쪽팔림 당한 걸 생각하면!!! 반령우도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굴어서, 정말 자랑스럽게 펼친 쇼핑백이었는데…. ‘우캬캬캬캬~~ 야야, 나 필요 없다. 너 혼자 다 먹어. 맛있게 먹어! 푸하하하하~~~’ ‘우씨, 웃지 마!!!!!’ 떨리는 내 손에는 아까 원희렴이 입고 있던 내가 뱉어낸 지지-_-가 잔뜩 묻은 옷과 짤막한 쪽지 하나. [미안하면 빨아] 그래도 하나, 녀석이 신경 써준 게 있다면, 밥 먹기 전에 열라고 말해준 거겠지. 고맙다, 참으로. “세상에 좋은 녀석이 다 얼어 죽었다. 어디 내가 한번만 더 감동하나 봐라.” 결국엔 그 좋아하는 점심도 못 먹고 우악스러운 냄새를 풍겨대는 옷을 벅벅 빨고 있는 중. 또 다시 올라올 것만 같은 구역질을 참아내며 못 잔 잠이라도 한숨 자볼까 했건만…제길 5분 있다가 수업이다. 한숨을 푹푹 쉬며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서서 학교로 향하는데 걸어가다 딱 마주친 인간. “왜 이제 나와.” “왜 이제 나오겠어. 토 묻은 네 옷이 잘 안 빨려서이지.-_-” “자.” 퀭한 내 몰골 앞에 또 쇼핑백을 내미는 원희렴. 또…두렵다. “뭐니. 설마 이번엔 토 묻은 양말?-_-” “점심도 안 먹었다며.” 이번엔 믿어보자는 마음으로 뻘쭘하게 쇼핑백을 받아들고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는데…다행히도 빵과 우유. 아아, 그래도 다시 가슴 찡해지누나. 좋아서 쇼핑백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쇼핑백을 보며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어딘가를 보고 굳어져가는 원희렴의 표정. 원체 무표정한 녀석이었지만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는 게 이상하여 녀석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갤 돌리니, 저 멀리서 껄렁대며 우리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자주 빛 넥타이의 3학년 선배들. “들어가.” 어느새 나를 향해 있는 희렴이. 아까 내게 쇼핑백을 건넬 때와는 또 다른 말투로 말한다. “아직 시간 좀 남았어. 같이 먹자.” “들어가…….” 조금 더 떼써보려고 했지만, 잔뜩 낮아진 녀석의 목소리에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여간 이상한 녀석이야.. 그래도 지울 수 없는 찝찝함에 교실에 다다르자마자 창가로 향해 아까 희렴이가 서있던 곳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없다. 원희렴도, 그 선배들도. 뭔가…역시 구리단 말이지. “토 깨끗이 빨구 왔어?” “이상해….” “뭐가? 토가 안 빨려?” 이 새끼 그냥 콱 죽이삘까 부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앉아서 고민하고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내가 가져온 쇼핑백을 열어보는 녀석. 하여튼간 이 놈은 사람 뒤집어 놓는데 뭐 있어. “그게 아니라…아까 희렴이랑 얘기하구 있었는데, 멀리서 선배들 다가오는 거 보고 빨리 올라가라고 정색을 하잖어.” “뭐…?” 이번엔 원희렴을 대신해서 정색을 하는 반령우. 왜 이래, 안 어울리게. “왜 그렇게 놀라?” “어디로 갔냐? 선배들이랑 어디로 갔어?!” “아니 그건 들어가라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보진 못했지만… 정확히는 선배들이랑 같이 간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어.” 내 말에 품고 있던 기대를 져 버린 듯 빠르게 교실을 나가려는 령우다. “거기 빨리 자리에 안 앉구 뭐하니?” 하지만 그 마저도 막 교실로 들어오신 선생님으로 인해 저지당하고. 멈칫 멈칫하던 반령우가 결국엔 못 이긴 듯 자리에 앉는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계속 ‘젠장’을 읊어 대는 반령우. 잘은 모르지만 저 녀석이 저러는 걸 보면 절대 좋은 일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젠장…그 새끼 오늘 떡 됐네.”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7. “왜 그래? 무슨 많이 안 좋은 일이야? 응?”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보고는 크게 한 숨을 쉬며 말한다. “좀 말리지 그랬냐.” “무슨 일인지 전혀 감도 안 잡혔는걸. 그냥 들어가라 길래…….” “알아. 네 잘못은 아니야.” 근데 그렇게 쳐다볼 거 없잖아, 딱총아.-_- 말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마주치는 눈, 그 두 눈 가득 한심하다는 눈치를 팍팍 주고 있으면서 주둥이만 아니라고 하면 다냐?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구는 건지 묻고 싶지만 나름대로 인상 가득 쓴 반령우의 얼굴은, 역시나 처음 봤을 때처럼 사나웠다. “지금쯤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을 걸….” “뭐!? 왜??” “누가 자꾸 떠드냐?”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께서 교실을 한번 둘러 보시고 다시 설명을 하시는 동안 작게 녀석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왜 얻어터져?” “니가 아까 본 그 선배 녀석들은 원희렴 때리는 게 취미고, 원희렴은 그 선배라는 인간들한테 맞는 게 일상이라구.” “희렴이 싸움 못 해…?” 내 질문에 고개를 내젓는다. “여자 친구면서 대체 아는 게 뭐야?” “말을 안 해주니까 그렇지!” 진짜 여자친구도 아닌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구!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지.” “왜? 그럼 계속 얻어맞기만 한단 말이야? 선배라는 사람들은 왜 때리는 건데.” “잘 생겼으니까. 원희렴 새끼 잘 생겼으니까 때리지.” “너 지금 나랑 장난해?” 나름대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건만 말 같잖은 말을 하구 있어 이 자식이. 아무리 생각 없는 골빈 인간들이 있다하더라도 그렇지 남의 외모 때문에 사람을 때린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반령우. 장난 같은 말에 찌푸린 내 얼굴을 보고 잔뜩 흥분해서 말한다. “장난 아니야! 너 그 녀석들 얼굴 못 봤냐? 세상에 그렇게 불쌍하게 생긴 놈들 더 없다. 당연히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게 얼굴 반반하겠다, 백도 있겠다, 공부도 잘해. 열은 받지, 때려도 반항은 않겠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원희렴보다 나은 자식이 어딨냐? 그 증거로 그 새끼들은 때릴 때 원희렴 얼굴만 때린다고.” “뭐 그런 웃기는 녀석들이 있대? 잘나서 때리건 못나서 때리건, 그럼 가서 빨리 도와줘야 할 거 아냐? 빨리 찾으러 가자. 응?” “우리가 말린 다고 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면, 그냥 처음부터 그 자식들이 원희렴 못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것 밖에.” “너, 괜히 너두 맞을까봐 겁나서 그러지?” 내 말에 살짝은 동요하는 눈치와 함께 또 다른 한 편으론 기분 상한 듯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이다. “희렴이가 싸움을 못해서 맞기만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왜 맞는데?!” “그건 나도 몰라. 처음 맞고 왔을 때부터 왜 반항조차 하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대꾸도 안하는 녀석이야. 그저 단순하게 말하면 관대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만도 않아. 그 자식은 그저 자기 자신을 아낄 줄 모르는 것뿐이야. 맞다가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무기력한 자식이야…늘 그랬어. 지금 내가 이유 없이 죽어라 쳐대도 그 녀석은 분명히 왜 때렸는지 조차 묻지 않을, 그런 녀석이야.” “그게 뭐야….마치 살기를 포기한 사람 같잖아….” “그래. 정말 살기 포기 한거 같구나, 다희 양. 잠시 나 좀 볼까?”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살기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팔짱을 끼시며 유유히 날 내려다보고 계시는 선생님. 잔뜩 울상이 된 내가 다시 고개를 숙여 천천히 반령우의 자리를 쳐다보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자식은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으로 문제 풀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 “크흑, 궁둥이 깨진다….” 작은 흐느낌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나. 저녁식사를 모두 마친 아이들이 각자 방으로 들어가며 역시나 날 향해 무수한 눈빛들을 보내지만 지금의 난 그런 걸 신경 쓸 세 없이 아픈 궁둥이를 끌며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자습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이미 한참 전부터 아픈 궁둥이로 원희렴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불도 키지 않은 채 침대위로 몸을 날렸다. “아……” 침대 위에 익숙지 않은 물컹함이 느껴짐과 함께 작은 신음이 세어 나온 것도 동시에. “으악!! 누, 누구야?” 아직 초저녁부터 누군가 날 덮치려 들어왔다기엔 이른 시간이기에 재빠르게 불을 켜자 잠시 깜빡이다가 불이 켜지고 어두웠던 방안이 환해지자 보였다. “아파.” 몸을 던졌던 침대 위로, 정확히 내가 몸을 던진 아래에 누워있는 원희렴. “…뭐야 언제 왔어?” 사실 언제 들어왔는지 보다 놀란 건, 정말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얼굴. 붉게 부어오른 볼과 작게 찢어진 이마의 상처. 이미 맞은 지는 한참 되어 보이는 듯, 터진 입술사이에 굳은 핏자국. “지금 내 방으로 들어가면 애새끼들이 소란 피워서 안돼…. 잠시만 있을게, 잠시만….” 천천히 녀석 앞에 다가서 녀석의 머리칼에 가려진 찢긴 상처를 보고나서야 제대로 입을 뗐다. “정말 맞고만 있었어…? 나 빨리 들어가라 그런 것도 맞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어?” “아프다….” “기, 기다려봐. 반창고랑 약이 있을 텐데….” 잔뜩 당황해서 서랍을 뒤지며 약을 찾고 있는 내게 그 녀석이 말한다. “얼굴보다 니가 깔고 드러누운 데가 아파.” “지금 그런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야?” 약을 찾아낸 내가 잔뜩 신경질 난 목소리로 녀석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말했다. “반령우한테 들은 원희렴이라는 사람은 정말 살기를 싫어하는 것 같더라.” 대꾸 없이 상처에 따가운 약이 닿자 쓰라린 듯 인상을 찌푸릴 뿐. “이해가 안 가. 물론 같이 때리고 싸우는 게 좋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몸 같은 건 생각도 않고 날아오는 주먹을 하나도 피하지 않고 맞았다니, 정말 한심해.” “귀찮아, 일일이 신경 쓰기.” “신경 쓰기 귀찮은 게 아니라 사는 게 귀찮은 건 아니구.” “싸움 못해.” “안 하는 거랑 못 하는 거랑은 엄연히 다른 거야. 핑계 대지 마.” 다시 입을 다문 녀석이었지만 이젠 약이 닿을 때도 무표정한 원희렴의 얼굴은 마치 너무나 정확한 한 마디에 대꾸할 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조금은 썰렁한 감이 돌자 책상에 앉으며 말했다. “자습시간 끝나면 내려가.” “왜 약 안 발라줘.” “다 발라줬잖아. 어디 다친데 또 있어?” “니가 깔고 누운덴 안 발라줬어.” “우씨, 자꾸 장난 할래냐!!?” 정말이지 이 녀석도 반령우 못잖은 놈이야.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방송으론 계속 영어회화가 흘러나오는데…… 그걸 자장가 삼아 미친 듯이 쏟아져 오는 잠. 하긴, 오늘 한숨도 못 잤었지. 녀석은 뭐하나 싶어 고갤 돌리자 쌔근쌔근 잠이 들어있는 녀석. 어째 이거…열 받네. 누군 앉아서 공부하고 누군 잠이나 자고. 또 다시 발동한 내 심술기에 볼따구나 한번 꼬집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자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녀석이 빠르게 내 허릴 잡아끈다. 덕분에 육중한 내 몸이 침대위로 쓰러지고, 녀석이 말한다. “자.” 아따, 또 심장 발랑발랑…. 너무 가까워서, 조금만 고개를 틀면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기분 좋은 샴푸향이 난다. 내가 변태두 아니구 이런 감정을 계속 느껴야하나 싶지만 그래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은 게, 어떻게 계속 이대로 있어야하나 잠시 고민이 됐는데…… 그 고민이 무색하리만큼 빠르게 팔을 거둬간다. 거 참…. “선생님 돌아다니다 공부 안하고 있는 거 걸림 혼나는데.” “그럼 공부해.” “30분만. 30분 있다가 깨워줘. 30분만 자께.” 밖에 선생님들이 두 눈 뜨고 돌아 댕기는데 설마 나한테 뭔 짓 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잤는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슬쩍 눈을 떴을 땐 깜깜한 방안. 깜짝 놀라 후딱 불을 키자 시계는 새벽 3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말도 없이 나간건가? 약간의 아쉬움도 드는 듯…아무도 없는 어둔 방. 그 방 문 밑으로 새어 들어오는 복도의 빛과 내 문 앞에 서계시며 순찰을 도는 사감선생님의 그림자가 문틈으로 비추는 걸 보고는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사감선생님께선 고된 피로에 1층 복도 의자에 앉아 잠을 주무시고 계시고, 한 손엔 야구배트를 들고 두 눈을 감은 체 내 방문 앞에 몸을 기대어 앉아선 밤새도록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원희렴이 있다는 걸, 난 알리 없었다.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8. “깡다이~~” 또 왜 부르는 거야. 게다가 남의 멀쩡한 이름을 제멋대로 개조해서 부르고… 인상 잔뜩 쓰고 고개를 확 돌렸는데, 내 코로 쏙 들어온 반령우의 두 번째 손가락. 녀석도 잠시간 굳어 있다가 상황파악을 하곤 미친 듯이 신경질을 내며 내 옷에 손가락을 닦는다. “아, 제길!!!” 그러게 누가 그딴 쌍 팔 년도 개그 하랬나? 내 콧구뇽으로 한번 들어갔던 손가락을 보며 씩씩대더니 그 사나운 인상으로 쳐다본다. “그르게 누가 그딴 장난치랬어.” “아, 원래 인간이라면 그 자리에 볼이 있어야 정상 아니야?” “난 인간이 아닌 갑다.-_-” “눅눅해, 눅눅해.” 그럼 이놈아 건강한 자의 콧구뇽이 눅눅해야지 건조하길 바라느냐. 천연덕스럽게 녀석에게선 시선을 돌리고 교과서를 피다가…곧 있으면 점심시간이기도 하겠다 문득 떠오른 원희렴 생각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희렴이가 몇 반이지?” 연신 손가락을 비비적대다 말고 기분 나쁠 만큼 가깝게 얼굴을 들이민다. 당황한 나는 노골적으로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런 내 표정을 보던 녀석이 말한다. “사실을 말해봐.” “무, 무슨 사실?” “너 사실 원희렴 여자친구 아니지? 뭐…니가 희렴이를 따라다니다가 사귀자고 했더니, 녀석이 흔쾌히 받아줬다거나, 그게 아님 그 녀석이 너한테 돈이라도 주고 부탁을 했던 건가.” 아니 이 자식…지금 당장 자리 펴도 되겠는 걸? 녀석의 예리한 추리에 주춤했지만 그것도 잠시, 퍼뜩 정신을 차린 내가 들키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오바를 해가며 말했다. “아니이!! 이 자식이 어디서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의심 하는겨!!! 우린 그저 요즘 발랑 까진 아이들과는 다른 서로를 배려하는 연애를 하는 중이라구!! 너, 지금 질투하는 거지? 희렴이와 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불만을 품은 게로구나!!?!” 자연스레 책상을 쳐대며 열변을 토로 한 것은 물론이요, 어느새 자리에서까지 일어나 있던 나에게로…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고 집중 되어 있는 시선. 민망한 내가 뻘쭘하니 자리로 앉아보였고 역시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말하는 령우. “역시 뭔가 수상해… 아무렴 자기 남친이 몇 반인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렇고… 웬만한 여자에 관심도 없는 희렴이가 너같이 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콧구뇽이나 있는 애랑 사귀는 것도 그렇고 말야.” “허, 헛소리 하지 말구 반이나 불러!!” “찬휘랑 같은 반이야. 2-A. 흠….수상해, 수상해.” 아니, A클래스라 함은…그 자식은 나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뜻? 이거 영 민망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다. 어쨌거나 녀석을 피해 도망치듯 A반을 향해 달렸고, 민망함을 참아가며 누군 가에게 원희렴을 콜 부탁했지만 자리에 없는 녀석.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어딜 간 거야….” 어쩔 수 없이 딱총이가 있는 그 공포의 D클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 말고 무심코 스치듯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는데…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찬휘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듯 보이는 녀석. 하하, 기다려라. 내가 간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다다다다 달려서 아까 녀석들이 있는 벤치로 다다랐는데…어째 그 사이 자리에 있는 건 찬휘 뿐. “어? 희렴이 보러 왔구나.” “응. 근데 어디 갔어?” “매점 갔어. 곧 올 거야. 앉아서 기다려.” 어느새 날 먼저 발견하곤 다정스레 옆에 자리를 터주는 찬휘. 음, 이 녀석은 시도 때도 없는 질문만 해대지 않으면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자리에 앉자 음료수를 건넨다. “희렴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 “엥? 뜬금없이 뭘 그런 걸 묻구 그래…….” “궁금해서.” “그, 그냥 다 좋아. 착하구…알게 모르게 다정한 녀석이구 또….” 이거야 영 알지도 못하는 원희렴의 장점을 꼬집어 내려니 힘들다. 자연스레 말꼬리를 흐린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얘한텐 잘못 걸리면 위험 하겠어…. “나는 네가…희렴이를 재밌게 해줬으면 좋겠어.” “엥? 재밌게?”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찬휘다. 재미있게라….원맨쇼라도 해주랴?-_- “웃겨주라고?” “음, 여러모로 말이야. 그나저나 난 생각도 못했어. 령우나 나나 기대라는 건 애초부터 없었고 그냥 힘들어하는 녀석 얼굴 보기가 싫어서 억지로 떠민 것뿐이었는데 정말 여자친구를 데려 올 줄은 몰랐어.” “으, 으응. 그렇지 뭐….” 무슨…말을 하는 걸까.=_=이거야 당최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두서없이 뭐가 보기 싫어 떠밀었다는 거야? 어리벙벙해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 특유의 배시시 웃음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넌……희렴이가 너랑 사귀는 게 널 좋아해서라고 장담할 수 있어?” “…아무리 궁금한 게 많다지만 그런 걸 상대한테 묻는 건 실례 아니야?” “아,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배실 배실 웃던 미소는 어디로 가고 정말 미안한 듯 당황하고 있는 찬휘. “아니 괜찮아.” 아니 뭐…기분이 나빴다기 보다 별로 대꾸 할 말없어 쏘아붙인 한 마디에 미안해 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괜시리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괜찮다는 말에 한결 누그 러진 표정. 얘도 참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걸까? “그보다 넌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 나라면 그렇게 궁금하기도 힘들겠다.” “상대에게 뭔가를 묻는다는 건…예의지.” “그래? 그렇지만 그렇게 묻는 게 실례가 될 수도 있잖아.” 내 말에 잠시 멍하니 날 바라보는 찬휘. 뜨뜨미지근한 9월 늦여름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다시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상대방에게 뭔가를 많이 묻는 건 가장 간단히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아주 좋은 위로가 되기도 해. 또 관심이지. 물론 그 잠깐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평생 감추고 싶은 비밀은 없어. 그건 누구나가 그래. 아무리 밝히기 싫고 드러내기 싫은 비밀일지라도…한번쯤 누군가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또 인정해 주기를 원하지. 아, 물론 이건 상대에 따라 달라. 너도 궁금한 게 있을 땐 참지만 말고 먼저 물어보는 것도 좋을 거야. 만약 상처가 깊지만 않다면… 흔쾌히 얘기해줄지도 모르지.” 잘은 모르겠지만…어쩐지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한 서찬휘의 인생관. 조금 헤아려지자 어렴풋이 웃어보였고 찬휘 역시 그런 내 웃음에 환한 미소를 보여준다. 자식 마음에 드는 군. “나 먼저 올라갈게. 희렴이 오거든 같이 올라와.” “으응!” 찬휘가 먼저 자리를 옮기고 멀어지는 것까지 보고 작게 숨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서찬휘랑 있으면 자꾸 긴장하게 된단 말이지. “후아…….” “여기서 뭐해.” 잠시 숨을 돌리기 무섭게 어느새 다가와 뒤에서 말을 건네는 원희렴이다. “아, 아니. 너 기다렸지~ 점심 먹었어?”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다행히 상처가…하루 새 많이 아물었구나. 멍하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손엔 흰 우유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엔 곰보빵을 든 녀석이 눈치를 보다가 내게 내민다. “에이. 됐어. 니 점심이잖아.” “너 주려고 산거야.” “그, 그래? 고마워.” 근데 왜 하필 곰보빵이냐 이 자식아. 그래도 녀석의 성의에 넙죽 받아들었고. 곰보빵이든 곰팡이 빵이든 뭐든 다 좋다 이거야. 그래도 이 녀석, 오묘하게 잘해준단 말이지. 마치 진짜 여친이라두 된 듯싶게 말이야. 옆에 앉아 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원희렴에게 곰보빵을 반을 갈라 내밀자 희미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빵을 받아든다. 아…역시 웃는 거 하난 예술이다. 자식, 곰보빵이 그렇게 좋았나? “여어 이게 누구야~?”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9. 이제 막 딱 한입 빵을 베어 물라고 했는데…어디선가 빵 냄새를 맡고 몰려든 똥딱지들. 고갤 드니 어제…그 화장실에서의 늙그렁방탱이들. 그리고…원희렴의 굳어진 표정을 보아하니…이 인간들이 원희렴을 괴롭히는 게 일상이라는 선배들이기도 하다. “앗? 앙칼지케 쏘아보고 도망갔던 이뿐이 아니야?” “샌님 주제에 유일하게 우리 학교에 하나 있는 여자두 꼬셨나봐? 능력 좋네.” “어허, 한 명 밖에 없는 여잔데 혼자 독차지 하면 쓰나.” 너 댓 명은 되는 녀석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나와 원희렴 주위를 둘러싸고. 내가 빠르게 희렴이 쪽으로 고갤 돌리자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원희렴이 말한다. “너 올라가.” “시…,싫다.” “조금 있다가 나도 따라 올라갈게. 먼저 가.” “이쁜이가 가기 싫다는데 그냥 둬라. 응?” 습관마냥 내 어깨로 손을 올리며 다시 자리로 눌러 앉히는 선배 녀석 하나에게, 내 어깨에 올려진 손을 먼지 털어내듯 쳐내며, 여태껏은 전혀 볼 수 없던 미묘하게 상기 된 얼굴로 말하는 원희렴. “얜 건드리지 마요. 얘 건드리면……버려요….” 점점 작아진 목소리에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어쨌든 마치 이런 원희렴은 처음이라는 듯 당황하는 선배 녀석들. “뭐…? 아니 이 자식이 쳐 돌았나!?!” “야아. 기다려. 아가야, 넌 그냥 올라가는 게 좋겠다.” 내가 올라가고 나면 한 대 칠 기세다. 싫다는 듯 작게 고개를 내저어봤지만 그럴수록 잡고 있는 희렴이의 손에 힘이 더해진다. “올라가.” 결국…조심히 내 어깨를 밀어내는 녀석으로 인해 떠밀리고 말았고. 원희렴과 함께 교정 수풀 안 쪽으로 들어가는 똥딱지 같은 얼굴의 선배 녀석들. 도움을 청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어디로 가는지 찾을 수 없을까봐서 거리를 두며 조심히 따라갔는데…얼마 들어가지 않아 모두 모여서고. 가장 가운데 선 녀석이 원희렴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순간, “안돼요!!!!” 안 그래도 다쳤는데. 더 이상 다치게 보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나도 모르게 녀석 앞으로 뛰어가 원희렴의 허리를 꼬옥 부둥켜안았다. 내가 맞을 것도 각오하면서, 또 녀석이 맞는 것만은 볼 수 없어서 녀석을 꽉 안았는데, 불행히도…난 키가 너무 작았다…. “헉…-_-” “……-_-” 선배들이 주먹을 날린 곳은 원희렴의 얼굴이었고 결국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원희렴은 나로 인해 피할 새도 없이 그 주먹을 맞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당황한 선배 놈들과 원희렴. 그렇지만 이내 그 범죄자 같은 인상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해댄다. “꼬마야….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응? 이러다 같이 맞는 수가 있어.” “왜…왜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들 같이 굴어요?!!! 대체 뭘 어쨌다구 그러는 건데요? 여럿이서 한 명한테 이러는 게 옳은 거예요? 다들 유치하게 왜 자꾸 괴롭히구 그래요! 자꾸…, 자꾸 그러지 말란 말이에요!!” 악에 바친 듯 바락 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날 보고 멍하니 서 있는 선배 놈들과 가만히…… 내 머릴 헝클어트리면서 조심히 밀어내는 희렴이. 다른 놈들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인다. “착하다. 먼저 가 있어.” 타이르는 듯한 음성. 제길, 내가 애냐. “싫어……. 싫어!! 너도 화를 내. 니가 아무 반항도 못하고 맞기만 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러니까 자꾸만 이러는 거잖아?! 뭐가 무서워서 이러는 건데!!”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가 있어.” “아씨, 저게!!” 눈을 부라리며 달려드는 녀석 하나.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을 다시 한번 희렴일 향해 내던지는데 또 맞을까봐 녀석의 허리를 꼭 껴안았고, 나 때문에 주춤하며 멈춰서는 선배 놈 하나. “너 빨리 비켜라. 같이 맞을래?” “야…관둬. 여자애 때리다가 걸리면 근신이야. 너 오늘 운 좋았다, 원희렴. 이쁜이는…또 보자.” “씨발. 너 한번만 더 눈에 띄면 그땐 그냥 죽여 버린다.” 니글거리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다른 녀석들과 멀어져가는 선배 녀석들.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까. 차츰 멀어져 어느새 보이지 않자 그제 서야 긴장이 풀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놈들이 멀어져간 곳을 바라보는 내게, 잔뜩 신경이 곤두서 표정의 원희렴이 말한다. “앞으로 이런 일에 나서지 마. 두 번씩이나 봐줄 사람들 아니야.” “네가 맞고만 있지 않았더라면 나서지도 않았어.” “신경 쓰지 마. 내 일이야.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껴드는 거, 별로 반갑지 않아.” “원희렴 바보 새끼. 멍청이. 겁쟁이… 피할 줄 밖에 모르는, 맞설 줄도 모르는 비겁자.” 하나, 하나. 녀석이 열 받을 만한 욕들을 나열해가는데도 아랑곳 않고 천천히 선배 녀석들이 사라져간 곳으로 걸어 나갈 뿐. 정말……비겁해. 여느 때처럼 자습 시간이 끝나고 소등 시간. 아직두 못 다한 잠이 많아서, 평소 같았으면 벌써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어째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방안엔 시계소리만 째깍이고…… 덜컹― 또 다시 전처럼. 덜컹이며 누군가 두드리는 창문. 놀란 것도 잠시, 분명히 또… 원희렴일 거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을 애써 주체하면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쩐 일이야?”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분명해…라는 생각에 기쁘게 문고리를 내리자 창문이 열리고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낯선 그림자 세 개. “입 막아.” 내가 놀랄 겨를도 없이 내 입을 꽉 막는 누군가의 손.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이 목소린……. “내심 기다리고 있었나봐? 먼저 문도 열어주고?” 제길…. 그 자식들이다. 입을 꽉 막고 있는 손, 떨치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조여들고. 안간힘을 써가며 발버둥을 쳐댔지만 내 다릴 붙잡는 또 다른 녀석 하나. “그러게 아가야….여자가 나설 때가 있고 안 나설 때가 있는 거야. 네가 괜히 나서다가 이렇게 꼴사나워 지잖냐.”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녀석들이 막아버린 입과 굳게 잡고 있는 다리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젠장…쓰레기들 같으니라구.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떨쳐내려고 했지만 점점 더 드는 두려움에 눈물이 고인다. “너도 처음부터 남자들만 우글거리는데 전학 온 건 생각이 있어서 아냐? 안 그래?” “우……으읍!!!!” “제대로 막아. 소리라도 지르면 어떡해.” “알았어. 아, 이거 기집애 힘 드럽게 세네.”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할 때 잠시 다릴 놓은 틈을 타 머리맡에 올려져 있던 시계를 떨어트렸고. 둔탁한 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자 당황해하며 빠르게 붙잡는다. “야. 꽉 잡으란 말야!” 그때. 그 순간…작은 빛이 세어 들어옴과 동시에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나와 방안에 있던 모든 자식들의 긴장된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눈물이 고여 흐릿한 내 눈엔 노란 복도의 빛에 그림자를 등지고 선…원희렴…. “후. 난 또 누군가 했네. 씨발. 선생인 줄 알았잖아. 어이, 너도 이리 들어와.” 다행이라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는 녀석들. 결국 내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빗물 쏟아지듯 흘러내리고…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방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희렴이. “야. 너도 눈 감아 줄 테니까 같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말고 잔뜩 굳어진 원희렴의 표정에 말을 멈추는 녀석.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원희렴이 굳게 두 주먹을 쥐고선 악다문 잇새 사이로 작은 음성을 내뱉었다. “얘는…건드리지 말라고 말했지. 또 건드리면…그땐 그냥 죽여 버린다고 말했지….” “뭐가 어쩌구 어째? 나참, 이 새끼 한번 봐줬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 이거!” 생각지도 못했던 원희렴의 말에 잔뜩 흥분하며 녀석에게로 다가서 무턱대고 주먹을 날리?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쯤…고개를 까딱여 주먹을 피한다. 덕분에 주먹을 날리던 놈의 육중한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그런 녀석의 등판에 다릴 올리고 서자 상황파악 못하고 한 마디 하는 놈. “이런 씨발……” “입 다물어.” 뭐라고 딱히 단정 지을 수 없는 위압감으로 그 놈의 말을 끊은 채로 엎드려 있는 녀석의 머리를 거칠게 걷어찬다. 결국 잔뜩 쫄아선 몸을 움츠리고 내 방을 나가는 그 자식과, 내 입을 막고 있는 놈 앞으로 다가서 가볍게 멱살을 쥐어 올리는 원희렴. “손 떼.” “이, 이 놈이 정말….” “떼라구.” 작은 목소리로 녀석의 허릴 향해, 굳게 쥐고 있던 주먹을 내던졌고 한 쪽 손엔 멱살이 잡힌 채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맞는다. “윽!” “야…….튀, 튀어―!” 그제 서야…지금의 원희렴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아니, 이제야 제정신이라는 걸 깨달은 한 놈이 남은 녀석을 데리고 급하게 방을 뛰어 나간다. 모두가 나가고 조용한 방…가만히 날 내려다보는 원희렴. 그런 녀석을 향해 내가 잔뜩 떨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쩐 일이야…….” 갈라진 작은 내 목소리에, 허릴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는 녀석. 원희렴의 눈동자로 잔뜩 겁먹고 움츠리고 있는 내가 비추고…그렇게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다…꼭…안는다. “우……흐읏, 무서…웠어….” “……미안해.” 제길…조금만 늦게 왔으면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작은 안도감과 불안함 섞인 한숨과 눈물이 흘러내리고 내가 울던 그 동안만큼은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다가 차츰 눈물이 멎고 진정되어가는 내게, 녀석이 말했다. “전학 가.”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0. 드르륵― 내 방 창문에 쇠창살 달고 계신 수위아저씨. 내가 정말 전학이라는 걸 갈 리 없단 사실을 깨달은 원희렴은 날이 밝자마자 다짜고짜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나의 신변보호와 안전을 위해 쇠창살을 건의했고 교장선생님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 쇠창살 이전에 끊임없이 전학가라 면박을 주었지만 내가 녀석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시, 싫어!’ ‘또 이런 꼴 당하고 싶어?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전학 가.’ ‘싫단 말이야. 내가 전학을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해.’ 싫었다. 이런 일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무섭고 두려웠지만 전학은…정말 싫어. 생각도 하기 싫다구. 온지 얼마나 됐다구 이 곳이 떠나기는 싫은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 한 거 하난…그냥 가기 싫다는 거야. 이런 불편한 상황을 감수 할 수 있을만큼. ‘교장선생님한테 네가 전학 가야하는 타당한 이유를 말해줄게.’ ‘말하지 마. 지금 있었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어디가서 말하기만 해 봐!’ 그리하여…내 방 창문엔 쇠창살이 달리게 되었는데, “야. 살인이라도 낼 기세다. 표정 왜 그래?” 드르륵 소리를 내며 창문에 창살을 달고 계시는 수위아저씨에게 내심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그걸 지켜보고 있던 반령우의 물음이었다. “당연히…내 방에 쇠창살이 달리는데 기분이 좋겠냐. 너라면 퍽이나 좋겠다!” “그래도 다 너 좋으라고 그런 거 잖냐.” “그래…그렇지.” 그나마 이제는 어제 같은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이 정도인 거라구. 수위아저씨가 창살을 다 달고 나가시고 멀찍이 서서 구경하던 원희렴이 다가와 쇠창살을 한번 흔들어 안전여부를 확인한다. “너흰 주말인데 데이트도 안하냐? 희렴아, 너 정말 얘 좋아서 사귀는 거 맞어? 어?” 뜬금없이 원희렴에게 우리 사이여부를 재차 확인하는 반령우. “아니 이 자식이 또 시작이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나는. 너희는 보면 볼수록 구린 뭔가가 있어.” 자꾸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반령우에게, 나는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안달 나 있는데 막상 들키면 곤란할 장본인인 원희렴은 계속 애꿎은 쇠창살만 흔들어댄다. “에잇, 둘 다 나가!” 억지로 반령우와 밀어내는데 먼저 밀려난 반령우와 잠시 틈이 난 사이로 말하는 희렴이. “주말인데 방에만 있지 말고 나와.” 꾸역꾸역 문을 닫다 말고 생각해보니 그도 그런 듯. 이런 주말에, 대체 내가 왜 방구석에 처박혀있어야 하는 건가 싶어 문을 열자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나 역시 녀석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걸음을 떼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당 옆 아카시아나무 벤치 옆에 줄지어 앉아 있는 녀석들. “저 궁둥이도 큰 게 왜 또 왔어.” 비아냥대는 반령우와 웃으며 옆자리를 터주는 찬휘. 무표정하니 아카시아 나뭇잎새를 뜯고 있는 원희렴. 녀석의 안 어울리는 행동에 덩달아 멍해지자 반령우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며 말하는 찬휘다. “우린 매점 좀 다녀올게. 얘기하고 있어.” “야야, 혼자가~ 귀찮어~” 하지만 자의와는 상관없이 끌려가고야 마는 반령우. 그것이 네 인생이나니 불평 말거라…. 둘이 가자 잎을 모두 떼어버린 원희렴이 그제야 나를 본다. “언제 왔어?” “글쎄다. 아마 네가 6번째 잎을 떼는 것부터 본 것 같은데 말이다.” “주말 인데 어디 갈 데 없어?” 상당히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 덕분에 내 자신이 지금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고 있는 가를 알게 됐다. “지리도 모르고 돈도 없고.” 그야말로 상황에 딱 들어차는 조건 아닌가. 그래. 난 정말 이 곳 지리도 모르고, 돈도 없고. 크게 한 숨을 쉬며 옆자리에 앉는 나를 보더니만 이내 무언가 준비해둔게 있었던 듯 주머니 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민다. “자―.” 그러고 보면, 난 항상 이 녀석에게 무언가를 받는 느낌. “이게 뭐야?” 반 접힌 하얀 종이봉투를 내미는 원희렴. 뭐냐고 물어보면서도 손을 이미 받아들고 그것을 펼쳤는데… “컥! 돈이잖아? 이걸 왜……” “가불해주는 거야.” 아마 정말로 내가 아주 많이 안돼 보였던 듯싶다. 하얀 종이봉투 안엔 빳빳한 만 원권이 30장. 생각지도 못했었던 돈이 손에 들어왔는데…처음 돈을 받으면 뭔가 뿌듯하니 기분도 좋을것만 같았는데…그래도 이 녀석이 내게 친절한 건 역시 형식상이라는 걸 생각하니 또한 섭섭하면서도 담담한 듯. “고…고마워.” 돈 봉투를 손에 쥐고도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그, 그러는 너는 어디 안나가? 주말인데 재미없게.” “재미없어도 돼.” “엥? 왜? 학교 안에만 있는 게 좋아?” “나는 꼭 재미있을 필요 없어.” “아 그래?” 이해하기 힘든 원희렴의 말에 잠시 멍해지다가…곧 그 말의 뜻이 뭔지 깨달았을 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역시~ 너희 딱 걸렸어. 그 손에 든 돈 봉투는 뭐지~? 역시 너희 계약 연애를 하고 있던 거야. 그렇지?!” 그 자식이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_-그리 머지않은 곳에서 두 손엔 한아름 과자를 안고 다가서는 반령우. 아니, 저 자식은 대체 뭔데 이렇게 시도 떼도 없이 나타나서 태클이야, 태클은!?!! “자, 이제 사실대로 불어라.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지금 이 광경은 무어란 말이지~?” 서찬휘는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왜 이 웬수덩어리 자식 혼자인거냐구!! 언제나 그렇듯, 그저 멍하니 반령우를 바라보기만 하는 원희렴과 거짓말 잘 못하는 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고 그걸 지켜보는 반령우는 그저 재밌다는 눈치만. “어서 말을 해보라구~” “무, 우…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당황할 거 없어.” 떠벌떠벌대는 내 손을 꼭 잡는 원희렴. 역시나 반령우와 나의 시선이 잡힌 내 손으로 향하고 태연한 척인지 정말 태연한 건지 별 동요 없어 보이는 원희렴의 표정에 령우와 나, 둘 다 놀라서 벙쪄 있을 무렵 내 손을 쥔 채로 당연스럽게 반령우를 지나쳐가며 말한다. “가자 커플링 사러.” “커, 커플링?” “응. 커플링. 가지고 싶다며.” 반령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터는 녀석. 아아, 순발력 하나는 기가 막힌 녀석. 이뻐서 뽀뽀를 다해주고 싶구나!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의 반령우를 두고 앞서가는 원희렴에게 물었다. “어, 어쩔 거야? 정말 커플링이라도 사게?” “일단은 시내에 나가자. 저 녀석 좀 어떻게 떨치면 되니까. 가서 옷이나 좀 갈아입고 내려와.” 뭐 굳이 옷 갈아입을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역시 갈아입어야겠다. 생각해 보니 이건 전 학교 체육복이잖아…. 난 대체 왜 여자라곤 나 하나 밖에 없는 곳에서, 여자에 대한 남자애들의 상상을 무참히 깨트려버리고야 마는 걸까!!! 방으로 올라가 입을 만한 옷을 찾아서 막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더럭 문을 열고 들어선 그대는, 이름 하야 원수로다.-_- “너희 정……” 녀석 역시 배때기까지 옷을 들추고 있던 나를 보고 놀란 듯 멍하니 굳어서 있고. “지금 당장 문 닫고…안 꺼질래냐!?!!!!” “미, 미안!!” 내 커다란 외침을 듣고서야 깜짝 놀라 문을 닫는다. 으아, 정말 위험해, 이 곳은. 하지만 내 더부룩한 배때기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느낌 안 드는 것은…… 상대가 반령우여서 일게야. 음, 다행이다. 옷을 갈아입고 홀 앞으로 나가자 아직도 얼굴이 벌게져 있는 반령우와 간단한 캐쥬얼 차림마저도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빛이나 보이는 원희렴이 서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http://cafe.daum.net/bearnangman) 11. “야아, 이것도 이쁘네. 어? 저건 어때? 좀 비싸려나?” 대체 지금…누구 커플링을 사러 온 것이냐…? 막상 당사자인 희렴이와 나는 가만히 서있기만 하고 혼자 신이 나서 쥬얼리 샵 안을 누비는 반령우. 혼자 들떠 있는 반령우를 바라보다 말고 원희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왜, 왠지 정말 사야할 것 같은 분위긴데 어떡할 거야?” “별 수 있나. 따라 올 줄은 몰랐는데…그냥 하나 사.” 웬일이니, 정말. 강다희 인생 18년 중 가장 놀랄 일. 나, 남자와 커플링이라는 것을 맞추다. 이 녀석, 생각했던 것보다 대범한 놈이잖아? 흠. 그저 커플링 값만 나한테 내라고 하지 않는 다면 이 녀석은 최고야!! 그럼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예쁜 걸로 골라야겠다 싶어 가게 안을 돌아다니는데 막상 원희렴은 정말로 관심 없는 듯. “야아~ 이왕 살 거면 예쁜걸루 고르자. 와서 봐봐. 예쁜 거 많아.” “뭐가 되도 상관없어.” 역시 이 녀석은 최하야. 무슨 남자가 저러냐? 정말 재미없는 녀석이야. 결국 관심 없어 하는 원희렴은 뒷전에 두고 이것저것 고르다가…한참만에야, 마음에 드는 걸 하나 발견하고. 관심 있어 하는 나를 보고 한 마디 하는 가게언니. “어머. 학생이 보는 눈이 있네~ 이거 신상품이야. 블루문이라고…백금에 파란색 보석이 잘 어울리지? 쥬얼리 디자이너 찰리 황씨가 제작한 거야. 심플하고 예쁜데 가격대가 좀 세지~” 음, 비싸도 될라나?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원희렴을 쳐다보자 그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하하하, 역시 최고라니께. 멀찍이 서서 구경만하던 반령우도 흘끗 쳐다본다. 그런 반령우를 쳐다보던 주인언니의 한 마디. “좋겠네, 동생이 커플링도 와서 다 골라주고. 여자친구 손가락 사이즈는 알아?” 아니 이 아줌씨가 노망이 들었나!?!!! 화악 달아오른 내 얼굴과 그걸 보고 재밌다고 끅끅대는 반령우. 멍하니 이 쪽을 지켜보는 원희렴. “동생 아닌 데요? 제가 할 거예요!!!” “아, 그래? 어머, 미얀. 난 학생이 어려보이길래~” 솔직하게 말하면 어려보이는 게 아니라 키가 작아 보이는 건 아니구? 어쨌거나 한번만 넘어가 주자구 마음먹고 다시 반지를 보고 있는데, “둘이서 할 거지? 손가락 사이즈 알아?” 이 아줌씨 이거 안 되겠네. “하. 세상에. 반령우랑 내가 커플링이라니이이!!! 이런 기분 나쁜 오해를 받을 줄 이야…, 원희렴! 빨리 와서 어떤가 봐봐!! 괜히 착각하시잖아!!!” “어머 이번에두 아니었나봐? 정말 미안.” 미안하면 입 다물어요. 잔뜩 기분 상한 나였지만 차마 나도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령우 녀석 역시 빈정 상한 듯 잔뜩 주둥이가 나와선 꽁시랑 댄다. “누군 그런 오해 받으면 기분 좋은 줄 아나. 하!” 정말 많이 마음 상한 듯…. 왠지 마구 미안해지려고 하는데? 그래도 또 꿋꿋하게 견뎌내는 자식이라 내심 대견스럽다. 옳지. 사내 녀석이 계속 꽁해 있으면 뵈기 싫지. 그래도 이런 사치. 나한테 어울리지두 않는 거 알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부려보고 싶었던 그런 사치. 반응이 영 시큰둥한 원희렴과 함께 결국은 그 반지를 사가지고 가게 안을 나오는데 역시 별 상관도 없는 놈이 뾰루퉁한 얼굴을 하구 있다. “내가 골라준 게 훨씬 예쁘다니까 그래.” “뭔 상관이셔~ 니가 낄 것도 아니니까 신경 끄셔.” “모처럼 시내 나왔는데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마치 이번에 시내에 나온 주목적자가 반령우 인양, 신나하며 활개치고 있다. 결국 타의로 카페까지 끌려 들어가고. 셋 다 아무 말 없이 주스만 홀짝이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카페에 들어올 때 준 신기허게 생긴 라이터를 관찰하며 만지작대는 내게 언제나 그렇듯 시비를 건네고야 마는 령우. “그것도 켤 줄 모르냐?” “우씨! 알거든? 그냥 가지고 노는 것뿐이야.” 사실…모른다. 아아, 발끈하면 안돼. 내가 이럴수록 반령우 저 자식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안다고? 그럼 켜봐. 켜봐, 켜봐아~~~” 정말 죽여 버릴까보다, 이 새끼…….자꾸만 나의 이성을 자극한다. 웬만함 그냥 그런 놈이려니 하고 참겠는데…계속 내가 들고 있는 라이터에 손을 어른거리며 배실배실 웃고 있다. 죽이고 시프다 정말!! 후아, 참자 참아.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그냥 혼자서 놀다가 무심코 뭔가를 틱하고 눌렀는데, 생각지도 못한 불이 확 솟아오르고. “으아 뜨!!!!!!!!!” “엄마아!!” 가히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다고 해서 과언이 아닐 괴성을 내지르는 반령우. 데인건지 한 쪽 손으로 자꾸만 손을 감싸며 호들갑을 떤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안 쳐다 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도 정말 깜짝 놀라서 뜨겁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령우의 손을 꽉 잡았다. “괘, 괜찮아? 많이 뜨거워? 어, 어떡해에~~그러게 왜 거기다 자꾸 손을 대구 그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으로 데인 령우의 손을 감싸고. “어, 언니, 여기 얼음 좀 주세요!” 얼굴과 몸이 전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녀석인데 괜히 데여서 상처라두 남으면 낭중에 돈이나 내놓으라지 않을까 걱정 되서 호호 불며 잔뜩 울상지은 얼굴로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령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열이 얼굴로 올랐냐? 왜 이렇게 시뻘게?” 정말 손에 있던 열이 얼굴로 오른 새빨간 얼굴로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한다. 수전증이라도 있는 건지 잡고 있는 녀석의 손에서 덜덜덜 떨림이 전해져올 뿐. “아얏!” 잠시 그러고 있는데 령우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등을 짝 소리 나게 때리는 작자. 그 이쁘게도 생긴 손을 거둬가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내 손등을 때리고도 무표정한 원희렴. 아아… 잠시 이 녀석을 잊고 있었어. “왜 때리구 그래. 아푸게.” “엄살이야, 저거. 안 데었어.” 그, 그런가? 다시 빠르게 반령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때자 정말…빨간 거 하나 없이 멀끔한 녀석의 손. 고갤 들어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자 제 얼굴만큼이나 뺀질 맞은 한 마디. “어? 아무렇지도 않네? 난 많이 데인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허허~~” 이 자식…. 니가 어느 날 누구에게 칼을 맞거든, 가장 유력하게 날 의심 하 거라. 내, 제일 먼저 널 죽이고 죽을 테다! “이씨….난 정말 크게 다친 줄 알았잖아!!!” 내 소란에 다급히 얼음담긴 그릇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종업원. 이번엔 내가 자꾸만 열이 차올라서 그릇에 담긴 얼음을 입에 집어넣고 오도독 오도독 씹었고. “흐에에…….누아 이어 옴 헤어오~~(흐에에…….누가 이거 좀 떼어줘~~)” 그 와중에도 혓바닥에 들러붙은 얼음. 반령우 또 신나 죽고, 원희렴 또 무표정하니 구경하고. 정말 내가 어쩌자고 이런 녀석들이랑 친구가 된 건지…새삼 내 자신이 불쌍해진다. 간신히 혓바닥에 붙은 얼음을 떼어내고 무심코 원희렴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던 녀석의 동공이 갑자기 확 커져 버렸음을 느꼈다. 항상 무표정한 녀석이, 갑자기 뭔가를 보고 정말 놀란 듯 두 눈이 커진 표정 변화에 나 역시 따라서 창가로 시선을 옮기자, 지금 녀석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이라고 마땅히 생각할 수 있는 게…어떤 여자. 예쁘게 쌍꺼풀 진 크고 동그란 눈, 작고 오똑한 코. 뽀얀 피부에, 복숭아빛 입술. 뒤에서 본다면 남자로 오해할 수 있을만큼 짧게 커트 친 머리지만, 그런 머리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무척이나 예쁜 여자. 와우 키도 크고 늘씬하니 보이쉬하다. 서울에서도 저렇게 예쁜 애는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은예림…?” 원희렴의 시선을 따라 창가로 옮긴 나의 시선을 보고 또 따라서 시선을 옮겼던 령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 은예림? 과연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다들 멍하니 그 여자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며 어여쁜 웃음을 흘리던 그녀가 카페 바로 앞을 스쳐지나갔다. 작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 원희렴을 보지 못한 채. 잠시동안은 멍하니, 그 아이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다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원희렴. “어…? 원희렴 어디……!!” 체 내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아주 빠르게. 그 멍하고 반응 느린 원희렴이, 의자도 넘어트리고, 부딪힌 사람에게 미안하단 말도 하지 않고 뛰어 나가서 붙잡으려 할 만큼 중요한 사람. 결국 그대로 카페 안의 창가를 스쳐 그 여자가 멀어진 곳을 향해 뛰어가며 똑같이 멀어져버렸다. “멍청한 자식. 잊긴 뭘 다 잊었다고…….” 아주 작은 령우의 말에, 나는 모르는 뭔가에 대해 살짝 가슴 아릿해지고. “너도 아는 사람이야…?” “응? 으응…. 그냥 알고 지내는 애야. 친구지, 친구~~” “누가 뭐랬냐?” “……-_-” “그리고 거짓말이잖아!” “뭐야. 진짜라니까!!!” 비아냥거리는 내 말투에 발끈하는 령우. 친구라면 그런 눈으로 쳐다 볼 리 없잖아, 바보야…. 누가 친구를 그렇게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은 눈으로 쳐다보냐. 누가 친구를… 그렇게 애틋한 눈으로 쳐다보냐…그게 정말 친구를 보는 눈이었냐고. “아무튼 빨리 가자. 지금 안 가면 8시 안에 못 도착해. 교문 잠글걸?” “희렴인 어쩌구?” 내 물음에 잠시간 뭔가를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여기 안 와, 그 자식.” “안…오다니?” “시간 좀 걸릴 걸. 우리 먼저 가야 해. 아마 통금시간 지나서 들어올 거야….” 내게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에 또 미안한 듯 멋쩍어하는 령우의 표정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의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걱정하지 마. 그냥 친구일 뿐이니까―.” “알어~ 누가 뭐랬냐??” “근데……넌 또 왜 그런 표정인 건데?” “내가…, 어떤 표정인데?” 령우에게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내 모습이 비췬 유리창이 다 말해주는 듯 했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벙쪄서는 눈동자도 흐리멍텅한게. 제길. 누가 봐도 정신이상자잖아? “늦겠다. 얼른 가자. 있다가 원희렴 새끼 오거든 우리 둘이서만 맛있는 거 열라 사먹었다고 구라까자.” 내 걱정을 하는 건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내 머릴 헝클어트리며 말하는 령우다. 제길. 이 녀석 걱정시키기 싫어서라도 고만 정신 차려야겠다. “굳이 구라를 칠 거 뭐 있어? 정말 사 먹으러 가자~” 원희렴이 왜 그렇게 뛰어나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 한건… 이 곳 지리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는 날 두고 그렇게 뛰쳐나갈 만큼…원희렴에게 소중한 사람. 만약 령우도 없었다면, 정말 어땠을까. 그래도 날 두고 갔을까. 녀석이 날 지나쳐가며 작은 바람을 일으켰을 때, 그 바람에서도 녀석과 같은 냄새가 났다. 깊고 푸른 알싸한 바다냄새와 코끝 시릴 만큼 차가운 새벽하늘 향. 같이 있을 땐 그저 시원하기만 한 냄새였는데…녀석이 스칠 땐 한없이 차가운 냄새가 났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허전한 느낌이 드나 보다. 가슴 한 구석이 빈 듯한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2. “비 온다.” 여름이 주춤하고 가을이 다가오는 걸 알리는 때늦은 소낙비가 내린다. 그만큼 왠지 모르게 교실 안과 아이들은 우중충하니, 축 쳐져 보인다. 하지만 반령우는 웃는다. 복도 한 가운데서 좋다고 꺽꺽대며 웃는다. 사실 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그 앞엔 처음 보는 당황한 얼굴의 원희렴이 앉아있다. “시상에 범생이 원희렴이 수업 시간에 졸아서 복도에 나앉게 될 줄이야.” 좋아하는 령우. 약간은 속 시원한 나. 무표정하지만 얼굴은 살짝 붉어진 원희렴. 어젠 통금시간 늦어서 혼이 나더니 오늘은 졸아서 혼나구…볼만하다. 곧 종이 치자 저린 다리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묻는다. “어제 잘 들어갔어?”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겠지.” “화났어?” “아아니! 내가 언제 화났다구 했어?” 라고 말은 했지만 반령우와 원희렴 둘 다 내가 현재 배배 꼬였음을 눈치 챈 듯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아무렴 그렇게 두고 뛰쳐나갔는데, 그것도 여자를 잡으러. 내가 여친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은 이의 그 참담함과 비참함이란. “다음 달 시험인 거 알아 몰라?” “무…, 뭐어!? 시험? 아니 뭐 벌써 시험을 보고 그런대?!!”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 오히려 놀라는 두 남정네. 제길, 무안해지네. 공부는 무슨,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다구 벌써 시험이라니. 멍한 내 얼굴을 보고 말하는 원희렴. “개학한지 벌써 한달 다 되 가. 저녁서부터 같이 공부해. 내가 알려줄게.” “어이구, 공부는 무슨. 깡다이는 나랑 계속 D클래스에서 함께 할겨.” “웃기신다! 알았어. 니가 내 방으로 와.” “어? 너희 방에서 단 둘이 뭘 할라구?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또 다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바보 녀석은 나나 원희렴이나 둘 다 무시한 채 식당으로 향했다. 헌데…학교에서 식당으로 향하기까지, 적어도 걸어서 5분 거리인데 웬걸 생각지도 못한 비였기 때문에 우산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 “아아…뛰어가야 하려나?” 천연덕스럽게 당연한 고민을 하고 있을 쯤, 옆에선 원희렴. 잠시나마 퍼붓는 빗속을 바라만 보더니 이내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고 말한다. “여기 잠깐만 있어. 올 때까지 가지말구 여기 있어.” “엥? 왜? 어디가게?” “기다리고 있어.” 대꾸 없이 갑자기 숙소 쪽을 향해 빗속을 달리는 희렴이. 빗줄기가 굵어서, 꽤나 아프지 않을까 싶어 하면서도 난데없이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기다리라는 녀석의 말을 되새기며 퍼붓는 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때마침 식당으로 향하는 건지 마구 몰려나오는 무리들. 멍하니 비만 바라보고 있는 내게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어? 너 왜 여기 서 있어? 우산 없어서 그래?” “야, 같이 쓰고 가자. 우리 우산 세 개야.” “으응? 아니 괜찮아.” “사양하지말구~ 이렇게 비도 많이 오는데 어떻게 가려구 그래?” “아냐. 난 정말 괜찮은……” 내 말에는 아랑곳 않고 팔을 잡아끈 채로 우산을 씌운 채 식당가로 향하는 아이들. 한사코 괜찮다는데도, 거의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하는 이들에게 악의는 없어 보여서 그런지 이 또한 거절하기 쉽지 않다. 그래두…꼭 기다리랬는데…. “저기, 나 누구 기다려야 해서 말야. 성의는 정말 고마워.” “어? 야!” 결국 한참을 갔다가, 그 굵은 빗줄기를 맞으며 다시 정문 앞으로 되돌아왔고. 그새 비에 홀딱 젖어 축축해진 옷을 바라보며 또 바보 같은 후회를 하고 있었으니….제길, 그냥 씌워준달 때 같이 가던지 아님 끝까지 서있을걸, 괜히 갔다가 다시 와서 옷만 젖었네. 쓸모없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 와중, 아까 사라졌던 그 길로 빠르게 뛰어오고 있는 누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비에 잔뜩 젖은 모습으로 내게 우산을 내민다. “이…우산 가져오려구 그렇게 뛴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우산을 내미는데, 이미 원희렴은 우산이 필요치 않을 만큼 잔뜩 젖어있다. 정말…바보 아니여!? 어차피 젖었더라도 올 때는 쓰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들고 오다니. “고, 고마워….” “근데 왜 젖었어?” “아, 어쩌다가 보니. 헤헤…, 뭐 이 정도 쯤은 젖을 수두 있는 거구. 그보다 안 추워?” “비 맞는 거 좋아해.” “어차피 젖었는데, 나도 그냥 같이 비 맞을까?” “여자는 몸 차게 하는 거 아니야.” 또 늙은이 같은 말로 우산을 펴서 내민다. 이 자식…. 어제 여자 뒤꽁무니 쫒아가는 거 보고는 그렇게 열딱지, 화딱지가 났는데, 그래도 또 이렇게 예쁜 짓을 하니 미움은커녕 더 괜찮은 녀석이라는 생각만 든다. “그래도 같이 써.” 이미 젖었다고, 또 식당까지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가려는 원희렴을 붙잡아 같이 우산을 쓰자, 작게 미소를 띄우며 웃는다. 둘 다 이미 비에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우산을 쓰고 식당가로 향하는, 이상한 광경을 모두에게 연출할 수밖에 없었으니. 식당으로 향하자 우산을 쓰고 있으면서도 홀딱 젖은 우리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허허, 이거 난감한걸. “어? 아까 걔네. 젖은 거 보니까 비 맞구 왔구나? 그러게 같이 쓰고 오자니까.” “아…하하….” 아까 우산을 씌워주던 다섯 명 정도의 아이들이 아는 척을 해보이고, 멋쩍게 웃으며 원희렴 쪽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분명 내 쪽으로 시선이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쌩 고개를 돌린다. 아니 마주치면 마주치는 거지 왜 저래? “야. 같이 먹자, 얘기나 좀 나누면서.” “그래. 너 항상 령우네랑만 먹더라. 우리랑 같이 먹자~” “어이, 그러지 말고 우리랑 먹읍세~~” “누나 이리로 오셔요!” 갑자기…광란의 도가니로 빠진 식당 안. 모두들 휘파람을 불어대며 같이 먹잖다.-_-처음엔 한 두 놈이 그러더니만, 이내 식당안의 선배고 후배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같이 먹자니… 이거 참 기분은 좋구나. “어, 어쩌지?” 사실 째지게 기분 좋은 내가 조금 난감한 척 애써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원희렴 쪽으로 고갤 돌리며 묻자,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네 마음대로 해.” 라는 대답과 함께 령우와 찬휘가 있는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원희렴. 쳇…!! 그냥 이리 와서 같이 먹자고 하면 덧나나? 딴 애들이랑 먹지 말라면 고려해볼 생각이었건만 조금도 그런 눈치 없이 멀어진 녀석을 보니 배알만 꼬이는 듯. 잔뜩 뾰루퉁해진 얼굴로 식당 안을 둘러다 보고 제일 인물 좋고 신수 훤한 녀석들 옆에가 식판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름은 뭐야?” “강다희.” “전에 다니던 학교는 어땠어? 좋았어? 지금 우리 학교보다 좋아?” “그럭저럭―” 누가 보기에도 무성의 해 보이는 대꾸를 해가며 입으로 정신없이 밥을 퍼 나르는데, 또 내 신경을 자극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남친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바람을 피고 있네, 여편네가아!!” 듣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리는 목소리. 그런 목소리의 주인공이 또 누가 있으랴. 아주 철천지원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령우의 목소리. 원희렴이 해야 할 행동을 저 녀석이 하고 있다니…꼽다. 그래도 본디 인생이 그러한 녀석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는데 고놈의 방정맞은 주둥이를 가만있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놀린다. “지조가 없어요, 지조가. 희렴아. 넌 지조 없는 여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 “…화가 나.” “근데 령우, 너 지조가 무슨 뜻인 줄은 알아?” 혼자서 주접을 떠는 것만으론 모자랐는지 원희렴의 생각을 묻는 반령우와, 그런 령우에게 지조의 뜻을 묻는 찬휘. 못 말릴 녀석들이야, 정말. “어? 그러고 보니 반지 끼고 있네? 무슨 반지야, 그거―?” 그 좋아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서려는 찰나에,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묻는 아이. “설마 커플링이야? 에이, 아닐테구~ 뭐야? 남친 있었어?” 이걸…뭐라고 해야할라나? 그냥 커플링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럼 누구냐고 물을 테고, 자연히 원희렴 눈치를 볼 테고. 진짜도 아닌데 괜히 귀찮아 할 녀석을 생각하자니 잠시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 이건 그냥…….” “너같이 오가는 폭탄을 막는 부적.”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3. “아하! 그렇구나, 하긴 여잔 너 혼자니까 나같이 오가는 폭탄을 막을 필요가……응……?” 금방 그 말은 절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깜짝 놀란 내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갤 돌리니,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느새 내 앞을 스쳐지나가던 원희렴의 한 마디. 생각지도 못했던 원희렴의 태클에 남학생은 충격 꽤나 먹었는지 멍한 상태. “풋…. 미, 미안해. 나 먼저 일어날게.” 식판을 비우고 원희렴이 나간 곳으로 빠르게 따라 나가며, 바깥은 어느새 비가 멎었고 마치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밝기만 하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얼마나 놀랐겠어.” “내 맘인데.” “너…뭐 화난 거 있어? 말투가 왜 그래~” “아니. 그보다 공부해야하니까 책 가지고 올라갈게. 먼저 가 있어.” 아따, 그래도 난 그런 말 대놓고 한 것도 그렇고 뭐 좀 서운했나 싶었는데 말하는 것과 표정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듯. 하지만! 이 녀석이 자기 꿍한 거 티를 낼만한 녀석도 아니구…질투 한번 귀엽게 한다 싶기만 하다. 역시 의외의 구석이 있는 놈이네. 하여간 뜬금없는 질투하곤. 정말 귀엽다니까. “그럼 가장 기초적인 회화부터 시작할게. 내가 먼저 말 할 테니까 대답해. i like both of hese jackets and they both look pretty good on me, don't you think?” “에…. 그러니까, 재킷이 프리티! 예쁘고…굿~ 좋다? 음, yeah, I think so…다음이….” 대답 없이, 작은 한숨과 함께 책을 덮어버리는 원희렴. “그냥 수학부터 하는 게 빠르겠어. 봐봐. 방정식 3x⁴-5(a+1)x² + 3a² = 0 의 네 실근이 등차수열을 이룰 때… a 값들의 합. 계산해봐.” “헉! 너무 어렵잖아? 어떻게 하는 거더라?” 아주…민망한 상황. 기분이나 상태가 어떠하든 웬만하면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원희렴의 표정이 굳었다. 심각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민망한 내가 한껏 민망한 얼굴로 올려다보면…그런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하는 녀석. “대체 뭐 하고 살았어?”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 나두 답답해 죽겠다구우…. 갑자기 100등 이상 오르라는 건 무리야. 그렇게 생각 안 해?” “안 하는데.” “에이, 됐어! 내가 너랑 무슨 얘길 하겠어?” 손을 휘휘 저으며 자연스럽게 책을 덮어버리던 터, 빠르게 넘어가던 공책 뒷장에 적힌 짧은 몇 마디에 손을 멈췄다. [보고싶다. 보고싶어, 은예림.] 아주 잠시동안은…멍하니 그 글을 바라보다가 문득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묵묵히 교과서를 읽고 있는 원희렴의 얼굴 그 어디에도 그리움의 기색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제서야… 이 녀석은, 아무에게나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 괜히 가슴 싸해지는 그 한마디, 보고싶다. 공책을 덮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날 힐끗 바라보던 원희렴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 알려줄래. 네 스스로 공부해.” “뭐어?! 치사하게…아, 그래 나도 혼자 공부하는 게 편하니까 뭐. 그냥 공책이나 빌려 줘.” 애써 내 쪽에서 거부하는 척 말은 했지만…따지고 보면 강다희, 무기력 원희렴에게 버림 받다. 고로, 더 깊이 파고들자면 딴 사람보단 더 참을 줄 알고 웬만하면 그냥 참아대는 그런 녀석에게 버림 받았다는 약간은 충격으로 다가오는 사실. 가지고 있던 공책들을 내게 내밀며 말한다. “B클래스마저 자신 없으면 하다못해 C클래스로라도 옮겨.” “후아…제발 공부에 관한 제약은 없애면 안돼?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단 말이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 거, 알잖아.” “프라이버시를 운운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프라이드나 지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성공은 성적순이야. 네 성적에 네 미래가 달려 있어. 한번이라도 노력은 해봤어?” “그, 그건…….” 간혹 볼 수 있는…그 특유의 똑 부러진 말투와 반듯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하는 원희렴. 노력이라도 해봤냐구…. 당연스럽게 그렇다고 말할 만큼 노력한 적은 없어서 차마 아무 대답도 못할 뿐. 그런 내게, 단순히 충고라고 하기엔 내 허를 찌르고야마는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 가장 간단하게 어떻다라고 나눌 수 있는 건 성적이야.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그저 수, 우, 미, 양, 가. A, B, C, D, E, F로 나뉜 겉으로 보이는 성적 하나로 널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모르는 사람이 보는 너는…D급인 거라구.” 잔뜩 굳어진 내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해댄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런 말 듣기 싫으면 듣지 않도록 스스로 잘하면 되는 거야. 알아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은 버려. 그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한심스러운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야. 공부를 떠나서, 네 인생에서 최소한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어?” “…나도 알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두 나두 안다구! 노력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되지 않는 게 있어. 물론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그래. 넌 참 좋겠다. 노력만하면 뭐든 맘먹은 대로 되나보지? 네 기준의 잣대로 내 노력 여부를 판단하지 마! 최소한의 대우를 받든 못 받든, 난 만족해. 너처럼 떠나간 사람 그림자나 ?i으면서 사는 것 같은 무의미한 짓은 안 하니까. 정말 불쌍하고 한심스러운 건 내가 아니라 너라구.” 다 말하고 스스로도 아차 싶을 만큼. 가시 같은 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땐,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이, 더 이상 어떤 말로도 웃게 만들 수도, 울게 만들 수도. 화나게 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나 마지못해 사는 이 녀석에겐 무표정이 가장 힘들고 아플 때의 표정이란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녀석 스스로도 재미없는 일상이며 삶이었기에, 항상 무표정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역시……심했나?” 계속 뒤척이느라 어느새 구겨진 침대시트. 다시금 멍한 얼굴로 아무 대꾸 없이 내 방을 나가던 원희렴의 뒷모습에, 너무 미안해져서. 지워지지가 않아서. 안되겠어. 사과해야겠어. 결국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작,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문을 열었는데…바로 앞방 문 앞에 서있는 사감선생님과…원희렴…? “자식, 나한테 맡기고 가서 자래도 그러냐?” “괜찮습니다.” “아무튼 네 덕분에 3층은 맘 놓을 수 있구나. 그럼, 부탁한다.” 원희렴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어깨를 두드리시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선생님. 그리고 내가 다시 빠르게 문을 닫고, 내 방문 앞에 털썩 기대어 앉는 그 녀석. 한 손엔 야구배트를 든… 웃긴 모습으로. 어쩐지 요즘 들어 문 두드리는 사람도 없고 옆 방 벽에서 소리도 안 나던 게……. “언제부터 여기 지키고 있었어…?” 조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문 너머 녀석에게 말을 건넸고 마치 내가 깨있는 건 몰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원희렴의 그림자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다. “안 잤어?” 아까와는 달리 높낮이 있는 어조로 묻는다. “응.” 굳게 닫혀 있는 문 너머로 대답했고 다시금 자리에 앉는 어둔 그림자 하나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옴과 함께 녀석이 말했다. “빨리 자.”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니까….” “기억이 안나.” “그러지 말구 가서 자.” 묵묵부답. 이 문 너머로, 녀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어서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녀석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문. 녀석이 기대고 있는 너머로 나 역시 방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제야…모범생 원희렴군이 수업시간에 조는 이유를 알겠다…. 어쩐지 가슴 뭉클해짐과 동시에 찡하기까지. “아까 말이야…니가 너무 정확한 말을 하니까, 내가 괜히 욱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거야. 맘에 담아두지 마. 미안….” “나도…있어. 노력해도 되지 않는 그런 거 나한테도 있어. 참으려고 해도 참아지지 않는 게 있고,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그런게, 나도 있어.” 작지만 또렷한 원희렴의 목소리가 들리고, 어쩌면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두고 있었을 말, 그 말이 녀석한텐 어떤 식으로 들렸을지 다시 생각하기에도 미안해서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사람,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사람…은예림…?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떼이지 않아서 입술만 깨물고 있던 때, 그 녀석이 마저 말했다. “불쌍해 하지마. 네가 한 말 잊었어. 처음부터 듣지 않았던 걸로 할테니까…불쌍하다고 하지마.” “응…그럴게.” 다시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침묵만 오갔고 그렇게 한참이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빨리 가서 자.” 내가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았는지 자라고 말한다. 그렇지만…침대까지 돌아가긴 너무 몸과 눈꺼풀이 무겁기만 하다. “그래. 너두 빨리 가서 자아…나두 자께….” “너 잠들면.” 결국 반쯤 감긴 눈으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누였고 곧 잠이 들었는데, 그 와중에 작게나마 원희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분명 무슨 말을 했는데, 이미 몽롱해진 정신 탓에 가뜩이나 작은 목소리가 더욱 희미해져 갈 뿐이었다. “여기와서 한번도 재미있던 적이 없어. 그래도…지금은 재밌다. 너랑 있으니까…전보다는 많이 웃는다.”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거 하난…나 역시 전보다는 지금이 녀석이 훨씬 좋아진 느낌이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4. 힐끗 힐끗. 그 녀석이 있나 없나 A반 복도앞 창문을 기웃기웃 거리고 있는데, 별안간 어깨위에 올라온 누군가의 손. “안녕.” “아…안녕.”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어제 급식소에서의…신수훤하던 남자아이. 또한 원희렴에게서 폭탄이라는 말까지 들은 그래도 참 괜찮게 생긴 아이. 내가 올려다보며 멋쩍어 하자 어제처럼 환하게 웃으며 묻는다. “나 보러 왔어?” “으응…?아니, 저…” “농담이야. 뭘 굳어지고 그래.” 아니 그럼 난데없이 한번 밖에 안본 놈이 저보러 왔냐는데 당황 안하겠냐. “이름이 다희 맞지.” “응.” “내 이름은 안 물어봐?” “아. 뭐니?” “재경, 신재경. 친하게 지내자. 자주자주 놀러와.” 이 남자…아무래도 나한테 관심있나부다. 물론 남학교에 한 명의 여학생이라, 잡초밭에 한 송이 들꽃스러운 취급이야 늘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다 할 직접적인 대쉬는 받고 있지 못한터라, 내심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건 아닌가 고민했는데 또 그건 아닌 듯 싶다. 푸하하하! “참, 어제는 미안했어. 희렴이도 장난이었대.” “괜찮아. 원래 그런 장난 안하던 애라 조금 의외였을 뿐이야, 신경쓰지마.” 계속 말을 걸어오길래 이런저런 말을 나눠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인 듯 복도 앞에서서 말을 주고 받고 있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두 남자의 행보에 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멀리서 휘적휘적 걸어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불쑥 교실로 들어가는 원희렴. 체, 아는척도 안하기냐! 희렴이보다 조금 늦게 걸어와 나와 재경이라는 아이를 한번씩 번갈아보며 묻는 찬휘. “둘이 알아?” “응? 아니, 지금 막 알게 됐어.” “찬휘 너도 다희랑 친해?” “희렴이 여자친구니까.” 직접적으로 ‘원희렴의 여자친구’ 라는 말은 한적이 없었던 데가, 그 아이 또한 들은 적은 없는 모양인지 잠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시 씨익 웃으며 찬휘에게 말했다. “어, 그랬어? 난 모르고 있었네. 어쨌든, 또 봐. 자주 놀러와~” 한쪽손으로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또 다른 손으로는 연신 손을 흔들어주며 교실로 쑥 들어가는 신재경. 령우 만큼 까불까불하는 성격이지만, 말을 나눠보니 또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듯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멀어진 재경일 보며 말하는 찬휘. “별로 친하게 지내지는 마.” “엥…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조금은 의아해하는 나를 보면서, 딱 한마디를 남긴 채 교실로 들어가 버리는 그였다. “넌 희렴이 여자친구니까.” 하여간 둘이 왜 친구인가 싶었다니까. 전혀 닮은 구석 없는 듯 싶다가도, 알고보면 쌍쌍으로 똑같은 세 녀석. 투덜투덜거리며 방을 들렀다가 내려 오는 길. 기숙사 쪽으로 걸어올라 오고 있던 원희렴이와 딱 마주친 순간. 내가 걸음을 멈추고 주춤주춤 녀석의 앞으로 다가섰다. “어, 어젠 고마웠어.” “응.” 그리고는 다시 날 스쳐, 휘적휘적 걸어가버린다. 뭐…저런 놈이 다 있대? 어제는 다 푼 것 같이 굴다가 또 왜 저러나 싶어서 물을까 하다가도, 꿍한 녀석의 모습이 보기싫어 나 역시 그대로 내려왔다. 얼마 내려오지 않아서 점심시간인 탓이었는지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꽤 있었는데, 여러 무리들 중에 멀리서 내게 손짓하는 누군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누군가 유심히 보았다가 그 아이가 먼저 내게로 다가와 손을 끌고 무리를 향함으로써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폈다. “어, 얘는……” “다희야. 우리 다희, 이쁘지?” 너무나도 부담스럽게, 어깨동무를 한 채로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 시키는 신재경.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색해하자, 내 머리를 파바바박 부비며 씩 웃는다. 상당히 거칠게도 부비네. 멀찍이 지켜보던 그의 친구들 마저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싶었는지 장난스레 한 마디 한다. “야, 인마. 누가 보면 니 여자친구인 줄 알겠다. 애가 싫어하잖어.” “어 진짜? 싫어?” “아니, 그런건 아니야.” “거봐. 안 싫대잖아~” 이 상황을…우야면 좋을꼬. 이런 스킨쉽은 익숙하지 않은데 말이지. 더군다나 괜찮게 생긴 남자가 이러면. 웃는게, 참 귀엽게도 생겼다고 느껴서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 애가 친구들 사이에서 내게 생각지도 못한 관심을 내비추고 있었다. 애들 사이에서 내 손을 꼭 붙잡고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재경이. 친구들 사이에서, 그 손을 빼내기도 자리를 피하기도 뭣해서 어떡하면 좋을까 조금은 난감해하고 있던 그때. “어…?” 깜짝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갑자기 손목을 잡아챈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언제나 무표정하고 있던 얼굴에, 지금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약간은 상기된 듯 볼이 붉어진 원희렴이 말했다. “가자.” 남은 채 내 쪽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재경이와 그 친구들에게 다른 말을 건넬 겨를도 없이 빠르게 내 손을 잡고 언덕 위로 향하는 희렴이. 미안함에 계속 뒤를 힐끗 거리며 녀석을 따라와 걸음을 멈추고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 갑자기 그렇게 끌고 옴 어떡해. 인사두 제대로 못하고 왔잖아.” 숨을 돌리고 올려다보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원희렴이 이내 꽉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가까이 하지마, 걔.” 그 순간, 나는 무슨 웃기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녀석 질투하고 있나보다. 어쩌면, 내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게 조금은 신경쓰일지 모른다라고. 작지만 아주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약간은 기대에 부푼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가엔 미소가 감돈채로 묻고 있었다. “왜…, 왜?! 재경이 괜찮은 애야! 착하다구. 네가 어제 식당에서 그런 말 했는데 전혀……” “너랑 안 어울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무슨 상관이여. 애가 착한데.” “안 착해, 걔.” “에이, 너 질투하는 거지? 사실을 말해봐, 뭐가 문제……” “…누구든 상관없어 보여.” 또 다시…쿵하고 내려 앉은 느낌. 왜…괜찮을만하면 다시 반복되지? 아물만 하면 다시 헐어내고 그러다 또 덮어주고. 내 기분이야 어떻든, 생각지도 않는 것처럼 자기 좋을대로 말하고 또 감동시켜서 풀어주고. 계속 그럴바에야 더는 헐어내지도 덮어주지도 않았으면 좋을텐데. “…맞아. 누구든 상관없어.”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원희렴과 눈을 맞추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흐려졌다.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 내색하지 않으니까 내 기분이, 내 마음이 어떤 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친구가 필요할 뿐이야. 허울없이 대하구 맘 편한 친구를 사귀고 싶을 뿐이라구. 내가 이 학교에서 너희 세명 아니면 누구를 알아? 어느 누가 나한테 친구로서 먼저 다가와주냐. 저렇게 말 걸어주는 애가 몇이나 된다구…. 나를 좋아해준다는데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졸업할때까지 너희 셋만 알면서 지낼까? 그랬으면 좋겠냐?!!” 정말 그 뿐이었다. 여자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 크게 바란 것도 아니잖아. 그냥…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구, 친해지구 싶구. 그랬을 뿐인데 원희렴에게는 그렇게 보였을까. 숨을 씩씩대며 잠시동안 아무것도 몰라주는 녀석을 한번 노려보곤 돌아섰다. 그런 나를 녀석은 더는 잡지도 미안하다는 말로 덮어주지 않았다. 허물기만 했을 뿐이었다. “꽤 길다?” 턱을 괴고 돌아앉은 채 말하는 령우. 시선도 주지 않고 녀석이 건네준 프린트물만 뚫어져라 읽고 있자, 대답을 기다리던 것이 조바심이라도 났는지 내 책상을 짚고 일어서며 말한다. “정말 사과 안 할거야?”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사과를 해! 자꾸 그러면 고마운 거구 뭐가 다 엎어버린다!” “알았어~ 아니면 아닌거지 왜 승질은 내구 그래.” 우연으로라도 마주치지 않은 지 3일째. 그때 그렇게 돌아선 후로 3일동안, 단 한번도 원희렴을 보지 않았다. 같은 복도니까 정말 지극히 단순한 우연으로라도 단 한번이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싶었는데…않았다. 하루에 한번씩 찬휘 혼자 와서 그냥 빨리 풀라는 말 밖에는. 게다가 령우는 어울리지 않게 자기가 정리한 공책과 프린트물을 빌려준다. 내가 꽤 불쌍해보이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이번만큼은 조금도 굽힐 수 없는 나는 아랑곳 않았고 결국은 밥도 녀석들과 따로 먹게된 상태. 그 3일 동안…재경이와 그 친구들과는 전보다 많이 가까워졌다. 물론 다른 아이들과도. “저 깝죽이 또 왔어.” “아무렴 너보다.” 령우가 ‘깝죽이’ 라도 부르며 이맛살 찌푸린 채 혀끝을 차는 쪽을 돌아보면 생긋생긋 웃으면서 우리반으로 걸어들어오는 재경이가 있다. “뭐하구 있었어?” “아니 그냥 다음시간 숙제 좀.” “에이, 재미없게. 매점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결국 재경이의 손에 이끌려 교실을 나가자, 못마땅한 듯 인상을 한 가득 쓰고 우리가 나갈 때까지 쳐다보는 령우다. 겨우 하루 이틀 일인데 이제 익숙하지. 3일 간, 매 쉬는 시간마다 거르지 않고 찾아와주는 재경이. 덕분에 참 고맙기도 하구, 즐겁기도 하구. “뭐 먹을래?” “움, 네가 사는 거라면 아무거나.” 매점에 앉아 멍하니 거칠게 빵을 물어뜯고 있는데, 곰곰이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재경이가 말한다. “딴 애들 우리가 사귀는 줄 안다?” “그래?” 그거야…요즘들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으니까. 더는 별 감흥없이 마저 빵을 뜯었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는지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 묻어나는 얼굴로 조금 더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하는 재경이. “그래서 말인데, 우리 그거 기정 사실로 만들까?” “푸켁, 무…뭐어?” 그제야 놀란 내가 먹던 빵을 떨어트린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면, 내 코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넌 싫어? 나는 솔직히, 너한테 관심 없었으면 이러지도 않아. 생각할 시간, 필요해?” 당연히 생각하고 말 것도 없지. 나는, 1년여의 계약에 묶여 있는 몸. 자유로울 수 없을 뿐더러…딱히,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차마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갈게.” 분명,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해야 하는 것이 옳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괜찮은 애가 나를 좋아해줄 일이 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만약에 정말 그런거라면, 계약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라도 잡아야 하지 않을까, 내심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계단을 올라 복도를 가다가 우연히, 그래. 이번에야 말로 정말 우연히. 우리반에서 걸어나오던 원희렴과 잠시동안 눈이 마주쳤다. 3일전이었다면 평소와 다름 없었을텐데 약간 울컥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이상한 걸까. 나도 모르게 고갤 숙여버린 채 스쳐지나 빠르게 교실로 걸음을 향했다. 못본 지 3일 밖에, 아니 3일 씩이나 됐는데 별로 변한 건 없지만 참 가슴 뭉클한 느낌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나 있을때는 우리반에 온 적, 단 한번도 없으면서. 느린 걸음으로 내 자리로 오자, 그 새 책상에 놓인 공책과 프린트물. 평소처럼…령우인가 싶었지만, 녀석은 자리에 없었고 대뜸 옆에 있던 아이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이거 누가 놓고 간 건지 알아?” “어…그거 금방 희렴이가 놓고 갔는데. 나가다가 못봤어?” 뭐가 진짠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은 순간에 어리둥절 해하다가, 때마침 교실로 들어오는 령우를 보자마자 물었다. “이거, 정말 네가 준 거야?” 내 손에 들린 공책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어하는 령우. “아니 딱히…” “정답만 말해, 정답만. 너야, 아니야?” “희렴이지.” “이…못된새끼야!! 왜 말도 안해줬어? 어쩐지 네가 이런 걸 해줄리도 없었다 싶었긴 했지만.” “희렴이가 말하지 말랬는데 어떡하냐!”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반령우가, 저렇게 노트필기를 잘 할리 없다는 것부터가 확실한 사실인데. 령우를 향해 한대 때릴 듯한 시늉을 하고 A반으로 뛰어갔지만, 교실로 들어간 건 아니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디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매점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재경이한테 확실히 말해야지. 처음부터 고민도 하면 안되는 일을, 한시라도 빨리 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달려 매점으로 내려가자 아까 함께 있었던 자리에 재경이가 있었는데 아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자리에 나 대신 재경이의 친구들이 있었을 뿐. “재겨……” “걔 벌써 89% 넘어왔어.” 이름을 부르다가도 친구들과 낄낄대며 장난치고 있던 재경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 역시 이름을 부르던 것도, 다가서던 것도 잠시 멈춰섰다. “웃긴다. 사귀자는데 대답도 안 했는데 뭘 89% 넘어와?” “야, 야. 그건 튕기는 거지. 지도 여자인데 그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봐. 이 형님이 끝내주는 밤을 보내고 그 소감을 말해주시마.” “키킥, 이 새끼 또 오바한다. 근데 걔는 생각있어 보이고?” “지 혼자 여기 온거서부터 생각이 있으니까 왔겠지, 그걸 입아프게 설명해야 아냐, 쪼다새꺄.” 착각쟁이 강다희. 하나부터 열까지, 오만가지 착각을 하고 사는 강다희. 그러니까 이렇게 놀라고 새삼 상처 받는 거잖어…. 역시…, 역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나는 그런 아이로 보였을까. 순간 화가 치솟아 소리라도 치고 난동이라도 부릴까 생각했다가 지금 이 상태로는 제정신이 아닐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비틀 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돌아섰을 때였다. 나보다 더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주먹을 다잡아쥐며, 그 아이들 쪽을 바라보고 선 원희렴. 그 뒤에 한숨을 작게 쉬며 고개를 내젓는 찬휘.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이전에, 빠르게 그 아이들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신재경의 멱살을 들어올렸다 바닥으로 거칠게 내리친다. “뭐…뭐야?!” “병신아 나가죽어.” “…하지마.” 작게 중얼거려서 녀석이 듣지 못했음이 불구했을텐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입은. 사실은 죽지 않을만큼만 패줬으면 좋겠다고 한 켠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연신 비명을 지르는 매점 아주머니와, 상황을 말리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기만 한 아이들. 거칠고 둔탁한 음들만 들려오는 가운데 내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마!!!!” 매점안에 가득 울려퍼진 내 목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았던 신재경과 그의 친구들. 한 손으론 멱살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그 아이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으려는 순간, 내 목소리에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턱끝까지 숨이 차오른 탓에 숨을 몰아쉬며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마. 하지말아….” 그 한 마디만을 한 채, 그대로 돌아서 달렸다. 그래도 청승맞은 눈물은 나오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얼마 가지 않아서, 건물을 나오자마자 빠르게 내 뒤를 쫒은 원희렴. 내 어깨에 올려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녀석 때문에, 애써 괜찮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힘겹게 입을 뗐다. “네가 거기서 그러면, 더 비참해지잖어. 그런 정도도 눈치 못채고 친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거, 인정해 버리잖어. 그런거…싫단 말이야.” 그렇게 참아왔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내려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우는 내 머리 위로 그 녀석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처음엔 천천히 머릴 슬어주던 그 손길이 이내 내 머리를 꼭 끌어안아 품에 가둔 채 말했다.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게.” 정말이지 그 순간만큼은…여자친구니 뭐니, 다른 사람은 다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소리없는 울음만 터져나왔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느낀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 손길이 참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 나를 위로하려고 다독여 주는 원희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두 번이야, 은예림. 너 이외의 사람 일 때문에 주먹 쓴거, 벌써 두번이라구….’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5. “다음 보기 중에 성학십도와 성학집요도의 차이점으로 옳은 것은?” “4번! 내가 이건 머리 터져라 외웠다구. 4번 확실해!” “맞았어.” “어이, 이보쇼….” 크게 한숨을 내쉬며 나와 원희렴의 어깨를 두드리는 령우. 덕분에 문제풀기를 중단하고 올려다보자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말한다. “너희가 시험 공부하는 건 상관 않겠는데…, 왜 남의 반에 와서 이러는 거야! 여기 애들은 조용히 놀고 싶으니까 딴 반 교실 가서 해. D클래스에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냐.” 그도 그럴 것이, 교실 안에 있던 모든이의 시선이 당장 나가라는 듯한 눈치를 주고있다. “그보다 너 다음시간이 음악인 건 알고 있냐?” “아, 음악시간이야?” 대뜸 묻더니, 또한 대뜸 대답하는 날 보고 지그시 뜬 눈으로 말한다. “그럼 너…이번 음악시간에 가창 수행평가 보는 건 알구 있냐?” “아? 수행…뭐어?!! 다음 주 아니었어?!!” “내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너무 태평해 보이더라니. 어쩔거냐? 가사는 다 외웠어?” “이런 니미럴. 어차피 뒷번호니까 금방 외울 수 있겠지?” “뭐 부르는데?” “신고산타령.” “……-_-” 급하게 음악책을 펴들고 있는데,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음악책을 뒤척이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던 원희렴이 잘보라는 입에 발린 인사조차 않고 더럭 교실을 나간다. “종쳤어 빨리와.” 그런 녀석을 야속해 할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음악실로 향했다. 낮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거리며 가사를 외우고 있는 아이들 틈바구니에 껴서 내 자리에 앉았고 곧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인사를 받으시곤 잠시 말이 없다가 출석부를 뒤척이며 말씀하시는 음악 선생님. “오늘 가창시험 보기로 한 거 맞지? 자, 그럼…이번엔 뒷번호서부터 봐볼까? 31번, 강다희…?” 재수가 없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아직 몇 페이지인지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해 교과서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하물며 이번에 끝에서부터 보자는 말씀과 함께 선생님께서 부르신 이름이 정녕 내 이름이란 말인가…. “다희야? 왜 대답이 없어? 강다희 없니?” “아뇨, 저기 있는데요.” 맨 뒷 자리에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내게로 아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고 낮게 몸을 숙이고 있는 웃기는 모습으로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으니… “뭐하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다희가 아니고 싶었습니다.” “재밌는 아이로구나. 어서 나오렴.” 옘병!! 결국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혼자이자 처음이란 것은 이토록 주목 받기 마련이다. 씨뻘게진 얼굴로 앞에 섰는데 박수를 쳐주며 또렷히 나를 보아주고 있는 남자 아이들의 모습이란 참…. 어서 시작하라며 어깨짓을 하시는 선생님과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가사를 아직 외우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대로 흥얼거려 봐야 하는지 붉어진 얼굴로 달아오를 쯤,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소리. 피아노 소리에 묻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였지만, 선생님이 반주를 쳐주느라 정신 없는 그 때. ‘퉁퉁퉁’ 하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들어보이자 보이는 건…조금은 작은 크기의 창문에 딱 들어맞는 8절지 스케치북. 그리고…거기에 적힌 신고산타령의 가사. 급하게 쓴 듯, 삐뚤삐뚤 한 글씨지만 신경썼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글씨크기라던가…다음 소절. 혹은 ‘메기는 부분’ 이라는 깜찍한 배려. “뭐해 안 부르고?” 창문과 반대편으로 돌아앉아 피아노를 치시느라 창가의 상황 따위는 알 리 없는 선생님께서 재촉하시고. “아, 예!” 조금은 먼 거리에 약간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글씨를 힐끗거리며 떠듬떠듬 노래를 불렀고, 나의 눈이 가는 곳 따라 아이들 역시 창가를 한번 훑어보고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작게 수군거리며 웃기 정신 없다. 간신히 그 위기를 모면하고 내 자리로 들어갔을 때. 빠르게 스케치북을 내리고 복도를 달리고 있는 그 누군가의 발소리. 얼굴을 못봤어도 날 위해 저 정도의 센스를 발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글씨체는 당신의 노트를 빌리면서 수도 없이 봤다고. “아주 열남 났더라 열남났어. 니가 시켰냐?” 모두들 다 본 광경이니 물론 이 녀석도 본 듯 못마땅한 얼굴로 원희렴이 사라져간 창가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묻는 령우. “그럴리가. 내가 뭐 되냐, 시켰다고 다 하게!” “그건 그렇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렴이가 먼저 나서서 저런 깜찍한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녀석의 친구마저 생각하지 못했다는 깜찍한 행동에, 내가 감동 받지 않았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게 아닐까. 어쨌거나 확실히 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어째야 할지 난감하다. 그렇게 어영부영 고난의 시간이 끝나고 음악실을 나서서 교실로 돌아가는 복도. 모두들 떠들며 돌아다니거나 장난을 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복도 한 가운데 손을 들고 서있는 한 남정네의 모습을 내 눈길을 잡아 끌었으니, 그가 곧 원희렴이렸다. “뭐해, 거기서?” 나보다 먼저 그 흉악한 얼굴을 더욱이 찌푸린 채 령우가 물었고 고갤 숙이고 있다가 앞에 서린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에 올려다보는 원희렴.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민망한 듯 다시 고갤 숙인다. 대체 뭐땜시 이 잘난 인간이 교실에서 쫒겨나 쉬는 시간까지 벌을 받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굳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지금 녀석 옆에 놓인 스케치북 하나로… 모든걸 알 수 있었다. “시험…잘 봤어?” 그러면서도 넌지시 묻는 원희렴. 아따…그걸 왜 또 묻는지 그 놈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응 덕분에! 너 아니었으면 정말…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그 스케치북 나 아닌데.” “…스케치북이라고는 안 했는데…?” “…….” 나는 분명 뭐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면 자기가 아니라고 잡아땔지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 말하고도 아니다 싶었는지 빨갛게 달아오른 녀석의 얼굴. “있다가 점심시간에 봐!” 무안해 하는 녀석을 생각하며 썩은 얼굴로 유심히 우릴 바라보고 있는 령우를 잡아 끌고 교실로 향했다. 내게 옷깃이 붙들린 채로 걸으면서도 계속 뒤를 바라보며 희렴이에게 썩은 표정을 보여주는 반령우. 희렴이 역시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교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뾰루퉁한 얼굴로 말한다. “아주 둘이 쇼를 해요 쇼를.” “령우야.” “왜?” “나 말이다…….정말 좋아지려나 봐.” “무슨 소리야, 그게?” 별로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니까…여태껏은 그냥 호감이었다고 친다면 지금은 정말 좋아지려는 거 같은 기분…있잖아, 그런 거. 원래 첫눈에 반한다는 건 안 믿었거든? 뭐…처음부터 괜찮은 녀석이었지만 어째 보면 볼수록 좋아지는 그런 거. 그런 거 있지.” “뭐야. 너희 원래 사귀는 사이면서 새삼 더 좋아지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에이,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뭔가 좀 다르다니까? 계속 심장이 뛰구 말이야.” 아직두 뭐가 그렇게 좋다구 벌게진 얼굴로 웃는 날 보더니 이내 빠르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령우. “얼라? 왜 그래~ 야, 나 좀 봐봐.” 사람 무안하게,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는 반령우가 또 민망하여 다시 녀석 앞으로 서자 또 뒤로 고갤 돌려버린다. 그렇데 고개 돌리기를 반복하길 몇 번, “우씨, 왜 그래?!” 자꾸만 미친 사람 취급하듯 눈 맞추기를 꺼려하는 녀석의 얼굴을 잡고 내 쪽으로 확 틀었는데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기분 좋아 보이지 않는 표정의 령우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놔.” 생각지도 못한 녀석의 말과 표정에 슬그머니 손을 놓아버렸고 더럭 걸음을 바삐 걷는 녀석. “야, 야아~ 왜 그래~ 내가 뭐 말 잘못했어? 응?” 녀석을 따라 쫄쫄쫄 쫓아가며 묻는데도,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빠르게도 걸어간다. 나 역시 빠르게 녀석의 뒤를 쫓았구 그렇게 저벅저벅 걷던 녀석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버리자 뒤꽁무니만 보고 걷던 내가 녀석의 등에 강하게 얼굴을 부딪히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니. “아얏! 왜 갑자기 서구 그래? 아구…, 내 코야.” 코 끝 찡한 아픔에 코를 어루만지며 묻는 나를 향해 돌아서서 내 키에 맞게 허리를 숙이며 말한다. “사람 염장 좀 지르지 마라. 니들 닭살 떠는 걸 내가 옆에서 지켜봐야하겠냐고~? 앙? 쫒아 오지 마. 나도 간만에 혼자서 고독이라는 것 좀 즐겨 보자.” 배배 꼬인 투의 녀석 말에, 왠지 안심이 됐다고 하면 이상한 걸까? 어쨌거나 얼굴과 목소리에서 우러나오는 꼬움은 어딘지 모르게 날 안심시킨다. “하하하~ 알았어, 잘 댕겨 와!!”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6.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마지막 시험날. 앞에 시험은…너무 망해서 도무지 손 쓸 기미조차 보이지 않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암기과목인지라 그나마 오늘 하루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사각사각. 무언가를 눌러쓰는 소리와 교실을 돌아다니며 감독하고 있는 선생님 발소리 외에는 조용한 교실 안. 그리고 한참만에…시험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아아아아~~” “다들 수고한 만큼씩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만큼’ 만이라니…잔인하다. 물론 그보다 더 잔인한 건, 참혹스러울 정도로 잔뜩 구겨진 내 시험지이지만 말이다. “잘봤냐?” 잘 본 모양인지, 한 손엔 시험지를 들고 내 앞자리에 털썩 앉는 령우. 아니나 다를까, 넌지시 들여다 본 그녀석의 시험지엔 동글뱅이가 여러개. “그…그럭 저럭!” “이번 시험은 쉬웠단 말이지. 아마도 다음달 반배정에서 이 형님이 너랑은 헤어질 듯 싶다.” “제발 그래줘라. 응?” 그 가뜩이나 야비하게 생긴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면서 잘난 체 하는 령우를 돌아서 가방을 싸고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돈이 깍이는 건 물론이구…그 녀석이랑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도 뻔해. 아무튼 자꾸만 한숨이 나오는 건, 깍이는 돈 때문이지 지키지 못할 약속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비 내리는 시험지를 책상 깊숙이 넣어두고 기숙사를 나와 교실로 향했다. 대충 청소가 끝난 교실에 아이들이 모여 앉아 시험에 대해 토론했고, 곧 한 손에 하얀 종이를 잔뜩 드신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다들 자리에 앉아라. 중간고사 가채점 점수 알려줄게.”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벌써 점수가 나왔을 줄이야. 아이들 모두 아우성을 지르며 차례차례 성적표를 받아들어 제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이 불리고, 천천히 걸어나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떨리는 손으로 성적표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곧, 내 얼굴이 잿빛이 되어버 렸음을 말할 것도 없었다. “이 형님은 이달로써 너랑 빠빠이다. 넌 몇 등이야?” 그 야비한 낯짝을 깝죽대며 내 성적표를 흘끗 거리는 반령우. 어쩐지… 성적이 나빠지니까 사람 성격도 나빠지는 듯, 괜히 저 모습에 화가 나려고 한다. “몇 점 이상 되야 반 옮길 수 있어?” “점수야 그때마다 다르니까…아마 반에서 15등 안에 들었으면 적어도 C클래스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녀석의 말에 눈치를 보며 다시 들여다본 성적표. 반등수 14등. 이거…오르긴 올랐으니까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입술이 다 움찔거린다. 분명 처음 들어왔을 때 보다야 한결 좋아진 성적일 테지만, 자랑스러워하기엔 턱없이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 기어코 내 움찍 거리는 입을 본 령우는 이맛살을 찌푸리기까지. 그래도, 일단 D클래스는 벗어났다. 그렇지만 나보다 더 잘본 듯 기세 등등하던 저 반령우씨는 몇등이나 됐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몇 등이야?”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갑자기 기고만장 해진 얼굴로 턱을 치켜드는 녀석. 설마 1등은 아니겠지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도 뭔가 석연찮은 구석은 어쩔 수 없다.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녀석이 자랑스럽게 성적표를 내 앞으로 내밀며 한 한마디. 참 어처구니 없는 한 마디. “이 몸이 이번에 15등이시다. 푸하하하~” 그 말을 듣기 이전에 내 눈으로 확인한 그 녀석의 성적표는 정말이지 사람 김새게 만들기 충분했다. 세상에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을까. 다행이랄까, 실망이랄까. 녀석이 나보다 성적이 좋다면 그것도 비참하고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나는 실망한 점수를, 녀석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참 안쓰럽다. 겨우 1등차로 앞선 나도 그다지 뿌듯하진 않지만, 더 웃긴 건 저 점수를 받고 좋아라 한 이 녀석의 속내. 내 코앞에 들이대있는 부담스러운 시험지를 밀쳐낸 채 말했다. “이놈아 이거받고 좋아하는 너도 별 볼일 없다.” “뭐어? 넌 몇점이길래?!” “그래, 몇점이야?” 령우를 밀친 채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는 내 앞에, 언제 온 건지 내 책상위에 자기 가방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는 원희렴. 세상에. 갑자기 봐서 그런지 심장이 다 떨린다. “엥? 아니, 언제왔어?” “몇 점이야? 올랐어?” 내 대답엔 대꾸도 없이, 내 손에 들려있는 성적표로 시선을 주는 그 녀석.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가 대답이 없자 원희렴이의 느린 손이 천천히 내 손에 있는 성적표께로 다가온다. 아마도…직접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난……. “아구아구…….” 거침없는 내 행동에, 허공에 멈추어버린 희렴이의 손과 령우의 놀란 눈. 그도 그럴 것이, 원희렴이 내 손에 들린 성적표를 가져가려 한 순간, 재빠르게 입안으로 쳐넣었다. 우걱우걱 소리를 내며 마른 종이를 씹고있는 내 입. “악, 쟤 미쳤어!!!”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반령우. 그렇지만 이런 성적표를 녀석에게 보일 바에야 차라리 먹고죽자는 심정으로 태어나 난생 처음, 우걱우걱 종이를 씹었다. 거침없이. 그런데 그런 나보다 더욱 거침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 내 턱주가리를 붙잡고 또 다른 한손으로는 억지로 내 입을 벌려, 침범벅이 되어버린 그 성적표를 꺼내고야 마는 원희렴씨. “으아악, 얘도 미쳤나봐!!” 미처 이럴 줄은 몰랐던 원씨의 행동에 침이 흐르는것도 모르고 흉하게 입을 벌리고 섰는데, 막상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침에 젖은 채 꼬깃꼬깃 씹힌 성적표를 펼쳐 들었다. 나의 침으로 인해, 잉크가 번졌을텐데도. 가만히, 그리고 묵묵히 성적표를 보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원희렴. 그때까지 멍해있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린 채, 녀석의 손에 들린 성적표를 다시 되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핑계 아닌 핑계. “B클래스에…못 들어서, 그래서…….” 사실, 반령우 보다야 낫다는 생각에 스스로는 뿌듯하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 녀석 앞에서는 당당하게 내보이지 못한 채로 꼬깃꼬깃, 작게 접힌 채 내 손에 들려있는 침범벅 성적표. 령우 앞에서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이 녀석은…달라. 뭔가 좀 더 잘 보이고 싶고, 나한테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어. “올랐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했을까. 생각지도 못했었던 다정한 손길로 고개숙인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원희렴이 말한다. “감출 거 없어. 노력했잖아. 열심히 한 만큼 기뻐해도 돼. 잘했어.” 목각인형 같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를 띠운 체 바라보는 그 눈빛에, 역시…안 좋아할래야 안 좋아할 수 없는 녀석.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작게 웃어보였고 그걸 보고 있던 망나니, 옆에서 한마디 한다. “기뻐해도 된다니까 바로 입 벌어지는 거 봐라~” “그러게.” 이것들이 또 쌍으로 가지고 노네…-_-기뻐해도 된다며 개봉아! 슬쩍 곁눈질로 령우를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울려퍼지는 방송에 내 이름. [알립니다. 교내에 있는 강다희 학생은 방송을 듣는 즉시 교무실로 와주기 바랍니다. 아아, 다시 한번…….] 교실 안에 울리는 내 이름에 멍해진 나와, 옆에서 방송을 들은 령우의 한 마디. “너 뭐 잘못했냐? 이를테면 컨닝이라던가.” “이씨, 재수 없는 소리하고 있어! 근데 정말 왜 부르지? 암튼 다녀올게.” 령우의 말에 정말 걱정에 들어찬 눈으로 나는 바라보는 희렴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왜 날 부르는 거지? 왠지 모를 긴장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교무실에 들어서자 인기척에 시선을 옮기신 담임선생님이 날 보며 말한다. “어, 잘 왔다. 전화 와있거든? 빨리 받아봐.” “전화요?” “응. 꼭 좀 바꿔달라시는데 어서 받아봐라.” 전화라. 세상에 날 찾는 전화라…. 의아해하며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었고 그 너머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다희니?] “원장님?” [그래. 잘 지내고 있니? 어쩌면 전화 한 통 없구나.] 여기 와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지낸, 내게는 어머니 같은 분. “죄, 죄송해요. 너무 정신없어서 깜빡했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어때 거긴 지낼 만 하니?] “네. 편해요. 친구두 많이 생겼구요.” 본의 아니게 남자친구들이지만요. [그래, 다행이구나. 그냥 오랜만에 네 목소리도 들을 겸, 또 내일은 네 생일이잖니. 만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전화했어.] “아 맞다, 생일!” [저런, 잊고 있었구나?] 강다희, 정말이지 여기 와서 경황이 없긴 없나보다. 내가 잊지 않는게 있다면 그것은 식사시간과, 취침시간. 그리고 내 생일이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주위를 빙둘러 내 눈에 띄인 교무실에 걸려있던 달력 속 내일은 나의 18번째 생일. “헤헤…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머, 얘가 남처럼 말하는 기는. 미역국은 못 끓여주겠지만 그래도 끼니는 거르지 말아라. 그리고 소포 붙인게 있으니까 늦어도 다음주엔 도착할 거야. 옷 몇 벌 챙겨 넣었어.] 아직도…어머니처럼 신경 써주시는 원장선생님의 다정함에 새삼 감동한다. 또 한참 동안이나 이 곳에 대한 이야기와 보육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흘끗흘끗 쳐다보는 선생님들의 눈치에, 다음엔 꼭 제가 먼저 전화를 하겠노라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부랴부랴 교무실을 나오자 문 앞에 서있던 원희렴이 대뜸 묻는다. “내일이 생일이야?” “어? 넌 또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크게 얘기하는데 어떻게 안 들려.” 별로 듣고싶지는 않았었다는 듯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본다. 거 참 할말 없네. 어쨌거나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 보였고 잠시동안은 말이 없던 그 녀석이 이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어디 가고 싶은데 있으면 말해봐.” “왜? 데려가 줄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쫓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데이트란 말이지, 데이트. 단 둘이 있게 될 것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입을 틀어막고 참았다. “근데 령우는?” “좀 자겠다면서 먼저 갔어.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모양이야.” 그래…열심히 했나보더라. 다시금 말없이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딱히 어디에 가고싶다고 말하지 못해, 내일까지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로비로 들어서자 자기 방쪽으로 올라가며 말하는 희렴이. “있다가 저녁 먹으러 가게 내려와. 홀에서 기다릴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올라갔다. 할일 없이 빈둥빈둥 침대에 누워서도 곰곰이… 어디를 갈까 생각중. 특별히 어디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냥 함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나쁘지 않다. 저녁 시간, 대충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나가자 먼저 나와 있는 희렴이와 찬휘. “엥? 령우는 아직도 자?” “그 녀석, 감기 몸살인가봐. 아까까지는 괜찮더니 지금은 열이나서 건강실에 누워있어.” “건강실? 그게 어디야?” “응, 양호실 같은 곳. 아픈 애들 쉬는 곳이야. 저녁은 먹으랬는데도 생각없다고 더 자겠대.” 아까까지만 해도 실없이 웃던 녀석이 아파 누워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 참 오묘하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어쩐지 맨날 주접을 떨던 사람 하나가 없으니까 모두 말없이 밥만 먹을 뿐. 그 녀석 그거, 15등 하겠다고 여간 공부했던 모양인데 그 15등에 그렇게 좋아하던 녀석의 얼굴이 생각나 차마 몇 숟갈 들 수 없었다. “저기, 나 먼저 일어날게. 마저 먹어.” 먼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 때문에, 당황해하는 찬휘와, 또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원희렴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0시. 행동개시. 선생님들은 애들 자습시키느라 정신없는 그때, 몰래 방을 빠져나간 나. 조심조심, 선생님들 눈치를 봐가며 들어온 곳은 식당 안. 이미 모든 정리가 끝나 불이 꺼진 식당안엔 아무도 없었고, 문을 잠그는 시간은 11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몰래 주방안으로 들어왔다. 걸리면 징계가 만만치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쪼그리고 앉아, 한 공기 분량의 쌀을 퍼다 죽을 쑤기 시작했다. 혹여, 내가 들어와있다는 것을 눈치챌까 그 깜깜한 주방안을 오로지 달빛에만 의지해가며. “아씨, 소금은 어딨어…이건가?” 그렇게…들어간 것이라고는 일체없는 흰죽에 대충 소금을 쳐서 힘들게 끓인 한 그릇의 죽을 들고는, 또 다시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그 건강실이라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다행히, 이 시간까지 그곳에 있는 것은 그 녀석 혼자 뿐이었는지 그 넓은 방안에 혼자 누워 있는 령우.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거칠게 숨을 색색대며 잠이 들어있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 어쩐지 엄마라도 된 듯이 가슴 짜해진다. “야, 아직두 자냐?”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쿡쿡 찌른 이마에는 땀이 흥건한 걸 보니 꽤병은 아니었는 듯, 이 녀석. 정말 아픈가보다. “야아 령우야~ 일어나봐. 내가 왔다구.” 깨우는 게 미안해서 귓가에 대고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올려다 본다. “다희…?” “그램마. 아까까지 멀쩡하던 녀석이 웬 몸살? 일어나봐,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힘에겨운 듯,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는 령우. 언제나 뺀질뺀질 하던 그 곱상한 얼굴이 반나절 만에 많이도 상했다. 그새 핼쓱해진 얼굴에, 퀭해진 눈가하며 저 초췌해진 입술하며. “많이 아퍼?” “응. 죽겠어.” 가만히 그 어둠속에서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이내 식을세라 품고 왔던 죽을 내밀었다. 물끄러니 죽을 보고 묻는 령우. “뭐야?” “뭐긴 뭐야 죽이지. 빨리 식기 전에 먹어.” “그게 아니라 이게 어디서 났어….” “말도 마. 내가 이거 끓일라구 몰래 주방 들어가서 애 좀 먹었어. 얼른 먹어, 식는다 야.” 재촉하는 나를 보고도 한참 죽그릇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식당에서 훔쳐온 숟가락을 받아든 채, 희미하게 미소띤 얼굴로 말한다. “바보. 걸리면 퇴학당할라구.” “에엑? 착한 일 하는 건데, 아무렴 퇴학까지 시키겠어.” 쪼그리고 앉아 지커보는 나를 봐서인지 힘겹게 한 입 먹는다. 그리고 곧,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가만히 내 이름을 부르는 령우. “다희야.” “응, 왜? 맛있어?” “죽을래…?” “뭐, 뭐야? 아니 퇴학을 무릅쓰고 죽 쒀온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야?” 부루퉁한 얼굴로 발끈하는 내게, 더 이상의 대꾸없이 먹던 죽을 내밀며 말한다. “니가 먹어봐.” 아프다는 놈이 고마워는 못할망정 하는 말이 저거라니. 잔뜩 삐진 얼굴로 녀석이 건넨 죽을 받아 한 입 먹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웁, 퉤!” “뭘 넣은 거야?” “우악. 소금을 넣는다고 했는데, 너무 정신없어서 설탕을 넣었나 봐….” 선생님한테 들킬세라 불도 켜지 못한 채, 나는 바닥에 쪼그려, 녀석은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단 둘 뿐인 방 안. 그렇게 우리 둘은 소금 대신 설탕을 넣은 죽그릇을 가운데 놓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내일 주말인데 뭐 할 거야?” “뭐하긴. 그냥 기숙사 안에 있어야지 뭐 할 거있냐.”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잠깐 얼굴에 화색이 도는 얼굴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반령우. “그럼 같이 영화보……” “맞다! 내일 희렴이랑 데이트 하기로 했다. 둘이서 하는 첫데이트! 헤헤…그러고보디 어디가고 싶은지 말하랬는데, 아직 못 정했네. 이따 정해야지. 아, 마저 하려던 말이 뭐야?” “…아니.”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말을 끊은 게 기분이 나빠서인지, 정말 별 다른 할 말이 없었던 건지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숨소리가 거칠어진 령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에휴, 아직도 열이 좀 있네. 아마 푹 자면 괜찮아 질 거야. 이제 그만 쉬어. 난 갈……” 이제 그만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가만히…제 이마 위에 얹어진 내 손을 꼭 잡는 령우. 생각지 못한 행동에 멍해져 있는 내게 말한다. “넌 보면 볼수록 이뻐.” “뭐…뭐야. 갑자기 뭔 뚱딴지 같은 소릴 하구 있어!” “진짜야. 강다희 보면 볼수록 이뻐.” 평소였다면 그냥 등짝을 한대 쳐주고 넘어갔을텐데, 장난으로 넘기기엔…진지한 말투. 그리고 마주친 녀석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어서, 민망해져 버린 상황. “자, 장난하지마, 인마. 그럼…푹 쉬어. 잘 자!” 빠르게,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게 잡힌 손을 밀어내고 건강실을 나왔다. 후아. 반령우가 반령우 같지 않은 순간이었다. 아직도 발갛게 달아오를 볼을 어쩔 줄 모르며 내 방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콩닥콩닥 뛰고 있는 심장은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내가 나간 후에도, 여전히 문을 바라보며 혼자서 나직히 중얼거리는 령우의 얼굴은 분명 슬펐을 거라 생각한다. “강다희…남자도 여자처럼 별 것 아닌 거에 감동하고 쉽게 사랑에 빠져. 그렇지만 쉽게 헤어나오지는 못해. 아니, 다른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더라도 나는 그래.”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7. 이상한가? 역시 이상하다. 아무리 보아도 거울 속의 나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 없다. 원래…옷 같은 거 신경 쓴 적은 없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걸까. 계속 이 옷, 저 옷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박진감 넘치는 발소리와 함께 벌컥 열리는 방 문. “강다희, 너 오늘 생일이었어?!!” 들어온 자와 있었던 자. 둘 다 할 말이 없어졌다. 반령우 저 자식 저거, 이런 꼴일 때 내 방에 들어온 게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또 다시 배때기까지 옷을 들추고 선 나와, 반쯤 내 방에 몸을 들이다 멈춰선 령우. 나보다 더욱이 굳어 있는 령우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너 정말 죽어볼텨…?” “잘못했어!” 말과 함께 빠르게 문을 닫는다. 그래도 저렇게 쿵쾅대면서 오는 거 보니까, 나았다보다. 어제까지는 죽을상을 하고 있더니만 지금은 말짱하잖아? 그나저나 더 이상 옷도 없는 건가? 서랍이면 서럽, 장롱이면 장롱 다 뒤져 봤지만 변변찮은 옷 한벌 없는 듯. 마구 헤집어낸 방 안엔 어제 본 시험지들과 계약서. 여러 가지 옷 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결국 맘에 안드는 꼴이지만 더 갈아입을 옷도 없어 대충 옷을 갖춰입고 방문을 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들어오는 녀석. “생일인 거 왜 말 안했어?” “아니 뭐…오늘 말하려고 했어~ 왜 선물이라도 준비했어?” 눈망울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나를 조금은 부담스러워하는 기색과 더불어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듯 눈을 맞추지 못한다. “아니 지금 막 알았어.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 바보야.” “됐네요. 그냥 있다가 매점에서 맛있는 거나 사줘. 그보다 몸은 괜찮아?” “응 뭐…넌 데이트 가냐?” “응. 푸하하, 다녀와서 감상 말해줄께. 있다가 봐!” “야! 늦어도 9시까지 들어와.”“9시? 왜?” “그런게 있어. 알았지? 꼭 9시에는 와야 해?” “알았어. 아, 나갈 때 방문 좀 잠그고 나가줘. 있다보자!” 대충 알겠다는 듯이 손짓하며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다희가 내려가고 약간은 부루퉁한 얼굴로 쳐다보며 손을 흔들던 령우가 방을 빙 둘러봤다. “아유, 무슨 계집애 방이 이래.” 그러다가 문득 시험지들과 같이 쌓여 있던 한 장의 종이에 그의 시선이 꽂혔고 이내 손을 뻗어 들린 하얀 종이는 ‘계약서’ 란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었다. ※ “어딜 가고 싶은 지 생각해 봤어?” “아, 내가 생각은 해봤는데 말이야. 굳이 멀리 가는 것보다 어딜 가든 상관없을 거 같아. 어차피 쉬는 날이잖아. 그냥…나 밥 사주구 시내 구경 시켜줘. 그거면 돼.” 씨익 웃어보이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쓰며 말했다. “오케이.” 신이 나서 히죽이죽 웃으며 녀석의 뒤를 쫒았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아이들, 모여서 놀러 가는 아이들이 다양하게 줄지어 서있다. 이 인원만 봐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듯… 늘어진 줄을 보고 한숨을 내쉬는 내 머리를 슥슥 스다듬으며 말한다. “금방 갈 수 있어.” 빨게진 얼굴이 들킬까 고갤 푹 숙이고 끄덕였다. 확실히…나쁘진 않은 기분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니 썩 좋지도 못한 듯. 애두 아니고 왜 머리를 스다듬고 그런담?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로 동생 데리고 놀러나가는 오빠의 기분이라도 된 듯 보여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불퉁해졌다. 제길. 전엔 이런 거 신경두 안 썼는데 이제 별 걸 다 신경쓰게 생겼잖아. 그렇게 두 대의 버스를 놓친 후에야 간신히 낑겨 타고 도착한 시내. 길게 나있는 도로밖에 없는 학교와는 많이 다르다. 시끌벅적하기도 하고, 사람이 사는 것 같달까. “길 잃지 않게 조심해. 사람많다.” “걱정마러~ 내가 애두 아니구.”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두리번 두리번. 이뿌고 잘생긴 사람들은 다 서울에 살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듯 날씬하고 이쁜 것들이 참 많기도 하다. “오! 예쁘다.” 내 말에 멈춰서서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본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눈에 띤 어느 가게 진열장안의 구두. 높은 굽은 아니지만, 낮지도 않은 굽. 화려하지는 않지만, 결코 밋밋해 보이지도 않게 작은 비즈장식이 달린 베이지색의 슈즈. 쇼윈도에 찰싹 붙어서 입을 벌린 채로 침 흘리는 것도 각인 못하고 넋나간 듯이 바라보는 나와 구두를 번걸아 보며 묻는다. “맘에 들어?” 이 녀석, 사줄테냐? 끄덕끄덕, 얼마나 세차제 고개를 흔들었던지 관절 흐트러지는 소리가 다 들렸더랜다. 그렇지만 눈망울을 반짝이고 바라보는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밀어넣고야 마는 녀석. “저런 거에 입을 옷은 있어?” “아니.-_-” 니가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내가 정말 할 말은 없잖냐. 아무리 이뻐서 갖게 되면 무얼하느냐고. 저런 구두에 맞춰 입을 만한 옷 한번도 없는 걸. 역시 꿈은 꿈이다 싶어, 조금은 아쉬움을 남겨두고 성큼성큼 앞서걸었다. “잠깐 서봐. 맘에 든다며.” “됐네, 그냥 한 말이었어. 인마. 더 많이 돌아볼거야. 가자 빨리.” 장난스레 어깨를 한대 친다는게, 차마 섞인 감정을 주체 못하고 짝소리나게 때려주고야 말았으니…잠시 정색하는 원씨. 허허, 이러니까 또 미안하네. 이것도 봤다가, 저것도 봤다가 한참을 목적지 없이 걷기만 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춰서고 묻는 원희렴. “어디가 가고 싶은 건데? 가고 싶은데 없어?” “없어. 그냥 돌아다니자.” 그러자 다시 정색하는 얼굴로 한 마디 한다. “장난해?” “엥? 왜? 난 그냥 걷기만 해도 상관없는데.” “하루 종일 이러고 다닐거야? 어디 가고싶은 건지 생각하랬는데 생각은커녕 잠만 잤지?” “야! 내가 무슨 잠보냐? 난 정말 어디……” “어? 희렴이냐?” 그 녀석도 나도 흥분해서 발끈 하기 일보 직전, 녀석의 어깨 너머에서 껄렁껄렁 걸어오며 아는 척을 하는 대여섯명 정도의 무리. 이야…겉보기에도 화려한게, 등장도 하려하시다. 다들 머리에 힘을 쫙쫙 주고 옷 또한 무진장 잘 입으셨습니다. 모두 수려한데다가, 잘생긴 분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껌을 짝짝 씹으며 건들건들, 희렴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는 키크고 스타일 좋은아이 하나. “이야 오랜만에 본다? 그동안 잘 지냈냐?” “그럭저럭.” “자식 딱딱하기는. 반년만에 보고서 그게 다냐?!” “변한게 없잖아, 변한게.” 굉장히…저 분들과는 언밸런스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서있으니까 전혀 그렇지도 않은 듯. 게다가 반년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럭저럭’ 이라는 인사 한 마디에 그다지 친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나의 착각이었다보다. 찬휘네랑 있을 때랑은 또 다르게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니. “쟨 누구야?” 흘끗흘끗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물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구 그렇게 한꺼번에 바라보실 것 까지야. 그래도…원희렴의 친구들 이라니까 왠지 긴장되네. “설마…니 깔따구냐?” 조금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새끼 손가락을 까딱이며 대답을 재촉한다. 깔따구라? 정확한 그 뜻을 아는 건 아닌데 기분이 좋지는 않다. 가만히 고갤 돌려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짧게 눈이 마주쳤고 곧 다시 친구에게도 시선을 돌린 그 녀석의 대답은, 솔직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니.” 순간 긴장해서 두근두근 거리던 심장이, 또 다른 의미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무슨 말을 기대했을까. 어차피 다시 만나지도 않을 사람에게 ‘그래, 맞아.’ 라는 말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아니’ 라고 대답하면, 천천히… 너에게로 쌓아올려져 가고 있던 내 마음이 흔들려 버린 것을. 잠시나마 어울리지도 않는 기대와 착각을 한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붉어져 버린 고갤 숙였다. 그런데 또. “그런 거 아니야. 이상한 말로 부르지마. 그냥 내 ‘여자친구’ 야.”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8. “참나. 알았어 인마~ 하여간 그런 거 가지고 정색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 여자친구. 이 자식, 참 사람 할말 잃게 만든다. 멍청히 서있는 나와 원희렴을 번갈아 보다가 대뜸 묻는 친구분 하나. “어디 갈데 없음 같이 갈래? 오랜만에 봤는데 그냥 헤어지기 뭣하지 않냐.” “기다려봐.” 조금 친구에게서 거리를 두고 내 앞으로 걸어오는 희렴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나를 향해 묻는다. “어떡할래 그냥 우리끼리 다닐까 같이 갈까.” 어디까지나 제대로 맞지도 않는 나의 추측일 뿐이건데, 이 녀석은 오랜만의 친구들과 지내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내색은 않지만, 친구들쪽을 향해 힐끔 거리다가 피식 웃는 모습이 그런 눈치니까. “그래. 같이가자.” 내 말에 희미하지만 미소가 번진 얼굴로 왼쪽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은 채 친구들쪽을 향해 걸어나가는 녀석. 결국 학교에서나, 밖에서나 여자라고는 또 나 하나. 그 많고 멋지신 분들 가운데 끼어서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만났다고들 하니까 어디를 갈까 상당히 궁금했는데…그래. 그들이 회포를 풀 수 있는 곳은 피씨방이었나보다. 노래방이든, 나이트든. 좀 더 화끈한 걸 기대한 나는 뭔가. 여섯명이 주르르 앉고 나는 당연히 민망한 기색 역력하게 원희렴 옆 컴퓨터에 앉았다. 다들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그 넓고 넓은 피씨방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자세들로, 큰소리도 내고 담배도 뻑뻑피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거야?” “아니…나는 뭔가를 좀 하고는 싶은데, 할게 없네 그래.” “메신저나 카트라도 해.” 그게 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메신저를 해봤자 대화를 할 변변찮은 친구도 없고, 카트인지 코트인지는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거든. 말할까 말까 하다가, 다시 속으로 꿈 삼켜 버린 말. 할 일 없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한마디가 궁금해져서 검색을 했다. 깔따구의 준말. 깔따구…파리목 깔따구과의 곤충…참 할 말 잃게 만든다. 더군다나 보고싶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던 깔따구의 사진은 사람 참 암담하게 만든다. 누가 여자친구라는 걸…이딴 거에 동조한거야. 다시금 할일 없어진 내가 원희렴의 컴퓨터에 기웃거리자, 스윽 내 얼굴을 쳐다보는 녀석. “뭘 봐.” “아니 뭐 그냥 뭐하나 궁금해서. 뭐하는 거야?” 가리려고 하는 녀석을 뒤로한 채 한사코 얼굴을 들이밀고 바라본 모니터. 희렴이가 가린다고 가렸지만 그 녀석이 막기엔 내 머리가 몹시 비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멍하니 바라본 모니터엔 그 카트라는 듯한 게임을 하고 있어보였는데, 굳이 왜 가리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내게서 신경을 끄기로 마음 먹기라도 했는지 다시금 나는 안중에도 없이 게임에 열중하던 원씨. 그러다가…물끄러미 그걸 쳐다보고 있는 나를 힐끗 보며 말한다. “하고싶어?” “움…근데 나 어떻게 하는지 몰라.” “이리와봐.” 어지간히도 불쌍해 보였나보다. 하던 게임을 접고 내 의자를 끌어당기는 녀석. 그리하여 내가 내 컴퓨터는 놔두고 녀석의 옆에 붙어앉았는데, 더럭 의자를 제 쪽으로 더 가까이 잡아당기더니 덥썩 손을 잡는다. “뭐야, 엉큼하게 왜 손은 잡구 그래?!” “미쳤나.” 그 특유의 정나미 떨어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잡았던 손을 키보드위에 올려 놓는다. 거 참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데 뭐있네, 인간이. 어쨌거나 지나칠만큼 가까운 거리에 녀석의 닿아 있다. 가만히, 내 손을 잡은 채 말한다. “봐봐. 출발할 때 이거 누르는 거야. 그리고 나서는……” 분명히 뭐라고 하고 있지만 제대로 듣고 있을리 만무하다. 녀석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덩달아 움찔거리는 손. 내 등뒤에 바로 맞닿아있는 그 녀석의 몸. 그리고…스윽 고갤 올리면 내 머리 위로 보이는 그 녀석의 얼굴.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모니터만 바라보며 말을 하는데…살짝 시선을 내려뜨면 보이는 긴 속눈썹과, 말을 할 때마다 목젖이……. “이제 해봐.” “응? 응! 오…이거 재밌는데.” 원희렴의 얼굴만 보던 것도 잠깐, 그새 한번 배운 게임에 맛들려 신나서 모니터를 보며 몸도 같이 움직이는 중. 자제하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몸뚱이까지 움직이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희렴이가 더럭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하고있어.” “어디가?” “잠깐만 나갔다 올게. 금방 와. 기다리고 있어.” 어디가는건지는 알려주지도 않고 그대로 피씨방을 나선다. 하여간 저 무뚝뚝한 거 하고는. 그래도 뭐 아까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멀둥멀둥 모니터만 바라보면 모르겠지만 알려준 게임덕분에 혼자 있는게 그다지 신경쓰이지는 않게 됐다. 한참 몸까지 움찔거리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데, 흘끗 나를 보더니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원희렴 친구. “헤이, 형수.” “예?” “재밌어? 게임만큼이나 표정도 박진감 넘치네.” 그 정도였나 싶어 약간은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서 친구분을 바라봤는데, 쭈욱 내 얼굴을 훑어보던 그 분이, 물고있던 담배를 끄더니 의자를 끌어당겨 가까이 앉더니 말한다. “이름이 뭐야?” “강다희요.” “푸하, 왜 자꾸 존댓말 해? 우리랑 동갑이라며? 말놔. 내 이름 윤승하.” “으응.” 다시 게임을 하기도 뭣하지만 딱히 할말도 없는 상태에서 뭘 어떡해야 하나 약간은 뻘쭘해하고 있는데도 계속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 재경이라는 아이가 더럭 물었다. “은예림 알지?” 은예림. 희미하지만, 몇 달전쯤 원희렴이 날 내비리두고 미친 듯이 쫒아가던 여자. 그 여자의 이름이 ‘은예림’ 이라는 걸 령우의 입을 통해 들었으니까. 뭐라고 하면 그 아이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 잠시 망설였다.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지만, 내 머릿속 한 구석엔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알 거 같아.” “그럼 내가 대충말고 자세하게 알려줄까?”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내게 그 아이의 말을 꺼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이 애가 아니면 찬휘에게도, 령우에게도 차마 쉽게 물을 수도 없고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것만 같았다.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비식. 코웃음을 치더니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리고 곧, 펼친 지갑에서 꺼낸 작은 이미지 사진 하나를 내 손에 건네 주었다. 그 아이 얼굴을 한번 보고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보여? 그거 걔네 사귈 때.” 분명히…나는 원희렴의 웃는 얼굴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정말 환하게 웃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아왔던 웃음따윈 지금 이 사진속의 원희렴이랑은 비교도 안된다. 밝은 사진만큼이나 밝게 웃고 있는 두 사람. 환하게 웃으며 그 ‘은예림’ 이라는 아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또 그 ‘은예림’ 이라는 아이는 무척이나 수줍은 미소로 브이를 그린 채 웃고 있는 사진. “이쁘지 은예림?” “응. 예쁘다.” “그냥 예쁜게 아니지. 키도크지, 날씬하지, 성격좋지, 공부도 잘하지…애교도 짱많아.” 그래. 그래보인다. 그런데 대체 나한테 그런 말 하는 저의가 뭐냐. 나보다 훨씬 예쁘고, 훨씬 잘난 그 아이의 사진을 보고 그 아이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차마 웃을 수는 없어서 그냥 사진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는 내게, 모니터 옆에 놓여있던 담배를 한 개비 다시 꺼내어 물더니 말하는 윤승하. “그러니까 니가 빠져.” 한순간이었지만, 내가 잘못들은건 아닌가 싶어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 아일 올려다 보았다. 내가 바라보자 쉽게 말을 못하겠는지, 이내 마주친 눈을 피해 머리를 긁적이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걔네 이런식으로 헤어졌다 사귄 적, 열 두 번도 넘어. 옆에서 2년 넘게 지켜봐와서 잘 알어. 은예림 그 년이 좀 변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또 마지막엔 희렴이 찾아오고, 그 녀석은 맘 다 접은 거 같이 굴다가도 그 계집애가 다시 찾아오면 아무일도 없었던 듯 하니까. 이번엔 좀 길긴하지만… 분명히 그 계집애 다시 희렴이한테 올 거야. 그럼 그 녀석은 당연히 용서할거구. 그러니까 그때 상처받기 전에 형수, 아니 니가 그냥 물러나라.” “내가…, 내가 왜 너한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 때문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만약 지금 의자에 앉아있는게 아니었다면 바닥에 주저앉기라도 했을테지. “난 그 녀석들 친구니까. 걔네 둘 소개시켜준 것도 나고, 또…은예림은 몰라도 원희렴은 은예림 아니면 안되는 거 내가 젤 잘 알 거든. 물론 이번에 여자친구 사겼다는 건 의외였지만, 뻔해. 기분 나빠 말아라. 나는 모두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설사 사귀더라도 너무 깊이 마음주진 마러. 니가봐도…희렴이가 누굴 택할지는, 눈에 뵈는 상황 아니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분 나쁘고, 비참하고 서러움 가득하던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말도 나오질 않았다. 숨이막혀. “…희렴이 오면 나 잠깐만 은행 다녀온다고 해줘.” 간신히 그 한 마디를, 그곳에 버려두듯 내뱉은 채 뛰어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상가를 나오자 맞은 편에 은행이 보였다. “제길…뭐더라.” 처음 받았던 돈과 두 번째 받은 돈이 들은 60만원이 담겨있는 하얀봉투와 현금카드를 꺼내 기억날 듯 말듯한 원장님의 계좌번호를 한참이나 떠올리다 그 의미없는 60만원을 모두 입금시키고 거리로 빠져나왔다. 이제 다시 거길 들어가야 하겠는데 이상하게도 걸음은 자꾸 모르는 거리를 무작정 해메고 있었다. 얼마 걷지는 않았지만 그 피씨방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벌써 여러 번,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고 발을 밟고 밟히고.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그래, 그 녀석이 다시 내 손을 잡기전까지는. “왜 여기있어?” 멀리서 뛰어온 듯 약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내 얼굴을 바라보는 원희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가득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야 숨이 트여.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입이, 이제야 떼일 것 같았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지, 뭘 그렇게 잘 안다고 단언을 하냐고, 그곳에서, 그 자리에서서 당당하게 묻고 싶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감이 없었으니까. 난 그저 희렴이에게 30만원 짜리 사람일 뿐, 사랑하는 마음도, 그렇다고 해서 미약한 우정조차도 없는 그런 사이였으니까. 나는 몰라도, 적어도 이 녀석에게는. “왜……” 갑자기 우는 나 때문에, 아주 많이 난처해진 얼굴로 차마 어쩔 줄 모르는 사람. 눈물을 직접 닦아주어야하는지, 그냥 울게 둬야하는 건지 그 짧은 시간동안 그런 많은 고민을 하고있는 듯한 녀석의 복잡한 표정을 보면서,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강다희는…이 사람을, 원희렴을…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다…. “내가 할 말이야. 지가 뭐라고 나한테 그딴 말을 해…,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해? 내가 왜?!!” 한 번, 두 번. 미약했던 힘이, 점점 거세져가며 녀석의 가슴팍을 몇 번이나 때렸는지 모르겠다. 거리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계속 힐끗 거리고 뒤돌아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이유도 없이 때리고 있는 나였는데, 그 녀석은 그런 나를 말리지도 않고, 더 이상은 왜냐는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점점 힘이 약해질 때까지 그 매를 다 맞고섰다. 한참을 그대로 서있던 원희렴이…제 풀에 지쳐 눈물만 뚝뚝 흘리고 서있는 나를 보다가, 입고 있는 재킷 속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듯 시선이란 시선은 다 받고 있는 나를 가려주었을 뿐. 왜 이렇게…따뜻할까. 사실은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녀가 똑같은 실수를 몇 십번을 반복해도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조건 예전이 될 수도 있다는 다른 여자의 남자친구인 원희렴은 왜 이렇게 나에게 따뜻할까…….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19. 깜깜한 8시의 놀이터. 끼걱끼걱. 낡은 모습만큼이나 흉한 소리를 내는 그네. “왜 울었는지 말 안해?” “몰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래.” 사실 한번만 더 물으면 못 이기는 척 하려고 했는데 역시 이 녀석은 여자의 속을 모른다. 그러니까 열 두 번도 더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는 거겠지…전에는 차마 이해할 수 없었던 찬휘의 말들이 이제야 정리가 됐다. 그래서, 찬휘 눈 피하려고 내가 필요한거였어. 30만원씩이나 줘가면서. 어차피 알고 시작했어도 상관도 않았을 일이, 이제는 더 더욱 상관없는 일이 아니게 됐다. “좋아하는 사람…있어?” 아주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고 싶었다. 정말로, ‘은예림’ 이란 애가 다시 돌아오면…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냐고. 생각하고 있었던 질문은 아니었는 모양인지 잠시동안이나마 잔뜩 울어서 추한 내 얼굴을 보며 한 마디 했다. 지금의 늦고 어두운 시간만큼 낮고 작은 목소리로. “사랑하는 사람, 있어.” 나 참, 사랑하는 사람이란다. 또 다시 울컥하네. 그래도 목에 힘을주고 손에도 힘을 주고 마저 물었다. “그럼, 나 왜 네 여자친구 하랬어…?” “그 사람이 가서.” 조금이라도 그럴싸한 말로, 변명도, 아니 사실 나한테 변명을 할 이유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그렇게 솔직하게 말을 하냐. 그렇지만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 새삼 더 충격먹고 더 슬퍼할 일도 아니었다. “그럼 그 사람 돌아오면 나 네 여자친구 아니야? 그냥, 보통 친구해?” 그래도 이번에는 약간의 망설임은있는지, 잠시동안은 눈도 맞추지 않고 발밑에 수두룩하게 깔린 모래를 헤쳤다가 묻었다가 딴짓을 하다가 한참만에 입을 뗐다. “응.” “븅신.” 정말 어지간히도 좋아하나보다. 열 두 번도 더 그랬다며. 같은핑계로, 같은 일로 너 상처준 사람이라며 어떻게 그렇게 좋아할 수 있냐. 만약에 네가 나한테 그랬으면,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아무 말없이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선 녀석을 보곤 나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시끌시끌한 게 참 좋아. 엄마아빠 돌아가신게 7살 때인데 이상하게 하나두 기억이 나지 않거든. 그때부터 보육원에서 지냈는데, 그게 싫진 않았어.” 가만히,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인 채 고개를 끄덕이는 희렴이. “그때부터 나는 혼자였다는 생각에설까, 사람이 많은게 참 따뜻하구 좋드라구….형제같은 동생들이 있었고 어머니같은 원장님도 있었구. 적응도 참 빨리 했어. 원래 사람을 좋아해서… 너도 그냥 그런 감정이었으면 좋을텐데…이젠 그게 아니게 됐어.” 차츰차츰 작아져간 목소리에, 그 뒤는 듣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내 말이 이어지길 기다릴 뿐 다른 물음이 없는 녀석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은, 그네가 움직이는 소리외엔 조용한 가운데 내가 다시 힘주어 또박또박 말하기까지. “나 돈 안받아. 저번에 준 건… 이미 원장선생님한테 드려서 돌려주진 못하겠지만 앞으로는 필요없어.” “왜?” 돈돈돈 하던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된건지, 또 다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바닥에 다리를 끌며 그네를 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리를 올리고 일어서 힘차게 밀며 말했다. “계약내용을 바꾸자.” 당황스럽기도 했을만큼 아무말 않고 계속 나를 보기만 했을 뿐 뭐냐고 묻지 않았다. 삐걱삐걱 거리는 그네 소리가 요란해지자 약간 인상을 찌푸린 내가 번쩍 그 녀석의 코앞으로 뛰쳐내렸다. 약간 삐끗하며 주춤하는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우는 희렴이. 곧 그 다정스러운 손을 슬그머니 밀어낸 채, 손가락으로 녀석의 얼굴을 처억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돌아오기 전까지,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되면 나는 그때도 네 여자친구야. 그러니까 니가 나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나 돈 안받아. 내 조건은 그거야. 어떡할래?” “무슨…말이야.” 오늘은 원희렴의 당황하는 표정을 참 많이 보는 날이다. 멍하니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녀석. “나는 네가 좋거든.” 얼굴에 오른 열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빨게지긴 했지만, 어둠속에 가려져 녀석은 모르긴 바라며 말했다. 한 마디 하는데도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는지 원희렴 너는 모르겠지만. 그래. 이 녀석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용기를해서 낸 말이기에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나쁜 여자잖아, 네가 좋아하는 애는. 적어도 내가 네 여자친구가 되면…혼자두지는 않을게.” 내가 그런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묻지도 않고, 더 이상은 놀라지도 않은 채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는 원희렴. 슬슬 입김이 나기 시작하는 10월의 날씨. 내 고백 때문인지, 약간은 쌀쌀한 이 날씨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볼이 붉어진 채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자.”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인데다가, 저의를 알 수 없는 대답이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일방적인 마음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태평양 한 가운데서 실오라기라도 잡은 심정이었다. “가, 갑자기 태도 바꾸거나 하지마.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괜히 의식하지두 말구.” “응.”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조용해졌다. 더 이상은 앞에 얼굴을 맞대고 서있기가 민망해서, 다시 되돌아 그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동안 히죽히죽 거리며 그네를 흔들흔들 거리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섰다. “그만 가자. 9시 다 되간다. 통금시간 지나겠어.” “아, 기다려봐.” 나를 다시 그네에 앉히며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민다. 녀석에게서 쇼핑백을 건네받자 저번의 악몽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경계태세로 들어가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손을 움찔거렸다. “뭔데?” “열어봐.” 아무렴 갑자기 어디선가 토 묻은 옷을 구해오지는 않았을테지. 조금은 멋쩍게 받아든 쇼핑백. 열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 녀석을 한번 보고는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잠시동안은 말이 없이 그것만 바라보다가 조심히 꺼내어 보았다. 아까…쇼윈도우 안에서 반짝반짝 거리던 그 구두가 지금 내 무릎위에 올려져 있다. “생일 축하해.” 가만히 그 구두만을 바라보고 있을 땐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냥 생각지도 못한 녀석의 선물에 대한 감동. 그래 그 정도였는데…손을 쭈삣쭈삣 거리며 구두를 가슴에 안아보는 내게 해준 그 녀석의 말은, 날 울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구두에 입을 옷은 내년 생일에 해줄게.” 어떤 생각으로 희렴이가 그런 말을 했을까…알 수없다. 그렇지만 그 말은…내년에도 네 옆에 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기대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과 함께 번져버린 눈물. “우…흑…우어어어…….” 갑자기 목놓아 우는 나 때문인지 깜짝 놀라며 내 앞에 바짝 다가서는 희렴이. “왜, 왜 또….” 11년 동안 보육원에 지내면서 ‘내것’ 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내게 저런 예쁜 구두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동화속의 이야기였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같은 것은. 그래도 나쁘지 않다면, 나도 언젠가 저런 구두를 신고 동화같은 예쁜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결국은 짝사랑이 되어버렸지만, 적어도…녀석이 준 저 구두는, 언젠가는 너도 동화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거라는 작은 위로 같았다.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알았어. 돈 생기면 다음달에 사줄게.” 내가 우는 이유도 모르는 체 어쩔 줄 모르는 원희렴을 보면서도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웃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다니, 강다희 븅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감동해서 우는 거야, 바보야. 에씨, 콧물 때문에 코 헐었어.” “아파?” “당연히 아프지. 코 헐면 얼마나 아픈데… 근데 지금…몇 시야? 버스가 언제 끊기더라…?” 제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벌서 10시 50분. 정신없이 뛰고 뛰었지만 이미 막차는 떠난지 오래. 정류장에 붙어있는 배차시간표는 9시였으니. 원희렴도 나도 허탈함에 멍하니 서있다가 녀석에 말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가자.” “어, 어떻게? 여기 택시도 없잖아.” “걸어서.” 이 남자가…오냐오냐 정말 정신이 나갔나! 여기서 기숙사까지 걸으면 한 시간이 훨씬 넘는데…. 그렇지만 분에 맞지도 않는 비싼 구두를 사준 턱에 녀석도 나도 빈털터리가 되어 택시를 잡는다 해도 낼 돈이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더는 이렇다 할 방법도 없이 묵묵히 도로를 걸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일직선 도로 한켠을 말도 없이 걷고 있었다. “하아. 나 더 이상 못 걷겠어…….” 이 시간에 기숙사랑 연결된 도로엔 차가 다니지 않으니, 대담하게 길바닥 한가운데 털썩 주저 앉으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처음 한 두 번은 재촉을 하더니, 내가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는 걸 알아챘는지 내 쪽으로 되돌아와 쪼그려 앉더니 등을 내보인다. “업혀.” “…너 나 업고 못걸어. 계속 그렇게 황홀스런 등짝을 내보이고 있으면 못참고 정말 업혀 버릴지 모르니까 그냥 일어나.” “괜찮으니까 빨리 업혀.” “오, 진짜지? 후회하기 없기다?” 결국 그 등에 넙죽 업혀서 가고 있는 중. 힘이 없을 것 같던 원희렴은 생각보다 가뿐히 날 업은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댄 녀석의 등은 참 넒고 따뜻하고…좋은 냄새가 난다. 게다가 이러면 정말 안되는데, 잠이 오려고 해. “나 자도 돼?” “응.” “그럼 자장가 불러주세요.” “힘들어.” “에이, 많이도 안 바랄게. 1절만.” 내 주제 같잖은 애교도 다 부려본다. 대답이 없어서 불러주지 않으려나 하고 그냥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작지만 또렷하게…희렴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영어에 무뇌한 나로써도 자장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사도 모르고 제목도 모르지만 익숙한 팝송. 민망한 듯 점점 작아져간 목소리지만, 작게 들려오는 부드러운 그 목소리는 참 듣기 좋았다. 더 듣고싶다고 생각했지만 무뎌져가는 생각이나, 감겨져 오는 눈을 비롯, 녀석의 목소리 또한 점점 더 작아져가고 있었다. “자?” 조용해진 내게 작게 물어오는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정말…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잊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더는…기다리지도 않고, 혼자만 사랑하지도 않고…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나는 이 녀석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 녀석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뒤늦은 안 사랑인만큼 더 지독하고 더 깊게 빠져버린다. .. .. “일어나.” 얼마나 잤을까. 가늘게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주황색 가로등 빛. 약하게 내 볼을 두드려 잠을 깨우는 원희렴. “우음…어디야….” “교문 잠겼어. 넘어가야 하니까 정신차려.” 잠시동안 비몽사몽이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야 학교 담장을 넘었다. 걸리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내가 먼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 높은 담장을 뛰어 넘었고, 내가 넘어 가는 걸 보자 가뿐히 넘어온다. “늦었으니까 빨리 들어가서 자.” “오늘…, 고마웠어! 내 생애 최고의 생일이야. 잊지 못할 거야.” 수줍게 말해보이는 나를 향해 미소짓는다. 낮에 본 사진과는 비교도 안될 웃음이었지만 적어도, 나란 사람이 그 아일 웃게 할 수는 있다는 생각에 나 역시 웃어보였다. “잘자.” “너두.” 먼저 들어가라는데도 한사코 원희렴이 내려가는 걸 보고서야 방으로 들어섰다. 불도 켜지 않고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은 채 구두를 품에 안은 채 웃고 있는데 들리는 목소리. “왜…이제 와.”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0. “누, 누구야?” 깜짝 놀라며 불을 켜자 보이는 건 령우. 침대에 걸터 앉은 채 나를 올려다 보고있다. 그 한켠에는 이미 촛농이 모두 녹아버린 듯한 작은 케이크. 뿐만 아니라 방안 가득 크게 불어져 있는 색색의 풍선들과, 4절지만한 크기의 색종이에 적혀진 글. [강][다][희] [생][일] [축][하][해]. 이래저래 잊고 있었다가…이제야 깨달았다. 분명히 9시 전에는 오라고, 기다리겠다고 했었는데. “려...령우야. 미안, 미안해! 깜빡하고 있었어.” “기다렸잖아, 여지껏.”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고 선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안함에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녀석의 얼굴을 바라 볼 수도 없었는데 내 앞에 바짝 선 령우가 ‘후’ 하고 작게 한숨을 크게 쉬더니 시작했다. “생일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다희의~ 생일축하합니다~” 이미 녹아버린 촛대에 다시 불을 붙인 채 내 앞에 내밀어져 있는 케이크에 미안함이 가득 담긴 미소로 어설프게 웃어보이며 초를 불었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는 령우. “에? 이거……” “선물이야.” 선물치고는 너무 그럴싸하게 담긴 상자에 약간은 부담스러운 얼굴로 상자를 열어보았고… 역시 부담이다. 손목시계…메이커니, 뭐니 그런건 잘 모르지만 이 시계, 상자부터 생긴 것까지 여간 값비싸 보일 수가 없다. “야, 이거 되게 비싸보이는데…” “별로 안 비싼 거야! 부담갖지 말고 받아.” 부담을…가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잖아. 그래도 녀석의 잊지 않아준 녀석의 성의에, 고맙구 고맙구 또 고마워서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방 진짜 예쁘다.” “찬휘도 같이 한 거야. 기다리다가…늦는다고 들어갔어.” “고마워 령우야. 오늘 정말 최고의 생일이야. 여러모로 절대 못 잊을 거야.” “여러모로…는 뭔데.” “아니 뭐, 희렴이랑 데이트도 했구 축하도 많이 받았으니까 정말 좋은……” 얼핏 본 령우의 얼굴은 왠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령우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는데, 순간 내 어깨를 잡아당겨 꽉 끌어안는 령우. 잠깐동안은 멈칫해 있었지만, 점점 더 꽉 끌어안는 녀석 때문에 어떻게든 밀어내보려고 안간힘 썼지만 그럴수록 힘은 거세져 간다. “령우야…반령우? 야?! 이것 좀 놔봐, 갑자기 왜……” “너희, 계약이라며.” “야…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깜짝 놀란 내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며 묻자 웃음도 짓지않고, 그렇다고 해서 화난 기색도 없는 진지한 얼굴로 내 어깨를 꼭 붙든 채 한참을 눈을 맞추다 힐끗 고갤 돌려 책상을 한번 바라보고 말한다. “계약서 봤어. 미리 말하지만 우연히 본 거야.” 그제야 미처 챙겨두지 못한 채 방을 어질러두고 나간 것이 떠올랐다. 하여간 되는 일이없어 강다희. “저기, 웬만하면 찬휘한테 만큼은 말하지마. 응? 희렴이 그거 알면 나…,” “찬휘한테는 처음부터 말할 필요가 없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들, 알 수 없는 행동들. 입을 벌리고 서서 멍하니 령우를 바라보고 있었고, 내 흐트러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하며 말했다. “나, 네가 좋거든. 정말 말뿐인 계약이라면..놓치진 않겠어.”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웃고 넘어가면서 한대 때려주고 ‘장난치지마’ 라고 하기엔 분명, 지나치게 령우의 얼굴이 진지했기 때문일거다. 그래, 안 어울리게 저런 표정을 지어서 그래.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똑바로 바라았지만, 조금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점점 더 커지는 내 눈동자를 보던 령우가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계약, 니가 먼저 그만 두게 할게.” “무슨…뜻이야?” “네가 날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말. 그래서 어쩔 수 없이라도 네가 먼저 그 계약을 그만두게 만들겠다는 말. 이제부터 시작이야.” 내 생일. 기분 나쁜 일도 있었지만, 최고의 생일 선물을 받은 최고로 기억에 남을 생일. 또 내가 원희렴을 좋아한 날. 그리고, 령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날. 지금 내 머릿속 에선…어떤 일이 가장 신경쓰이고 있을까…? .. .. “잘잤어?” “응? 아, 으응.” “거짓말. 눈 부었네. 어제 울고 들어온 거야? 아니면 나가서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에, 아니야~” “그런게 왜 그렇게 밥은 깨작이고 그러냐. 맛이 없어? 매점가서 뭐라도 사줄까?” “아…아니 괜찮아. 너, 너나 먹어.” 이상하다. 그래, 아주 많이. 그것은 나 혼자만 느낀 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안 보려고 하지만 계속 자신도 모르게 이쪽을 바라보게 되는 듯, 그러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저 고갤 묻고 밥만 먹으려고 하는 노력이 역력한 찬휘와 노골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상황을 쳐다보고 있는 희렴이. 괜히 내가 민망하고, 내가 어색해서 나와 령우를 번갈아보는 그 시선을 피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령우, 너 무슨 일 있냐?” 보다못한 찬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일? 무슨 일?” “아니 니 태도가 이상해서.” “이상은 무슨. 신경끄고 밥이나 먹어, 인마.” 이상해, 이 녀석아. 너만 느끼지 못할 뿐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나만보면 장난에, 장난을 치지 못해서 안달이 나던놈이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했으니까 말이야. 데리러 올라오는 둥, 반찬을 집어주는 둥, 명색이 남자친구라는 원희렴도 하지 않는 행동을 네가 하고 있단 말이다. “나 먼저 일어날게.” “어? 기다려. 같이 나가.” 배도 아프고, 밥도 별로 넘어가질 않아서 먼저 자리를 뜨고 싶은 내 마음을 모르는지 기어코 나를 따라 자리를 일어나는 반령우. 그래, 마침 이야기도 할 겸 잘됐어. 빠르게 식당을 나오자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뒤를 쫓는다. 식당을 나오고 기숙사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서다 말고 뒤를 돌아 령우 앞으로 다가섰다. “너 왜 그래 정말? 장난도 작작 해.” “장난? 내가 언제 장난을 쳤어?” “아까부터, 아니 어제부터. 애들 이상하게 쳐다보던 거 안 보여? 왜 평소같이 안 굴고 새삼스럽게 그래?” “말했잖아. 나, 네가 좋다고. 그래서 강다희도 나 좋아하게 만들겠다고.” 뭐라고…말을 해줘야 할까. 그래. 계약일 뿐이지만 나는 그 녀석을 정말로 좋아한다고. 그래서, 장난이든 아니든 령우 네 마음에 답할 수 없을거라고…. “령우야.” “응. 말해.” “계약은 계약이지만, 나는 희렴이가 정말 좋아.” “알아.” “뭐…?” “안다고. 네가 원희렴 좋아하는 거.” 나는 이 말을 하는 것도 진심인지 장난일지 모를 령우한테 너무 미안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어렵게 꺼낸건데, 너무나 당연하게 안다고 말하는 령우. 슬그머니 고갤 들어 눈이 마주치자 말한다. “눈치챘어, 바보야. 근데 네 맘은 네 맘이고 내 맘은 내 맘인거야. 아직 희렴이가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닌 이상은 나도 희망이 있지 않겠냐.” 참…웃기는 꼴이 되어버렸어 이거. 원희렴은 은예림을, 나는 원희렴을, 령우는 나를. 꼬이고 꼬여도 단단히 꼬여있어. 더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다시 령우에게 내밀었다. “이거, 못 받겠어.” “받아.” “싫어. 안 받아.” “그냥 받아둬…이건 협박이야. 너, 나한테 들통난 거 있잖아.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면 안될 거. 찬휘도 알게되면 희렴이한테 화도 낼거고, 어차피 찬휘한테 들키면 너희 더 이상 사귈 이유도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네 맘이 아프잖아. 들키고 싶지 않으면 그냥 받아.” 아주…정곡을 찔러버린 사실. 그래. 어차피 들켜봐야 희렴이는 찬휘한테 몇 마디 꾸중을 듣고 끝나겠지. 더 이상은 내가 원희렴의 ‘여자친구’ 일 필요 또한 없어 지고.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내 맘이 가장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현실. “너…이러기야?” “걱정마. 악용하지는 않을게.” 그건 나도 알아, 인마… . 결국 다시 돌려주지 못한 ‘생일선물’을 손에 꼭 쥐고 아무런 대꾸조차 않은 채 앞서걸었다. 만약에 내가 원희렴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령우의 마음이 참 고마웠을테지. 그렇지만 단 한 시간, 내 감정을 먼저 알아차린 나는 그런 마음이 하나도 달갑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절대 나쁜 일은 아닌데. .. “야아, 다들 이달 말이 우리 학교 축제인거 알지? 우리 반은 뭘하면 좋을지 의견 적어서 부반장한테 내라.” 교실로 가자 시험도 끝났겠다 이제 남은 체육대회 겸, 축제와 수학여행에 전교가 들떠있다. 나도 기대는 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뭐랄까…여자라고는 나 혼자 뿐인 곳에서 뭘하겠어. 중간고사라지만 시험이 끝나자 느긋해진 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마찬가지 인듯, 체육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랜만에 운동장으로 나왔다. 게다가 오늘은 딱 한번, A반과 수업이 겹치는 날.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저기 저 멀리서 위아래 하얀 체육복을 입고 나오는 아이들이 보인다. 아직 희렴이와 찬휘는 찾지 못했지만. “자, 오늘은 A반과 축구경기를 하겠다. 지는 반이 아이스크림 사는 거니까 열심히 해라.” “안 져요~” 아이들도, 선생님도 몹시 신나보이는데 말이지, 나는 그게 아니란 말이지. 벙찐 채로 가만히 서있는 나를 쳐다보시며 말씀하시는 선생님. “어떻게, 다희 너도 할테냐?” “예에? 저두요?” “네가 끼던가, A반에서 빠지던가 둘 중 하나겠지. 어떡할래? 힘들다면 쉬어도 좋아.” “할래요.” 사실 축구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무턱대고 나섰다. 아무렴 혼자 청승맞게 앉아 있는 것 보다야 낫지. 골대 앞에 서있다가 어느새 같이 운동장에 선 나를 보고 다가와 묻는 령우. “축구 할 줄 알아?” “아니. 모르니까 애들더러 내 쪽으론 패스하지 말라구 해.” 이 녀석, 나 좋아한답시고 잘해주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장난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 분명한데, 스스로를 자제하려는 듯 입을 우물우물 거리다 말없이 수비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놈아,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란 말이다. 괜히 잘해준답시고 나중에 홧병나지 말고. 어쨌거나 뻘줌하게 그 운동장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고, 속속들이 같이 자리하는 A반 아이들. 어어…저기, 저쪽에 원희렴이 보인다. “다희야 무리하지말고 열심히 해.” “어? 응, 알았어. 땡쓰!” 그래도…꼴에 여자는 나 하나라고 가끔 이렇게 따슨 말 한 마디 건네주면 좋기는 억수로 좋다니께.-_-* 반대편에서 손목에 밴드를 채운 채 걸어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주춤하는 희렴이. 신이 난 내가 짧은 팔을 연신 흔들어 보이자, 빠르게 코앞까지 다가와 스탠드를 가리키며 말한다. “나가.” “뭐? 아니 보자마자 대뜸 어딜 나가래?” “괜히 공에 맞거나 자살골 같은 거 넣어서 욕 먹지 말고 나가.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거칠어.” “너 맨날 나 애 취급 할 거야? 걱정마! 공에 맞지도 않을 거고 자살골 넣지두 않을 거니까.” 왜냐하믄 심판을 보고 계신 선생님 옆에 가만히 서있을 참이니까! 물론 이 말은 자랑스럽게 하지 못한 채 속으로 되내고 말았지만. 시합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결국은 못 이기겠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최대한 공이 오지 않을 자리에 멀찍이 서있었다. 아이들 모두 공이 뺏기고 빼앗을때마다 커다란 함성을 질렀고, 나도 알지도 못하면서 원희렴이 공을 빼앗기만 하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전반전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나, 반장이 몰고 있던 공을 원희렴을 비롯한, A반을 아이들이 빼앗아 가며, 약간은 무리가 있을 듯한 거리에서 녀석이 찬 공은, 생각보다 훨씬 높고 빨라서, 수비는 물론 골키퍼 역시 손도 쓰지 못한 채 우리 반 골대를 강타했다. “꺄악!! 골인이다!! 원희렴 짱, 최고……!!” 나도 모르게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나…. A반 아이들은 별로 상관없어 보였는데 막상 우리반 아이들의 시선이 생각보다 강렬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눈치보며 줄어든 내 목소리. “워, 원희렴 짜, 짱나. 최…최악…….-_-;” 전반전이 흐지부지 끝나고 약간의 짬이 있을 무렵, 얼떨결에 시합에 끼긴 했지만 공을 차보기는커녕 뛰어보지도 않은 나만 말짱하고 모두들 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후반전에 임했다. 앞에서 마음에도 없이 우리반을 응원하는 채 하고 슬쩍 바라본 A반, 딱 마주친 시선. 순간 흠칫하기는 했지만, 녀석은 희렴이는 피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보인다. 그래…니가 따봉이다, 인마. 나 역시 다른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따봉을 해주고, 원희렴이 그걸 보고 작게 미소 지을 쯤, 다시 경기가 시작됐다. 그렇게 선생님 옆에서서 구경하고 서있는데…아프다. 어쩐지, 아침부터 살살 아프던 배가 점점 더 심해지는 듯 결국은 참다 못해 작게 허릴 숙여 반쯤 주저 앉은 모양새가 됐을 무렵이었다. “어? 거기!! 야, 피해!!” 어느새 이마엔 땀이 줄줄 흘러, 도무지 다리에 힘을 주고 서있을 겨를조차 없어 찌푸린 얼굴로 가늘게 눈을 뜨자 멀리서 누군가가 잘못 찬 공이 빠르게 내 앞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공이 내게 닿기도 이전에, 미끄러지 듯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털썩 쓰러졌고 작은 말소리들이 곧 커다란 웅성거림으로 번졌다. “뭐야, 맞은 거야?” “아니 맞지는 않은 것 같은데 쓰러졌어. 땀좀 봐. 어디 아픈거 아니야?” “다들 저리 비켜! 선생님이 양호실 데려갈 테니까, 다들 자리로 돌아가!” “제가 업을게요.” 저 멀리 서있던 령우가 내가 쓰러짐과 동시에 재빠르게 달려와, 나를 업으려고 앞에선 선생님 대신 등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래, 그럴래? 자, 빨리 양호실로 데려가 봐라.”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머리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람 얼굴도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령우에게 업혀진 채 양호실로 옮겨지고 있었는데, 곧 내 어깨를 움켜잡은 누군가가 말했다. 아니 들려 온 그 목소리는 ‘누군가’ 가 아니라 희렴이었다. “내가 데려갈게. 그만 가봐.” “됐어.” “내 여자친구야. 내가 해.” 내 어깨를 움켜쥔 손에 조금 힘이 실렸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흐릿하긴 했지만, 가만히 령우와 눈을 맞추고 있는 희렴이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업힌 채라 령우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이내 들려온 령우의 목소리 또한 전과 같지는 않았다. “넌 그럴 자격이 없잖아.” “무슨…소리야.” 둘 다 말없이 멈춰선 채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제정신으로 내가 작게 말했다. “이것들아…그러고 서있지 말고 이럴 시간에 나나 빨리 데려가…죽으면 니네가 책임질텨….” 그리고는 더 이상 그 둘의 얼굴도,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 http://cafe.daum.net/bearnangman 21. “우어어어, 나는 죽을텨. 말리지마러~” 덮고 있던 하얀 이불을 둘둘 가늘게 말아 목에대고 매는 시늉을 하자 거침없는 단 한번의 손짓으로 내 목에 둘둘 말은 이불을 거둬낸다. 애써 해낸 자살시도 마저도 실패한 지금, 나는 그대로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정말…정말 죽고싶어어!! 쓰러진 것 까진 좋아. 오래간만에 나도 연약한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켰으니까. 그렇지만, 이유는 많잖아? 예를들면, 그래. 빈혈이라던가 두통. 아니, 복통도 사실 좋았단 말이야. 물론 내가 쓰러진 이유도 이를테면 복통의 한 종류이지만, 그것이…왜 하필 생리통이냔 말이다!! 그리구 이상하게, 아까까진 괜찮았던 엉덩이도 좀 아파. 마친 멍이라도 든 것처럼. 계속 작게 훌쩍거리리는 나를 보자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말한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는 나 때문에 깜짝 놀란 듯 싶더니, 이내 두 눈에 정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걸 보고는 또 놀란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이제 얼굴들구 학교도 못 돌아 다닐 거야…창피해서 어떻게 살어….” “아무도 모르는데 뭐 어때.”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희렴이와 령우, 찬휘 뿐이지만 소문이란 언제 불거질지 알 수 없는 것. 게다가…하필이면 이 녀석이어서 더 그래. “너희들 말구 또 아는 사람이 있을지 어떻게 알어? 아, 몰라. 정말…씨.” “난 괜찮은데.” “그거야 물론 니 얘기가 아니니깐 그러지! 그치만 잘 생각해봐. 이건 너두 창피할 일이야.” “그게 아니라 내 여자친구가 그거… 때문에 쓰러졌다고 해도 난 안 창피한데. 만악에 그거 갖다가 누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 일러.” “무…이르긴 뭘 일르냐.” 그거…라는 말에서 슬쩍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흐렸지만, 그래도 그 말은 작은 위로 같아서 울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길, 그래도 이미 나온 눈물은 떨어진다. 그러나 다시 씩씩하게 떨쳐냈고, 양호실을 나와서 원희렴이가 교실 앞까지 바래다주고야 작게 한숨을 내쉬고 교실로 들어섰다. 확실히, 아직 뭐 때문에 쓰러졌는지 모르는 듯 교실에 들어가자 다들 괜찮냐고 물으면서 어디가 아팠냐고 묻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자리로 좀 돌아가, 새끼들아. 좁아 죽겠는데 왜 다 몰려 들어.” 난처할 내 입장을 알았는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몰려든 아이들을 몰아내는 령우. 애들이 다 자리로 돌아가는 걸 보고서야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묻는다. “좀 괜찮아?” “응, 지금은. 아까…고마웠어. 네가 데려다 준거지?” 그 말에 갑자기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볼멘소리로 말한다. “그래, 렴이 그 새끼만 아니면 내가 너를 공주님처럼 고이 안아모셔서 양호실에 데려다주고 간호까지 해주었을테지.” “에? 그럼 희렴이가 데려갔었어? 기억이 하나도 안나.” “그래. 그래서 참 다행인 것 같다. 니가 나한테 업힌 채로 바닥에 떨어진 걸 기억하지 못해서.” “뭐…뭐라구? 떨어져? 내가? 왜!” “하여간 그 새끼, 도움이 안돼. 자기가 업겠다길래 내가 업고가겠다고 했더니, 너 밀어트리던데? 그러니 당연히 넌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운동장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는 너를 주워서 들춰 업고 양호실로 가더라.” 어쩐지…그래서 멀쩡했던 엉덩이가 아팠군. 이 자식들, 정말 죽여버릴까부다. 아니 아파죽겠는데 빨리 데려다주진 못할 망정, 서로 업겠다구 다투다가 결국엔 바닥에 내팽게쳐서 업구 가? 있다가 죽었어.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치솟아 오르는 화에 이를 잘근잘근 갈고 있을 쯤,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원래 과학실로 가야했을텐데, 내부를 수리하면서 더러워진 탓에 아직 사용할 수가 없다고 결국 이론수업이 되었다. 헌데 또 얼마 있지 않아 고갤 돌리고 묻는 령우. “근데, 나 아까 좀 멋있었지?” “뭐가?” “너 업고 갈 때 말이야. 내가 일빠로 달려왔잖아, 희렴이보다.” “기억이 안나는데?” “뭐? 아니, 너는 무슨 기집애가 그런 것도 하나 기억 못하냐? 내가 얼마나 멋있게 달려갔는지 알아?!” “아, 글쎄 모르겠다니까 이놈이 왜 돌아서 시비야, 시비가!” 그래도 내심, 멋있다는 말을 기다하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약간 실망한 기색이 비춘다. 미안한 마음에…그냥 멋있었다고 말할걸 그랬나, 생각할 쯤 그런 생각을 싹다 저버리게 만드는 그 녀석의 한마디. “완전 무거운 오리궁뎅이.” 차마 소리를 못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버린 나. 그나마 이성적으로 판단해 입술끝까지 올라온 소리는 삼켰는데, 몸뚱이는 벌떡 일어났다 이거지. 아니나 다를까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들과, 인자한 미소로 말씀하시는 생물선생님. “그래, 그럼 다희가 할테냐?” “에에…예…?” “그래도 과학실이 여간 커서 혼자 청소하기는 무리가 있을텐데 괜찮겠니?” “아니, 저…그게 아닌데…” 분명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다. 난데없이 과학실 청소라니…? 제길. 강다희가 이렇지 뭐. 결국 어쩔 수 없이 푹 썩은미소로 애써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착하구나. 음…그래, 그럼 령우랑 친한 것 같던데 령우 네가 같이 다희 좀 도와줘라.” “예?!” “자, 수업 시작할까?” 아자 신난다. 하긴 나만 걸리면 그건 정말 억울하지. 어느새 내 얼굴에는 기분좋은 미소가 감돌았고, 제가 판 구덩이에 제 몸 던진 꼴이 된 령우는 심하게 경직된 얼굴로 수업에 임했다. .. “켁켁, 무슨 먼지가 이렇게 많아?” 방과 후, 자율 학습은 제껴두고 과학실로 들어온 령우와 나.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듯 뽀얗게 먼지가 싸인 과학실은, 내부수리 공사 때문에 더욱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오래됐으니까 그렇지. 겉은 반지르르 해보여도 사실 우리 학교 건물이 얼마나 낡았는지 아냐? 여기 맨날 문 고장나고 비오면 물 새고 그랬어.” “알았으니까 빨리 빗자루 집어들고 쓸어.” 4층 맨 구석에 자리한 과학실. 교복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청소를 시작했다. 먼지와 페인트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과학실 안은, 실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하고 있었다. “헉, 헉…아직 다 안 쓸었어?” “아직 한참 멀었어. 제길, 왜 이렇게 더러워.” “더는 못하겠어.” 반도 다 닦지 못하고 책상에 나뒹굴고 있던 내 모습을 보던 령우가 열심히 쓸다 말고 내 쪽을 바라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에 쥐여져 있던 걸레를 가로채 내려놓으며 말한다. “넌 쉬고 있어 내가할게.” “에이, 됐어요. 같이 할게요 먼저 하구 계셔.” 역시나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뜬 채 거부도 해보았지만, 녀석의 딱 한 마디에 다시 입을 꼭 다물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힘들어하는 거 내가 보기 싫어서 그래. 그냥 가만히 있어. 너 나한테 약점 잡혔어.” 별로 약점 같지도 않은 걸 약점이랍시고 저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닌 나를 위한 행동을 하는 반령우. 대체가…원희렴 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더는 헥헥대며 청소를 하기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민망해서 하다못해 물이라도 떠오려고 양동이를 들었는데 그 마저도 하지 못하게 내 손에 들린 양동이를 건네받아 수돗가로 가는 령우. 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이, 그래도 내가 좋다는 말을 들은 이상 새삼 신경쓰이고 있다…. 한참 동안 대걸레를 들고 복도와 교실안을 왔다갔다 하던 령우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른다. “다희야.” “응? 왜?” “혼자는…못하겠다. 좀 도와라. 죽겠어.” 이래야 반령우 답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올뻔한 걸, 참아가며 대꾸없이 뾰루퉁한 얼굴로 마포를 빨아가지고 돌아왔다. 아직도 열심히 청소를 하던 령우가, 들어오면서 바람에 닫힌 문소리에 깜짝 놀라기까지. “너…다시 청소하랬다구 화났지?” “엥? 무슨 소리야. 화가 나긴 왜 화가 나?” “그럼 문을 왜 그렇게 콱 닫어. 놀랐잖냐!” “바람이야, 바람! 또 시비걸테냐?” 어쩌면 우리 둘은 절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 시키듯이 한시간 걸러 다투는 구나 정말.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기두 전에 빠르게 다시 청소를 하는 령우로 인해 의미없는 말이 오가던 것은 거기서 멈췄다. 한참을 왔다갔다 거리며 닦고 쓸고를 반복하자 조금은 깔끔해진 듯한 과학실. 아직 다 하지도 못했는데 그새 가을이 되어 이제 곧 겨울이 되려는 저녁하늘은 7시 밖에 안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어두워져 있었다. “어둡다. 불 좀 키자.” 불을 켜기 위해 벽을 짚어가며 문가로 다가섰다가…나는 또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멀찍이 문앞에 서있는 나를 보고는 다가오며 묻는 령우. “왜 그러고 서있어?” “…문이 안 열려.” 손잡이를 이리 저리 돌려보았지만,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서는 문고리에 매달린 나를 애써 진정시키려는 듯 한쪽으로 밀어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대신 문고리를 잡아본다. “문이 안 열리긴 왜 안 열……리네.” “왜 이러지 이거?!” “설마 아까 너 들어오다 문 닫힐때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이거 전부터 자주 이랬단 말이야.” “뭐어? 진짜 그러면 어떡해?!” 난감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복도측으로 있는 창문은 얼굴만 디밀어도 끼일 크기에, 이곳은 4층 구관 제일 끝 복도. 주위에 다른 실습실도 없는 이상, 수위아저씨가 순찰을 돌기 전까지 몇이나 이곳에 올까. 망연자실한 내가 털썩 바닥에 주저 앉자 령우 역시도 적잖게 당황했는지 따라 앉는다. “제길, 미치겠네. 그러게 문부터 고치라고 몇 번이나 건의 했는데.” “령우야. 우리 설마 이대로 영영 못나가는 거 아닐까? 응? 나 벌써 배도 고프구, 불도 안 켜지니까 너무 무서워. 우리 이대로 갇히면 어떡해? 안돼, 난 그럴 수 없어. 내 마지막을 너와 보낼 수는 없어!!” “놀고있다.-_-아마 곧 있으면 누가 찾아오겠지. 학생이 둘이나 없어졌는데 가만 있겠냐? 오도방정말고 가만 좀 있어!” “으응.” 깜깜한 과학실 안에…달빛에 의지해서 창가에 마주 앉아 있는 우리 둘. 주위를 둘러보면. 하얀 천에 덮인 해골선생과, 절단면이 표시되어있는 인체를 본뜬 마네킹. 크고 많은 서랍 장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들. 진짜 정신 나가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오돌오돌 떨며 옆에 앉은 령우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무슨 얘기라두 해봐 령우야. 나 무서워 죽겠어.” “뭐가 그렇게 무서워?” “아니 생각을 해봐. 주위를 둘러보라구. 저런 범상치않은 것들이 있는 공간에 갇혀있는 와중인데.” 그러나 이번 마저도 령우의 한 마디에 다시 굳게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나는…좋은데. 너랑 둘이 있을 수 있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이제는 장난처럼 여기면서 등짝 한대 때려줄 수도 없는 걸. 대답이 없는 나 때문에 잠시 조용해졌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함에 보통이라면 민망하게 생각했을만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대체…원희렴은 왜 은예림을 좋아할까? 나는 왜 또 원희렴을 좋아하고, 너는 왜 나를 좋아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 분명히 알아온 시간보다 모르고 지낸 시간이 많은데 그 짧은 시간동안 왜 좋아하게 됐을까.” 령우의 얼굴은 보고있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시선. 그리고 녀석의 이유있는 대답. “그건 니가 그 녀석을 모르고 지낸 오랜 날들보다 알고 지낸 짧은 시간들이 더 행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렇거든. 게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성의 판단이 아닌 감성의 판단이야. 그러니까 굳이 좋아하는 이유 같은 걸 생각할 필요는 없어.” “…오, 간만에 멋진 말 좀 했는데?” “그지? 아씨, 내가 생각해도 그러네. 잊어먹기 전에 적어놔야지.” 아닌 척 했지만, 둘 다 이런 곳에 있게 된 사실을 긴장해서인지 조금씩은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결국은 그 대화마저도 오가다 말았고 쌀쌀해진 10월 저녁 날씨에 내가 차갑게 식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말했다. “춥다. 마이 입고 올걸.” “내가 안아줄까?” “한번 죽어볼래?” 장난인 듯 말하는 진심이었을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느물느물 어깨에 손을 올리는 녀석을 향해 눈을 부릅 치뜨자, 흠칫 하더니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린다. 하여간, 그래도 령우랑 있으니까 그나마 웃고 있는거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이러고나 있었을까. 문득,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희렴일 좋아하기 이전에 너에 대해 한 5%로만 더 알았어도 널 참 좋아하게 됐을 거야.” 그 말과 함께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잠깐동안은 아무 표정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령우가, 이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뗐다. “그 약점, 악용하고 싶어졌어.” “응…?” “눈감아. 아니면 떠도 되고.” 그리고는 한쪽 손으로 천천히 내 손을 꽉 움켜잡은 채 다가오는 녀석의 얼굴. 잠시동안은 뭐가 뭔지 짐작도 안가다가, 령우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져 오고 또 심장박동수가 빨라질 무렵 슬금슬금 뒤로 내빼며, 애써 침착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왜 이래? 좋은 말 할때 저리 가. 한번의 실수가 네 인생을 좌우할……” “현재 강다희한테 거부권 없음.” “너, 너! 진짜 이러면 나 평생 책임지라고 한다?!” “그럼 더 좋지.” 이게 아니지. 이게 아니지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차마 더는 밀쳐낼 수있을 만한 거리가 아닌 상태에, 더욱 가까워져 온 녀석의 입술에 조금만 더 잘못 움직였다가는 닿아버릴 듯한 거리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2. 곧 닿을테지. 지금 눈을 뜨면 그 녀석의 얼굴에 바로 코앞에 있을거야…라고 생각한지, 그래. 아직 1분은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무 일도 없는게,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져서 가늘게 눈을 뜨자 조금만 더 고갤 움직이면 닿을 듯 가까이서 눈 감은 나를 바라보고 있던 령우가, 막상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붉어진 얼굴로 빠르게 멀어져 갔다.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앞에두고, 달아오른 얼굴을 어쩔 줄 몰라한다. “제길…….”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난 두 눈을 꿈뻑 꿈뻑 뜨며 멍해져 있을 뿐, 아무 말도 말도 할 수가 없어서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면, 그런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해 고갤 푹 숙인 채 말한다. “못하겠어. 떨리잖아.” “푸…푸하하하하.” 그제서야 안심이랄지, 알 수 없는 실망이랄지 어쨌거나 한시름 놓으며 터져나온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자, 아니꼬운 듯 인상을 쓰고 나를 바라보는 령우다. “웃겨?” “웃기잖아. 재밌어, 하여간.” 힘겹게 웃음을 멈추고서야, 다시금 본 령우의 얼굴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웃어서…화났나 싶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할까 망설이던 터 나보다 먼저 입을 떼는 령우. “다음번에도 이런 기회가 생기면 그땐 멈추지 않을거야.” 벌써 여러 번, 웃게 만들었다가 진지 해질 수 밖에 없도록 하는 령우. 덕분에 잠시 쉴까 했던 심장이 다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소리와 복도에서 새어 들어온 빛, 그 앞에 선 사람 때문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지만. 끼기긱― 안에서는 열리지도 않던 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너무나 쉽게 열리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묵묵히 우리 둘을 바라보고 선 원희렴. “어…어떻게 알고 왔어? 안그래두 문이 안 열려서 어떡해야 하나 걱정하구 있었는데…” 그런 내 말과 표정보다는, 나와 령우. 두 사람의 사이를 번갈아 보고있기만 해서 새삼 의식하게 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하구 있었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들어올 때 봤던 나와 령우의 분위기를 신경쓰고 있던 건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다. 특별히…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웬지 모르게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편같은 심정에 가슴 한켠이 화악 시리다. “일은 무슨! 그냥 같이 얘기 하구 있었을 뿐이야. 정말이야.” “그래. 나가자.” 아니라는 내 한 마디에, 더는 추궁하지 않고 내 손을 꽉 잡은 채로 문 밖으로 향하는 희렴이. 분명, 아직도 창가에 걸터 앉아있는 령우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너..너두 어서 나와 령우야.” 희렴이의 손에 이끌린 채로 멀찍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선 령우에게 말했다. 다음으로 령우가 무슨 말을 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는 이미 계단을 내려서고 있던 터라 볼 수가 없었다. 숨도 돌리지 않고 계단을 내려와 화단 앞에 다다르고 놔서야 꽉 쥐고 있던 손을 놓는다. 서늘한 저녁바람에 땀이 다 날 정도로 굳게 잡혀있다가 놓여진 손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나쁜놈이 되버렸어, 내가.” 작은 목소리지만 또렷했다. 그렇지만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그 한마디에 의아해하는 나를 뒤로 하고 앞서 걷는다. “무슨 뜻이야, 그게?” “그냥…네가 령우랑 같이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희렴일 보면서도 나 또한 마른침을 삼킬 뿐, 어째서냐고 이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정말 착각이었다하더라도 그냥 그 순간의 착각을 깨트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희렴이가 하는 그 말이 ‘질투’ 이길 바라는 심정에 그저 입술만 깨물고 서있었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 “말도 안돼! 나는 무조건 결사반대야!!” 다들 신나서 떠들어대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내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내가 눈을 부릅뜨며 반 아이들 모두를 번갈아보았지만 다들 신경쓰지도 않는 듯. “강다희, 네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걸린 문제를 왜 내가 선택할 자격이 없느냔 말이야?! 어떻게 나를 상품으로 내걸 생각을 할 수 있어? 다들 너무한 거 아냐?!” “다희야. 한번 잘 생각해봐. A반 녀석들은 대체적으로 성적과 외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분명 대단한 일을 기획할 것이 분명하고, B반 녀석들은 4차원인 덕에 기상천외한 뭔가를 내놓을거야. C반은 있으나마나. 그리고 우리반, 우리 D반에는 네가 있지 않냐. 이번 축제 때 뭔가 이슈거리가 될만한게 너밖에 없어!”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다. 그렇지만…막상 그네들더러 자신의 반을 위해 상품이 되라한다면 쉽게 오케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뭐라고 해봤자 더는 들어줄 것 같지도 않은 저들의 태도에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어때, 재밌겠는데?” “니들이야 재밌겠지. 당사자는 전혀, 조금도 재미없습메. 그리구…이왕하려면 거창하게 하지, 판당 3천원짜리 훌라우프게임에서 이기면 나와 데이트가 주어진다니~? 내가 3천원 가치 밖에 안된다 이거야?!” 이쯤에서 당연하게 ‘아니’ 라고 말해줘야 할 령우인데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3천원과 내 가치의 여부를 재보고 있음이 상관없다. “남고 축제가 재미나 있을라나.” 시큰둥한 혼잣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령우.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전남에서 단고축제하면 유명해. 여학교에서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냐? 그야 물론 그 중의 반은 나 때문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입 닫고 고개 앞으로 돌리셔?” 생각보다 싸한 내 태도에, 실망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앞으로 돌아앉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호응해줄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래두 뭐…그 중 10%로는 너 때문에 온다고 치자.” “뭐어?10%? 참나…사실과는 한참 동 떨어진 얘기지만, 그래. 대충 그렇다고 치고. 너는 그런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돼.” “됐으니까 다신 뒤돌아보지마.” 쓸데없는 짓이었다.-_-다신 이런 거 해주나봐. 가방을 꾸리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할즈음, 터벅터벅. 굉장히 빠르고도 박진감 넘치는 발소리와 함께 발칵 우리반 문을 여는 원희렴. 뒤에는 찬휘. 교실을 휘휘 둘러보더니 내 자리로 다가와 대뜸 묻는다. “진짜야?” “응? 뭐가?” “훌라우프 데이트.” 어떻게 듣고 온건지, 금방 안 나보다도 다른 이들은 먼저 알고 있었던 듯 싶다. 내 결정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참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옷자락만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자, 옆에 령우를 보며 말한다. “너도 알고 있었어?” “응. 근데 걱정 안해도 돼. 내가 참가해서 1등할게. 그럼 되잖아.” 그래.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되는구나 싶어 얼굴에 동요하는 누치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령우의 말에 어떤 의미인지 모를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잠시 나와 령우를 번갈아 보다가 더럭 교실을 나간다. “어…야, 어디가?!” 내 물음에 대꾸없이 멀어진 녀석이었기에 멍하니 녀석이 나간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령우를 유심히 보고 있던 찬휘가 나에게 말했다. “번거롭게 됐네. 희렴이 훌라우프는 젬병인데.” “어…희렴이도 나간다구 했어?” “아무렴 제 여자친구가 나오는데 두 손 놓고 있겠어? 지금 당장 매점가서 훌라우프라도 사려는 거겠지. 아, 잠깐 볼펜 좀 줄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볼펜을 찬휘에게 건네고 빠르게 창가로 달려가 매점을 내려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구점 겸 매점에서 커다란 훌라우프를 하나 사들고 어설프게 돌려보는 원희렴 씨가, 내눈에 보이고 말았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질즘, 내가 건넨 팬으로 공책에 몇자 끄적인 찬휘가 그걸 령우에게 내보였고, 그걸 본 령우의 조금은 가슴 따끔할 수 밖에 없는 한 마디도. [너 위험해.] “뭐가?” “장난이라도…이쯤에서 관둬. 너 남의 거 넘보는 자식 아니잖아. 더군다나 친구 거는 더 더욱. 진짜가 되버리기 전에 그만 두는게 좋아.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거,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찬휘답지 않게 경직된 얼굴로 령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힘주어 말하면. 피식 웃으며 내게로 시선을 돌린 채 한 그 한 마디에 찬휘는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후에 이야기 했다. “늦었어, 인마. 충고는…돌이킬 수 있을 때 하는거야….” 나는 창밖 아래 어정쩡하게 훌라우프를 돌려 보고 있는 희렴일 내려다보며 함지박만한 미소를 짓고 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령우는 아무 것도 알리 없는 내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찬휘는 어느 한쪽도 택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때의 우리들 모습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지속 되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때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힌트는, 지금 저기 있는 원희렴은 누구를 보고 있냐는 것이었는데도…우리 셋, 모두가 생각해도 답은 하나라는 사실에 누구하나 쉽게 입을 뗄 수 없이 그저 파란만장할 축제준비로 떠들썩해있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3. “나한테는…그런 말 단 한마디도 없었잖아!” 이건 나를 상품으로 걸고 할 훌라우프데이트보다도 몹시 충격적인 일임에는 틀림 없었다. 울컥하는 심정에 거칠게 소리쳐봤지만 쑥스러운 듯 내 눈을 맞추지 못하며 가운을 여미는 원희렴과 그런 희렴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찬휘가 씨익 웃었다. “아마 이번 축제때는 우리반이 대박을 터트릴게 분명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찬휘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것은 정녕 본능.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누드 카페라니!! “누…누드 카페 같은 걸 교장 선생님도 허락한 거야?!” “에이, 누드카페라니 그렇게 말하면 음란해 보이잖아. 그냥 자신의 미술 실력을 알게 해줄 수 있는 naked art cafe라고 해줄래?” “이거나 그거나 뭐가 달라! 취지는 벗는다 이거 아니야?” “사실 이것도 누드라고 하긴 뭐해. 그냥 그림 모델이 되어주는 것 뿐인 걸? 벗는다하더라도 상의가 전부고. 아무래도 직접 그리고자 하는 애들보다도 그냥 차나 마시면서 구경이나하는 애들이 더 많을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그런 차원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수 십명 여자애들 앞에 웃통을 벗겨놓고 누드모델을 시키면서 걱정을 말라구? 말이 통하지 않을 법한 찬휘에게서 고개를 돌려 빠르게 원희렴과 눈을 마주치자 어울리지도 않게 붉어진 얼굴로 쇄골이 훤희 드러나는 가운을 더욱 여밀 뿐이다. 뭐여, 시방. 쑥스럼타는 새색시라두 되는 기분인가 부지? “그래서 너는 그냥 이걸 하겠다구?”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대.” 그래. 그러니까 결과는 하겠다 이거지! 뭐라고 크게 소리치고 난동이라도 피울까 하다가, 이 녀석도 결국은 내 처지라는 것에 어쩐지 이상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깊이 생각해보면 썩 나쁘지만은 않을 듯…일단 눈요기감은 되잖아…. 아직 9시 반. 곧 있으면 외부인을 개방하기 때문에 모두들 준비에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한편 반에서 나와 다른 부와 함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꼭 한번 들르러 오라고 한 령우의 말이 생각나 도착한 어느 동아리부실 앞.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빼곰이 들여다보자, 기타 손질을 하고 있던 령우가 먼저 날 발견하고는 손짓한다. “여기, 일루 와.” “뭐하는 거야?” “이따가 오후에 운동장에서 공연하기로 했어. 밴드 이름하야 데일밴드!” “그게 뭐야.-_-” 무척이나 개그스러운 밴드의 이름에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해버리고 말았고, 그 표정을 본 옆에 있던 남자애 하나가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령우만 그렇게 부르는 거고 정식명칭은 Destiny Lilusion이야. 그거 따서 저 새끼가 DL밴드라고 하는데, 한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앞으로 공연 때 안 껴줄 줄 알아라.” 장난스레 그 한마디를 하며,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그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내 18년 인생 중,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봤다. 그 장난스러운 말과 행동 가운데 저 미소는 실로 사람 입 벌어지게 만들었다. 살짝 들어간 보조개와 환상적인 눈웃음. “누…누구세요?” “아, 걔가 보컬 경준이야. 저기 드럼에 현석이, 기타에 민기랑 윤석이. 마지막으로 베이스에 나~” 특히 자신을 말할 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는 령우였는데, 경준님께 정신이 팔린 내가 그 말에 신경 따위나 썼을리 만무하다. 마이크 준비를 하고 있는 경준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서있자 코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머리를 두드리는 령우. “야, 뭐해?” “멋있다 진짜…잘생기구 노래두 잘하나봐. 우아…” 벙찐 내 표정에 그제야 뭣 때문에 이렇게 정신 나간 얼굴이 됐는지 알겠다는 듯이 혀끝을 찬다. 그래도 어찌하랴. 정말이지, 저 아이를 봐오기 전 내겐 최고였던 원희렴이, 갑자기 댈 것도 아니 라는 생각이 다 든다. “됐으니까 그냥 나가라. 더 있다간 아주 잡아먹겠다. 이따가 공연할 때 보러와.” “으응, 앞자리 좀 맡아주……” 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내쫒은 채 문을 닫아버리는 반령우. 아따, 저 놈 참. 복도를 나와 운동장으로 향하는 새에, 방송으로 커다란 음악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교문이 개방되었다. 아직 수업을 하고 있는 학교가 태반 이상일텐데도 대체 저 인원들은 어디서 오는건지, 수위아저씨가 굳게 닫혀던 문을 열기 무섭게 엄청한 인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들 서로 먼저 들어오느라 정신이 없어선, 나의 존재조차 인식치 못하고 소란스럽기만 했다. “꺄악, 쟤 괜찮다.” “학교 진짜 좋다. 근데 왜 이번엔 축제를 하루밖에 안한다지?” “여기 내 남자친구있어. 그러고보니 팜플렛에 각 반 마다 뭐하는지 써져있는데 어디갈까?” 등등. 또한 남고축제기에 여자들만 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듯 속속들이 남자들도 모여들고 있다. 확실히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단고축제가 유명한 모양이다. 다들, 그 중에 한명뿐인 여고생인 나의 존재는 모르는 듯 하지만 말이다. “야, 누드카페 있다는데 가볼까?” “누드카페?” “응. 다 벗는 건 아니구 그림 그리고 싶은 사람에 한해서 그림 모델 해준다나봐. 포즈 요청도 되는데? 함 가보자.” “야아~ 나 그림 못 그리는거 알면서~” “안 그리는 사람은 그냥 차만 마셔도 되는 것 같은데? 야, 여기 나와있는 애들 사진 완전 잘 생겼어. 한번 가보자. 잘하면 번호 딸 수 있잖아.” 결국은 입이 헤벌쭉 벌어져선 A반으로 향하는 여자들의 무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짐과 동시에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번호를 따다니…누구 마음대로 번호를 따!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고 A반 앞에서니, 제일 길게 줄이 늘어져있다. “어우 뭐야, 누가 밀고 지랄이야.” “저 교복 어디야? 첨 보는데. 암튼 누군 새치기 할 줄 몰라서 줄 서 있나?” 기다리기엔 지나치게 길게 늘어진 줄 때문에, 줄 서 있는 여인들의 가시 돋친 말에도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가자, 문앞에서 표를 받던 아이가 먼저 내 얼굴을 알아보고 말한다. “어? 아직 희렴이 타임 아닌데.” 어절씨구리. 타임도 나눴어? “상관없어. 안에 있지? 나 좀 들어갈게.” “응. 아마 커튼 뒤에 있을 거야. 애들한테 말하고 들어가.” “오케이.” 수많은 여자들의 야유를 받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바쁘게 서빙을 하거나, 한 켠에 책상을 모아놓고 급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들. 휘휘 둘러보니, 정 가운데 약간 좋은 의자 위에 웃통을 벗은 채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한 A반 준수하게 생긴 남자 아이와, 그걸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몇몇의 여자 아이들. 세상에…저걸 원희렴이 한단 말이지? 때마침 반으로 들어오는 찬휘를 보고는 희렴이가 있는 커튼 뒤로 들어가도 되겠느냐는 식의 손짓을 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여자들이 또 보고 이번엔 주먹이라도 날릴세라 빠르게 커튼 쳐진 안으로 들어오자 의자에 앉아있다가 누군가의 인기척에 깜짝 놀라하며 움찔하는 원희렴. “아까부터…왜 그렇게 별거 아닌 거에 놀라구 그래?” “이런 건 처음이니까.” “전문직으로 삼는 사람이 아닐테면 보통은 겪지도 않을 일이니 처음인게 당연하겠지.-_-네 타임은 언젠데?” “12시부터 3시까지.” 그냥 하지말라고 말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에 어쩐지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이 녀석이, 내심 해보고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은 나의 착각일까. ♬♩♪~♩♬♬♩♪♪~♩♪ 둘이 잠시 아무말도 없는 사이에, 녀석의 핸드폰 소리가 울리고 잠시 액정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은 원희렴이 이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네게 핸드폰을 건넸다. 내가 나를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건네 준 핸드폰. 원희렴의 핸드폰으로 나를 찾을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궁금함 가득함에 건네받은 핸드폰에선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워…원장님?!” 어떻게 번호를 아셨을까, 궁금도 했지만 언젠가 돈을 부치며 함께 적었던 번호를 기억하셨던거라 믿고, 또한 지금 학교 앞에 와 계시다는 말씀에 더욱이 갑작스럽고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학교 인거, 전혀 모르고 계셨을텐데 얼마나 놀라고 계실까,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교문쪽으로 뛰어나갔다. 헌데 빠르게 내 뒤를 쫓는 원희렴. “왜 나와?” “너희 원장님, 어머니 같은 분이라며. 인사드려야지.” 스치듯 했었던 말을, 이 녀석은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조금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며 다시 앞서 걸었다. 교정과 운동장을 지나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조금은 멋쩍게 서계신 원장선생님과…영웅이. “선생님! 영웅아!” 먼저 뵙고는 재빠르게 달려 나가자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시며 바라보시는 원장선생님과, 나를 보고 두 눈 동그랗게 뜨며 뛰어오는 영웅이다. “누나아!!!” 오랜만에 봤다고 그새 꽤 큰 듯한 영웅이는, 평소에는 본 척 만 척 하다가 몹시 반가운 듯 내 허리를 꼭 끌어 안는다. 나도 오랜만에 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냥 근처에 들를 일이 있어서…잘 지냈니?” “예. 잘 지냈어요. 아, 그러지 마시구 들어가세요. 축제라 어수선한데, 방에 들어가시면 조금 조용할 거예요.” “그래. 그럼 일단 들어갈까?” 내 옆에 서시다, 이내 옆에 있는 희렴일 보셨고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원희렴. 원장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으셨다. “누구야? 누나 친구야?” 한참 아래서, 희렴일 올려다 보며 묻는 영웅이. 원희렴 역시 가만히 영웅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응. 넌 누구야?” 그 질문 수준 참 비슷하다.-_-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웃음으로 내민 손을 잡는 영웅이다. “나는 한영웅이에요. 8살이요.” “응.” 잠시 잠깐의 악수 인 줄 알았지만, 그 둘은 꽤 오랫동안이나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통하는 뭔가가 있다거나 서로가 맘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학생. 미안하지만, 영웅이 좀 대신 봐주겠어요? 다희랑 짧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양해해주세요.” “괜찮습니다.”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잡고 있는 영웅이의 손을 흔들며 말하는 원희렴. “갈까?” “응. 근데 형이름은 뭐야?” 오래간만에 만난 영웅이는, 그렇게 내게 별다른 말없이 희렴이와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 “입양이라구요…? 세상에, 말두안돼…. 왜, 미리 말씀 안해주셨어요?!” 원장선생님은 애써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그 웃음에는 일말의 즐거움이나 기쁨 따위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눈물이나 슬픔을 감추려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밖에선 커다란 음악소리와 함성 소리 가득했지만, 나와 선생님 사이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전부터 계속 연락이 왔었어. 영웅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외국사람들인데다가, 호주라니 그렇게 먼 곳은 영웅이 스스로가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고싶대. 그런데 어떡하겠니….다행이 좋은 사람들이고, 영웅이가 좋다면 그걸로 되지 않겠니. 이따가 9시 비행기로 떠날 거야. 그 쪽에서 마중 오겠다고 했고. 그 참에 잠시 들렀어. 너는 보고 가야겠지 않나 싶어서.” “영웅이가…정말 가구 싶대요? 먼 곳인데, 아마 다시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정말 가겠대요?” “가고싶대.” 그렇지만, 호주라니. 한국 땅도 아닌 타지. 정말 그곳으로 가버린다면, 쉽게 볼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 가슴 한구석이 싸해짐과 동시에 울컥해졌다. 나자마자 보육원에 오게 되어서, 8년을 같이 지낸 내 ‘동생’ 이었다. 그런 아이가, 지금 남의 나라로 가서 다른 사람의 가족이 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영웅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텐데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기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영웅이가 원하니까 이해해주렴. 그쪽에서 매년 한번씩은 한국에도 꼭 오겠다고 했었으니까 영웅이 보면 웃으면서 인사해줄 수 있지?” 당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정말, 영웅이에겐 가족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잘된 일이라고. 축하해주어야 하는 거라고…. 잠시동안 아무말 없이 방안을 빙 둘러 보시던 원장선생님이 말씀했다. “그것보다 남학교 기숙사라고는 말 안했었잖니?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떻게, 지낼만 한 거야? 뭐 문제는 없구?” “아, 그건…지금처럼 걱정하실까봐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지내는데는 전혀 지장없어요! 방도 혼자 써서 편하구, 또 아이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구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걱정스러운 눈길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시는 원장선생님. 그러다 말고 문득 가방에서 흰봉투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 놓으셨다. “그리고 이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조심스럽게 열어본 흰 봉투엔, 언젠가 내가 보냈었던 듯한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걸 보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상한 거 아녜요. 걱정하지 않으셔두 되요. 그냥…잠깐 아르바이트 한 거예요.” 이젠 보수두 없구 기한도 엉망이 되어버렸고 여전히 힘들기만 한 그런 아르바이트.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더 힘이 들고 맘고생이 심할 걸 알구 있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학교생활하는 것도 힘들텐데 굳이 이럴 필요 없어. 이젠 옆에서 건강 챙겨 줄 사람도 없는데 무리하지 마라. 그리고 이건 네가 필요한데 쓰도록 해.” “아뇨…그걸로 영웅이 이쁜 옷 입혀서 보내주세요. 그리구, 애들 선물 하나씩 사가시면 정말 좋아할거예요. 제발 부담갖지 마세요. 그걸루 좋아요….” 내 어색한 웃음에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원장선생님. “가시게요?” “아니. 잠깐 교장선생님을 뵙고 몇 마디 좀 나누고 싶구나. 교장실까지 안내 좀 해줄래?” 원장선생님을 교장실 앞까지 데려다 드리고, 들어가시는 것 까지 보고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잠시 동안은 그 앞에서 원장선생님을 기다릴 생각었지만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해 다시 A반 교실로 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어? 누나!” 마침 반대편에서,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들고 또 다른 한쪽 손은 희렴이와 꼭 붙든 채로 내 앞으로 뛰어오는 영웅이. “뭐…하구 있었어? 재미 있었어?” “형이랑 돌아다니면서 웃기는 거 구경하구 맛있는 거 먹었어. 선생님은?!” “응.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계셔. 좀 있다가 오실 거야. 그때까지 축제 구경이나 하러 다니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영웅이의 왼손을 붙잡고 원희렴 앞에 섰다. “고마워, 봐줘서.” “괜찮아.” “우…누나, 형. 나 오줌마려.” “화장실 가구 싶어? 가자.” “피, 나 꼬맹이 아냐! 혼자 갈 수 있다, 뭐.” 그 말과 함께,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게 맡기고 교장실 건너 편 남자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멍하니, 영웅이가 멀어진 곳을 보고선 내게 말하는 희렴이. “무슨 일이야.” 특별히, 높낮이 있는 어조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말과 눈빛에 순간 울컥함이 치밀었다. “티 나?” “뭔데….”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본 지 한 시간도 영웅이를 귀여워해주고, 또 잘 따르는 영웅이를 본 이상 이 녀석도 내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긴박감에 말했다. “오늘, 오늘이 영웅이 호주로 입양되는 날이었는데 모르고 있었어. 분명 잘된 일이고 기뻐해줘야 하는데…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앤데…” 입술을 꾹 깨문채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묵묵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원희렴이, 자신 역시도 힘겹게 입을 뗐다. “가고 싶다면 가게 해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차칫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그렇다고 해서 네 옆에 남기는 건, 그 애의 행복이 아니잖아.” “…….” “그 애가 원한다면 보내. 그래도 돌아올 사람은… 돌아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은 돌아오게 되있어. 반드시.” 어째서…그 말이 내게 아닌 원희렴 자신에게 하는 말 같이 들렸을까. 이유를 알 수 없게, 나보다도 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그 말은, 분명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은예림이 원해서 자신은 보내주었지만,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은예림은…원희렴 옆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이라고. 마치 그렇게 들렸다. 또 다른 이유로 가슴 아릿해진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며 손을 털던 영웅이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렸고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보고섰자 손을 흔들며 말하는 영웅이. “나 이번엔 손 씻었어!” 그런 영웅일 보면서, 차마 나오지도 않는 억지 웃음을 지어낸 채 허릴 숙여 영웅이의 키에 맞춰 앉으며 말했다. “영웅아.” “응?” “호주…정말 가구 싶어?” “응.” “…거기가면 원장님두 못보구, 누나두 못보구, 영웅이가 좋아하는 소라도 못 볼지 모르는데…갈 거야? 아니면…누나 다시 제주도로 갈까? 그래서, 전처럼 다같이 모여서 살까? 누나 다시 제주도 간다고 해두 갈거야…?” “그래두 갈꺼야.” 아무리 그래두, 가지말라는 기색 역력한 얼굴로, 말투로 말했는데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하자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나쁜 녀석아….그렇게 고민두 안하구 대답하면, 누나가…섭섭하잖어….나는 너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슬픈데 이 나쁜 녀석아….” 나도 모르게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에 고갤 푹 숙여 버렸고, 이내 꽉 잡고 있던 영웅이의 가녀린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며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계…계속 보육원에만 자라면 훌륭한 어른이 되기 힘들다구 성훈이 형이 말했어! 호주가서 꼭 훌륭한 어른이 되서 다시 한국 올 꺼야! 어서어서 커서 돈 많이 벌면 다시 오꺼야. 그럼 그땐 누나랑 원장님이랑 소라랑 살꺼야. 다시오께. 그니까…울지마 누나….” 나보다도 훨씬 어른같이, 울고 있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때문에 울지 않으려고 해도 울음이 격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보다도 훨씬 많이 어른인 영웅이의 위로 아닌 위로에 더욱 꼭 ‘내동생 영웅이’를 끌어안았다. 이 어린 아이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말로 나는 무슨 생각으로 무슨 욕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내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도, 평생을 보살펴 줄 수도 없으면서. “그래…꼭 그러자.” 지켜질 수 있을지 미지수인 약속을 하면서도, 흐트러진 내 앞머릴 정돈해주며 미소짓고 있는 영웅이 때문에, 나 역시 작게 웃어보였다. 계속 이러고 있는 건 안되겠다 싶어 재빨리 눈물을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희렴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나는 영웅이랑 구경 좀 하고 있을게. 넌 그만 가봐. 고마웠어, 아깐. 12시부터 네 타임이잖아. 몇 분 안남았어, 얼른가. 늦겠다.” “……하지말라고 하면.” 가만히 우릴 보고만 있던 희렴이가 모처럼 말하던 순간이었다. 때문에 영웅이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다가 올려다 본 희렴이는, 언제나처럼 또렷한 흑갈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가지말라고 한마디만 하면. 얼마든지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왜 말리지 않아?”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4. 내 기억속 중 원희렴의 물음 중에서, 제일 대답을 바라는 어조의 말투. 가지말라고…하지말라고. 왜 말하고 싶지 않겠어. 그렇지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내가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때문에…차마 할 수 없던 말이었다. 그런 그 말을, 지금 저 녀석이 어째서 하지 않냐고 묻고 있다. 마치 잡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런 녀석 때문에…어렵게 다시 입을 뗐다. “그, 그럼…가지 마.”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그 한 마디에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원희렴. 어쩌면, 내가 이렇게 말하기를 이 녀석이 바라고 있었다고, 그런 착각을 하면 안될까…?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우. 뜨겁다. 뜨거와.” 영웅이가 손을 내저으며 부채질을 하는 시늉을 하기 전까진 말이다. “시끄러, 이 놈. 어… 어서 가자!” 희렴이에겐 안 보이게 영웅이에게 주먹을 꽉 쥐어보이고 그걸 보자 옛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건지 입을 꼭 다문다. 영웅이의 손을 잡고, 빠르게 다른 반을 기웃기웃 거리고 있을 쯤, 조그맣게 내게 물어오는 영웅이. “누나 봉 잡았네?” “무, 무슨 소리야!! 쬐…쬐그만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아니라며 손을 내저어 봤지만, 그런 나를 보며 개구진 미소로 말한다. “그래두 내가 희렴이 형아면 누나보다 더 이쁜 누나 사귀겠다.” “내가 형이랑 사귄다구 누가 그래?” “응? 아까 형이 그랬는데? 형 ‘여자친구’ 라구. 아니야?” “…아냐. 맞아.” 아이를 상대로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녀석이 한 말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어느새 옆에 나란히 선 희렴이의 얼굴을 힐끗 들여다 보았다. “왜 그래?” 내 시선을 눈치챈건지, 멋쩍게 얼굴을 더듬어보는 원희렴. “아냐, 아무것도.” 짧게 대꾸하고 영웅이의 손을 붙잡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아이들이 많이 모인 곳까지 다다랐고, 대뜸 왼쪽에 나. 가운데 영웅이, 오른쪽에 희렴이. 셋이 손을 잡고 걸어다니는 우스꽝 스러운 모양새에 흘끗흘끗 쳐다보곤 한다. “누구 동생이냐?” 구경 겸 복도를 돌아다니고 계시던 체육선생님께서 우리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영웅이를 보시며 물었다. “아, 제 동……” “우리 아이예요.” 길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내가 더는 그 말을 잇지도 못하게끔 딱 끊어버리는 원희렴. 놀란 내가, 영웅이보다 더욱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원희렴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서있었고 잠시 동안은 벙쩌 계셨던 선생님 마저, 이내 ‘크허허허허허’ 하는 크고 호탕한 웃음소리로 영웅이의 머리를 한번 부비고 걸음을 옮기신다. “재밌다. 그래, 다음에 또 데려 오너라. 크허허허허허~” 그 같지않은 농담이, 무척이나 맘에 드신 모양이었다. 선생님 멀어지고 나서야 내가 발끈해져선 한 마디 했고. “미쳤나봐, 정말! 남의 혼사길 막으려고 작정을 했어!” 부득부득 이를 갈며, 알 수 없는 심오함에 감정이 격해진 내가 녀석의 멱살까지 쥐어가며 화를 내자 여전히 그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냉정하게 한 마디 할 뿐이었다. “맞잖아. 우리가 데려온 아이인데 뭐.” “그게…보통은 그 말에 그렇게 생각 안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맞는 말이어서 차마 할 말 없어진 나. 그래…분명 우리가 데려온 건 맞지. 그렇지만 뭔가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말이야. 결국은 또 혼자 오바한 감에 멋쩍게 앞서 걸었다. “다희야.” 뒤를 돌아보자 얘기를 끝마치신 듯한 원장선생님이 뒤에서 이름을 부르시며 걸어오고 계셨다. “얘기 끝나셨어요?” “응. 간단히 인사만 드렸고, 비행기 시간 때문에 지금 떠나야 할 것 같다.” “벌써요?” 선생님과 영웅이를 번걸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영웅이가 천천히 손을 놓으며 원장 선생님 옆으로 섰다. 그런 영웅이를 바라보시며 조심스런 손길로 영웅이의 머릴 쓰다듬어주시는 원장선생님. 조금 더 있다가 가면 안되겠느냐고, 말도 해봤지만 이미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질테로 늦어진 터라 급히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결국은 교문 앞까지 따라나가서도 한참이나 다른 한 쪽 손에 잡은 영웅이의 손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그만 나와도 돼. 너무 걱정하지 말구, 있다가 전화하마. 감기 조심하구, 끼니거르지 말구. 힘든 일 있으면 전화하구…영웅아 누나랑 형한테 인사해야지.” 결국은 교문 앞까지 따라가서야 간신히 영웅이의 손을 놓을 수 없었고, 언제나처럼 해맑고 개구진 미소로 말하는 영웅이. “가께 누나. 꼭 다시 돌아오께, 나 잊구 있으면 안돼.” “잊기는 누가 잊는다구 그래…….” “구럼 우리 다음에 꼭 만나는 거야?” “…그래. 다음에 꼭….”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는 그 다음.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붉어져 오는 눈시울에 푹 고갤 숙여버렸다. “글구 형아. 재미있었어. 다음에 오면 꼭 놀이동산 같이 가야 해? 글구…약속은 꼭 지켜!” 둘이 있었던 잠시 잠깐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렷품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희렴이. 때마침 콜택시가 오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원장님과 택시에 올라탔던 영웅이가, 내가 교문을 나서 택시 앞까지 뛰어감과 동시에 다시 내려서며 말했다. “깜빡하고 안 한 말이 있어.” 내가 뭐냐고 묻기도 이전에, 허릴 숙인 내 귓가에 자그마하게 속삭인다. “내가 그동안은 말 못했는데 누난 내 첫사랑이었어.” “무…” 멍해진 내가 미처 당황해할 새도 없이 빠르게 택시에 올라타는 영웅이. 나는 그저 멍하니 서있었을 뿐이고, 곧 열린 차창 밖으로 영웅이가 말했다. “형아! 약속은 꼭 지켜야 해! 나중에 내가 와서 누나한테 물어볼 거야!” 곧 빠르게 멀어져 가는 택시 차창밖으로 연신 손을 흔드는 영웅이. 뒤늦게 차를 따라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다시 보자, 영웅아! 꼭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돌아와야 해…!!” 내 삶의 반을 함께 지낸 영웅이. 나보다도 먼저 어린이 되려는 그 아이를 보내고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점이 되고, 그 점마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고, 내 뒤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같이 기다려주고 있는 희렴이가 생각 났을 때쯤에서야 작게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서 크게 말했다.. “자, 들어가자!!” “안 울어…?”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멍하니 날 바라보는 희렴이. “울긴 왜 울어? 영영 못 만날 것도 아닌데. 아까 우리 약속하는 거 봤잖아, 다시 만나기로. 그래두…사실 싫은 건 어쩔 수 없어. 영웅이 마저도 나만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싫지만, 그래도 다시 만날 거니까.” 내 그 말에…희미한 미소로 웃음짓는 녀석. 나란히 서서 교문 안으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춰섰다. 갑자기 멈춰선 나를 보고 덩달아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는 원희렴에게,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돌아올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그랬잖아, 네가.” 체 대답도 하기 전에 내가 다시 말을 이었지만. “아니. 네가 틀렸어. 앉아서 떠난사람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원한다면, 놓치기 싫다면 직접 찾으러 가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어. 한번 떠난 사람이 두 번 떠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난…,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녀석은 과연,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내 말을 듣고, 떠난 은예림을 찾을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사실은 알려줘야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틀리다고. 그러니까… 혹여 네가 날 떠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의 나는 저럴거라고…. 그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는 희렴일 나 역시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곧, 작고도 낮은 목소리로 그 녀석이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뜻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대답이었지만, 적어도 노력이 담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될 수 있었다. ‥　 　　 ··+ 완결소설ⅰ | 담당Master : 배건희 (rjsgml0205@hanmail.net) 최신목록 | 목록 | 윗글 | 아랫글 [펌설]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21~30 》 번호 : 7678 글쓴이 : 부주인[리자] 조회 : 7 스크랩 : 0 날짜 : 2007.01.06 10:36 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 http://cafe.daum.net/bearnangman 21. “우어어어, 나는 죽을텨. 말리지마러~” 덮고 있던 하얀 이불을 둘둘 가늘게 말아 목에대고 매는 시늉을 하자 거침없는 단 한번의 손짓으로 내 목에 둘둘 말은 이불을 거둬낸다. 애써 해낸 자살시도 마저도 실패한 지금, 나는 그대로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정말…정말 죽고싶어어!! 쓰러진 것 까진 좋아. 오래간만에 나도 연약한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켰으니까. 그렇지만, 이유는 많잖아? 예를들면, 그래. 빈혈이라던가 두통. 아니, 복통도 사실 좋았단 말이야. 물론 내가 쓰러진 이유도 이를테면 복통의 한 종류이지만, 그것이…왜 하필 생리통이냔 말이다!! 그리구 이상하게, 아까까진 괜찮았던 엉덩이도 좀 아파. 마친 멍이라도 든 것처럼. 계속 작게 훌쩍거리리는 나를 보자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말한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는 나 때문에 깜짝 놀란 듯 싶더니, 이내 두 눈에 정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걸 보고는 또 놀란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이제 얼굴들구 학교도 못 돌아 다닐 거야…창피해서 어떻게 살어….” “아무도 모르는데 뭐 어때.”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희렴이와 령우, 찬휘 뿐이지만 소문이란 언제 불거질지 알 수 없는 것. 게다가…하필이면 이 녀석이어서 더 그래. “너희들 말구 또 아는 사람이 있을지 어떻게 알어? 아, 몰라. 정말…씨.” “난 괜찮은데.” “그거야 물론 니 얘기가 아니니깐 그러지! 그치만 잘 생각해봐. 이건 너두 창피할 일이야.” “그게 아니라 내 여자친구가 그거… 때문에 쓰러졌다고 해도 난 안 창피한데. 만악에 그거 갖다가 누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 일러.” “무…이르긴 뭘 일르냐.” 그거…라는 말에서 슬쩍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흐렸지만, 그래도 그 말은 작은 위로 같아서 울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길, 그래도 이미 나온 눈물은 떨어진다. 그러나 다시 씩씩하게 떨쳐냈고, 양호실을 나와서 원희렴이가 교실 앞까지 바래다주고야 작게 한숨을 내쉬고 교실로 들어섰다. 확실히, 아직 뭐 때문에 쓰러졌는지 모르는 듯 교실에 들어가자 다들 괜찮냐고 물으면서 어디가 아팠냐고 묻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자리로 좀 돌아가, 새끼들아. 좁아 죽겠는데 왜 다 몰려 들어.” 난처할 내 입장을 알았는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몰려든 아이들을 몰아내는 령우. 애들이 다 자리로 돌아가는 걸 보고서야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묻는다. “좀 괜찮아?” “응, 지금은. 아까…고마웠어. 네가 데려다 준거지?” 그 말에 갑자기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볼멘소리로 말한다. “그래, 렴이 그 새끼만 아니면 내가 너를 공주님처럼 고이 안아모셔서 양호실에 데려다주고 간호까지 해주었을테지.” “에? 그럼 희렴이가 데려갔었어? 기억이 하나도 안나.” “그래. 그래서 참 다행인 것 같다. 니가 나한테 업힌 채로 바닥에 떨어진 걸 기억하지 못해서.” “뭐…뭐라구? 떨어져? 내가? 왜!” “하여간 그 새끼, 도움이 안돼. 자기가 업겠다길래 내가 업고가겠다고 했더니, 너 밀어트리던데? 그러니 당연히 넌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운동장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는 너를 주워서 들춰 업고 양호실로 가더라.” 어쩐지…그래서 멀쩡했던 엉덩이가 아팠군. 이 자식들, 정말 죽여버릴까부다. 아니 아파죽겠는데 빨리 데려다주진 못할 망정, 서로 업겠다구 다투다가 결국엔 바닥에 내팽게쳐서 업구 가? 있다가 죽었어.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치솟아 오르는 화에 이를 잘근잘근 갈고 있을 쯤,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원래 과학실로 가야했을텐데, 내부를 수리하면서 더러워진 탓에 아직 사용할 수가 없다고 결국 이론수업이 되었다. 헌데 또 얼마 있지 않아 고갤 돌리고 묻는 령우. “근데, 나 아까 좀 멋있었지?” “뭐가?” “너 업고 갈 때 말이야. 내가 일빠로 달려왔잖아, 희렴이보다.” “기억이 안나는데?” “뭐? 아니, 너는 무슨 기집애가 그런 것도 하나 기억 못하냐? 내가 얼마나 멋있게 달려갔는지 알아?!” “아, 글쎄 모르겠다니까 이놈이 왜 돌아서 시비야, 시비가!” 그래도 내심, 멋있다는 말을 기다하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약간 실망한 기색이 비춘다. 미안한 마음에…그냥 멋있었다고 말할걸 그랬나, 생각할 쯤 그런 생각을 싹다 저버리게 만드는 그 녀석의 한마디. “완전 무거운 오리궁뎅이.” 차마 소리를 못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버린 나. 그나마 이성적으로 판단해 입술끝까지 올라온 소리는 삼켰는데, 몸뚱이는 벌떡 일어났다 이거지. 아니나 다를까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들과, 인자한 미소로 말씀하시는 생물선생님. “그래, 그럼 다희가 할테냐?” “에에…예…?” “그래도 과학실이 여간 커서 혼자 청소하기는 무리가 있을텐데 괜찮겠니?” “아니, 저…그게 아닌데…” 분명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다. 난데없이 과학실 청소라니…? 제길. 강다희가 이렇지 뭐. 결국 어쩔 수 없이 푹 썩은미소로 애써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착하구나. 음…그래, 그럼 령우랑 친한 것 같던데 령우 네가 같이 다희 좀 도와줘라.” “예?!” “자, 수업 시작할까?” 아자 신난다. 하긴 나만 걸리면 그건 정말 억울하지. 어느새 내 얼굴에는 기분좋은 미소가 감돌았고, 제가 판 구덩이에 제 몸 던진 꼴이 된 령우는 심하게 경직된 얼굴로 수업에 임했다. .. “켁켁, 무슨 먼지가 이렇게 많아?” 방과 후, 자율 학습은 제껴두고 과학실로 들어온 령우와 나.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듯 뽀얗게 먼지가 싸인 과학실은, 내부수리 공사 때문에 더욱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오래됐으니까 그렇지. 겉은 반지르르 해보여도 사실 우리 학교 건물이 얼마나 낡았는지 아냐? 여기 맨날 문 고장나고 비오면 물 새고 그랬어.” “알았으니까 빨리 빗자루 집어들고 쓸어.” 4층 맨 구석에 자리한 과학실. 교복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청소를 시작했다. 먼지와 페인트 냄새가 진동을 하는 과학실 안은, 실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하고 있었다. “헉, 헉…아직 다 안 쓸었어?” “아직 한참 멀었어. 제길, 왜 이렇게 더러워.” “더는 못하겠어.” 반도 다 닦지 못하고 책상에 나뒹굴고 있던 내 모습을 보던 령우가 열심히 쓸다 말고 내 쪽을 바라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에 쥐여져 있던 걸레를 가로채 내려놓으며 말한다. “넌 쉬고 있어 내가할게.” “에이, 됐어요. 같이 할게요 먼저 하구 계셔.” 역시나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눈을 가늘게 뜬 채 거부도 해보았지만, 녀석의 딱 한 마디에 다시 입을 꼭 다물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힘들어하는 거 내가 보기 싫어서 그래. 그냥 가만히 있어. 너 나한테 약점 잡혔어.” 별로 약점 같지도 않은 걸 약점이랍시고 저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닌 나를 위한 행동을 하는 반령우. 대체가…원희렴 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더는 헥헥대며 청소를 하기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민망해서 하다못해 물이라도 떠오려고 양동이를 들었는데 그 마저도 하지 못하게 내 손에 들린 양동이를 건네받아 수돗가로 가는 령우. 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이, 그래도 내가 좋다는 말을 들은 이상 새삼 신경쓰이고 있다…. 한참 동안 대걸레를 들고 복도와 교실안을 왔다갔다 하던 령우가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른다. “다희야.” “응? 왜?” “혼자는…못하겠다. 좀 도와라. 죽겠어.” 이래야 반령우 답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올뻔한 걸, 참아가며 대꾸없이 뾰루퉁한 얼굴로 마포를 빨아가지고 돌아왔다. 아직도 열심히 청소를 하던 령우가, 들어오면서 바람에 닫힌 문소리에 깜짝 놀라기까지. “너…다시 청소하랬다구 화났지?” “엥? 무슨 소리야. 화가 나긴 왜 화가 나?” “그럼 문을 왜 그렇게 콱 닫어. 놀랐잖냐!” “바람이야, 바람! 또 시비걸테냐?” 어쩌면 우리 둘은 절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 시키듯이 한시간 걸러 다투는 구나 정말.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기두 전에 빠르게 다시 청소를 하는 령우로 인해 의미없는 말이 오가던 것은 거기서 멈췄다. 한참을 왔다갔다 거리며 닦고 쓸고를 반복하자 조금은 깔끔해진 듯한 과학실. 아직 다 하지도 못했는데 그새 가을이 되어 이제 곧 겨울이 되려는 저녁하늘은 7시 밖에 안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어두워져 있었다. “어둡다. 불 좀 키자.” 불을 켜기 위해 벽을 짚어가며 문가로 다가섰다가…나는 또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멀찍이 문앞에 서있는 나를 보고는 다가오며 묻는 령우. “왜 그러고 서있어?” “…문이 안 열려.” 손잡이를 이리 저리 돌려보았지만, 도무지 열리지 않는 문.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서는 문고리에 매달린 나를 애써 진정시키려는 듯 한쪽으로 밀어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곤 대신 문고리를 잡아본다. “문이 안 열리긴 왜 안 열……리네.” “왜 이러지 이거?!” “설마 아까 너 들어오다 문 닫힐때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이거 전부터 자주 이랬단 말이야.” “뭐어? 진짜 그러면 어떡해?!” 난감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복도측으로 있는 창문은 얼굴만 디밀어도 끼일 크기에, 이곳은 4층 구관 제일 끝 복도. 주위에 다른 실습실도 없는 이상, 수위아저씨가 순찰을 돌기 전까지 몇이나 이곳에 올까. 망연자실한 내가 털썩 바닥에 주저 앉자 령우 역시도 적잖게 당황했는지 따라 앉는다. “제길, 미치겠네. 그러게 문부터 고치라고 몇 번이나 건의 했는데.” “령우야. 우리 설마 이대로 영영 못나가는 거 아닐까? 응? 나 벌써 배도 고프구, 불도 안 켜지니까 너무 무서워. 우리 이대로 갇히면 어떡해? 안돼, 난 그럴 수 없어. 내 마지막을 너와 보낼 수는 없어!!” “놀고있다.-_-아마 곧 있으면 누가 찾아오겠지. 학생이 둘이나 없어졌는데 가만 있겠냐? 오도방정말고 가만 좀 있어!” “으응.” 깜깜한 과학실 안에…달빛에 의지해서 창가에 마주 앉아 있는 우리 둘. 주위를 둘러보면. 하얀 천에 덮인 해골선생과, 절단면이 표시되어있는 인체를 본뜬 마네킹. 크고 많은 서랍 장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들. 진짜 정신 나가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오돌오돌 떨며 옆에 앉은 령우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무슨 얘기라두 해봐 령우야. 나 무서워 죽겠어.” “뭐가 그렇게 무서워?” “아니 생각을 해봐. 주위를 둘러보라구. 저런 범상치않은 것들이 있는 공간에 갇혀있는 와중인데.” 그러나 이번 마저도 령우의 한 마디에 다시 굳게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나는…좋은데. 너랑 둘이 있을 수 있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이제는 장난처럼 여기면서 등짝 한대 때려줄 수도 없는 걸. 대답이 없는 나 때문에 잠시 조용해졌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함에 보통이라면 민망하게 생각했을만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대체…원희렴은 왜 은예림을 좋아할까? 나는 왜 또 원희렴을 좋아하고, 너는 왜 나를 좋아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 분명히 알아온 시간보다 모르고 지낸 시간이 많은데 그 짧은 시간동안 왜 좋아하게 됐을까.” 령우의 얼굴은 보고있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시선. 그리고 녀석의 이유있는 대답. “그건 니가 그 녀석을 모르고 지낸 오랜 날들보다 알고 지낸 짧은 시간들이 더 행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렇거든. 게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성의 판단이 아닌 감성의 판단이야. 그러니까 굳이 좋아하는 이유 같은 걸 생각할 필요는 없어.” “…오, 간만에 멋진 말 좀 했는데?” “그지? 아씨, 내가 생각해도 그러네. 잊어먹기 전에 적어놔야지.” 아닌 척 했지만, 둘 다 이런 곳에 있게 된 사실을 긴장해서인지 조금씩은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결국은 그 대화마저도 오가다 말았고 쌀쌀해진 10월 저녁 날씨에 내가 차갑게 식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말했다. “춥다. 마이 입고 올걸.” “내가 안아줄까?” “한번 죽어볼래?” 장난인 듯 말하는 진심이었을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느물느물 어깨에 손을 올리는 녀석을 향해 눈을 부릅 치뜨자, 흠칫 하더니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린다. 하여간, 그래도 령우랑 있으니까 그나마 웃고 있는거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이러고나 있었을까. 문득,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희렴일 좋아하기 이전에 너에 대해 한 5%로만 더 알았어도 널 참 좋아하게 됐을 거야.” 그 말과 함께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잠깐동안은 아무 표정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령우가, 이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뗐다. “그 약점, 악용하고 싶어졌어.” “응…?” “눈감아. 아니면 떠도 되고.” 그리고는 한쪽 손으로 천천히 내 손을 꽉 움켜잡은 채 다가오는 녀석의 얼굴. 잠시동안은 뭐가 뭔지 짐작도 안가다가, 령우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져 오고 또 심장박동수가 빨라질 무렵 슬금슬금 뒤로 내빼며, 애써 침착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 왜 이래? 좋은 말 할때 저리 가. 한번의 실수가 네 인생을 좌우할……” “현재 강다희한테 거부권 없음.” “너, 너! 진짜 이러면 나 평생 책임지라고 한다?!” “그럼 더 좋지.” 이게 아니지. 이게 아니지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차마 더는 밀쳐낼 수있을 만한 거리가 아닌 상태에, 더욱 가까워져 온 녀석의 입술에 조금만 더 잘못 움직였다가는 닿아버릴 듯한 거리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2. 곧 닿을테지. 지금 눈을 뜨면 그 녀석의 얼굴에 바로 코앞에 있을거야…라고 생각한지, 그래. 아직 1분은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무 일도 없는게,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져서 가늘게 눈을 뜨자 조금만 더 고갤 움직이면 닿을 듯 가까이서 눈 감은 나를 바라보고 있던 령우가, 막상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붉어진 얼굴로 빠르게 멀어져 갔다.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앞에두고, 달아오른 얼굴을 어쩔 줄 몰라한다. “제길…….”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난 두 눈을 꿈뻑 꿈뻑 뜨며 멍해져 있을 뿐, 아무 말도 말도 할 수가 없어서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면, 그런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해 고갤 푹 숙인 채 말한다. “못하겠어. 떨리잖아.” “푸…푸하하하하.” 그제서야 안심이랄지, 알 수 없는 실망이랄지 어쨌거나 한시름 놓으며 터져나온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자, 아니꼬운 듯 인상을 쓰고 나를 바라보는 령우다. “웃겨?” “웃기잖아. 재밌어, 하여간.” 힘겹게 웃음을 멈추고서야, 다시금 본 령우의 얼굴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웃어서…화났나 싶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할까 망설이던 터 나보다 먼저 입을 떼는 령우. “다음번에도 이런 기회가 생기면 그땐 멈추지 않을거야.” 벌써 여러 번, 웃게 만들었다가 진지 해질 수 밖에 없도록 하는 령우. 덕분에 잠시 쉴까 했던 심장이 다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소리와 복도에서 새어 들어온 빛, 그 앞에 선 사람 때문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지만. 끼기긱― 안에서는 열리지도 않던 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너무나 쉽게 열리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묵묵히 우리 둘을 바라보고 선 원희렴. “어…어떻게 알고 왔어? 안그래두 문이 안 열려서 어떡해야 하나 걱정하구 있었는데…” 그런 내 말과 표정보다는, 나와 령우. 두 사람의 사이를 번갈아 보고있기만 해서 새삼 의식하게 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하구 있었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들어올 때 봤던 나와 령우의 분위기를 신경쓰고 있던 건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다. 특별히…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웬지 모르게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편같은 심정에 가슴 한켠이 화악 시리다. “일은 무슨! 그냥 같이 얘기 하구 있었을 뿐이야. 정말이야.” “그래. 나가자.” 아니라는 내 한 마디에, 더는 추궁하지 않고 내 손을 꽉 잡은 채로 문 밖으로 향하는 희렴이. 분명, 아직도 창가에 걸터 앉아있는 령우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너..너두 어서 나와 령우야.” 희렴이의 손에 이끌린 채로 멀찍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선 령우에게 말했다. 다음으로 령우가 무슨 말을 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는 이미 계단을 내려서고 있던 터라 볼 수가 없었다. 숨도 돌리지 않고 계단을 내려와 화단 앞에 다다르고 놔서야 꽉 쥐고 있던 손을 놓는다. 서늘한 저녁바람에 땀이 다 날 정도로 굳게 잡혀있다가 놓여진 손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나쁜놈이 되버렸어, 내가.” 작은 목소리지만 또렷했다. 그렇지만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그 한마디에 의아해하는 나를 뒤로 하고 앞서 걷는다. “무슨 뜻이야, 그게?” “그냥…네가 령우랑 같이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희렴일 보면서도 나 또한 마른침을 삼킬 뿐, 어째서냐고 이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정말 착각이었다하더라도 그냥 그 순간의 착각을 깨트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희렴이가 하는 그 말이 ‘질투’ 이길 바라는 심정에 그저 입술만 깨물고 서있었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 “말도 안돼! 나는 무조건 결사반대야!!” 다들 신나서 떠들어대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내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내가 눈을 부릅뜨며 반 아이들 모두를 번갈아보았지만 다들 신경쓰지도 않는 듯. “강다희, 네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걸린 문제를 왜 내가 선택할 자격이 없느냔 말이야?! 어떻게 나를 상품으로 내걸 생각을 할 수 있어? 다들 너무한 거 아냐?!” “다희야. 한번 잘 생각해봐. A반 녀석들은 대체적으로 성적과 외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 분명 대단한 일을 기획할 것이 분명하고, B반 녀석들은 4차원인 덕에 기상천외한 뭔가를 내놓을거야. C반은 있으나마나. 그리고 우리반, 우리 D반에는 네가 있지 않냐. 이번 축제 때 뭔가 이슈거리가 될만한게 너밖에 없어!”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다. 그렇지만…막상 그네들더러 자신의 반을 위해 상품이 되라한다면 쉽게 오케이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뭐라고 해봤자 더는 들어줄 것 같지도 않은 저들의 태도에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어때, 재밌겠는데?” “니들이야 재밌겠지. 당사자는 전혀, 조금도 재미없습메. 그리구…이왕하려면 거창하게 하지, 판당 3천원짜리 훌라우프게임에서 이기면 나와 데이트가 주어진다니~? 내가 3천원 가치 밖에 안된다 이거야?!” 이쯤에서 당연하게 ‘아니’ 라고 말해줘야 할 령우인데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3천원과 내 가치의 여부를 재보고 있음이 상관없다. “남고 축제가 재미나 있을라나.” 시큰둥한 혼잣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령우.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전남에서 단고축제하면 유명해. 여학교에서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냐? 그야 물론 그 중의 반은 나 때문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입 닫고 고개 앞으로 돌리셔?” 생각보다 싸한 내 태도에, 실망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앞으로 돌아앉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호응해줄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래두 뭐…그 중 10%로는 너 때문에 온다고 치자.” “뭐어?10%? 참나…사실과는 한참 동 떨어진 얘기지만, 그래. 대충 그렇다고 치고. 너는 그런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돼.” “됐으니까 다신 뒤돌아보지마.” 쓸데없는 짓이었다.-_-다신 이런 거 해주나봐. 가방을 꾸리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할즈음, 터벅터벅. 굉장히 빠르고도 박진감 넘치는 발소리와 함께 발칵 우리반 문을 여는 원희렴. 뒤에는 찬휘. 교실을 휘휘 둘러보더니 내 자리로 다가와 대뜸 묻는다. “진짜야?” “응? 뭐가?” “훌라우프 데이트.” 어떻게 듣고 온건지, 금방 안 나보다도 다른 이들은 먼저 알고 있었던 듯 싶다. 내 결정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참 민망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옷자락만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자, 옆에 령우를 보며 말한다. “너도 알고 있었어?” “응. 근데 걱정 안해도 돼. 내가 참가해서 1등할게. 그럼 되잖아.” 그래. 생각해보니까 그래도 되는구나 싶어 얼굴에 동요하는 누치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령우의 말에 어떤 의미인지 모를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잠시 나와 령우를 번갈아 보다가 더럭 교실을 나간다. “어…야, 어디가?!” 내 물음에 대꾸없이 멀어진 녀석이었기에 멍하니 녀석이 나간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령우를 유심히 보고 있던 찬휘가 나에게 말했다. “번거롭게 됐네. 희렴이 훌라우프는 젬병인데.” “어…희렴이도 나간다구 했어?” “아무렴 제 여자친구가 나오는데 두 손 놓고 있겠어? 지금 당장 매점가서 훌라우프라도 사려는 거겠지. 아, 잠깐 볼펜 좀 줄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볼펜을 찬휘에게 건네고 빠르게 창가로 달려가 매점을 내려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구점 겸 매점에서 커다란 훌라우프를 하나 사들고 어설프게 돌려보는 원희렴 씨가, 내눈에 보이고 말았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질즘, 내가 건넨 팬으로 공책에 몇자 끄적인 찬휘가 그걸 령우에게 내보였고, 그걸 본 령우의 조금은 가슴 따끔할 수 밖에 없는 한 마디도. [너 위험해.] “뭐가?” “장난이라도…이쯤에서 관둬. 너 남의 거 넘보는 자식 아니잖아. 더군다나 친구 거는 더 더욱. 진짜가 되버리기 전에 그만 두는게 좋아.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거,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찬휘답지 않게 경직된 얼굴로 령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힘주어 말하면. 피식 웃으며 내게로 시선을 돌린 채 한 그 한 마디에 찬휘는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후에 이야기 했다. “늦었어, 인마. 충고는…돌이킬 수 있을 때 하는거야….” 나는 창밖 아래 어정쩡하게 훌라우프를 돌려 보고 있는 희렴일 내려다보며 함지박만한 미소를 짓고 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령우는 아무 것도 알리 없는 내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찬휘는 어느 한쪽도 택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때의 우리들 모습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지속 되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때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힌트는, 지금 저기 있는 원희렴은 누구를 보고 있냐는 것이었는데도…우리 셋, 모두가 생각해도 답은 하나라는 사실에 누구하나 쉽게 입을 뗄 수 없이 그저 파란만장할 축제준비로 떠들썩해있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3. “나한테는…그런 말 단 한마디도 없었잖아!” 이건 나를 상품으로 걸고 할 훌라우프데이트보다도 몹시 충격적인 일임에는 틀림 없었다. 울컥하는 심정에 거칠게 소리쳐봤지만 쑥스러운 듯 내 눈을 맞추지 못하며 가운을 여미는 원희렴과 그런 희렴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찬휘가 씨익 웃었다. “아마 이번 축제때는 우리반이 대박을 터트릴게 분명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찬휘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것은 정녕 본능.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누드 카페라니!! “누…누드 카페 같은 걸 교장 선생님도 허락한 거야?!” “에이, 누드카페라니 그렇게 말하면 음란해 보이잖아. 그냥 자신의 미술 실력을 알게 해줄 수 있는 naked art cafe라고 해줄래?” “이거나 그거나 뭐가 달라! 취지는 벗는다 이거 아니야?” “사실 이것도 누드라고 하긴 뭐해. 그냥 그림 모델이 되어주는 것 뿐인 걸? 벗는다하더라도 상의가 전부고. 아무래도 직접 그리고자 하는 애들보다도 그냥 차나 마시면서 구경이나하는 애들이 더 많을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그런 차원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수 십명 여자애들 앞에 웃통을 벗겨놓고 누드모델을 시키면서 걱정을 말라구? 말이 통하지 않을 법한 찬휘에게서 고개를 돌려 빠르게 원희렴과 눈을 마주치자 어울리지도 않게 붉어진 얼굴로 쇄골이 훤희 드러나는 가운을 더욱 여밀 뿐이다. 뭐여, 시방. 쑥스럼타는 새색시라두 되는 기분인가 부지? “그래서 너는 그냥 이걸 하겠다구?”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대.” 그래. 그러니까 결과는 하겠다 이거지! 뭐라고 크게 소리치고 난동이라도 피울까 하다가, 이 녀석도 결국은 내 처지라는 것에 어쩐지 이상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깊이 생각해보면 썩 나쁘지만은 않을 듯…일단 눈요기감은 되잖아…. 아직 9시 반. 곧 있으면 외부인을 개방하기 때문에 모두들 준비에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한편 반에서 나와 다른 부와 함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꼭 한번 들르러 오라고 한 령우의 말이 생각나 도착한 어느 동아리부실 앞.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빼곰이 들여다보자, 기타 손질을 하고 있던 령우가 먼저 날 발견하고는 손짓한다. “여기, 일루 와.” “뭐하는 거야?” “이따가 오후에 운동장에서 공연하기로 했어. 밴드 이름하야 데일밴드!” “그게 뭐야.-_-” 무척이나 개그스러운 밴드의 이름에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해버리고 말았고, 그 표정을 본 옆에 있던 남자애 하나가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령우만 그렇게 부르는 거고 정식명칭은 Destiny Lilusion이야. 그거 따서 저 새끼가 DL밴드라고 하는데, 한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앞으로 공연 때 안 껴줄 줄 알아라.” 장난스레 그 한마디를 하며, 총을 쏘는 시늉을 하는 그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내 18년 인생 중,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봤다. 그 장난스러운 말과 행동 가운데 저 미소는 실로 사람 입 벌어지게 만들었다. 살짝 들어간 보조개와 환상적인 눈웃음. “누…누구세요?” “아, 걔가 보컬 경준이야. 저기 드럼에 현석이, 기타에 민기랑 윤석이. 마지막으로 베이스에 나~” 특히 자신을 말할 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는 령우였는데, 경준님께 정신이 팔린 내가 그 말에 신경 따위나 썼을리 만무하다. 마이크 준비를 하고 있는 경준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서있자 코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머리를 두드리는 령우. “야, 뭐해?” “멋있다 진짜…잘생기구 노래두 잘하나봐. 우아…” 벙찐 내 표정에 그제야 뭣 때문에 이렇게 정신 나간 얼굴이 됐는지 알겠다는 듯이 혀끝을 찬다. 그래도 어찌하랴. 정말이지, 저 아이를 봐오기 전 내겐 최고였던 원희렴이, 갑자기 댈 것도 아니 라는 생각이 다 든다. “됐으니까 그냥 나가라. 더 있다간 아주 잡아먹겠다. 이따가 공연할 때 보러와.” “으응, 앞자리 좀 맡아주……” 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내쫒은 채 문을 닫아버리는 반령우. 아따, 저 놈 참. 복도를 나와 운동장으로 향하는 새에, 방송으로 커다란 음악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교문이 개방되었다. 아직 수업을 하고 있는 학교가 태반 이상일텐데도 대체 저 인원들은 어디서 오는건지, 수위아저씨가 굳게 닫혀던 문을 열기 무섭게 엄청한 인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들 서로 먼저 들어오느라 정신이 없어선, 나의 존재조차 인식치 못하고 소란스럽기만 했다. “꺄악, 쟤 괜찮다.” “학교 진짜 좋다. 근데 왜 이번엔 축제를 하루밖에 안한다지?” “여기 내 남자친구있어. 그러고보니 팜플렛에 각 반 마다 뭐하는지 써져있는데 어디갈까?” 등등. 또한 남고축제기에 여자들만 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듯 속속들이 남자들도 모여들고 있다. 확실히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단고축제가 유명한 모양이다. 다들, 그 중에 한명뿐인 여고생인 나의 존재는 모르는 듯 하지만 말이다. “야, 누드카페 있다는데 가볼까?” “누드카페?” “응. 다 벗는 건 아니구 그림 그리고 싶은 사람에 한해서 그림 모델 해준다나봐. 포즈 요청도 되는데? 함 가보자.” “야아~ 나 그림 못 그리는거 알면서~” “안 그리는 사람은 그냥 차만 마셔도 되는 것 같은데? 야, 여기 나와있는 애들 사진 완전 잘 생겼어. 한번 가보자. 잘하면 번호 딸 수 있잖아.” 결국은 입이 헤벌쭉 벌어져선 A반으로 향하는 여자들의 무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짐과 동시에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번호를 따다니…누구 마음대로 번호를 따!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고 A반 앞에서니, 제일 길게 줄이 늘어져있다. “어우 뭐야, 누가 밀고 지랄이야.” “저 교복 어디야? 첨 보는데. 암튼 누군 새치기 할 줄 몰라서 줄 서 있나?” 기다리기엔 지나치게 길게 늘어진 줄 때문에, 줄 서 있는 여인들의 가시 돋친 말에도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가자, 문앞에서 표를 받던 아이가 먼저 내 얼굴을 알아보고 말한다. “어? 아직 희렴이 타임 아닌데.” 어절씨구리. 타임도 나눴어? “상관없어. 안에 있지? 나 좀 들어갈게.” “응. 아마 커튼 뒤에 있을 거야. 애들한테 말하고 들어가.” “오케이.” 수많은 여자들의 야유를 받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바쁘게 서빙을 하거나, 한 켠에 책상을 모아놓고 급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들. 휘휘 둘러보니, 정 가운데 약간 좋은 의자 위에 웃통을 벗은 채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한 A반 준수하게 생긴 남자 아이와, 그걸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몇몇의 여자 아이들. 세상에…저걸 원희렴이 한단 말이지? 때마침 반으로 들어오는 찬휘를 보고는 희렴이가 있는 커튼 뒤로 들어가도 되겠느냐는 식의 손짓을 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여자들이 또 보고 이번엔 주먹이라도 날릴세라 빠르게 커튼 쳐진 안으로 들어오자 의자에 앉아있다가 누군가의 인기척에 깜짝 놀라하며 움찔하는 원희렴. “아까부터…왜 그렇게 별거 아닌 거에 놀라구 그래?” “이런 건 처음이니까.” “전문직으로 삼는 사람이 아닐테면 보통은 겪지도 않을 일이니 처음인게 당연하겠지.-_-네 타임은 언젠데?” “12시부터 3시까지.” 그냥 하지말라고 말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에 어쩐지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이 녀석이, 내심 해보고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은 나의 착각일까. ♬♩♪~♩♬♬♩♪♪~♩♪ 둘이 잠시 아무말도 없는 사이에, 녀석의 핸드폰 소리가 울리고 잠시 액정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은 원희렴이 이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네게 핸드폰을 건넸다. 내가 나를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건네 준 핸드폰. 원희렴의 핸드폰으로 나를 찾을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궁금함 가득함에 건네받은 핸드폰에선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워…원장님?!” 어떻게 번호를 아셨을까, 궁금도 했지만 언젠가 돈을 부치며 함께 적었던 번호를 기억하셨던거라 믿고, 또한 지금 학교 앞에 와 계시다는 말씀에 더욱이 갑작스럽고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학교 인거, 전혀 모르고 계셨을텐데 얼마나 놀라고 계실까,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교문쪽으로 뛰어나갔다. 헌데 빠르게 내 뒤를 쫓는 원희렴. “왜 나와?” “너희 원장님, 어머니 같은 분이라며. 인사드려야지.” 스치듯 했었던 말을, 이 녀석은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조금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며 다시 앞서 걸었다. 교정과 운동장을 지나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조금은 멋쩍게 서계신 원장선생님과…영웅이. “선생님! 영웅아!” 먼저 뵙고는 재빠르게 달려 나가자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시며 바라보시는 원장선생님과, 나를 보고 두 눈 동그랗게 뜨며 뛰어오는 영웅이다. “누나아!!!” 오랜만에 봤다고 그새 꽤 큰 듯한 영웅이는, 평소에는 본 척 만 척 하다가 몹시 반가운 듯 내 허리를 꼭 끌어 안는다. 나도 오랜만에 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냥 근처에 들를 일이 있어서…잘 지냈니?” “예. 잘 지냈어요. 아, 그러지 마시구 들어가세요. 축제라 어수선한데, 방에 들어가시면 조금 조용할 거예요.” “그래. 그럼 일단 들어갈까?” 내 옆에 서시다, 이내 옆에 있는 희렴일 보셨고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원희렴. 원장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으셨다. “누구야? 누나 친구야?” 한참 아래서, 희렴일 올려다 보며 묻는 영웅이. 원희렴 역시 가만히 영웅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응. 넌 누구야?” 그 질문 수준 참 비슷하다.-_-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웃음으로 내민 손을 잡는 영웅이다. “나는 한영웅이에요. 8살이요.” “응.” 잠시 잠깐의 악수 인 줄 알았지만, 그 둘은 꽤 오랫동안이나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통하는 뭔가가 있다거나 서로가 맘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학생. 미안하지만, 영웅이 좀 대신 봐주겠어요? 다희랑 짧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양해해주세요.” “괜찮습니다.”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잡고 있는 영웅이의 손을 흔들며 말하는 원희렴. “갈까?” “응. 근데 형이름은 뭐야?” 오래간만에 만난 영웅이는, 그렇게 내게 별다른 말없이 희렴이와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 “입양이라구요…? 세상에, 말두안돼…. 왜, 미리 말씀 안해주셨어요?!” 원장선생님은 애써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그 웃음에는 일말의 즐거움이나 기쁨 따위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눈물이나 슬픔을 감추려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밖에선 커다란 음악소리와 함성 소리 가득했지만, 나와 선생님 사이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전부터 계속 연락이 왔었어. 영웅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외국사람들인데다가, 호주라니 그렇게 먼 곳은 영웅이 스스로가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고싶대. 그런데 어떡하겠니….다행이 좋은 사람들이고, 영웅이가 좋다면 그걸로 되지 않겠니. 이따가 9시 비행기로 떠날 거야. 그 쪽에서 마중 오겠다고 했고. 그 참에 잠시 들렀어. 너는 보고 가야겠지 않나 싶어서.” “영웅이가…정말 가구 싶대요? 먼 곳인데, 아마 다시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정말 가겠대요?” “가고싶대.” 그렇지만, 호주라니. 한국 땅도 아닌 타지. 정말 그곳으로 가버린다면, 쉽게 볼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 가슴 한구석이 싸해짐과 동시에 울컥해졌다. 나자마자 보육원에 오게 되어서, 8년을 같이 지낸 내 ‘동생’ 이었다. 그런 아이가, 지금 남의 나라로 가서 다른 사람의 가족이 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영웅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텐데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기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영웅이가 원하니까 이해해주렴. 그쪽에서 매년 한번씩은 한국에도 꼭 오겠다고 했었으니까 영웅이 보면 웃으면서 인사해줄 수 있지?” 당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정말, 영웅이에겐 가족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잘된 일이라고. 축하해주어야 하는 거라고…. 잠시동안 아무말 없이 방안을 빙 둘러 보시던 원장선생님이 말씀했다. “그것보다 남학교 기숙사라고는 말 안했었잖니?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떻게, 지낼만 한 거야? 뭐 문제는 없구?” “아, 그건…지금처럼 걱정하실까봐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지내는데는 전혀 지장없어요! 방도 혼자 써서 편하구, 또 아이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구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걱정스러운 눈길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시는 원장선생님. 그러다 말고 문득 가방에서 흰봉투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 놓으셨다. “그리고 이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조심스럽게 열어본 흰 봉투엔, 언젠가 내가 보냈었던 듯한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걸 보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상한 거 아녜요. 걱정하지 않으셔두 되요. 그냥…잠깐 아르바이트 한 거예요.” 이젠 보수두 없구 기한도 엉망이 되어버렸고 여전히 힘들기만 한 그런 아르바이트.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더 힘이 들고 맘고생이 심할 걸 알구 있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런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학교생활하는 것도 힘들텐데 굳이 이럴 필요 없어. 이젠 옆에서 건강 챙겨 줄 사람도 없는데 무리하지 마라. 그리고 이건 네가 필요한데 쓰도록 해.” “아뇨…그걸로 영웅이 이쁜 옷 입혀서 보내주세요. 그리구, 애들 선물 하나씩 사가시면 정말 좋아할거예요. 제발 부담갖지 마세요. 그걸루 좋아요….” 내 어색한 웃음에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원장선생님. “가시게요?” “아니. 잠깐 교장선생님을 뵙고 몇 마디 좀 나누고 싶구나. 교장실까지 안내 좀 해줄래?” 원장선생님을 교장실 앞까지 데려다 드리고, 들어가시는 것 까지 보고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잠시 동안은 그 앞에서 원장선생님을 기다릴 생각었지만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해 다시 A반 교실로 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어? 누나!” 마침 반대편에서,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들고 또 다른 한쪽 손은 희렴이와 꼭 붙든 채로 내 앞으로 뛰어오는 영웅이. “뭐…하구 있었어? 재미 있었어?” “형이랑 돌아다니면서 웃기는 거 구경하구 맛있는 거 먹었어. 선생님은?!” “응. 지금 누구랑 얘기하고 계셔. 좀 있다가 오실 거야. 그때까지 축제 구경이나 하러 다니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영웅이의 왼손을 붙잡고 원희렴 앞에 섰다. “고마워, 봐줘서.” “괜찮아.” “우…누나, 형. 나 오줌마려.” “화장실 가구 싶어? 가자.” “피, 나 꼬맹이 아냐! 혼자 갈 수 있다, 뭐.” 그 말과 함께, 다른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게 맡기고 교장실 건너 편 남자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멍하니, 영웅이가 멀어진 곳을 보고선 내게 말하는 희렴이. “무슨 일이야.” 특별히, 높낮이 있는 어조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말과 눈빛에 순간 울컥함이 치밀었다. “티 나?” “뭔데….”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본 지 한 시간도 영웅이를 귀여워해주고, 또 잘 따르는 영웅이를 본 이상 이 녀석도 내 심정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긴박감에 말했다. “오늘, 오늘이 영웅이 호주로 입양되는 날이었는데 모르고 있었어. 분명 잘된 일이고 기뻐해줘야 하는데…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앤데…” 입술을 꾹 깨문채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묵묵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원희렴이, 자신 역시도 힘겹게 입을 뗐다. “가고 싶다면 가게 해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차칫하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그렇다고 해서 네 옆에 남기는 건, 그 애의 행복이 아니잖아.” “…….” “그 애가 원한다면 보내. 그래도 돌아올 사람은… 돌아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은 돌아오게 되있어. 반드시.” 어째서…그 말이 내게 아닌 원희렴 자신에게 하는 말 같이 들렸을까. 이유를 알 수 없게, 나보다도 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그 말은, 분명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은예림이 원해서 자신은 보내주었지만,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은예림은…원희렴 옆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이라고. 마치 그렇게 들렸다. 또 다른 이유로 가슴 아릿해진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며 손을 털던 영웅이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렸고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보고섰자 손을 흔들며 말하는 영웅이. “나 이번엔 손 씻었어!” 그런 영웅일 보면서, 차마 나오지도 않는 억지 웃음을 지어낸 채 허릴 숙여 영웅이의 키에 맞춰 앉으며 말했다. “영웅아.” “응?” “호주…정말 가구 싶어?” “응.” “…거기가면 원장님두 못보구, 누나두 못보구, 영웅이가 좋아하는 소라도 못 볼지 모르는데…갈 거야? 아니면…누나 다시 제주도로 갈까? 그래서, 전처럼 다같이 모여서 살까? 누나 다시 제주도 간다고 해두 갈거야…?” “그래두 갈꺼야.” 아무리 그래두, 가지말라는 기색 역력한 얼굴로, 말투로 말했는데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하자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나쁜 녀석아….그렇게 고민두 안하구 대답하면, 누나가…섭섭하잖어….나는 너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슬픈데 이 나쁜 녀석아….” 나도 모르게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에 고갤 푹 숙여 버렸고, 이내 꽉 잡고 있던 영웅이의 가녀린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며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계…계속 보육원에만 자라면 훌륭한 어른이 되기 힘들다구 성훈이 형이 말했어! 호주가서 꼭 훌륭한 어른이 되서 다시 한국 올 꺼야! 어서어서 커서 돈 많이 벌면 다시 오꺼야. 그럼 그땐 누나랑 원장님이랑 소라랑 살꺼야. 다시오께. 그니까…울지마 누나….” 나보다도 훨씬 어른같이, 울고 있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때문에 울지 않으려고 해도 울음이 격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보다도 훨씬 많이 어른인 영웅이의 위로 아닌 위로에 더욱 꼭 ‘내동생 영웅이’를 끌어안았다. 이 어린 아이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말로 나는 무슨 생각으로 무슨 욕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내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도, 평생을 보살펴 줄 수도 없으면서. “그래…꼭 그러자.” 지켜질 수 있을지 미지수인 약속을 하면서도, 흐트러진 내 앞머릴 정돈해주며 미소짓고 있는 영웅이 때문에, 나 역시 작게 웃어보였다. 계속 이러고 있는 건 안되겠다 싶어 재빨리 눈물을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희렴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나는 영웅이랑 구경 좀 하고 있을게. 넌 그만 가봐. 고마웠어, 아깐. 12시부터 네 타임이잖아. 몇 분 안남았어, 얼른가. 늦겠다.” “……하지말라고 하면.” 가만히 우릴 보고만 있던 희렴이가 모처럼 말하던 순간이었다. 때문에 영웅이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다가 올려다 본 희렴이는, 언제나처럼 또렷한 흑갈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가지말라고 한마디만 하면. 얼마든지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왜 말리지 않아?”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4. 내 기억속 중 원희렴의 물음 중에서, 제일 대답을 바라는 어조의 말투. 가지말라고…하지말라고. 왜 말하고 싶지 않겠어. 그렇지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내가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때문에…차마 할 수 없던 말이었다. 그런 그 말을, 지금 저 녀석이 어째서 하지 않냐고 묻고 있다. 마치 잡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런 녀석 때문에…어렵게 다시 입을 뗐다. “그, 그럼…가지 마.”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그 한 마디에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원희렴. 어쩌면, 내가 이렇게 말하기를 이 녀석이 바라고 있었다고, 그런 착각을 하면 안될까…?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우. 뜨겁다. 뜨거와.” 영웅이가 손을 내저으며 부채질을 하는 시늉을 하기 전까진 말이다. “시끄러, 이 놈. 어… 어서 가자!” 희렴이에겐 안 보이게 영웅이에게 주먹을 꽉 쥐어보이고 그걸 보자 옛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건지 입을 꼭 다문다. 영웅이의 손을 잡고, 빠르게 다른 반을 기웃기웃 거리고 있을 쯤, 조그맣게 내게 물어오는 영웅이. “누나 봉 잡았네?” “무, 무슨 소리야!! 쬐…쬐그만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아니라며 손을 내저어 봤지만, 그런 나를 보며 개구진 미소로 말한다. “그래두 내가 희렴이 형아면 누나보다 더 이쁜 누나 사귀겠다.” “내가 형이랑 사귄다구 누가 그래?” “응? 아까 형이 그랬는데? 형 ‘여자친구’ 라구. 아니야?” “…아냐. 맞아.” 아이를 상대로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녀석이 한 말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어느새 옆에 나란히 선 희렴이의 얼굴을 힐끗 들여다 보았다. “왜 그래?” 내 시선을 눈치챈건지, 멋쩍게 얼굴을 더듬어보는 원희렴. “아냐, 아무것도.” 짧게 대꾸하고 영웅이의 손을 붙잡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아이들이 많이 모인 곳까지 다다랐고, 대뜸 왼쪽에 나. 가운데 영웅이, 오른쪽에 희렴이. 셋이 손을 잡고 걸어다니는 우스꽝 스러운 모양새에 흘끗흘끗 쳐다보곤 한다. “누구 동생이냐?” 구경 겸 복도를 돌아다니고 계시던 체육선생님께서 우리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영웅이를 보시며 물었다. “아, 제 동……” “우리 아이예요.” 길지도 않은 말이었는데, 내가 더는 그 말을 잇지도 못하게끔 딱 끊어버리는 원희렴. 놀란 내가, 영웅이보다 더욱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원희렴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서있었고 잠시 동안은 벙쩌 계셨던 선생님 마저, 이내 ‘크허허허허허’ 하는 크고 호탕한 웃음소리로 영웅이의 머리를 한번 부비고 걸음을 옮기신다. “재밌다. 그래, 다음에 또 데려 오너라. 크허허허허허~” 그 같지않은 농담이, 무척이나 맘에 드신 모양이었다. 선생님 멀어지고 나서야 내가 발끈해져선 한 마디 했고. “미쳤나봐, 정말! 남의 혼사길 막으려고 작정을 했어!” 부득부득 이를 갈며, 알 수 없는 심오함에 감정이 격해진 내가 녀석의 멱살까지 쥐어가며 화를 내자 여전히 그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냉정하게 한 마디 할 뿐이었다. “맞잖아. 우리가 데려온 아이인데 뭐.” “그게…보통은 그 말에 그렇게 생각 안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맞는 말이어서 차마 할 말 없어진 나. 그래…분명 우리가 데려온 건 맞지. 그렇지만 뭔가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말이야. 결국은 또 혼자 오바한 감에 멋쩍게 앞서 걸었다. “다희야.” 뒤를 돌아보자 얘기를 끝마치신 듯한 원장선생님이 뒤에서 이름을 부르시며 걸어오고 계셨다. “얘기 끝나셨어요?” “응. 간단히 인사만 드렸고, 비행기 시간 때문에 지금 떠나야 할 것 같다.” “벌써요?” 선생님과 영웅이를 번걸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영웅이가 천천히 손을 놓으며 원장 선생님 옆으로 섰다. 그런 영웅이를 바라보시며 조심스런 손길로 영웅이의 머릴 쓰다듬어주시는 원장선생님. 조금 더 있다가 가면 안되겠느냐고, 말도 해봤지만 이미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질테로 늦어진 터라 급히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결국은 교문 앞까지 따라나가서도 한참이나 다른 한 쪽 손에 잡은 영웅이의 손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그만 나와도 돼. 너무 걱정하지 말구, 있다가 전화하마. 감기 조심하구, 끼니거르지 말구. 힘든 일 있으면 전화하구…영웅아 누나랑 형한테 인사해야지.” 결국은 교문 앞까지 따라가서야 간신히 영웅이의 손을 놓을 수 없었고, 언제나처럼 해맑고 개구진 미소로 말하는 영웅이. “가께 누나. 꼭 다시 돌아오께, 나 잊구 있으면 안돼.” “잊기는 누가 잊는다구 그래…….” “구럼 우리 다음에 꼭 만나는 거야?” “…그래. 다음에 꼭….”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는 그 다음.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붉어져 오는 눈시울에 푹 고갤 숙여버렸다. “글구 형아. 재미있었어. 다음에 오면 꼭 놀이동산 같이 가야 해? 글구…약속은 꼭 지켜!” 둘이 있었던 잠시 잠깐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들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렷품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희렴이. 때마침 콜택시가 오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원장님과 택시에 올라탔던 영웅이가, 내가 교문을 나서 택시 앞까지 뛰어감과 동시에 다시 내려서며 말했다. “깜빡하고 안 한 말이 있어.” 내가 뭐냐고 묻기도 이전에, 허릴 숙인 내 귓가에 자그마하게 속삭인다. “내가 그동안은 말 못했는데 누난 내 첫사랑이었어.” “무…” 멍해진 내가 미처 당황해할 새도 없이 빠르게 택시에 올라타는 영웅이. 나는 그저 멍하니 서있었을 뿐이고, 곧 열린 차창 밖으로 영웅이가 말했다. “형아! 약속은 꼭 지켜야 해! 나중에 내가 와서 누나한테 물어볼 거야!” 곧 빠르게 멀어져 가는 택시 차창밖으로 연신 손을 흔드는 영웅이. 뒤늦게 차를 따라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다시 보자, 영웅아! 꼭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돌아와야 해…!!” 내 삶의 반을 함께 지낸 영웅이. 나보다도 먼저 어린이 되려는 그 아이를 보내고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점이 되고, 그 점마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고, 내 뒤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같이 기다려주고 있는 희렴이가 생각 났을 때쯤에서야 작게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서 크게 말했다.. “자, 들어가자!!” “안 울어…?”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멍하니 날 바라보는 희렴이. “울긴 왜 울어? 영영 못 만날 것도 아닌데. 아까 우리 약속하는 거 봤잖아, 다시 만나기로. 그래두…사실 싫은 건 어쩔 수 없어. 영웅이 마저도 나만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싫지만, 그래도 다시 만날 거니까.” 내 그 말에…희미한 미소로 웃음짓는 녀석. 나란히 서서 교문 안으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춰섰다. 갑자기 멈춰선 나를 보고 덩달아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는 원희렴에게,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돌아올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그랬잖아, 네가.” 체 대답도 하기 전에 내가 다시 말을 이었지만. “아니. 네가 틀렸어. 앉아서 떠난사람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원한다면, 놓치기 싫다면 직접 찾으러 가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어. 한번 떠난 사람이 두 번 떠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난…,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녀석은 과연,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내 말을 듣고, 떠난 은예림을 찾을지 말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사실은 알려줘야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틀리다고. 그러니까… 혹여 네가 날 떠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의 나는 저럴거라고…. 그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는 희렴일 나 역시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곧, 작고도 낮은 목소리로 그 녀석이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뜻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대답이었지만, 적어도 노력이 담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될 수 있었다. “그냥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뻔 했나봐.” “왜….” “사실, 여기 오면 큰아버지 가족들이랑… 또 학교에서 친구들 많이 사겨서 시끌벅적하게 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외롭거든. 방두 혼자쓰구, 친구도 없구…잠을 혼자 자는 것도, 혼자 어딘가를 걷고 돌아다니는 것도 사실 익숙하지 않아.” 자그맣게 말한 내 속마음에 묵묵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녀석의 한 마디. “혼자 두지 않을게.” “응?” “항상 같이 있을게. 거리를 걷든, 공부를 하든… 아플때도 심심할 때도 영웅이 몫까지 옆에 있어줄게. 외롭지 않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들지 않게.” 종일 우울한 얼굴이었다가, 그 말 한 마디로 웃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원희렴 또한 역시 좋아 할 수 밖에 없었다. 설령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따스한 사람이라하더라도. “응!” 내 웃음에, 녀석 역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운 채로 걸었다. 계속 뒤쳐지는 걸음을 따라잡아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근데, 영웅이랑 무슨 약속을 했길래 나중에 물어보겠다는 거야?” “비밀이야.” “엥? 비밀은 무슨, 뭔데 그래~?” “…나중에. 내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면 알려줄게.” 말과 함께, 잠시 동안은 묵묵히 걷다가, 이내 피식하고 웃는 원희렴. 한참동안 이유를 물었지만 대꾸없이 작은 웃음소리로 대신 할 뿐이었다. 나도…지키고 싶다, 그 약속.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5. “나도 참가할래!” “야, 줄서. 어디서 새치기야.” 상황을 본 나와 원희렴이 기가 막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기막히다 못해, 어이없음에 웃음 조차 나오질 않았다. A반 다음으로 길게 늘어진 이 줄은, 정녕 우리 D반 줄이 맞더냐…물론 그것보다도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문 앞에 현수막으로 크게 걸려진 내가 아닌 내 사진이었지만 말이다. “무슨 짓을 한 걸까…….” “우리 나라가 IT산업 최강국이라는 걸 실감한다.” “제발 내 사진을 보고 그런 걸 실감하진 말아줄래?” 확실히, 현수막 속의 나는 머리스타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변형되어 있었다. 심각하게 오똑한 콧날하며, 왕방울만한 눈에, 복숭아빛 입술까지. 그야말로 순정만화 속 그녀로 변한 내 사진에 혹한 남자들은 교실 안에서 10명을 뽑기 위한 예선전을 치르고 있었고, 한켠에 앉아 열심히 돈을 새고 있던 반장은 이 상황을 멀거니 지켜보고 선 나와 희렴일 보고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희 네가 여기 와 있으면 어떡해!” “어떡하냐니, 오면 안돼?” “당연하지. 포토샵 제일 잘한다는 놈 불러서 세 시간 공들여 한 건데 너라는 거 들통나면 어쩔거야.” “그러니까 누가 그 따위 조악한 사기 치래?! 난 몰라. 나야 야유의 눈길 한번 받으면 끝날 일지만, 나중에 어떡하려구 그래?” “나중일은 나중에 걱정하고. 암튼 벌써 100명 정도는 된 거 같다. 희렴이도 아까와서 했고.” 배시시 웃으며 생각없이 내뱉은 반장의 그 한 마디에, 옆에 서있던 원희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반장과 희렴일 번갈아 보며 물었고. “엥? 희렴이도?” “으…아, 맞다. 비밀로 하랬었는데.” 이 새끼. 조잘조잘 다 말해놓고 뒤늦게 비밀은 무슨 비밀. 내 시선에 조금씩 얼굴이 붉어져 가던 희렴이는 곧 반장을 향해 알 수 없는 눈짓을 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섰던 내가 물었다. “그래서…이겼어?” “응. 98개나 했어. 아마 여지껏 애들 중에선 손에 꼽히지 않나 싶은데. 아무튼 밴드공연 끝나면 바로 본선할 거야. 교장선생님도 게임에 대해서 들으시곤, 몹시 재밌어 하시던걸.” 이번 또한, 희렴일 대신 말하는 반장. 훌라우프 못한다더니…. 매점에서 처음 훌라우프를 사서 어설프게 돌려보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어떤 노력으로 98개나 했을지 새삼 가슴 뭉클해진다. ‘남자친구’ 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입술 끝까지 올라온 고맙다는 말을 꼭 삼켰다. “가자.” 조금은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는 녀석. 잡혀진 손을 한번 보고, 다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니 언제나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한다. “령우 공연하는 거 보러. 조금 있으면 시작할 거야.” “응! 그런데 거기 보컬 되……” 체 말을 잇지 못한 상태로,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 시선을 떼지 않고 희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누군가. 말을 걸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망설이는 듯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고 서있기만 하다가…나와 눈이 마주쳐짐으로 인해 멈칫하며 빠르게 사람들 속으로 모습을 감춘…은예림…. 분명, 사진 속의 그 아이. 원희렴이 사랑하는 그 아이. “왜 그래?” 그제야 내가 멍하니 뒤만 바라보고 섰다는 걸 깨닫고 뒤를 돌아보려는 희렴이의 팔을 꽉 잡은 채 말했다. “아니야, 가자. 더 늦으면 사람 없을 거 같아.” 때문에 미처 뒤를 돌아보기 이전에 내게 이끌려 운동장으로 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해.” “뭐가?” “그냥…그냥 미안해.” 뜬금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되내는 나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하는 녀석. “바보.” 만약 봤으면… 갔을 거잖아. 또 나 혼자 남겨둔 채로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갈 거였잖아. 나쁘다고 말해도, 나쁜년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었어.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에 도착하자, 이미 공연은 시작된 듯 많은 아이들이 몰려 있었고 이리저리 파玆榕?간신히 맨앞에 설 수 있었다. 열창하는 보컬과, 힘차게 두드리는 드럼. 정신없이 연주하는 베이스와 기타. 우릴 보고 눈짓하는 령우. 한 곡의 노래가 끝나자 공연을 보고 있던 수많은 이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하…그럼 이번엔 신청곡 받아볼게요. 특별히 신청하고 싶으신 노래 있으신 분?” 다들 소리지르며 좋아하는 곡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 가운데 묵묵히 지켜보고 서기만 한 희렴이와 나를 알아보고 말하는 보컬. “거기 남자 분, 신청할 노래 있어요?” “……Don't Cry.” 잠시동안 고민하던 듯한 눈치의 희렴이가 부탁한 곡. “오케이. Don't Cry, 저도 좋아하는 곡이예요~” 보컬의 손짓에, 잠시 베이스 연주를 하던 한 명이 베이스를 내려놓은 채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고, 그렇게 연주가 시작됐다. 노래가 시작되자 웅성거리던 사람들 역시 조용해졌다. “좋아하는 노래야?” “응.” 그대의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우리의 사랑을 볼수 없을 테니 울지 말아요. 이제야 나는 알겠으니 날 사랑하던 그대는 이미 없다는걸. So you don't cry for me 세월 지나도 난 변하지 않아. And I cry for you 이밤 지나면 이젠 안녕. 영원히… 그대의 아픔도 눈물도 슬픈 상처도 내가 갖겠다던 약속들 잊지 않았기에 울지 말아요. 이토록 사랑하기에 이제 안녕.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So you don't cry for me 세월 지나도 난 변하지 않아. And then I cry for you 이밤 지나면 이젠 안녕. 영원히…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영원히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언제나 영원히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So you don't cry for me… 그때의 내 기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모두가 보는 원희렴은 나와 같은 느낌이었을까. 듣기 좋은 보컬의 목소리와, 잔잔한 연주. 그리고 애틋한 가사까지, 마치 하나하나 녀석의 진심같이 느껴진 건. 노래가 끝나자, 우뢰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시끄러운 가운데, 문득 올려다 본 원희렴은 찾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왔는 지 안 왔는 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 를 찾듯, 계속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녀석의 그 표정이, 왜 그렇게 슬퍼보였을까. 죄를 진 것만 같았다. 그때 원희렴의 친구가 했던 말과 같이 껴선 안될 사이에 함께 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벅차 오를 것만 같은 눈물 때문에, 차마 더는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는 나를 보고는 맘춰 세우는 희렴이. “어디 가는 거야?” “늦었어.” “뭐가….” “너무 늦어버렸다구…….” 영웅이를 보냈을 때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지금에야 흐르고 있었다. 다시 그를 찾아온 그녀와, 끈임없이 그녀를 찾고 있는 그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낄 자리는 없어.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욱 화가 나고 가슴 아픈 사실은…너무 늦었어. 이제와 친구로 돌리기엔 너무 늦었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이 감정을…전으로 되돌릴 순 없다구……. “봤어, 그 애.” “…누굴…….” “은예림. 여기 와 있어.” 힘겹게 내뱉은 그 한 마디에, 확 커진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는 원희렴. 왜…진작에 말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더라도 미안해 하지 않을 거야. 너는 다시 날 버려두고 그 애한테 뛰어갈테니까. 그럼 분명히, 우린 서로에게 하나씩의 잘못을 주고 받은 샘이 되는 거니까 미안해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런 다짐으로 녀석이 화를 내든, 아니면 그대로 어딘가에 있을 그 아일 찾아 뛰어가든 그저 고개 숙여 눈 꼭 감은 채 기다리고 있는 내게, 그 녀석의 한 마디. “고개 들어.” 생각보다 무겁지 않은 목소리에 힘없이 숙였던 고갤 들어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네가 울어.” “…….”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화를 내지도, 은예림을 찾아 헤매지도 않고 소매끝으로 눈물범벅이 되어 올려다보는 내 얼굴을 닦아준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있기만 한 내 손을 잡아 끈 채 수돗가로 향하며 말하는 희렴이. “세수하자.” “왜 안 가? 여기 있는데, 지금이면 찾을 수 있을텐데 왜……” 아무말 없이, 그저 차가워진 내 손을 잡고 수돗가로 향할 뿐. 그런데 그 손이, 미세하지만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도…….그 순간 생각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설령 나만 포기하면 모든게 괜찮은 일일텐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잡을 수 있는데까지 잡고 놓지 않을 거야, 라고. 하나님. 제가 정말 이 아일 잡을 수 있을까요. 제가 언젠가 이 녀석에게, 은예림보다 크게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6. “코, 킁.” “크으으응~” 코에 휴지를 대준 턱에, 이렇게 무턱대고 코를 풀어도 되나 싶었지만, 이내 시원하게 풀어낸 코에, 막상 정말 풀 줄은 몰랐다는 듯 약간 질린 얼굴로 휴지를 확인하고 버리는 원희렴. “후회 안 해?” “응.” “정말…후회 안 해?”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은 이유가 대체 뭘까. 노랫소리, 말소리 시끄러운 가운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없이 서있는 녀석에게 말했다. “근데 왜 안 갔어. 후회할 거면서….” “노력할 거니까.” 우리 둘 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면. 그저 아무 말 없이 얼굴만 바라보고 선 나에게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너 두고 안 가…약속했잖아. 지킬게. 노력할게…….” 점점 작아진 말소리였지만 그런 다짐이 흐트러질까봐서 인지, 내 손을 더욱 굳게 잡는 원희렴. 나 또한 그 손을 꽉 잡고, 혹여 눈시울이 붉어진 게 들킬까 고갤 숙인 채 서있었을 뿐이다. 그 약속, 꼭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아, 2학년 D반 훌라우트 데이트 본선 참가자 분들은 운동장 조회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교내에 크게 울려퍼지는 반장의 목소리. “저기 말하는 데이트가…날 걸은 이벤트가 아니겠지…?” “맞는 것 같은데. 가보자.” 잡은 내 손을 이끌고 운동장 쪽으로 걸어 나가는 희렴이. “오메, 내가 못 살어~ 고작 반에서 하는 이벤트를 저렇게 공개적으로 하는 거야?” “재밌는데 왜.” “재밌기는 개뿔! 있다가 돌이 날러 올지두 몰러. 그 뿐이면 좋게? 끌려가서 맞는 거 아닐까? 아…대체 왜 난 의도치않게 피를 봐야 하는 거냐고~~” 머리를 쥐뜯으며 울분을 토하는 내 어깨에 넌지시 손을 올리며 말한다. “상관없어. 내가 이길테니까.” 또한 안 어울리게 붉어진 얼굴하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되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으응. 꼭 이겨.” 조회대 앞으로 가니, 방송을 듣고 몰려든 아이들과 본선 진출자로 보이는 남학생 여덟명 가량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주춤주춤 원희렴 뒤에 숨은 채 조심스럽게 조회대 쪽으로 걸어나갔고, 단상 위에서 날 내려다 본 반장 녀석이, 이제야 속내를 내비추며 내 팔을 끌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여기, 이 여학생이 아까 그 사진 속 오늘의 데이트 주인공 ‘강다희’ 입니다. 모두들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환영? 놀고 자빠졌다. 너는 정녕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되지 않느냔 말이다 “헉!” 그때의 그 시선과 웅성거림들이란…아마 내 평생 이토록 깊게 뇌리에 박힌 기억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서 나를 올려다보는 희렴일 비롯한 여덟명의 학생과, 어느새 조회대 아래 걸려진 내 성형사진과 단상 위 실물을 비교해 보고 웅성웅성 거리는 아이들 “저게 뭐야!” 저게 뭐야라니…. “헉. 저건 너무 했다. 정도껏 고쳤어야지…나간 애들 뭐됐다.” “본선 참가한 애들 표정 좀 봐.” 과연, 나조차도 고개 들기가 심히 민망 할 정도로 그들의 표정은 폭주의 끝을 달리고 있었으니, 헌데 이 일로 마음 상한 건, 그네들 뿐만이 아니라구!! 괜히…나가고 싶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내보낸 것도 모자라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들끼리 고친 사진 때문에 욕먹고 야유 받는 건 나라구. 게다가 이걸로 나한테 돌아오는 것도 한 푼 없고! 이거 정말 눈물난다. “마지막 참가자 도착했습니다~ 시합 언제 시작해요?” 멀리서 공연을 마치고 베이스를 한 켠에 내려놓으며, 주위의 분위기는 아랑곳 않고 싱글생글 웃는 령우. [에헴, 암튼 그럼 다희양의 응원을 듣고, 시합 시작하겠습니다.] 이 자식. 나를 매장 시키려고 환장을 한게야. 모두들 웅성대느라 정신없는 터, 잠시 뒤돌아 반장 녀석의 멱살을 쥐며 말했다. “니가 정녕 쳐맞고 싶은 거?” “에이~ 어차피 하려면 즐겁게 해야지. 자, 빨리 대충 몇 마디 하구 끝내자구.” “넌 이따가 끝나고 봐.” 또 다른 이들 보일 듯 말들 주먹을 움켜쥐고 돌아선 채, 지어지지도 않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또 마침 확성기를 들여다 대는 반장. [에…모두들 열심히 하셔서 꼭 이기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딱 한 마디만 한 채 얼른 단상 아래로 내려 섰다. 물론 망연자실해서 나를 내려다보던 대회 참가자들과 구경꾼들의 지나친 시선에 몸이 다 따가왔다. 운동에 세로로 길게 10개 줄의 라인이 그려지고 맨 앞엔 훌라후프와 중간 중간 각각의 장애물들을 거쳐 마지막으로 반환 지점에 나를 엎고 골인해야 성공. 이제 다들 자리에 서려고 할 무렵, 손 들며 말하는 누군가. “어이, 진행자. 이거 기권 안돼?” “어? 나두나두! 3천원 없었던 걸로 할테니까 그냥 기권 할래.” 저 새끼들…-_-그냥 콱 다 죽여버릴까….내가 알 수 없는 심오함에 주먹을 굳게 쥐고 있을 무렵, 당황한 듯 애써 그 술렁임을 무마시키고 있었다. “어차피 시작한거니까 기권은 안됩니다. 다들 자리에 서주세요.” “제기랄.” “씨발….” 나랑 데이트 한번 하는 게…그렇게 ‘제기랄, 씨발’ 소리 나올 일이란 말이냐….제길. 이거 사람 너무 비참해진다. 어쨌거나 10명의 진출자 모두 제자리에 섰고, 한번씩 스윽 선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봤는데…엥? 찬휘…? 분명, 안경을 고쳐 쓰며 출발지점부터 반환지점을 거쳐 골인지점의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 듯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저 아인…찬휘. “찬휘야! 넌 또 왜 여기 있어?” “아, 다희야….” “그럼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시작입니다. 다희 넌 빨리 반환지점에 가 있어.” “으응.” 삐익― 미처 찬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커다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작된 경기. 그 새 아까보다 더욱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먼저, 앞에 놓인 훌라후프 50번을 성공 하고 세 개의 장애물을 넘어, 내 앞에 림보를 한 다음 날 얼고 전력질주.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열심히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는 10개의 인영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이겨다오 원희렴. 나는 너만 믿고 있다.” 슬슬 훌라후프 돌리는데서 차가 나기 시작했던 건지, 앞서 달리는 사람과 뒤쳐지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는데…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터라 누가 누구인지 분간 할 순 없었다. “와아아아~” 커다란 함성과 함께 머잖은 곳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리를 좁히고 있는 3명. 한 명은 모르는 얼굴, 두번짼 령우, 그리고 마지막은 원희렴…. 모두들 1미터가 넘는 장애물들을, 선수라도 되는 듯 가뿐히 넘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제일 선두로 달리던 얼굴을 알 수 있는 이가 넘어지자 령우가 앞섰고 약간의 거리차가 있는 곳에서 뒤쫓는 희렴이. “제발, 제발!” 사실, 령우가 이겨도 괜찮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욕심으로는 역시 ‘남자친구’ 인 그 녀석이 이겼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런 내 바램과 상관없이 내 앞에 놓인 림보까지 다다른 령우가 나를 향해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오빠 왔다.” “빨리두 왔다.” “아씨, 무슨 림보가 이렇게 낮아? 이걸 어떻게 지나.” 가장 선두였기 때문일까, 약간 안심하고 있었던 듯한 령우가 짧게 주저리를 늘어놓을 쯤, 어느새 바로 옆에서 한 마디하는 희렴이. “나와.” “뭐…?” “그 림보는 내가 넘을거야. 나와.” “뭐야! 넌 옆에꺼 넘어, 새꺄.” “아니. 난 그게 아니면 안되겠는데.” 옆에 거든, 위에 거든 아래 거든, 빨리 넘어서 날 들춰업을 생각 않고 눈 앞에 림보를 하나 두고 티격태격 하는 녀석들. “뭐가 다르다고 그래!” “이게 1cm 더 낮아보여.” “웃기지마! 난 양보할 수 없어. 좋은 말로 할때 비켜라~?” “저기, 이봐…둘 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야! 아무거나 넘으면 어떻다구 그래?!” 답답한 내가 소리쳐 봤지만, 더 이상 나는 안중에도 없는지 신경전을 벌이고 섰다. 나 참, 돌겠네 정말. 환장할 지경에 이르러 가슴을 치고 있을 무렵, 어느새 앞서 온 누군가가 날렵하게 림보를 넘어 내 앞에 등을 내보이는 자가 있었으니… “찬휘야?!” “이러고 있을 새가 없어. 빨리 업혀.” 두 녀석도 당황해서 우리 쪽을 바라보기도 전에, 빠르게 나를 들춰업고 전력질주 하기 시작하는 찬휘. “야, 거기서 서찬휘! 얌마, 너 뭐야!!!” “내려놔…강다희 내려놔.” 그제야 상황파악을 하고 뒤늦게 찬휘의 뒤를 쫓는 령우와 희렴이. 이거 완전…코메디네. 찬휘의 등에 업힌 채 빠른 속도로 골인지점에 가까워지고 있던 내가 빠른 바람살에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넌 왜 이거에 참가한 거야?” 의아한 듯 묻는 내게, 작게 조소를 띄우며 찬휘가 한 그 한 마디는 바로 그것, 정답이었더랬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뻔히 예상됐거든.” ※ “원희렴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우승이었어. 아휴, 이 도움 안되는 새끼!” “네 여자친구도 아니니까 네가 포기했어도 되는 경기 였는데 끝까지 오기부린 넌 뭐냐.” “그, 그건……” “다들 그만 좀 해라. 어차피 우리 셋 중 하나만 이기면 되는 거였잖아? 이겼음 됐지 뭘 그래.” “너가 젤 어처구니 없어 이 자식아!” 처음으로 입모아 말하는 반령우와 원희렴. 그 덕에 둘을 말리려다 오히려 한 마디 들은 찬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됐어! 니들 둘 다 잘한 거 없어. 찬휘 아니었으면 이기지도 못했을텐데 뭐.” 시큰둥하게 쏘아붙이는 나를 보고 입을 다무는 둘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벤트에서 우승한 사람은 찬휘였기 때문에, 희렴이와 령우를 동반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 찜질방 오니까 좋다. 이게 얼마만 이냐….” “개학하고는 처음 오는 거네. 모두들 외출 허락 받고 온 거니까 편히 쉬다 가자.” 오늘은 토요일인데다가 축제였기 때문에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위해 외출이 허락 된 날이라 찬휘, 희렴이, 령우, 나 이렇게 셋은 단란하게 찜질방으로 향했던 것이었다. 주말인데 생각보다 사람도 없고 좋다. 모두들 보기 힘들었던 반바지 차림 하며, 참 눈보신 하는 구나, 흐흐흐. “아…눈이 왜 이렇게 뻑뻑하지.” 그리고, 찬휘를 만난 날부터 처음. 그래. 정말 처음으로, 그 순간 안경을 벗은 찬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내 끼고 있던 안경을 벗은 채, 잘 안 보이기 때문인지 약간 미간을 좁힌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찬휘. 그러다가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다시 안경을 쓰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찬휘야….” “응?” “안경 왜 쓰냐? 인물 죽는다, 야. 안경 벗으니까 훨씬 멋진 걸…렌즈로 바꿀 생각은 없어?” 그래. 그제야 내가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세상은 넓고 잘생긴 남자는 많도다. 약간 인상 쓴 모습 마저, 안경을 썼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새삼스런 내 칭찬에 약간은 멋쩍은 듯 대답하는 찬휘. “아니, 안경이 편해.” “그래두 그렇지…야, 너가 최고 잘생겼다. 반령우 나가 떨어지라 그래.” “뭐얏? 넌 왜 가만히 있는 나한테 그러냐!” “사실 인걸 뭐.” 확실히, 불쌍하게도 아무 죄 없이 옆에 있었다가 비교의 대상이 되어버린 듯한 령우는 몹시 토라진 분위기였고, 자꾸만 찬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추켜세우는 나를 묵묵히 지켜보던 원희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가?” 휘적휘적 앞을 향해 걸어 나가다, 내 물음 살짝 고갤 돌려 말한다. “황토방. 넌?” “황토방? 거기 너무 덥더라. 나 더운 거 싫어.” “그럼…옥냉방.” “근데 더운 것 보단 추운 걸 더 못 참구. 암튼 다녀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가볍게 손을 흔드는 내 인사에 대꾸도 없이 훽하니 고갤 돌려버리고 빠른 걸음으로 황토방으로 들어가 거칠게 문을 닫었더란다. 나 아닌 찬휘나 령우가 보기에도 뭔가 틀어진 듯한 심보였는지 벙찐 채로, 령우와 함께 굳게 닫힌 황토방 문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말하는 찬휘. “다희 넌 아무리 생각해도 무딘데가 있어.” “엥? 왜? 내가 뭐 잘못 했나…?” “녀석이 두 번이나 장소를 고쳐가며 말한 건, 같이 가자는 뜻이잖아. 그런데 더워서 싫다고 하고, 추워서 싫다 하고. 원래 그런 말 직선적으로 못하는 녀석이니 삐질 만도 하지.” “아…그런 거야?” 뒤늦게야 녀석의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행동들을 눈치 채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 둘이서 뭘 하려……” “넌 나랑 같이 식혜나 사오자.” “혼자 가, 인마!!” 따라가려는 령우의 행동을 눈치 챈 건지 강제적으로 령우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찬휘. 하여간 재밌어. 그 둘이 내려가고, 이상할 정도로 한산한 찜질방에 간혹 잠이든 몇몇 사람들을 제하고는 혼자만 남아, 황토방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있는 온도계의 황토방 온도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린 채 문 앞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부루퉁하니 아빠다릴 한 채 앉아 있던 원희렴이 날 보고 일어서더니 갑자기 문 앞을 막아선다. 그러니,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지만 안에서 막고 있는 문은 열릴 줄 모르는 것은 당연지사. “뭐, 뭐여.” “오지마.” “너 화났어?” “…….” “암튼 비켜 봐. 일단 들어가서 얘기 할게.” “안돼.” 이 자식이 왜 이렇게 심통을 부릴까…그런데 때마침 공교롭게도 황토방 안엔 아무도 없었고 들어가려는 사람 또한 없었으니 이 상황이 제지 될 가능성 또한 희박했다. “왜 자꾸 심술이야. 황토방이 네 꺼야?!” “넌 이미 황토방에게 한번 모욕을 줬어. 널 받아들일 수 없어.”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엉뚱한 모습조차도 귀엽게만 느껴지는 것 또한 문제 있다. 결국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들어가지 못한 채로 문 앞에 기대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어, 언제쯤 열어 줄 테니?” “생각 없어.” “그래. 그럼 이러구 얘기하자. 어차피 뜨거운 건 싫다, 뭐.” 가만히 문에 등을 기대어 앉자, 녀석 역시 내가 더 이상은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안쪽에서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어색함이 감돌아 무슨 말을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문 너머 녀석에게 들릴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날 말이야. 네가 1등을 하진 못했지만, 참 기뻤어. 나는 그것보다…네가 가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으니까. 사실 미리 말하지 못한 것도 네가 가버릴까봐서 였어. 그래서 말 못했었어.” 듣고 있는 건지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건너편. 그래도 나쁘다고 하지 않는 건, 화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생각보다 쉽게 머리에 떠오른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은예림을 왜 그렇게 좋아했냐고 물으면…대답해 줄 수 있어?” 잠시동안의 망설임쯤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 쓸데없는 시간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이 빠르게 들려오는 목소리. “사랑했으니까.” 거추장스러운 표현도, 다른 어떤 꾸임 또한 필요 없는 한 마디. 그 뒤엔 뭐라고 해야 할지 긴장하고 있는데…나는 묻지도 않은 녀석의 깊은 마음이 문 너머로 울리고 있었다. “함께 있었을 때만큼은…그 애도 날 정말 사랑했으니까.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7.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바보자식!” 큰 목소리로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내 모습을 보고 문 너머로 덩달아 일어서는 원희렴. 생각보다 큰 내 목소리에,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굵은 유리문 너머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아는 게 전부인 것처럼 세상을 살지는 마. 열 받으니까….니가 그러니까 그렇게 차이는 거라구. 알아?!” 함께 있을 때 그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사랑해주는 사랑만 있는 게 아니라…같이 있지 않아도 언제나 절실하게 하는 사랑도 있는데, 왜…저 남잔 자신이 느낀 것 외에 다른 사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을까. 스스로도 독한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서슴치않고 내뱉었고 원희렴 또한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문 열어. 나 들어갈 거야.” 잠시 녀석이 뒤로 주춤해 있는 새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뜨거운 온기가 화악 느껴졌고 그제야 제대로 바라본 원희렴의 얼굴은, 생각보다 붉어져 있었는데 결코 화가 나서는 아닌 것 같았다. 순전히 내 추측일 뿐이었지만 어쩐지 녀석의 얼굴엔 약간의 웃음이 감돌고 있다 싶었다. 하지만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는지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다가 이내 얼굴엔 커다랗게 웃음이 번졌다. “왜, 왜 웃는……” “네가 알려줘 그럼.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면 나머지는 네가 알려줘.” 한번쯤 그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할 직함의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작게 웃음 짓던 녀석이 갑자기 내 쪽으로 쓰러지듯 몸을 기대고 말았다. “어…, 왜 그래? 어디 아파?” 깜짝 놀란 내가 힘들게 녀석의 몸을 일으키며 물었고, 약간은 힘에 겨운 듯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녀석이 하는 말. “더워….” ※ “가끔 뜨거운 거 참지도 못하면서 꼭 그렇게 오기로 들어가서 탈이 나는 사람들이 있지.” 얼음주머니를 건네주시며, 바닥에 널부러진 원희렴을 보고 혀끝을 차는 찜질방 아저씨. 그래. 솔직히 저 꼴은 내가 뵈도 가관이었으니, 여태껏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한번에 다 깨네. “이제 좀 괜찮아?” 얼굴을 덮고 있던 적신 물수건을 들어내고 내가 건네는 얼음주머니를 받아드는 원희렴. 얼굴은 홍조라기엔 지나치게 붉어져 있었고 아직도 아찔한 더위에 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인지…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 “좀 더 앉아 있어.” 일어나려는 녀석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그 안에 정말 무리할 정도로 오래 참고 있었던 건지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말았지만 이내 일어섰다. “씻고 올 거야.” “걷지도 못하면서! 조금 앉아 있다가 정신이라도 멀쩡해지면 씻던가.” “찝찝해.” 땀에 젖은 옷을 펄럭이며 이맛살을 찌푸리는 원희렴. …땀에 젖은 남자의 몸에 비춰지는 주황빛 조명이라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지만 본인이 저렇게도 싫다고 한다면 난들 묶어 놓은 채 감상하는 게 아닌 이상 말릴 수도 없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으음, 그럼 업어줄까?” 생각 없이 한 말이긴 했지만 그에대한 녀석의 기대 또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번뜩이는 그의 눈을 본 순간 난 내가 내뱉은 말 자체를 후회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한다. “그래.” “엥? 진짜 업히겠다구…?” “응. 위에 남자 목욕탕 문 앞 까지만.” 진짜인지, 망설임의 기색 없이 내 등에 넙적 업힌다. 그 틈에 잠깐 주춤거리긴 했지만, 스스로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거뜬하게 녀석을 업은 채 자리에 서있을 수 있었다. “몸무게가 몇이야?” “70.” “나참. 요즘 남자들은 다 왜 이래? 싫다, 정말.” 분명 몇 없는 찜질방 안 사람들이었는데도. 그 몇 안되는 사람들이 대체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들 있는 건지…확실히 저보다 20cm는 큰 남자를 등에 업고 있는 여자는 보기 힘들지. 그것도 이렇게 거뜬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우쭐해지며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진다. “너 지금 우쭐했지?” “무, 무슨 소리야? 우쭐하긴 뭘 우쭐해!” “방금 막 어깨에 힘이 들어갔어.” 이거야 무서워서 행동 하나 맘 편할 대로 할 수 가 있나. 약간은 자중하며 녀석을 입은 채 3층 남자 욕탕 위 계단으로 올라섰다. 물론 70키로의 그 녀석을 등에 업은 채. “하아. 다 왔다. 빨리 씻고 내려와. 나 심심해.” “응.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여기까지 업고 올라온 게 대견스러웠는지 마치 자기 애완동물 다루듯 머리를 스윽 쓰다듬어 주고 목에 수건을 둘러맨 채 남자 목욕탕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원희렴. 체. 자식이 빈말으로라도 들어오란 말도 안하네.(으응?-_-) 두꺼운 불투명 유리문 너머로 멀어진 녀석을 보고서도 아쉬움에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그제야 내려갈 마음을 먹고 계단을 내딛었을 쯤이었다. “헉!”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게 된 것은, 그 상황에 처해있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콧구멍을 벌렁벌렁 대며 나를 훑어보고 있는 30대 중반의 우량한 남자. 두 손을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으니,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고 싶었건만, 아저씨가 덥썩 잡은 나의 손으로 하여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으악!! 뭐예요?!” “학생, 얼마…?” 얼떨결에 잡힌 손엔, 아저씨의 북실 북실한 손등 털의 감촉이 다 느껴져 오고 있었다. 입술이 달달달 떨리면서 말문이 꽉 막히는 순간, 축축한 손으로 더욱 꼭 내 팔목을 붙잡고 있는 변태. “왜 그러고 섰어? 응? 얼마야. 얼마면 되겠어~?” “아…아저씨, 이거 범죄예요. 이러시는 거 아니에요!” “아~ 일단 어디 좀 가서 얘기하자고. 어디가 좋을까, 응? 옥상?” 내 말은 들은 채도 않고 일방적으로 옥상 쪽으로 걸음을 뗀다. 나도 한 힘 하는 편이라 가지 않으려고 최대한 뻐팅기고 서자, 확실히 여자치곤 감당하기 힘든 포스를 느꼈는지 얼굴이 점점 시뻘게지며 한 마디 한다. “아따, 학생 쇠심줄을 고아드시었소, 힘 한번 대단 하네 그래.” 말과 함께 아저씨가 손을 잡아당기자 주르륵 끌려가버렸고 이때다 싶었는지 빠르게 계단을 올라서려는 것을 보고서야 드디어 초인적인 힘이 발휘 된 내가 움켜쥔 주먹을 거칠게 휘둘러 보였다. “어억, 놔!! 놔, 놔!!” 눈을 감고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을 뿐인데 꽤 여기저기 무언가 부대끼는 느낌이 들고, 언제쯤에야 눈을 떠야 걸리지 않고 도망갈 수 있나 궁리를 하던 터, “야! 미쳤어? 뭐하는 거야?!” 밑에서 뛰어올라오며 나를 막아서는 목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뜨니 주체 못하고 휘두르고 있는 내 주먹을 가로 막아서는 령우. “려, 령우야! 마침 잘 왔……” “어른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왜 그래? 아저씨, 괜찮으세요?” 상황파악이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됐지. 피해자는 나인데, 막상 내가 몇 번 휘두른 주먹에 손도 쓰지 못하고 맞고 있던 털이 복슬복슬한 아저씨는 되려 자신을 옹호해주는 령우의 태도에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죽어가는 시늉을 하는 변태. “아이구, 무슨 여학상이 저런데. 나 죽네, 죽어~” “허…이봐요, 아저씨! 아저씨가 먼저 저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려구 하셨잖아요?!” 내 말에 조금 의아하게 아저씨와 나를 번갈아 보는 령우다. 이 놈이 무슨 변명을 하나 보자하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데, 연신 령우와 내 눈치를 보더니 없는 눈물 짜내가며 말한다. “무, 무슨 소린 지 모르겠네, 시방. 얌전해 보이던 여학상이 가만히 길 가던 사람 밀쳐놓고 할 말인가….아이구 허리야~” “아저씨?!” “야. 좀…죄송하다고는 못할망정 왜 그래? 사과하기 싫으면 가만이라도 있어.” “정말 아니라니까? 미치겠네, 정말?!”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뭣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봐요. 일어나실 수 있어요?” 나를 뒤로 밀어내며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령우.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며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저 남자의 말을 더 믿는 듯한 말투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말보다 말을 믿어하는 듯 사과하는 령우를 보며, 마치 정말 피해자라도 되는 양 얼굴에 불쾌하다는 기색과 말투 역력하게 같잖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며 아래로 내려가는 우량한 그 남자. “거, 조심 좀 하라고. 요즘 학상들은……쯔쯧.” “이봐요, 거기서요! 지금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황스러운 그 남자의 태도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어, 따라 내려서려는 나를 멈춰 세우는 령우. “그만해라, 좀.” “뭘 그만하라는 건데…? 넌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어떻게 내 말은 들은 채도 안하고 네 멋대로 생각할 수가 있어?!” “나한테 보인 상황은 그게 아니었잖아? 설사 그 사람 잘못이었다고 해도 아까 태도만 봐서는 네 편을 들 수 없었다구. 그리구 솔직히 그 아저씨가 널 덮치려고 했다 치자. 아까처럼 때려잡았을 거였으면서 뭘 그러냐~” 령우는 장난같이 내뱉은 한 마디였지만 울컥하는 기분을 참을 수는 없었다. 서운해서,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울컥한 느낌에. “…그래. 상황이 어쨌던 간에 내 태도가 옳은 건 아니었다고, 인정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었어. 자세히 듣지도 않고 나만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건 네 잘못이라구. 적어도 내 말 한 마디 정도는 더 들어 볼 수도 있는 거였잖아? 잘못한 게 누군데! 진짜 피해자가 누구인데, 내가 왜 그런 사람 앞에서 밑 보여야 하는 거냐구?!” 내가 정말 힘이 세서, 그런 인간 열댓 명이 덤벼들어도 거뜬히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하다하더라도, 정말 그렇다고 해도…나는 마치 겁도 없고 상처도 받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는 느낌에 서럽구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많이 화가 난 듯한 내 태도에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령우를 보면서도 쉽게 화를 풀지 않았다. “왜 그래?” 또 다시, 이 사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희렴이가 수건으로 젖은 머릴 닦다가 마주치게 되기까지 우리 셋 모두가 조용해졌다. “…….” “말해.” 령우도 나도 아무런 말이 없자, 별안간 나를 붙잡고 서서 묻는다. 여기 저기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입술을 꾹 깨물고 섰다가 문득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아직 마르지 않아 촉촉이 젖은 머리칼에선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아.” “무슨 오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나를 대신해 대답하는 령우. “어떤 아저씨랑 무슨 문제가 있었나봐. 그런데 감싸주지 않았어.” “감싸주지 않은게 아니라 믿지 않은 거겠지.” “네가 내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쉽게 다희 말만 믿을 수는 없었을 거야. 네 결정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말하지는 마라.” “잘못알고 있어, 너.” “그, 그만해. 사실 별일 아니었어. 나 혼자 흥분한 것뿐이야. 그러니까…” 나는 모르고 있었던 둘 사이의 골이 생각보다 깊었던가 보다. 말 한마디가 오갈 때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표정에 수습에 나서려고 했지만 그 상태 그대로였을 뿐. “얼굴을 붉혀가면서 자기 유리할 말 하는 녀석 아니야, 강다희.” “나도 알고 있어.” “그러면서…그런 상황에서의 말조차 의심 없이 믿어줄 수 있는 신뢰감도 없으면서 날 도발한 이유는 뭐야.” “그건…….”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던 것뿐일까, 담아두고 있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던 걸까. 그저 아무 말도 없이 굳게 주먹만 다부지는 령우를 봐버려서,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아…….” 그저, 빠르게 내 손을 움켜잡고 계단을 내려서는 희렴이를 따랐을 뿐. 손을 잡은 것만 한 순간이었을 뿐 걸음은 느렸다. 하나하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서면서 한번쯤, 또 다시 혼자 서있게 된 령우를 뒤돌아 봤음직도 한데 그럴 수 없었다. 차마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혼자 서서 나와 희렴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령우의 표정과 기분을 왠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또 그렇게 되면 이상하게도 이 걸음을 멈추고 령우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게 될 것 같은 기분에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서운함이나 섭섭함보다도 지금 령우의 기분이 신경 쓰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8. “해외여행은 처음이라니까 신경 쓸 것이 많겠구나. 여권은 주말쯤엔 나올게다. 어때, 뭐 불편한 건 없고?” “네. 다들 신경 써줘서 편하게 지내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지내다가 문제 생기거나 할 말 있으면 꼭 말하거라.” 교장실. 얼마 남지 않은 수학여행 이야기 겸, 요즘의 생활을 물어보시는 작은 아버지. “그런 걱정은 안하셔두 되요. 정말 편해요, 저.” “그래, 알겠다. 이만 가서 쉬고 다음에 또 이야기 하자꾸나.” “안녕히 계세요.” “다희야.” “예?” 짧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교장실을 나서려고 할 즈음, 나지막이 내 이름은 부르시는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잠시 동안 내 얼굴만 바라보시다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우며 말씀하신다. “네가 참 예쁘게 자라 주어서, 나중에 형님내외를 만나더라도 한 점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구나.” “…또 올게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괜찮다’ 라거나, ‘아니에요’ 라는 말 대신, 그저 간단한 인사와 함께 시익 웃어보이며 교장실을 나왔다. 그것은 내가 그 말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줍잖은 기분으로 작은 아버지의 기분을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작은 아버지께서 나를 돌봐야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그저 지금의 생활이 나쁘지 않은 내게는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 생긴 건지도. ※ “와우, 교토래. 일본이라고, 일본!” 교실에 오자, 아침에 나눠준 프린트물을 흔들며 떠들고 있는 아이들. 아직도 아침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들 사이에 함께 웃고 있는 령우를 보았지만. 그 날 이후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져서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혼자서 오도카니 자리에 앉아 있던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수업시간이 시작됐고 때마침 담임선생님 시간이었던터라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교과목 선생님으로서보다 종례 때 하실법한 말씀들을 늘어놓으셨다. “이놈들, 수학여행 때문에 들떠 있는 모양인들데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공부는 하면서 들떠라.” “아, 여권은 언제 나와요?” “빨리 가고 싶어요, 선생님!” “다들 입 다물고…지금 그것보다 먼저 결정해야 할 일이 있는데 말이다. 이번에 우리학교가 서울 S대에서 열리는 강의에 초대되어서 학교 대표로 한반에서 두 명씩 견학을 다녀와야 하는데 말이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잠시 조용해지는 아이들. ‘서울’ 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듯. 하긴, 좀처럼 학교 밖을 나설 기회가 없으니까 모두들 혈안이 되어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서울요? 어, 가고 싶어요!” “저두요.” “선생님, 그거 가면 수업 빠져요?” 그렇지만 너도 나도 손을 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것들아, 이미 내가 다 결정 했으니까 입 다물고 끝까지 들어라.” “어? 누구요? 누가 가는데요?” 모두들 잔뜩 흥분해서 묻는데도 그런 어수선함에도 동요치 않으시고 내 쪽을 바라보시며 입가에 웃음을 띠운 체 말씀하시는 선생님. “다희가 여기 전학 오고 서울 구경을 한번도 못해봤잖냐. 그래서 명단에 다희를 올렸고 남은 한 명은…….” “누구예요, 그 한 명?!” 선생님께서 임의로 결정하셨다는 것에서부터 나라는 것을 예상한 듯한 아이들의 관심사는, 더 이상 서울 한번도 못 가본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 그런데 어째 심상찮다 싶은 것이…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내 짐작이 처음으로 맞아 떨어졌던 때였다. “아무래도 다희랑 제일 친한게 령우니까 령우랑 가는게 제일 편하겠다 싶어서 다희랑 령우를 추천했다. 다들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수학여행을 기대하자. 알겠지?”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십니다.-_-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말이란 말씀입니다! 차마 싫다 소리 못하고 입만 우물쭈물 대고 있는 나의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령우의 어깨를 장난스레 한대씩 툭툭 치며 한 마디씩 던졌다. “자식, 좋겠다. 나도 다희랑 많이 친해질걸!” “야! 서울 가는 김에 경숙이한테 내 편지 좀 전해주고 오면 안되냐?” “자자, 그만 조용히 하고 진도 나가게 교과서 펴자.” 아이들이 모두 잠잠해졌을 즈음, 스윽 고갤 돌려 바라보자 마주친 눈. 사실 나로서는, 그제의 일이 여간 신경 쓰여서 살짝 움찔했는데 그때의 일들은 아예 마음에 두고 잊지 않았던 사람처럼 평소같이 개구진 미소로 날 보며 씨익 웃는다. “웃지마, 따샤.” “아니 저게 다정히 대해줘도 틱틱대네.-_-” 민망한 감에 생각없이 한 말이지만…사실 나는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는데. 그대로 그때 령우를 두고 간 것이 가슴에 걸리고, 꼭 못된 짓을 한 것만 같아서 혹여 녀석이 신경 쓰고 있으면 어떡해 야하나 걱정도 했지만, 평소와 같은 모습에 안심 반, 실망 반 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야.” 종이치자 마자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서는 내 어깨를 돌려 세우는 령우. “으응?” “어디 아파? 왜 그렇게 아침부터 말도 없더니, 어디 가?” “아니 그냥 바람이나 쐴까 하고…….” “어쨌든 네 덕에 나까지 따라가게 된 거니까 내가 서울 가면 맛있는 거 사주마. 너랑 있으니까 별의 별 혜택이 다 있네? 생각보다 너란 녀석 사귀는 재미가 쏠쏠하다.” 피식 웃으며 마냥 어린 아이 다루듯 볼을 잡아당기는 녀석. “우씨, 이거 놔?!” “승질내지 마라. 푸들같다.” 왜 내 주위에 녀석들은 하나같이 어린애 취급을 하는거냐구요. 머리를 부빈다든지, 잘했어 라는 둥의 칭찬은 다섯 살배기 어린애 아니면 개한테-_-하는 행동이 아니냐고. 아직도 머리에 올려진 령우의 손을 내려놓으며 부루퉁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왔다. “하여간 신경 쓰고 있던 내가 바보지.” 혹여 그때 일로 마음 상해있으면, 웃겨서라도 풀어주려고 했는데. 혼자 구시렁구시렁 대며 복도 계단을 내려설 쯤, 부딪힌 누군가와 부딪힘으로 인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픈 코를 감쌌다. “아구구….” “뭐하고 있어?”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29.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니, 생각보다 매우 심오하게 인상 쓰고 있었던 나를 내려다보고 선 희렴이. “어?! 안 그래도 지금 찾아가려고 했는데.” “왜?” “내일 서울에 강의 들으러 가는 거 있잖아!” “아아, 그거.” “응, 그거. 헤헤…선생님이 나 추천해주셔서 가게 됐는데, 너도 갈 거지?” “아니.” 순간의 정적이란……. “뭐어? 왜 안가?!” “그걸 내가 왜 가….” 하긴, 나야 가고 안 가고를 선택할 여유 또한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은 모두 가고 싶어 하니까 이 녀석도 가고 싶어 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바보인 거야. 원래 이 녀석은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남달랐으니까! 이게 바로 시골촌년과 알 것 다 아는 도시 사람의 차이 아니겠어?-_-어쨌거나 원희렴 또한 실망스러움이 역력한 내 얼굴 때문에 더는 할 말이 없는지 멋쩍게 서있었을 뿐이었다. “난 당연히 너랑 찬휘도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야. 에이…그럼 령우랑 나 둘 뿐인 거네.” “령우도…?” 그것은 생각지 못했었다는 듯 묻는 원희렴씨의 얼굴에 목소리에 힘을 실어 대답했다. “으응! 선생님이 나랑 친하니까 신경 써서 같이 보내주신 모양이야. 너랑 찬휘도 안 가는데 그나마 다행이지 뭐야?” “그거 안 가면 안돼?” “나, 공항 처음 왔을 때 말고는 아직 한번도 서울구경도 못해봤단 말이야. 너야말로 같이 가면 안돼?” “응.” “우씨, 그럼 나도 안돼!” 못 이기는 척, 그냥 같이 가주면 참 좋겠다고. 그저 그런 작은 투정 하나 부려본 것뿐인데 그거 하나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면서 나 못지않은 고집을 부리는 녀석 때문에 나 또한 잔뜩 심술이 났다. “그래 좋아.” “엥? 같이 갈 거야?” “잘 다녀와.” 말과는 다르게 다정한 말투도, 표정도 아니었으면서 그저 말만 대충 내뱉고 다시 걸음을 옮겨가 버린다. 굳이 가지 않으려는 녀석의 심보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나로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잔뜩 인상 쓴 얼굴로 녀석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왜 그래, 대체? 서울 한번 가고 싶어서 같이 가자는게 그렇게 큰 욕심이냐?!” “령우가 가잖아.” 아까보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는 원희렴. 생각 외로 그 고운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쓴 채 찌푸리고 있는 것이 차마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그게 왜…령우는 친구잖아?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었는데 너 요즘 유난히……” “동요해 줄 수도 없는 마음이면서 괜한 기대 가지도록 다정하게 대하지 마. 그 녀석이 힘들어하는 건 나도 원하지 않아. 네 말대로 나는 그녀석 친구이니까.” 정곡을 찌르는 그 한 마디에 차마 더는 녀석을 붙잡지 못했다. 그럼…알고 있다는 거잖아, 령우의 마음을. 때문에 솟아오르는 울컥함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서….너 거기 서, 이 나쁜 놈아!!!” 내 커다란 목소리에 가뜩이나 느렸던 그 걸음을 멈춰섰고, 나는 또 멀어졌던 만큼 성큼성큼 앞서 다가섰다. “너, 지금 네가 한 말이 어떤 뜻인지나 알아?” 좀처럼 속상할 수가 없어 부릅뜬 두 눈엔 벌써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놀란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원희렴은 그저 아무 말도 않고 내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령우가 내 어줍잖은 태도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괴롭다고… 그럼, 그럼 나는 뭔데? 네 태도에 힘들어하는 나는 어떻고? 령우한텐 너처럼 걱정해 줄 친구라도 있지만, 친구도 없는 나는…, 네가 어설픈 태도로 내 마음을 흔들던 말던 혼자 힘들어해야만 하는 거야? 그런거냐구 이 자식아?!” 그런 사소하고 작은 일들이…내게 있어선 작지만 유일한 상처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분하고 서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내 물음에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입술만 굳게 깨물고 서서 나를 바라보는 원희렴. 몇 방울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보이고 돌아섰다. 차마 달릴 수는 없어 빠르게, 빠르게 걸음을 내딛고 있는 나를 다시금 돌려세우기 전까진. “나는 달라.” “네 속뜻이 어땠는지는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고 나조차도 놀랄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여기가.” 곧 크고 따뜻한 손으로 작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왼쪽 가슴팍에 얹은 채 말을 이어 나간다. “그러니까 넌 그냥 그 자리에 있어. 움직이지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그냥 한 곳에만 있어. 곧 갈게.” 들려왔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지금…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녀석의 심장소리가. 대답을 기다리다가 슬그머니 녀석이 먼저 손을 놓아버린 탓에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내 왼손엔 그저 아까만의 따스함만 맴돌았다. 자꾸 눈물만 차오르는 탓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 “조심해서 다녀와. 아, 그리고 괜찮다면 다녀와서 거기서 나눠준 프린트 좀 보여줄 수 있어?” “응, 물론이지!” 꼭 가고 싶었는데 안타깝게 패한 가위바위보로 인해 안경너머, 부러운 시선으로 나와 령우를 바라보는 찬휘. 운동장 앞엔 서울로 향할 고속버스 한 대가 이미 도착했고, 짧지만 잠시나마 서울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에 자꾸 미소가 맴도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내 앞에 부루퉁한 표정으로 서있는 저기 저 남자, 원희렴 때문에. “흠흠…, 다녀올게.” “웃음 참지 마. 얼굴 찌그러졌어.” “에이~ 티났어?” 뒤늦게나마 희렴이도 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명단이 올라간 터라 결국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왕에 가게된 거 즐거운 마음으로 가야지. 헤헤. “잘 다녀와. 빨리 와.” “응, 빨리 올게. 혹시 뭐 필요한거나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아이고 저 멍순이 말하는 것 좀 봐라. 너는 서울이 무슨 만물상인 줄 아냐?” “넌 빠지고 있엇!” 옆에서 시큰둥하게 한 마디 쏘아붙이는 령우에게 한번 눈짓을 주고, 희렴이에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더니 그 특유의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경복궁 정도……?” 이 새끼…내색은 하지 않지만 역시 토라져 있는 거다.-_-; 어떠한 대답도 없이 령우와 함께 버스에 올랐고,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나를 향해, 마치 자식을 떠나보내는 듯한 어머니의 얼굴을 하며 말하는 찬휘. “차 조심하고 덤벙대다가 애들 놓치면 안돼. 뭐 살 거면 꼭 령우 데리고 가고.” “알았어, 걱정하지마~” “그래. 다녀와, 다희야.” “거 참 너무하네…옆에 나도 있는데!” 보다 못한 령우가 옆에서 한 마디 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버스는 떠나고야 말았다. 상황을 즐겨하며 웃고 있기보다 어쩐지 차창 밖으로 보이던 심오한 표정의 희렴이가 걸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러고 보니 너 왜 내 옆에 앉아있어?!” “왜?” “왜냐면, 그러니까…….” “알았어. 그럼 난 뒤로 가서 다른 애들이랑 앉을게.” “아니, 그러라는 건 아니구!” 마음 상했는지 토라진 얼굴로 뒷좌석으로 옮기려는 령우를 애써 붙잡았다. 좋아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일단 친구니까 같이 앉아도 이상할 것 없지. 무엇보다 친구라고 있는게 저 놈 하나니 원. 곧 학교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자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났고 나 또한 즐거운 마음이었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으….” “왜 그래, 아까부터?” “속이 좀 안 좋아.” “뭐? 어떻게 안 좋아? 언제부터?” “한 시간 쫌 전부터……” “한 시간? 너 바보냐?! 진작에 말을 해야지! 아씨…괜찮겠어? 조금만 참아봐. 야, 누구 비닐봉지 가지고 있는 사람 없냐?” 오히려 저리 가라며 밀어낼 것만 같던 령우가 걱정스러운 듯 등을 쓸어주며 버스 안의 아이들에게 비닐봉지를 구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저 자식…나 좋아한다는게 역시 거짓은 아니었나봐. 그런 령우의 감동스러운 모습에 괜시리 감동을 받고야 말았다. “흑흑, 령우야……” “왜? 못 참겠어?” “아니 그것보다…네 마음이 너무 예뻐서 나 정말, 우…우웨에웩…….” 그러나 결국 물은 엎질러지고야 말았다.-_- 한 시간 뒤, 버스는 도착지인 대학교 캠퍼스에 섰고, 기지개를 펴며 하나씩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 “이야, 상쾌하다~~” 나 역시도 버스 안에서 탁한 공기만 맡고 있다가 찬바람을 맞으니 상쾌하기까지 하다. “상쾌……? 그래. 넌 참 상쾌도 하겠다. 그렇지만 오늘 내내 이 역한 내 나는 옷을 입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야 할 나는 어떻고!!” “미, 미안해. 령우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령우의 바지는 얼룩덜룩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물들어 있었고 미안한 마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 옆을 스치면서 머리를 헝클어 놓으며 말한다. “됐어. 그보다 이것 좀 들어줘. 화장실 가서 한번 닦아 볼 테니까.” “으응!” “에휴. 아무리 좋아한다지만 토악질까지 받아줘야 하는 이 신세야….” 말은 투덜투덜하지만, 사실 싫은 내색 한번 안하는 예쁜 마음에 령우의 마이를 들고 뒤쫓았다. 학교 캠퍼스 안이 굉장히 넓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강당으로 들어섰다. 다른 건물에 비해 강당만 있는 건물이라 작은 편이었는데도 굉장히 커서 눈이 다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에이씨, 대체 화장실이 어디 있는 거야.” “어? 저깄다!” 두리번거리다가 찾은 화장실. “뭐야, 저기 있었어? 왜 저런데 짱박혀 있는 거야.” 투덜투덜 대며 다급히 화장실로 들어가는 령우. 저 자식…사실 바지에 묻은 토보다 뭔가 더 급한게 있는게 분명해. 령우를 기다릴 겸, 쌀쌀해진 날씨에 언 손도 녹인 겸 화장실 맞은 편에 놓인 자판기에서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뽑아 손에 들고 바깥쪽 벤치로 향하던 찰나였다. “저기 이거 그쪽 거 아닌 가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돌아보자 코코아에 정신이 팔려 자판기 위에 올려둔 령우의 마이. 정말이지, 잃어버리기라도 했다면 어떤 닦달을 당했을지 상상이 된다. “아, 맞아요. 고맙……” 다른 한쪽 손으로 마이를 건네받으며 생각 없이 올려다 얼굴. 이렇게 만나게 되리라곤…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운명이라는 것은 이토록 교묘하고 장난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는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으로만 봤었던 예쁜 웃음을 짓고 서있는 그 아이 은예림을, 바로 지금 내 앞에서.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0. 먼저 날 알아보고 있었던 건지 나와 눈이 마주쳐버린 그 순간 엷은 미소 띠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은예림. 그 아이가 말을 건네기 전 그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 “안녕.” 나는 더 말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그 아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머릿속에 실타래가 꼬이고 꼬여 얽히고설킨 이런저런 생각들이 모두 일축되었다. 그 아이의 ‘안녕’ 이란 단 한 마디에. “아…….” “우리, 초면은 아니지?” 스치듯이 우연히 한번 봤었을 뿐인데 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했었던 것보다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건다. 긴장한 탓에 잔뜩 당황해서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앗, 뜨……” 금방 뽑은 뜨거운 코코아가 무릎과 손을 적셔버리고, 그런 상태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는데, 나보다 더 놀란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옷과 손에 묻은 코코아를 닦아주는…은예림. “어떡해, 많이 뜨거울텐데…괜찮아?!” “아…괜찮아.” “미안해. 반가운 마음에 생각 없이 말을 걸어서…놀랄 줄은 몰랐어.” “아니, 나는……” 왜…무엇을 사과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그냥…그냥……. 걱정스러운 얼굴로 붉어진 내손을 연신 ‘호호’ 불며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대어주고, “잠깐 있어봐.” 화장실로 들어가 빠르게 손수건을 적셔 붉어진 무릎 위에 얹어준다. 최악이다, 이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는지 고갤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은예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마주치자 씨익 웃어 보인다. 이해할 수…있을 것 같았다. 이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원희렴이 왜 은예림을 좋아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아. 그냥 봤던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걱정해주고 자기가 아픈 것처럼 말해주고. 예쁘게 웃을 줄도 알고…. “내가 원래 좀 이래. 친구들한테도 많이 혼나는데 고쳐지지가 잘 고쳐지지가 않아서…미안.”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그래두…상처 지면 안 될 텐데.” “…….” “나, 너 축제 때 봤었어. 너도 나 봤었지?” “…으응.” “여학생은 너 한명이니까 딱 알아보겠더라. 아까 령우랑…같이 온 거 봤어. 강의 들으러 온 거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바라본다. 다시금 차가운 손수건을 꼭꼭 눌러주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 은예림. “희렴이는…같이 안 왔어…?” 나왔다. 우려했던 질문이. 지금은…괜찮은 걸까. 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은예림과 눈을 마주쳐도. “안 왔어. 아마 오지 않을 거야, 절대…….” 다시는…전처럼 쉽게 네게 오지는 않을 거야. 나는…그렇게 믿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그리고 나조차도 놀랄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여기가.’ 말했으니까. 그 녀석 말을 믿으니까. 당당하게 눈을 맞추며 또박또박 말하는 나를, 조금은 당황한 듯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로 멋쩍게 웃어 보이는…은예림. “그렇구나…….” “야, 이거 대충 지워지기는 했는데 계속 냄새가……” 때마침, 바지를 온통 물에 적신 채로 화장실을 나오다가 앞에 서있는 은예림과 나를 번갈아 보고서 멈춰서는 령우. “…오랜만이야, 령우야.” “네가 여기 왜…….” 처음엔 놀란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런 기색은 차츰 사라져 무표정이 되어버린 얼굴의 령우는, 눈앞에 은예림은 본 체 만 체 대뜸 나를 향해 한 마디하며 돌아선다. “가자, 강다희.” “그렇게 가지말구!” 그제야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령우. 그저 아무 말도 할 수 없이…멍하니 서있는 것, 그것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이렇게 가지 않으면 어떻게 갈까. 내가 가는 길마저도 네가 원하는 데로 가주랴? 응? 그런데 어쩌냐. 나는 원희렴이 아니라서 네가 하란 데로, 곧이곧데 로는 못하겠는데.” “너까지 이러지 않아두 되잖아, 령우야.” “헌 신짝 내버리듯 뒤도 안 돌아보고… 먼저 떠나버린 건 너면서 왜 피해자인 척 굴어. 똑바로 행동해.” “…그런 거 아니야. 그냥…잘 지내나, 궁금해서….” “나야 못 지낼 이유가 없지. 할 말은 그게 다냐?” “희렴이는…잘 지내?” “왜? 못 지낸다 그러면 어쩔라구. 다시 돌아오게?” “…….” 내가 봐왔던 모습들 중에…최고로 쌀쌀맞은 태도로 대꾸하는 령우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 숙이고 선 은예림을 내려보던 것도 잠시, “더 할말 없으면 간다. 가자, 다희야.” “아….” 빠르게 내 손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는 령우. “잠깐만 기다려.” 령우는 들은 체 말은 체 앞서 걸었지만 주춤하며 멈춰선 내게로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차가운 음료수와 물에 적신 손수건을 내 손에 쥐어주며 말하는 은예림. “손수건은…나중에 꼭 돌려줘. 나한텐 소중한 거거든.” “그, 그럼 가져가. 난 괜찮으니까……” “나중에 돌려주면 돼. 가서 꼭 약 발라. 상처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얼떨결에 건네받고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그 아일 바라보고, 더는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걸음이 나란해져서야 물었다. “원래…저런 애였어?” “뭐가.” “치렁치렁한 긴 생머리가 아니잖아. 우윳빛 피부에, 왕방울 눈두 아니구 앵두같은 입술도 아니구… 싸가지 없지두 않구, 내숭도 안 떨구 또… 다정하구 내가 생각했던 거랑 영 딴판이잖아…….” 아주 나쁜 애이길 바랬어. 만화속이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나쁜 애여서, 만난다면 희렴일 아프게 했으니까 화도 실컷, 내고 욕도 실컷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상상해온 은예림이 아니잖아. “정말, 정말 쟤가 은예림 맞아? 저런 애가 어떻게 희렴일 버려…, 쟤가, 저런 애가 어떻게 희렴일 힘들게 했겠어…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따지듯이 묻는 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령우. “착해, 분명히…착하지. 정 많고. 하지만 똑똑해. 그게 문제인 것뿐이야.” “무슨……” “인간이란 건…원래 망각과 탐욕의 동물이야. 욕심이 끊이질 않지. 인간은 누구나가 더 좋은 것을 찾고 더 좋은 것은 원해. 소중한 것도 언제나 옆에 있으면 소중함을 잃어버리게 돼. 언제부턴가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지. 그렇게 되는 순간엔 소홀해지는 거야.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결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법이야. 은예림은 그걸 잊었을 뿐이야.” “나는 아냐. 나는……” 난…더 욕심 부리지 않을 거야. 원희렴보다 좋은 거, 그런 거 없어. 언제나 소중해. 언제나 곁에 있어준다고 해서…그 소중함을 잊지는 않을 거야. “알아, 인마. 그래서…희렴이가 네가 여자친구라고 했을 때 안심했어. 너희는 둘 다 받는 사랑에도, 주는 사랑에도 익숙하지 않으니까. 뭐 지금이야…내게 있어선 썩 좋은 사실만은 아니지만.” 피식 웃으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해준다. “내가 남자가 아닌게 다행이야.” “왜?” “왜냐니. 혹시 그 웃는 모습에 내가 반하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설마….끔찍하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은 집어쳐라.” “솔직히…얼마나 예뻤다고. 같은 여자지만, 웃는게 그렇게 이쁜 앤 처음 봤어. 말하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희렴일…이해할 수 있어, 조금은. 아무튼 다행이야. 그 녀석 오지 않아서. 오지 않는다고 했던 걸 억지로 데려왔었더라면, 그게 더 큰일 일 뻔 했어.” “그러게 말이다. 근데…… 다행이라면서 표정은 왜 계속 침울해 있어?” 좀처럼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내 표정에 툭 튀어나온 주둥이를 찌르면서 묻는 령우. “그거야…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는 걸. 당당하게 이제 희렴이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말해버렸지만 사실 자신이 없어. 걔보다 이쁘지두 착하지두 않은 걸.” “그건 그렇다.” “자꾸 위로해주는 척 하면서 옆에서 그렇게 신경 긁어?-_-” “걱정마라. 내 눈이 그렇게 낮지는 않다.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분명 은예림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야. 그거 하난 확신할 수 있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정말이지…어떻게 힘이 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단순한 위로라고 해도, 저렇게 멋진 말을 해주는 녀석에게 어떻게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까. 멍하니 올려다보는 나를 보면서, 피식 웃는 령우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는데,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더 이상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게 뭐야 민망하게!” “뭐가. 사실인데.” “그, 그럼 힘내라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해줘. 강다희가 대한민국에서 젤 예쁘다! 라고.” 나는 장난스레 한번 해본 말일 뿐인데도, 그런 말 꺼낸 내가 더욱 창피해질 만큼 굳은 얼굴로 정색하는 령우. 그러나 그런 정색마저 내가 상처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곧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나 거짓말은 못하는 거 알잖아.”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http://cafe.daum.net/bearnangman) 31. “에휴~ 여기 뭐야? 우리학교만 특별강의 해주는 것처럼 갖은 생색은 다 내더만. 이게 뭐야!!” 세 시간여에 걸친 강의를 듣고 나온 령우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하기야… 나 또한 우리 학교학생들만 초청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남의 열 댓 개 쯤 되는 학교 학생을 모두 부른 자리였기에 널따란 강의실 맨 뒤편에서 그다지 듣고 싶지도 않은 유전공학에 대해서 들어야 했다. 물론, 강의 내내 내 시선은 선생님이나 칠판 따위가 아니라 강의실 어딘가에 있을 은예림이었지만 말이다. “야!” “으응?”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어? 이제 자유시간인데 어디 가보고 싶냐니까?” “아…종로. 종로엘 가자. 길 알지?” “웬 종로? 거기 볼게 뭐있다고?” 명동이나 압구정동쯤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종로’ 라는 나의 내 한 마디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듯 눈부시게 반짝이던 눈망울이 한 순간에 이그러지면서 따지듯이 묻는다. 그런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씩 웃는 얼굴로 말했다. “경복궁을 훔쳐야 하거든.” ※ 연신 손놀림을 해대는 나를 보고 혀끝을 차는 령우. “경복궁을 훔친다길래 뭔 소린가 했더니만 겨우 이러려고 오자 그랬어~?” “닥쵸 인마!” 하긴, 저런 자식이 내 깊은 속뜻을 알 리가 없지. 어떤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리 없는 령우는 관심 없다는 듯이 경복궁이 아닌 사람 얼굴 관찰하기에 바쁘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헤헤. 다됐다. 이제 너 가고 싶은데 가자. 응?” “됐네요.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무슨.” 애써 마음 써주었건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사레를 치는 것이었다.-_-정말 이 얄미운 녀석을… 우짜면 좋을까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애써 참아가고 있던,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힐끔힐끔 거리던 여자아이 세 명이 령우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선 것은. “저기요.” 령우나 나나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떴는데, 옆에 선 나는 뒷전으로 밀쳐놓고, 령우의 앞에 바짝 다가선 똥꼬치마 차림의 지지배들이 애교 섞인 콧소리로 말한다. “아까부터 그쪽 계속 봤는데요, 얘가 관심 있다고 그러거든요? 괜찮으시면 핸드폰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령우 또한 어리둥절하여 긴가민가 하는 마음에 슬쩍 저 자신을 가리키자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녀석에게서 내비춰진 그 조소를, 나는 제길스럽게도 목격하고야 말았다. 자신에게 하는 말임이 확인되자 급격히 자랑스러운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슬쩍 내 귓가에 속삭인다. “너 봤지? 내가 전에 했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내 외모는 전남뿐만 아니라 서울서도 먹히잖냐, 응?” “알겠으니까 그 주둥이 좀 절로 때줄래? 말할 때마다 미적지근한 니 입김이 내 귀에 닿거든……?-_-” 특별한 반응을 기대했을까, 아님 하다못해 내가 놀라기라도 바랬던 것일까.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돌아서 아까 그 여자애들에게 말한다. “물론, 알려줄게.” “고마워요. 고등학생 맞죠? 몇 학년이예요? 어디서 오셨어요?” “응. 고2야. 전남에서 왔어.” “아아~ 동갑이네? 그럼 말 놔도 되지? 우리 수행평가 때문에 여기 왔는데, 괜찮으면 같이 사진 찍지 않을래?” 저들끼리 죽이 맞아 떨어지는 듯 신이 나서 희희낙락하더니, 대뜸 멀찍이 서있는 내게 카메라를 건네며 말하는 무리 중 한명. “미안한데 사진 좀 찍어주실래요?” 그래서 그 순간 내가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내 성질대로, “놀고 자빠졌네! 내 사진 찍기도 바쁜데 내가 왜 네놈들 사진을 찍고 앉았겠냐!” 라고, 너무너무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모르는 남자한테 저렇게 다가서 번호를 따는 나와 동갑내기의 저 여인들은 척 보기에도 껌 좀 씹어보이게 생기셨기에, 두 손으로 공손히 카메라를 받아들고 무려 다섯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카메라를 돌려받고 찍힌 사진들을 보며 저들끼리 신이 난 네 자식들. 아주…웃기지도 않아, 반령우! 경복궁 오자고 했더니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던게 누군데, 혼자 제대로 신이 나선 나는 안중에도 없잖아? 그래, 너는 너 좋아하는 저 똥꼬치마 지지배들이랑 잘해보라 이 말이야! 라는 억한 심정에 그대로 뒤돌아 터벅터벅 걸었다. 그래도 곧 쫓아오겠지, 오겠지…하는 마음에 무려 5분 정도의 거리를 걷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는데…보이지도 않는다. 세상에, 쫓아오지도 않아? 뭐 그딴 자식이 다 있어~?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다. 그리고 어쩐지 섭섭함을 느끼기도 하고. 가지고 있던 내 일회용 카메라를 급히 17분 현상소에 맡긴 채, 녀석이 더 이상 쫓아오지도 않는 길을 혼자서 걷고 있을 무렵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저게 뭐예요?” 대뜸 앞에선 사람을 잡고 묻자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해준다. “대학 동아리라는데 공짜로 타로 점을 봐준다나 봐요.” 순간 ‘공짜’ 라는 말에 맘보다 먼저 몸이 동했으니, 그 많은 인파 속을 헤집고 앞으로 다가섰다. 귀를 간질이는 작은 욕설쯤이야 대수롭잖게 여겨주고. 자근자근 순서를 기다려 어느새 내 차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은 나를 향해 씨익 웃으며 다정스레 말하는 점쟁이언니. “결과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말구요, 그냥 재미삼아 보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예~” 언니의 요구에 따라 마음 내키는 때에서 카드를 고르고, 또 반복하기를 여러 번, 마지막 카드를 결정한 다음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는 터, 묵묵히 카드를 바라보고만 있던 언니가 입을 뗐다. “첫번째 고른 카드는 가까운 시일 내의 과거를 뜻하는 것으로써 별 카드네요. 굉장히 순조로운 출발을 뜻해요. 희망, 또는 밝은 전망을 뜻하죠. 성취를 의미하는 카드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카드는 현재를 암시해요. 역방향의 매달린 사람 카드네요. 정방향의 매달린 사람 카드는 희생이나 포기, 또는 후회를 뜻하지만 역방향일 경우엔 반대가 되죠. 본인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만족하거나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요. 그리고 마지막 카드는…….” 잘 말해주던 언니가 조금은 멋쩍은 얼굴로 나와 카드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미래를 의미하는 카드로 달 카드를 골랐네요. 음…. 이 카드는 기만이나 거짓, 배신. 그리고 또…숨겨져 있는 적을 의미해요.” “…적이요?” 눈을 크게 뜨고 묻는 나를 향해 미안한 듯이 손을 흔들며 말한다. “크게 나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주로 불안한 마음 상태에서의 심리를 나타내지만, 단순한 의미로는 모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네요. 여기까지예요.”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개운치 못한 건… 그 순간 ‘적’ 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은예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을까? 적이라……. 믿는다고, 그렇게 스스로 다짐했는데.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희렴이의 고백을 들으면서도, 그 하나로 은예림 앞에서까지 당당할 수 있었는데 결국 이런 작은 말 하나에 흔들리고야 만다. 하지만 어쩐지 나보다 점을 봐준 언니가 더 민망해 하는 것 같아서 애써 좋지 않은 기색을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에.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아까도 말했듯이 재미로 보는 거니까 마음에 두고 있지 말아요. 무엇이든 마음먹는 것에 따라 변하니까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막 천막을 나올 쯤,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서 멈춰서는 령우. 그러다 별 생각 없이 마주친 눈을 피하고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내게 소리친다. “야!!” “엄마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야 사람이 걱정을 안하잖아!” 생각지도 못하게…불같이 화를 내며 거칠게 어깨를 움켜쥐는 령우. 그래서였을까.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도 섭섭했던 마음하며 울적했던 마음이, 나를 걱정하는 이 녀석으로 하여금 작게 위로 받은 것 같았다고. 그렇지만 내 좁고 뒤틀린 심보가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를 못했다. “무…그러는 너야 말로 아까 걔들이랑 시시덕거리느라 내가 어디를 가던 말던, 신경도 안 썼으면서 이제와 무슨 상관이냐!?” 잘못한 주제에 화를 내는 입장이라 녀석이 또 맞서기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과 반대로 가만히 말없이 내 얼굴만 바라보다가 불현듯 묻는다. “화났어…?” “엥? 아니 그러니까 화가 났다기 보다, 그 뭐냐…….” “너 지금, 질투 하는 거지? 응? 내가 아까 걔들이랑 얘기해서 너 지금 삐진 거지?!” 화났을 때보다 더욱 눈을 번뜩이며 묻는다. 그렇게 물을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 안 해 봤는데… 어쩐지 당황스러운 물음이기도 하고, 또한 내가 왜 화를 내고 서운해 했는지 또한 명확하지가 않아서 아무 말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 안하는 거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그런 거지, 너?” “아, 아니야! 내가 미쳤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아마.” 그런 내 맘에 조금은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뾰루퉁하게 대꾸한다. “그러냐? 뭐야, 난 또…기뻐하고 있었잖아.” 가끔씩 튀어나오는…녀석의 저런 솔직함은,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언제나 적응하질 못하고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작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정말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였다면 조금이라도 서운해 할 거 없어. 그런 사소한 일들에 휩쓸릴 만큼 내 감정이 얕지는 않아. 언제나 티격태격 했지만 그러면서 자란 정이기도 하고, 또… 그로인해 자란 마음이니까. 분명한 건 달라. 그런 스치는 사람들 하고 달라. 그렇게 가벼운 마음도, 또 함부로 하고 싶은 감정도 아니야.” 장난 같이만 말하기에 언제나 나 또한 장난으로만 넘겼던 령우의 진심. 늘 장난 같은 말투였던 속에 숨은 속뜻을 오늘에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처럼 그런 진심어린 고백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붉어져 버린 얼굴을 감추려고 자꾸만 머리칼로 얼굴을 가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버스 안. 버스 안의 아이들이 거의 다가 잠들고 나는 그저 령우의 어깨를 빌린 채 오지 않는 잠을 청할 뿐이었다. 어둑어둑 해져서야 버스는 도착했고 마중 나와 계신 선생님들의 마중을 받고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또…기대치도 않았는데 쌀쌀한 바람에 얼어버린 자신의 언 손을 호호 불며 기숙사 앞에 서있는 희렴이. 말없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알아보고 작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이제 왔네.” “으응.” 멋쩍게 인사를 하고 무의식적으로 내 뒤를 돌아보자 마침 들어오고 있던 령우는 나와 희렴이를 번갈아 보다가 눈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잘 하고 왔어?” “응. 령우 덕분에 서울 구경도 하고 왔어. 그리고…”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조금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서 은예림을 만났어.”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말이기에 그랬는지, 순간 커져버린 희렴이의 검은 눈동자를 애써 담담한 척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진보다 더 이쁘더라. 나를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걸었는데 너에 대해 묻더라. 너는 오늘 안 오냐고. 그래서… 아마 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 다시는……. 설마 내가 잘못 한 거야…?” 앞뒤를 모두 잘라먹고 한 말이었지만 그 정도로 눈치 채 주기를 바랬다. 그 속 뜻이 어떠한 것일지 내가 어떤 마음에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인지를. 내 치마 주머니 속에 곱게 접혀진 그 아이의 소중하다던 손수건을 꽉 쥔 채 희렴이의 대답을 기다릴 무렵,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해서 였을까. 고개를 끄덕인다. “잘했어.” 덕분에 땀이 날 정도로 굳게 쥐였던 주먹을 풀었다. 혹시라도, 아무 대답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또 한 계단 아래로 떨어져 버렸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 둘 다 서로 말이 없기를 잠시, 내가 문득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그것을 급히 꺼내 녀석에게 내밈으로써 다시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손에 쥐어준 그것을 보면서…조그맣게 묻는 원희렴. “뭐야…?”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경복궁. 그런데 들고 오기에는 너무 커서, 담아왔어. 실제 보는 거랑은 크기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겠지만… 그래도 주고 싶었어, 네가 가지고 싶다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경복궁 사진. 또 그 뿐만 아니라 버스가 지나던 고속도로의 풍경이라던가, 갔었던 대학의 건물과 강의실, 또 지나가는 사람들. 특별하게 잘 찍은 사진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진들 여러 장.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가게 된 게 미안하기도 하고 같이 오고 싶었기 때문에…그 곳에서 봤던 것들을 함께 본 것처럼 공감하고 싶었다. 비록 작은 것이긴 하지만 이것 또한 오늘 하루 희렴이에게는 생각지 못했던 선물이었을까.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한참 사진만 들여다보다가…더럭. 그래, 정말 더럭. 흐뭇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만큼. “으켁! 가, 갑자기 왜 그……” “고마워. 고마워, 정말.” 별 것 아닌데…생각하지도 못한 만큼 기뻐하는 녀석 때문에, 콧대 세우며 잘난 척 해야지 했던 그 다짐은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그저 말없이 녀석의 품에 안겨 거칠게 뛰는 이 심장소리가 들릴까 안겨있는 내내 조마조마 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론 령우가 했었던 말 또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설레이는, 그런 밤이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2. “다들 조용하란 내 말이 안 들립니까아~~?!” 다소 악에 바친 목소리로 크게 묻고 있는 사감 선생님이었지만, 아이들 또한 이번만큼은 그 무섭디무서운 사감 선생님도 아랑곳 않고 떠든다. 마이크에 대고 크게 한숨을 푸욱 쉬는 선생님. 하긴…수학여행 예행연습에서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는 어떨까? 그 흔하고 흔했던 제주도가 아니라, 해외이기 때문에 더욱 흥분한 것일 테지만. 그래고 떨리는 손으로 여권을 건네받은 나 또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지만. “어이, 촌순이. 너 또 설마 지금 긴장해서 굳어있는 거야?” 일본에서의 행복할 나날을 떠올리고 있자니 잠시라도 나를 그렇게는 못 두는 령우의 초전박살 한 마디. “무, 무신 소리를?! 내가 긴장은 왜 하냐! 비행기를 타봤어도 너보단 많이 타봤을 거다, 인마.” “대신 해외로 나가는 건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나가봤을 거다. 오케이?” 그 얄미운 말에 대해서는 차마 할 말을 잃었다.-_-그래. 나는 이 여권이…놀라우리만치 신기하다 이놈아! 발급받은 여권을 꼭 품에 안고 뒤에서 계속 깐죽대는 령우를 무시한 채로 계단을 올라서는 나를 알아본 찬휘와 희렴이가, 그 많은 인파 속을 헤치고 앞으로 다가섰다. “챙길 건 다 챙겼어?” “응. 그렇기는 한데…아우 떨려~ 사요나라, 스미마셍, 다이조부데쓰, 데오 아케떼 쿠다사이…….” 머릿속에 알고 있는 일본어를 중얼중얼 거리며 되뇌는 나를 보며 작게 웃는 희렴이. 뭐가 그렇게 웃긴가 싶어 조금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내 키에 맞춰 허릴 숙인 채 녀석이 속삭이는 말. “가서 즐겁게 보내자. 사진도 찍고 같이 돌아다니고.” “으…응!!” 특별하게…귓가에 속삭일 만큼의 중요한 말도 아니고, 또 듣고 나서도 크게 기뻐할 만큼 특별한 말도 아니었는데, 그 대화는 나와 희렴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둘 사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녀석도, 또 듣는 나도 쑥스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 일본간사이국제공항. 두 시간여에 걸친 비행 끝에 도착한 일본의 공항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로 복작복작 발 디딜 틈이 없다. “자, 여러분. 모두 집중하세요. 여기서 오늘 우리는 오사카성, 통천각, 사천왕사를 들르고 츄오호텔에서 묵게 됩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가는 거예요. 여기 저기 돌아야 다녀야하기 때문에 많이 혼잡하니까 개별 행동 하지 말고 정해진 조대로 활동하도록 하세요.” 공항 밖으로 나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두들 처음 와보는 낯선 외국 땅에 신기해하며 정해진 좌석에 앉았을 때…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제 여러분들은 대강 눈치 채시지 않았는가? 처음으로 오게 된 해외여행에 대한 나의 설렘은 뒤로 밀어두고, 슬그머니 옆 좌석을 바라보면 능청스럽게 물어보는 반령우가 있다는 것을. “뭘 그런 눈으로 봐?” “대체 왜 나와 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에 자리해 있지?” 나의 시답잖은 물음에도 불구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에 들떠 답한다. “아마 운명의 빨간 실로 묶여진 게 아닐까?” “기구하다, 내 인생.” 투덜투덜. 쓸데없는 투정을 부려보고 잠시 동안의 움직임 끝에 도착한 곳은 오사카 성. 커다랗고 화려한 동양식의 건물. 나를 비롯, 처음 보는 일본식 건물에 모두들 신기 한 듯이 올려보고 있다. “여기서 기념 촬영을 하고 1시간의 자유시간을 줄 테니까 조끼리 성을 둘러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정확히 1시간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모이는 거예요.” 들떠서 선생님의 말씀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는 아이들 모두 어영부영 사진을 찍고 뿔뿔이 흩어졌다. 3조인 나와 령우, 그리고 세 명의 다른 아이들 모두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슬그머니 한쪽으로 비켜 세나가는 나를 잡아 세우는 령우. “어디 가?” “A반 버스 도착했나 가보려구. 아까 비행기에서두 얘기 못나눴거든. 같이 갈래?” 조금은 실없이, 헤벌쭉 웃어 보이는 나를 보더니 약간은 경직된 표정으로 잡고 있던 어깨를 놓는다. 잠시 동안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다 묻는다. “아니. 그럼 계속…희렴이랑 있을 거야?” “잘 모르겠어. 어쨌건 모이는 시간 전에는 꼭 돌아올게!” 그때의 령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의미로 그 질문을 했었는지 차마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뒤돌아 뛰어갔다. 그때 그 순간이…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실수 중에 하나라는 것은 오랜 시간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다른 반 버스가 있는 곳을 계속 기웃 거리다가 이내 A반 버스를 발견하고 후다다닥 달려갔다. 나를 알아보고 씨익 웃는 찬휘와 희렴이. “령우는?” “응. 다른 애들이랑 있어.” 고개를 끄덕이고 찬휘 또한 다른 나라의 풍경을 눈에 담느라 정신없는 사이 아주 조심스럽고 천천히…내 손을 꽉 잡아 깍지 끼는 손. 그 따뜻한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려다보니, 희미하게 웃음 띤 얼굴로 녀석이 말한다. “잃어버릴까봐서.” 그때 희렴이의 표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마치 정말로 녀석의 여자친구라도 되는 듯이, 정말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굳게 다잡아 쥔 그 손이 어쩐지 창피하고도 너무 기뻐서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여 헤벌쭉 웃던 순간이었다. 찰칵. 거침없는 셔터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희렴이보다 더욱 귀한 것을 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뒤로 감추는 찬휘……. “와, 신기한 거 찍었다.” “설마 그 신기한 거라고 하는게 내 얼굴은 아닌 거지?” “왜 아니겠어?” 가끔 느끼는 거지만… 알고 보면 셋 중에 가장 잔인하고 냉정한 녀석은 찬휘다. 남의 허를 찌르고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말하다니… 아마 내가 네 안경속의 진실을 몰랐다면 령우보다 더한 면박을 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것보다 일단 저 카메라를 빼앗는게 우선이라는 거지. 폴라로이드 카메라 였기 때문에 금방 뽑아져 나온 저 따끈따끈한 사진이 얼마나 흉할지, 스스로도 상상이 가기 때문에 빼앗으려고 한 사진을 하늘 높이 올려들고서 약올린다. “진짜 못됐어~ 빨랑 줘, 진짜 흉하단 말이야!” 그리고 찬휘가 어떠한 대꾸도 하기 이전에 그 사진을 잽싸게 손에 넣는 원희렴……. 얼떨결에 빼앗긴 찬휘는 멍한 표정을 짓고, 그 흉한 사진을 보인 나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잠시 동안 묵묵히 그 사진을 바라보기만 하던 희렴이가 이내 말없이 마이안주머니에 꽂아 넣는다. “우악, 그걸 왜 거기다가 넣어! 빨리 줘, 내가 처리할 테야.” 그러나 그런 나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더 깊숙이 집어넣는다. 정말로 받아낼 생각에 계속 졸라대는 나의 끈질긴 채근에야 어쩔 수 없이 말하는 희렴이. “네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 그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나. 그렇지만, 정말 그렇지만 왜 하필 그딴 사진이냐구요~ 울며 겨자 먹기로 그 흉한 사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구경이나 하자는 찬휘 말에 몇 발짝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던 터였다. “실례 합니다~” *기울어진 글꼴은 일본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_); 우리를 멈춰 세우는 낯선 언어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고갤 돌리자, 궁딩이가 다 뵐만큼 짤막한 교복치마를 입은 여학생 무리가 카메라를 내민다. “한국 사람이죠? 우리도 수학여행 왔는데 같이 사진 찍어요.”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리 없는 나는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고 약간은 당황스럽게 말하는 찬휘. “사진 같이 찍자는데?” 차림새하며…뭔가 불길하다 싶었드만 역시 목적이 그거였나! 그렇지만 령우도 아니고 원희렴이 모르는 사람과 덥석 사진을 찍을 리가…… “찍지 뭐.” 있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여학생 무더기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승낙한 걸 알아챈 예닐곱 명의 일본 언니들은 다가온 원희렴을 향해 팔짱을 끼는 둥, 어깨동무를 하는 둥…다양한 제스처를 취한다. 아니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여자에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만 순 거짓말이었어! 약간은 실망해하며 서있는 나를 두고, 내 옆에 멍하니 서있는 찬휘의 손을 끌고 사진 찍을 포즈를 취한다. 나 또한 조금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 무리로 다가서려는 순간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찬휘의 한마디. “빨리 찍어 달래, 다희야.” “…….” 그 순간의 침묵이란… 만약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섰었더라면 그게 무슨 개쪽인가……. 저들의 사진 속에 나 또한 포함되리라 생각했던 민망함을 제쳐두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이 상황이 어째 낯설지 않은게… 최근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데 말이다. 젠장, 그냥 콱 사진기사나 해버려?! 아무튼 각기 다른 포즈로 대여섯 방의 사진을 찍어주고 카메라를 건네자 무리 중 가방 귀엽장하게 생긴 한 명이 대뜸 희렴이의 팔목을 잡고 늘어지며 말하는데, 문제인즉슨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거, 저거 뭐라는 거야?!” 눈에 불을 키고 찬휘의 옆에 바싹 다가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통역을 해주는 찬휘. “같이 돌아다니자고 하고 있어.” “그래서? 원희렴이 뭐래?” “나중에. 라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 나중은 개뿔! 그래서 쟤넨 또 뭐라는데?” “그러지 말고 같이 다니자. 어느 호텔에 묶어? 오늘밤 찾아갈게.” “차, 찾아와? 나참~ 웃기구 있다 증말! 그래서 원희렴은?” “다희 때문에 안돼.” 듣는 순간, 조금은 억지스럽게만 느껴지는 저 핑계가… 정말 원희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일까? 찬휘는 멍하니 대꾸 없는 나에게 계속 해서 그들의 대화를 알려준다. “다희? 그게 누구야?” “뒤에 있는 애.” “걔가 너랑 무슨 사인데?” 그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약간은 조마조마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찬휘가 생중계해준 이 말들이, 바로 지금 한 세 네 걸음 앞에서 하고 있는 말들이라는게 조금은 어색하기만 한 상태에서 이어진 찬휘의 통역.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진짜 여자친구…….”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3. 분명히…그 말은 찬휘의 목소리로 대신 전해 들었는데. 뭐랄까. 마음이…희렴이의 마음이 그 말에서 묻어나오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아쉬운 건, 내가 저 일본어들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희렴이의 말만으로도 직접 이해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것 뿐. 말을 전해주고 나서, 조금은 의아스럽게 나를 향해 묻는 찬휘. “근데 진짜 여자친구라는게 무슨 말이야?” 잠시 동안 사색에 젖어 있는 내가 또 다시 제정신을 차린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찬휘만큼은 나와 희렴이의 계약관계를 모르니까 말이다. “아니, 그러니까 정말로 소중한 여자친구다 이 말이겠지, 뭐~” 떠벌떠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고갤 돌리자, 마지막으로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 ‘스미마셍’ 이라고 말하고 우리 쪽으로 돌아온 희렴이. 어쩐지 부끄러운 나는, 쉽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뒤에서 쑥덕쑥덕 거리는 그 일본 언니들은 제쳐두고 구경을 시작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대다수였지만, 일본학생들도 수학여행을 온 듯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멋진 절경에 절로 탄성이 나오려던 찰나, 성 외곽 한 구석에 일본만화책에서만 봤던 풍경이 실제 내 눈앞에 펼쳐진 것에 대한 놀라움에 다다다 뛰어갔다. “어, 이거이거! 물고기 잡는 거!” 마침 여행시즌이어서 그랬을까.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상도 많았지만 그 한켠에 얇은 종이 채로 금붕어를 뜨는 그 오락거리! 신기한 듯 앞에 다가서자 종이 채를 건네며 한번 해볼 것은 권하는 아저씨. “이게 뭐야.” 옆에 따라 앉은 희렴이는 의아한 듯 내게 묻는다. “뭐기는~ 이걸로 이 금붕어를 뜨는 거야. 종이를 찢어 트리지 않고 잘 뜨면 잡은 금붕어 가져갈 수 있대.” 언제나 무덤덤한 이 녀석도 신기하기는 한 건지 가지고 있던 엔화를 내고 시도해본다. 그러나 그게 어디 생각처럼 쉬우랴. 벌써 찢어진 채만 해도 여덟 개인데 그 성격에 좀처럼 포기 않고 어느새 이마에 심줄까지 세우며 열중하고 있다. “이제 그만 가자.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시간이 30분도 안 남았어.” “기다려.” 생각보다 황소고집이었으니, 결국 나 또한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녀석이 제발 한 마리라도 떠내기를 염원해야만 했다.-_- 그리고 엄청 오랜 시도 끝에 간신히 떠낸 금붕어 한 마리. 뜰채 위에서 파닥파닥 거리는 금붕어를 내게 보여주며 아이같이 웃는다. “했다!” “오! 신기하다!” 마냥 좋아하는 우리 둘 모습에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금붕어 한 마리를 담아주셨고 덤으로 먹이까지 건네주셨다. 꾸그리고 앉아 금붕어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갤 들자 멀리서 우릴 알아보고 다가오신 담임선생님과 A반 선생님. “어머, 그거 너희가 잡은 거니?” “네, 희렴이가요!” “다희 넌 희렴이랑 같은 반 안 되서 아쉽겠다, 얘. 3학년 때 같은 반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하겠는 걸?” “너희 사귀는 거 맞지? 희렴인 참 좋겠네. 우리 학교의 유일무이한 여학생이랑 사귀고.” “에이, 쑥스럽게…데이트두 잘 못하는걸요.” 슬그머니 얼굴을 붉히는 내가, 그리도 웃기셨는지 두 분이서 깔깔깔 웃으신다. 내…얼굴 붉히는 모습이 그렇게 웃겼던가. 순간 머쓱해진 나에게 담임선생님께서 장난삼아 한 마디 하시길, “그럼 다희 너 오늘 A반 버스 타고 갈래?” “예? 정말요?!” 정말로 장난인 듯 꺼내신 이야기였다가, 내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일까. 눈을 빛내고 되묻는 나를 향해 조금은 난처해지신 듯 마지못해 대답해 주신다. “아…그래, 뭐. 신 선생님만 괜찮다면 상관없지.” 하시며 자신이 꺼낸 이야기를 A반 선생님으로 하여금 무마시키려는 모양이었는지 대뜸 A반 선생님을 바라보는 우리 담임선생님의 눈빛이 거절을 강요하고 있다는 건 정말 내 착각인겨……? 헌데 눈치 없는 신 선생님, 깔깔깔 웃으시며 대답하신 말이 우리 담임선생님의 입방정을 후회하게 만들었으니! “그래, 오늘 하루쯤이야 담임선생님께서도 허락했는데 그러렴. 덕분에 나야 말동무 생기고 우리 반 녀석들도 좋아하겠다.” “와아, 감사합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나의 얼굴에도 희렴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A반 버스에 타게 되고 다른 아이들 모두 고맙게도 반겨주었다. 그날 종일, 희렴이와의 데이트라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최고의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정말이지 왜 그렇게 나 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령우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었던 약속에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이제 그만 버스로 돌아가자는 아이들의 만류에도 계속 그 자리에서 오지 않을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령우를. 선생님께서 내가 A반 버스에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기에 허탈하게 걸음을 뗐을 령우를……. 령우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버스가 숙소 앞에 서고 나서의 일. 우리 반 버스에 있을 나의 짐을 찾기 위해 우리 반 버스 쪽으로 달려갔는데 때마침 버스에서 내리는 령우. “어? 령우야!” 종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할말이 많아서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는데, 어쩐지…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령우가 자신의 왼쪽 손에 들려 있던 내 짐가방을 내게로 던진다. “우악!” 얼떨결에 커다란 가방을 건네받고, 나는 조금은 놀란 눈으로 녀석을 보게 된 데 반해 령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을 그냥 스쳐 간다. “야!” “왜.” 평소처럼…장난이라도 치거나, 웃으면서 답해주기를 바랐는데… 쳐다보지도 않고서 대뜸 하는 대답. 도무지 왜 그러는 지 알 길이 없어 나도 입이 삐죽 나오려다가, 빠르게 녀석 뒤를 좇았다. “사람이 부르는데 쳐다보지두 않구 그게 뭐냐? 뭐 화난 거 있어?” 또 다시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게 갑자기 멈춰서는 령우. 나 또한 따라 걷던 걸음을 멈추고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이 아닌, 웃음기 싹 가신 얼굴로 또박또박 말한다. “만약에 올 수 없을 거 같으면… 미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어?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나든?” 아마도…오전의 일을 이야기 하는 듯. 아차 싶은 미안함에 뭐라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아, 미안해. 화났어? 미처 생각지 못했어. 오래 기다렸어?” 누구보다 령우의 성격을 가장 잘 아는 나이기에, 좀처럼 미안함을 감출 수 없어 조심스럽게 물어본 물음에 약간은 풀어진 듯 심심하게 말한다. “됐어. 미안하라고 한 말이 아니라…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한 말이야.” “알겠어. 다신 안 그럴게~” “……좋았어?” “응? 뭐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묻는 령우였기에 의아하게 되묻는 나를. 그런 멍청한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령우가 말한다. “희렴이랑 있어서…즐거웠냐구.” “그거야…당연한거잖아~ 에이, 난 또 뭐라구~” 물음의 의미도 깊게 생각해보지도 않고서. 령우의 마음을 깊게 해아려보지도 않고서. “그래도…아무리 즐겁고 재밌어도 나 잊지는 마.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잊는 마.” “헤헤, 쏘리.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내 그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다른 뜻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인 령우를 이해 못한 나였기에. 차마 그때 령우의 표정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장난스럽게 충성까지 해 보이는 나의 다짐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던 령우를. “숙소 어디야?” “그거이 말이야.-_-여선생님들이랑 같은 방 써.” “그런 수학여행 보내는 학생, 너 밖에 없을 거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튼, 씻고 있다가 보자.” 모두들 뿔뿔이 자신의 숙소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나와 령우도 곧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밤을 새고 놀아야 할 즐거운 수학여행에서 선생님들 사이에 껴서 3일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묵을 방임에도 불구하고 노크를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밝게 맞아주시는 선생님들. “다희 왔구나.” “어서 들어와. 짐 무거울 텐데 내려놓고.” “아, 예에.” 그래도 확실히, 선생님들 전용 방에서 묵는다는 사실 외에 다른 특별한 것은 꼽아보자면, 저기 저 널따란 침대들과 다른 방들보다도 확연히 넓고 경치도 좋은 것만큼은 나쁘다고 할 수도 없지.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배란다로 보이는 경치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우아…….” “전망이 정말 좋지? 구경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내려가자. 저녁식사 해야지. 먼저 내려가 있으렴.” “예. 그럼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꾸벅 하고 내려서 로비로 나가자 먼저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 곧 같이 걸음을 옮긴 식당에 도착하자, 정말이지 아까 그 경치 따윈 이런 음식들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꺄악, 뷔페식이야!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되나봐. 초밥도 있네?” 역시 신기한 광경에 식당 안을 빙 둘러 다니며 집게와 접시를 들고 음식을 집어 담는 나를 보고 묵묵히 지켜보는 희렴이와 찬휘. 그리고 작게 읊조리는 령우. “한국 망신이다. 진짜.” 흥, 아무려면 먹는 거 앞에 장사 없다지 않아? 실컨 먹을 생각을 해야지 체면 차릴 새가 어딨담. 기막힌 음식 맛에 여러 번 떠다 먹고 있을 무렵, 다른 아이들도 모두 내려와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생각했던 그대로 체면 차리지 않고 먹을 만큼 먹고 나오자 평소엔 접대용 홀로 쓰이던 곳을 레크레이션 장소로 바꿔 식사를 마친 학생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했다. 비교적 빠른 준비에 의해 레크레이션 또한 원활하게 진행되고 분위기가 한창 물 올라 모두들 달아있을 무렵이었다. 그때서야 시작될 것이 시작되고만 게야. “자아, 에브리 바디 댄스타임도 끝났고, 본격적으로 한번 시작해 볼까요?! 듣자하니 이 학교에 특별한 학생이 한 명 있다면서요? 그게 누구죠?” 알면서 모르는 척, 진행자가 넌지시 물었고 일순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며 크게 내 이름을 외친다. “다희요, 강다희!” 본교의 학생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고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썩 달갑지도 않은 야릇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무튼 모두가 크게 나의 이름을 외치자 곧 싱긋 웃으며 생각했던 상황대로 나를 무대로 부른다. “그렇군요. 다희? 강다희 학생이 누굽니까? 무대로 올라오세요!” 사실 예상은 했었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뛰쳐나가기도 민망하지 않은가? 조명이 나를 향해 비춰지자 조금은 쑥스러운 듯이 주춤주춤 두 볼을 감싸 쥐며 스테이지 위로 걸음을 옮겼다. “단고에 유일하게 한 명 있는 여학생이라고 저도 들었습니다~ 오늘 같이 특별한 날 장기자랑이 빠질 수 없죠. 잘 하는 거 뭐있어요? 춤, 노래?” “아, 아뇨. 저 정말 아무것도 못해요!” “그럼 무난하게 노래로 갑시다. 오케이?” “저 노래 못해요~” “그렇게 빼지 말구 한 곡 불러요, 학생. 전교생이 다 바라는데. 이런데선 빼는 거 아니야~ 응?” 진행자와 나 사이의 그렇고 그런 입씨름이 펼쳐지고 실망한 듯한 야유를 던지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참으로 난감하지 아니할 수 없던 것이다.-_- 노래, 까짓 거 부르라면 부를 수 있지만 희렴이도 있는데 어떻게……. “정말 못 불러요.” “에휴, 그럼 어쩔 수 없……” “그럼 한 곡만 뽑겠습니다~” 살짝 뺀다고 해서 정말 받아들이는 사회자는 처음이야, 흥. 진짜 무르려는 진행자의 손에 들린 마이크를 빼앗듯 손에 쥐었고, 곧 반주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 였다가 한국에서 손수 공수해온 테이프 소리의 반주를 듣자 모두들 알 듯 말 듯 한 음에 고개를 까딱인다. 일부러 안 웃는 거 맞죠, 나에게만 차가운 거 맞죠~ 알아요, 그대 마음을 내게 빠질까봐 두려운 거죠~ 그대는 그게 매력이에요. 관심 없는 듯한 말투, 눈빛~ 하지만 그대 시선을 나는 안보고도 느낄 수 있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인가요, 그대의 어깨가 무거워 보여~ 이런 나 당돌한가요, 술 한 잔 사주실래요~ 야이 야이 야이 야이, 날 봐요~ 우리 마음속이지는 말아요~ 날 기다렸다고 먼저 얘기하면 손해라도 보나요~ 야이 야이 야이 야이, 말해요~ 그대여자 되 달라고 말해요~ 난 이미 오래전 그대 여자이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1절을 끝으로 노래가 끝나자 정말이지 폭발적인 반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순히 내숭 떠는 간드러지는 발라드도 아닌 걸죽한 국민음악, 트롯 한곡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아이들. 앵콜을 외치는 모두를 간신히 외면하고, 또 처음에는 내빼다가 너무나 멋들어지게 불러주었다며 다른 어떠한 시도를 하려는 진행자를 한사코 거부하고서, 부상으로 간식거리가 담긴 봉다리를 앉고서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타박타박. 즐겁고도 가벼운 걸음으로 경쾌하게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크게 웃는 찬휘와 령우. “풋…….” 그리고 작게나마 소리 내어 웃는 법 없던 원희렴 까지 내 얼굴을 보고 웃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왜 그래~ 사람 민망하게 시리.” “이야. 대박이다, 깡다이. 야이~야이~야이~야이~ 날 봐요, 우리 마음속이지는 말아요~” 나를 흉해내는 듯, 조금은 흉한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령우를 한번 흘겨봐주고 부끄러운 듯이 희렴이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창피하단 말이야, 그만해에~” 내 주먹질이 생각보다 강했던 모양인지 곧 웃음을 멈추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는 듯이 날 바라볼 뿐이었다. 나의 무대를 마지막으로 레크레이션 또한 끝이 났고 모두들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아이들 사이에 섞여서 여기저기 부대끼며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와중이었다. 내 뒤로 서서 걷던 희렴이가 짧게 고개 숙여 귀가에 속삭이는 말. “잘 자.” “아! 으으응!!” 사실 말로써는 전혀 놀랄 만한 이유가 없는데 내가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커진 것은, 아마도 그 말을 건네던 희렴이와 나의 사이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조금만 고개를 틀기만 했어도 코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말을 하던 희렴이에게서 나던 샴푸냄새나, 그냥 ‘원희렴’ 이구나. 하고 알 수 있는 녀석에게서 나는 코 끝 싸한 시원한 냄새 때문이었겠지. 그런데 내가 그렇게 놀란 것에는 아랑곳 않고 한 마디 더 하길, “내일……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고 싶은 말……?” 나도 모르게 고갤 돌리게 된 순간. 다행히도 마침 숙였던 고갤 든 희렴이라 닿지는 않았지만 그 왁자지껄하고 시끄러운 틈바구니 속에서 내가 밀리기라도 할 세라 내 어깨를 잡고 사람들에게 닿지 않게 그 속을 헤쳐 나가며 답한다. “응.” “지, 지금 하면 안 되는 말이야?” “안되는 말이야.” 단호하게. 미소 지으며 안된다고 하는 그 말이… 자꾸 기대되고 설레는 이유는 정말 뭘까? 무슨 말일까 묻고 싶은 마음이 넘쳐흘렀지만 애써 참아냈다. 곧 좁은 복도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섞여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 멀어져 버린 희렴이. 애들이 다 지나가고도 나 혼자 멍하니 복도에 남아 쿵쾅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뒤늦게 나오다 나를 발견하고 령우가 걸음을 멈춰섰다. “여기 왜 이러고 있어? 안 들어가?”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막무가내로 령우를 붙들고 로비 앞 소파에 앉았다. 한참이나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령우가 의아한 듯 묻기 전까진 침묵만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왜 말이 없어?” “령우야.” “응? 왜?” “아까 나 희렴이한테 갔을 때 말이야. 어떤 일본 애들이 희렴이한테 만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나봐. 물론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런데……?” “그런데 희렴이가…안 된다고 했어. 나 때문에. 강다희 때문에, 내 진짜 여자친구 때문에 안된다고. 그렇게 말했대.” 말없이 내 얼굴만 바라보는 령우. “그리고 그전에 찬휘가 내 사진을 흉하게 찍은게 있었거든. 창피해서 안된다고 돌려달라고 했는데 희렴이가 가져갔어. 내 사진이 한 장도 없다면서.” “그래……?” “응! 그리고 아까 희렴이가 나한테, 내일 할 말있다고 했어. 물론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미리 말해주는 게…어쩐지 특별해서 말이야.” “…….” 내가 신나서 말하는 내내 령우는 조용했다. 이기적이고 멍청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나쁜 강다희는, 미처 령우의 고개 숙인 모습은 보지도 못하고서 혼자 들떠서 말하고 있었다. “사실 저번에 은예림을 만났을 때… 많이 자신이 없었거든. 내가 저런 아이를, 희렴이에게서 거둬낼 수 있을까 하구. 그렇지만 요 며칠 사이에 그런 걱정했던 내가 바보스럽게만 느껴져. 그 정도로 희렴이가 많이 다정해진 걸.” 그리고, 이미 내 앞선 말들에 잔뜩 가슴 헐은 령우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 이제……” 그렇게…나는 또 생각 없이 말을 늘어놓으려던 찰나였다. “희렴이, 희렴이, 희렴이!! 이제 그만 좀 해!!”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를 내려다보는 령우. 때문에 할 말을 잃은 내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서며 놀란 얼굴로 령우를 바라보았다. “령우야……?” “정말이지 이제 그만 좀 하면 안되겠냐…? 언제까지, 어디까지 가야 니 속이 시원해질래?” “무…무슨 말이야, 왜 그래…?” “내 스스로 내가 이렇게 추악한 놈이구나 되새기게 만들지 말라구! 너 계속 그러는 거 정말 화나고 짜증나. 니가 내 앞에서 희렴이 얘기를 할 때마다 희렴이를 질투해야 하고, 미워해야하는 거…이제 정말 지친다구.” 애써 담담한 척 하려했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린 순간이었기에. 령우의 마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희렴이에 대한 내 마음 또한 자제한 적 없지만, 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까. 내가 그럴 때마다 령우가 얼마나 힘들어할지를. 그 어떤 사과의 말도 건넬 수 없어서 그저 멍하니 선 체 울상이 되어 령우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차마 미안하다는 어줍잖은 사과도 할 수 없어서. 그 간단한 말조차 할 수가 없는 나였기에. 그런 내게…조금 전 나의 말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보인 가슴을 내보이는 령우. “니 맘, 모르는 거 아니야. 니가 희렴이를 누구보다 좋아한다는 거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너무한다는 생각은 안 드냐? 나, 너 좋다고 고백했어. 틈이 날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내 마음을 내보였는데 넌 그에 따른 어떤 대답도 없었지? 물론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그렇지만 적어도 너 나한테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오직 네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내 마음. 니가 내 친구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면서 주체 못하는 이기적인 내 마음, 차마 친구들한테도 밝힐 수 없는 추잡한 내 마음을 알면서, 나한테 이러는 거 정말 못된 짓 하는 거잖아….” 아무 말도…할 수가 없었다. 네 마음, 나도 모르게 아니야. 알고 있어. 네가 날 좋아해주고 있다는 거, 느낄 수 있어 령우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네 마음을, 어떻게 더 장난으로 취급할 수 있었겠니 령우야…. 그치만, 나는 그래서 겁이 났던 거였어. 내가 너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내가 느낄 수 있다는게 겁이 났던 거야. 때문에 내가 대답 할 수 없었던 건…….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그래도 참지 못해 거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잘못한 건 나이면서, 나쁜 건 나면서 우는 역할 또한 내가 해버리고 말았다. 정말 힘들고 슬플 령우가 차마 울 수 없도록. “그치만, 그치만 령우야…….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내가 내 마음을 너한테 말하면, 분명 네가 변할 것만 같아서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어. 내가 나쁘다는 거 알아! 하지만… 하지만 난 정말 널 잃고 싶지 않아, 령우야. 내게 넌 정말 소중한 친구야.” 그런 내 마음 또한 령우가 알아주길 바랐다. 결코 너를 잃고 싶지 않은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그렇지만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령우는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욱 화가 나고 답답한 듯한 표정으로 목을 옥죄는 옷깃을 늘어트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소중한 친구……? 하. 그딴 건 개나 주라고 해.”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4. 달갑지 못한 아침이었다. “정말 괜찮겠니?” 잠시 정신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걱정하는 선생님의 손길이 이마를 쓸었다. “아, 괜찮아요. 식사하고 오세요.” 담임선생님께 애써 괜찮다는 말로 마무리 짓고 혼자 남은 방안, 간밤에 어질러진 나의 짐들을 차곡차곡 챙기면서 생각했다. 나는 어젯밤 령우에게 확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다리지 말라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기에 우리들 사이에 어떤 끝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답답해. 똑똑. “누, 누구세요?” 조금은 놀라서 문 앞으로 뛰어나가자 들려오는 목소리. “나야.” “어, 어쩐 일이야?” 평소였다면 신이 나서 문 밖의 희렴이를 반겼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만큼은…내가 웃고 기뻐할 수가 없어. 령우의 아픈 마음을 알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어. 문도 열지 않는 채 묻는 내게 걱정스러운 듯이 대답하는 희렴이. “왜 밥을 안 먹어….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어지러워서. 조금만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따가 봐.” “…….” 내 걱정에 여기까지 올라왔을 희렴이를 애써 외면하고 문 쪽에서 멀어져 침대에 걸터앉았다. “문 앞에 약 두고 갈게. 나 가면 꼭 먹어.”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은 채 그 말을 끝으로 멀어져가는 희렴이의 발소리. 그제 서야 용기 없는 내가 문을 열었고 그새 보이지 않는 희렴이 대신, 문 앞엔 소화제와 데일밴드, 두통약이 놓여져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의 울컥함이란……. 분명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들고 왔을 테지.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짐을 싸서 밑으로 내려갔다. 식사를 끝마치고 모두들 멀지 않은 우메다역으로 걸음을 향했다. “모두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거다. 우리들을 위해 운행하는 전철이 아니기 때문에 놓치면 그대로 미아 되는 거야. 시간에 맞춰 움직이도록. 잠시 10분 동안 화장실이나 매점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한다.” 아침 출근과 등교시간 이었기 때문일까. 역에는 생각보다 붐볐고, 많은 시선도 받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겠어?” 어제 이후로 아직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던 령우가 내게 먼저 묻는다. “아, 응.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수학여행만큼은…… 어제 일 신경 쓰지 말고 즐겁게 지내자. 네가 우울하게 있는 건 싫어.” 또…나보다도 힘들 령우의 자상한 배려에 목이 메었다. 령우나 희렴이나…모두들 나한테는 너무 과분해. 애써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령우에게, 나 또한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그럴게. 헤헤… 아,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 올 테니까 먼저 열차에 타 있어.” 억지웃음 지었던 것이 혹여 티라도 날세라 빠르게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분명 잔꾀였건만… 어쩐지 정말로 지끈지끈 아파오려는 머리 탓에, 찬물을 틀고 시원하게 세수를 하던 참이었다. 찰랑. 고개를 숙임으로써 인해 옷 속 깊숙이 숨어있던 링 펜던트가 옷 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희렴이가 준 커플링……. 손에 끼고 다닐 수 없는데다가 워낙 덜렁거리는 성격에 잃어버릴까봐 가죽 끈으로 목걸이처럼 하고 다녔던 것. 받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떼놓지 않고서…. 화장실 조명을 받아 반짝 빛나는 반지에 살짝 입을 맞추고 잠시 거울을 바라보다 말고 아차 싶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열차를 놓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인데, 바보같이 또 정신을 놓고 있었으니 곧 출발할 열차를 향해 정신없이 뛰던 터, 챙강― 나의 움직임과 동시에 난 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멈춰서, 조심스럽게 목걸이 쪽으로 손을 향했다.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끈이 풀려버린 것인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반지 때문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금세는 시야에 반지가 보였는데, 미처 내가 줍기도 전에 누군가의 발로 인해 다시 챙그랑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로 데구르르 굴러가는 반지. “ちょっと, ちょっと待ってください!” 머지않은 곳에 떨어졌을게 분명한 반지가, 많은 사람들에 채여 혹시라도 더욱 멀어질까 조급한 마음으로 살피고 있는데 순간 나를 잡아 일으켜 세우는 누군가. “뭐하고 있어?” “바, 반지…반지를 떨어트렸어.” 삐리릭, 삐리릭― 곧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나는 그 정신없는 상태에서, 울먹이며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길바닥 한복판에 주저앉아 반지를 찾고 있는 내게 말하는 희렴이. “그냥 가자.” “안돼! 찾을 거야, 찾아야 돼…….” 잃어버릴까봐. 그래서, 그래서 한시도 떼지 않고 가지고 있던 건데… 다신 찾을 수도 없는 곳에서 잃어버릴까봐 하는 마음에 더욱 급해졌다. 쉽게 일어서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치 챈 희렴이도 나를 말리려 채근하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같이 반지를 찾아내려고 함께 살폈다. 그리고 곧, “찾았다.” 승강구에서 조금 떨어진 안쪽 의자 밑에서 희렴이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내 손에 쥐어진 반지. 영영 못 찾게 될 줄로만 알았던 반지를 보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다행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심한 것은 큰 실수였던 것이다. 곧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어느새 출발하고 있는 열차를 보게 된 것은 무심코 뒤를 돌았을 때 깨달았다. 희렴이의 손을 꽉 붙잡고 재빠르게 달려갔지만 이미 열차는 출발해서, 어느새 승강장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는 것을. “아…….” 희렴이도 나도 아무 말 못하고 그저 멀어진 열차를 바라보는 것 뿐. 세상에……어쩜 좋아. 순식간에 국제미아 되어부렸어……. 허탈하게 열차를 보다 말고 희렴이의 옷깃을 잡고 늘어지며 말했다. “어, 어떡해! 열차가 떠나버렸어. 어쩜 좋지?” 때문에 슬그머니 옮긴 시선으로 나를 보다말고 은근히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는 원희렴. “너 때문이야.” “뭣이? 왜, 왜 나 때문이야?!” “네가 반지 떨어트려서 그렇잖아.” “그…그치만 그것만큼은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단 말야……. 어, 어떡해?” 그래도 염치 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하는 나를 보곤 허탈하게 웃어 보이며 말한다. “바로 다음 차타고 가자. 둘이나 없어졌으니 분명 눈치 채고 역에서 기다리실 거야.” “…으응!” 그래도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녀석에게서 듬직함을 느끼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눈치 채고 기다리시긴 개뿔이…….” 멋쩍은 표정과 난감한 표정이 교차하는 녀석의 낯빛. 우메다역보다 더욱 사람으로 붐비는 이곳은, 교토 최고의 번화가답게 발 디딜 틈이 없이 복작거린다. 설사 선생님께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도, 마주칠 새가 없어. 망연자실한 채로 서있다가,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자꾸만 어깨를 치이는 나를 잡고 역 밖으로 나가는 희렴이. “아……” 그런 희렴이를 따라 움직이던 내가 잠시 걸음을 주춤하며 멈춰섰다. “왜 그래?” 참아보려고도 했지만 심하게 울렁거리는 속과 가뜩이나 시끄러운 곳에서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에 그만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웃…, 속이 이상해. 머리도 어지럽고 메슥거리는게……” . . . “배고파서였다 이거지?” 후르륵, 후르륵. 요란스럽게 면발을 먹고, 국물을 들이키는 것으로 우동그릇을 내려놓는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원희렴. 아따, 먹다가 체하게 생겼다. 자연히 눈치를 보게 된 내가 멋쩍어 하며 말했다. “히히…그래도 이제 살 것 같어.” 그런 내 말에 녀석은 작게나마 한숨을 내쉬고 카운터로 가서 우동 값을 계산 할 뿐이었다. “안 일어나?” “조금만 앉아 있다가 가자. 나가두 있을 곳이 없잖아.” 내 말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는다. “이제 어떡하지?” “계속 역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돈도 가방에 두고 나와 버렸고… 우리가 어느 호텔에 묵는 지도 모르고 있으니까.” 서로 별다른 대답이랄 것도 없이 대화가 멈췄다. 정말이지 다 나 때문이야…. 내가 그때 바보같이 반지만 떨어트리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스스로를 자책하던 것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 내게 손을 내미는 희렴이를 올려다보고 그만 테이블에서 일어나 가게 밖을 나가려던 찰나, 우동가게 주인아저씨 내외분 대화에 다시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보, 우리도 그만 식사해요.” . . . “그러니까……너희를 찾으러 올 동안만 가게에 묵게 해달라 이거지? 대신 가게 일을 돕고 말이야.” “네에! 부탁이에요. 도와주세요, 아저씨!” 가만히 희렴이와 날 번갈아보며 내려다보는 아저씨.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가 말하자면, 이 가게의 주인인 저 아저씨는 바로 한국 분. 제일교포라 이거지.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일본어 인사말에 당연히 일본인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주머니와 편하게 하는 대화로써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나를 한 번 더 보시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까짓 거 좋다. 대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바로 쫓아 낼 테다?” “네에, 감사합니다!” 그렇게…일단은 역 근처에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가게에 있던 앞치마를 두르고 조금은 신이 나있는 나와는 다르게 판이하게 굳어진 표정의 원희렴. 그도 그럴 것이……녀석은 분홍빛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이 꼴로, 가게 앞에 나가 호객 행위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하하, 너무 상심 말아라. 아주 잘 어울리니까 말이다. 오늘은 여자 손님들이 꽤나 몰릴 것 같구나.” 아저씨는 그런 원희렴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사실 나도, 녀석의 번듯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나까지 웃으면 아마 화낼지도 몰라. 그렇게…녀석의 호객 행위는 시작되고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 써빙과 주방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역을 보면서 혹여나 우릴 찾고 있을 선생님이 계시진 않을까 살폈지만 보는 내내 경찰이니, 선생님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확실히 희렴이 때문이었을까. 평소보다 3배는 여자 손님이 많다며 싱글벙글 하시며 아예 취직을 하라고 권하시는 아저씨 모습에 약간의 불안함이 엄습하기도 했다. 저녁 11시경 영업이 끝나고 뒷마무리까지 도운 후에야 쉴 수 있었다. 종일 익숙지 않은 가게 일을 돕고 찌뿌드드한 허리로 기지개를 피고 있는 내 옆에 앉으며 말하는 희렴이. “네가 방에 들어가서 자. 내가 여기서 잘게.” 남은 방이 하나뿐이었던 것을 고려했던 탓인지, 가게 한 켠에 놓인 소파에 몸을 누인다. 나는 또 그런 녀석 옆으로 냉큼 다가앉으며 말했다. “내일은 선생님들이 꼭 찾으러 오시겠지……?” 내 말에 대답 없이 누워만 있을 뿐. 그렇게 길지 않은 조용함 가운데, 더럭 녀석이 입을 뗐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어지러운 가운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특별하게 별일은 없었구……” “…….” “그저…알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을 뿐이야…….” “령우 말하는 거지…?” “알고…있었어?” “알지 못할 리가 없잖아….” 피식 웃으며 답하는 희렴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만…희렴이 또한 눈치 채고 있던 령우의 마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애써 티 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컸어, 령우의 마음이. 때문에 더욱 속상해졌다. 미안함에 미안함이 거듭해 크게 북받쳐 올랐다. 이런 것 때문에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령우를 울리고 말았어. 정말…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나를 묵묵히 바라보던 희렴이가, 순간 거칠게 끌어안았다. 내가 놀라움에 숨을 들이킬 만큼.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릴 만큼 순식간의 일이었다. “잘했어.”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여 주는 그 손길이 위로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따뜻하고 다정한 위로였지만 한 편으로는 45키로 정도 되는 내게 10킬로그램 정도의 죄책감이 되고 말았다. 내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사랑은 다쳐도 상관없다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마음의. “어째서…….” 나를 위한 위로에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이기적이었으나 그때의 나와 희렴이에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더 이상 죄책감을 느낄 새가 없었다. 지금 우리의 감정만 생각하기에도 그 밤은 짧았으니까. “날더러 나쁜 놈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이제 어느 누가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어젯밤, 령우를 울리지 않을 대답을 했다면……오늘밤 울게 되는 건 나였을 테니까.”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그날 이후 》 오랜만에 꿈을 꿨다. 너를 만나던 순간부터, 너를 잃었던 때까지의 평생 잊지 못할 지독한 악몽을…….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 오게 되고…누군가 널 사랑했던 이유를 묻는다면 정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게. 너랑 나는 사랑할 운명이었다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내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앞으로는 욕 같은 거 하면 안돼.” “놀구있다. 좋은 말 할 때 안 꺼질래?”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12월이었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난 것은. 추위에 붉어져 부르튼 얼굴로 헤헤 웃으면서 내 손에 들려있던 담배를 가로채던 그때의 너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 남자친구니까 당연히 담배두 안 되구. 음…귀 뚫는 건 싫고, 오토바이 타는 것도 싫어. 염색두 하면 안되고, 머리 길이는 이 정도면 됐다. 역시 말투랑 담배만 끊으면…….” “너 말이야. 나는 내 여자친구가 너 같이 생긴 거 딱 질색이거든? 너처럼 머리가 긴 것도 질색이고, 앵앵대는 것도 질색이야. 그러니까 넌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렇게 돌아섰었지, 분명히. 자정이 넘은 크리스마스이브 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버리듯 내버려두고 혼자 돌아섰던 게 아직도 뚜렷이 생각나. 그리고 그것이, 너와의 마지막만남일 줄 알았어. .. “야! 렴아, 인나봐~” “왜 자꾸 깨워 아침부터.”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졸린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켰을 때, 난처한 얼굴로 밖을 가리키는 령우 때문에 의아스럽게 내다본 창밖으로 보이는 너의 모습에 다소 짜증나는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을 때. 대체 얼마 동안을 기다리고 서있었던 건지, 빨갛게 부르튼 언 손을 호호 녹여가며 내 앞으로 다가서 목도리를 푸르던 그때의 네 모습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앵앵대지 않을 거야. 얼굴은 어쩔 수 없겠지만…그 정도는 너도 참아주면 안될까? 대신 나도 네 말투는 이해할게.” 허리까지 내려오던, 사실은 아주 잘 어울리고 예뻤던 그 긴 머리를 귀까지 드러낼 정도로 짧게 자르고는 해맑게 웃어보이던 네 모습에 미처 할 말을 잃었다. 그때, 그게 화근이었어. 그저 ‘네 맘대로 해’ 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돌아선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널 보던 그때, 이미 그때 난 너를 받아들였는지도 몰라. 그 순간이 시작이었을 지도 모르겠어. ‘에휴, 내가 가르쳐 줄 게 참 많은 것 같다. 봐! 여자가 술 마시려고 하면 일단 말리는 게 남자야. 앞으로는 내가 술 먹는 척하면, 재빠르게 말려?’ ‘싫어.’ ‘비 올 때 달려가서 우산을 구해오는 건 기본적인 매너라구.’ ‘미쳤냐.’ ‘여자가 어떨 때 가장 감동을 많이 받는 줄 알아? 바로, 갖고 싶었던 물건을 선물해줄 때. 다른 선물 같은 거 필요 없어도, 꼭 가지고 싶은 걸 남자친구가 선물 해줄 때, 여자는 엄청 감동하게 되어있다고.’ ‘비싼 거면 어떡해.’ ‘걷기 힘들어하는 여자친구에게 근사하게 등을 내주기.’ ‘나도 힘들 텐데.’ ‘진짜 남자는 말이야~ 언제나 주먹을 쓰지 않는 법이야. 물론 맞기만 하는 남자친구는 매력 없지만, 남자는 딱 한 가지 이유에서만 주먹을 쓰면 돼. 여자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주먹을 쓸 줄 아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란 말이야. 아이참, 내 말 듣고 있어?’ ‘…….’ 그때는 몰랐었어. 기막힌 필연도 운명도 아니었던 만남. 친구끼리 소개시켜준 별것도 아닌 인연에, 네가 4년 동안 길러왔다는 머리를 잘라가면서 까지, 매일 버스를 타고 외지에 있는 우리 학교를 찾아오는 고생을 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어. 왜 그랬는지 아직도 알 수는 없지만, 너에게 만큼은 그저 쌀쌀맞고 냉담하게. 언제나처럼 봐도 안 본 척, 들어도 모르는 척. 그렇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찬휘와 령우, 그리고 너. 우리 넷이 함께 있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여겨질 때서야. 그때 서야. “희렴아.” “응.” “너, 참 많이 변한 거 알지? 근데…, 그게 다 예림이 때문이냐?” “……글쎄.” “은예림 좋아해?” “…….” 뜬금없던 찬휘의 물음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실없이 웃어 보이는 것. 그게 전부였어. 네가 내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단 한번도 인정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왜였을까. 그 순간만큼은 인정해도 나쁘지 않겠다…싶었어. 은예림이 원희렴의 진짜 여자친구라고, 말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어. “그 녀석, 분명히 은예림 좋아하게 됐어. 아씨! 맨날 관심 없는 척 굴다가 정말 좋아해 버리면 어쩌란 말이야? 렴이 자식이 은예림한테 한 게 있으니까 무턱대고 나무랄 수도 없고…… 아무튼 희렴이한테는 말 하지 말자. 잘못 본 걸 수도 있잖아. 정확한 거 아니니까 직접 은예림 입으로 듣기 전까지는 그냥 감추고……” “뭘…감춰. 말해.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니네가 본 거 말해.” 사실은, 그다지 신경 쓸 말도 못 됐었는데. 령우 입에서 전해들은 그 이야기에 미친 듯이 그곳으로 뛰어가고. 또 그곳에서 본 장면들로 인해 미친 듯이 열 받고, 또 미친 듯이 화를 내고.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네가, 그냥 다른 남자와 웃고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런 네 옆에 서있던 그 자식을 정신을 잃을 만큼 쥐어 팬 채 다짜고짜 너의 어깨를 흔들면서 내가 했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뭐 하는 짓거리야……. 시작도 니가 하고, 애꿎은 사람 맘 흔드는 것도 너면서 왜 사람 병신 만들어. 나 가지고 논 거야? 장난 친 거야?” “니가, 니가 나쁜 거야. 사람 병신 만든게 누군데?! 매일…매일을 그렇게 사람 기다리게만 해놓고, 나한테만 냉정하고 나한테만 웃어주지 않고 나한테만! 그러면서 화는 왜 내?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제와 내가 다른 누구랑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 “……못 놔. 이젠 내가 너 못 놔 줘.” 그때, 그렇게 울부짖던 널 끌어안으며 그제 서야 깨달았던 거야. 나는 너를 좋아하는 구나. 원희렴이 은예림을 좋아하는 구나. 그리고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어. 네가 나를 배신하는 일은, 네가 나를 속이는 일은 그날이 끝이 될 줄로만 알고 있었어. “이게 뭐야?” “열어봐. 색깔이 이뻐서.” 포장지를 뜯어내고, 안에 들어 있던 손수건을 꺼내들며 조금은 멋쩍게 웃어보이던 너. “뭐야.” “왜. 싫어…?” “손수건은, 이별의 선물이란 말이야. 헤어질 때 하는 선물이라는데…….” “……몰랐어. 줘. 갖다 버리게.” “에이, 됐어. 그래도 가지고 있을래. 우리가 그 말을 없애 버리는 거야. 손수건이 결코 이별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증명해 보이면 되잖아. 영원한 사랑으로~ 오케이?” 그 선물이 화근이었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건 어떤 의미였던 간에 나는 후회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실을. 언제나……너에게 냉정하기만 했던 나에게, 네가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며 나란 인간에게 매달렸었던 사실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었는지. 우연히 마주치게 된 광경들. 네가 싫다던 남자. 말투가 쌀쌀맞은 남자. 담배 피는 남자. 오토바이를 타는 남자. 귀 뚫은 남자. 염색을 한 남자. 다…네가 싫다고 했었던 것들이면서, 막상 넌 어째서 그 모든 걸 다 갖춘 남자 옆에서 그렇게 기쁜 듯이 웃고 있었냐. 어째서 그런 남자 옆에서 그렇게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냐……. 네가 싫어하는 모든 걸 갖춘 그런 남자의 옆에서 말이야. 때문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었고, 그제 서야 널 소개시켜 준 녀석에게 달려가 물었어. 네가 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네가 4년을 짝사랑한 사람. 4년을 길렀던 머리도, 오로지 그 남자를 위해서였다고. 단순히, 그 남자를 잊기 위한 방법으로 나를 만났다고. 나를 핑계로, 그 사람이 좋아했던 네 긴 머리를 잘라버렸다고……. 나에 대한 네 별것도 아니었던 그 사소한 바람들은 그 사람을 잊기 위해서, 그 사람에 대한 일말의 어떤 것도 나에게서 찾지 못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네가 사랑한 남자는 그런 남자였겠지. 억지로 술을 마시는 너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 밖에 몰랐던. 비가 올때도 네가 젖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던. 네가 꼭 가지고 싶은 것 하나도 모르는 채 무시해 버린. 지치고 힘든 너를 뒤에 두고 혼자 걸었을. 언제나 주먹질을 하고 다녀 얼굴에 상처 나을 새가 없던 그런 남자……. 누구든 상관없었던 거야. 그 사람을 잊을 수 있도록 정신없이 빠져들 수 있을 상대가 필요했을 뿐, 그게 내가 아니어도, 넌 상관없었던 거였어……. 미칠 듯이 눈물이 났어. 그렇지만 전처럼 화를 낼 수는 없었어. 그랬다가는…네가 가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나를 핑계로 내게서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제야 뒤늦은 후회를 했다. 천번만번. 나는 그때 왜 너를 떠밀어내지 못했을까. 이른 아침, 짧게 머리를 자르고 나를 기다리고 서있던 너를 왜 그때 바로 밀어내지 못했던 걸까. 나가라고, 내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왜 진작 말리지 못했을까……. ..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아…, 친구. 친구 좀 만나고 오는 길이야.” “…….” 너와 그의 만남이, 그때 그 한번으로 끝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계속 너를 만나고.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나모르게 다시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널 보고서도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던 이유. 이번에는 내가 너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내게……. “미안해…….더는 너를 속일 수 없어. 나 그 사람이 좋아. 너랑 있으면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너랑 있어도, 너랑 만나도 그 사람이 좋아. 그 사람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다시는 날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희렴아…. 나…, 그 사람한테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나는…….나는.” “……미안해.” 그럼 나는. 이제…너만 기다리고 너만 바라보는 나는 어떡하고. 멀쩡하게 잘도 살던 원희렴을, 자기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 놓고 어딜 가겠다고. 날 두고 어딜 가겠다고. “가지마. 가지 마….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가지 마, 제발…….”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화를 내다가, 결국은 울음을 터트리게 된 나를 보면서도. 결국은 애원을 하게 된 나를 보면서도 넌 그렇게, 그렇게 떠나갔잖아……. 그래도 쉽게 보낼 수는 없었다. 학교를 뛰쳐나가 너를 기다리고, 그렇게 힘들게 너를 만날 때마다 넘쳐흐를 것만 같은 눈물을 애써 참아내며 네게 했던 말들. 몇 번을 날 떠나도 괜찮으니까 다시 돌아오라고.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언제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네 마지막이…나이기만 하면 된다고. 애써 고개 돌려 외면 너를 보면서도 수도 없이 했던 그 말들…. 난감한 표정으로 그와 함께 태연한 척 내 옆을 스쳐 지나가버리던 너의 모습. 나를 모르는 척하던 익숙지 않은 그 뒷모습이… 아직도 너무 생생해서 겁이나. 아직도 그때의 냉정하던 너의 모습만큼은 잊을 수가 없어. 비올 때 우산 가져다주기, 갖고 싶은 선물을 사주기, 업어주기, 또…너만을 위해 주먹을 쓰기……. 이제야, 네가 원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이제야 해줄 수 있는 남자가 되었는데 그렇게 가버렸으면서. 차라리 나를 그 남자처럼 바꾸어 놓았다면. 그 남자처럼 염색도 하라고 하고, 담배도 피고, 오토바이도 타라고 하고. 그래서 내가 그 남자와 비슷해졌었더라면, 네가 날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에 울고 또 울고. 길을 걷다 너를 닮은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달려가서 붙잡게 되고, 남는 시간만 생기면 너를 찾는 일에 하루를 다 써버리는 지독한 일상에 익숙해졌을 즈음…너로 인해 가루가 되어버렸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너와 많이 닮은 듯, 닮지 않은 다른 누군가로 인해. 단순히 너의 빈자리를 메워 둘 수단이 될 사람일 뿐이었는데, 너를 위해 하기로 했던 사소한 일들을 그 아일 위해 해나가기 시작했어. 너를 위해 비가 올 날을 기다렸던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우산을 가져다주고, 너에게 선물을 사주기로 했던 내가 다른 사람의 선물을 사주고, 너만 위해 쓰기로 했던 주먹을…그 아일 위해서 쓰고. 네가 사라진 후로, 재미있을 필요가 사라졌던 쓰디쓰기만 했던 내 삶에 웃음이 생겨버린 것처럼. 어느새…네가 없어도 다시 웃을 수 있게 됐어. 너에게 해주지 못했던 많은 것을, 더욱 많이 해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 생겼어. 나도 모르는 사이 너를 사랑했을 때보다 더 큰 마음을 알게 됐어. 지금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다면 분명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거야. 하지만 그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 없을지도 몰라…. 아직도 가끔은 그때의 너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지만. 네가 만약 늦게라도 다시 내게 돌아온다면 쉽게 밀어내지는 못하겠지만…언젠간 변하리라 믿어. 너무 늦지 않게, 나의 눈이… 나만 바라보는 그 아일 마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그러니까……그러니까, 용서한다, 은예림. 이제야 널 용서하고 보낸다. 내가 아는 사랑은, 다시금 심장을 뛰게 만들어준 상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준 것은 너이니까. 너로 인해 배우게 된 사랑이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내비춰 줄 수 있도록 해준 너이니까. 솔직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 너이니까. 이제 그만 널 용서하고 보낸다. 용서한다, 은예림……. …네가 나오는 꿈이 지독한 악몽이 아니라,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빛바랜 추억 속 기억들 중의 하나로 너를 기억하고 싶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6. 아무런 말도 없었다. 멍해진 내가 숨 가쁘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가 들킬까 가슴팍을 꾸욱 짓누르고 있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가 입을 떼려던 순간, “안 자고 뭐하니?” 잠시 밖으로 나오신 주인아주머니의 한 마디와 갑자기 밝아진 상황에 깜짝 놀라 서로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을 뿐. “예? 아, 이제 곧 잘 거예요.” “그래. 오늘 하루 수고 많았다. 정말 고마워~ 만약에 내일도 선생님 찾지 못하면 경찰서에 연락이라도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구, 푹 쉬렴.” “예. 안녕히 주무세요.” 아주머니가 다시 들어가시고, 불이 다시 꺼지면 깊게 내쉬는 희렴이의 숨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 희렴이. “내가 어제……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아, 으응!” 조금 전 말의 의미와 더불어 두근두근. 사실 내심, 하고 싶다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말을 꺼낸다. 기대하고 있지 않으면 거짓이고 설레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 적당한 설렘과 다분한 기대 속에 녀석에게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말을 꺼낸 원희렴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림일…은예림을, 정말 많이 좋아했어.” 다시 가슴이…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주고 싶다던 말이, 이런 말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됐어.” 말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는 아무렇지 않은 그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두 세배쯤 더욱 크게 번져버린 속상함. 이제 이 애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혼자서 헛물을 들이킨 것도 속상한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앉아서 듣고 있어줄 만큼, 강심장은 아니었으니까. “너는…, 왜 자꾸만 내 앞에 그 애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해서, 아직도 그 애를 좋아하는 네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너를 보는 내 마음까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야.” 더럭 그동안 상처받았던 내 마음을 내보였음에,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는 듯이 처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이 왠지 더욱 속상해. “전혀 신경 안 쓰는 것 같아보여도, 네가 그 애를 추억하고 떠올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서 그 애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싫어. 니가 아주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한테 내가 모르는 그 아이와의 이야기를 꺼낼 순 없어.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아. 정말 잔인해, 너….” 너무 서운하고 속상해서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 그 순간에야, 령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 말을 아무렇지 않은 듯 옆에서 들어주고 있어야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 건지 너무 잘 알겠어. 자리를 피하려 일어선 나의 손목을 붙잡은 채 말하는 희렴이. “끝까지 들어줘.” “…….” “내 마음이 어떤 건지, 너한테 말해주고 싶어서 그래….” 결국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게 된 내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는 은예림이 만든 사람이야. 2년 전에 나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 만약에 내가 그 애를 만나지 않은 채로 우리가 알게 됐다면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 무슨 뜻일까. 문득 들은 그 말의 의미를 찬찬히 되짚어 보고 있을 즘, 다시 말을 잇는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아이에게서 배웠어.” “무슨…뜻이야?” “2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밖에 모르고, 뒷골목을 전전하는 양아치와 다름없는 몹쓸 놈이었으니까. 그런 내 앞에 은예림이 나타나줘서… 변했어. 우습고 유치한 진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사실이야. 나는 그 애가 좋아서…변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끝까지 들어달라고 했던 녀석의 말은 못 들은 체 하고 싶을 만큼 듣기 거북한 말들이었다. 또 다시 아무렇지 않게 그 아이를 떠올리며, 그 아이에 대한 감정을 내비추는 원희렴은 무척이나 잔인하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은 저 녀석의 눈 때문이 아니었을까. 기억을 떠올리듯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던 그때 희렴이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났던 것 같다…. “조금 냉정하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그 애가 날 이용한 건 분명해.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어. 그 아이 때문에 내가 변했고, 그래도 내가 그 아일 몹시 좋아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날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그때 네가 나타난 거야.” 멍하니 녀석의 눈을 바라보던 나와 희렴이의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회상을 접은 듯, 이제는 나를 바라보며 반짝이던 녀석의 눈. 조금은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하던 말. “그런데…만약에 지금 다시 그 애가 돌아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저 말없이 듣고 있었던 내게 뒤이은 그 말들은 과연 우리의 ‘시작’ 이었을까, 아님 ‘끝’ 이었을까. “그 애에게 주기로 했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너에게 주었으니까. 너와 내가 만나면서부터 해오던 모든 것들은 은예림에게 해주기로 한 것들이면서, 나는 어느새 그것들을 강다희에게 해줬으니까. 별 것 아닌 행동도, 말투도…그리고 마음까지도 모조리 너에게 주어버렸으니까.” “…….” “아직 사랑이라는 확신은 할 수 없어. 하지만 널 좋아해. 더 이상 은예림을 기억하지 않아도 될 만큼…, 친한 친구에게도 널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해.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해서… 네가 보이지 않으면 심심하고, 걱정되고, 보고 싶어서… 우울해지고 슬퍼지는 이런 마음들이 사랑이라고 말해준다면 확신할게.” “…거짓말.” “…진심이야.” “…….” “사랑일까……?” “……사랑이야.” 사랑이라는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날 끌어안는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안아도, 안아도 덜어져 있는 것만 같아서 더욱 꼭 껴안았다. 그때…쉴 새 없이 들려오던 심장의 고동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실 그런 마음들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희렴이 또한 날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더는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확신보다…, 후회하고 싶지 않은 내 욕심에 대한 확신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희렴이는 그것 또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밤이었다. 누구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하고 소중한 밤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이유로 잠 못 이룰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밤……. ※ “괜찮은 거니? 다친 덴 없는 거야? 잠은 어떻게 했니? 식사는? 응?” 희렴이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에, 선생님께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교직생활이 오래지 않은 담임선생님께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없어진 것을 관광버스에 오르고 나셔서야 깨달으셨음에, 다시 역으로 가셨었지만, 그때 우린 이미 다음 차를 타고 가와라마치 역에 있었고…. 만약 수학여행 내 우리를 찾지 못한다면 길지 않은 그 교직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이셨다고 하니, 하루 만에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아무튼 정말 다행이구나. 아무 일 없이, 변한 거 하나 없이 너희를 찾았으니 정말 다행이야.”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우리 둘을 꼭 끌어안으셨다. 그리고 우동가게 주인 내외분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하시는 내내 눈치 채지 못하신 듯 했다. 선생님의 옆에 서 있는 희렴이와 나의 손이 아주 굳게 마주 잡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선생님을 따라 수학여행 코스 장소인 야사카 신사로 갔고, 우리가 내비추자 마자 우리를 알아본 아이들의 엄청난 질문공세들이 쏟아졌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도 어떻게 찾게 되서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었다구.” 조금 전까지도 내 옆에서도 혹여 쓸데없는 질문이라도 들려올세라 굳건히 옆을 지켜주던 희렴이도 선생님의 부름에 잠시 자리를 떠난 상황, 어쩐지 머쓱해진 내가 머리를 긁적이던 참이었다. 같은 반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나와 말도 몇 마디 건네 본 적 없던 아이들 몇 명이 바로 옆에서 수군거리던 소리가 내 귀에 들어온 것은. “야, 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지 솔직히 혈기왕성한 사내새끼랑 계집애랑 단둘이 있었는데 어떻게 아무 일 없을 수가 없겠냐.” “내말이. 아~ 아무튼 누구는 참 재주도 좋다. 나도 내친김에 여기서 누구랑 같이 길이나 잃어버려봐?”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하며 꺽꺽대는 사람 같지 않은 녀석들을 마주보고 있는 지금, 뭐라고… 말은 해야 하겠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지금으로썬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 아이들의 말에 순식간에 나에게로 향한 시선과 배로 불어난 수군거림에 그 자리에 서서 붉어진 얼굴하고, 그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을 쯤. 퍽― “웃!!”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걸어온 누군가가 거침없이 날린 주먹에 기도 못 쓰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진 무리 중에 한 녀석. 깜짝 놀란 내가 넘어진 아이와 녀석들을 내리다 보며 한 마디 하는 그 누군가를 번갈아 보았다. “세상 모든 새끼들이 다 너희같이 찌끄레기 같진 않다. 다시 한번 더 그따위 개소리 지껄이면 가만 안 둬.” 녀석에게 날렸던 왼손 주먹을 훌훌 털며,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아서는 령우. 정말이지…언제나 이런 식이다. 곤란해진 내게, 혹은 이기적인 내게 아무렇지 않게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서 주는 녀석. 엉거주춤 멀어지는 놈들을 보다가, 이내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말없이 뒤돌아 버린다. 그 순간…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멀어지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한없이 바라만 보았다. “기다려!” 그러다가도,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미 저만치 멀어진 령우를 향해 달려갔다. 내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춰서고 나를 바라보는 령우. “대체 왜 그래? 너는, 너는 왜 그런 거야?” “뭐가.” “넌 어째서, 어째서 항상……” 항상 그렇게 나를 나쁘게 만드는 거야. 왜 미안해서 고개도 들 수 없게 만들어…. 그 애의 다갈색 눈동자가 못나기만 한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그 순간, 나는 한 번 더 독한 마음을 먹었다. “나 너 안 좋아해 령우야.”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나, 희렴이랑 있는 동안 네 걱정 안 했어. 네가 잊지 말아달라고 했는데도, 나 네 생각 안하고 있었어. 알아?” “밥은 먹고 온 거지?” “화 안내? 차라리 나를 미워해.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때려. 그게 백배 천배 나아. 너한테도, 나한테도 그게 나아. 너도 알고 있잖아?” 몇 번을…내 말과는 다르게만 대답하던 령우도, 또 그것을 참지 못한 나도 서로를 마주보았다. 내가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빠르게, 거친 손놀림으로 내 어깨를 부여잡고 물었다.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할까…? 화를 낼까? 그러지 말라고 빌기라도 할까? 넌 대체 나한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데? 왜 자꾸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건데, 왜, 왜?!” “우리 그냥 친구가 되자, 령우야.” 무슨 뜻이었을지, 잠시간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령우에게 나는 그런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말과 함께 녀석에게 내밀어진 내 손. 잠시 내밀어진 내 손과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령우가 물었다. “무슨 뜻이야….” “돌아와, 령우야. 나는 네가, 그냥 내 친구 령우였으면 좋겠어. 그동안 네가 했던 말들…, 모두 다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할게. 우리 그렇게 지내자. 응?” 허탈하게 웃어 보이는 령우를 보면서도 주먹을 굳게 쥐었다. 얼마나 잔인한 말들인지는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가슴 아파할 너를 보는게 더 힘들 것 같아…. “없었던……일이라고? 정말 잔인하다, 너.” “정말 솔직히 너, 네 말대로 멋지고 괜찮은 녀석이야. 그런 네가 왜 나를 좋아해…? 그게 잘 못된 거야. 그게 이상한 거야. 솔직히, 나란 애가 뭐 별 거야? 언제나 툴툴대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됐어. 됐으니까 그만둬. 너를 위해서 내 마음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마.” “……어?” 왜였을까. 그 순간, 나를 위해서라는 령우의 그 말에, 차마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던 것. “네가 원한다면 그럴게.”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더 이상은 화가 나고 속상한 얼굴이 아닌, 조금은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진심 같지 않은 웃음과 함께 말한다. “나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친구의 애인을 몰래 좋아하는 더러운 짓 따위, 나조차도 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쳐진 어깨를 하고 내게 뒤돌아서는 령우를 보며 나는 기도했다. 령우가 마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로 인해 아파하는 일이 제발 더 이상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기도를 하는 나는 그 순간까지도 나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혼자서 했을 많은 고민과 생각들, 친구에게 들었을 죄책감의 무게, 주위의 시선. 그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나만 생각했는데, 나는 또 다시 그 애를 위해서라는 위선적인 말로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고 있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7. “왜 그래?” 보다 못한 희렴이의 물음이었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의 밤인데, 아침에 사진촬영을 할 때도, 놀이공원에서도 종일 나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하다가 끝끝내 나온 질문이었다. “아냐, 아무것도.” 차마 말할 수는 없어서…. 나름대로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나보다.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해도, 령우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럴 순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나마 내게 남아있던 양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나머지 한결 더 마음이 편한 것도 사실이다. “거짓말 하지 마. 얼굴에 다 드러나.” “거짓말 같은 게 아니라…….”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는 희렴이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령우가 날 좋아해서, 나는 또 그런 령우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 미안해서라고. 말하다가도 망설여지는 듯 작아진 목소리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였다. 일순간, 재빠른 손놀림으로 내 볼을 쭈욱 잡아당겼음에… 깜짝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을 바라보자, 말한다. “다녀와.” “어, 어딜?” “령우한테.” “싫어, 안가. 내가 어떻게 가.”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령우 얼굴을 봐. 더는 령우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할 용기가 없는데…. “그래. 정 못 가겠으면 가지 않아도 돼.” 그러자, 볼을 꼬집고 있던 희렴이의 손에 천천히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곧 녀석이 말했다. “다시는 령우랑 이야기 할 수 없고, 장난치지 않아도 괜찮다면 상관없어. 그래도 괜찮다면 가지 않아도 돼.” “아니야, 그런 건!” 박차고 일어서느라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물이 바지를 적셔버린 우스운 꼴로, 씩씩대는 나를 엷게 미소 띠운 얼굴로 바라보던 희렴이를 보고서는 더는 망설일 것도 없었다. “다녀올게.” 작게 손을 흔들어주는 희렴이를 뒤로하고, 빠르게 뛰었다. 사실 자신은 없지만, 이미 나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령우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자신은 없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미 많은 상처를 받은 령우이지만, 나의 서툰 사과 한 마디에 다시 웃어줄 거라는 것. 그거 하나. 숨도 안 쉬고 령우가 있는 방문 앞까지 뛰어가, [1609] 호라는 룸 넘버를 확인한 후, 더럭 방문을 열며 외쳤다. “령우야!!!” 그러나 다급했던 령우보다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결코 령우가 아닌…, 반라의 상태로 나를 보고 굳어선 다수의 남정네였다. “…….” “…….” 결코 짧지만은 않던, 한참의 시간동안은 그들도 나도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그들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다시 눈이 마주친 어색한 상황이 되어서야 한번 씨익 웃고…. “꺄악!!” 당황한 나는 그대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래도 남자라, 생각보다 담담한 듯한 그들은 멍하니 서서 그런 나를 바라보고. 안 쪽에 있다가 뒤늦게야 이 상황을 알아챈 령우는 아이들과 나, 그 중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문을 닫아버렸다. “야! 뭘 보고 있어!” 거칠게 문이 닫히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즈음, 잠시 후에 문이 빼꼼히 열리고, 방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나를 내려다보는 령우.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한 마디의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기 이전에 묻는다. “지금 휴식시간인 거 몰라?” “나두 볼려구 본 거 아냐! 누가 옷 벗고 있을 줄 알았겠어?” “오후 내내 땡볕 돌아다니다가 간만에 주어진 휴식시간이니까 씻을 준비하는 게 당연하지! 너는 대체가……,” 평소처럼, 무어라고 쏘아붙이다말고 다시 어제의 일이 기억이라도 난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튼 조심해.” “왜, 왜?!” 말과 함께 다시 방으로 들어서려는 령우의 옷깃을 붙잡고, 힘없이 숙여진 고개와 더불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깨 때문인지, 내 기분을 살피려고 령우가 조심스럽게 허릴 낮추던 그 순간, 나는 붙잡고 있던 녀석의 팔목을 와구 깨물었다. “으아악!!”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놓인 령우는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붉어진 팔목과 나를 번갈아 본다. “어울리지도 않게…화내다 말구 무게 잡는 건 또 뭐야!” 네가 또 그러면…, 사과할 용기가 나질 않잖아…. 씩씩대는 나를 보고 멍해졌던 령우가 이내 대답한다. “그럼…어떡하냐. 지금같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가도, 또 언제 화를 내서 너를 울릴지도 모르는데. 대체 어떡하면 좋겠어.”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었다. 나만 아니라 령우도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나는 언제나 나만 생각하고…. “잘 들어!” 한 뼘 이상 나는 키 차이에도 불구하고, 까치발을 들어서기까지 하며 녀석의 멱살을 쥐고. 깜짝 놀란 령우가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바라보면, 나는 그제 서야 더 이상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한다. “난 절대 널 잃을 생각은 없어. 여태껏 내가 했던 말, 어제 했던 말 다 잊어. 속상하고, 화가 났었더라도 잊어줘. 한번만 더 네가 날 용서해. 네가 했던 말들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래. 어쩌면 당연해. 네가 날 좋아하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지금 우리학교에 여자가 나 하나일 뿐더러, 굳이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종 내가 생각해봐도 나는 정말 매력 있는 것 같거든.”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나를 보며 어리둥절해하는 령우를 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더 이상 말리지 않을게. 내가 좋으면, 실컷 좋아해. 나도 나 좋다는 사람, 일부러 냉정한 태도로 상처주고 싶은 마음 없어. 너는 나한테…그렇게까지 해서 떨치고 싶을 만큼 하찮은 사람 아냐. 소중해. 좋아하는 희렴이 만큼 소중해. 그래서…,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너랑 난 변함없이 친구야. 그치만 만약 그러다가…, 몇 년 후이든, 몇 십 년 뒤의 일이든… 너는 변함없이 나를 좋아하고, 또 내가 희렴이보다 네가 더 좋아졌다고 하면 늦더라도 받아줄래? 그때까지 내 곁에 친구로 있어줄 수 있어……?”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게 가장 솔직한 나의 마음이야. 확신이 없는 대답으로 설령 령우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너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풋……. 푸하하하하.” 그런 나의 이기적인 말들에 그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볼 뿐이던 령우는, 작게 미소 짓다가 이내 커다란 웃음소리로 텅 빈 복도를 메웠다. “왜, 왜 웃기만 해?” “너답다, 강다희.” 붉어진 얼굴로 녀석에게서 대답을 기다리던 내게 다시 한번 령우가 보여줬던…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환한 미소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몇 년이 아니라…며칠 뒤일지도 모를 걸? 나도 너만큼이나 매력 있는 남자니까.” 그때 그 말을 하던 령우는, 분명 그 어느 누구보다도 멋있었다. 녀석이 다시금 보여준 환한 웃음에 나까지 덩달아 소리 내어 웃어버렸고,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우리 둘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 “온천이요?” “응, 1층에 내려가면 있어. 야외온천인데 아주 좋단다. 자기 전에 다녀오렴. 마지막 밤인데.” 선생님께 여관 안에 온천이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부랴부랴 내려와 조심스럽게 온천으로 향했다. 탈의실 바깥쪽으로 길게 내려진 발을 들추자, 까만 밤하늘이 훤히 보이는 자연온천이 그대로 눈앞에 보였다. “오아…….” 주위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현무암으로 보이는 암석으로 둑을 쌓은 탕에선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고 있는데다, 간혹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환한 보름달이 비추는 멋있는 밤이었다. 저녁시간 이어서였는지 텅 빈 탕안. 혹, 혼욕인가 나름대로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라 했다.-_- 처음 접한 신기한 환경에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물을 찰팍이다 말고 불현 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으니, ‘참, 나무판자 하나 사이가 남탕이니까 조심하렴. 엿보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잖니. 하도 호기심 많은 나이니까…호호호.’ 담임선생님의 말씀이셨다. 허나……, 그 호기심 왕성한 나이가 꼭 남자에게만 해당된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여자도 예외는 아니라는 말씀이지, 허허. 나도 모르게 비식비식 입 꼬리가 말아 올라감과 동시에 별로 높지 않게 쳐진 나무판자 옆으로 다가섰다. 감히 눈으로 보기 이전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장애물때기에 귀를 가져다대던 찰나였다. “개자식.” 내가 깜짝 놀라 움찔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이 생각 없이 엿들은 말이 ‘개자식’ 이라는 욕이었다는 것보다도,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라 대답할 것이다. 내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누가 할 소리를.” 더 이상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물속에서 일어나 사방에 둘러싸인 암석을 딛고 빼꼼히 판자 너머로 조심히 얼굴을 내밀었다. 자욱한 수증기 가운데 탕 안에 들어앉아 있는 두 명의 남정네가 보였고, 그 둘은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희렴이와 령우였다.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모를 두 사람은, 생각보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한 마디씩 주고받고 있었는데 아랫도리를 둘렀다는 것이 아쉽지만 그나마 덜 신경 쓰였다. “친구보다 여자가 좋은 새끼면서.” 부루퉁한 말투와 낯선 표정으로 희렴이가 내뱉은 한 마디에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던 령우가 곧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꾸한다. “아까부터 누가 할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여태껏 본 체 만 체 하더니, 강다희 한 마디에 싹 풀려서 먼저 말 건 거잖아. 안 그랬으면 나한테 평생 말 안 걸었겠다?” “야, 그건……!” 대꾸를 하려했지만, 말문이 막히는 듯 다시 첨벙 소리와 함께 물을 튀기며 자리에 앉는 령우. 그런 령우를 슬쩍 흘겨본 희렴이는 이내 고개를 젖히고 바위틈에 어깨를 기대고 누워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한다. “미안하지만…양보를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야, 그 녀석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앨 붙잡을 수 없겠지. 만약에……그 애가 먼저 놔달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노력은 해보겠지만.” “벌써 그 정도야? 강다희가 많이 자라긴 했나보네. 그 좁기도 좁은 네 속에서 잘도.” 엿듣고 있다는 걸 망각하기라도 한 듯한 주책 맞은 심장은 주체할 줄 모르고 쿵쿵 뛰기 시작하고, 다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언젠가 내가 막무가내로도 붙잡을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그땐 포기할게. 물론, 그 녀석이 너를 택한다고 하면.” “너 죽으면 성취 가능할 일이겠네.” “아니. 아마 죽어서도 안 될걸.” 피식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령우를 향해 희렴이가 마저 말을 잇는다. “대신 내가 있잖냐. 원하면 네 여자친구, 그 이상도 해줄 수 있어.” “징그러운 소리 좀 집어쳐.” 멋진 밤이었다. 물론 희뿌연 안개와 수증기 속에 가려져, 녀석들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던 건 아니지만, 별이 수놓인 듯한 멋진 밤하늘의 풍경과 더불어…지금 세계를 통틀어 가장 멋진 녀석들이 이곳에 있다.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다시 내려앉은 나 또한 환한 달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감사드렸다. 저렇게 멋진 녀석을 만나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평생 잊지 못할…내가 세상을 살면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이라고…….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8. “대체 왜? 어째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의자를 박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칠게 테이블을 두들긴다. 그러면… 예전부터 줄곧 보아오던 이런 내 행동에 익숙한 찬휘는 그저 위 아래로 나를 한번 바라보고 이내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옮긴 채 대뜸 말한다. “그러니까 사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진 게 없고… 아직까지 스킨십도 단 한번도 없었다고?” “그래, 바로 그거야!” “흠…, 내가 그 녀석이 아니니 모르겠지만, 뭐…대충 너한테서 섹시함이 없기 때문이거나 뭐 그런 게 아닐까?” 그러나 그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대뜸 말한 그 대답은 나를 술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섹시……?” “그래, 섹시.” “딴 것도 아니고 섹시란 말이야? 이 청순, 깜찍, 발랄, 큐트, 가련한 내게 섹시함이 없다고?” 나의 그 말에…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찬휘. 가끔 녀석은, 너무나도 솔직한 말과 행동으로 이렇게 나를 상처 입히곤 한다.-_- “그렇지 않겠어? 사귄지 반년이 다 되가는데 스킨십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여자에 별 관심이 없다던가… 아니면 굉장한 성인군자라서 참고 있다던가. 둘 중 하나로 밖에 생각이 안 되는 걸. 아,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다.” “예외의 경우?” “……녀석에게 결함이 있을 수도 있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결함이라니?!”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럴 수 있지 않겠냐는 내 추측일 뿐이야. 서둘러 오해는 마.” 이내 잔뜩 흥분한 나를 진정시켰지만 어쩐지, 친구 녀석이 그런 말을 한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은 이 찝찝함…. 결함이라니, 결함이라니…. 하긴 조금 이상하기는 해. 손잡은 것. 그것도 수학여행 때 한번, 그 이후로 변한 것도 아무것도 없었고, 언제나처럼 평범한 일상.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것을 느낄 그런 것이 없어! 물론 수학여행 다녀온 지 일주일도 안됐지만. 그래두 그렇지 모처럼의 주말인데 늦잠만 자구….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 속에 혼잣말로 투덜투덜 대며 숙소로 걸음을 옮길 무렵이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누군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서야 자다 막 일어난 듯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는 희렴이. “아, 찾았어?” “당연하지.”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변한 건가 보다. ‘당연’ 하다는 말이 이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낯설다는 것을 전에는 깨닫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왜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을 뿐인데 그런 나를 의아해 하지 않은 채 녀석이 말했다. “모처럼 주말인데 나가자.” ※ “그렇게 정신 놓고 사람들 구경하고 있다간 또 미아 돼.” “어? 으응!” 바보. 내가 그토록 정신 놓고 구경하고 있는 것은 이 영화관 안에 많고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얇은 흰색의 브이넥 니트 티 하나에, 검은 슈트를 받쳐 입었을 뿐인데도 모두들 한번씩 돌아 볼만큼 매력적인 너의 모습이란 말이다. “뭐볼까?” “고민하고 말 것도 없지. 영화라면 무조건 공포영화! 저거, 저거 보자.” “싫어.” 내가 가리키는 영화 포스터를 힐끗 보더니 이내 딱 잘라 싫다고 말하기에, “왜에~ 재밌을 거 같은데. 음, 그럼…저건 어때?” “싫어.” 라며 다시 시선을 돌려버린다. “뭐야, 왜? 너 설마…공포영화 못 봐?” “누구…. 나 말이야?” “그럼 여기 너 말구 또 누구 있어?” “내가 못 보긴 왜 못 봐. 공포영화? 나 잘 봐. 시시해서 안 보는 거야.” 그리고 못 본다면 못 보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잖게 물었는데, 지나친 과민반응으로 발끈하는 녀석은 나를 도발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 난 못 보길래 그러는 줄 알았잖아. 그럼 보는 거다?” 그리하여…우여곡절 끝에 보게 된 영화. 주말이어서 그런지 영화관에는 사람도 많았고. 두 손에 팝콘과 콜라를 들고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크린을 보다말고 문득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보게 된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으니… 의자 손잡이 턱을 받치고 목이 꺼져라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원희렴. “어이.” “어! 어….” 생각 없이 두드린 어깨에 다소 지나치게 놀라는 모습.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절대 공포영화가 무섭다는 생각 안했어.” “아… 난 안 물어봤는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이 빨개진 무안했는지 고개를 돌려버린다. 스크린 화면이 으슥한 부분으로 바뀌어 어두워지면…, 의자 손잡이를 꾹 붙드는 녀석의 움직임이 옆에서 느껴져 온다. 거기다가 효과음까지 쿵쾅 흘러나오면, 글쎄 이 남자는 깜짝깜짝 놀라며 꾹 눈을 감아버리기 일쑤다. 이 녀석, 공포영화 못 보면서… 괜한 자존심만 내세우고 말이야.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밌어, 하여간. 쿡쿡 옆구리를 찌르자 헉 소리와 함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날 바라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또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까딱이는 원희렴. 오늘 아주 의외의 면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어…. 못살아 증말. 더 이상 영화 보다가는 기절할 지도 모르겠어. “음료수 떨어졌는데, 음료수 좀 사줘.” “…….” 놀란 표정을 곧 차갑게 식혀 내리는 원희렴. 그래도 놀란 티 다 난다. “팝콘은 많이 남았는데, 음료수가 없으니까 못 먹겠어서 그래~” 내 말에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마치 기회인 듯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여 읊조리는 그 얄밉고도 얄미운 말을 들어버리고야 말았다. “……귀찮게.” ……제발 언행일치 좀 안되겠니. 아, 괜히 공포영화 보자고 해가지고 표 값만 날렸네. 희렴이가 나가고, 나 또한 영화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영화관을 나왔다. 콜라를 계산하고 있는 희렴이의 뒷모습이 보이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영화관 안에서의 잔뜩 쫀 그의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절로 난다. “푸히히히히.” 혼자 실없이 웃어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여러모로 깜짝 놀란 듯이 두 눈 크게 뜨고 묻는 녀석. “어디 아파?” “말짱해.-_-” “근데 왜 나왔어?” “재미없는 거 같아서.” 희렴의 손에 들려있는 콜라를 낚아채며 말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투로 바라보더니, 곧이어. “내가 뭐랬어, 공포영화는 시시하다고 했잖아.” 이 새끼……. 그냥 다 콱 불어 버릴까보다. 원희렴이가 공포 영화 보면서 벌벌 떨었다구!! 어쨌거나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영화관을 나와 카페로 향하던 희렴이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 섰다. 언젠가 한번, 내가 녀석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누군가를 보고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남겨두고 나가버렸던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나 또한 희렴일 따라 고갤 돌렸고 거기에 보였던 것은…안도와 더불어 궁금증을 자아냈다. 희렴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어떤 한 무리. 말투나, 행동들이…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끗 돌아볼 만큼, 조금은 불량스러워 보이는 사내들 네 댓 명과 그 가운데 껴있는 여자 두어 명. 정확히는 그 가운데에서도 어떤 여자애를 허리에 끼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훤칠한 키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내리깔고 있는데도 눈매가 사나운 남자라고 할 수 있겠다. “아는 사람이야?” 진지하게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기를 한참, “희렴아?” “아……, 어…?”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가자.” 그리고 곧 어렵게 눈을 떼고 빠르게 영화관을 나선다. 멍해져서, 자신과 그 사람을 번갈아 보는 내 손을 더럭 잡고. 갑자기 손을 잡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내가 앗하고 놀랄 세도 없이 빠른 걸음이었다. 그러나 마주잡은 손은 몇 걸음 가지 않아 자연스레 놓여졌고-_- 나는 안중에도 없이 혼자 문을 벌컥 열고 커피숍으로 들어서는 희렴이를, 나는 짧고도 짧은 다리로 필사적으로 쫓았고 녀석을 따라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 하악……” 숨 돌리고 있는 나를 보며, 또 아까 영화관에서처럼 놀란 듯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어오는 원희렴. “어디 아파?” “……안 아프다니까! 그렇게 빨리 걸으니까, 숨이 차서 그러지!” 그러나 나의 그런 화는, 이렇게 더럭 화를 내는 날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녀석의 얼굴을 봄으로써 지속될 리 만무했다. 귀여워 죽겠어. 후후. 가만히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곧 주문 받은 커피와 오렌지 주스가 올려진 쟁반과 또 다른 한 손에 들려있던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흔들며 말하는 종업원 언니. “손님, 저희 카페 이벤트 기념으로 커플 분들 사진촬영을 해드리거든요. 어떻게, 괜찮으시다면 촬영해드릴까요?” “사진이요?” 당연히 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녀석의 옆자리로 옮겼고, 내가 자리를 옮기자 또 다시 식겁하며-_-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말한다. 이 자식이 새삼스럽게. “난 안 찍어.” “안 찍긴 뭘 안 찍어~ 꽁짜루 찍어 주신다잖아. 빨리 치즈해, 치즈.” 혹여 안 찍어주고 그냥 가버릴 세라 걱정을 한 내가 희렴이의 엄한 등짝을 내리치며 사진 찍을 것을 강요했고, 오버하며 눈을 부릅뜨는 나를 보고 결국은 피식 웃다가 이내 옅게 미소 띠운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희렴이. 곧 찰칵하는 셔터소리와 함께 금방 나온 따끈따끈한 사진을 내 손에 건네주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한참이나 사진을 들여다보며 싱글벙글인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렴이는, 그런 질문을 했었다. “사진 찍는 게 그렇게 좋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사진을 떨어트리기라도 할 세라 꼭 쥐고 잠시 망설이다가 한 대답. “그러니까 나는…사실 아직도 겁이 나거든. 뭔가 우리가,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이라도 함께했었다는 그런 추억을 남기고 싶어. 이렇게 지내고 있지만, 사실 서로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는 것이 없잖아. 그러니까……” 조금은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이야기 하는 나를 보던 희렴이의 표정이 왜 그렇게 속상해보였는지 그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주스 잔을 매만지기만 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했던 한 마디. “알려줄게.” 그리고 곧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메모지와 펜을 집어 들어 말없이 뭔가를 써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메모지 위에는 빼곡하게 글씨 쓰인 종이를 내게 건넨다. 희렴이의 얼굴과 종이를 번갈아보며 글씨를 읽으려하던 무렵, 마주앉은 희렴이가 종이에 써져있는 말들을 직접 읽어 내려간다. “생년월일 11월 29일 사수자리, 혈액형 B형, 좋아하는 영화는 타이타닉. 취미는 독서나 영화관람… 내가 생각하는 매력 포인트는 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그 모습에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것을 간신히 참고 계속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희렴이가 했던 말. “현재 좋아하는 사람 있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어떻게 희렴이의 입에서 직접 나왔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보다 웃긴 것은 내 물음이었지만. “누구……?” “글쎄…, 누굴까.” 더 이상 녀석의 마음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의미심장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을 하던 때에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희렴이의 얼굴에는 이미 진심이 드러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조마조마, 자신이 없는 나는 입술 끝까지 올라온 물음을 다시 속으로 집어삼켜야 했다. 이제 그 애는 다 잊었느냐고……. 나 혼자서 좋아할 땐,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희렴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자 이젠 옛사람을 잊어주길 바라는 내가, 기가 막힐 만큼 욕심쟁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별 수 없나보다. 저녁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간신히 막차를 타고 학교 앞에 내렸고. 나보다 한발 앞선 내린 희렴이가 잠시 내려선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막 버스에서 내리려는 나는 막아서며 손을 내미는 희렴이. “응?” “땅이 젖어 있어서 옷 버릴 거야. 내려와. 받아줄게.” 말과 함께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고여 있던 흙탕물에 검은 정장바지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도 꿋꿋이 서서 나에게로 손을 내민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든 생각. 이렇게 완벽한 녀석에게…… 의외로 남성취향이라던가, 생물학적 오점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절대 찬휘의 말에 혹하지 않을 테야. “뭐해.” 잠시 감상에 젖어들어 아침에 찬휘가 했었던 말을 되새김질 하며 불끈 주먹을 다지는 나를 보고는 팔을 내밀고 기다리다 말고 잠시 멈칫해하며 한 걸음 물러선다. “지금 내려갈 거야. 간다?” 그리고 곧 덥썩 이 틈을 타 녀석의 어깨를 끌어안고.-_- 얼씨구나, 좋다구나~ 갑작스레 뛰어든 나를 안고는 잠시 휘청휘청 거리다가 이내 가까스로 자리에 선 채로 곧, 어깨에 기대고 있는 나를 향해 작게 말한다. “이대로 교문까지 갈까?” “응!” 나는 또 목이 떨어져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묵묵히 걸어 나가는 희렴이. 이때다 싶어 녀석의 등에 고개를 기댄 채 생각했다. 좋아하길 잘했어. 큰 선물을 하지 않아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 주진 않아도 언제나 작은 행동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 있으니까. 언제나 감동을 주니까. 이대로라면 교문 앞이 아니라…세상 끝까지 가도 좋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거의 교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 수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교문 앞 귀퉁이에 작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림자에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빠르게 내려서서 잔뜩 움츠려든 상태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을 때에…, 우리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누군가. 나를 뒤에 감추고 먼저 한발 앞으로 나아가던 희렴이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몰랐던 내가. 그저 멍하니 그대로 멈춰서 있는 것을 의아해하며 옆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우릴 반기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감춰져 있다가, 주황빛 가로등에 의해 비춰진 그 누군가의 모습에 나 또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야, 희렴아…….” 나는 이제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헛된 기대들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다시 희렴이의 앞에 나타난, 그 아이로 인하여.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39. 꽉 잡고 있던 희렴이의 손이 조금씩 떨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 떨림이 내게 불안함으로 엄습해오려던 순간, 굳게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더욱 꽉 잡는 희렴이. 그것은 분명…더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은 심지와도 같았을 것이다. 어떠한 대답이든 기다리고 있을 울먹이는 은예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인 채, 나의 손을 잡고 그 아이의 앞을 스치던 참이었다. “할 말이 있어.” 그것은 그 아이가 허전한 다른 쪽 팔을 잡아 세움으로써 곧 멈춰질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없어.” “그렇다고…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건데 그냥 갈 거 아니잖아…….” “놔줘.”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좋아했던 아이의 얼굴을, 한번도 바라보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대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더욱 슬픈 눈을 하고 바라보는 것은 희렴이가 아닌 그 애. 은예림. 희렴이가 곧 떼어낸 팔 때문에, 허공에 어정쩡하게 멈춰진 손을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듯 쳐다보다 말했다. “언제는…돌아오라고 했잖아. 그게 언제든, 몇 년이든 기다리겠다고 해놓고 왜…….” 마치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처럼 울먹이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담담하게, 다시 잡힌 팔을 천천히 풀어내며 희렴이가 하던 말. “사람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거잖아. 너처럼.” 그 말에…그 아이 손의 힘이 맥없이 풀려버렸다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다. “돌아가.” 순식간에 그 애의 커다랗던 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는 건, 비스듬히 비껴서있는 나도 봤는데 희렴이가 못 보았을 리 없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재촉하는 희렴이를 따라 나 또한 내색 없이 걸었고 힐끔 뒤돌아보자 아직도 거기 그 자리, 멀어지는 희렴이를 바라보고 서 있는 은예림. 그리고 들릴 듯 말듯, 작게 말하는 희렴이. “조금 전에……위험했다, 나.” 말과 함께 더욱 꽉 내 손을 잡는 희렴이는, 그런 말을 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터트려버린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도 돼?” 사실 나는 그렇게 아량 넓은 사람은 아닌데. 누구보다도, 희렴이가 그 아이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그리움도 연민의 마음도 가져 주지 않았으면 좋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참 우습다. “왜 왔는지 듣는다고 뭐가 어떻게 달라질까.” “아직두…그래? 그 아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떨리고 애틋하고, 심장이 뛰어?” 조심스러운 물음에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다말고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한쪽 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한다. “……아파서. 그런 감정에는 무뎌졌지만, 다시 마주하는 건 자신이 없어.” 그 순간에…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 였을까. 나는 아직도 그 애가 부럽다. 나보다 먼저 희렴이를 만났을 거라는 것과, 누구보다도 원희렴을, 내가 보지 못한 많은 표정들을 짓게 할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슬그머니 고개를 떨궈버린 나를 눈치 챈 희렴이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내 키를 맞추느라 허릴 숙인 채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한다. “미안해. 이렇게 약해서.” 내 손이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기엔, 힘들어보였던 그 얼굴을 가려주기엔 내 손이 너무나 작았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 다희야. 너무 오랜 시간을 걷기에 지쳐왔을 그 녀석을 천천히,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하자. ※ “비 온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말고 들려온 목소리에 고갤 돌리니 어느새 내 옆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원희렴. “앗, 언제 왔어?” “조금 아까.” “말을 하지 왜 그러고 서 있어~” “뭘 그렇게 보나 궁금해서. 나도 같이 보려고.” 씩 웃으며 그 말을 하던 그때의 녀석이란…참말로 따봉.-_- 여러모로 바람직한 자식이야…. “어구, 그래쪄요~? 아이 이뻐라~” 나는 또 녀석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헤벌쭉 웃으며 가볍게 엉덩이를 두드렸을 뿐인데, 놀라던 것도 잠시 순간 정색의 묘미를 보여주며 새침하게 대꾸하길, “이러지마!” 라며 빈정 상한 듯이 휘적휘적 복도를 걸어 나가는 원희렴. 이건 마치 부하직원 성희롱이라도 한 상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잖아? 나참, 비싸게 굴긴. “야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서 나는 비굴히 그 뒤를 쫓는 것이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녀석을 따라 황급히 따라가고 있는데…. “희렴아!” 마침 반대편에서 걸어오시던 A반 선생님. 누군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시던 눈길이 우리를 보고서야 반가운 기색이 스침과 동시에 다급히 희렴이의 이름을 부르셨다. “여기 있었구나. 마침 찾던 참인데.” 찾으셨다는 말씀에, 희렴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새도 없이 말을 이으시는 선생님. “널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데, 수위아저씨가 안된다고 돌아가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계속 들여보내달라고 떼쓰기에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네 친구라고 하더라구. 그냥은 돌아가지 않을 것 같던데 네가 직접 만나볼래?” 누구인지는…생각해볼 것도 없이 뻔하다. 고민하는 듯한 것도 잠시, 예전에나 볼 수 있던 목각인형 같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 대답한다. “……아니요.” “친구 아니야?” “…….” “흠, 알겠어. 수위아저씨한테 말씀드려서 돌려보내라고 하마.”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 하시며 돌아서시고, “가자.”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네며 걸음을 옮기는 희렴이. 그러나 녀석의 걸음이 미약하지만 조금씩 더뎌지고 있다는 걸 자신은 알고 있을까. 자꾸만 폈다 쥐었다하는 주먹이, 이미 망설이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데. 슬쩍 곁눈질로 바라본 희렴이의 시선이 창밖 교문을 향해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다녀올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 듯,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떼는 희렴이. “네가 왜 가.” “그렇다고 이렇게 비가 오는데 내버려 둘 수 없잖아.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있고.” “하고 싶은 말?” 그 애를 전혀 알리 없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단 그 소리에 조금은 의외인 듯, 또 왠지 모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을 향해 말했다. “이상한 말 하려는 거 아니야. 나쁘게 말하지 않아. 네가…, 네가 아끼고 좋아했던 사람인만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야. 그냥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결국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희렴이를 뒤로 하고 먼저 기숙사로 올라가 책상서랍을 뒤졌다. 그 언젠가 빌렸었던 손수건을 교복 주머니에 접어 넣고 손에는 우산 하나를 새로 든 채로 냅따 뛰었다. 정신없이 뛰어서, 빗물이 신발을 다 적시는데도 철퍽철퍽 소리를 내면서 가까스로 교문 앞에 다다르자…그렇게 퍼붓는 빗속을, 우산 하나 없이 웅크리고 앉아있는 그 애를 채근하다 나를 발견하시고야 혀끝을 차며 말씀하시는 수위아저씨. “아이고, 네 친구냐? 어떻게 좀 말려봐라. 아침서부터 이러고 있는데, 안된다고 해도 가질 않고, 그럼 들어와서 기다리래도 요지부동이야.” “제가 말해볼게요.” 한번 숨을 들이키고, 한 걸음 다가서자 순간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다소 기대에 찬 얼굴로 올려다보다가 이내 나라는 것을 보고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떨구는 그 아이. “비가 많이 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희렴이 여자 친구였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듯이,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우산을 받아들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 아이 또한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는 듯, 웅크리고 앉은 무릎 사이에 더욱 얼굴을 묻고 말할 뿐. “그럴 거라고…짐작은 하긴 했었지만.” “일어나, 다 젖잖아….” 그러기를 또 한참이나, 우산을 내민 채로 말없이 서있던 참에 교복 블라우스가 남김없이 모두 젖어버렸을 즈음, 보기에도 힘겨워 보이게 자리에서 일어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는 은예림. 처음에는 무표정하던 그 얼굴이, 조금씩 흐트러져 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내가 깨달았을 때쯤 내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 거칠게 어깨를 흔들며 묻는다. “희렴인 모른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데?!” “무슨…….” 그리고는 곧, 내가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내게 몸을 기대고 힘없이 쓰러지고야 말았다. “엇, 저, 정신 차…….” 닿아있는 몸이 빗속에 차갑게 식어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뜨거운 몸에 대체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을 때. 그 아일 붙든 채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듯, 급히 다가와 내게 기대어진 그 아이를 붙드는 희렴이.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는 그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곧 빠르게 자신의 등에 업는다. 그것은 내가 놀랄 세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마치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그 아일 업은 채 무작정 교문 밖으로 향하려는 희렴이를 멈춰 세웠다. “어, 어디 가는 거야?!” “병원에 가야해.” “병원이…여기서 얼마나 먼데……. 무리야, 그냥 양호실로 데려가는 게 낫겠어. 응?” 내 그 말에, 망설이는 듯하다가 다시 학교 안으로 돌린 발길을 재촉한다. 그저 가만히 그 뒤를 따르는 게 전부였던 나는,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조차 물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쉽게 이성을 잃는 건 한번도 본 적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문득 든 우스운 생각은… 너는 만약, 내가 조금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떤 표정, 어떤 행동을 할까. 정신없이 양호실에 도착했고 비에 흠뻑 젖은 우리들을 보다가 이내 희렴이의 등에 업힌 은예림을 부축해 침대 위에 눕히며 물으시는 양호선생님. “어머, 왜 이렇게 젖었어?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니지?” “네.” “세상에, 열나는 것 좀 봐.”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될까요?” “비 맞아서 그러는 것 같은데… 일단 링거 좀 맞히고 두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침대에 눕혀진 은예림이 거친 숨결을 토해내는 것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희렴이를 보면서, 그저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 두 사람 뒤에 멀찍이 서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저 모습이 신경 쓰이면, 나 정말 나쁜 사람인거지….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하면서 있은 지도 한참.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시며 말씀하시는 양호선생님. “너희는 그만 가있어도 돼.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깨면 연락해줄게.” “아니요. 옆에 있을래요.” 그 말에 잔뜩 움츠린 내 심장이 쿡쿡. 그것은 단순한 질투나 부러움을 넘어서,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양심을 가책을 느끼는 그런 느낌이었다. 문득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학생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교내에 있는 강다희 학생은 지금 즉시 교무실로……다시 한번……] 작은 양호실 안에 방송이 크게 울려 퍼졌을 때서야, 나를 기억한 듯 천천히 고갤 돌려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아…, 다녀올게.”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을 맞출 수 없던 나는 고갤 숙인 채 희렴이가 말을 할 새도 없이 양호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등을 기대어 한 숨 돌리고 나서야 앞을 바라보았는데… 언제부터였던 건지 양호실 앞을 지키고 섰다가 나를 보고 한 발짝 다가서는 령우. 서로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말 없는 그 상황이 몹시 어색했던 내가 가뜩이나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애가…아파. 들었어?” “응. 너는?” “어?” “너는 괜찮냐구.” “나, 나야 당연히…내가 언제 어디 아픈 거 봤어? 에이 참~” “그게 다야?” 어쩐지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령우의 말에 괜한 서러움에 눈이 북받쳐 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멍청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까부터……너 좀 이상하다! 난 아무렇지두 않어, 신경 쓰지 마. 참, 교무실에서 불렀었는데…다녀올게.” 사실…, 속상하다고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면 령우는 이해해주겠지. 또 가슴이 벅찰 만큼 따뜻한 말들로 위로를 해주겠지. 그렇지만 안돼. 그런 식으로는 나아갈 수가 없어. 걷는 길마다 꽃길이고 잘 다져진 잔디밭 길 일 수는 없잖아, 인생이란 것이 그렇듯이. 때로는 가시밭길도, 진흙길에도 혼자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런 마음으로 교무실까지 힘주어 걸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0. 한참을 말이 없으시던 작은 아버지가 오랜 침묵 끝에 찻잔을 내려놓으시며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주말에 시간 되니?” “예, 그냥 학교에 있을 생각이에요.” “그래? 다행이구나. 안양에 다녀오려면 꼬박 하루는 걸릴 테니.” “안양이요…?” “부모님 기일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직 한번도 가지 못했겠더구나. 이번 주말에 다녀오겠니? 한번도 가본 적 없을 테고… 생각할 것도 많을 테니 혼자 다녀오는 것이 좋겠구나.”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작은 아버지께 가도 좋다는 허락, 아니 그것은 사실 작은 아버지의 제안이었지만. 제주도로 가게 된 후로 단 한번도 가본 적 없었던 부모님을 찾아뵈러 갈 일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는데도 뭔가 허한 이 기분은……. 교장실을 나와 한참 복도를 걷다가 이내 멈춰서 작게 중얼거렸다. “갈 곳이……없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혼자 있으면 방문 꼭꼭 걸어 잠그고 안 나올 것 같고, 이 상태로 령우한테 갔다간 틀림없이 기대고 말아. 그렇다고…다시 그 양호실엘 들어갈 자신은 더더욱 없고. 그리하여 찬휘를 찾아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6층이나 되는 높은 도서관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던 것 때문인지, 5층 휴게실까지 올라가다 어찔어찔 하는 머리에 잠시 멈춰 섰다. “오메, 죽겠다.” 그리고 다시 힘내 마저 계단을 딛으려던 참에…조용한 복도 한 가운데 울리던 익숙한 이의 진지한 목소리에 짐짓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돼.” 앞으로 나서기에도 민망하고, 그렇다고 계속 듣고 있어도 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굉장히 갈등이 때리는 가운데…난간 사이로 보이는 심각하게 통화중인 찬휘. “믿을 수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떠한 일에도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던 찬휘가, 골치 깨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채 자꾸만 계단을 올라섰다 내려섰다를 반복한다. 저러는 거 보면 뭔가 심각한 일인가 본데 아마 들으면 안 되는 거겠지? 하고 조심히 계단을 내려서던 순간, “장난해?!” 라는 격한 말투에 깜짝 놀라 멈칫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대화. “그 상황을 희렴이한테 이해시키라구…? 그게 다 오해였다구? 웃기는 소리 마. 내가 왜 그 둘 사이에 나서야 하는 건데? 그것도 이제 와서.” 결국 나는 본의 아니게 통화 속 ‘희렴’ 이라는 이름에 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오해라니? 무슨 이야기이길래 찬휘가 저토록 흥분한 건지,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잖아. “나도 안타깝게는 생각하지만 돌리기엔 너무 늦었어. 게다가 지금 희렴이한테는 이미 여자친구가…… 아, 아니 이 이야긴 너도 알 테니까 길게 말하지 않겠어. 네 말대로 하자면 골치 아파져. 맘 다쳐야 할 사람들이 더 늘어나 버린다구. 어쨌거나 나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고 크게 한숨을 내쉬는 찬휘. 지금 말을 걸어도 될까 망설이고 있던 순간 스치듯이 내려본 계단 아래 서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다희야?” “아…….” “너…언제부터 있었어?” “에…, 미안해. 하지만 들으려고 들으려던 건 아니었어.” 어쨌거나 통화내용을 엿들어 버린 셈이 되어버린 내가 멋쩍게 웃어도 심각한 표정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있어보이진 않는 듯…아니, 오히려 더욱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는 찬휘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그게 다 무슨 소리야? 뭐가 오해라는 거야? 희렴이한테 무슨 일있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나 궁금해, 찬휘야. 들을 건 다 들었으니까 감추려고 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줘. 응?” 뜻밖의 난처한 입장에 머리를 긁적였다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가를 반복하던 찬휘도 계속되는 나의 보챔에 못 이기는 듯 한참이나 곤란한 표정을 짓다말고 마지못해 입을 떼려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그리고…가까이 듣기 위해 한 발짝 계단을 오르던 것뿐이었는데, 순간 다시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균형을 잃은 내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 가늘게 뜬 시야로 쏟아져 들어오는 형광등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던 예림이 멈칫했다. 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아 고갤 숙인 채로 잠이 들어있는 희렴을 보고 다시 왈칵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참았다. 익숙지 않은 모진 말과 행동을 하긴 했지만 예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폭우 속에서 말없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 정신을 잃고 쓰러져가는 자신을 누구보다 도 먼저 달려와 부축했다는 것을. 한번만 만져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뻗은 손이 닿기도 전에 희렴이 눈을 번쩍 떴다. 덕분에 다시 손을 거둔 예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워있어.” “…눈 뜨면 이렇게 네가 다시 옆에 있을 줄 알았어.” 희렴은 말과 함께 자신의 목을 힘없이 끌어안은 예림의 뜨거운 손을 거둬내길 잠시 망설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그녀의 가느다랗던 흐느낌을 끊어버리긴 힘들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도 않았다. 곧 팔을 거둔 예림이 그새 눈물범벅이 되어버린 얼굴 눈물을 훔치며 애써 환하게 웃어 보인다. “……열이 많아서 그런지 자꾸 눈물이 나.” “좀 괜찮아?” “응. 끄떡없어. 알잖아, 나 그렇게 약하지 않은 거.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했으면 난 아마…….” 말을 잇다 말고 물끄러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희렴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번 싱긋 웃어 보인 예림이 곧 오래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갤 숙였다. 둘 다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누구에겐 침묵마저 반가웠지만, 다른 누구에겐 그 침묵마저 불편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희렴의 얼굴을 바라보곤 큰 결심이나 한 듯, 작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오 했었어. 이 정도쯤은…. 여태껏 참아오던 것쯤에 비하면 별 거 아닐 각오하고 온 거야. 희렴아, 나 사실…….” “이제 다신 여기 오지 마.” “……어?” “너도 알잖아. 이제 네가 여기 올 이유가 없다는 거.” 핏기 없던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던 예림의 입가가 굳어져갔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매정한 태도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분명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왜,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건데? 난 네 여자친구 아니었어? 그렇게 헤어졌어도 기다리고 하겠다고 한 건 너였잖아…? 나는 그 말만 믿고…….” 스스로가 염치없는 말이었다는 건 알았지만 더는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가 알길 바랐고,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 말도 잇지 못하고, 무슨 대답이든 해주기를 갈구하며 바라보았다. 희렴도 잠시…묵묵히 예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그랬었어. 네가 나를 떠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네가 다시 돌아온다면 다 잊고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내가 그런 대단한 남자쯤 되는 줄 알았어.” “너 그런 남자 맞잖아.”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지 못하는 예림이 희렴의 소매끝자락을 꽉 붙들었다. 희렴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어. 네가 가져가서…, 살아도 산 게 아니고 뛰어도 뛰지 않는 것처럼. 남아있지 않다고 믿었던 심장이 그대로 있었어. 그 심장 뛰는 소리가…하도 작아서, 귀 기울여듣지 않아서 몰랐던 것 뿐… 나는 그 애를 만나고 나서야 다시 들었어.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난 네가 없으면 웃지 못 할 줄 알았는데… 네가 없이도 웃었어. 결국 나도 다른 남자들이랑 똑같아. 네가 다시 찾아올만한 그런 남자가 아니야.” 말이 끝 맞춰지기 무섭게 굳게 쥐고 있었던 소매 자락을 놓쳤다. 본의와 상관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각오했고 결심도 했었는데, 그의 익숙지 못한 말투나 표정 등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치 처음의 희렴일 만나던 때처럼. 목이 메어오는 것을 간신히 힘주어 말한다. “그래도 내 말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냐?” “아니.” “후회…할 거야. 내 말 안 들은 거,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어떤 말을 들어도 후회했을 거, 안 듣고 후회할래. 그게 나아.” 다시 한번 바라 본 희렴에게서 예림은 더는 일말의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실이야 어쨌든 그가 그토록 확고하게 듣지 않겠다고 하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상황이었다. 차오른 눈물 때문에 흐릿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희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만 하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급하게 뛰어온 듯 거친 숨소리와, 악다문 잇새 사이로 흘리는 듯한 령우의 목소리도 들렸다. “원희렴…, 니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니 여자친구는 다 죽어 가는데…….” ※ “정말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괜찮을까?” “나 진짜 괜찮다니까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떨어졌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는 거지?” 정말 놀랍다는 듯이, 나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뜯어보는 녀석이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나는 그저 고갤 숙인 채 민망함을 삭혀야 했다. 분명…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져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데구르르 떨어져 발라당 넘어졌는데 남아있는 상처라곤 발목이 조금 긁힌 정도? 이쯤 되면 이 무지막지한 생명력도 민망해지기 시작하는 거다. 부담스런 찬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고갤 돌리고 앉아 있는데, 벌컥 열리는 문. 그리고 곧 모습을 드러낸…원희렴. 나와 함께 그런 희렴이를 본 찬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긁힌 상처도 혹시 모르니까 약이라도 가져올게.” 찬휘가 나가고 희렴이와 나, 우리 둘만 남은 방안.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듯 거친 호흡의 녀석은 내 얼굴을 보고서야 크게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다쳤다며?” “응. 그런데 괜찮으니까 그만 가도 돼.” 그러나 섭섭함이 최고조에 달하는 지금, 눈도 맞추지 않은 채 퉁명스레 대꾸하고 돌아눕는 나 때문에 말없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쓴 내 뒷모습을 보며 작게 묻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지금은 얘기 싶지 않아. 그냥 가.” “화났어?” “그럼 안 나?!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이해해. 수 십, 수백 번을 이해한다구. 그치만…내 앞에서도 그 애 때문에 두근거리는 건, 그 애 때문에 날 잊는 건 이해 못해. 싫어!” 애써 담담한 척, 쿨 한 척, 신경 쓰지 않는 척. 할 수 있는 척은 다하려고 했지만, 주체 못하는 감정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말하자 잠시 멍하니…내 얼굴을 바라보다 꽉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인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 말도 싫어. 차라리 아니라고 해! 나는 아직도……확신할 수가 없단 말이야. 네가 그 애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내 옆에 있어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게 슬퍼.” 그 말에 어쩜 나보다도 더욱 울컥하는 듯한표정으로 더욱 더 끌어안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체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하는 희렴이. “걱정하지 마. 내 심장, 그대로 있었어. 여기 있어.”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나는 그냥 안긴 채로, 녀석에게서 나는 그리운 바다향이 나는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 창피한 얼굴, 보일 수가 없어. 분명 질투에 일그러져 있는 세상에서 가장 추한 얼굴 일 테니까…. 그러면서도 또 한번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뭘 보고 믿어.” 그러자 내 한쪽 손목을 들어 지긋이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손닿은 곳에…느껴지는 심장 박동 소리. 익숙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불규칙하게. “봐.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그거야…달려왔으니까 그러지!” “어? 정답.” 얄미운 자식. 배시시 웃기는. 그러나 그 웃는 얼굴에 나 또한 다시 화가 풀려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루퉁하게 나와 있는 나의 입을 보고 말하는 희렴이.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래.” 아마도 어떻게든 화를 풀어주려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어차피 각오하고 한 시작이었으니까, 한 번 더 속아주는 셈치고 이해해줘야지. 그제야 고갤 들어 눈을 맞추고 말했다. “주말에……같이 가줬으면 하는 데가 있어.” “그래.” “어디냐고 안 물어봐?” 묻는다면 솔직하게 이야기 해줄 요량으로 했었던 말에, 묻지도 않고 흔쾌히 가겠다는 희렴이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묻자 녀석이 말했다. “갈게. 어디인지 말 안 해도, 네가 가자면 묻지 않고 따라 나설게. 세상 끝까지라도.” ……세상 끝까지라도.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http://cafe.daum.net/bearnangman) 41. 정신 나간 가슴이 요란하게 뛰어댄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섭섭하던 녀석에게 또 다시 그새를 못참고 이뻐보이기 시작한다니 사람이 이렇게 사람이 이토록 줏대가 없어서야. “너 그거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인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러자 발끈하고 나서는 원희렴.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들으니까 귀에 익구만! 표절이 얼마나 나쁜건데!” 설마 정말로 그랬던 건지 아닌 지 알수는 없지만 그냥 잠자코 입을 닫는다. 다시 조용해진 상황에 다친 다리를 긁적이다 말고 침을 한번 슥 바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조그맣게 말하길, “더럽다.” “더럽긴 뭐 더러워? 내가 요새 이빨을 얼마나 자주 닦는데.” “앉아있지 왜 일어나?”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누워있는 거 싫어. 찬휘한테 물어볼 것두 있구.” 나를 따라 덩달아 일어서는 희렴이를 보며 뭔가 말로하기 모호한 기분에 미소가 머금어 진다. 이를테면 강아지를 기르는 느낌의…? 벌컥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뜻밖에 문 앞에 서있는 령우. 언제부터 서있었는지도 가늠할 수 없게, 벽을 등지고 푹 고갤 숙이고 있다가 내 인기척에서야 고갤 든다. “어…언제 왔어?” “조금 아까. 다린 좀 괜찮아?” “응, 뭐 얼마나 다쳤다구 다들 걱정해. 신경쓰지 마.” “그래. 다행이야.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찬휘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 그럼 희렴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먼저 가 있을래?” 그 말에 내 뒤를 따라나오던 희렴이도 령우와 눈이 마주치자 나에게 먼저 가라는 듯이 눈짓을 한다. 그 눈짓을 받는 나는…또 저 둘의 대화가 문득 궁금해져 오긴 하지만, 찬휘와 단 둘이 말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리라는 생각에 고갤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희렴과 령우, 두 사람 모두 다희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서야 계단에서 시선을 떼고 서로를 응시했다. 령우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희렴을 보다말고 주머니에서 잘 접혀진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희렴의 동공이 커졌다. “너한테 전해주래.” 희미하지만 어렴풋이 기억은 났다. 그 언젠가 자신이 주었던 것. 그리고 환하게 웃어 보이는 예림이의 얼굴도. 가지고 있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에 바라보고 서 있기만 하던 문득 희렴이 물었다. “예림인……” “갔어.” 그러나 말이 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가로막은 령우가 희렴이 손수건을 받아들기 위해 내민 손을 거칠게 쳐내며 말했다. “다희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않으면서, 당연하게 ‘예림이’ 라고 하지 마. 내 친구지만 너 요즘 열 받으니깐.” 차라리 자신의 이런 태도에 대해 화라도 낸다면, 자신 또한 좀 더 솔직하게 화를 내고 솔직하게 질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허나 묵묵히 자신을 바라 볼 뿐인 희렴을 더욱 얄궂게만 느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처신 똑바로 해. 니 마음도 알고 상처도 알지만…… 니가 받은 상처를 그 애한테 똑같이 되물려주는 건 내가 용서 못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할 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가시돋친 말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손수건을 건네받은 희렴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대꾸했다. “너무 바른 말만 해서 화도 못 내겠다. 충고 고마워.” ※ 간혹 그를 찾으러 갈때면 나도 모르게 도서관으로 향할 정도로 언제나 그곳에 있는 찬휘. 그럼 나는 평소처럼 정해진 그 자리로 다가가, 책에 열중하고 있는 찬휘의 앞에 서면.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갤 들어 나를 본 찬휘가 휴게실로 나온다. “쉬고 있지 어쩐 일이야?” “너야말로 약 가지러 다녀온다고 해놓고선, 왜 도서관에 있는 거야? 요즘엔 도서관에서 약도 줘?! 너 은근슬쩍 아까 얘기 안 해주려고 뺀 거 다 알아.” “아까 얘기라니?” “아까 나 듣다가 꼬꾸라진 얘기 있잖아.” 지금껏 시침 뚝 떼고 전혀 처음듣는 이야기인 듯한 표정을 하다가, 나의 그 말에서야 본래의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찬휘. “넌 영어단어는 잊어도 꼭 그런 건 안 잊더라.” 요새는 령우보다 이 녀석이 더욱 얄밉곤 해…. “그런 얘기를 굳이 들으려고 하니까 꼬꾸라진 거잖아. 하여간 끈덕져.” 제길, 정말로 그래서 꼬꾸라진 건가. 어쩐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은 묘한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빠르게 반박하고 나섰다. “어쨌거나 빨리 마저 말 해줘.” “별 것도 아니라는데 왜 그렇게 들으려고 해.” “별 것도 아닌 거니까 얘기해줘.” 나의 끈질김에 속으로 절실히 ‘제길’을 외치고 있음이 드러난다. 자꾸 감추려고 하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한참을 보채고 말씨름을 하고나서야, 정말 두 손을 다 드는 시늉을 하다가 진지하게 입을 여는 찬휘. “별로 말해주고 싶지 않아, 다희야.” “궁금해. 난 듣고 싶어.” “들어서 좋을 거 하나 없을 텐데….” 그래도 들을 거야. 눈 하나 꿈뻑하지 않고 어서 말해달라는 듯이 바라보는 내 시선을 더는 피할 겨를도 없던 찬휘가 다시 한번 깊게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은예림이랑 희렴이 사이에…오해가 있었어.” “오해…?” “응. 아주 큰 오해. 어쩌면 다시 그 둘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게되는 오해라… 말하고 싶지 않았어.” 분명히…전화 통화하는 걸 본 것만으로도 큰 오해라는 걸 알았지만, 찬휘의 말 중간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계기가 될 오해’ 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는 걸 느꼈다. “어떤 오핸데, 그게?” “그러니까 은예림이……협박을 당하고 있었어.” 심각하게 입을 열던 찬휘의 입에서 나온 말이 ‘협박’ 이라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협박을 했다구? 누가? 뭣 때문에? 머릿속 전체가 질문거리로 가득했지만 고갤 저어 떨쳐 버리고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뭐? 협박? 협박이라니…그게 다 무슨 소리야?” “한참 은예림이랑 희렴이가 사이좋을 때였을 거야. 은예림이 원래 만나던 사람 있었다는 건, 너도 들었지?” “응.” “다시 기회를 주겠다고, 예림이한테 돌아오라고 했었는데 거절했었다나봐. 그 남자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었었어. 우리보다 두 살 많은데, 학생 때도 날렸었던 사람이고 결국 퇴학까지 당했어서 여기선 유명했거든. 은예림이 그 남자한테 맞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믿지는 않았어. 근데 정말로…그렇게 맞았었고, 결국 희렴이까지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에 헤어졌다는 얘기를, 그 둘을 소개 시켜줬던 녀석에게서 나도 막 전해들은 참이었어.”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돼.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정말로 가능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갸륵하다 못해 말도 안나온다. 순간…커다란 돌로 머리를 맞은 느낌. 나도 모르게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제 서야…이미 헤어진 희렴이한테 받았던 손수건이 그 아이에겐 왜 그렇게 중요하고 소중한 건지 이해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이런 줄 알았더라면,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놀란 내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무슨 소리야…….” 깜짝 놀란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나와 찬휘의 대화를 들은 듯 가늘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되묻는 희렴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니가 들은 그대로야. 은예림, 니가 생각하고 있던 그런 이유로 헤어지자고 한 게 아니었대. 걔가 만나던 남자, 한시혁. 너는 몰랐겠지만 은예림이 맞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찬휘를 응시하고 있는 희렴이의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린다.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고 힘없이 떨리던 주먹을 움켜쥔다. “왜…진작 말 안 해줬어.” 찬휘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는 달리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될 사실이라는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희렴이의 화가 아주 크다는 걸 나보다 잘 알 텐데도. 하지만 나는 안다. 조금은 특별한, 남들과는 다른 찬휘의 배려를. 속으로는 말해주지 못했을 미안함과 나보다도 더 놀랐을 희렴이를 알면서 생각보다 담담하게 찬휘는 말했다.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매정하기까지 한 찬휘의 한 마디에, 다시 한번 더 주먹을 움켜쥐는 희렴이. 내가 아는 데로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사이좋았을 이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상황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원희렴. “희렴아!” 놀란 내가 희렴이의 뒤를 쫓아 나서고, 뒤늦게 계단을 오르던 령우가 빠르게 내려간 희렴이를 붙잡지 못한 채 의아하게 보내고 나서 따라 내려오던 나를 멈춰 세우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가면 안돼. 이대로 보내면 안 돼, 희렴이 좀 말려줘 령우야.” 이렇다 할 설명을 해줄 시간도 없는 내가 막무가내로 하는 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내가 다시 희렴일 쫓아 내리막길 까지 쉴 새 없이 뛰어 내려가던 참, 나를 따라 뒤를 쫓는 령우. 그러나 이미 저만치 멀어진 희렴이는 계속되는 내 부름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희렴아, 원희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망연자실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만 보고 있는 내 어깨를 붙잡고 말하는 령우. “바로 따라 갈 수 있을 거야. 일단 타자.” 비가 왔던 탓인지 뻥 뚫린 한산한 도로가, 오늘 따라 왜 그렇게 길고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화…났을 거야. 이해할 수 있어, 오해였다니 얼마나 놀랐을지 알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발……. 택시가 달리는 내내 안절부절 못하며 옷자락만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내 손을 꼭 잡는 령우. 얼굴엔 걱정이 다닥다닥 묻어나는 채로 조심히 령우의 얼굴을 올려다보면…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다정한 말로 나를 위로하는 령우를 보며 애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쫓고 쫓기를 반복해, 한참을 달리던 택시가 멈춰선 곳은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커다란 당구장. 차창 밖으로 택시에서 내리기 무섭게 건물로 올라가는 희렴이가 보였고, 우리 또한 차가 멈추자마자 돈을 지불하고 건물로 올라갔다. 5층이나 되던 당구장을,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 계단으로 뛰어올라갔고, 문 앞까지 다다랐음 즘 안에서 새어나오는 무거운 희렴이의 목소리. “한시혁 나와.” 그러나 지금 희렴이의 기분을 알리 없는 그 남자는 비아냥대는 투로 대꾸했고. “어, 이게 누구야? 귀하신 몸께서 여긴 어쩐……” 그리고 곧, 그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이어지는 둔탁한 소리. 나와 령우가 들어섰을 때 당구장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있었고 나는 빠르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아갔으나, 곧 눈앞에 광경에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고 멈춰 섰다.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소리 지르며 둘러싼 그 가운데 희렴이가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당구 큐(cue)로 그 남자를 인정사정없이 내리치며 울부짖는 그 녀석이 있었다. “죽어. 죽어!! 그냥 깔끔하게 죽고 끝내라. 죽어버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2. 앞에선 타닥타닥 타자치는 소리와, 뒤로는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 수갑을 찬 채로 연행되어 오는 별의 별 사람 가득한 이 곳은 경찰서. 태어나 처음 와본 곳에 내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즘 희렴이를 향해 대뜸 말하시는 경찰 아저씨. “너 인마 이걸로 두 번째야.” 라며 혀끝을 찬다. 희렴이는 그저 말없이 고갤 숙인 채 바닥만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지금 내 호흡이 거칠어지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는, 자세한 상황이나 진술을 하기도 이전에, 그저 입가가 찢어진 상처 하나 뿐인 그 자식이 합의 따윈 없으니 당장 감방에 처넣으라는 말과 함께 홀연히 경찰서를 나가버렸다는 것. 희렴이 옆에 앉아서 초조함에 숨을 죽이고 있을 무렵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오신 학생주임 선생님과 A반 담임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연락 받은 학생 담임되는 사람입니다. 이쪽은 학생과 부장님이시구요.” “아, 어서 오십시오. 이러고 보니 초면도 아니네요, 허허.” 웃음이 잘도 나오던지, 껄껄 웃으며 선생님을 반기는 경찰아저씨. 난감한 얼굴로 희렴이 쪽을 바라보시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저어 피해자 상태는 어떤지…….” “합의 따위 해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으니 알아서 처넣으라고 하는 바람에…. 보아하니 상대 쪽도 학생 같던데 완고하드라구요. 아시겠지만 저번에도 그 학생이랑 얽혀서 오지 않았습니까? 피해자 쪽에서 합의를 바라지 않는데다가 두 번이나 이렇게 되서 원…….”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학교 학생 대부분이 부모님이 외국에 나가 계셔서 연락이 어렵습니다. 일단 저희가 피해자 쪽이랑 얘기를 좀 할 수 없을까요?” “진술도 제대로 안 하고 나가버렸는데 저희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경찰아저씨와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얘기에 정신없을 동안도 희렴이는 그저 바닥만 내려보고 있는 것이 전부. 처음도 아니라는 경찰아저씨의 말에 희렴이가 언젠가 했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 희렴 이를 보다말고 더럭 경찰서 밖으로 나가자 내 뒤를 따라 나오는 령우. “어디 가?” “그냥……바람 좀 쐬고 싶어서. 가 있어. 금방 들어갈게.”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령우를 향해 안심시키고 걸음을 옮겼다. 경찰서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그곳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별의 별 생각으로 가득한 머리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려는 시각, 그곳은 아직도 불이 훤했고. 문 앞에 서서…한번쯤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을 즘 안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문에 달려있던 종소리가 나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뭐야?” “누구 아는 사람이야?” 주인 없는 듯한 당구장 안쪽. 대 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 가운데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그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마 내 손님 같은데…. 맞나?” “합의, 해주세요.” “일단 앉아.” 대뜸 합의 이야기를 꺼내는 나를, 넌지시 올려 보다가 테이블 위에 있던 맥주 캔을 내민다. “마실래?” “아니요. 합의 해주세요.” 대꾸도 없이 일방적인 두 번째 나의 말에 그나마 남아있던 희미한 조소마저 사라진 냉랭한 얼굴로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그 남자. “것 참 말이 안 통하는 꼬맹이네. 부탁하러 왔으면 사람이 하는 말 좀 들어. 올려다보기 목 아프거든? 소파에 앉든가, 바닥에 앉든가.” 그제서야…조금 움찔한 내가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고. 나를 위한 배려였는지 자신들을 위한 도피였는지 테이블 위에 담배 갑을 집어 들고 우르르 나가버리는 사람들을 당황히 올려다보고 있는 내게 대뜸 묻는다. “여자친구냐?” “그런데요.” 딱딱한 나의 대꾸에, 다시 한번 인상을 구기더니 곧 남아 있던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나 성격 별로 안 좋거든? 참고삼아 말해주자면 딱딱한 것도 싫고 재미없는 건 더 안 좋아해. 후…, 용건이 뭐랬지?” “희렴이…합의 해주세요. 부탁드리러 왔어요.” 이 문을 나가는 순간 후회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할 거야. 나는 돌아서자마자 이런 자식한테 이렇게 고개 숙이고 허리 숙여 무언가를 부탁했단 사실이 부끄럽고 창피 할 거야. 그렇지만…그게 희렴이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이런 창피는 몇 백번도 당해줄 수 있어. “할 말 그게 다면 시끄러우니까 돌아가. 나 합의해줄 생각, 죽어도 없거든. 그 자식이 와서 무릎 꿇고 빈다면 0.1초 고민은 해볼지 몰라도.” “한번 만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제발요…….” 그러나 나의 부탁에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전혀 합의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시혁이라는 그 인간을 더는 내가 못 참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말한다. “아, 방법은 하나 있다.” 그 말에 멈춰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그 더럽고 야비한 말을 내뱉었다. “은예림을 내 앞에 데려다놓으면. 그럼 해줄 수도 있고.” “난 그 애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리고 그런 건… 그쪽 여자친구니까 그 쪽이 더 잘 알겠죠.” “아, 그건 모르나? 우린 헤어졌지, 며칠 전에. 원희렴 찾아 안 갔든? 난 당연히 그 놈 찾아 갔을 줄……아, 아니다. 만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 나 몰래, 너 몰래.” 휘말리면 안돼. 일부러 저런 말 하는 거야. 꾹 쥐고 있는 손에선 땀이 삐질삐질 나오고. “……이미 헤어졌으면서 다시 만나서 뭐하게요.” 마치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기라도 한 듯이 비식 웃으면서 그 남자가 한 말은 정말 몸서리 쳐질 만큼 오싹했다. “처음에는 단지 내거였다는 걸 뺏긴다는 게 아까워서였고, 두 번째에는 내가 그 계집앨 진심으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로 착각해서였고, 지금은……오기지. 넌 열도 안 받냐? 그렇게 갈라놔도 둘이 자석처럼 철썩 들러붙는 거. 꼴 뵈기 싫잖아. 왜, 짝지어 날아다니는 새보면 억지로 떼어놓고 싶어서라도 한 마리 콱 쏴죽이고 싶단 생각, 너는 안 해봤냐?” 보통은 절대 하지도 않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무슨 재밋거리나 되는 것처럼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야비하게 웃는 이 남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예림 그 아이는, 아무리 한 순간일 뿐이 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 어떤 말도 나오지않아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인 나에게 대뜸 말한다. “너 말이야, 여기까지 와서 빈 네 정성 하나는 기특하다고 해주겠는데. 그놈이 왜 날 찾아왔는지도 알면, 둘 사이에 대해서도 알 거 다 알면서 그 새끼 옆에 붙어있는 거 아니냐? 네가 암만 이렇게 그 놈을 위해 발버둥을 쳐도 그 자식은 결국 은예림이랑 짝짜꿍 할 것도 다 알면서. 확실히 너도 정상은 아냐. 그치?” “아니에요! 희렴인, 희렴이는…….” ‘희렴인 안 그래요’ 라고…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떼이질 않았다. 정말 제길스럽게도 당연하게, ‘아니에요. 이젠 아니에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순간 울컥하기 까지 했다. “내기 하나 할까?” 말과 함께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며, 나를 향해 뿌연 연기를 내뿜는다. 익숙지 않은 담배연기에 콜록거리며 매캐한 냄새에 눈물이 찔끔 고인 눈으로 찌푸려 올려보자 그게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몇 달, 아니…며칠 뒤에도 네가 원희렴 여자친구 일지 아닐지. 어때? 조건은 없어도 꽤 흥미 있는 내기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까짓 조건은 얼마든지 걸 수 있어.” “안 해요. 그런 거.” 더 말 섞고 있어봐야 놀림거리 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더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상투적인 이유로 고개를 대충 꾸벅이고 막 문을 나설 무렵, 마지막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대단해. 정말이지 은예림 못잖은 숭고한 희생정신이야. 착한 어린이한테 상 주는 셈 치지 뭐.”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그를, 다시 돌아볼 것도 없이 그대로 나왔다. 무거운 걸음으로 터덜터덜 길을 가다 말고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거리 한 복판에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길가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겨를도 없이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대로 돌아가 희렴이나 령우의 얼굴을 본다면 참지 못해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아서. 잠시 동안만…, 지금 이 시큰시큰한 눈에 맺힌 눈물이 마르면 그때가자, 하고. 사실 울 이유같은 것은 전혀 없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런 나쁜 녀석하고 말장난한 게 속이 상해서, 그 놈이 짓궂게 한 말이 사실 내게 있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어서.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을 땐, 경찰서 앞에서 한참을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멀찍이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령우. “어디 다녀오는 거야?” “그냥 좀 걷는다고 걷는 게, 한참 걷다 보니까 길이 헷갈려서…….” “……울었어?” “아니!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그냥 밤바람에 눈이 시큰해서 그래. 들어가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령우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우리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시끄럽던 경찰서 안에서도 가장 커다란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던 아까의 그 경찰 아저씨. “자세한 건 경찰서로 좀 오면 좋겠는데…. 아, 알겠어. 어쨌거나 잘 생각했어, 괜히 학생끼리 얼굴 붉히…….” 경찰아저씨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건너편에서 끊어졌던 이유인 건지, 언짢은 표정으로 수화기를 바라보다가, 선생님을 비롯 우리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헛기침을 두어 번하며 말한다. “금방 통화하는 것 보셨죠? 원희렴 학생 피해자 되는 사람이요. 합의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돌려보내라고 합디다. 나 참.” 그 말에…선생님과 령우, 그리고 내 표정은 밝아졌지만 고개 숙이고 있던 희렴이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12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경찰서를 나오며 선생님들은 연신 그 경찰아저씨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하던 때…경찰서를 나오고 나서야, 그리고도 한참만에야 나와 눈을 맞춘 희렴이가 말했다. “걱정하게 해서…미안해.” 그 말을 하던 희렴이의 눈은,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다 곧, 다시 마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피곤했던 하루라…웃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아니야, 괜찮아. 네가…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점점 줄어든 목소리가…결국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서 듣진 못했을 테지만……. 아니야, 괜찮아. 네가…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희렴아. 제발 날 떠나지만 마…….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No.1｀낭만곰탱이＊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3. “이상해, 아주.” “뭐가?” “너.” 안 그래도…안 어울리는 건가하고 연신 거울을 보고 있는데 거기다 데고 하는 말이라니. 머리를 묶다가 말고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생각보다 깨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령우. “왜 시비야!” “평소엔 거울도 안 보던게 왜 갑자기 머리는 만져.” “난 좀 꾸미면 안돼?” “그게 꾸민 거였어?” 저 자식이 좀 괜찮을 만 하면 시비여. 애써 령우를 외면하고 다시 거울을 보며 익숙지 않은 단장에 여념 없을 즘, 말한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니까 걱정이 되잖아. 속상하고 우울하면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그럼 내가 풀어줄 수라도 있는데 너 그렇게… 밝은 척 하면 보는 내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정곡을 찔린 듯한 그 말에…평소엔 묶어본 적도 없는 머리를, 최대한 높게 묶었던 그 머리를 다시 푸르려다 곧 그 마저도 멈췄다. 체, 그럼 어떡하냐. 경찰서에 다녀온 희렴이는 그날 이후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처음 만나던 그때처럼…인형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자자, 그렇다고 그런 표정 짓지 말구.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알아?” 령우의 한 마디에 다시 풀이 죽은 채로 입을 내밀고 있는 내 어깨를 다소 거칠게 흔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여느 때보다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다. 부담스럽게 시리.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이 계집애는 왜 이렇게 비윗살이 없냐! 암튼 그 이상한 머리 푸르고 이리 와봐.” 그리고 곧 내 어깨를 거칠게 끄댕겨 손바닥 안에 작은 그것을, 몹시 뿌듯한 듯, 또 자랑스러운 듯 불쑥 내민다. “봐, 이쁘지?!” 그 자랑스럽고 대단한 것을 꺼내기라도 하는 듯 사람 긴장 시켜놓은 것의 정체가…어디서 구경하기도 힘들 딱 손바닥 반만 한 사이즈의 넙대대한 크기의 초록색 집게 핀. “뭐냐, 이게.” “오다가 주웠어. 운동장에 있드라구.” 남고에서 보기 드문 머리핀이 운동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게 신기해서 주워온 그 심정은 이해한다만, 어디서 이런 줘도 안 갖게 생긴 걸……. 벙찐 내가 멍하니 그걸 바라보는 사이, 이내 내 머리에 엉성하게 핀을 꽂는 령우. “아악!” “가만 좀 있어봐.” 묶여있던 머리를 막무가내로 풀어재끼고, 머리가 다 얽히고설키도록 둔한 손놀림으로 아픔을 느끼고 있는 나는 아랑곳 않고 결국 핀을 꽂아주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와, 예쁘다! 짝짝짝.” 박수소리를 입으로 내가며 호응하는 령우. 결국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슬쩍 거울을 바라본 나는 다시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결코 이 녀석이…나를 좋아하는 것을 좋게만 생각하면 안돼. 이 녀석은…이런 호박잎을 머리에 붙이고, 평소보다 두 배는 띵띵 불어있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도 예쁘다고 하는, 미적 감각이 범상치 않은 녀석이니까. 애써 거울 속의 나를 외면하며, 또 못내 령우의 이런 점을 대단스럽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그래. 이뻐. 이쁘긴 한데… 어쩐지 나랑은 안 어울리는 거 같아.” “사실 그건 그래.” “니 놈이 사실 그런 놈이지. 칭찬의 치읏 자도 모르는 놈!” “아냐, 내 눈엔 신데렐라 같은데 뭘.” “그러니까 어쨌거나 그지였다가 핀 꽂고 공주 같아졌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잖아!” 녹색 호박잎 핀 꽂고 공주 된 기분, 참 밍숭밍숭하다. “곧 죽을 사람처럼 울상이었다가도… 이렇게 금방 기분 풀리고, 잘 웃어서…그래서 이쁜 거야.” 전부터 느꼈지만 사람 민망하게 하는데 도가 텄어. 내가 또 민망함에 화끈거릴 무렵 작게 말하는 령우. “이쁘게 하고 희렴이한테 가려던 거 아니었어?” “으응.” “지금 가. 딱 좋아. 오늘 아주 예뻐.” 그런 말 하는 령우를 더 나무랄 것도 없이 머리에 호박잎을 붙인 우스운 꼴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나오자마자 떼려고, 힐끗 뒤를 돌아봤지만, 저렇게 창문에 딱 달라붙어서 무언의 압박을 가하며 나를 지켜보는 녀석을 본 후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학생과로 도착해서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경찰서까지 다녀간 나름대로 큰 폭행사건이었기 때문에 징계를 면치 못했고 이렇게 하루 다섯 시간씩 학생과에 앉아서 반성문을 작성하는 원희렴. 다행히 지금 선생님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내가 문을 톡톡 두드리고 냉큼 안으로 들어서자 엷게 미소 띠운 얼굴로 바라보는 희렴이. “여긴 왜 왔어?” “심심할 것 같아서. 안 심심했어?” “심심했어.” 말과 함께 가만히 내 얼굴을 보다 말고 묻는다. “근데 머리에 그건 뭐야?” “아, 호박잎.” 그제 서야 단세포 나는, 내가 여기까지도 이 핀을 꽂은 우스운 꼴로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거둬내려 했지만 잠시 내 손목을 잡아 멈춰 세운다. “잠깐….” 머리에 2/3을 가리는 이 핀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어디서 본 것 같은 눈치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이런 건 어디서 구했는지 신기해하는 것도 같고. “구경 좀 하고.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제길 후자였다. 역시 남이 보기에도 이건 범상치 않았던 거야. “려, 령우가 꽂아준 거야. 하도 하고 가라기에 엉겁결에 그냥 왔지.” 조금은 걱정을 하며 내 말의 뒤에 이어질 희렴이의 대답을 기다리던 와중 녀석이 하는 말. “이쁘네.” 제길, 내 주위엔 평범한 녀석들이 하나도 없어! 흘려내진 못했지만 애써 눈물을 감추고.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더니, 곧 쓰던 반성문을 쓰기에 열중한다. 그렇게 한참을 3평 남짓한 교실 안에선 사각사각 글 쓰는 소리만 들렸더란다. 그렇게 말없이 희렴이를 보다 말고 문득 말했다. “나 말이야,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그제야 고갤 들어 눈을 맞추는 희렴이. 모처럼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생과일 빙수가게, 가봤어?” “아니.” “웨딩카페는?” “거긴 어떤 곳인데.” “그냥 카페 같은 곳인데,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고. 아, 거기가면 웨딩드레스도 입어볼 수 있대. 사진도 찍어주고.”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으며, 내가 웃었기 때문일지 웃음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희렴이. 나는 또 그런 희렴이를 보면서 더, 더 더욱 환하게 웃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어디 좀 다녀와서…같이 가자. 우리 아직 노래방도 안 가봤잖아? 너, 나 노래 부르는 거 봤었지? 나 그거 말고도 잘 부르는 거 많아. 음…, 그리고 우리도 옷이나 신발이나 시계나…뭐 하나 맞추자. 커플로. 응? 아, 기대된다. 이걸 하루 안에 다 할 수 있을까?” 혼자 박수를 쳐가면서 있는 대로 들떠 이야기 하는 나를 보던 희렴이의 얼굴이 차츰 굳어져 가고, 나는 또 그런 희렴이를 의아하게 올려다 볼 무렵 나지막이 말하는 녀석의 얼굴이 슬펐다. 감추고 있는 내 마음만큼이나. “그렇게…급할 거 없잖아. 천천히 하자. 하루에 하나씩.” 결국 나는 그 말에 본의 아니게 쏟아낼 수 없어 슬프게도 울컥하고야 말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하나씩…우린 그렇게 몇 개나 해나갈 수 있을까. ※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 골랐던 옷을 녀석에게 들려주고 냉큼 방에서 나왔다. 내가 들어간 덕분에 졸지에 밖으로 나오게 된 희렴이와 같은 방 친구들은, 졸지에 녀석이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나와 함께 복도에 서있는 채로. “됐어?” 그리고 곧, 어딜 가느냐는 말도, 왜 굳이 이 옷을 입느냐는 거추장스런 질문 없이 내가 골라준 검은 슈트를 입고 나온다. 그리고 멋쩍게 바라보는 녀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자.” 사실은 외출금지이지만. 내게는 특별한 날이고 해서…모처럼 허락을 받아 이른아침부터 학교를 벗어나고 있다. 사실은 최악의 만남이었던 탈탈거리는 그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문득 묻는다. “누구 만나는 거야?” 녀석에게서 나온 첫 번째 물음. “응. 꼭 만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더 물을 것도 없이 내 대답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물어도 다 대답해줄 거지만, 어디인지 말 하지도 않아도 내가 가자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함께 가준다는 사실이…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10년 만에 뵈는 부모님께도 꼭 보여드리고 싶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하고. 종점에서 내려 도착한 버스터미널. 매표소로 가서 나 안양행 차표를 두 장 끊고, 곧 떠난다는 차에 올라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것은…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막힌 우연이랄지 지독할 정도로 잔인한 신의 계시인 건지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보다도 큰 가누기도 힘들 가방을 끌고, 금방 도착한 서울행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냘퍼 보이기도 하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는 그 여자는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미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챈 나는 두려웠고, 희렴인 벌써 흔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자 리에서 일어나 버린 희렴이를 내가 더럭 붙잡았다. “가, 가지마. 가지마, 희렴아…….” “해야 할 말이 있어. 꼭…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차라리 지금이 아니었다면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고 보내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치만 지금은 가지 마, 희렴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나는 한참 약한 애일지도 몰라. 내가 가장 약해져 있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겁먹은 지금만큼은 가지마. 어쩌면 한계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내가 참고 기다리고 이해할 수 있던 한계가…여기까지인지도 모르겠어. 지금 가버린다면, 어쩜 너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 그러니까……제발, 제발 이번만큼만……. 왜 나는 그때 그 절실한 말들을 토해낼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속으로만 되뇌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에 그저 처연히 희렴일 올려 볼 뿐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줘. 돌아올게.” 그러나 그런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느새 젖어들은 그 눈동자로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보고, 다시 한번 은예림 쪽으로 고갤돌린 희렴이는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뛰었다. 내손에 금방까지 잡혀있던 셔츠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한데…눈 깜빡할 새에, 저만치 멀리 그 아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4. 나 역시 빠르게 희렴이의 뒤를 쫓았고. 정신없이 달려 터미널 바깥쪽에 모여 있는 버스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지, 말아야지 고민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치려하는 그 아일 잡는 희렴이의 모습도 보였다. “기다려.” “싫어. 갈 거야, 이거 놔.” “내 말 듣고 가.” “다신보고 싶지 않다고 한 건 너잖아!” “왜…왜 진작 말 안했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번쯤 돌아볼 만큼 커다란 목소리.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아랑곳 않았고, 희렴이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크고 검은 눈동자에 순식간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본 후엔 잠자코 돌아섰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해?” 등 뒤로는 계속해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을 자신도 없었다. 얼마나 그 두 사람만 보고 서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어느새 아파오는 다리에 버스정류장 앞 대기석에 앉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울지 않았는데 그저 한참을 멍하니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공중전화 박스로 걸음을 옮겼는데, 그냥 무작정 머릿속에 떠오르던 번호를 눌렀고 잠시간의 연결음 끝에 수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령우야.” [에? 갑자기 웬 전화. 무슨 일 있어?] “내가 길을 몰라서…, 혼자는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흑…….”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우는 내게,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떨리고 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금방 올게’ 하고 대답한다. 그렇게 터미널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초스피드로 날아온 령우. 택시에서 내려 내 쪽으로 뛰어오는 령우를 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대뜸 녀석의 손을 잡고 안양행 버스에 올라탔다.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희렴인 어딨고?”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갔어. 그러니까 같이 가주라. 응?” “야, 강다……” “부탁이야. 길도 잘 모르겠고, 혼자는 자신도 없고…오늘은, 거기만큼은 혼자 가고 싶지 않아.” 차츰 줄어들어버린 목소리였지만, 그런 나를 보던 얼굴에 역력했던 당황스러운 기색을 누그러트린 채 조용히 좌석에 앉아주었다. 그렇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말없이 있었고. 한참만에야 령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희렴이 어디 갔어?” “누굴 좀 만나러.” “왜……안 말렸어.” 그 누가, 정말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건지 어쩐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린아이에게 잘못을 꾸짖는 듯도 하고, 마치 걱정하는 오빠 말투같기도 하고. 참 다양한 느낌이다. 그런 령우의 물음에 나는 그저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말렸는데도 갔는 걸…어떡해.” 그 내 말에 더는 말없이 또 한참동안의 침묵이 찾아왔다. 혹시라도 돌아오지 않을까봐. 혼자 남을까봐 나는 희렴이를 기다릴 수 없었어 령우야. 금방 오겠다고 했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혼자 남게 될 내가 너무 불쌍해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어. 그런 경험은 단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늘의 나는, 그렇게 약해…. 그렇게 몇 시간여 만에 안양엘 도착할 수 있었고. 도착해서도 낡은 버스로 갈아타고 깊고 후미진, 꼭대기로 몇 개의 묘지가 보이는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섰다. 묵묵히 같이 걸어주는 령우와 함께 올라섰을 때…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나란히 붙어있는 두개의 비석. 비록 봉분은 없었지만 두 사람 몫의 비석이 늠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석위에 또박또박 새겨진 두 분의 성함. 그리고 그 밑에 따로 새겨 넣은 듯한 글귀가 보였다. [강인석, 윤지현. 살아서도 하나같이 서로를 사랑하던 두 사람이, 여기 이곳에 잠들었습니다.] 솔직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사무치거나 그 사실이 그다지 서글프지는 않다. 그런 것에 슬퍼하기엔 너무 오래 혼자였고, 부모님의 생전을 기억하기도, 또 마지막을 기억하기에도 난 너무 어렸으니까. 하지만…웃어주시던 모습과 함께했던 추억들은 세월에 바래져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던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 머리를 쓸어주던 아빠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 정도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으…….” 그러나 어째서인지 가슴 속에서는 뭔가 북받쳐 오르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어느새 소리 내어 울게 된 나의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령우. 그때 흘렸던 나의 눈물엔 단순히 부모님에 대한 것 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흙바닥에 주저앉아 그토록 서럽게 울면서 속으로는 오랜만에 만난 엄마 아빠한 테 그렇게 물었다. 눈물이 나요. 엄마, 아빠.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요? 오늘은 그냥…엄마 아빠 생각만으로도 벅찰 만큼 울고 싶었는데, 그 애한테 위로 받고 싶었는데 왜 굳이 오늘 같은 날 까지도 내 눈물의 이유에 그가 포함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 너무 겁이 나요. 만약 희렴이가…다시 그 애에게로 돌아가 버리면 어쩌죠? 그럼 난 다시 혼자가 되는 건가요? 곧 다녀온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다신 볼 수 없었던 엄마 아빠처럼요……? .. “다 울었어?” 얼마동안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어깨를 토닥여준 령우. 차츰 내가 울음을 그치고 진정이 되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서야 입을 뗐다. “……으응.” “그럼 빨리 코 좀 풀어. 보기 흉해죽겠다. 오랜만에 부모님 만나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냐.” 라는 말과 함께 휴지를 건넨다. 령우에게서 건네받은 휴지로 코를 닦다말고… “우…우어어어.” 이내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고 당황해 하는 령우가 물었다. “왜, 왜 그래? 아직도 눈물이 나?” “고마워서…고마워서. 넌 너무 따뜻해, 령우야. 우어어어.” 그렇게 또 한참을 울었더란다. 그리고 또 우는 나를 지켜보던 령우가 그제서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참 여러 가지 이유로 운다.” ※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희렴의 손의 힘이 더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애써 빼내려했지만 그 마저도 쉽게 되지 않았다. 희렴 역시 차오른 눈물에 그녀의 얼굴이 흐릿해져 오는 걸 느꼈다. 이미 눈가 가득 맺혀버린 눈물을 떨어트려 내기 위해 고갤 숙였던 참이었다. “이거…….” 가는 그녀의 손목에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굵게 나있는 칼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지만, 예림은 곧 빠르게 손을 빼냈다. 하지만 다시 거칠게 손목을 낚아챈 희렴이 물었다. “뭐야.” “아무것도 아냐.” “뭐냐구 묻잖아!” “……도망치고 싶었어.” 조금 벌어진 예림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희렴이 손을 들어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잡아끌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닫힌 입은 도통 벌릴 줄을 몰랐다. 쉼 없이 떨리는, 예림의 어깨의 떨림이 온 몸 으로 전해져왔다. 예림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더욱 끌어안았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듯한 느낌에 가볍게 고개를 휘저었다. “아파. 아파…, 아파 죽겠어.” “말하지. 그때 말을 했어야지, 왜…왜 이렇게 늦게…….” “내가 어떻게 말 해. 내가 맞고 있다고, 네가 그렇게 사랑해주는 내가, 한심스럽게도 고통에 찌들어 살고 있다고, 나 좀 도와달라고, 어떻게 그 말을 할 수 있겠어?” 그 말에 희렴이 고개를 숙였다. 희미하게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도 뽀얀 볼을 타고 쉼 없이 떨어져 내렸다. 뿌옇게 흐려져 가는 망막에 비추는 예림의 모습에 손을 들어 볼에 눈물 자국을 지워가며 힘겹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용서해줘…….” 눈물로 젖어버린 볼을 두 손으로 쓸어내며, 마치 속죄와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런 한마디에 예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응시했다. 순간 휘청거리며. 희렴이 놀라 예림의 허리를 잡아 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돌아오는 대답은 더 이상 흐느낌이 아닌 눈물이었지만, 그것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안해두, 나 좀 구해주지 그랬어. 내 맘 좀 알아주지 그랬어, 희렴아. 얼마나 간절히 빌었는데… 나 진심 아니라구 네가 제발 알아달라고 얼마나 빌었는데…….” 그 눈물에, 그 떨림에 몇 번이나 부서져 내린 심장이 힘없이 뛰는 것이 가슴 깊이 느껴졌다. 한참을 자신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눈물 흘리던 예림이 살짝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다시 돌아와 줬으니까, 나 괜찮아.” 그말에 작게 예림의 어깨를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예림 또한 눈물을 닦고 희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그의 눈에도 젖어있었지만,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불안하다고 느끼던 순간이었다. 자신의 옷깃을 꼭 붙들고 서있는 예림을 천천히 밀어낸 희렴이 입을 뗐다. “너를 사랑해서 온 거 아니야. 용서를 구하려고 온 거야…….” “뭐…?” 미미하게 경련처럼 일던 떨림이 멈췄다. 희렴이 입에서 마치 한숨처럼 나온 한 마디에 예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숨이 막혀왔다.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는 공기에 숨이 막혀왔다. “……말도 안돼.” 예림이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희렴을 바라본다. 희렴이 그 눈빛을 피하자 손을 들어 그 어깨를 밀쳤다. 한 대, 두 대. 거칠게 가슴팍을 내리치던 손의 힘이 점점 약해져, 순간 휘청거리는 예림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매정하게 그 손을 뿌리쳤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녀를 바라보자 바닥에 주저 앉아 바라보는 자신을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가 울부짖었다. “거짓말이지? 장난이라고 해. 어서. 응? 사랑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랑했는데!”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그날부터, 45》 굳이 그 사람에게 끌렸었던 이유를 대라면…나와는 너무 달랐던 것. 언제나 갑갑한 새장 속에 갇혀 사는 것만 같았던 나의 삶과는 달리 자유분방하고 거친 그의 삶이 부러웠다. 그것이 내가 잠시나마 그를 사랑했던 이유다. 아니 내가 정말 그를 사랑하긴 했었을까? 희렴이를 만나고 난 후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앞으로는 욕 같은 거 하면 안돼.” “놀구있다. 좋은 말 할 때 안 꺼질래?” 사실 무섭지 않았다면 그건 쌔빨간 거짓말. 나는 그저, 그를 잊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기만 하면 됐는데…이렇게 잘생겼지만 무서운 사람을 원했던 건 아니었어. 그치만 다시 한번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내 남자친구니까 당연히 담배두 안 되구. 음…귀 뚫는 건 싫고, 오토바이 타는 것도 싫어. 염색두 하면 안되고, 머리 길이는 이 정도면 됐다. 역시 말투랑 담배만 끊으면…….” “너 말이야. 나는 내 여자친구가 너 같이 생긴 거 딱 질색이거든? 너처럼 머리가 긴 것도 질색이고, 앵앵대는 것도 질색이야. 그러니까 넌 아무래도 안되겠다.” 말과 함께 자정이 넘은 크리스마스이브 날. 그 많던 사람들 속에서, 명동 거리 한복판에 나만 남겨두고 멀어져 버리던 네 뒷모습을 보며 알았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유난히 슬퍼보이던 네 쓸쓸한 뒷모습이 말했거든. 너도…나만큼이나 상처가 깊으리라고.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너의 집 앞으로 찾아가, 금방 일어난 듯한 부스스한 머리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현관을 나서서 신경질적으로 바라보는 너를 보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추위에 꽁꽁 언 손을 뒤로 감추고 네 앞으로 다가서 했던 말. “앞으로 앵앵대지 않을 거야. 얼굴은 어쩔 수 없겠지만…그 정도는 너도 참아주면 안될까? 대신 나도 네 말투는 이해할게.” 사실 내가 그렇게 앵앵대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칭칭 둘러메고 있던 목도리를 풀자 갑자기 드러난 귀밑이 조금은 휑하게만 느껴지던 낯선 짧은 머리. 그런 내 모습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 이내 네가 해주었던 대답. “네 맘대로 해.” 나는 그때 너의 그 대답만으로도 그 사람의 50%를 잊었다. 물론 머리를 자르던 순간 너의 말은 단순한 핑계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 핑계로 기다란 머리카락과 함께 그에 대한 기억도 잘라 내버렸으니까. ‘에휴, 내가 가르쳐 줄 게 참 많은 것 같다. 봐! 여자가 술 마시려고 하면 일단 말리는 게 남자야. 앞으로는 내가 술 먹는 척하면, 재빠르게 말려?’ ‘싫어.’ ‘걷기 힘들어하는 여자친구에게 근사하게 등을 내주기.’ ‘나도 힘들어.’ ‘진짜 남자는 말이야~ 언제나 주먹을 쓰지 않는 법이야. 물론 맞기만 하는 남자친구는 매력 없지만, 남자는 딱 한 가지 이유에서만 주먹을 쓰면 돼. 여자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주먹을 쓸 줄 아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란 말이야. 아이참, 내 말 듣고 있어?’ ‘…….’ 물론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런 그가 바보 같다기보다는 오히려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 같아서…내가 알려주는 대로, 내가 그린대로 변해가는 널 보면서 느꼈었어. 어쩌면, 나는 그 사람을 잊을 수도 잊겠구나. 너의 곁에 있으면서, 아예 그 사람을 지울 수 있겠구나…하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랬었는데……. 나와는 다르게 그런 나의 마음과 반대로 네가 냉정한 것이 몹시 속상했던 어느 날. 마치 하늘이 나를 시험한 것만 같았어. 정말 그를 잊었느냐고. “내가 잘못했었어, 예림아. 제발 다시 한번만 나한테 돌아와. 응?” 자존심 강하고, 자신밖에 몰랐던 그가 나에게 용서를 구해오던 날. 그가 다시 돌아와 주었단 사실에 흔들린 것 40%, 만약 내가…이제 다시 네게서 멀어지면 과연 희렴이 넌 뭐라고 할까에 흔들린 것 60%. 그리고 그런 나를 알아채고 정신없이 네가 그를 때렸을 때, 정말 나쁜 나는, 차갑게 얼어있던 마음이 희렴이로 인해 녹아들은 후 어느덧 그에 대한 걱정보다도 가슴 한켠에 알 수 없는 미묘한 기쁨에 이상해 할 수 밖에 없었어. “뭐 하는 짓거리야……. 시작도 니가 하고, 애꿎은 사람 맘 흔드는 것도 너면서 왜 사람 병신 만들어. 나 가지고 논 거야? 장난 친 거야?” “니가, 니가 나쁜 거야. 사람 병신 만든 게 누군데?! 매일…매일을 그렇게 사람 기다리게만 해놓고, 나한테만 냉정하고 나한테만 웃어주지 않고 나한테만! 그러면서 화는 왜 내?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제와 내가 다른 누구랑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 “……못 놔. 이젠 내가 너 못 놔 줘.” 그때, 그렇게 소리치던 날 꽉 끌어안던 네 품에서 나는 울 수밖에 없었어. 결코 그것은 속상함의 눈물도, 서러움의 눈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친 그를 위한 연민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저 기뻤을 뿐…. 냉정하게 굴던 네가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 했다는게 기뻤어. 너도, 나로서도 단순히 그를 잊기위해 시작한 만남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원희렴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마음에 담고 말았던 거야. “이게 뭐야?” “열어봐. 색깔이 이뻐서.” “뭐야.” “왜. 싫어…?” “손수건은, 이별의 선물이란 말이야. 헤어질 때 하는 선물이라는데…….” “……몰랐어. 줘. 갖다 버리게.” 예쁜 포장지 안에 곱게 접혀 있던 손수건에 조금은 의아스럽게 바라보다가, 희렴이의 순수한 그 한 마디에 나는 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 됐어. 그래도 가지고 있을래. 우리가 그 말을 없애 버리는 거야. 손수건이 결코 이별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증명해 보이면 되잖아. 영원한 사랑으로. 오케이?” 그리고 별 것 아니었던 그 약속을…꼭 지키고 싶었는데……. “대답해.” “…….” “대답하라고, 썅. 잘못했어, 안했어?” “잘못……했어.” “…그러니까 좋은 말 할 때 들었으면 좋았잖아. 괜히 이쁜 얼굴에 상처 생기고.” 단순히 그의 손찌검이 겁이 나서가 아니었어. 그가 그런 사람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그를 4년 동안이나 사랑했었으니까. 비가 오는 날에 바이크를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위험하고, 한 시간에 담배 한 갑을 다 피울 정도로 담배를 좋아하던 남자. 나에게 상처를 주고 모질게 굴면서, 언제나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들을 했었던 그 남자. 물론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내 곁에 있었던 게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다. 단지 그에겐 나라는 존재가 아닌, 곁에 있어줄 어떤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처음으로 내가 그런 사람을 사랑한 사실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뒤늦게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또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행복 할 수가 없었으니까. “나 좀…, 나 좀 이제 그만 놔주면 안돼……?” 부르튼 얼굴로 입가에 묻은 마른 피를 닦아내면서 그에게 했던 말, 아니 처음으로 했었던 부탁. 그런 내 말에, 입안 가득 물고 있던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그가 했었던 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찔렀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입 아프게 하지 마. 넌 나한테 집 같은 존재야. 주인 없는 집이 어디로 달아나기라도 하던? 집주인이 없으면 그 안에서 거미줄이 쳐지건, 먼지가 쌓이건 주인 오시길 기다려야지…. 너한테 도망갈 수 있는 발 같은 건 없어. 내가 팔아치우거나, 허물기 이전엔 잠자코 있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유리조각 같은 사람이라…그가 했었던 어떤 모진 행동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삼켜낼 수 있던 스펀지 같던 내 심장이 처음으로 찢겨진 날이기도 했다. 희렴이가 모르는 상처가 하루하루 늘어날 때마다 나는 아픔보다도 그가 알아채는 것이 겁이 났다. 어떻게든 모르게 하고 싶었다. 네가 사랑해주는 나란 사람이, 실은 이렇게 미련하고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바보 같은 사람이 라는 것을 너에게만은 모르게 하고 싶었어.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아…, 친구. 친구 좀 만나고 오는 길이야.” “…….” 조금씩이지만…너도 뭔가 감추고 있는 날 눈치 채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의심하지 않고 이유를 물어주지 않는 네 다정함이 내겐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과연 너는 알까.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 그의 옆에 인형같이 앉아 있고, 인형처럼 웃는 날이 지속될 때에도 난 언제나 네 생각을 했었어. 이렇게…이렇게 잠시만 이 사람 곁에 있어주면 곧 너에게 갈 수 있을 테니까…. “너 접때 그 새끼 아직도 만나고 있냐?” “…….” “좋은 말 할 때……끝내. 곱게 자란 도련님 손에 맞아주는 건 한번이면 족해. 더 이상은 나도 손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너 내 말 잘 듣잖아, 은예림.”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나만 괴롭힘 당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참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의 입에서 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것은 없었어. 그날따라 뭔가 불안해하면서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는 널 보면서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 부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거짓말쟁이가 되게 해달라고. 최고의 연기자가 되게 해달라고…. “미안해…….더는 너를 속일 수 없어. 나 그 사람이 좋아. 너랑 있으면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너랑 있어도, 너랑 만나도 그 사람이 좋아. 그 사람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다시는 날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희렴아…. 나…, 그 사람한테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거짓말이야. 지금 하는 말, 하나도 진심 아니야.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을 속으로만 되뇌고 삼켰던 말들. “나는…, 나는……?” “……미안해.” “가지마. 가지 마….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가지 마, 제발…….”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울부짖는 너를 뒤로하고 담담하게 돌아서 카페 안을 나갈 때. 나는 평생가도 다 흘리지 못할 만큼의 많은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더욱 슬픈 것은, 네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나 또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어. 너를 버린 나쁜 여자라는 손가 락질과 따가운 눈총들이 언제나 내 뒤를 따르곤 했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너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서 걷다가 말고 문득 너에게 했던 말. “나…, 지금은 너한테 돌아갈 수 없지만, 만약…몇 년 뒤라 해도 다시 너한테 돌아가면 그땐…….” “기다릴게. 기다리고 있을게.” 마치 거짓말처럼 바로 이어진 대답에 눈은 우는데 입은 웃고. “거짓말. 지칠 거야.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기다릴 수 있겠어.” “……몸이 지친다고 마음까지 지치는 거 아니니까.” 더는 도저히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히 돌아서 버린 내 등 뒤로 작게 들려왔던 네 말.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멋진 남자가 되어있을게…….” 나를 기다린다는, 나를 믿는다는 너의 한 마디로 나는 견뎌낼 수 있었으니까. 비록 다시 돌아갈 순 없다 해도…참아낼 수 있었는걸.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상관없어. 너만 아니라고 생각해주면, 난 그것으로도 그 어떤 모진 시련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 그가 그런 말을 했었다. “머리는 왜 자꾸 자르는 거야?” “아…, 그냥….” “꼴 보기 싫으니까 길러. 사내새끼도 아니고.” 우스운 건, 머리를 기를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닿기만 해도 머리를 자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언제나 긴 머리가 익숙했던 나였는데도 불구하고 어깨에 닿는 길이만 되어버려도 습관적으로 머리를 자르고 있었어. 기대에 차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시나 네가 서있는 날이면 일부러 골목 귀퉁이에 숨어 한참을 들어가지 않고 서있었어. 조금이라도, 잠시만이라도 멀리서나마 네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내가 올 때 까지 너는 기다릴 것이라는 걸 잘 알아서, 욕심 같아선 그냥 그대로 하루를 꼬박 서있고 싶기도 했지만…. 많이 야윈 너의 얼굴이, 추위 속에도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서있는 너를 보는 게 안쓰러워 서…나도 금방 온 사람처럼 애써 담담히 너의 앞을 스쳐지나갈 때, 그런 나를 보고도 웃던 너의 모습. “……기다렸어.” “돌아가. 왜 또 왔어? 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내가 보고 싶어서…….” 숨기고 감추고 닦아내고. 내 눈물은 그렇게 좀처럼 네 앞에서 드러낼 수 없었어. 네 앞에서 만큼은…. 그리고 언제부턴가 네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또 한번 깨달았어. 결코 내가 참을성이 대단한 인간이어서 여지껏 견뎌온 게 아니구나. 인내심 지독한 여자여서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게 아니구나. 나를 바라보는 너의 모습을, 나는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면서 견뎌냈던 거구나……. 하루하루 네가 보이지 않는 날이 길어질수록 잘된 거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렇게 슬프고 눈물이 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늘 생각했지. 너는 또 그새 어떤 남자가 되었을까. 언제나 하나만 알려주어도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혼자서 깨닫곤 하는 너였으니까 분명 그 때보다도 훨씬 더 멋진 남자가 되어있겠지…? 하고. 희렴아, 언젠가 네가 그랬었잖아. 몇 번을 널 떠나도 괜찮으니까 다시 돌아오라고. 돌아오기만 하면 너는 언제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내 마지막이…너이기만 하면 된다고. 그때는 그 말만으로도 평생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욕심은 그게 아니더라. 만약에…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너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모진 매질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모두 견뎌낼 수 있을 텐데……. 나는 깨달았어. 이제 더는 잃을 것도, 더 흘릴 눈물도 다칠 마음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어. 다시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하고. 설령 너무 늦어버려 네가 다시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네가 곁에 없어도 너를 사랑할 내 마음, 이왕이면 네 옆에서 하고 싶었어. 그래서 결심한 거야. 나는 이 선택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6. “그럼 왜 왔었어? 지금 나한테, 왜 다시 돌아왔냐구?” 희렴이 입을 꽉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예림이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다시금 거칠게 내리쳤다. 밀어내려는 듯한 그 손짓에 희렴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들기듯 쳐내는 가슴은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그보다 깊숙이 자리 잡은 심장은 울고 있었다. 앞에 서서 눈물을 쏟아내는 그녀보다 더욱 서글프게. “네가 어떤 마음으로 헤어지자고 했을지, 몰라서 미안해. 끝까지 널 기다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정말…그게 다야? 나한테 할 말이, 그게 다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희렴의 모습에 예림이 무너지듯 휘청 였다. 하지만 곧이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어 올려 희렴을 향했다. 눈동자에 그를 꼭꼭 눌러 담고서는, 콱 잠겨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손목을 그었는지 알아?” 부들부들 떨리는 손목을 앞에 가져다 대자, 희렴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아직도 또렷이 남은 자국을 그의 눈앞에 가져다 대고는 따지듯 말을 잇는 예림의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네가 없을 거라는 그런 생각, 한번도 안 해봤었어. 날 기다린다고 해줬으니까, 어떻게든… 내가 어떻게든 그 사람한테서 벗어나기만 하면 될 거라고. 근데 너까지 안 된다구 하면 나 정말 힘들어, 희렴아. 이렇게 도망쳐 온 이유가 사라진다구… 차라리 그냥 죽으라고 해. 미안할 일 같은 거, 하지 마!” 희렴이 공허한 눈동자로 예림을 바라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되뇌는 그를 보며 예림은 계속해서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삼켰다. 이제 그는 자신을 보지 않는다. 더 이상, 저 맑고 깊은 눈동자 안에 담길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었던 그 눈에. 그 사실에 화가 나고, 또 그가 너무 미워서 손을 들어 그를 밀며 말했다. “멋진 남자…? 내 곁에서가 아닐 거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지키지도 못할 약속 같은 거 하지 말지 그랬어. 기다린다며. 몇 년 이라도 기다린다며? 네 사랑은 왜 이렇게 얕은 거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적, 끝없는 정적 속에 예림을 덮친 것은 불안이었다. 이제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기어코 참았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뿌옇게 앞을 가린 눈물을 손을 들어 닦아내고 옷자락을 쥐었다.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참아내며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 매달렸다. “제발, 제발 나 버리지 마…….” “……이러지마, 제발.” “나 너 아니면 다신 사랑 같은 거 못해.”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예림이 고갤 들었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울먹임에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아무 말 없는 희렴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뗐다. “미안하다구, 용서해달라고 했지…?” ※ “크응.”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코를 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한다. “이런 데를 내가 같이 왔어도 됐는지 걱정된다.” “안 될 건 또 뭐람.” 내 그 말에서야 어렴풋하게나마 웃어 보이다 말고, 문득 작게 묻는 령우. “뭐 하나 물어도 돼?” “뭐?” “부모님이랑…헤어져 산지 오래됐어?” “그야……7살 때부터니까 그럭저럭 11년 됐네.” “11년?” 놀란 듯이 되묻는 령우. 굉장히 조심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별 난처한 기색 없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하는 나를 보는 녀석의 표정에 미안함 같은 게 묻어나서, 내가 씨익 웃어보였다. “동창모임에 다녀오신다고 두 분이 같이 나갔었어. 비가 많이 온 날이었었는데… 원래는 나 혼자 두고 두 분이서만 다녀오신 일이 거의 없었거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그렇게 따라가고 싶다고 졸랐는데도 그날따라 안 된다고 집에 있으라고, 금방 다녀오시겠다고 약속하셨어. 떼쓰고 울던 내 손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해바라기 모양 사탕을 손에 쥐어주시고 나가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 “해바라기 사탕……?” “응. 그게 내가 살던 동네 슈퍼에서만 파는 거였거든. 어릴 때는 달구 살았었는데, 안 먹어본지 꽤 됐다.” 작게 뭔가를 읊조리며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는 령우. 표정엔, 차마 내가 이해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의미가 다분한 듯 했다. 애써 그런 시선을 외면하며 코 푼 휴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대뜸 령우를 향해 말했다. “갑자기 그 사탕이 먹구싶다” “넌 어떻게 이 와중에…….” “가자. 여기서 금방이야.” 대뜸 령우의 손을 붙잡고 산 귀퉁이를 내려섰다. 령우는 한참을 따라 내려오며 구시렁구시렁 댔는데, 사실 그런 시시콜콜한 잔소리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듯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지도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속으로만 되뇌었지만 분명 들으셨으리라 확신했다. 다음에……또 올게요, 엄마 아빠. 하고 작게 말하는 내 말을. “어, 여기는……” 그리고 잠시 후에 도착한 장소에 령우는 평소 놀랐을 때보다 눈을 두 세 배쯤 크게 뜨고, 멍하니 가게를 바라보다 말했다. “너 여기를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 보육원 가기 전까진 이 동네 살았는걸?” “에…, 말도 안돼!” 그러더니 곧 믿기지 않는 다는 투로 나를 바라보다 말고 곧 성급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나야 말로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어, 7살 때부터.” “어, 진짜?! 근데 그러면 모르는 사이인 게 당연한 것도 아니야? 나는 그쯤에 제주도로 갔으니까… 그래도 신기하기는 하다. 그지?” “……하. 말도 안돼, 진짜.” 그냥 우연으로 치부시키고 단순히 신기해하는 나와는 달리,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뱉어보기도 하고, 또 머리를 긁적이며 어리둥절해하다가 실없이 하하 소리를 내며 웃기도 한다. “아, 그럼 해담 공원도 알겠네?” 대뜸 벙쪄있는 령우의 손을 이끌고 부랴부랴 기억을 짚고 짚어 공원으로 향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기억 그대로, 이제는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것을 신기해하며 멀찍이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는 령우를 향해 말했다. “이건 진짜 놀랄만한 우연 같아.” “이런 건 우연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웃으며 건넨 말에 아니라고 대꾸하던 령우는 어쩐지 생각보다 몹시 진지한 표정이었다. “운명이지.” 진지한 표정과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더럭 할 말이 없어진 내가, 이제는 작아져버린 그네에 앉아 흔들릴 때 들리던 끼걱 소리 외에는 전처럼 뛰노는 아이들도 없이 공원은 조용했다. 눈을 맞추기에도 민망해서, 계속 시선을 피한 채 흙을 헤집고 있는데 별안간 크게 들려오는 령우의 웃음소리. “풋.” “엥, 왜 웃는 거야?” 당황해하는 나와는 달리 한참을 말없이 웃기만 하다가, 모처럼만에 고갤 들어 나와 눈을 맞추며 말한다. “기뻐서. 너무 좋아서.”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고 령우는 그런 나를 보며 계속 웃었다. 계속. 나를 보고 웃는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나로서는 처음에는 웃지 말라고 성질내다가, 결국엔 덩달아 소리 내어 웃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거 알아?” “뭐?” 정신없이 웃다 말고 별안간 튀어 나온 내 말에 고개를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대답을 기다리는 령우. “뭐랄까…, 진짜 웃는다고 해야 하나. 너무 환하고 밝게 웃어서, 네가 웃는 거 보고 있으면 우울했던 기분이나 걱정거리. 고민…그런 거 싹 다 날아가는 기분이야. 웃는게 참 보기 좋아.” 말과 함께 꺄르르 웃는 나와는 달리 어째서인지, 얼굴에 남아 있던 옅은 미소기가 사라진 채 나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하는 령우. “평생 나 웃는 것만 보게 해줄 수도 있는데.” 그리고 곧, 내가 다시 령우에게로 시선을 돌릴 틈도 없이 마저 말을 이었다. “너만 옆에 있으면.” 그 말에 멍하니 령우를 보다가 말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는 날 향해 작게 말한다. “바보.” 쳇, 또…심장이 두근거렸어. 이제 그만, 면역력이 생겼을 법 한데 말이다. “오늘 널 따라와서 좋은 걸 알았어.” “좋은 거? 그게 뭔데?” “비밀.” 그 비밀이 대체 어떤 건지 물을 새도 없이,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띠운 얼굴로 전처럼 머리를 부비고는 멍하니 서있는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만 가자. 더 있으면 너무 늦겠어.” 그렇게 령우의 손을 붙잡고 버스를 타러 가는 내내, 아니 버스를 타고도 한참 동안 령우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굳이, 굳게 쥐고 있는 그 손을 빼내 령우를 씁쓸하게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엔…참 큰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 내가 아마…희렴이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분명 령우를 좋아했겠지. 너무 따뜻한 녀석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깜빡 잠이 들어 령우가 깨워줘서야 눈을 떴을 땐 곧 있으면 버스가 끊길 시간의 어둑어둑한 밤중. 사람이 몇 없는 버스에서 내려, 이미 불이 꺼진 대기석에 고개 숙여 앉아 있는 한 사람. 그 존재를 채고 내가 걸음을 멈춰버리긴 했지만, 희렴이 또한 인기척을 느끼곤 어슴푸레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 뒤에 덩달아 멈춰서 말이 없는 령우를 보고 이내 나를 향해 말한다. “다녀왔었는데……네가 없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올 것 같아서. 조금 늦었네.” 기다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아무렇지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아쉬워서라도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게 대했을 텐데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그 기분에 휩쓸려 화를 낼 수밖에 없잖아…. 아주 잠시 동안 희렴일 바라보다 말고 그대로 지나쳤고, 곧 나를 멈춰 세운다. “미안해.” “괜찮아. 어떻게든 다녀왔으니까. 꼭 너랑 가야하는 것도 아니었어.” 말과 함께, 붙잡혀진 손을 냉정하게 밀어내 버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화났어?” “화가 났냐구? 네가 보기에 내가 예수님, 부처님 쯤 되니? 어차피 가지 못했을 거라면 차라리 어디 가는 지 물어나 봐주지 그랬어. 어딘지 모르니까 그렇게 맘 편하게 약속을 어겨도 된다구 생각했어?” “그런 게 아니야. 오려고 했고, 왔어. 근데……” “엄마아빠한테 다녀오는 길이었어.” 더 듣지 않고 딱 잘라버린 내 말에 생각지도 못했던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희렴이. “어디 가는 거였는지…미리 말해줬으면…….” “11년 만에, 아니 돌아가시고 처음 가 본 성묘야. 그곳엘…네가 같이 가줬으면 했어. 네가 같이 가줘야만 울지 않을 것 같았고, 혹시라도 울게 된다면 위로해주길 바랐어. 너를…, 엄마아빠한테 소개도 해드리구 싶었다구…….” “……미안해.” 그래. 그러니까 같이 가주지 못한 사실이 더 미안해지겠지. 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오히려 이토록 더욱 모질게 녀석을 밀어붙이고 말았다. “은예림한테……정말 가지 않아 줬으면 했어. 너도 나도 그만큼이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직도 남은 게 있다면, 그게 대체 뭐니?” “…….” 오늘은 나도 참지 말아야지, 내가 화를 내야 다음부터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런 마음이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은예림과 있던 동안, 내가 그렇게 말을 하는 동안, 또 나를 기다리던 동안이… 희렴이에게는 어떤 기분이고 어떤 시간이었을 지를. “생일, 혈액형, 취미, 좋아하는 것……. 그런 것들로는 안돼. 그런 것만으로는 너를 이해하기 너무 힘들어. 내가 모르는 네가 너무 많아.” 말과 함께…한없이 수그러져있는 희렴이를 매정하게 지나쳤다. 뒤도 보지 않고 그대로 버스정류장까지 뛰었다. 이 정도는 너두 아프지 않지, 원희렴. 내가 맘고생 한 거 너두 반만 느껴봐. 그런 철없는, 어리숙 한 투정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이미 지나쳐 가버린 다희로 인해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는 희렴 앞으로 령우가 한 걸음 다가가 말한다. “어딜 다녀 온 거냐.” “……다희랑 같이 다녀와 줘서 고마워.” “그 말을 내가 왜 너한테 듣는 건데. 너한테 들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 령우의 말에 희렴의 얼굴에 미묘하게 씁쓸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답지 않게, 언제나 무미건조했던 얼굴엔 잔뜩 지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희렴을 알면서도 령우는 다시금 한 마디를 뱉어냈다.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하는데…… 너 이런 식이면 내가 가만있을 이유 없어. 만날 울리고 혼자 두면서 지켜주긴 뭘 지켜주겠다는 거야? 처음부터 다희를 좋아하긴 했어? 아니면 은예림이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변 한 거야?” “변하는 건 없어. 다만 난…, 가슴이…아플 뿐이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 애한테 너무 미안한, 그 뿐이야. 내가 대체 뭘 어떡해야 하는 건지, 누가 좀 알려 줬으면 좋겠어.” 자꾸만 떨려오려는 목소리를 내심 가다듬고 억눌렀다. 어떤 말이든 듣고 싶었다. 굳이 따뜻한 위로가 아닌 냉정한 충고의 말이라도 달게 듣고 싶은 희렴의 마음을 령우 또한 분명히 눈치 챘다. 허나 애써 아무런 동요 없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말 더 이상 나한테 하지마라. 더는 네 약한 부분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아. 위로해주고 싶지 않으니까.” 언제나 서로에게 허물없이 가장 좋은 친구였던 그가 내뱉은 익숙지 않은 말에 희렴이 초점 흐려져 버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너까지 이러면 나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고……친구는 친구잖냐.” 힘에 겹게, 간신히 말을 내뱉은 희렴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린 령우가 고개 숙인 채 묵묵히 그의 앞을 지나쳐 걷다말고 일부러 모진 한 마디와 함께 희렴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니가 내가 되면 꼭 그렇지 만은 않을 거다. 이제 나도 더는 놓칠 수 없는 이유가 생겨버렸거든.” 그렇게…뒤돌아 멀어진 령우를 바라보다 어느새 혼자 남아 버린 썰렁한 터미널에 ‘하’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쉰 채 바닥에 내려앉다가 그대로 누웠다. 그날따라 크고 환하던 달 때문에…좀처럼 울 것 같은 그 얼굴 을 가릴 수 없어 두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눈물은 감출 수 없었다. “제길…, 어떡하냐. 난 정말…어떻게 해야 하냐…….” 있는 힘껏 뛰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해보니 고작 15분가량 지난 후였다. 혹여, 짧지만 길게 느껴졌던 그 시간 동안 다희가 가버렸을까하는 의구심은 예림과 서있는 내내 한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온 자신에게 어서오라고 말해주며 어깨를 토닥여 주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으로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내고 뛰었다. 그러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까 그곳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평소처럼 웃으며 자신을 반겨줄 다희도, 안양행 버스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7.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하고 통금시간 지켜야 한다.” 얼마 전부터 자주 보아온 광경으로, 매일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께 허락을 맡은 희렴이는 자습도 빠지고 학교를 나간다. 그렇게 나갔다 들어오는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통금시간을 비껴나가는 9시 전후. 며칠이 지나도록 희렴이와 나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는데…, 녀석 또한 내게 말을 붙이기는 커녕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너 또 밥 안 먹었지?” 창가로 희렴이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느라 멍해진 나의 이마를 톡톡 치며 앞의 책상에 앉는 령우. “으응, 먹었어.” “근데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밖에 뭐 있어?” “아냐! 아무것도.”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의아한 듯이 창가 쪽을 바라보는 령우를 말리려 애써 돌아앉았다. 그리고 문득, 그날 밤 희렴이가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하. 뭐라구?” “돌아올게. 아주 잠시면 돼. 꼭 돌아올게. 그때까지만 있어줘. 아무데도 가지 말고…조금만 기다려줘….” “…나 정말 네가 이해 안 가려고 해. 아직도 그 애 좋아해?” “아니야, 그런 거.” “그런데 대체 무슨 용서를 받겠다는 거야? 어차피 헤어진 사람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게 용서를 구하고 사죄를 받아야 할 일이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 좀 해봐!” “…….” 나의 다그침에 무슨 말을 할 듯 입을 떼다가, 곧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굳게 다물어 버린 희렴이가 원망스럽기만 했던 그날 밤. 끝내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이 여느때보다 잔뜩 쳐진 어깨로 돌아서버린 그날로부터 딱 나흘째. 오늘도 어김없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이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리며 더딘 걸음으로 걷는 희렴이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더럭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래?” “나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 “에? 어디……”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령우는 제쳐두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뛰어 나가 교문 앞까지 도착했을 때, 희렴이를 태운 택시가 이제 막 출발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음 차로 뒤를 좇았다. “앞에 차 좀 따라가 주세요.” 다행이도 무리 없이 희렴이가 탄 택시를 따라갈 수 있었고. 차에서 내린 희렴이가 잠시 멈춰서 있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고층 건물에 자리한 카페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 또한 얼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안으로 들어서며 가게 안을 살폈을 때… 창가에 마주 앉은 희렴이 와 은예림의 모습에 대충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차피…알고 있었던 일이라 별로 놀랄 것도 없었던 나는 그저 별 감흥 없이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와 줘서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서며, 얼굴에 옅게 홍조를 띠우는 그 아이. 그에 비해, 다소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희렴이는 그런 은예림을 한번 바라보고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안 나올 줄 알았어.” 그리고는 말없는 희렴이가 난감한 듯이 앞에 놓인 찻잔만 매만진다. “한번쯤은 네가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 매번…왜 그렇게 말이 없니.” 한참을 그 상태로 앉아만 있다가, 마지못해 꺼낸 듯한 은예림의 말에 창밖을 응시하던 희렴이가 고갤 돌려 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매 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할말 없어.” 둘 사이에선 언제부터 이런 분위기가 오가기 시작했을까. 더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에 얼굴색이 흑빛이 되어버린 그 애가 잡고만 있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한숨과 함께 작은 한 마디를 내뱉어냈다. “그럼 내가 할까.” 아무런 동요 없는 표정으로, 그저 가만히 은예림을 마주 보는 희렴이. 그러라는, 혹은 말라는 짧은 대답조차 없는 희렴이를 다소 감당하기 힘든 듯이 쳐다보다 입을 뗐다. “나 들었어. 너, 그…다희라는 애 처음부터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라는 거.”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 또한 흠칫 놀라고 그제 서야 희미하게나마 이맛살을 찌푸린 희렴이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대꾸한다. “누가 그런 소릴 해.” “아니라고 말하려는 거면 그만 둬. 너 처음에 그 애 사귄 거, 다 나 잊어보려구 억지로 사귄 거였다며? 내가 볼 때 넌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여자친구처럼 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네가 정말 그 앨 좋아하기라도 하는 듯이 착각을 하구 있는 거라구.” 하,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기막힌 말들에 머리가 아찔해지기 까지 하다. 때마침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종업원이, 순간 앉아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의자에 기대 비틀거리는 나를 향해 놀란 듯이 묻는다. “어머, 손님 어디 불편하세요?” “아…아뇨, 괜찮아요.” 생각보다 큰 종업원의 목소리에 당황한 내가 혹여 두 사람이 보기라도 할 세라 고갤 숙이고 빠르게 카페를 나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은예림의 그 말에, 희렴이가 어떤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그저 가만히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어. ※ “착각…이라구.” 예림의 그 말을 천천히 되 읊어 보던 희렴을 향해 예림이 확신하듯이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 생각해봐. 정말 그 애랑 나랑 같아?” 내심 얼굴 가득 부정의 대답을 바라는 눈치를 숨기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예림을 향해 희렴이 짧게 대답했다. “달라.” 대답을 듣는 순간 예림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가 오래 머물기도 전에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너완 달라. 아픈 것을 감추느라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않아. 슬프면 슬프다고 말해. 그리고 사랑하면…사랑한다고 말해. 솔직한 아이야.” 때문에 잠시나마 웃음 짓고 있던 그녀의 입가가 천천히 굳어갔다. 하지만 희렴은 아랑곳 않은 채 오히려 예림을 더욱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너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솔직함에 끌린 거야…. 네가 떠나고 난 뒤 혼자남아 있던 나는, 아주 약한 남자였으니까―” 예림이 그 말에 덜덜 떨려오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혹여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단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럼 그땐 나 대신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는 거였니…?” “그랬을 거야, 아마. 하지만 그게 지금의 ‘강다희’ 가 아니라 정말 아무나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선 반드시 너에게로 돌아갔을 거야.” 예림은 지금 그 단 한 마디로 희렴의 결심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애써 믿으려 하지 않았다.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참았다. 가슴 속에서부터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 잔을 움켜잡으며 입을 뗐다. “그럼 그 아이니까……” “돌아갈 수 없어. 미안해. 너한테는……평생 미안해 할 거야.”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려는 희렴의 옷깃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가지마! 내가 했던 말…, 단순히 겁주려고 했던 말 아니야.” 하지만 희렴이 굳게 움켜잡힌 손을 천천히 밀어냄으로써 예림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구어 졌다. 아직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듯한 눈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자신을 올려보는 그녀를 바라본 희렴이 흔들림없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리고 곧 바램이자 부탁인 몇마디와 함께 예림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이렇게 너를 보는 일은 다신 없었으면 좋겠다. 내 기억 속에 너는 아직도 여리고 순수한기만 한데… 그 기억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모두들 한창 자습중일 시간에 선생님들의 눈초리를 피해 아무도 없는 복도, 희렴이 방앞에 꾸그리고 앉아 녀석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무거운 걸음 소리로 계단을 오르던 희렴이가 나를 보고 멈춰서며 말한다. “왜 여기에 이러고 있어. 쌀쌀한데.” 말과 함께 입고 있던 재킷을 내 어깨에 둘러주는 희렴이를 보면서, 나는 이미 대답을 뻔히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 애 만났니?”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치고, 이내 대답조차 힘에 겨운 듯 가까스로 고갤 끄덕인다. 그 한순간에… 그 사실이 왜 그렇게 울컥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도 화났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인정해버리는 모습도 싫었다. “사실은 아직도 그 앨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내 그 말에 처음으로 동요하는 표정으로 미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본다. “솔직하게 말해봐.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흔들리는 거 아니야? 네가 싫어 헤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아쉬운 거잖아!” “입 닫아.” 꽉 다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 나를 향해 냉정하게 내뱉어진 그 한 마디에 말을 멈춘 나에게 말한다. “그런 미운 말 하는 거 너답지 않아.” 나의 그 말은, 가뜩이나 흠이 나버린 희렴이의 가슴에 더욱 깊이 상처를 낸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속에 담아 둔 말들을 모질게 쏟아냈다. “그치만……그만큼 내가 힘들어, 나쁜 자식아. 너는 왜 항상 나한테 기다리라고만 해. 나도 이젠 멍청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거, 이력이 난다구…….” 그런 나의 투정에, 자신 또한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 속 깊은 속의 이야기를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하는 희렴이. “나도 힘들어. 네가 이러지 않아도 힘들어. 정말 죽을 만큼…힘에 부쳐.” “대체 뭔데…. 그런데도 네가 나한테 말하지 못하는 게, 대체 뭔데?!” 더 이상은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고, 그렇게…한참의 흐느낌 외엔 조용하기만 하던 복도. 그런 정적을 게워내기라도 하려는듯이 방문 너머,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인 희렴이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마지못해 방안으로 들어서는 희렴이. 어두운 방안에서 유일하게 환한 핸드폰 액정에 떠오르는 이름, 은예림 석자가 내게도 보였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도통 끊길 줄 모르는 벨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드는 희렴이. “여보세요.” 희렴이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다소 긴박한 듯 간간이 들려오는 목소리.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건 지는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말을 듣는 희렴이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쉴 새 없이 흔들려온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곧 나의 물음에 답할 새도 없는 듯이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희렴아, 원희렴!” 빠르게 따라나섰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학교를 벗어나 어느새 눈앞에서 멀어져 버렸다. 그렇게 아주 조금…마음에서조차 멀어진 듯 했다……. - K대 부속 병원입니다. 환자 휴대폰 통화목록에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은예림씨 아시죠? 조금 전에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오셨거든요. 그런데 다른 보호자가 연락이 안 되서요. 가능하면 지금 빨리 와주실 수 있나요?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8. “자살시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카페 안에서 그렇게 많은 수면제를 복용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다행히 주위에서 즉시 신고해서 위기는 넘겼구요. 환자 깨어나고 한 번 더 진찰해서 이상 없을 시엔 후엔 바로 퇴원 가능합니다.” 그나마 말을 하던 간호사마저 나가버린 병실 안은 조용했다. 희렴은 그저 주먹을 굳게 쥐고 서서 예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대체 왜!!!” 거칠게 물었지만, 두 눈을 꾹 감은 채 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답을 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이내 손에 잡힌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로 무너져 내리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있으면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아 될 수 있는 한 주먹을 다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넘친 눈물은 그가 고개 숙인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네가……미워지려고 해.” ※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르니?” “예. 모르겠어요.” “후…, 그래 알았다. 혹시라도 희렴이한테 연락이 있으면 바로 말해주렴.” 통금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제 그렇게 학교를 뛰쳐나간 희렴이는 12시를 넘기고, 또 수업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전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 참 왜 그러는 지. 갑자기 왜 때 지난 반항아 노릇을 하고 있답니까?” A반 선생님께 꾸벅 고개 숙이고 교무실을 나서려던 찰나 들려오는 선생님들의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주춤했다. “원희렴이라면……원래 안 그러던 학생이었지 않아요?” “아, 원래야 착실했죠. 근래 들어 왜 그러는지 저번 파출소 사건도 그렇고…. 하여간 문젭니다, 문제.” “무슨 사정이 있는 거 아닐까요?” 각자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는 선생님들을 뒤로한 채 교무실을 나왔고. 천천히 교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와중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다희야.” “찬휘야…….”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부터 가쁜 걸음으로 내게로 다가서는 찬휘.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날 향해 씩 웃으며 말한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오랜만에 돌아본 교정은 계절을 느끼기 가장 쉬운 장소다. 학교 안 군데군데 심겨 있는 소나무와, 처음 녀석들을 만나던 장소인 벤치 옆 아카시아 나무만이 유일하게 초록빛을 띨 뿐, 잎이 무성하던 꽃나무와 잔디들이 어느새 누릇한 빛을 띠며 말라간다. 새삼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자판기에서 금방 뽑은 따뜻한 캔 음료를 불쑥 내밀며 말하는 찬휘. “그새 많이 말랐네. 마음고생이…심한 거지?” “내가 마음고생 할 일이 뭐가 있어~” 천연덕스럽게 웃어 넘겼지만, 애써 웃음 짓는 내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해보였을 것이라는 것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로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다가, 한참만에야 찬휘가 어렵게 입을 뗐다. “지금 네가 많이 힘들다는 걸 알아서 강요할 수는 없지만… 희렴이도 힘들다는 걸 너도 알아주길 바래.” 물론…알 것 같아. 희렴이가 많이 힘들 것도 알 수 있어. 그런데…근데 찬휘야…….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기적인가봐. 언제는…그런 희렴이를 얼마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서 어느새 그 앨 힘들게 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나봐. 나는 아직도 겁이나. 지금 네게 이렇게 희렴이의 마음을 대신 전해 들으면서도 불안해하는 건, 어쩌면 벌써 내가 희렴이를 믿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몰라. 내 마음이 그렇게 얄팍했던 건지도 몰라……. “나는 그 자식을 너무 오래 봐와서 알고 싶지 않은 것 까지도 알게 돼. 가령 지금 같은 때엔… 무작정 다희 너를 위로할 수 없어서 곤란할 정도로. 나는 그 녀석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이 어떤지 알아. 그래서 너를 바라보는 희렴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도 알아.” 대답이 없는 나를 보며 진지하게, 약간의 애원조로 말을 이어나가는 찬휘. “처음에 희렴이가 너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할 땐 사실 믿지 않았어. 너를 보는 표정이 은예림을 대할 때랑 달랐거든. 근데 언제부턴가… 달라졌어, 너를 보는 눈이. 물론 달라진 그 눈도 은예림을 볼 때와 같진 않지만… 적어도 그게 너를 그 애보다 많이 좋아해서라는 것쯤은 알 수 있어. 희렴이를 믿어봐. 너를 실망시킬 녀석 아니야.” “고마워. 고마워, 찬휘야.” 딱히 이렇다 할 대답 없이, 그저 고맙다는 내 말에 씁쓸히 바라보는 찬휘였다. 때마침 친 종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나 덤덤히 교실로 향했고, 나를 보고 다가선 령우에게 말했다. “나 잠깐 핸드폰 좀 빌려주라.” “핸드폰? 왜?” “문자 하나만 보낼게.”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령우를 의식하며 조금은 서툴게 문자를 보내고 짐을 쌌다. “나 오늘도 조금 늦을 거 같아. 혹시 선생님이 찾으시면 대충 얼버무려줘. 응?” “또 어딜가려구? 어제도 그렇게 나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서려는 내 손을 붙잡아 멈춰 세우는 령우. 얼굴 가득 드러난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바라보는 령우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제 그만하려구.” “뭐를?” “나는 나만 아프다고 생각했는데…그것도 아니었어. 희렴이도 아프고, 그 애도 아프고…령우 너도 아프고. 무의미한 거잖아 이거. 더 길어지면……그땐 다시 웃을 자신이 없어, 령우야. 그러니까 내가 다녀와서도 웃을 수 있도록 너도 기도해주라. 부탁할게…….”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을 내 의미심장한 말에도 그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령우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교실을 나왔다. 내가 아무리 그 녀석을 좋아한다지만 더는 무리야. 언젠가… 떠난 사람 뒷모습에 허덕이는 희렴이를 바보 같다 말했었는데, 나까지 그럴 순 없잖아. 나마저도 언제까지나…은예림한테 흔들리는 희렴이를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잖아. 그래서 나는 자신 없지만 슬슬 준비를 하고 있어 찬휘야. 더는 희렴이 없이도 아무렇지 않을 준비를. ※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예림이 눈썹을 찌푸렸다. 익숙지 않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물먹은 솜처럼 한없이 무겁기만 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아직까진 울렁거림과 어지러움에 온전치 못한 정신이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확인하고 생각했다. 그가 왔을 지를. 아무도 없는 병실 안에서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던 와중 어디선가 작게 진동소리가 울려왔다. 드르륵― 희렴의 핸드폰이었다. 그의 것이 자신의 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와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림이 엷게 미소 짓다가 이내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본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나 다희야. 내 생일 때 갔었던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가만히 그것을 보는 예림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희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단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잠시 망설임으로 이지러진 그녀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가까이 들려온 걸음소리에 핸드폰을 베개 맡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문을 연 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희렴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죽는다니까 와줬네. 니가 겁이 나서 온 거든, 동정을 해서 왔든…난 나 좋을 대로 생각할래.” 하지만 자신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동요 없는 표정의 희렴을 향해 다시금 한 마디 했다. “너 지금 날 보는 표정이 어떤 지 알아?” 마치 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혹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묵묵히 채워둔 물병을 올려두고 밀린 침대 시트를 정돈하는 희렴이었다. “마치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을 때 너를 생각하면서 지었던 딱, 그 표정이야.” “차라리.” 그러다 말고 들고 있던 물병을 더욱 세게 움켜쥔 희렴이 천천히 예림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이내 잠겨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차라리…지금 깨어나지 말지. 깨어나도 잠들어 있는 척 하지, 왜…왜 일어나서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랬더라면 너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을 텐데, 왜…왜 네 스스로가 너를 미워하게 만들어…….” 자신의 말을 끊고 이어진 희렴의 말에 믿을 수 없이 ‘하’ 하고 작게 숨을 내쉬는 예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깨어나지 말았어야 미안함이라도 느꼈을 거라고……말하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지금!” “차라리 왜 죽지 않았냐는 소리랑 뭐가 달라?! 처음부터 죽을 각오도 하고 왔어. 그 사람 옆에서도 죽은 듯이 살았는데, 네 옆에서라면 죽지 못할 건 또 뭐야.” 마치 실성하기라도 한 듯이 팔에 꽂혀있던 링거를 거칠게 뽑아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예림을 희렴은 그저 냉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 “하……. 많이 잔인해졌다, 원희렴.” “네가 변했기 때문에 나도 변한 거야.” 말과 함께 더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고 돌아서 병실을 나가는 희렴을 빤히 바라보며 혼자 읊조렸다. “내가…변했다구?” 거짓말이야.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대체 뭐가 변했다는 거야. 희렴이 나간 문에서 시선을 돌린 그녀가 천천히 베개 맡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잠시 동안 초점 흐린 눈으로 메시지를 읽던 예림이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메시지 함의 [삭제] 버튼을 눌렀다. ※ 수업이 모두 끝나고, 어둑어둑 해진 시간에서야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방 해가 져서 그런지 공원에는 장난치며 노는 아이들도 없고 한적한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다 말고 문득 그네에 몸을 실었다. 끼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오늘은 올 거지? 오늘만큼은…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지? 약속했었잖아, 내가 가자는 곳이면 어디든 가주겠다고. 아직 한번도 지켜질 수 없었던 약속이지만…나는 믿어, 희렴아. 올 거지……?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49. “그만 퇴원하셔도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아참, 환자 진찰해 보니까 빈혈기와 약간의 영양결핍증세가 있네요. 끼니 거르지 않게 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신경 좀 써주세요. 안정이 최우선이니까요.” “…….” 당부의 말을 거듭하는 의사에게 희렴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진찰실을 나와 병원 밖으로 나섰다. 손에는 약봉투를 쥐고, 어느덧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시내를 걷다말고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쇼윈도에 장식되어 있는 여성코트에 희렴의 눈길이 머물렀다.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 손님을 향해 가게 점원이 반갑게 맞았다.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옷 있으세요?” “저 코트, 가장 작은 사이즈로요.” “어머…선물 하시려나 봐요. 좋으시겠다, 선물 받는 분은. 누구한테 선물하시려구요?” “……여자친구요.” ※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던 예림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추해.” 거울에 비춰지던 자신의 모습이 초췌하고 볼품없게만 느껴졌다. 희렴에게 온 메시지를 삭제한 그 순간 부터,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드물게 느껴본 죄책감이라는 것 때문에 가슴이 죄어오는 답답함을 애써 모르는 척 했다. 막연히 창가를 바라보고 서있는 사이 희렴이 돌아왔다. 손에 들고 있던 두개의 종이봉투 중 한 개를 내려놓고 예림 앞에 다가섰다. “그만 돌아가도 된대.” 그리고 곧 자신 앞에 내밀어진 쇼핑백을 받아든 예림은 알 수 없는 기분에 가슴속이 휘몰아쳤다. “약 잊지 말고 챙겨먹고. 끼니도 거르지 마.” 이틀 정도 분량의 약과 금방 나가서 사온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죽.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예림을 향해 희렴이 말을 이었다. “또……아프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땐 연락해.”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물었다. “어…째서? 너 나 밉다며. 미워졌다며. 근데 또 얼굴 볼 수 있겠어?” 그 물음에 잠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어진 희렴의 말. “네가 밉다고…평생 미워할 수는 없어. 너를 사랑하겠다고 마음먹고…평생 그럴 수 없었던 것처럼. 내 뜻대로 안되는, 그런 거야. 아파하는 너를 모르는 체 할 순 없어. 그건 다희도 이해해 줄 거야.” “……하.” 가슴 속 저 아래서부터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말, 이런 기분을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옥죄던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더는 희렴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와 닿았다. “나……정말 왜 이렇게 망가진 거니.” 사랑한다고 믿던 사람. 그토록 사랑해, 그의 옆에서라면 죽는 것조차 두렵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 그런 이에게서 웃음을 빼앗아 버리고 행복을 빼앗아 버리고, 울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란 사실을 인정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함 같은 거, 책임감 같은 거… 느낄 거 없어. 나 그냥… 투정 한번 부려 본거야.”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나오려고 하지 않는 말을 애써 끄집어냈다. 분명 희렴은 많이 변했다. 자신이 사랑 하던 예전보다 더욱 멋지고 남자답게. 그래서 더욱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희렴을 너무 좋아하 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우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어떻게든 붙잡아서 곁에 있는 것만이 목표였다면, 너무 사랑하진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넌…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원희렴이 아니야. 가. 이제 다시는 나한테 오지 않아두 돼…….” 분명 내가 사랑할 때보다 훨씬 멋진 남자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그런 원희렴. 어느새 너는 그렇게 변했구나. 희렴을 바라보는 예림이 눈물 가득 맺힌 눈으로 애써 웃어 보이자 넘친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울고 있는 그녀를 모르는 체 하지 못하는 희렴이 걸음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자 예림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잠깐…아주 잠깐만…….” 간신히 울음을 참아내는 그 목소리에, 희렴이 거둬내려던 손을 멈췄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힘주어, 심장의 두근거림이 전해져 올 정도로. 그리고 곧 희렴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 그 말에 희렴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희렴을 그가 들고 있던 짐과 함께 천천히 문밖으로 밀어낸 예림이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말과 함께 문을 닫았다. “……안녕.” 닫힌건 고작, 자신 또한 곧 나가야 할 병실의 문일 뿐이었지만 마음에서건, 현실에서건 그를 몰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 앞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희렴의 발소리를 들으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 때문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흡…….” 병실의 문이 닫혀 지고 잠시 동안 멍해져 있던 희렴이 이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해서…그녀가 우는 것을 보는 건 가슴 아팠지만 지체할 새가 없었다. - 어서가. 문자가 왔었어. 생일 때 갔었던 공원에서 기다린데. 더 늦기 전에……빨리 가. 이제 더는 다희를 울릴 일도, 혼자 둘 일도, 섭섭하게 할 일도, 외롭게 할 일도……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 앉아 있다가 지치면 서있기도 하고, 입구 주변을 서성이기도 하고, 그네를 타고 흙장난을 하고. 그렇게 몇시간이나 있었을까.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공원을 밝게 비춰주던 거리의 네온사인도 어느덧 하나 둘씩 꺼져 그나마 남은 가로등 빛 외엔 어두운 공원. 그리고 정말 최악의 조건으로… 한 방울씩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옷을 적시고 바닥을 적셔가고 있었다. 얼마나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던 건지, 아무 말도 않고 있던 목이 바싹 말라 와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원희렴 넌 임마 지각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번만큼은 네가 해선 안 되는 지각 이었어….” 그러다 문득, 이젠 서있는 것조차 힘에 겨워 질척이는 모레바닥 한 가운데 주저 않아 소리 내어 울고 있는 내 머리맡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혹시나 하는 한 줄기 기대 속에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았을 때. 커다란 손이 보였다. 내밀어진 손을 따라 찬찬히 고갤 들어 올렸을 때 보인 건 안쓰러운 듯이 나를 내려다보는 령우의 모습이었다. “이제 그만 가자. 너무 늦었어.” “흣…으흡, 으…….” 때문에 목 놓아 울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빗속에서라면, 그냥 마음 편하게 울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오지 마…. 난 너한테 위로받지 않을 거야, 령우야. 그러니까 너도 날 위로하지 마. 그냥 혼자 울다 지쳐버리게, 그냥 둬.” “…그 녀석을 이해할 수 있어. 남자한테…첫사랑이라는 게,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볍지 않아. 이름만 들어도 떨리고 아무리 노력해서 잊을 수 없는 게,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는 게 첫사랑이란 걸 나도 알아서 녀석을 이해할 수는 있는데… 그런데도 내가 희렴이를 감싸주지 못하는 건, 그건…네가 내 첫사랑이기 때문이야…….” 그래서…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나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 주는 령우. 잔뜩 움츠려 있는 나를 꼭 안아주며 말한다. “이렇게 너를 울리는 그 녀석은 너무 나쁘다…….” 그렇게 말하던 령우의 품은 굉장히 따뜻했다. 그것 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 “비를 그렇게 오래 맞고 서있었으니까 무리도 아니지. 선생님께는 말씀드릴 테니 딴 데 가지 말고 푹 쉬고 있어라.” 말과 함께 주사한 링거를 벽에 잘 걸어놓고 건강실을 나서는 양호 선생님. 그때까지도 령우는 그저 말없이 묵묵하게 내 옆을 지켜주고 있을 뿐. 추위에 얼어있던 몸이 따뜻한 전기장판에서 녹아드는 걸 느끼며 스르르 눈이 감길 때였다. 벌컥 하는 문소리와 함께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잠시 멈춰서 내 얼굴을 바라보다…주춤주춤 내 앞으로 다가서는 희렴이를 향해 낮게 경고하는 령우. “나가.” 하지만 그런 말에도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서는 희렴이를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서버리는 령우다. “네가 어떻게 다시 여기 와서 다희 얼굴 볼 생각을 하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렴이는…비에 젖어있던 나보다도 슬픈 눈을 하고서 오로지 나만 응시할 뿐이었다. “희렴이랑 할 얘기가 있어, 령우야.” 그 말에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린 령우는 희렴이 옆을 스치고 나갔다. 희렴이와 나 둘만 남은 방. 잠시 동안의 정적 끝에 나를 향해 작게 말한다. “……미안해, 늦어서.” 더는……미안하다는 말로는 안돼, 이 자식아. 언제부턴가…넌 너무 늦어. 지각이 너무 잦다구. “아니야. 나도…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 그래서…네가 오고 있는데 걸려버린 시간동안, 난 지쳐버리기 시작했어. 네가 온 만큼, 나는 뒤로 물러 서버렸다고…….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그 자식은, 그 말에 희미하게 웃음을 짓고 있다. 그게 어떤 뜻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은 듯이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넌……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가 있는 거야?” 그게 너무나 속상했던 나는 웃고 있는 희렴이를 향해 그렇게 물었고, 당황한 듯한 희렴이는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처연히 바라본다. “알아. 니가 그 앨 정말로 좋아한 건 알겠는데, 어떻게…그 애가 돌아왔다고 해서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니. 너도 누구든 상관없었어? 그 애만 잊을 수 있다면, 남은 상처를 받든 말든 네 알바가 아니야? 좋아한다구, 내가 좋다구 했었잖아. 이럴 거였다면 내 맘 그냥 모른 체 해버리지 그랬어. 조금도 틈을 주지 말지 그랬어. 이래선……네가 그 애한테 받은 상처를 나에게 똑같이 되새겨 주는 거야…….” “아니야……. 내 말 들……” “듣고 싶지 않아. 너는 왔어야 했어. 한번쯤은 나한테 와줘야 했어….” “널 좋아한다고 생각한 이후로… 단 한번도 그 애한테 흔들린 적은 없어. 흔들린 게 아니야. 그건…….” “그럼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는 거야…? 많이 힘들 땐 나한테 기대구 위로받아도 되잖아. 왜 너는…, 내가 너한테 그렇게 못 미더운 사람이었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젖는 희렴이. “이제 너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그만하고 싶어.” 나는 그런 희렴이를 향해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똑바로 올려 보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까……넌 아닌 것 같아. 평생 은예림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해놓고 나에게 와버린 네가, 그러고도 이미 한번 은예림한테 다시 흔들린 네가…… 언제까지고 나만 좋아해준다는 보장도, 다른 누구한테 흔들리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잖아. 널 어떻게 믿어.” 그 말은…마치 길이와 강도를 알 수 없는 칼 같아서…여린 희렴이의 가슴을 찌르고 도려낸 것만으로도 모자라 다시 나을 수 없을만큼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내 말에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기는 희렴이. 그리고 곧…아무렇지 않은 듯 텅 비어버린 눈동자에서 투둑하고 한 방울의 눈물만 남겨두고 방을 나가버렸다. “미쳤어. 미쳤어, 강다희…….” 어떻게, 어떻게 희렴이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0. “대체 무슨 얘길 한 거야? 나한테라도 좀 속 시원하게 털어놔봐.” 며칠 째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학교 안에선 교실에만, 그 외엔 언제나 방안에 박혀있는 나를 찬휘가 찾아왔다. “희렴이가 이상해. 며칠 째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안 자. 그리고 너도 이상해. 대체 무슨 얘길 했기에 그런 거야?”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 나가겠다는 듯 자리를 잡고앉은 찬휘를 외면하는 것도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내가 찬휘를 마주보고 앉았다. 더는 닦달하지 않고 내가 먼저 이야기 꺼내기를 차분히 기다리는 찬휘를 향해 굳게 닫혀있던 입을 뗐다. “더는 믿을 수 없다고 했어.” “뭐를.” “희렴이를…. 한번 누군가를 버린 네가 날 버리지 않으리란 보장을 할 수 없어서… 더 이상은 믿을 수 없으니까 그만두자고 했어, 사귀고 좋아하는…그런 우스운 거.”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이야기 인 듯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찬휘가 굉장히 덤덤하게, 그렇지만 무게 있는 어조로 내게 물어왔다. “그래서……헤어지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 좋아하던 마음이, 깨끗이 정리 되는 거 같아?” 알고 있던 거지만 찬휘는 너무 똑똑해.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하지만, 그것보다도 사람 마음을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나는 그게…조금 겁이나. 더 이상은 희렴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잘할 자신이 없어서, 들통 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서 고개 숙이고 있는 나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누구보다도…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서투른 희렴이를 가장 잘 아는 네가 그 녀석한테 상처를 줬다는 건……정말 실망이다.” 말과 함께 나가버린 찬휘로 인해 덩그러니 방안에 혼자 남아 앉아있게 되버렸다. 차라리 누군가 속시원 하게 나를 욕했으면 좋겠다. 한 대 때려서 정신이라도 번쩍 들게 해주면, 그럼 나 망설임 없이 희렴이한 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갈 텐데 그러지 못하는 건… 희렴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희렴이를 믿지 못하는 내 옹졸한 마음 때문일까. “여기 있었어?” 그러고 있던 와중 더럭 문을 열고 들어온 령우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손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나가자. 종일 방에만 있잖아. 나가서 TV볼래?” “그냥 방에 있고 싶어.” “아니면 산책을 하던지 나가서 뭘 사먹던지.” “령우야. 나 지금 그럴 기분 아니야. 나 좀 그냥 둬.” 다소 신경질적으로 붙잡혀진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은 이미 령우의 굳어버린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은 사실. “그럼 매일 방구석에 이러고 처박혀 앉아 있을 거야? 정신 차려. 이럴 거면 희렴이한테 왜 그런 소린 했어? 감당 못할 일을 어쩌자고 벌려놓고, 이게 다 뭐하는 행동이야?” 참다못해 본의 아니게 언성이 높아진 듯, 스스로 말해놓고 숨을 몰아쉬며 엄한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령우. 하루 종일 방안에만 있으면서, 말도 없이 우울해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면서도. “미안. 미안해, 령우야. 난 정말…내가 희렴이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내가 정말 미쳤었나봐. 더 웃기는 건…희렴이가 화를 안냈어. 그런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는 거야. 충분히 화내구 소리를 질렀어도 됐는데 그러지 않아서, 나는 그게 더 마음에 걸려. 마음이…아파.” 눈물을 떨어트리고 방에서 나가버린 그 뒷모습이, 낫지 않을 상처로 돌아선 희렴이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우는 거야. 빨리 그 모습을 흘려내게, 씻겨내려고 그래서 자꾸 우는 거야. 작게 웅크리고 숨죽여 우는 나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작게 말하는 령우. “그렇게 미안하고 죄책감 느껴할 거면… …그런 말을 하지 말지 그랬어.” 그러게 말야. 왜 감당하지 못할 짓을 해서 상처를 주고 가슴 아파하는 건지 나조차도 모르겠어. 더는 상처받고 싶지않을 뿐이었어.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정말 한번이면 족해. 기다리는데도 이제 진저리나. …그렇게 작은 방에 훌쩍이는 내 소리와 령우 또한 더는 위로도 해주지 못하고 그런 나를 그저 내려다 볼 뿐이던 무렵이었다. [알립니다. 교내에 있는 강다희 학생은 방송을 듣는 즉시 교무실로 와주기 바랍니다.] 방송으로 울린 나를 찾는다는 그 소리에 그때다 싶어 빠르게 방을 나서 교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내 뒤를 쫓았고. 교무실에 도착하자, 선생님이 건네주시는 수화기를 어색 하게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안녕….] 그리고 들려 온 것은 그 애의 목소리였다. ※ “정말 괜찮대도.” “괜찮긴 뭐가 괜찮아. 걔가 널 왜 보자는 건데? 그리고 나오는 너는 또 뭐야.” 버스를 타던 내내, 또 내려서 걷는 내내 내 옆에 붙어서며 투덜거리는 령우의 얼굴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도 그럴 것이, 별안간 나에게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이 은예림이었다는 것과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더럭 나와 버린 내가 불만인 듯 약속한 장소까지 함께 따라 내린 령우. “이제 그만 돌아가. 나는 얘기하구 갈게.”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릴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여기까지 함께 나온 것부터가 막무가내였듯, 요지부동 자세로 카페 앞을 지키고 선 모습에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는 나를 보고 있었던 듯,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 선 그 아이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나와 줘서 고마워.” 예쁘고 예쁘던 그 얼굴이 그새 많이 헬쓱 해진 채로 힘겹게 웃어 보이는 은예림. “희렴이가 아무 말도 안했니?” 그리고 대뜸, 그렇게 물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가만히 그 애의 얼굴을 바라보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려버린 나를 향해 작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역시…그럴 줄 알았어. 정리할 시간을 달라는 핑계였어. 그 애의 거절 못하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할 얘기가 뭐야?” 조금은 매정하다 싶을 만큼 딱딱한 어조의 내 물음에 마주보던 시선을 내리깐 채 그리고 곧, 입술이 떼이지 않는 지 한참 동안 물을 마시다가 탁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놓고 잠긴 소리를 끌어내 듯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자살 시도를 했어. 이번이 두 번째야.” 그 말에 내가 천천히 고갤 들어 올려 마주보게 된 얼굴.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던 은예림의 얼굴은 생각보다 담담해서…보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죽으려고 결심했던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어차피 죽은 것만 못하게 살 삶이라면 어떻게든 희렴이를 붙잡겠다고, 절대 놔주지 않을 거라고. 근데…그 녀석 안에 더 이상 나는 없나봐. 날 보면 흔들리고, 안타까워서라도 나에게 돌아올 거라고,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구.”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잘 감이 오진 않지만 확실한 거 하나는 이 아이는 아직도 희렴이를 많이 좋아하구 있구나. 말로써나 눈빛으로써나…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고 하는 나한테 조금도 감추지 않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올 수 없다고, 그런 말을 했어.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 애가 널 좋아해.” 그 말을 하던 은예림의 목소리는 계속 불안정 했는데 그 떨리던 목소리로도 두 손을 꼭 모으고 말을 이어나가던 그 모습이 내겐 참 이상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은예림이 포기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절실한 희렴이의 마음을 왜 나는 믿어주지 못했던 걸까? 왜…애써 웃어보이던 그 미소 뒤에 감춰져있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던 걸까.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에도, 계속해서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들 을 이야기하는 은예림. “네가 희렴이한테 보낸 문자도 내가 지웠어. 그래서 늦은 거야. 희렴이가……말 안했지?” “뭐…?” 내가 믿어주지 못한 희렴이. 한번도, 한번도 희렴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어. 기댈 수 있는 틈도 시간도 주지 않은 건 나야. 은예림의 말이 계속 될수록 의지와는 상관없이 젖어가던 눈시울에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이렇게 희렴이를 힘들게 한 건… 나로도 족해.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만 나로선 어쩔 수가 없었어. 솔직하게 희렴이가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내 생각보다 너의 존재가 희렴이 안에서 큰 가봐. 내가 희렴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만큼…….” 조금…조금만 더 일찍 말해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말을 내뱉었는데, 믿어달라던 희렴이를 끝까지 믿어주지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희렴이한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난 이미 희렴이한테 상처를 줬어. 내가 무슨 낯으로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시 웃을 수 있겠어.” 무슨 생각으로 그 애에게 그런 말을 했던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물음을 해버린 것에 대해 조금은 놀란 듯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던 은예림이 말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그것만으로도 네 잘못 같은 건 묻지 않고 웃으면서 반겨줄 사람이 바로 그 애라는 건……너도 알잖아.” 그 말이 끝마쳐지기 무섭게 더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나설 뻔한 것을, 다시 고개를 내젖고 앞에 앉아 있는 그 아일 향해 말했다. “…고마워, 말 해줘서.” 그 말에 그저 마지 못하는 얼굴로 웃어 보이던 은예림의 눈가가 이미 한참 전에서부터 붉어져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네가 꼭……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말을 하며 카페를 나서던 나를 그저 가만히 쳐다보던 그 아이. 문을 나서기 전 슬쩍 뒤 돌아 보았을 때,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내려는 듯이 입을 꼭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는 은예림의 모습을 보아서…잠시 멈춰서 있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해. 가서 희렴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그 생각뿐이었다. 카페를 나오기 무섭게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쪽으로 나가는 나를 보고 내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우는 령우. “얘긴 다했어?” “어떡해, 어떡해 령우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지금…지금 당장 학교로 가야해. 빨리.” “왜 그러는데? 뭘 알아야 어떻게 하든지 하지. 무슨 얘길 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어, 령우야. 다녀와서 말해줄게. 응?” 령우의 물음에 제대로 얼굴도 보지 않고 대꾸하며 도로에 드문드문 다니던 택시 때문에 조급한 심정을 어쩔 줄 모르던 사이. 간신히 반대편에서 멈춰선 한 대의 택시를 보고 지체 할 새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좀……다희야! 강다희!!” 뒤에서 긴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령우의 목소리를 분명 들었는데, 일단 저 쪽으로 가고 나서 돌아봐도 된다는 우스운 생각으로 길을 건너던 찰나였다. “강다희, 멈춰!!”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승용차가 커다란 클락션 소리와 함께 어느새 바로 코앞으로 들이닥친 순간 나도 모르게 굳어져 버린 다리 때문에 그만 두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만 순간. 무엇으로 인해 인도 쪽으로 밀쳐 넘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내가 서있던 자리에서 나 대신 공중으로 떠오른 령우의 모습이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http://cafe.daum.net/bearnangman) 51. 눈을 의심했었다. 순간 잘못 본거라고, 다시 두 눈을 비비고 봤을 때도 변한 것은 하나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공중으로 떠올랐던 령우가 털썩하는 무딘 소리로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 그거 하나. “아…….” 머리가 멍해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놀란 사람들이 질러대는 비명소리나 곧 몰려든 엄청난 인원의 사람들도 수군거리며 ‘어떡해’를 되뇔 뿐 쉽게 다가서는 사람은 없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을 질질 끌며 령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는데…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두 눈을 꾹 감은 채 누워있는 령우. “도, 도와주세요…, 그렇게 보지만 말고 누가 좀 도와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제…제발 누가 좀…….” 그제 서야 몇몇의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들어 도움을 청했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누워있는 령우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령우야…, 정신 차려봐. 응?” 하지만 눈을 감은 령우에게선 조금의 미동조차 없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가십거리 라도 되는 듯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떠드는 사람들, 걱정 반, 흥미 반의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가운데 령우를 꼭 부둥켜안고소리쳤다. “쳐다보지 마요!” 미안해. 미안해, 령우야. 사람들이 너를 이런 눈으로 보게 해서 미안해. 그러고 있는 사이 경찰과 구조대 가 왔고 빠르게 들것에 실려 나가는 령우를 좇는 나를 붙잡아 세우는 구조대원. “다치신 것 같은데 일단 응급처치부터…….”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빨리, 빨리 병원에 가주세요. 네?!” 정신없이 매달리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구조대원을 따라 차에 올랐고. 령우를 태운 구급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던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차가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또 도착하고 나서도 응급실 밖에 령우를 기다리는 내내 간절히 빌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아픈 령우를 더욱 아프게 하지 마세요, 라고. “다희야!” 때마침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오신 선생님이 나를 보고 뛰어오신다.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니?” “아, 제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도 진찰을 받아 보자. 응? 세상에, 이 상처 좀 봐.” 아니에요, 선생님. 이 까짓 건 아무 것도 아니라구요. 저는 고작 이 상처뿐이지만, 령우는 저 때문에 몇 십 배는 더 아프고 있잖아요. 선생님이 의사의 동의를 얻어 응급실로 들어가시고, 혼자 남은 내가 털푸덕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가운데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곧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천천히 고갤 들어 올리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이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닫아주는 희렴이. 때문에 그동안 나오지 못했던 눈물이 한순간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나 때문이야. 령우 저렇게 된 거 다 나 때문이야, 희렴아. 령우가 가지 말라고, 멈추라고 했을 때 멈춰야 했는데. 내가 듣지 않아서, 그래서…흑…….” “령우가 대신 치인 거라구…?” 차마 대답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소리 내어 울 수 가 없어서 참다가 결국엔 어깨를 들썩이는 거리는 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나, 울 자격도 없는 거지…? 그렇게 또 한참 동안 말없이 누군가 들여보내주길 기다리며 대기석에 앉아 있는 사이, 응급실에서 나오는 담임선생님과 담당의사. 그리고 그 뒤로 령우를 실은 침대가 일반 병실로 옮겨지던 참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령우를 바라보았을 때.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령우를 보며 더럭 의사의 옷깃을 잡고 물었다. “많이 다친 거예요?” “나중에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어깨탈골과 무릎 골절, 간단한 타박상 정도고 특별히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그, 그런데 왜 안 일어나는 거죠…? “그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으니 일시적인 증세로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 크게 걱정하실 것은 없고요. 좀 더 자세한 상태는 환자가 깨어나면 말씀드리도록 하죠. 그럼 이만.” 짧디 짧은 의례적인 말과 함께 응급실을 나서는 의사 선생님. 순간 다리에 힘이 쫙 풀린 것을 느끼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고. 일반 병실로 옮겨진 령우는 아직도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희렴아.” 선생님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고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던 상황. 조용한 병실에 울려 퍼진 내 목소리에 천천히 고갤 돌려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아직도 생생해. 눈앞에서 차가 달려왔는데…움직일 수가 없었어. 령우가 멈추라고 말했는데 듣고도 뛰어가던 날 구하느라 령우가 대신 치인거야. 조심하지 못한 내가 벌 받는 건 당연한데…그게 왜 나 대신 령우였을까?” “…계속 말하지 않아도 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무서워서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어째서 령우는 나 같은 애 때문에 대신 뛰어들 생각을……” 다시금 차오른 눈물 때문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바로 코앞까지 가까웠던 차가 보이는 순간 굳어진 몸은 움직일 줄을 몰랐고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던 그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나를 밀어 내던 령우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아. 다시 목이 멜 정도로 숨을 죽이며 우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 다보다가 작게 말하는 희렴이. “녀석이 널 많이……좋아하잖아.” “좋아하면 그래? 자신이 다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야…? 정말 조금이라도 날 생각해준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결국 이렇게 되어버려서…령우 너에게 너무 미안해서 고개조차 들 수가 없잖아. 그리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에 들어오신 선생님. “다희 너도 빨리 치료 받아야겠다. 여기엔 내가 있을 테니 희렴이랑 같이 다녀오도록 해.” “령우는……괜찮데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시다 말을 이으신다. “무릎 관절 사이가 심하게 손상된 데다가 뼈마디가 아주 조각이 나버려서 짧게는 4주에서 6주 정도 병원 신세를 져야한다는 구나. 목발이나 휠체어 없이 정상 생활하는데도 6개월은 걸릴 거라고….” 그 말에 결국 나는 또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어버렸고. 빠르게 나를 일으켜 의자에 앉히는 희렴이. 담임선생님도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시다가 부모님께 연락조치를 취하겠다는 핑계로 다시 병실을 나가셨다. 선생님이 나가시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내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말한다. “정신 차려. 네가 이러면 안 되잖아.” “어떡해. 내가 어떡하면 좋아, 희렴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누워있는 령우를 응시하며 말하는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마주 잡고 똑똑히 말하는 희렴이다. “잘 들어. 네가 이러면 안돼. 령우는 곧 깰 거야. 그러니까…걱정하지 말고 있어.” 그 때 느낀 것은…지금 이런 나에게 희렴이가 곁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말로 표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제 서야 나는 제대로 희렴이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은예림한테…들었어. 그래서, 빨리 너에게 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 내가 너를 믿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해서, 너한테 상처를 줬다는 게…, 난 그게…….” “내가 아팠던 건 그래서가 아니야.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난 널 아프게 했구나, 너를 힘들게 했구나. 네가 많이……슬펐겠구나. 난 그게 가슴이 아팠어.” 말과 함께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는 희렴이. 나는 다시 또 하나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이 녀석은 그런 사람이었지. 다시 나을 수 없는 가슴으로도 사랑을 하는 사람. 찢기고 너덜너덜 해진 가슴으로도, 다시 그 모난 유리조각을 끌어안는 사람. 나 또한 희렴이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눈물을 묻는 사이 희렴이가 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치지 않고 있어줘서……고마워.” “나를 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워…….” 겁에 질려 작게 오그라들었던 심장이 다시 제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희렴이에게서 들려오던 불안정한 삼작박동의 소리와,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그 품 안에선 눈물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있던 것도 잠시, 내가 차츰 진정을 되찾자 흐트러진 내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넘겨주며 희렴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서 치료해야지. 혹시 이상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 “령우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데…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아.” 고개를 내저으며 병실을 나설 기미가 없어 보이는 나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쉰 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지못해 희렴이가 말했다. “그럼 약을 가져올게. 기다리고 있어.” “으응. 다녀와.” 희렴이 마저 병실을 나서고 령우와 단 둘이 남은 병실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초침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적막하던 병실 안에서 그저 멍하니 잠들어 있는 령우의 얼굴 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 전부이던 그때. 순간 미약하게 움직임이 느껴지는 손. 그리고 곧…아주 천천히 힘에 겹게 부스스 눈을 뜨는 령우. “령우야 정신이 들어?” 눈이 부신 듯 잠시 이마를 찡그렸다가 이내 빛에 익숙해진 것처럼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런 령우를 보자 안도의 한숨과 눈물이 핑 도려는 것을 꾹 참으며 다짜고짜 소리쳤다. “너……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아냐구? 이러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니? 고맙다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줄 알았어? 넌 정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혹시, 혹시라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정말 죽을 각오로 네가 깨기만 기다렸다구 이 자식아.” 아직 정신이 온전하지도 않은 령우에게 언성을 높혀가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시끄러운 내 목소리에 살짝 눈썹을 찌푸리던 령우는 다시 말없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 볼 뿐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마. 무서웠단 말이야…….” 그리고 곧 그 외침이 점점 미약해져 투정 섞인 울먹임으로 변해갈 무렵 령우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넌 누구야?” “뭐……?” 그 말을 들은 순간…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상황을 처음으로 몸소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멍하니. 더 그 어떤 말도 잇지 못하고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령우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뭐…뭐하는 거야. 지금 나 놀리려고 장난치는 거지……?” 나를 마주보는 내내 무표정을 하고서, 정말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이 하는 령우로 인해 애써 힘주어 버티고 서있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릴 무렵… 순간 울음을 참지 못하는 어린 아이 같은 표정으로 머리맡에 올려진 베개를 끌어당겨 얼굴을 가린 채 령우가 하던 말.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랐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냥 너를 잊었으면 좋겠다고. 근데 아니었어. 처음 느낀 고통에 아파죽겠는 순간에도… 몇 시간을 의식 없이 앓아누워있던 제정신이 아닌 그 상황에서도 네 얼굴은 또렷이 기억이 나더라. 빌어먹게도 네가 보고 싶더라. 그래서 일어났어. 장하지, 나……?” 그런 말을…울고 있는 눈으로 애써 억지로 웃으며 힘들게 말하던 령우를 보던 그때에…나는 생각했었다. 더는 너를 아프게 해서도…또 울게 해서도 안 되겠구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제정신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너 지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몰라?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끔찍하단 말이야! 무섭게 왜 그래, 정말….” 그 말을 하던 령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꼭 깨물고 서서 망설이고 있는 내게 령우가 말한다. “그 정도로 절실해, 내가 지금.” “더 이상 미안하게 하지 마. 나 이미 얼굴도 들 수 없을 만큼 너한테 충분히 미안해. 자꾸 그러지마…….” “그렇게 미안하면…까짓 거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거잖아……. 불쌍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내 옆에 있어주면 되는 거잖아…….” “그런…문제가 아니잖아. 미안하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왜 자꾸…그러는 거야.”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떠듬떠듬 말을 더듬으면서도 애써 담담한 척 말을 이어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소용없었다. 필사적으로 내겐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리고 있는 사이로 보이던 령우의 눈물은 한없이 나를 약하게만 만들었다. 점점 더 잦아들어가는 령우의 자신 없는 목소리는 나를 너무 아프고 슬프게 했다. “졸업할 때까지만. 아니 1년만, 다 나을 때까지만. 그것도 안된다면 6개월만, 한 달만…하루만…한 시간만…일 분만…, 일 초만…, 내 사람으로 나랑 있어…….”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2.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령우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손에 구급상자를 들고 들어서는 희렴이. 그러다 이내 눈이 마주친 령우를 보고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띠우며 말한다. “깨어났?” “……어.” 그리고 다시 조용해진 가운데 문득 내게 말하는 령우. “다희야.” “응?” “희렴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잠깐 자리 좀 비워줄래?” “아…, 그래. 얘기해.” 사실 두 사람의 대화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 불편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병실을 나왔다. 병실의 문이 닫히고 달리 걸음을 돌릴 곳이 없어 복도에 앉아 있다 말고 어지러운 머리 를 식힐 겸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문득 1층 로비를 나가던 참이었다. “아직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대기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공중전화 근처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짐짓 걸음을 멈춰선 것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수화기를 들고 있는 반대편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 채 눈을 감고 통화중인 선생님.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피해자 측이랑 통화는 해봤는데 어떻게 될 지는…. 아, 부장님까지 오실 건 없구요. 반령우 학생 부모님께 연락 좀 취해주시겠어요?” 그냥 지나쳤어도 되는 대화이지만… 통화가 끝나면 령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그대로 서있었을 뿐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악재가 겹치는지 모르겠어요. 머리가 좀 아프네요. 학생 상태요? 그게…전치 6주는 될 것 같아요. 근데 의사 말이 완쾌 되도 전처럼 달린다던가, 정상적인 생활에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해서…, 대체 이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휴…….” 다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혹,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선생님과 마주칠까 그대로 뛰어 로비를 나갔다. “어머, 학생 괜찮아?” 앞도 보지 않고 막무가네로 뛰어나가는 바람에 어깨가 부대낀 아주머니가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괜찮냐고 묻기 전까지 뛰었다. “괜찮아요…….” 고갤 숙여 인사를 하고 다시 달리려던 걸음에 힘을 주어 간신히 멈춰 섰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는 고작 이 정도에 눈물 흘릴 정도로 아픈데 령우는 얼마나 아플까. 하나님,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요? 누가 좀 가르쳐 주세요. 더 이상 울지 않을 수 있도록. ※ 다희가 나가고 한참동안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희렴은 령우가 말하던 할 말이라는 것이 어떤 것 일지 몹시 궁금해 했지만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갤 숙인 령우를 바라보던 희렴이 먼저 입을 뗐다. “많이 아프냐.” “당연하지. 뼈가 다 으스러졌는데 너 같으면 안 아프겠냐.” 그리고 이어진 부루퉁한 대답에 요 며칠 사이 느껴졌던 왠지 모를 불편함이 가신 것 같은 마음에 한결 밝아진 기분으로 령우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 소리 들을 이유가 뭐있냐. 좋아하는 여자애 지키자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 하지만, 곧 무표정하게 대꾸하는 령우로 인해 결국은 다시 침묵으로 이어졌다. 둘 다 쉽게 입을 뗄 수는 없었다.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나 희렴이 문득 궁금해져 올 무렵 령우가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너는 알지.” “뭐를?” “내가 너 많이 좋아했다는 거…….” “무슨 소리야, 갑자기.” “기억 안 나냐? 왜, 중학교 1학년 때… 오락실에서 내가 너 테트리스 하는 거 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할 수 있냐고 알려달라고 했는데 네가 대답도 안하고 그냥 나가버렸잖아. 친구하자고 했는데도 무참히 씹고. 그게 존심 상해서 오기로 네 뒤를 쫓아다니면서 친구가 된지 벌써 5년이다…….” “그때 얘기는 왜 지금 와서 꺼내. 기억도 안 난다.” 문득 꺼낸 이야기에 희렴이 멋쩍게 웃었다. 말을 하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령우 또한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난 아직도 생생해. 그날 이후로 분명 나한테 너는,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은… 최고의 친구였는데 말이다.” “…나도 그래. 나한텐 ‘친구였는데’가 아니라…, 아직도 최고의 친구야.” 희렴의 그 말에 잠시 서로 눈을 맞추다가 이내 령우가 고갤 돌렸다. 이미 양심 같은 건 다 버리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 할 자신은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쓰디쓴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무언가를 다시 깊숙이 집어삼키며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데 그래.” 아직도 얼굴엔 어렴풋한 웃음을 띠운 채, 무엇이든 말해보라는 듯이, 마치 다 들어주겠다는 듯이 웃는 희렴을 보며 다시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부탁은…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한테 다희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면서도 내가 포기가 안돼. 기를 쓰고 노력해도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아. 처음이자 딱 한번만…네 걸 욕심낼게. 그 애가…내 옆에서 웃었으면 좋겠어. 니가 한번만 날 봐주라. 딱 한번만…, 도와줘. 나 정말…, 5년 넘게 알아온 너한테 이렇게 더럽고 지독하게 굴 정도로 그 애가 좋다. 다희가……나 정말 너무 좋다.” 령우는 알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야 만 자신을 바라보던 희렴이 애써 흔들림을 감추기 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린 눈동자가 얼마나 큰 고민을 하고 있는지. 분명 자신이 그토록 오래 알아왔던 그라면… 이런 자신의 눈물에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는 것과 그렇다고 선뜻 자신이 포기하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다희에 대한 희렴의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것 또한. 그래서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서 입술을 깨물어 버리고 마는 희렴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괴로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그 오래던 우정이 무색할 만큼 낯선 침묵이 감돌았다. “사실 이런 말에 고민 같은 거 할 필요 없는데.” 그리고 그 침묵을 일깨운 것은 작게 읊조린 희렴의 목소리였다. 령우 또한 창가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희렴은 아까의 고민이 역력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한참전과 같은 엷은 미소를 띠운 채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내 소중한 친구지만, 다희는… 그 애는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머리가 포기해도 마음이 포기 못하는,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나도 이렇게 지독하게 굴잖아. 결국엔 의를 저버린 파렴치한 놈에 불과하지만…….” “근데 나는.” 희렴의 그런 말에, 얼굴에 미묘하게 드러나던 망설임을 끝내 저버리고 씁쓸한 웃음과 함께 말을 내뱉는 령우를 가로 막은 채 희렴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너도 소중하고 다희도 소중해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춘 희렴이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있는 령우를 똑바로 보며 말한다. “만약……다희가 너에게 가겠다고 하면 그땐 내가 노력해볼게. 네가 그랬던 것처럼…기를 써서라도 포기해보도록.” 힘들게 이어진 희렴의 말에 령우의 얼굴에 번졌던 난감한 기색이 곧 어이없는 듯한 작은 숨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런 령우를 보는 희렴의 얼굴은 더욱 묘연하게 굳어졌지만 령우는 알길 없이 작게 조소를 띠운 채 읊조렸다. “네가 조금이라도 현실성 있는 말을 해줬다면 감동이라도 받았을 텐데 이건 화만 난다. 제길, 어깨까지 쑤시려고 하네. 그만 나가라. 쉬고 싶다.” 그리고 곧 희렴에게서 등을 돌린 채 머리맡 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럴싸하게 말을 돌려 버릴 뿐, 결국은 자신을 놀리는 바와 별 다를 리 없는 말에 울컥하는 것을 느낀 령우였다. 만약 희렴이 완강하게 다희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 좀 더 쉽게 미련을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희렴의 태도가 마치 가진 사람이 부리는 오기처럼 느껴졌다. 그때에 령우는 이미 다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깨닫고 있는 희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 다음날, 한참을 망설이다 병실 앞에 섰다. 오늘은 아무렇지 않게 령우를 대할 수 있을까. 또… 태연한 척 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문고리를 잡았다. “뭐……” 하지만 병실로 들어서던 참, 안에서 느껴지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는데 병실에는 먼저 도착한 선생님이 령우를 마주본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령우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고, 령우 또한 커다란 손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쓸어 내렸다. “의사 선생님이 그래요? 저 많이…다쳤다고?” 그리고 들려온 령우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애써 담담한 척 힘주어 말하는 령우가 보기 힘들었다. 선생님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을 거야. 다만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려서 그렇지… 문제없을 거라고 했어. 물론 한동안은 병원에 있어야 하고 걸을 수는 없겠지만 병원에서 재활 치료도 열심히 받고 그러면…….” 여태껏 아무렇지 않은 척, 잘 들고 있더니 결국은 ‘하’ 하고 작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깨무는 령우. 다시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된 나로서는 순간 입을 꼭 틀어막았다. “선생님, 제가요…….” “그래 말해봐.” 마치 선생님께서 죄인이라도 되는 듯이 눈을 맞추시지 못했지만 령우는 그런 선생님을 향해 말했다. 말은 선생님께 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허공을 바라보는 령우의 눈은 다른 무언가를 향해있었다. “일 곱살 때부터 무서운 게 없었거든요. 그렇게 무섭던 강아지도 언젠가부터 하나도 안 무섭고 호통 치는 사감님도, 곧잘 때리는 아버지도…또 이렇게 사고가 났지만 차도 무섭지 않은 데요. 딱 하나 두려운 게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뭔데…?” 마주본 선생님을 향해 해맑게 웃는 령우. 하지만 곧 그 웃음은 무척이나 힘에 겨운 표정으로 변해 조심스레 물은 선생님을 난처하게 만든 듯 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진 령우의 말에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로 뛰어든 순간도 그랬고, 지금도 아픈 것도 잘 모르겠지만… 다희가 이런 얘길 듣게 되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미안해 할 것 같아서…, 저는 그게 걱정이고 그게 제일 무서워요…….” 말을 듣기 무섭게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작은 틈새로 새어나왔지만 그 말의 깊이나 아픔은 너무 커서 닫아버린 문으로 감출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더는 안돼. 령우를 더 이상 아프게 할 수가 없어…. 더는 령우에게…그만 다가오라고 말 할 수도 없어요. 이미 령우는 더 이상 전처럼 쉽게 다가올 수 없을 테니까. 다친 다리와 다친 마음에 평생을 그 자리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를 더는 모르는 척 할 수 없어요. 내가 령우에게 받았던 것들을 돌려줘야 할 때가 아마 바로 지금일 거예요. 이제 내가 그 앨 위해 한걸음 다가설 차례인 거예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서서, 차마 병실에 들어가지는 못한 채 대기석에 앉아 있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왜 여기 있어?” 선생님께 허락을 맡자마자 바로 온 건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둘러맨 채로 내 앞에 서는 희렴이. 때마침 해가 지던 데다가, 희렴이가 서있던 곳이 서쪽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뒤에서 비쳐지는 태양빛에, 올려다 본 희렴이가 그 어느 때보다 눈이 부셨다. 잠시나마 가늘게 눈을 뜨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를 마주보는 그 검고 또렷한 눈동자가 이렇게 깊었나 싶을 만큼 빤히. “무슨 일 있어…?” 그런 내가 걱정이 됐는지 따뜻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는 희렴이. 그 걱정하는 얼굴이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해서 좋아하지만,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없어.” “그런데 왜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야 안 들어가고.” “음, 그냥…널 기다렸어.” “나를? 왜?” 생각지 못했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희렴이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보고 싶어서. 우리, 오랜만에 어디 놀러가지 않을래?”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No.1｀낭만곰탱이＊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3.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웃으며 말하는 나를 묵묵히 쳐다보는 희렴이.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표정이 당황함도, 의아한 기색도 아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 변화로 나를 보는 눈동자가 한순간에 이지러진 듯 보였는데 곧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래. 그러자.” 멍하니 서있는 내 손을 굳게 잡고 병원을 나섰다. 그저 말없이 걷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가고 느꼈을 무렵, 잡고 있던 손을 더럭 놓으며 말하는 원희렴. “네 손에서 밍식밍식한 땀 나. 눅눅해.” “밍식…눅눅…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게 어딨어!” “손수건을 대고 잡자.” “됐어, 안 잡어!” 별안간 들려온 솔직한 녀석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이 부루퉁하니 나왔고. 잡기 싫으면 말라는 듯이 그대로 휘적휘적 걷는다. 하여튼 두 번 권하는 예의를 몰라…. “어디 갈까. 노래방? 카페?”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목적지를 묻는 희렴이. 그러고 보니 딱히 어딜 가겠다는 생각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섰다. “으음, 그런데 말고 그냥 조용한 곳.” “조용한 곳?”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곰곰이 뭔가를 떠올리는 듯 생각한다. 그저 가만히 서로 바라보고, 오랜 시간을 말없이 있어도 방해받지 않을만한, 그런 곳. 잠시간의 생각 끝에 물어온다. “일몰 보러갈까?” ※ “근처에 바다가 있어?” 희렴이를 따라 버스를 타고 가던 와중 물었다. “여기서 내려서 유람선을 타고 가면 작은 섬이 하나 있어. 알 사람들만 아는 작고 조용한 곳.” “아아…….”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배를 타기 까기 위해 걷던 와중 다시 내 손을 꼭 잡는 희렴이. 내가 또 녀석을 올려다보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손…잡자.” 흥. 하여간 응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니까. 라는 생각과 함께 못이기는 척 그대로 손을 잡은 채 걸었고. 희렴이 말대로 작은 유람선에는 그렇게 많지 않은 소수의 사람만이 타있었다. 이제 움직이려는 배에서 오랜만에 바닷바람을 쐬며 잔뜩 신이 났고. “그렇게 좋아?” 문득 물어오는 희렴이. “뭐가?” “제주도에 있으면 바다 자주 봤을 거 아니야. 근데 너무 좋아하는 것 같길래.” “오랜만이니까. 거기 살 때는 바다를 보는 게 그렇게 특별한 일이라고는 생각 안했는데 막상 육지에 사니까 바다 볼 일이 별로 없잖아. 와, 바람 좋다…….”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바람을 손으로 가르는 나를 보고 엷게 웃으며 말한다. “자주 오자.” 때문에 다시금 희렴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는데… 그것은 몹시 이해하기 힘든 오묘한 표정이었다. 그 말을 하는데 굳이 그토록 애틋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 이상하다 느낄 만큼, 그 말을 하던 희렴이의 눈가는 여느 때보다 젖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러자.” 다른 대답을 하면 어쩐지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섬에 도착하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해가……벌써 거의 다 졌네.”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10월에는 낮이 짧아서 벌써 어둑어둑 해져 보고 싶어 온 일몰을 볼 수 없었다 는 것. 결국에 멍하니 서있는 내게 말하는 희렴이. “걸을까?” 인적이 드문 해변가를 걷는다는 건 참 기분이 묘하다. 더군다나 유난히 말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인지 평소보다 말이 없어진 우리는 그저 묵묵히 걷고만 있었을 뿐. “저기, 죄송한데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다른 누군가 말을 건네 오기 전까진 말이다. “아, 예. 찍어드릴게요.” 가족여행을 온 듯 한 네 식구의 엄마가 한 부탁에 흔쾌히 카메라를 받아들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주고 카메라를 건네던 참, 나와 희렴이를 번갈아 보며 말씀하시는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둘이서 여행 오셨나본데 괜찮다면 한 장 찍어드릴게요.” “예? 아니 괜찮……” “찍자.” 손을 내저으며 거절의 말을 꺼내던 나와는 달리 흔쾌하게 내 옆에 나란히 서는 희렴이. 때문에… 어설프게 미소 지어보였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 당겨 손을 잡는 희렴이. 그 틈 타 살짝 올려다 본 희렴이가 너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웃어보였다. 됐어.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환한 웃음을 봤으니까…이만하면 충분히 만족 스러워. “현상하면 보내드릴게요. 주소 적어주시겠어요?” 예기치 못하게 사진을 찍게 되고, 꼭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아주머니께 학교 주소를 가르쳐 드렸다. “히히, 사진이 이쁘게 나왔으면 좋겠다.” 히죽이죽 웃으며 말하는 나를 보고 엷게 미소 짓다 말고 또 무슨 심술이 도진 건지 무표정하니 대꾸하는 희렴이. “얼굴이 크면 사진이 잘 안 나온데. 그리고 어제 운 것 때문에 눈이 부어서 더 안 나올걸.” “또 그렇게 내 성질 긁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스러운 말을 해대는 녀석을 향해 슬쩍 눈을 흘겼고. 그런 내 볼을 쭈욱 잡아 당기며 하던 말. “그러니까 다신 울지 마.” 그 말에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게 된 상태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이제 춥다.” 웃으며 한 내 말에, 마치 잊고 있던 뭔가가 떠오른 듯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 쇼핑백을 내미는 희렴이. 받아들기 이전에 쇼핑백과 희렴이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물었지만 대답 없는 희렴이는 어서 받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멋쩍게 받아든 쇼핑백. 다소 서투르게 그것을 열어보았을 때……그저 손에 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나를 보다가 이내 대신 집어 들고 내게 걸쳐준다. “제일 작은 건데도 크네. 그새 또 말랐나보다.” “옷은 갑자기 왜……” 내 물음에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희렴이. “네가 혼자 걷는 걸 보면 위태위태해 보여서. 언제나 얇은 옷만 입고 추위에 떠는 모습이 싫어서…… 네가 좀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 네가 더 강해지면 좋겠어.”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한 기분에 나는 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눈가가 시큰해지고 코끝이 찡해져왔다. 가슴도 먹먹해졌다. 안간힘을 쓰며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집어삼키고 있을 즈음 희렴이가 물어온다. “네 이름의 ‘희’자는 빛날 희를 쓰지?” “응.” 내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피식 웃는다. 그리고 곧,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잘 어울려. 너한텐 항상 빛이 나.” “비…, 빛은 무슨! 놀리지 마.” “진짜야. 옆에 있으면 이렇게……주위까지 환해지거든.”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는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의 얼굴이 왜 그리도 슬펐던지, 그건 아마도 녀석의 웃음과 더불어 내 가슴이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멍하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너도 잖아, 빛날 희.” “달라. 난 너처럼 빛이 나진 않거든.” 짧게 대답하는 희렴이를 향해 빠르게 고갤 저었다. 그렇지 않아. “아니. 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러니까…… 눈이 시렸어. 넌 보고만 있어도 눈이 부신 사람이야.” 아주 우연히 버스에서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또 지금까지도 넌 언제나 내게 바라보는 것도 힘들만큼 멀게 느껴질 정도로 눈부신 사람이었으니까…. 그 말에 희렴이는 그저 미소 띠운 얼굴로 나를 바라 볼 뿐이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환해지던 사람.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 사람. 언제부터 우린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을까.’ 하지만 그건 참 이상할 만큼 익숙지 못한 일이었다. 마치 이별을 고하는 사람처럼, 희렴이는 내게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을 해주었으니까. 나는 못내 그게 두려워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희렴이 한테 인사를 해야 했으면서도. 한참을 말없이 해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눈이 시리면, 가만히 고갤 돌려 물끄러미 서로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러기에도 시간은 짧고 짧았다. 그렇게 있다가…마지막 배가 운항을 준비할 즘 이었다. “희렴아.” “응.” 나에게는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바로 대답하는 희렴이. 못된 녀석…. 조금이라도, 아주 잠시라도 더 바라보게…더 함께 있게…더 망설여도 될 시간을 줘도 괜찮았을 텐데. 그런 희렴이를 조금은 원망스럽게 생각하며 떼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나……나 말이야. 아마 다시는 이렇게… 우리 둘이서 놀러오지 못할지도 몰라. 둘이 같은 옷을 맞춰 입거나 단 둘이서 카페를 간다거나 하는 거…… 지키지 못할 거야. 아마……” 어떻게든 울고 싶지 않아서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간신해 했던 말인데,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듣는 희렴이는 미소 짓고 있었다. 웃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 었지만 입가에 미미한 웃음은 띠운 채. 때문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내 볼을 쓸어주며… 희렴이가 말했다. “알아. 말로 하지 않아도 네 맘 같은 건 다 알아. ……말하지 않아도 돼.” 거짓말. 알면서……다 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말해.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버렸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무릎 안에 가두고 가뒀지만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눈물방울은 가릴 방법이 없었다. “나빴어. 너 정말 나빴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보내주지 마. 마치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만 같아서…티내지 않으려 마음 고생했을 너를 떠올리면 울 수밖에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내 거친 울음이 차츰 흐느낌으로 변해 잦아들 때까지 희렴이는 꼭 안아줄 뿐이었고.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한참만의 침묵 끝에 매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 돌아갈게.” “다녀와.” 하지만 이어진 희렴이의 말에 나는 다시 입술 끝까지 올라온 울음을 집어삼켰다. 아무 말도 못하고서, 그저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는데 그런 나를 보며…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넘겨주며 하던 말. “꼭……돌아와. 기다릴게…….” 알지만, 이제 너무도 절실한 희렴이의 진심은 어느새 둔한 나에게까지 와닿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다시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차마…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서 그대로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뿌옇게 시야를 가리던 눈물을 달리면서 떨어트려냈다. 혼자 남아 나의 뒷모습을 지켜 볼 희렴이를 돌아볼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아예 눈물이 멎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은 다 안다고 했지. 그럼 들을 수 있겠네. 다시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해 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가슴속으로 소리쳐. 들어. 아주 크게……널 볼 때마다 외칠 테니까 들어야 해. 사랑해. 사랑해, 원희렴. 그렇게 나는 다시 희렴이를 혼자 남겨 두고 돌아왔어요, 아니 돌아서 버렸어요…….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4. “정말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제는 익숙하게 휠체어를 다루는 령우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런 나의 눈빛을 이해한 령우는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 말라니까.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 보니 정말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어. 의사 선생님도 허락하셨는데 뭐. 너는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 그런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나는 어느새 웃는 것을 대신으로 무마하고 병실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대신 짐을 꾸리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불현듯 물어오는 령우. “요즘엔 그 코트만 입고 다니네. 좋아하는 옷이야?” “아, 이건…….” 별 것 아닌 물음이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대답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을 즘, 때 마쳐 퇴원 길에 마중 나온 선생님과 찬휘, 두 사람. “수속은 다 끝냈니?” “예. 정리 끝나면 가도 좋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잠시 원장실에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시고 우리 세 사람만이 남은 가운데 령우를 향해 말하는 찬휘. “좀 살만하냐?” “당연하지. 그동안 누워 있느라고 정말 죽을 맛이었어. 이렇게 절실히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 령우의 퇴원이 반갑지만 사실 못내 가슴 한 켠이 무겁기도 하다.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난 지금, 학교가 끝나면 곧장 병원으로 오고 통금시간 바로 전에 돌아가고 하는 일상에 어느덧 익숙해졌으니까. 그치만 그것보다도…우연이라도 마주치게 될 희렴이를 대할 자신이 없어. “와…, 이제 좀 살 것 같다.” 어느덧 도착해서 오랜만에 학교에 발을 딛는 령우. 비록 직접 발 닿아 걸을 순 없지만 돌아왔다는 자체로 싱글벙글. 선생님과 찬휘가 짐을 가지고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나와 령우도 이제 막 학교 안으로 들어서려던 참…교문 앞에 마중 나와 있는 아이들. 같은 반 아이들을 비롯, 꽤 많은 사람이 서있었는데도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 그의 얼굴을 본 나를 멈칫 굳어 설 수밖에 없었고. 령우 또한 멍하니 바라볼 뿐인 가운데, 희렴이가 말을 건넸다. “이제 괜찮은 거냐.”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에 령우 또한 조금은 어색하게 말했다. “응. 오랜만이다.”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령우야!” 그저 멀찍이 세 사람 모두 말없이 서있기만 한 가운데 령우를 부르시는 선생님. “사감선생님이랑 학생주임 선생님들이랑 너 빨리 오라고 난리도 아니시다. 같이 들어가자.” 라는 말과 함께 령우가 탄 휠체어를 끌어당기셨다. 웃음으로 대신 답하고 가려다 말고 문득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채 묻는다. “같이 안 가?” “아, 나는……” 굳이 가지 않을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망설이고 있었고 그런 내 모습에 기다리듯 잠시 서있다가 도무지 떼일 줄 모르는 나를 연신 돌아보며 선생님과 함께 멀어져 갔다. 또…상처를 주고 말았어. 멀어진 령우를 보고 가슴 찡해하다 말고 슬며시 올려본 희렴이 얼굴. 우연이었던 건지, 어쩌면 희렴이는 처음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마주친 눈에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그만 가볼게. 나중에 봐.” 그렇게 다시금 아무렇지 않은 척 희렴이에게서 돌아설 무렵. 문득 귓가에 들려온 소리에 짐짓 걸음을 멈추었다. “다 낫는데 시간 깨나 걸린다더니 벌써 왔네?” 그저 여러 무리 사이에서 나온, 지나쳐 버렸어도 될 시시콜콜한 잡담일 뿐이었지만. “그러게. 근데 아직도 휠체어 타고 있는 걸 보니, 저러다 아예 다리병신 되는 거 아니야?” 똑똑히 들려온 저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고 저렇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뒤돌아서서 대뜸 나보다도 한 뼘이나 키가 큰 그 아이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치며 말했다. “뭐라고 말했어, 너?” 눈을 치켜뜨며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는 나로 인해 잠시 당황한 듯도 했다가 이내 하, 하고 기가 찬 한숨을 내뱉으며 내려다본다. “뭐라고 말했냐구.” “니가 무슨 상관인데 난리야?” “무슨 상관이냐구…? 너 같으면, 누가 네 친구한테 그런 소릴 지껄여도 그딴 소리가 나오겠어? 뭐…다리병신?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지 마!” “아, 진짜 별 같지도 않은 게 뭐가 어쩌고 어째?” 어느새 운동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리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하고 이미 열이 받을 대로 받아버린 그 애를 애써 진정시키려는 그 친구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굽힘없이 노려보았고. 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긴 것 마냥 나를 보고 연신 작게 욕을 읊조리다 꺼낸 말. “꼴깝 떨긴. 여자가 저 하나라고 무서운 줄 모르고 사이좋던 녀석들 우정이나 흐려놓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꺼져.” 그저 단순한 욕 일 뿐이었다면 절대 움츠릴 이유도 없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그 말이 마치 가시처럼 가슴에 콕 박혀버려서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그 말 하나 로써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깨달은 그 아이가 내 어깨를 밀치며 욕지거리와 함께 스쳐 지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둥그러진 것은. “아, 씨발! 뭐야?!”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보다도 먼저 교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눈을 치뜨고 자신에게 주먹을 내던진 희렴이를 올려다본다. “뭐…뭐야.” “잘 들어.”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보는 그 앨 향해 희렴이가 말했다. “그 흐려진 우정이고 뭐고 사이에서도 여전히 소중한 사람, 그 사람한테 아무나 함부로 구는 거 못 봐.” 구경하던 애들도 말리지 못하고, 그저 넘어진 그 아이를 부축할 뿐이었다. 그 가운데 놓인 나는 말없이 희렴이를 바라볼 뿐이었는데…다시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서는 희렴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 보다 말고 내가 소리쳤다. “내가…주먹 쓰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 전부터 있었던 많은 일들 때문에…아직까지 학생과 지도를 받고 있는 중인데, 이 와중에 또 선생님들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많이 지치고 힘들어 할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그리고 그것보다도 그 힘든 건, 그 이유가 나라는 게…… 더욱 그래.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향해 나직이 말하는 희렴이. “저런 말 따위에 약해지지 마.” 또 왜냐고 묻기 전에 이어진 말. “이제 나한테 네가 없는 학교는 상상도 할 수 없어.” 그게 전부였다. 그게…쉽게 누군가를 욕하거나 때리지 않는 희렴이가 굳이 주먹을 쓴 이유였다. 아주 짧은 시간일 뿐이었는데도 그새 어떻게 알게 된 건지 학생과 선생님을 비롯 여러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고, 어렴풋이 둘러본 그 사이에 령우도 있었던 것 같다. “너 이 자식,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다짜고짜 희렴이 앞에 선 학생주임 선생님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고. “벌…받을게요.” 그에 희렴이는 그저 벌 받겠다는 짤막한 대답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한 선생님은 더욱 인상을 쓰시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내가 희렴이 앞을 가로 막아섰다. “저 때문이에요!” “뭐?” “저 때문에…제 말실수로 다툰 거예요. 그러니까 혼내지 마세요. 제가 벌 받을게요. 희렴이……이제 혼내지 마세요….” 제발. 제발. 제발……. ※ ‘주위 아이들 말도 그랬고 하니까 이번 한번만 넘어가는 줄 알아. 어디 한번만 더 사고 쳐봐!’ 아무것도 모르실 선생님으로선 도저히 이해 못할 내 눈물에 당황해하시다가 이내 그 말 한마디를 내뱉으시고 들어가시고 구경하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돌아갔다. 어느 덧 나와 희렴이, 그리고 령우. 단 셋이 남은 운동장에서 내가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났다. “참 네 앞으로 우편물이 와있던데 방에 가져다 놓았다.” 방으로 올라가는 나를 붙잡고 말씀하시던 사감선생님의 이야기에도 별 감흥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올라섰다. 그리고 생각 없이 집어든 편지. 조심스럽게 뜯은 종이봉투 안에 현상 되 있는 두 장의 사진. 더불어 짤막한 메모도 함께. [이제야 사진을 찾았네요. 예쁘게 잘 나와서 두 장 현상했어요. 덧, 필름도 같이 보내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우리 두 사람의 사진. 나도 모르게 사진 속 환히 웃고 있는 희렴이를 향해 미소 짓게 된다. “어쩜…뭐 이렇게 이쁘게 웃냐.” 그저 사진일 뿐이지만, 한번 꼭 안아 보기도 하고 눈을 깜빡이는 걸 잊을 정도로 바라보기도 하고.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느라 열린 문으로 령우가 들어선 것도 모르고 있던 가운데, 더럭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깨달은 내가 재빠르게 사진을 뒤로 감췄지만. 이미 한참전서부터 보고 있던 듯한 령우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다 아는데.” 뒤로 감춘 사진을 움켜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 하는 그 사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니가 갑자기 매일 병원 와서 내 옆에 지키고 어떻게든 나한테 최선을 다 하려고 한 거…… 미안함 때문이라는 것도 다 아는데, 근데… 이렇게 직접 보고 있으니까 나 어떡해야 할지,……모르겠다.” 그에 더 이상 무슨 변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저 가만히, 힘겨운 듯이 나를 바라보는 령우를 봄으로써 마주친 눈을 피했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미안해.” “그런 말 듣는 것도 이젠 진저리 나. 그런 사진 보면서 눈물 짜는 것도 혼잣말 하는 것도 싫어.” “나도,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희렴이를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 오히려 가지 말라고 붙잡았으면 괜찮았을 거야. 오히려 더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희렴이를 대할텐데 나는 그 애가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슬퍼할지 알아서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약해지고 말거야. “잠깐이야. 곁에 없어서 죽고 못 사는 그런 건 잠시 뿐이야.” “알아. 알고 있어. 그치만…” 머리와 다르게 마음은 이토록 불가항력이다.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추고 머리라고 아니라고 부정을 하고 무덤덤한 척 하지만… 작은 말, 마주친 눈빛, 사소한 행동 하나에 흔들려서 힘들게 올라왔던 100번째의 계단에서 가장 끝자락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처럼. “만약에…희렴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잠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 애 얼굴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으면, 그 따뜻했던 손이 그리워져서 외로워지는 날엔 ……나 정말 어떡하지?” 너무 잔인했던 물음이었던 걸 알지만 령우는 개의치 않는 듯 그저 더욱 꼭 날 끌어안았을 뿐이다. “괜찮아질 거야. 아마 금방……아무렇지 않아질 거야. 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그만하자, 우리.” 하지만 곧 이어진 내 매마른 목소리에 떨리는 목소리로 힘주어 묻는 령우. “……뭐를.” “우리 그냥 친구하자. 내가 정말 자신이 없어. 너도 희렴이도… 누구와도 특별한 마음 같은 거 더 이상 원하지 않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싫어. 싫다구…….” 내 어깨를 꼭 안고 있던 령우의 손의 힘이 맥이 빠진 듯 스르륵 풀리는 것을 느꼈지만, 어어떻게든 놓지 않으려 자꾸만 거듭 힘주어 안는 령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차오른 눈물을 내 어깨에 묻은 채 고개 숙인 령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되뇔 뿐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힘들거나 혹은 슬프거나 어느 때에도 공평한 것이 바로 시간이다. 괴롭다고 해서 빨리 흘러가거나 기쁘다고 해서 더디게 가지는 않으니까. 느끼고 생각하는 건 모든 사람마다 다르지 않은가 싶었다. “성적이 많이 올랐네.” 잠시 정신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내 앞으로 휠체어를 가까이 끌어당겨 앉으며 말하는 령우. “아, 으응.” “4등이라…제길, 이러면 우리 같은 반 못하잖아. 20등 이상 차이나네. 슬프다. 그지?” “……응.” 짤막하게 대답을 하는 것으로 멈춰진 대화에 입술을 슬쩍 깨무는 령우. 이런 익숙지 못한 불편함이 지속된 지 그 뒤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듯한 령우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기에 나는 또 굳게 먹었던 마음이 흔들려 우유부단한 대답을 해버리고 마는 일상. 다시 말이 없어지자 묵묵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령우가 문득 묻는다. “열심히 하려고 할 때에도 그렇게 안 된다던 공부가, 갑자기 왜 그렇게 잘 되는 건지 물어봐도 돼?” 생각지 못했던 질문에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냥…정신없이 빠져 들어서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독 될 뭔가가 필요해. 그런게…공부 밖에 없었어.” 하지만 특별한 생각 없이 했던 말과 함께 멋쩍게 웃어 보이던 모로서는 짐짓 그 웃음을 멈추고 조금 당황할 만큼, 경직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이어지던 령우의 말. “……나한테 빠지고 나한테 중독되면 되잖아.” 다시금 형성 되어버린 미묘한 분위기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된 나는 그저 멍하니 령우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 한번도 생각지 못해 봤는데. 그날따라 조용하기만한 교실을 불편 하게 느끼며 내가 입을 떼지 못하고 있던 와중, 나를 찾는 방송이 울려 퍼진 것으로 인해 상황이 종료 되었다. “그만 가봐야겠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령우를 뒤로 하고 서둘러 교실을 나왔다. 다행이야.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으니까. 숨도 쉬지 않고 교무실로 향했고, 문 앞에 다다르고 담임선생님 앞에 가서야 숨을 내쉬었다. “저 찾으셨다구….” “아, 전화 왔거든? 안쪽에 가서 받을래?” 고개를 끄덕이고, 분명 원장님 일거라고 생각하고 받아든 전화. [누나! 누나?]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반갑지만, 웃음이 나오진 않고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잠시 멍해져 있다 말고 물었다. “영웅이? 영웅이야?!” [응, 나야 누나!] 수화기 너머로 울릴 정도로 밝은 영웅이의 목소리. “자……잘 지내고 있어? 밥은 먹구? 부, 부모님은 어때? 잘 해주셔? 지낼만 하구?” 너무 반가운 마음에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지 않아 이것저것 쉴 새 없이 묻는 내 목소리에 차근차근 말한다. [우우…, 누나 하나씩, 천천히 물어봐. 다 대답해주께.] “읏…….” 왜였을까. 영웅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온 것은. 울지 않으려 해도 아무리 닦아내도 뚝뚝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별안간의 내 울음소리에 놀란 듯이 물어오는 영웅이. [누나…? 울어?] “…아냐.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반가워서 그래. 너는 인마…, 누나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 왜 이제야 연락 하는 거야?” [보고 싶어 누나. 누나두, 원장님두, 소라두 보고 싶어…….] 어떻게든 울고 있을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감추려고, 이를 악물고 한 말이었는데…수화기 너머 덩달아 울먹이는 영웅이의 목소리에, 나는 꽉 깨물고 있던 입을 벌려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그랬다. 누나두…, 그냥 영웅이랑 원장님이랑 살 걸 오지 말 걸 그랬어. 다시……돌아가고 싶다…….” 그건 분명 영웅이가 보고 싶은 이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울 수만 있었다면 울고 싶었을 뿐이었다.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돌아가고 싶었으니까…너를 몰랐던 그때로. .. 다희가 나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있던 령우가 휠체어를 움직여 교실 밖으로 나갔다. 제대로 걸을 수 없던 이후로 학교 안 어디라도 돌아다니는 것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걸을 때와,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한층 낮아진 자리로 사람들을 대한다는 것이 썩 기분 좋지 못한 일이라는 사실을 부쩍 느끼고 있었다. “제길….” 지나치기엔 조금은 높게만 느껴지는, 평소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던 문턱 앞에 짐짓 그 자리에 멈춘 채 서있었다. 그대로 멍하니 있었던 것도 잠시…천천히 고갤 들어 올리자, 중문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다시 고갤 숙였다. “기숙사로 갈까?” 마치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멈춰져 있던 자신의 휠체어를 밀며 걸음을 옮기는 희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뭐 묻었어?” 그리고 그런 령우의 시선이 이상하다는 듯이 멋쩍어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희렴을 보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나오는 한숨을 몰아쉬며 떼이지 않는 입을 열었다. “너는……내가 안 밉냐?”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날 이후, 언제나 함께 있었다는 게 오히려 거짓말 같을 정도로 말도 붙이지 않았다. 헌데 그런 자신에게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올 수 있는지. 웃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입술이 매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마주보는 희렴이 어떤 대답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들려온 대답은 잔뜩 긴장해있던 주먹에 들어간 힘이, 맥이 탁 풀리듯 했다. “무슨 웃기는 소리야. 애냐?” “개자식. 비겁한 놈.”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나온 욕지거리. 그치만 여전히 동요 없는 얼굴로. 그저 묵묵히 휠체어를 밀어 정확히 엘리베이터 앞, 버튼까지 누르고 나서야 돌아서며 말했다. “쉬어. 이만 간다.” 언제나 그렇다. 단 한 순간도 저 녀석은 솔직한 법이 없어. 거짓투성이야. 근데 난 그걸 알아서…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면 모르는 척 할 수…있을 텐데. 멀어지는 희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령우가 이내 전화기를 들어 잠시 멈칫거리다 말고 어디론가 다이얼을 누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 들려온 목소리에 대답도 앉았던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엄마…, 나 갑자기 엄마가 디게디게 보고 싶다…….” ※ “요즘 어떠니?” 교무실 안쪽 귀퉁이에서 영웅이와의 길고 긴 국제전화를 끝마치고. 울었던 흔적이라도 남을라 두 눈을 비비고서 나오는 나를 향해 물으시는 선생님. 혹여 중간에 끊겼던 전화로 인해 내가 캐나다로 국제전화 를 걸었단 사실을 아시진 않았을 테지. “그냥 그래요.” “성적 많이 올랐더라. 선생님 아주 놀랐어. 거봐, 조금만 공부하니까 되잖아. 참,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번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 볼 생각 없니?” “예…?” 당황스러운 말에 벙찐 내가 되물어오자, 얼굴에 더욱이 활기를 띠며 말씀하신다. “생각 있으면 해보라 이 말이야. 성적도 충분히 올랐고…수학여행 갈 때도 그랬고 반장 따라 이것저것 많이 도왔다며? 괜찮으면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선생님들도 다희 네 이름 한 번씩 추천하셨구. 어때 해볼래?” “글쎄, 그런 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천천히 생각해봐. 되면 좋은 거잖아. 그지?” 다소 막무가내 식으로 밀어붙이는 선생님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나의 의견을 표명할 겨를도 없이 잠자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꾸벅 인사와 함께 교무실을 나서려는 나를 또 붙들어두시는 선생님의 한 마디. “근데 요즘 무슨 일 있니?” “아뇨, 아무 일도 없는데요.” 그 사이 눈이 띵띵 부은 건가 걱정시리 눈가를 쓸고 있는데 그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신다. “요 사이에 많이 마른 것 같아서. 혹시 다이어트 하니?” “에…. 다이어트는 무슨요!” “그래? 근데 많이 말랐다. 볼 살이 피둥피둥한게 예전이 더 이뻤는데. 살 좀 찌워.” 씨익 웃으시면서 내 볼 살을 한번 찌익 늘리시고 제자리로 걸음을 옮기시는 선생님. 피둥피둥…은 과연 칭찬인건가요…. 다소 의심을 품은 내가 천천히 교무실을 나왔고. 저벅저벅. 길바닥만 보고 천천히 숙소로 걸음을 옮기다말고 멀리서부터 보이던 점 하나가, 가까워질수록 사람의 형상을 닮았고. 그 사람이 희렴이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 챈 내가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희렴이도 나도 둘 다 멈춰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그때…짧고 짧게만 느껴지던 잠시 동안의 정적 끝에 희렴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왜 자꾸……야위어.” 며칠 만에 만나는 우리가 할 수 있었던 대화는 고작 그것. 입술에 경련이 오기라도 한 듯, 할 말을 잃고서 파르르 떨려오는 걸 참으려고 깨물고 깨물다 간신히 입을 뗐다. “야…야위긴 누가. 그냥 그래 보이는 거겠지, 기분 탓일 거야. 그래두 좀 살 빠졌다 소리 들으니까 기분은 좋다. 하하…….” 실없이 웃는 나를 어쩔 수 없이 엷게 미소 띠운 얼굴로 바라보지만 젖은 눈동자로 마주보는 희렴이.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게 불편하고 어색한, 그런 사이. 눈물 나게…초라해진 관계. “아, 나 그만 가볼게. 다음에 봐!” 더 이상 눈을 마주칠 수 없던 내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애초부터, 걸음이 향했던 곳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가야했던 것처럼, 그렇게 빠르게 돌아서 교실로 향했고. 그런 기분에 수업이 머리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듣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고 더딘 걸음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문고리에 걸려있는 작은 봉지를 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집어 들어 보았을 때, 나는 결국 참을 수 없이 솟구치는 눈물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 언젠가 내게 사주었던 빵, 좋아한다고 말했던 음료수, 희렴이와 함께였을 때 사소하게 스쳐 지났던, 지금은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그런 것들. “으…흡, 흣…….” 그것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넘친 눈물에 흐릿해져서 닦아내고 또 닦아내고. 가까스로 손이 닿고 나서는, 내려놓았다가 다시 품에 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한참만에…거친 울음을 토해내며 그것들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자꾸만 목이 메어 와서,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다. 오늘도 들었어? 널 사랑한다고 가슴으로 외치던 거.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55 》 《 part¸ 1 》 그러니까…그게 언제더라. 아마 내가 일곱 살, 날 때부터 있었던 곳에서 아빠의 잦은 출장 때문에 이사를 갔을 때였을 거예요. 그곳에는 친구가 디게많았는데, 새로 이사 온 곳은 조금 낯설었어요. 며칠이 지나도록 친구 하나 없었구요…. 매일매일 공원에 나가서 누군가 말 걸어 주길 기다려보고, 먼저 말을 걸어도 봤지만 다들 내가 다가가면 슬금슬금 나를 피했어요. 예전 살던 곳에서의 나는 활기차고 명랑한 아이였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까맣고 촌스런 시골아이였으니까요. 그래서 난 늘 혼자였습니다. 그 날, 그 아이가 말을 걸어주기 전까지는요. 그날도 평소처럼 혼자 흙을 지져 밟으며 멀리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힐끗힐끗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어요. 도르르 소리와 함께 내 발치에 굴러온 작은 공과 동시에 공을 줍기 위해 내 앞으로 다가오던 그 아이를 아직도 기억해요. 주워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초라한 어깨로 그대로 뒤돌아 서던 내게 말했죠. ‘디게 나빴다.’ 부루퉁하니 입술을 내밀고 말하던 그 여자아이를 향해 당황하며 말했어요. ‘모…내가 모?’ ‘원래 멋진 남자는 여자가 움직이기 전에 달려와서 대신 주어주는 거야.’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소리를 하는 나보다 한 뺨 정도 키가 작던 그 아이에게서 그대로 대꾸 없이 돌아섰어요. ‘어어? 잠깐만!’ 그리고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멈춘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해주었죠. ‘같이 놀자.’ 잠시 멍해 있다가 곧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갔어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마치 나를 낯선 곳에서 온 이방인 취급 하던 아이들은 표정이 굳어진 채로 말했어요. ‘난 걔랑 노는 거 시러. 그냥 갈래.’ ‘나두….’ 그렇게…하나 둘씩 돌아서 버리던 아이들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아이 옆에서 참았던 눈물이 차올라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뛰었어요. 너무 창피하고 마음이 아파서, 다신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나는다짐했었어요. 한참을 달리다 숨이 차 멈췄을 때, 아까부터 나를 쫓아 달리던 그 아이를 발견 하기 전 까진요. ‘왜…왜 자꾸 따라와?’ 돌아서 나를 쫓아 달리던 그 애에게 버럭 화를 냈을 때,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앤 그런 날 울먹이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지요. ‘씨이, 따라오지 마!’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최대한 그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뜀박질을 하던 그때 철푸덕 소리와 함께 넘어진 그 아이가 보였어요. ‘우……우어어엉…….’ 그냥 가려했지만 어쩐지 픕忖봉隔?된 무릎으로 엉엉 우는 그 애가 신경 쓰여서 그대로 갈 수가 없었어요. 결국 마지못해 주춤주춤 다가가 물었지요. ‘…괜차나?’ 까진 무릎이 아픈 듯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 아이가, 멋대가리 없이 멋쩍게 내려다보며 던진 물음에 눈물을 닦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어요. ‘우지마, 내가 이거 주께. 차카다, 착해요….’ 작은 손에 꼭 쥐어져 있던 그것은…손바닥만한 해바라기 모양의 사탕.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 힘겹게 일어나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로 애써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어요.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내가 왜 그 앨 따라 덩달아 울게 됐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몇 가지 알 수 있는 것도 있었어요.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 키는 작지만 나보다 어른스럽다는 것. 그리고…웃는 모습이 눈 이 부실 정도로 이쁘다는 것. ‘어? 운다. 우지마…….’ ‘우, 우는 거 아냐! 콧물이야….’ 사실 이건 비밀이지마는요…, 나는 강아지가 싫어요. 예전에 옆집 할아부지네 진돗개에게 크게 물린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강아지가 디게디게 무서웠어요. 그치만 그날 이후로는 큰 강아지도, 작은 강아지도 무섭지가 않았어요. 그건 왜냐면…나를 향해 웃어주던 그 아이가 마치 작고 애기 푸들을 닮았었거든요. 그 날 나는 해질녘까지 그 아이와 함께 동네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애의 작은 아지트였던 아파트 뒤 공터, 해바라기 사탕을 팔던 구멍가게, 해담 공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동갑이던 그 애와 내가 몇 달 후면 들어갈 초등학교. 그렇게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함께 있다가서야 나는 문득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이름이 모야? 나는……’ 내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뒤에서 그 애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구, 얘. 여기서 뭐하고 있니……’ ‘어? 아줌마.’ 우릴 찾아 헤맨 듯 숨을 몰아쉰 젊은 아줌마가 더럭 그 애의 어깨를 잡구 말했습니다. ‘어쩜 좋니. 빨리 아줌마랑 병원에 가자. 응? 너 여기서 이러구 있으면 안돼.’ ‘왜요? 우리 어디 가는 건데요…?’ ‘어휴, 이 어린 것을 어쩌고…하늘도 무심하시지….’ 나는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을 때에.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넘겨주며 그 아주머닌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그 애를 바라보며 눈물지었어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 애도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를 나서며 말했습니다. ‘나 그만 가봐야게써….’ 나는 그 뒤를 쫄래쫄래 쫓으며 물었습니다. ‘내일도 오꺼야?’ ‘웅, 낼도 오께. 내일 봐.’ ‘……꼭 와.’ ‘응, 안녕.’ 환하게 웃으며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흔들어 흔든 채로 멀어져가는 그 아이를 보는 내 작은 가슴이 설렜어요. 그러다, 멀찍이 그 애가 멀어져간 곳을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대로 헤어져 버렸으니까요. 이름도 묻지 못한 채 말입니다. 나는 다음 날 어제 그 공원으로 가 한 발짝도 떼지 않고 그 아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어둑어둑 해지도록, 가로등만 켜진 어두운 공원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결국은 날 찾으러 나온 엄마의 손에 끌려가며 생각했어요. 아마 내일은 나오겠지?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그 아이를 만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설레던 마음으로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그해. 늙은 교장선생님의 길고 긴 말이 이어진 그 때도 반을 배정받아 뿔뿔이 흩어지던 많은 아이들 가운데 나는 그 아이를 찾아 수많은 사람들 속을 헤맸어요. 강당 안을 이 잡 듯 헤매고 다니는 꼬마아이를 잡기 위해 여러 명의 선생님들이 쫓고 쫒는 입학식 사상 유래 없던 상황이 벌어졌죠. 난 그날 내 기억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엉덩이가 부르트도록 맞고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어요. 그리고 나서도 매일매일 학교 안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다신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어요……. 끝 모를 기다림은 그날 그때부터,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 “시간 있냐?” 별안간 벌컥 문을 열어 재끼고 말하는 령우.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기도 했고. 갑자기 열린 문에 놀라기도 했기에 하던 일을 멈추고 대답을 하긴 했는데… “어, 있는데……넌 왜 항상 이 모양이야!!!” 이번만큼은 샤워하고 나서 나시 티라도 걸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대뜸 손에 잡히는 걸로다 인정사정없이 녀석에게 던졌고, 녀석 또한 다소 남루한 나의 옷차림에 민망한 듯 후딱 방문을 닫았다. 하여간 노크라는 걸 몰라. 그나마 나의 손에 잡힌 것이 베개라는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좀만 더 가까웠으면 잡혔을 선인장 따위를 던졌다면 너의 얼굴엔 구멍이 송송 났을 테니. 대충 옷을 갈아입고 문 앞으로 나가자 뻘쭘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하는 령우. “니가 그때 옷 갈아입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안 물어봤으니까 대꾸말구 하려던 말이나 하셔.-_-” “오랜만에 시내 나가자.” 히죽 웃으면서 하던 소리가 그거라니…어처구니없어진 내가 다소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네 다리는 어쩌구?” “목발 집으면 되지. 슬슬 걷는 연습도 하라고 했잖아, 의사 선생님이. 운동 겸 같이 가줄 거지?”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툴툴대며 결국은 시내로 나설 채비를 했다. 교문을 나오며 버스 안에서 하던 생각이지만, 왠지…령우가 방문을 열던 그 순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어쩐지 예전같이 편하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어이, 내 말 듣고 있어?” “어…어?” “오늘 하루 내꺼 하자고.” 갑자기 편안하게 느껴지는 령우와 다시 예전같이 지낼 수 있는 건가하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앞 뒤 다 잘라먹고 문득 제대로 들려온 그 한 마디에 내가 잠시 주춤한 채로 입을 벙끗 거리고 있자 딱 소리 나게 이마를 두드리며 말한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어? 오늘 하루만 네 시간 나한테 달라는 거야. 오케이?” “아, 으응. 알아듣고 있었어!” 곧 시뻘게진 얼굴로 나는 반박해야 했지만. “그럼 뭐부터 할까. 노래방부터 고?” 무릎을 절뚝거리면서도 경이로운 속도로 사람들을 헤집고 노래방으로 향하는 령우의 발걸음이 경쾌하기만 하다. 거 참, 무슨 생각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나마… 어쩐지 지금의 령우가 예전같이 느껴져서 불편하지 않은 것만이 다행일 뿐. 노래방으로 들어선 령우가 먼저 선곡을 예약했고. 찬란한 반주와 함께 노래는 시작 되었다. 긴 세월 흘러서가도 그 시절 생각이 나면 못 잊어 그리워지면 내 마음 서글퍼지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시간이 흘러서 가면 아픔은 잊어진다고 남들은 말을 하지만 그 마음 믿을 수 없어.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내가 있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 놓고 열창한다. 참 웃기지도 않게…. 그래, 어떤 곡이든 좋다 이거야. 당신이 트로트를 부르든 성악을 하든 신경쓰지 않겠다 이거야. 헌데…왜 똑같은 노래를 계속 부르냐구! 벌써 네 번째 똑같은 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올 무렵에서야 녀석의 마이크를 가로막았다. “야, 너 왜 또 불러?-_-” “노래 좋잖아~” “작작 불러! 한번만 부르란 말야, 한번만.” 결국 령우의 그 네번째 노래를 가로막고 찬란한 반주와 함께 나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아 당신은 못 믿을 사람, 아 당신은 철없는 사람 아무리 달래봐도 어쩔 순 없지만 마음 하나는 괜찮은 사람 오늘은 들국화 또 내일은 장미꽃 치근치근 치근대다가 잠이 들겠지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 너무 추워요 당신은 못 말리는 땡벌 땡벌, 당신은 날 울리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 너무 길어요 내 열창에 뭐가 그리 웃긴지 노래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며 까르르 웃는 령우. 저놈의 웃음소리로 보아 분명 똥줄이 타도록 웃고 있으리라는 생각 하에 애써 령우 쪽을 보지 않았는데 난 왜 몰랐을까. 그 웃음 뒤에…우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왜 나는 몰랐을까? 《 part¸ 2 》 사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네가 그 아이다라는 느낌도, 확신도 없었어. 다만… 나는 그냥 그 밝고 환한 네가…너로서 다가온 것, 그것 뿐. 부모님이 해외로 나가신 뒤부터 중고교를 혼자 기숙사에서 다니면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은 줄었지만…그래도 처음이었어. 아플 때 내 이마를 짚어주고 옆에 앉아 간호 해주는 사람. 따뜻한 죽을 만들어줄 사람…. 먼저 좋아하고 혼자 좋아한 거였으면서도, 내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너를 원망스럽다고 생각 한 못난 나인데……. 울먹이던 목소리로 네가 전화를 했을 때, 나는 흔들리지 말아야지 하고 굳게 먹은 마음이 다시 흔들려 버렸고 너를 따라 너의 부모님을 찾아뵙던 날. ‘뭐랄까…, 진짜 웃는다고 해야 하나. 너무 환하고 밝게 웃어서, 네가 웃는 거 보고 있으면 우울했던 기분이나 걱정거리. 고민…그런 거 싹 다 날아가는 기분이야. 웃는게 참 보기 좋아.’ 너는 그랬다. 내가 웃으면 그 어떤 고민도, 걱정근심도 다 잊게 된다고. 그리고 나에겐 네가 그랬다. 난 네가 웃으면 마치…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생각했어. 그 아이가…분명히 너 일거라고. 설령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믿기로 했어. 그래야 내가 희렴이를 외면하고, 널 쫓을 수 있을 테니까…. ‘령우야.’ 1년…, 그러다 하루 한 시간 일분일초로 점점 줄어들어버린 용기 없는 내 비열한 고백에 차마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던 네가 희렴이와 함께 갔던 다음 날, 혼자 돌아와 내 이름을 불렀었잖아. 그저 묵묵히 너를 바라볼 뿐인 나에게 네가 말했지. ‘네 다리가 다 나으면 우리 여기저기 놀러 다니자. 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네가 이렇게 여기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잖아.’ 사실 그 말을 하던 네가 울지 못해 웃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나는 돌아온 너를 보며 생각했어. 괜찮아. 이제 다신 너를 울게 하지 않을 거야. 네가……널 기쁘게 해줄 거야, 그랬는데…그래도 여전한 너를 보며 차츰 줄어갔던 내 자신감은 어느 덧 바닥이 나……이제 정말 자신이 없다. ※ 장장 두 시간여에 걸쳐 우리 둘만의 광적인 무대가 끝이 나고. 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할 겸 오렌지 주스를 꼴깍꼴깍 마시고 있는 내게 령우가 말한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대답대신, 말을 이으라는 뜻에서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들썩이는 내 모습에 작게 웃어보였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아직도 친구인가?”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기에…조금은 멋쩍게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여전히 미소 띠운 얼굴로 바라보는 령우. 잠시 멈칫거리다 말고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당연한 말을 갑자기 왜 해? 우리가 언제는 친구가 아닌 적 있었나! 좋은 친구잖아, 우린…….” 천연덕스럽게 령우의 등짝을 내리치며 한 말이었지만, 그런 내 장난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입술을 꾹 깨물며 작게 되뇐다. “…그래. 친구지. 몇날 며칠… 몇 년이 가도 우린 평생 친구지…….” 어쩌면 깨나 그럴 듯해 보이지만, 령우에게는 한없이 슬프기만 하던 그 말. 다시금 묘한 정적이 생겨나 버린 가운데 내가 문득 물었다. “정말……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 때문에 네가 다치면서까지 그럴 거라고는…. 지금도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해. 그치만 다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 때문에 너까지 위험해지는 일은…제발 하지 마. 무섭지도 않았어? 하여간 용기하나는 두둑하다니까.” “후회했어.” “어?” “후회는…널 감싸고 내달리던 그 순간부터 했어, 내가 미쳤지 하고. 아프기도 아팠고. 무서웠으니까.” 나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그날의 령우에게 미안하고 감사할 뿐이었음에, 처음 들을 수 있었던 그날 령우의 심정 때문에 나도 모르게 굳어져버린 내 얼굴을 슬쩍 꼬집으며 말한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너 이렇게 웃는 거 보면 진짜 잘 했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렇게 너 웃는 거 볼 수 있으면 그런 후회 한 백번쯤은 더해도 괜찮겠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라는 거야. 생각해봐. 나는 네 대신 하늘을 난 거야, 그렇게. 멋지지 않냐?” 발끈하는 나를 금방 멈추게 하는 데는 도가 텄어. 하여간 평생가도 못 말릴 녀석….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잠시 시계를 들여다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령우. “시간 다됐다.” “무슨 시간?” “오빠 오랜만에 외국물 먹는다.” “…무슨 소리야?” 두서없는 말에 잠시 멍해져 있다가 말고 대답 없이 나가려는 녀석의 옷깃을 잡아 멈춰 세움으로써 나와 눈을 맞춘 채, 그렇게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내 다리 다 나으면 같이 놀러 가자고. 하고 싶은 거 많다고. 근데 그거……못해주겠다.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그러니까 그런 건 희렴이랑 해라.” “그러니까…뭣 때문인데? 시간이 다 됐다는 건 무슨 소리고 외국물 먹는 건 또 뭐야? 갑자기 그게 다 뭐야?” 쿵하고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가 심장이 털썩 내려앉은 것 같기도 하고. 다소 신경질 적으로 묻는 나를 향해 나직이 말하길. “갑자기가 아니야. 부모님 계신 곳에 잠시 다녀와야 해. 원래 이맘쯤에 가야했어. 조금 앞당겨 진 것뿐이야. 그리 길지 않아. 짧게는 몇 주 정도일 거고 길게는 한두 달 정도.” “……뭐야. 근데 왜 영영 어딜 갈 사람처럼 말을 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혼자 남은 네가 나 때문에 희렴이랑 말 한 마디 못하고 지내며 외로워하는 것도 싫고, 힘들어 하는 것도 싫어. 빨리…희렴이랑 화해해. 더 이상 어린애처럼 억지 부리지 않을게.” “갑자기…왜 그러겠다는 건데? 이상하잖아, 너 지금 이러는 거…….” “내가 여기서야 보고 지내는 게 너 하나니까 너 없으면 못 살겠다 난리를 쳐도, 거기서 이쁜 여자를 보고 딴 맘먹지 않으리란 보장을 해 줄 수가 없다. 괜히……나 기다리게 해놓고 내가 한 눈 팔면 네가 너무 불쌍하잖냐.” 분명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를 리 없다. 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 모르는 척 넘어가지지가 않는 다는 걸 분명히 령우 자신도 알고 있을 텐데. “하하…. 웃긴다, 너. 진짜.” 나오지도 않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비릿한 피가 새어나올 정도로 꾹 깨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너 지금 우리가 로맨스 영화 주인공이라도 되나보다 하고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빨리 정신 차려. 희렴이랑 예전처럼 지내고 아니고는 내가 결정할 문제야. 네가 무슨 멋들어지는 이별장면이라도 보여주려는지 몰라도 그런 거 하나도 안 멋있어. 유치해서 웃음도 안 나오니까 그만……” 앞 뒤 맞는지 안 맞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말을 해대고 있는 나에게 나직이 말하는 령우. “너야말로 사람 좀 작작 울려.” 때문에 내가 하던 말을 멈추고 다시금 령우의 얼굴을 바라보면…어느 덧 거짓 웃음을 띠우지 않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거짓말도 못하는 게… 아닌 척 하면 아닌 게 되냐. 내가 언제 너랑 나랑 평생 사랑하쟀냐…. 잠깐…하루면 된다고 했잖아.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몇 년, 몇 십 년 후에도 니 자리는 남겨놓을게. 희렴이랑 지내다가 힘들거나 지치면 잠깐씩 나한테 와도 돼. 기대도 돼. 네가 욕심나서…희렴이를 져버렸으면서, 막상 일부러 모진 말 하고 독하게 굴고, 며칠 얘기를 안 해 봤더니 깨달았거든. 나는 그 녀석이 너무 좋아. 제길. 널 포기할 수밖에 없을 만큼……그 녀석은 소중한 친구야. 너도 그 녀석도 어느 하나 버릴 수가 없어…. 그러니까…네 말대로 평생가도 안 변할……평생 친구하자, 우리.” 말과 함께… 오른손을 내민다. 잠시 령우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던 나는, 결국 천천히 손을 잡았다. 짧고 간결하게 악수를 하고 나 손을 놓는 령우. ……없었다. 나는 결국 환히 들여다보이던 령우의 진심을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령우의 커다란 배려이기도 하고 또 내가 령우에게 해줄 수 있는 작은 배려이기도 했다. “됐다…. 비행기 시간 더 늦기 전에 가야해.” “애들한테 인사도 안하구 가? 허락은 맡았어? 왜 이렇게 급하게 가는데?” “원래 가려던 거라고 말했잖아. 선생님들도 애들도 다 알아. 너만 모르지. 그리고…… 다시 돌아올 건데 무슨 인사가 필요하냐.” 눈물이 나긴 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곁에 있어달라고…내게 자신 없게 말을 하던 때와 달리 이제는 홀가분한 모습으로 당당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일까 전보다도 훨씬 멋있는 모습으로 웃는다. 근처 역 캐비닛에 미리 넣어놓은 듯 짐을 찾아 든 채로 걷는 령우의 뒤를 좇았다. 그러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추고 시계를 바라보며 말한다. “오늘 아침에 네 이름으로 희렴이한테 문자 남겼어. 그 공원에서 만나자고. 약속시간보다 여덟 시간은 지났으려나? 9시 정도에 문자했으니까.” “뭐?”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피식 웃는 령우. “가는 김에……골탕 한번 먹여주려고 심술 한번 부려본 거야. 그만 가봐. 그 녀석이라면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 분명 령우 말대로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을 희렴이를 알면서도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은 초조하게만 느끼고 있을 무렵, 멀리서 버스가 보이자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쓰며 말하는 령우. “지금은 이렇게 가지만 나중엔 더 멋있어져서 돌아온다. 그때 후회해도 소용없어.” “……령우야.” “이제 그만. 바이바이, 강다희.”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익숙하게 내 어깨를 한번 토닥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타는 령우. 그때까지도 실감치 못하다가, 이제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보고서야 이별을 실감한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령우가 탄 버스가 천천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다녀와, 기다릴게.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다녀올게.” 애써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꼭 참았지만, 창문을 열고 애써 환하게 웃는 령우의 모습에 큰 소리로 외쳤고. 점점 더 멀어져…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령우. 어차피 얼마 후면, 다시 만날 거니까 괜히 울거나 가슴 아파하지 말자. 반령우, 더 멋있어진 모습으로 우리 다시 만나자……. 《 part¸ 3 》 이게 정말 잘한 일일 까. 궁상맞지 않고 쿨하게 보내준 게 정말 맞을까? 너에게 말하던 그 순간에도 고민했어. 이만큼이면 충분했다고… 힘들어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두 사람이 내 몫을 나누어 힘들어 했으니까 다시 전으로 돌려보내주는 것도 내 몫이라 생각했어. 그렇게 좋아하는 너를, 또 울리고야 말아서 미안해. 언젠가, 희렴이 옆에 선 널 보고 웃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땐 말해주어야겠다. 이 나의 마음도, 희렴이 못지않은 일편단심이었다는 것을. - 나는 분명 령우 너를 좋아했어. 그것이 단순한 친구간의 감정이든, 그 다른 어떤 것이라 하던 간에. 내가 널 좋아한 사실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사랑으로 전해져 오기엔 시간이 조금 늦어졌을 뿐, 내가 희렴이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너를 생각하는 마음엔 다름이 없어.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땐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겠어……. - 바보. 먼저 만났어도… 지금처럼 기억도 못했을 거면서……. 일곱 살 그때부터 열여덟 지금까지…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에 언제나 옆에 있어주던 꼬마아이. 이제 안녕.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6. 그렇게 열심히 또 달리고 달려본 적이 또 있을까. 목 끝까지 차오른 숨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쉬지 않고 달렸다. 간신히 도착했을 땐 이미 해지고 어둔 공원에 주황빛의 가로등 불외엔 뛰노는 아이들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고. 막상 떨리는 마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지만…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공원……. 아직 7시가 되지 않았으니, 적어도 자그마치 9시간은 지났으니까 어쩌면 없는 게 당연하지만… 없을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허탈한 기분에 그 자리에 더럭 쪼그리고 앉았다. “뭐…이래.” 나도 모르게 주르륵 떨어져 내리는 눈물에 고개도 들지 못하구 눈물을 훔쳐내고 있을 즈음.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누군가의 인기척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내가 다시금 눈을 비비고 보라보아도 여전히 앞에 서있는 희렴이로 인하여 그저 멍해져있는 내게 말한다. “추운데 그렇게 앉아 있으면 어떡해.” 말과 함께 나를 일으켜 세우는 희렴이. 그게……전부. 10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은, 한참을 늦어버린 나에게 화도 내지 않고 왜 늦었냐고 묻지도 않고 또 또 걱정.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오지 않으면 그냥 가야지. 이렇게 늦으면 기다리지 말아야지 대체 넌 왜 그렇게, 왜……” 속상한 심정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나무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눈물자국을 닦아주는 녀석 때문에 다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손이 너무 차서 할 말을 잃어버린 가운데 작게 들려온 목소리. “…올 것 같아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네가 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기다리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야.” 원래부터 이런 녀석임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차마 더는 화를 낼 수도 더 이상 미안해 할 수도 없어 차차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령우 갔어.” “응. 알아.” “근데 왜 마중 안 나왔어? 왜…나한테 말 안했어?” “…그게 녀석한테 편할 것 같아서.” “…령우가 한 거짓말을……. 뻔히 알고 있었는데 모르는 척 할 수밖에 없었어. 멋지게 잊어주겠다고 한 말, 평생 친구가 되자고 한 말 다 울지 못해 웃으며 한 말인 거 아는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너무 미안한데, 그런데도 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한 마디에 령우 간 걸 보구나서 바로 너한테 달려왔어. 아마 령우는 울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너한테 온 거야.” 언제나처럼 녀석은 그저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는 듯 재촉 하지 않고 가만히 어깨를 다독여 주는 손에 다시 한 번 차오른 눈물을 훔쳐냈다. “나는…난 그렇게 이기적인 애야. 근데, 근데두 네가 이렇게 좋아해주면…, 이제는 네가 나 싫다고 해도, 그래서 이젠 내가 너를 쫓아다녀도 되잖아. 그게 훨씬 좋잖아.” 령우는 아주 힘든 결정으로 자리를 비웠는데 내가 바로 기뻐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나도 조금쯤은 힘들어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해. 그게 힘들었던 령우에게도 희렴이한테도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따뜻한 얼굴을 하고 또 그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로. “그럴 수만 있었으면 진작 그랬겠다.” 한참을 기다리느라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은 생각 못하고서 속으로 끌어 당겨, 힘주어 안는다. 그것으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잘 알고 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 하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동안, 어쩌면 11월 중 가장 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가장 따뜻했다. ※ “심심해.” 음, 뭐라고 써야하지? 고민의 고민 끝에 편지의 서두를 장식하기 위할, 그 몇 마디 되도 않는 짧은 문장들을 다시 쓰고 지우길 반복하길 한참.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다 앉으며 불쑥 내 책상에 턱을 괸 채 말하는 희렴이. 잠자코 앉아 있는 듯싶더니 자기 반에 다녀오기도 하고 애들이랑 몇 마디 주고도 받더니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너도 령우한테 편지 써! 편지 좀 써달라고 먼저 메일 보내왔잖어~ 주소만 딸랑 써있긴 했지만서두.” 하지만 그건 또 내키지 않는 듯 딴청을 피우고 있다….-_- 이 자식, 어쩐지 요즘에 자주 반항을 한단 말이지. 어쨌거나 그런 희렴이를 뒤로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편지 쓰기에 열중하고 있을 즘 교무실에 다녀온 반장이 걷었던 공책을 돌려주며 말한다. “참, 담임이 그러는데 너 지금 교장실에 좀 다녀오래.” “교장실에? 나를?!” “엉, 너를.” “아항. 그렇구나.” 교장실에 다녀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별 감흥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는 희렴이. “왜?” “같이 가려구.” “나 들어가 있는 동안 너 혼자 기다려야 하잖아. 그냥 찬휘랑 있어.” “그래두.” 거 참 놀랄 일이지만… 애교가 늘었달 지, 그냥 애가 됐다고 해야 할지 같이 녀석은 부쩍 잔투정이 늘었다. 물론 저렇게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볼 때엔, 나는 그저 콩닥거리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쉼호흡을 해야 하지만. 하여간 누가 말리겠어 싶어 결국 둘이서 저벅저벅 교장실 앞까지 걸음을 옮겼고. 노크를 하고 교장실에 들어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금방 올게!” 그런 희렴일 향해 작게 눈짓을 하고 교장실에 들어섰는데… 평상시처럼 정 중앙에 계신 작은 아버지 이외…왼쪽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 아이. 눈이 마주친 순간 벙찐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을 즘 작은 아버지께서 먼저 입을 여셨다. “어서 오려무나.” “아, 예. 찾으셨어요?” “그래. 일단 거기 좀 앉고.” 내가 다소 멋쩍어하며 반대편 의자에 앉았을 때, 그런 나를 보며 작게 ‘풋’ 소리를 내며 웃는 그 아이. 순간 다시 눈이 마주쳤는데… 이마를 가린 일자 앞머리에 나를 똑바로 올려다 보는 커다랗고 쌍꺼풀 깊게 패인 눈동자. 작게 오므리고 있던 붉은 입술이 한순간 오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느꼈을 즘 말씀하시는 작은 아버지. “이쪽은 내 조카 다희란다. 얘기 들었지? 너보다 한 살 많으니 언니가 되겠구나. 인사하렴, 다희야. 이 아인 내 잘 아는 분의 손녀란다. 부모님이 사정상 외국에 나가게 되셔서 우리 학교로 오게 되었단다.” 생각지도 못했던 내가 약간의 놀라움과 기쁨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즘 생긋 웃으며 나를 향해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아, 으응. 안녕!” 멀뚱히 보고 있는 나를 향해 이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기에 나 또한 어설프게 인사를 했고 그런 내 모습에 또 싱긋 웃어 보인다. “효빈인 너보다 한 살 아래란다. 외동이라 적적해했는데, 우리 학교에 오면 네가 있다는 소릴 듣고 몹시 기뻐했단다. 많이 낯설 테니까 네가 친동생처럼 잘 대해주고. 오늘 처음 왔으니, 다희 네가 학교를 구경시켜 주겠니?” “아…, 네! 맡겨주세요.” “그래. 그럼 믿고 부탁하마.” 내 어깨를 다독이시며 거듭 당부의 말씀을 하신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설 무렵 약간 부푼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효빈이. “제 이름은 차효빈이예요. 교장 선생님께 언니 얘길 전해 듣곤 했는데…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몰라요.” “아, 으응. 나도 만나서 반가워. 잘 지내자.” “네. 잘 부탁해요, 언니.” 낯을 가리지 않는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낀다. 아아…, 이쁘구나. 어쩐지 이 늑대 투성이인 학교에 나 이외의 여학생이자 예쁜 후배가 생겼단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지기 까지 한다. 효빈이나 나나 들뜬 기분으로 교장실을 나오자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다가 일어서는 희렴이. 나와 효빈이의 시선이 희렴이에게로 향하고 희렴이 또한 내 키가 어깨 높이 즈음 되는 효빈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누구야?” “누구예요?” “아아…….” 어이쿠, 짝짜꿍이어라. 순간적으로 동시에 질문이 들어오자 난처하게 둘을 바라보다 말고 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쪽은 원희렴이라고 해! 나랑 동갑이지. 그리고 이쪽은 전학생이야. 우리보다 한 살 어려. 아, 방은 이제부터 나랑 같이 쓰고.” 간단명료한 나의 설명에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와는 다르게 그 특유의 친절함이 담긴 미소를 잃지 않는 효빈이. “안녕하세요. 차효빈이예요. 반가워요, 헤헤. 그냥 오빠라고 불러도 되지요?” “…응.” 그리고…환하게 웃으며 내민 그녀의 손이 무색하도록…그저 짧은 단답식의 대답과 함께 자신에게로 내밀어진 효빈이의 손을 그저 멀뚱히 바라보기만 한다. 잠시 동안의 침묵에 많이 민망했던 모양인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빠르게 손을 거두는 효빈이. “에…,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난처한 웃음과 함께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는 가련한 효빈이의 뒷모습을 머쓱히 바라보다 말고 그런 희렴이의 발등을 거치게 지져 밟았고. “아.” 아픈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톤의 목소리로 짧게 단발마의 비명 아닌 비명을 내지를 희렴이의 등짝을 거칠게 내리치며 말했다. “사람 무안하게 왜 그래, 증말~ 악수를 하는 게 뭐 어렵냐! 보는 내가 다 민망해.” 그에 아무런 대꾸 없이 쓰린 듯 등을 매만지는 희렴이. 화도 안내고 저러면 또 미안해진다니까…. “아무튼 좀 따뜻이 대해줘. 효빈이도 부모님이 외국에 나가 계신대. 외동이라 외롭게 컸나봐. 얼굴두 얼마나 이뻐! 잘 좀 대해줘. 알았지?” “…….” 녀석 답게 달리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내 말에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 듯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운다. “그럼 먼저 교실 가 있어. 난 학교 구경 좀 시켜주고 올게.” “빨리 와야 해.” 그제야 얼굴에 미묘하게 미소를 띠운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든다. 그런 희렴이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화장실 앞까지 걸어 나갔다. 혹여 놀라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화장실 안으로 막 들어서려 했을 무렵, 조용하던 화장실 안에 울리는 목소리. “몰라. 짜증나, 씨발. 완전 촌구석이라구.” 순간 들려온 욕에 깜짝 놀라며 한 발짝 더 다가서자 긴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화장실 문을 뻥하고 차버리는 낯선 모습의 효빈이. “그래도 여기 있으면 재미는 쏠쏠할 것 같다. 다들 인물은 죽어나. 참, 나 금방 제대로 잘 생긴……” 거칠게 말하다 문득 즐거운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커다란 목소리로 통화를 하다 말고 스치듯 거울을 바라보던 효빈이가 문 앞에 서있는 내가 거울에 비친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대로 핸드폰 플립을 닫아 버리고 돌아서 말한다. “…언니 언제 왔어요?” “그, 금방 왔어. 통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나가려고 했는데… 미안. 설마 나 때문에 끊은 거야?” “아녜요. 그냥 좀 놀라서… 아, 학교구경 시켜주기로 했잖아요, 언니~” 통화하며 머리를 쓸어 넘길 때의 짜증스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아까의 애교가 철철 넘치는 말투로 내 손을 잡아 끈 채로 화장실을 나선다. 어리고 귀엽게만 보았던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포스에 효빈이도 나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뭐… 친한 친구랑 한 통화면 편하게 통화하다 보면 충분히 나올 수 있을 법한 행동들이라 생각하고, 조용히 옆에 걷던 효빈이에게 말했다. “참, 아까 희렴이 일은 미안해. 워낙 낙을 가려서… 아마 친해지면 괜찮아 질 거야. 네가 이해해줘.” “아니에요, 멋있기만 하던 걸요, 뭐~ 언니 남자친구 맞죠?” “그… 그렇다고 해야 하나?” 감히 내 남자친구요, 라고 말하기엔 쑥스러워 웃음으로 무마하는 나를 보며 여태껏의 싱긋 웃던 웃음들과는 뭔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미묘하게 올라간 입술을 꼭 깨물며 새침하게 말하는 효빈이. “우아, 언니 부러워요. 나두 남자친구 생기면 좋겠는데….” “에이, 걱정 마! 효빈이 너 얼굴이 예쁘고 애교도 많고, 금방 생길 거야.” “정말요? 그치만…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 할까요……?” “응? 그 사람? 누구? 벌써 마음에 든 사람 있어?” “아…, 아니에요. 헤헤.” 얼굴을 붉히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효빈이. 뭔가……여지껏과는 다른 새로운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7. 그날 저녁, 저녁을 먹기 위해 홀에서 모여 식당으로 가 밥을 먹으면서도 조용한 네 사람. 희렴이야 원래 말이 없던 놈이었고 찬휘 또한 말 많은 성격은 아니기에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하지만 밝고 명랑한 성격의 효빈이는 그 어색함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희렴이에게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지만, “어? 희렴이 오빠는 왼손잡인가 봐요. 왼손잡이는 머리가 좋다던데 정말 그래요?” “아니. 안 그래.” “아아…, 네에.” 곧 저렇게 맥없이 끊겨 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다시금 입을 다물고 아까부터 내내 맞은편의 찬휘를 힐끗힐끗 바라보다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 인지 밥을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효빈이. “어? 왜 일어나?” “에…, 속이 안 좋아서 그만 먹으려구요. 언니 천천히 드시고 오세요.” 새로 온 전학생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효빈이를 뒤 따르는게 못내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 순간 먼저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 원희렴. “먼저 올라갈게.” 뭐땜시롱 나를 두고 저리 급하게 올라가는가 궁금하기도 했는데 나마저 일어서버리면 혼자 남아 있을 찬휘로 인하여 자리를 지켰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밥만 잘 먹는 녀석을 향해 더럭 물었다. “너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효빈이한테, 말이라두 좀 걸어주지. 아직 적응도 안 되서 낯설 텐데 얼마나 불편 했겠어~” “나 원래 말 많지 않은 거 알면서 새삼스럽긴.” “그래두! 나 처음 봤을 땐 그래도 말 많이 했잖아.” “그거야 너는… 그냥 외면적인 모습으로 봤을 땐 도저히 어떻게 희렴이 여자친구가 됐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으래? 근데 그거 알아? 너의 말은 사람의 기분을 오묘하게 만드는데 뭐가 있다, 찬휘야.-_-” 마음이 상한 여린 나로서는 결국 녀석을 식당에 남겨놓고 매점을 나왔다. 소화제를 하나 사가지구 방으로 향해 경쾌하게 계단을 오르고 있을 즘 복도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짐짓 걸음을 멈춰 세웠을 때. “어째서요…?” 고개를 배꼼이 내미니 보이는 건 희렴이와 효빈이 두 사람. 서로 쉬이 말도 건네지 못하던 두 사람이 대체 왜 저기에 마주해 있는 건가 궁금함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소화제를 건네는 희렴이의 손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그때 그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기억도 못하면 나 어떡해요…….” 앞뒤를 빼먹은 저 말에 대한 궁금증이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늘어나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에 전해져 오던 뭔가 미묘한 분위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기만 한 가운데, “왜 거기 그러고 서있어?” 그렇게… 찬휘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 어리둥절해 있다가, 계단 한 가운데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고 의아한 듯 묻는다. “누구 있어?” “잠깐…!” 말과 함께 그대로 복도로 향해버리는 찬휘. 그런 찬휘를 말리려다가 무심결에 나까지 올라가버리고 말았고. 결국 별안간 등장한 나와 찬휘의 모습에 효빈이와 희렴이의 시선이 동시에 우리에게로 꽂혔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 찬휘의 물음에, 깜짝 놀라 그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효빈이와는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와 찬휘를 보다말고 나에게로 시선을 옮겨 묻는 원희렴. “그냥 잠깐…. 밥 다 먹었어?” “응. 다 먹었어.” 순간 물어볼까 말까하는 고민을 하다가 그냥 그 짧은 대답 한 마디만 남겨두고 더럭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효빈이 걱정 되서 온 거야? 아이구, 이뻐라~” 그리곤 다른 한쪽 손으로 은근슬쩍 두드린 엉덩이 때문인지 눈썹을 찌푸리며 한 발짝 걸음을 물러선다. 하여간 맘대로 만지지도 못하게 해! “근데 무슨 얘기 한 거야?” “별 얘기 안했어.” 별 얘기 안 한 거 좋아하구 있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봤건만! 나름대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척, 그렇지만 궁금한 것처럼 넌지시 물었지만 딱히 이렇다하게 대답을 하지 않는 녀석에게서 더 이상 추궁할 겨를이 없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는데… 깜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트리는 효빈이. 효빈이의 손에서 떨어진 종이는 팔락팔락 바람을 타고 내 앞으로 떨어졌고, 주워주려고 떨어진 종이를 집었을 때 느낀 당황스러움. “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서랍 안에 들어 있길래…….”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효빈이에게서 떨어진 종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희렴이와 나의 계약서. 그동안 까맣게 잊혀져 서랍 안에서만 보관 되어오던 계약서는 효빈이로 인해 다시금 그 존재를 알렸다. “죄송해요, 언니. 정말 일부러……” “아냐, 괜찮아. 상관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하~”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효빈이가 오히려 안쓰러워서 당황한 기색을 감춘 채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는 효빈이를 안심시키며 그 어색한 상황이 수그러들기만 기다리던 참 조심스레 물어온다. “언니. 미안한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응. 뭔데? 말해봐.” “언니랑 희렴오빠…, 좋아해서 사귄 거 아니었어요?” 아무렇지 않은 그 물음에 어색한 웃음기마저 사라진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기다린다. 그런 순진무구한 표정에… 무어라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물론 처음에는 그런 장난을 했던 게 맞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치운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 하하~” “진심으로 좋아하게…된 거예요?” 아무런 욕심도 마음도 가지지 않고 시작한 장난이 결국엔 진심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저 따위 건 진즉에 불살라 없애 버렸어야 했어! 괜히 가지고 있어서 본 사람도 당황스럽고 보인 사람도 민망한 상황. 뭔가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듯하던 효빈이가 작게 되뇐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얻는게 가능한 거라면… 나도 가망이 있는 걸까요?” 눈망울을 반짝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어오는 효빈이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 지 한참을 망설였다. 분명 그럴 거라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건…어쩐지 모르게 희렴이를 대하던 효빈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서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다음날. 곧 있을 회장선거에 본의 아니게 출마하게 된 바, 이런저런 준비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기만 하다. 또… 어젯밤 묘하게 신경 쓰이던 효빈이의 말도 그렇고 싱숭생숭한 마음에 멍하니 앉아 있을 즘, 내 책상 위에 작은 봉지를 내려놓으며 앉은 효빈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 효빈아….” “지금 바빠요?” “아니야, 전혀~ 근데 어쩐 일이야?” “점심시간인데 언니 식당 안 갔잖아요. 같이 먹으려구 왔죠.” 생긋 웃으며 들고 온 봉지에서 과자며 빵이며 하나하나 늘어놓는 모습이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어제 원희렴과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잠시나마 묘하다고 느낀 내가 나쁜 년이여…. “희렴 오빠랑 찬휘 오빠는…오늘 안 보이네요?” “응? 그러고 보니 그렇네. 바쁜가보지, 뭐.” 대수롭잖게 여기고 열심히 먹기에 열중하는 나와는 달리 뭔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두 사람 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희렴 오빠도 그렇고 찬휘 오빠도…….” “찬휘? 그렇지 않아! 희렴이나 찬휘나 낯을 좀 가려서 그렇지 친해지면 말도 얼마나 잘한다구~ 참, 너는 모르겠다. 지금은 잠깐 미국에 가있는데, 찬휘랑 희렴이 말고 한 명 더 있어. 령우라구. 걔는 별로 낯도 안 가리고 말도 얼마나 많은데! 오지랖도 넓고.”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효빈이의 모습에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효빈아.” “예?” “혹시 우리 학교 학생 중에…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어?” 순간 내 말에 확 붉어진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효빈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엄습해오는 불안감. 뭐지, 이 기분은? 시방… 아무 이유 없이 생뚱맞게 원희렴이의 얼굴이 확 떠오른 건 왜 일까.-_- “그, 그게 누군데?” 콩닥콩닥 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는 표정으로 멈칫하던 효빈이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밥 먹었어?”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더럭 나타난 원희렴으로 인하여 뭔가 말을 할 듯 작게 벌어졌던 효빈이의 입술이 다시 꾹 다물림과 동시에 거칠게 일그러져버린 나의 표정…. 지금 그 타이밍이 어떤 순간이었는지 알 리 없는 그 녀석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릴 뿐이다. “보면 몰러!” 더럭 소리를 지르는 날 보며 그냥 멍하고 바라보다 말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쳇, 이젠 그냥 무시한다 이거지? 조금만 늦게 왔더라도 누군지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녀석으로 인하여 들을 수 없게 된 효빈이의 그 누군가에 대해 정신없이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희렴이의 뒤에 서있던 찬휘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효빈이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 효빈이라고 했던가?” 그러자 조금은 놀란 듯 대답하는 효빈이. “아, 네. 안녕하세요!” “좀 지낼 만 해? 아직은 적응 안 되지? 많이 불편하겠다.”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던 어제와는 달리 웃는 얼굴로 편안하게 말을 건네는 찬휘를 보며 얼굴에 홍조를 띠운 얼굴로 수줍은 듯이 대답한다. “괜찮아요, 헤헤. 아직 하루 밖에 안 되서 낯선 것 빼고는…무엇보다 다희언니가 있으니깐요.” “그래. 어제 저녁엔 미안했다. 내가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텐 말을 잘 못해.” 그리고 그 순간,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미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찬휘를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숙여버리는 효빈이. 분명 찬휘는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편안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를 눈치 채지 못한 듯한 찬휘가 문득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프린트물을 보다 말고 말한다. “다희 너 선거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거야?” “아, 나름대로 하고 있기는 한데 잘 모르겠어. 역시 괜히 하겠다고 한 것 같아~” “모르겠는 거 있으면 물어봐. 혼자 끙끙 앓지만 말고. 도움 될 수 있다면 최대한으로 노력해 볼 테니까.” “넌 역시 멋진 놈이야, 따봉.-_-” 그때였다. 내 농담에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리고야 마는 찬휘 녀석으로 인해, 치켜들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씁쓸하게 내리던 때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는 효빈이. “어, 효빈아?” 때문에 놀란 내가 효빈이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너는 그냥 여기 있어.” 라는 말과 함께 나보다도 먼저일어선 희렴이가 효빈이의 뒤를 좇아 교실 밖으로 나갔다. 때문에 나는… 조금은 당황해하며 두 사람의 멀어지는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8. 근데……그 예쁜 효빈이가 희렴이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아까 일을 생각하느라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가운데 들려오는 목소리. “뭐하고 있어?” 그에 흠칫 놀라며 여지껏 끄적인 편지를 다시 꾸깃하게 접어 책상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뒤돌아보자 고개를 까딱하며 말하는 희렴이. “나가자.” 말과 함께 앉아 있던 나의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향한다. “어, 어디 가는 건데?” “중학생들이 오늘 견학 온다고 운동장에 모이래.” “아아…, 참. 효빈이는 좀 괜찮아?” “응. 걱정 하지 마.”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는 조금 들떠 보이는 표정인 희렴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그러고 보니, 단 둘이 있어본지도 꽤 된 듯… 내일 밖에 나가서 오랜만에 데이트도 좀 하고 이것저것 물어볼까하고 넌지시 말했다. “내일 바빠?” “아니. 왜?” “음, 그럼 우리 어디 놀러 가자. 요 며칠 암데두 안나가고 학교에만 있었더니 답답해~” “그럴……” 그 내말에, 마치 그럴 듯이 살짝 미소 짓는 희렴이. 그러나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멈칫하다 말고 말을 정정한다. “아. 안돼.” “뭐? 왜 안돼?!” “…약속이 있어.” “약속? 누구랑?” 눈 크게 뜨고 올려보며 묻자 대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로 내 얼굴을 보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문다. “있어, 하여간.” “우씨~ 무슨 약속 인데? 오래 걸리는 거야?” “응. 다음에 놀러가자.” 사실 친구도 없는 놈이…! 누구와의 약속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어제 효빈이랑 무슨 얘길 했는지도 궁금하고. 자세히 물어보면… 내가 너무 지나치게 의식하는 건가? 쪼잔하다고 생각하겠지? 제길, 괴롭다! 운동장으로 나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갖가지 생각에 정신없던 와중 희렴이와 나를 보고 다가오는 효빈이. “이제 나오셨어요? 사람이 많아서 언닐 한참 찾았어요~” “그러게, 사람 진짜 많다.” 효빈이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이지 사방팔방에 우리 학교 학생 하며, 견학을 온 듯 한 수 백 여명의 중학생들로 넓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경하는 건 오랜만이라 나 또한 신기하게 주위를 둘러볼 즈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작은 쑥덕거림. “와 학교 진짜 좋다. 근데 저 언니들도 이 학교 학생인가?” “나 들었어! 여기 아직 여학생 딱 두 명밖에 없대. 그게 저 언니들 인가봐. 오, 저기 언니 되게 예쁘게 생겼어. 왠지 멋지다….” “…진짜 이쁘다. 옆에 오빠도 봐. 진짜 잘 생겼어! 커플인가봐. 부럽다!” 허허, 깜찍한 녀석들. 동경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는 귀여운 아이들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턱이 하늘만치 치솟는 것을 느낀다. “근데 그 옆에…… 주걱턱에 저 어깨 넓은 언닌 뭐야?-_-깬다, 증말.” “그러게. 어우, 뭐야 진짜~” 때문에…한껏 힘이 들어갔던 고개를 꺾이듯 푹 숙이고 잔뜩 힘을 주었던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런 썩을 잡것들!! 입학하기만 해봐라하고 빠득빠득 이를 갈고 있던 가운데, 갑자기 앞으로 다가오던 여학생이, 긴가 민가 하는 얼굴로 우리를 보다 말고, 이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멍해진 우리 앞에서, 더럭 효빈이에게 다가오더니 마치 군대에서나 볼 듯한 모양새로 90도 각도로 푹 숙여 인사한다.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 크고도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희렴이와 나.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당황한 듯한 효빈이가 붉어진 얼굴로 그 애를 말렸다. “아……. 유, 윤아구나. 오랜만이야.” “드디어 여기로 전학 오신 거예요? 그 오빠는 찾으셨구요?” 당황하고 있는 효빈이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여전히 씩씩한 목소리로 말한다. “목소리가 너무 커. 잠깐 다른데서 이야기 하자.” 연신 나와 희렴이의 눈치를 보며, 급하게 그 아이를 데리고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대단한 포스였어. 벙찐 상태로 두 사람이 지나간 길을 보고 있는 내게 말하는 희렴이. “찬휘 데려 올게. 잠깐만 기다려.” “아, 으응.” “금방 다녀올게.” 정말 금방 다녀올 듯이 눈을 부릅뜨며 기다리란 말을 거듭하고 급하게 그 시끌벅적한 틈바구니 속을 헤집고 나간다. 하지만 내가 혼자 남아 기다릴 것도 없이, 금방 돌아온 효빈이. “죄송해요! 중학교 때 알던 후배인데 원래 애가 괄괄해서…놀라셨죠?” “아냐, 뭘~ 얘기는 다 했어?” “네~ 헤헤.” 귀엽게 웃어 보이는 효빈이를 보며 느끼는데, 아주 가끔씩 뿜어져 나오는 포스랄까…. 뭔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다. 다시 우리 둘만 남은 가운데 중학생들 사이에 껴서 아직은 낯선 듯, 익숙지 못한 곳들을 다시금 구경하고 있는 효빈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효빈아.” “네?” “에, 그러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는 효빈이에게, 참 꺼내기 어렵고 민망한 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애교 섞인 말투로 말한다. “언니 할 말 있죠? 편하게 말씀 하세요~ 네?” 그래. 계속 신경 쓰는 것보다 똑 부러지게 전해 들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겠지, 하는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물어도 돼?” “아….” 하지만 질문이 그거였는지는 몰랐는지 잠시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낯빛으로 나를 보다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말한다. “죄송해요. 아직은… 말할 수가 없어요. 만약에 확실해지면…, 그때 제일 먼저 언니한테 말할게요.” “아, 괜찮아 나는!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니까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미안함에 눈을 맞추지 못하다가, 어깨를 토닥여주며 한참을 괜찮다고 말하자 그제야 고갤 들고 멋쩍은 듯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여리고 착한 효빈이의 사랑을… 나도 물론 지켜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 문제는, 그게……희렴이가 아니라면!!! ※ 다음날, 모처럼의 휴일이지만 외출마저 거절당한 마당에 잠이나 조금 늦은 시각까지 잠들어 있던 와중 방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아, 저 때문에 깨셨어요? 죄송해요.” 잠에서 깬 나를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눈썹을 찡끗하는 효빈이. 만날 뭐 그렇게 미안한 것도 많은지…. “우음, 어디 나가는 거야?” “네! 잠시 어디 좀 다녀오려구요. 지금 나갈 거니까 더 주무세요.” “응. 근데 그러고 나가려고?” “네. 왜요? 이상해요…?” 나갈 채비를 마친 듯 신발을 신고 있는 효빈이의 옷차림이 하도 가벼워서 보는 내가 다 춥기까지 하다. 때문에 걷어찼던 이불을 다시 둘둘 두르며 말했다. “미쳤어?! 지금이 몇 월 달인데 그러고 나가. 12월이야, 12월! 얼어 죽겠다.” “아, 그치만… 짐을 다 안 가지구 와서요. 언니 말 들으니까 좀 추운 것도 같아요, 헤…. 남은 짐 이제 부쳐달라고 해야죠.” “그래. 일단은 내거라도 아무 거나 걸쳐.” “전 괜찮아요~” “보는 내가 더 추워서 그래. 장롱 열면 맨 앞에 코트 있을 거야. 그거라도 입어. 예쁘지는 않겠지만 추운 것보다야 낫지.” 미안해서 그런지, 한사코 거절을 하던 효빈이. 그러나 나의 무서우리 만큼 지독한 한참의 강요 끝에 못 이겨 장롱에 있던 코트를 꺼내 든다. “이거요?” “응, 그래. 그……헉!” 얼추 보고서는, 미처 행동은 멈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자세히 보니… 효빈이의 손에 들린 것은 희렴이가 사준 코트. 그건 따로 보관해 놓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순간 어떡하지 짧은 고민을 해야 했다. “와아. 너무 이뻐요.” 나는 빌려줘도 괜찮은데, 혹시라도 희렴이가 보면 기분 상해할까 걱정도 됐지만, 마음에 든 듯 코트를 보고 있는 효빈이를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이, 뭐… 그 정도야 녀석도 이해해 주겠지. “빨리 다녀올게요.” 어쨌거나 코트를 입고. 막 나가려고 신발을 신다 말고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짝 치며 말하는 효빈이. “아, 참! 깜빡할 뻔 했다! 언니 뭐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엥? 괜찮어~” “나가는 김에 사올게요. 네에~?” “음, 그렇다면… 역 앞에서 파는 가토 쇼콜라!” 원래 한번은 마다하지만 두 번은 마다 않는 거지…. 안면몰수하고 묻기 무섭게 대답했고. 재빠른 내 대답에 씩 웃으며 꼭 사오겠다는 말을 거듭하고 나섰다. 효빈이가 나가자…조용해진 방. 다시 잠을 청했지만 이미 잠도 달아나버렸고. 혹시 해서 가본 희렴이 방도 역시 조용했다. 결국,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바람도 쐴 겸 령우에게 쓴 편지를 들고 학교를 나왔다. 세수도 안했으니 머리도 안감은 건 당연지사. 모자 딸린 잠바를 푹 뒤집어쓰고, 회색 츄리닝 바람에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끈 모습으로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왔다. 하필이면 우체국이 역 앞, 시내 한복판에 있을 게 뭐람. 어쩐지 슬금슬금 나를 피해가는 사람들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후딱 편지를 부치고, 내심 괜히 나왔다 생각을 하면서 빨리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그때, 나는 못 볼꼴을 보고야 말았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한 남자의 뒷모습과, 낯익은 코트를 입은 한 여자의 뒷모습을!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59. 설마 설마 했는데…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띠운 체 걷고 있는 원희렴과 종종걸음으로 그런 희렴이의 소매 깃을 꼭 붙잡고 뒤를 따르는 효빈이. 점점 내 앞으로 가까워 오는 걸 느낀 내가 후딱 사람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거친 나의 움직임에 놀란 듯 술렁이는 사람들. “어머, 뭐야!” “사람이야, 뭐야! 거무죽죽한 것이!” 그래 실컷 지껄여라…. 나는 일단 이 짐짝 같은 몸뚱이를 숨기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심정으로 최대한 몸을 움츠렸고, 다행히도 나를 보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듯하다가… 무어라 말하는 효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효빈이를 남겨두고 어딘가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다녀온 듯한 희렴이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먹고 싶다던 가토 쇼콜라.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또 다시 두 사람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내내 온몸으로 퍼져버린 괘씸함. 오호라…, 나한테 말도 못한 그 약속이, 효빈이랑 시내를 나오는 거였지? 더 지켜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돌아서 학교로 돌아왔다. 혼자뿐인 방안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문소리. “다녀왔습니다~” 때문에 다시 숨을 죽이고 베개 맡에 얼굴을 묻었다. “언니, 자요?” 이불을 둘둘 뒤집어쓰고 있는 나를 조심스레 흔들어 보는 효빈이. 그러나 아무런 동요가 없자 다시금 방을 나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지금 기분으로 효빈이를 대하면, 나도 모르게 화를 낼지도 모를 것 같아서…, 나는 이제 정말 어쩌면 좋지? ※ “휘유.”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땅 꺼지겠다.” 일부러 마주치지 않기 위해 혼자 내려와 있는 식당에 어느새 나를 발견하고 맞은 편 의자에 앉으며 식판을 내려놓는 찬휘. “왜 혼자야?” “후. 몰라아…. 요즘 내 기분이 말이 아니야.” “그래? 근데 혼자서도 밥은 꼬박꼬박 먹으러 내려오네.” “너 내가 밥 잘 먹는 꼴이 그냥 막 보기 싫은 거지?-_-” 이놈의 자식이, 령우가 없으니까 이젠 네가 나를 힘들게 만드는 구나…. 대꾸가 없자 잠자코 밥을 먹는 찬휘를 향해, 문득 물었다. “찬휘야.” “응?” “네가 봐도, 효빈이 이쁘지?” “뭐…그 정도면 예쁘지. 예전에……,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잠깐 멍해 있던 것도 잠시,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하다 말고 올려다보며 묻는 찬휘. 때문에 말을 할까 말까 우물쭈물해하며 입을 오물거리다 말고 의기소침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효빈이가… 희렴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건 아닐 걸.” 하지만 찬휘는 마치 어떠한 확신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완강한 표정으로 답한다. 대체 뭐땜시롱 그렇게 확신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이 고개를 갸웃하자 넌지시 묻는다. “아직도 희렴이 못 믿어?” “아냐, 그건! 그치만……” “알잖아, 희렴이. 네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정 궁금하면 혼자서 속 앓지 말고 직접 물어보든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니가 그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지 궁금하단 말이다. 그렇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둘이 있을 일이 대체 뭐 있냔 말이야…. 원래 그러던 녀석이 아니어서 더욱 그래. 어쩐지 걱정이 되고 또 효빈이는 예쁘기까지 하니까…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릿속이 뒤죽박죽, 갑자기 물밀 듯 밀려오는 심란함을 참지 못해 꾸역꾸역 밥을 퍼나렀고. 잠시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찬휘는 아주 조심스럽게, 슬금슬금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축 처진 어깨로 식당을 나오던 그때, 멀리서 나를 보고 걸음이 빨라져오는 누군가. “밥 혼자 먹었어?” 미소 띤 얼굴로 묻는 녀석을 애써 외면한 채 눈도 맞추지 않고 대꾸했다. “그럼 혼자 먹지 누구랑 먹어…. 너랑 효빈이 둘 다 나갔는데.” “자.” 찔리라고 한 말이건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내 손에 쥐어 준다. 예전에 도 한번 이와 비슷한 좋지 않은 추억이 있던 탓에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히 꺼내 든 것은…아까 오전에, 효빈이와 함께 산 것으로 추정되는 초콜릿.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했건만 보자마자 가슴 언저리가 불끈 끓어오른다. “……안 먹어!!!” 별안간 빽 소리를 지르며, 녀석이 손수 내 손에 쥐어준 상자를 다시 내밀었고 살짝 놀란 듯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묻는다. “왜?” “내가 언제 이거 먹고 싶댔냐!” “…샀으니까 그냥 먹어.” “안 먹는대두!!” 그리고 결코 그러할 생각은 없었는데… 억지로 떠넘기고 떠받다보니, 다시 희렴이의 손에 들려지기 전에 투욱 소리를 내며 떨어진 상자. “아…….” 벌어진 상자에서 나온 초콜릿이 형편없는 모양새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모습과 희렴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아무 말 없이 허리 숙여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을 상자에 주워 담는 희렴이. 나 또한 빠르게 따라 앉아 주워 담기 시작했지만.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희렴이가 무미건조한 어투의 말과 함께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나 화났어.” 그건 아마… 내가 녀석을 보아온 이래 처음으로 화낸 모습. 미안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차마 어떻게 할 수조차 없었지만, 나 또한 화나고 속상한 어린애 같은 마음에 그대로 돌아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흥! 화났다고 하면 누가 잘못했다고 말 할 줄 알구…….” 그치만 지금 당장 녀석을 마주치기라도 한 다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미안하단 말을 주체할 수 없을 지도 몰라. 가만있으면, 사과하러 달려갈 것만 같은 마음에 방안에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책상에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와중 귀에 쏙쏙 들어오는 라디오 사연. [평소 아껴라했던 예쁜 후배와 내 남자친구가 바람이 나다니, 정말 이럴 수 있는 건가요?] 덕분에 귀가 쫑끗. 라디오의 음량을 더욱 크게 하고 귀 기울이고 있는 마당에 마치 누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어떻게 그리도 똑같은지 눈물이 절로 난다. [둘이 같이 돌아다니는 걸 봤다고 한 친구의 말에도 설마설마 했는데, 어쩐지 얼마 전부터 남자친구가 갑자기 이것저것 선물을 하더라구요. 제 딴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결국엔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제 남자친구랑 눈 맞은 후배도 평소 아껴왔던 동생인데 정말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라구요. 예…, 정말 속상하시겠어요. 저희도 달리 드릴 말씀이 없네요.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시구 힘내시라고 신청곡 들려 드릴게요, 진주의 난 괜찮아!] 그리고 연이어 나오는 반주. 이보시오들. 그쪽은 괜찮을지 몰라도……난 결코 괜찮지 않단 말이다! 라디오를 끄고 다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무렵 들려오는 문소리. 때문에 나는 책상에 앉은 자세에서 재빠르게 잠이든 척 엎드렸다. “언니.” 아니나 다를까 방에 들어온 효빈이가 책상 위에 엎드린 나를 조심히 흔들고. “언니, 언니~” 그래도 전혀 미동이 없자 더욱 거칠게 흔들어댄다. 하지만 나 또한 죽은 사람만치로 꿋꿋이 그 자세를 유지했고. 참다못해 궁금증 반, 답답한 마음 반으로 소리치는 효빈이. “언니 왜 내가 올 때마다 자는 거예요!” “…….” 더 이상은 포기한 듯 나를 내려다 보다 말구 다시 신발장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서있다 말고, 잠든 척한 나를 향해 말한다. “저 지금 고백하러 갈 거예요, 언니. 언니한테 미리 말 못 해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언니가 응원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효빈이가 나갔음을 알려주는 듯 타악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나고서야 부스스 눈을 떴다. 그래, 고백을 하던 고사 하던 마음대로 해라 싶어 그대로 침대에 털썩 옮겨 누워 다시 한번 효빈이의 말을 곰곰이 되뇌어 보다 말고… “뭐어?!”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설마 시방 지금 효빈이가 원희렴한테 고백한다고 한 거야?! 저절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 몇 분간 멍하니 앉아 있다말고,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뛰쳐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뛰어 A반 교실로 갔다. “희, 희렴이 어딨어?!” “희렴이? 잠깐 뭐 좀 가져오겠다고 숙소로 갔는데?” 머리 꼴하며,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학교 안을 뛰어다니는 나는 여지껏과는 또 다른 이유로 많은 시선을 받았고. 그런 것 쯤 아랑곳 않고 달려 다시금 숙소 앞에 도착했을 즈음… 먼발치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부터 걸어오다, 나를 발견하고는 마치 못 본 것 마냥 그대로 지나치려 하는 녀석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아, 안돼!” “왜 이래.” “너 지금 효빈이한테 가려구 그러지…? 안돼, 절대 못 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못 가!!” 그러자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으로 발밑과 내 눈을 번갈아 본다. 이 위험한 자식…. 막무가내로 막고 선 나를 향해 다시금 말한다. “내가 가봐야 해.” “글쎄 니가 효빈이한테 왜 가는데!” 또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에 아차,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나한테 화나 있었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구! 그, 그래두… 그렇다구 바람을 피면 어떡해, 이 자식아. 아무리 젊고 예쁜 애가 좋다지만 너는 그러면 안되지, 이 나쁜 놈아아아아!” 이렇게 냅다 소리를 지르고 보니 속상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울컥하는 마음에 주먹으로 녀석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한 말에 잠시 멍해 있다가, 더럭 내 손을 잡아 맘춰 세우며 묻는다. “무슨 소리야?” “너, 아까두 효빈이랑 있었던 거 내가 몰랐을 거 같아? 그래두 암말 안하려구 했는데… 그런 거 사오면 누가 고맙다구 헤벌레할 줄 알구? 차라리 바람을 펴도 내가 모르게 하던가!” 그 내 말에 ‘허’ 하고 당황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희렴이가 막 입을 떼려 한 순간, 기숙사 건물 뒤편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희렴이와 내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이내 몇 발자국 걸음을 떼자 아카시아 나무 벤치 앞에 서 있는 효빈이와 찬휘. “머리도 좋다면서……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는 게 어디 있어!” 가만히 마주보고 서있는 찬휘를 올려다보며 악을 쓰듯 소리치며 우는 효빈이.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이 야속한지, 연거푸 떨어지는 눈물을 닦다말고, 더럭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손으로 잡아 쥔 채 말했다. “기억해, 나쁜 자식아!”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60. 저에겐 2년 동안 좋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작 2년이라구요? 그런 말 할 사람은 조용히 돌아가 주세요. 나는 지금부터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2년 전, 2학기가 막 시작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부모님께 허락받지 않은 무단 외박, 이른 바 가출로 인해 개학 후 학생과 지도를 받게 된 저는 결국 벌로 화장실 청소를 하던 무렵이었지요. “제길, 썩을 것들. 내일 학교 오기만 해봐. 다 죽었어.” 그 가운데도 재수가 옴팡지게도 없었던 저는 혼자만 벌을 받게 되었고, 낑낑거리며 화장실 청소를 혼자 끝마치고 교문으로 나왔지만, 역시나 재수가 없었죠. “아…….” 아까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하던 밖에는 어느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잔뜩 지친 몸으로 입을 쩌억 벌리고 망연자실 서있던 그때,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내 옆에서 우산을 피던, 그 사람. 나도 종종 학교 안에서 마주치곤 했지만, 한 번도 자세히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미소년다운 외모로 아주 대단한 인기였죠. 다만 조금 특별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저는 약 30센티도 되지 않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마주 본 것 이었습니다. 하늘하늘한 머리칼. 백옥같이 뽀얀 피부. 쭉 뻗은 콧날. 살짝 벌어진 입술하며…나는 그제야 왜 그가 그토록 인기가 있는 줄 알게 되었죠. 그렇게 정신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와중, 갑자기 그 또한 저를 바라보더군요.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죠. 그리고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고 머리를 추스르던 제게, 그가 말했습니다. “비가 많이 온다. 이거라도 쓰고 가.” 그리고 멍해있는 제 손에 자신의 우산을 쥐어준 채, 그 퍼붓는 빗속을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생각했죠. 아아…, 이 얼마나 전형적인 사랑의 시작인가요. 모르긴 몰라도, 그도 분명 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러했겠죠! 실제로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제가 우산을 갈구하는 줄로만 알고 마지못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후일담을, 저는 모르고 있지만요. 어쨌거나 그것이 그 사람과 저의 첫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신 그와 말 한 마디 나눌 기회가 없을 줄 알았던 저는 우연한 기회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쿠, 냄시야.” 그 날도 어김없이 혼자 남아 화장실 청소를 하던 때였죠. 힘들게 여자화장실 청소를 끝마치고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지요. 그날따라 텅 빈 화장실이 유독 크게만 느껴졌습니다. “내 학주 그 인간 졸업할 때 봐. 그놈의 잘난 자동차에 똥칠을……” 오만 인상을 쓰고 지린내 나는 변기를 벅벅 닦고 있을 즘 문득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치만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뜸 말했죠. “거 퍼뜩퍼뜩 싸고 잽싸게 가쇼~” 그치만 어째서인지 뒤로 느껴지는 그림자에서 더 이상 움직임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거 안 쳐다 볼 테니까 그냥 싸요. 참, 물 내리는 것 잊지 말구. 다들 물도 안내리구 나가서 냄새가 얼마나 나는데! 거 손잡이 한번 댕기기가 그렇게 어렵디까?” 그래도 등 뒤의 그림자는 묵묵부답 요동이 없었지요. 내가 나가야 쌀랑가, 거 참 까탈스럽 기는. “진짜 안 본다니……!”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 특유의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저는 붉어진 얼굴을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갤 푹 숙였습니다. 제길,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이제 다신 얼굴도 못 볼 거야, 제길…. 입술만 꾹 깨물고 있던 와중, 그가 돌연 엷게 웃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도와줄까?” “예…?” “도와줄게.” 그리고 팔을 걷어부친 채 넓기도 넓던 화장실 청소를 도왔지요. 연거푸 괜찮다 말했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래서 전 한시간 내내 청소를 한 건지, 그의 얼굴을 본 건지 잘 모르겠어요. 가까스로 청소를 끝마치고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즘 교문 앞에서 반대편으로 향하는 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 저…오늘 고마웠습니다!” 그에 그 사람은 별 다른 말없이, 씩 웃어주고 손을 흔들어주었지요. 그 뒷모습을 보는 내내 저의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웃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요, 저는 그날 이후, 그에게 반한 겁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수집하기 시작했죠. 현재 3학년이라는 것과 이름 또한 외모와 걸맞는 서찬휘. 또한 그가 주로 서식하고 있다는 도서관. 저는 그날부로 바로 독서부에 들었고, 하루 왼 종일 그를 따라 도서관에 머물렀습니다. 후우, 이제 어느 정도 나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그만 말 놓을게. 방과 후 도서관에 앉아 멀리서나마 그를 지켜보는 것이 어느 정도 일상이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지. 지적이게 책을 좋아하는 그 옆에는 주로 어울리지 않는 친구들이 옆을 지켰지. 하지만 난 별로 개의치 않았어. 그럴수록 그의 외모는 더욱 빛을 발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그에게 묻더군. “찬휘 넌 왜 여자친구 안 사귀는 거야?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애들만 몇 명인데… 너 슬슬 게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거 알아 몰라?” 그 순간 언제나 그의 옆에 껌딱지모냥 붙어있던 뚱땡이 친구가 예뻐보였어. 나 또한 궁금했다 이거야! 나는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대화에 더욱 귀를 기울였지. “뭐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아직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그으래…? 그럼 대체 네 이상형은 어떤데?” 선배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며 묻는 뚱땡이. 저 표정은 뭔가 켕기지만 질문 하나는 알차구나. “음, 굳이 따지자면… 키는 164에서 168 정도가 적당하고, 머리는 허리를 넘지 않는 긴 생머리였으면 좋겠어. 얼굴은 특별하게 예쁘지 않아도 좋지만 꾸미지 않아도 귀여운 타입이 좋아. 그리고 생활이나 취미, 생각이나 취향이 나랑 비슷하면 좋겠지.” 때문에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어. 그 중 들어맞는 것이라곤 163인 내 키를 164 정도로는 속일 수 있다는 것뿐이었으니까. 고작 15살 난 별 볼일 없는 계집애일 뿐이었지만,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이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가출도 했고, 술도 먹고, 사실 모자람 없으면서 삥도 뜯어본 양아치는 선배와 잘 어울리지 않는 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닿았어. 그렇지만 겨우 그런 것 때문에 포기할 생각 또한 없었어.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어쩌면 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 뭐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언니 이제 변하기로 결심했다.” 언제나 부스스하게 하고 다녔던 갈색 머리를 본래의 색으로 염색도 했고 터질 듯 줄였던 교복을 보기 좋을 만큼만 맞게 수선도 했고 늘 관심도 없었던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 사실은…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친구를, 어떻게든 제정신을 찾게 만들 요량으로 그가 대충 둘러댄 말이라는 것을 나는 전혀 알 리 없었거든.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의 앞자리를 차지했어. “어머, 손이 안 닿네….” 그리고 종종 일부러 그가 내 옆을 지날 때면 닿지도 않을 만큼 멀리 올려져 있던 책을 향해 까치발을 든 채 손을 뻗고 있으면, 그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책을 내려주곤 했지. “자.” 이런 사람이었어, 그는. 안 좋아하겠다고 마음먹어서 그럴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던 거야. “어머, 감사합니다. 답례로 차라도 한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사드린다잖아요, 제가. 그냥 마셔요!”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는 그를 더럭 끌고 복도로 나왔지. 다시 또 억지로 그의 손에 캔음료를 쥐어주고 생각하니, 확실히 민망했어. 그는 계속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거든. “고마워. 잘 마실게.” 그렇게라도 그와 한 마디 나눌 수 있다는 건 참 기뻤어. 하지만 그 작고 사소했던 기쁨 또한 오래가지 못했어. 그날도 평소처럼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그날따라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들어온 그가, 먼저 기다리고 있던 뚱땡이 친구에게 작게 무슨 말을 주고받자 더럭 뚱땡이가 큰 소리로 물었지. “뭐? 전학을 간다고?!” 그래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었고. 도서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어. 갑자기 일어난 나를 넌지시 올려다보던 그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해. “정말…전학 가요…?” 주위의 시선엔 아랑곳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물었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어. “목소리가 너무 커.” 때문에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 할 수 없었어. 도서관 안에 있던 그다지 많지않던 아이들이 수군대다 말고 하나 둘 짐을 챙겨 나가버릴 때, 결국은 나와 그, 그리고 눈치 없는 그의 뚱땡이 친구만 남아있을 때 까지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 뭔가를 눈치 챈 그가 친구를 보내고 나서야 한참 끝에 내게 말했지. “왜……”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왜 우냐는 말임에는 분명했어. 그래서 나는 잠긴 목소리로 가까스로 답했어. “흑, 너무, 너무 불쌍해서요…….” “…뭐가?” “아직 시작도 못해보고…,흑. 끝이 난 내 사랑이 너무 가엾어서 울어요, 흐흑….” 내가 자신을 좋아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줄 대답이 없어서였는지 그저 묵묵히 내가 눈물을 멈추길 기다렸어. 잠시 후에 조금이나마 진정된 내가 다짜고짜 그를 향해 물었어. “어디로 가요…?” “전남 강진.” “거, 거기가 여기서 많이 먼가요?” “조금.” “그럼… 가면 언제쯤 와요?” “…못 와. 거기서 고등학교 다닐 생각이야.” “흑…, 언제 가는 데요…….” “내일 아침에.” 나는 또 울었어. 더는 그도 아무 말 없었지. 짧았던 단발머리는 이제야 슬슬 자라나고 있었고, 우유를 마시기 시작한지도, 책을 본지도 얼마 되지 않았거든. 변한 모습을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 헤어져야 한다는게 너무 속상했어. “찬휘야. 담임선생님이 너 찾으신다! 반애들한테 인사하고 가래.” 도서관으로 그를 찾으러 온 다른 친구가 그 말을 전하고 돌아가자 그가 잠시 망설이는 내 얼굴로 바라보던 가운데, 물었어. “내 이름 알아요?” 당연히 알 리 없겠지만. 그는 미안한 듯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지. 그래서 나는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어. “만약에… 만약에요. 나중에라도 내가 키는 164 정도 되고, 머리가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될 때…, 책도 많이 읽어서 선배랑 대화하는데 불편이 없을 정도로 괜찮은 여자애가 되면, 그땐 저 선배 여자친구가 될 수 있나요……?” 설령 마지못해, 혹은 그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였다하더라도. 그는 처음 봤을 때, 그 미소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어. 더는 지체 할 시간이 없어서 인지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계단을 내려서던 그를 향해 좇아가며 외쳤어. “제 이름은 차효빈이예요!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땐 기억해 주는 거죠? 여자친구…할 수 있는 거죠……” 크고 쩌렁쩌렁 하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변해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때처럼 손을 흔들어 주던 뒷모습을 자꾸만 가리는 야속한 눈물을 닦아내고, 잊지 않기 위해 머리에, 가슴에 새겼어. 보잘 것 없고,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던 양아치 소녀가 차츰차츰 어여쁜 숙녀로 변해갔고 그를 만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부드러운 눈동자를 가리는 안경을 쓰고 있을 뿐인 그와, 전과 같은 것이 하나있다면 이름 뿐인, 어느새 몰라볼 만큼 예쁘게 자란 그녀가 정확히 2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 약속처럼 그녀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 한눈에 알아 봐주리라 생각했던 그가 전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조금만 지나면 그가 기억을 해내리라 생각했다는 것. 그렇지만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녀를 다시 울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에 알아봐 줄 것처럼 말했었으면서, 이제 와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구…?” 따지듯이 물어오는 나를 향해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 너무 속상해서… 헤어지던 그날처럼 눈물을 참을 길이 없었다. “인현중학교 3학년 6반 28번 서찬휘. 생일은 4월 9일, 별자리는 양자리, 혈액형은 AB형, 나는…, 하나도 잊지 않았는데… 꼭, 기억해주기로 했으면서…….” 결국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내 모습에 그가 허릴 숙여 내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다시 울컥함을 느끼며 말했다. “많이……나 많이 노력했다구요. 아직 말투 같은 건 다 못 고쳤어도 이제는 키도 컸고, 머리도 많이 길었구…근데 아직두 멀었나요…? 아님 너무 변해서 못 알아보는 거예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는 대꾸 없이, 나를 자리에서 일으키며 그때처럼 웃는다. 때문에 코를 훌쩍이며 고갤 들어 올리자 그제야 입을 뗀다. “만약 다시 만나면 그때는 네가 먼저 말을 걸 거라고 생각했어.” “됐어요. 핑계는 듣고 싶지 않아.” 볼멘소리로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고, 뾰루퉁한 내 모습에 그가 다시금 미소 짓는 것을 보고 더럭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보다 한 뺨 이상이나 크지만 까치발을 든 채 그의 귓가에 속삭인 말. “어쨌거나 기억 하든 못하든 이제 더는 상관없어. 그때 약속했으니까… 이제 와서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소용없어.” 때문에 그가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해도… 내게 놓이고 나서야 아주 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뒤돌아서며 그가 나직이 꺼낸 말. “변한 거……하나도 없네.” “에…? 여태껏 기억도 못하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괜히…….” 돌아서 있는 그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이 서려 있는 이유를, 그녀는 아직 모르나 봅니다. 사실 그녀가 소녀이던 그때부터… 옆에 있어 우산을 건네주었던 소녀를, 어쩐지 잊을 길이 없던 그가 우연을 가장하고 도서관과는 전혀 다른 건물에 있는 5층이나 되는 화장실까지 갔었다는 것도. 또 소녀가 기다리고 있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도서관에 가야만 했던 것. 그리고……다시 만났을 때에는 자신이 우산을 건넸을 때처럼, 이번엔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그렇지 않다면 하다못해 그때처럼 도서관 맞은편에 앉아 기다리리라 생각해, 요 며칠을 도서관에만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녀는 아마 끝까지 모르겠지요…….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소설제목 : 늑대사육소《 위험한 기숙사 》 작가명 : 낭만곰탱이＊ E-mail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연재장소 : 새싹소설② -10대 총편수 : 총 70 편 완결 장르 : N소설 -------- 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No.1｀낭만곰탱이＊(http://cafe.daum.net/bearnangman) 61. “어? 두 사람 다 어쩐 일로 여기 서있어?” 조금 전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서있는 나와 희렴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묻는 찬휘. 그럼에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슬그머니 희렴이를 올려다보았고 어이없는 듯이 나를 내려다본다. “헤헤, 그, 그냥 잠깐 지나다가……” 그런 녀석을 외면하며 멋쩍은 듯이 말했고, 찬휘와 뒤에 서있던 효빈이 또한 다소 붉어진 얼굴로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다시 단 둘이 남은 어색한 상황. 민망함을 감출 길 없던 내가, 되려 큰 소리로 녀석에게 말했다. “근데! 아까 효빈이랑 둘이 나가서 뭐했어?!” “이거 찾으러 갔어.”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우산……?” “찬휘가 자신을 기억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 같이 찾으러 가 준 것뿐이야.” “원래 효빈이를 알고 있었어?” “근처 중학교였으니까.” 라고 말하니 참 할 말 없다. 그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랴…, 싶지만 차마 굳힐 수도 없었기에 철판 깔고 말했다. “그치만 오해 할만 했잖아! 나한테 말해줘도 되는 거였으면서….” “그러는 자기는 내가 사준 옷 막 빌려주고.” ……그 말에 강다희 완패.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문득 쇼핑백 안쪽에 들어있던, 아까 무참히 떨어졌던 초콜릿 상자가 보인다. 그럼에 덥썩 집어 들어, 땅에 떨어졌던 그 초콜릿을 입에 넣었고, 놀란 듯이 바라보는 희렴이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히히, 맛있다.” “……더럽게.” 마음에도 없는 미운 말을 하지만, 그와 다르게 엷게 웃어 보인다. 아주 잠시라고 해도… 내가 희렴일 의심한 건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다. 내가 녀석을 좋아한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내가 실망할 행동은 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쭈욱 그럴 테니까. ※ “정말 어찌나 멋지든 지요. 언니가 찬휘 오빠를 그때 봤어야 했어요. 반하고 말았을 거예요. 아, 그럼 안 되지. 암튼 언니가 희렴 오빠랑 사귀고 있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다행스러운 일이예요!” 장장 30여 분째. 그녀는 쉬지도 않고 입을 놀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찬휘와 그런 일이 있던 후로 다소 변한 효빈이. 수줍은 듯이 고갤 수그리던 모습은 다 어딜가고 말도 많고 억센 그녀. 물론 어느 정도 내숭이리라 생각은 했었지만…이 여자, 벅차다.-_-그래도 뭐, 전보다는 더 친해지긴 했지만. 어쨌든간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열심히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와중, 궁금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물어오는 효빈이. “참, 언니는 희렴 오빠랑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아, 그건……” 그저 잘생긴 얼굴뿐이라면, 관심에서 그쳐버렸겠지만…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었기에 이미 떠나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한 사람만을 기다리던 그 녀석의 순정에 아마 지켜보던 내가 흔들려 버린 것 아닐까 싶어, 라고 장황히 설명하려했지만, 들뜬 듯이 말하는 효빈이의 한 마디에 나는 굳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희렴 오빠라면 분명히 굉장히 멋지게 고백했을 거 같아요. 무슨 말 하면서 사귀자고 했어요? 사귄지는 얼마나 됐구요?” “그…그런 거 없는데. 고백은 내가 했어~ 그냥 어쩌다보니 사귀게 된 거구… 그러고보니 사귄지는 얼마나 됐더라…?” 멋지게 고백…? 멋지지도 않았지만 후줄근하게나마 고백을 한 것은 나였고, 달리 프러포즈라 할 것도 없이 처음엔 그저 보수 30만원의 아르바이트였고…그러고 보니 심지어 나는 희렴이와 내가 만난 지 얼마나 됐는지 조차도 서로 모르고 있으니!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얼굴이, 마치 바람 빠진 풍선마냥 축 쳐져 말한다. “에에……. 정말요? 뭔가 굉장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 따로 프러포즈를 안했단 말이에요? 좀 의외다.” “그러는 니네는 했냐?-_-” “꺅, 그런 건 묻지 마세요….” 대뜸 나의 질문에 돌연 얼굴을 붉히는 효빈이. 오호라, 뭐 있는 모양이지 싶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얼레? 뭐 대단한 일이라두 있었나부지? 뭔데, 말해봐아~” “몰라요!” 그리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교실을 뛰쳐나갔다. 나갈 것까지야…. 아무튼 찬휘 그 녀석, 의외야. 그리곤 혼자 끄적끄적, 곧 있을 학생회장 선거 준비에 몰두했다. 선생님이 해보라고 하셔서 한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여간 신경 쓰이고 까탈스러운 일이야. 열심히 지키지도 못할 공략을 끄적이고 있는 와중 뒤에서 작게 부르는 목소리. “다희야.” “응? 누가 불렀어?” 따라서 뒤를 돌아보자 장난치며 놀고 있던 무리 중 한명이 뒷문을 가리기며 말한다. “누가 너 찾고 있어, 나가 봐.” “나를?” 때문에 고개를 갸웃하곤 아이들이 가리킨 뒷문으로 나자가, 문 앞에 기대서 있다가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말을 건넨다. “네가 다희니?” “누구…세요?” 180은 족히 되 보이는 훤칠한 키에, 흑갈색의 단정한 머리. 깔끔하게 다려 입은 깨끗한 교복. 거기에다… 사람 환장할 만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그의 입에서 나온 듣기 좋은 저음. “반갑다. 난 학생회장 이원우라고 해. 이번에 학생회장 선거에 나간다며?” “아, 네.” “도와주려고 왔어.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말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파일과 함께, 다른 쪽 손에 쥐여져 있던 따끈한 코코아 캔을 내민다. 멀거니 서서 멀뚱멀뚱 그것을 바라보자, 어서 받으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아…, 감사합니다!” 때문에 고개 숙여 인사하며 멋쩍게 받아들자 피식 웃으며 말한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랑, 이것저것 기록해 놓은 파일이야. 아마 도움이 될 거야. 선거까지 몇 주 안 남았지만…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편하게 대해. 친하게 지내자.” 멍해있는 나에게, 전혀 불편함의 기색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온 듯 따뜻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학생회장. 나는 그때까지 멍하니 서서 그가 멀어진 복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뭔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로구나. 아무튼 후딱 정신을 챙기고서야 그가 건네준 파일을 넘기며 기숙사 건물로 향하고 있던 와중 운동장에 모인 많은 차들을 보고서야 깨달은 사실. 그러고 보니 오늘, 진학상담이 있다고 했던가. 학교 곳곳에 정중히 차려입은 학부형들이 보인다. 인적이 드문 학교에 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신기함에 넋 놓고 구경하며 걷다가, 뭔가 어스름한 느낌에 제대로 앞을 바라보았을 땐 이미 늦은 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깨를 부대낀 내가 뒤로 밀려났고, 나와 부딪힌 누군가 또한 어깨를 움켜쥐며 멈춰섰다. “아야….” 찡한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빠르게 고갤 들자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중년의 아주머니. 짧은 헤어컷의, 검은 치마정장이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어딘가 냉소적인 느낌을 주는 그런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놀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 죄송한 얼굴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지만,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팍 쓴 채 냉랭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뭐니, 조심하질 못하고서.” “죄…죄송합니다.” 내심 놀라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신 탓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부딪혔던 어깨를 털어 내리며 슬쩍 위 아래로 훑어보는 아주머니. 뭔가 느낌을 말 할 수 없는 애매한 시선에 당황한 내가 다시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지만 보지 못하신 건지 그대로 지나친다. “어디 다치진 않았니?” 그 냉랭한 분위기 속에 얼어붙어 멍하니 서있던 와중 들려온 목소리.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던 내 공책들과 파일들을 대신 주워든 채로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건네시는 아주머니. 조금 전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셨는지, 어느새 시선이 아까 넘어질 때 까진 손등의 상처로 옮겨갔다. “저런… 많이 아프겠구나.” “아니, 괜찮은……” 내 손을 잡은 채 앞에 있던 벤치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방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상처에 묻은 흙을 닦아주신다. 쓰라림에 얼굴을 찌푸리다 말고 조심스럽게 바라본 얼굴. 주름 하나 없는 고운 얼굴에, 긴 파마머리.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채 30도 되지 않을 듯이 젊어 보이는 모습에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말씀하셨다. “자, 됐다. 이따가 양호실에라도 가서 꼭 약 발라야 해.” “아, 감사합니다!” 아주머니의 말에 문득 내 손을 바라보자 대일밴드가 붙여져 있다. 꾸벅 인사하는 내 모습에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신다. “여학생은 혼자뿐이니? 생활하는데 조금 힘들겠구나.” “에…. 아니요~ 몇 주 전까진 그랬는데 지금은 다른 학생도 있어요. 내년엔 신입생들도 많이 올 거구요, 헤헤.” “어머, 다행이네. 하도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입학식 때도 느꼈지만 학교가 정말 큰 것 같아. 조금 전에도 강당이 어디인지 몰라서 한참을 헤맸지 뭐니.” “학교가 워낙 커서요. 저두 가끔 헤매는 걸요….” “그러니?” 말씀하시는 내내 누군가를 찾듯이 틈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는 아주머니를 따라 시선을 옮겼지만 멀리 보이는 다른 부모님들 외 수업시간이라 대부분 교실에 있을 학생들로 인해 생각보다 조용한 교정. “누굴 찾으세요?” “음… 아들이 마중을 오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아서 혼자 들어왔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아아…, 그러셨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길을 알려드릴 게요.” “그래주겠니? 고마워. 요즘 우리 아들이 도통 전화도 자주 안 하고 방학 때 집에 오지도 않아서 내가 좀 삐져있었거든. 그랬더니 미안한지 마중 나와 있겠다고 했으면서… 아마 여자친구가 생긴 게 분명해. 그러니까 전화도 뜸하고 주말에 잘 오지도 않는 걸 거야.” “정말요? 거 못된 녀석이로군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사실 그게 더 궁금해서 내려 온 거야. 우리 아들 여자친구라면 어떤지 내가 한번 봐야하지 않겠니.” 싱긋 웃으시며 기대에 들뜬 부푼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어쩐지… 고등학생씩이나 되는 아들이 있을 거 라고는 보이지 않는 외모로, 자랑스러운 듯이 아들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아무튼 이런 엄마가 있다니, 어떤 녀석인지 참 부럽네. “그러셔야죠! 여자친구가 생겼기로서니 부모님께 소홀해지면 쓰나요!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럴 거예요! 금방 정신 차리겠지요, 뭐! 그래도 계속 그러거든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따끔하게 혼을 내줄게요!” “그래. 꼭 우리 아들한테 전해줄게. 아, 네 이름을 알려주겠니?” “아, 제 이름은……” 더욱 성을 내며 말하는 나를 보고 연신 미소 띤 얼굴로 마주보시며 아주머니께서 물으신 물음에 막 대답 하려던 찰나였다. “어째서……여기 계신 거예요?”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62.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자 머잖은 곳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아주머니를 번갈아 보며 걸어오는 희렴이. “어? 수업 끝났어?” “아들!” 나의 물음과 동시에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순간 귀를 의심했으나, 활짝 웃으시며 다가온 희렴이를 덥썩 끌어안으신다. 뭐? 아들…? “어머닌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어…어머니라구?!” 상황 파악이 덜 된 얼굴로 아주머니와 희렴이를 보고 있는 가운데 희렴이를 가볍게 안아 어깨를 두드리신다. “하도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찾으려고 들어왔다가 길을 잃었지 뭐야. 마침 저 학생, 아니 다희라고 했지? 다희를 만나지 않았으면 더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신 채, 나를 향해 싱긋 웃으시는 아주…아니, 희렴이의 어머니. 그럼 설마…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신, 여자친구에 홀랑 빠져 부모님께 소홀한, 그 철 덜 들고 정신 못 차린 녀석이 참말 원희렴이란 말이더냐…. 서로 마주보며 멍해있는 나와 희렴이를 향해 의아한 듯 물으셨다. “어머, 설마 둘이 알고 있는 사이니?” 공황상태에 빠져 머쓱해있던 것도 잠시 뭐라 말씀은 드려야 하겠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이냐. “아, 저는…그러니까……”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신 못난 아들래미의 여자친구되는 사람입니다, 라고 감히 아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 민망한 상황을 어쩔꼬. 횡설수설하고 있는 나의 어깨를 끌어당겨 나란히 선 채, 담담히 말하는 희렴이. “제 여자 친구예요.” 때문에 도대체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런 날 알 리 없는 원희렴이는 당당하기만 하고…생각지도 못하셨는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시다가 돌연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신다. “정말이야? 세상에,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하…하하하.” 내가 씁쓸한 억지웃음을 지었고. 역시 놀라신 듯 한 희렴이의 어머니께서도 또한 힐끗 희렴이를 쳐다보시곤 서운한 투로 작게 말씀하신다.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왜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진작 말 안했니?” “오늘 말씀드리려고 했어.” “어쩐지 엄마한테 대하는 태도가 변했더니, 역시 그런 거였구나.” “내가 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시며 처연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는 어머니를 향해, 당황스러운 듯 낯빛을 붉히는 희렴이. 그런 희렴이에게 아주머니께서 하신 말씀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전에는 하루에 세 번 씩 꼬박꼬박 전화도 하고, 주말에는 꼬박꼬박 왔었으면서 요즘엔 이틀에 한 번씩 전화하구. 전에는 만날 잊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더니, 요즘은 통 그런 말도 없고….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 “내, 내가 언제 그랬어!” 녀석 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발끈하기 까지 한다. 아무튼 그 말에 나의 시선이 지그시 희렴이에게로 꽂혔고. 나와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거… 아주 엄청난 마마 보이였던 게로구만! 붉어진 얼굴로 연거푸 ‘내가 언제…’ 라고 읊조리는 희렴이와는 상관없이 싱긋 웃으시며 내 손을 꼬옥 잡으시는 아주머니. “하지만 그 여자 친구가 다희라면 엄마가 이해 할 의향은 있어. 우리는 뭔가 마음이 잘 맞는 것 같거든. 그지?” 덕분에… 내가 느끼고 있던 민망함과 어색함이 싹 사라졌다. 나 또한 얼굴을 ??히며 웃고 있을 즈음, 뭔가 생각난 듯 말하는 희렴이. “여기 계속 계실 거예요? 곧 상담시작인데.” “아, 그렇지. 잊고 있었네. 어서 가자. 이런 데 늦으면 안되잖아.” 아주머니와 희렴이, 그리고 나. 셋이 강당으로 옮겼고. 강당 안에는 이미 많은 학부모들이 모여 있었다. 담임선생님들과 상담을 하기 전, 미리 강당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시는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강당 뒤 화단 벤치에 앉은 희렴이와 나. 가만히 앉아 있다 말고 괜한 장난기가 발동해선 대뜸 말했다. “아유, 나도 원장님한테 전화해서 사랑한다는 말이나 해드려야겠네~” “…….” “근데 그렇게 꼬박꼬박 전화를 하는지두 모르고 있었네. 나는 한 달에 한번 전화도 못하는데 이틀에 한 번씩이나…. 우리 희렴이 아주 효자야~?” “…하지 마.” “왜 정색을 하구 그래! 나도 본받아 야겠어~ 앞으로 어머니께 전화할 땐, 나한테도 말해? 같이 전화하……읍!” 말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희렴이의 옆구리를 연신 쿡쿡 찔러대며 놀리고 있던 참에 돌연 장난치던 내 손목을 움켜 쥔 채 다른 한 쪽 손으로 대뜸 내 입을 틀어막는다. “놀리지 말라고 했지.” 낮게 깔린 저음에, 정말 화가 난 건가 싶어 입을 꾹 다물었고… 희렴이의 기분을 살피기 위해 살짝 눈을 내리떴을 즈음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놓으며 고갤 들었다. “창피하잖아….” 고갤 든 희렴이의 얼굴은 화가 나 있다기보다… 부끄러운 듯이 붉어져 있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 듯, 눈을 맞추지 못한 채 내 입을 막았던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린다. “아니 나는 그냥 장난으로… 화났어?” “화 난 게 아니야.” 입을 막고 있던 손은 놓았지만, 손목을 잡은 희렴이의 손에선 어쩐지 점점 조여 온다. “네 말대로 난 마마보이에 효자일 걸, 분명. 근데… 내가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만든 거, 여자 친구 밖에 모르는 불효자식으로 만든 거…, 그건 너잖아.” 그렇게 나오니 또 할 말 없다. 손목을 잡고 있는 희렴이의 손은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멍해진 채로 희렴이의 얼굴을 멀뚱멀뚱 보고 있는 가운데 슬그머니 다가오는 녀석의 얼굴. 놀란 내가 숨을 들이킴과 동시에 귓가에 속삭였다. “나보다 네가 더 나빠.” 그리고 살짝 고갤 틀어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창피하다고 말하며 부끄러워하던 아까와는 달리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도리어 뚫어져라 쳐다본다. 때문에 내가 재빨리 고갤 돌려 시선을 피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 참… ‘응응’ 한 상황이 아닌가……. 인적이 드문, 나무가 무성한 벤치에 단 둘이… 손목을 잡힌 채로… 내 쪽으로 향해 있는 희렴이의 몸. 서로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묘한 시선……. 가늘게 뜬 시야로 천천히 가까워져 오는 희렴이의 붉은 입술을 본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대로 두 눈을 꾹 감으려던 찰나였다. “여기 있었네!” 바스락 소리와 함께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희렴이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나를 밀쳤고, 나는 그로 인해 그만 벤치 아래 흙바닥으로 궁둥이가 떨어져지는 비참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으헉!” “괘, 괜찮아?”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털퍽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추락한 나를 일으키는 희렴이. 나는 궁둥이가 깨어질 듯 한 그 아픔보다도 먼저 밀려온 분노에, 대체 어떤 작자인지 세차게 고갤 돌렸고, 그 곳엔… 어리둥절해하며 나와 희렴이를 바라보는 반장 녀석이 서 있었다…. “왜 그래? 내가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나?” 심하게 비틀어진 내 표정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하고 배알도 없이 껄껄 웃는다. 이 자식은 꼭 이럴 때만 나타나드라…. 너 이놈의 자식, 네 놈 때문에 내 키스가……. “어쩐 일이냐…….” 절망감에 휩싸여 빠져나올 수 없던 나로서는 마치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바닥에 낮게 엎드린 채로 점점 눈만 치켜뜨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나를 가까이서 본 희렴이는 흠칫하며 몸을 떨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상황파악 안된 반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이거 주려구 찾아다녔지.” “그게 뭐냐….” “령우한테 온 편지 같던데?” “뭐어? 령우 편지?” 그제 서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를 받아들었고 보낸 사람 이름이 령우임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었다. 편지는 생각보다 짧았다. 희렴이 또한 옆에 서서 같이 편지를 읽었고, 다 읽고난 내가 잠시 멍해 있다말고 더럭 걸음을 옮기려 하자 묻는 희렴이. “어디 가?” “편지에 령우 어머니가 오신다고 했잖아. 빨리 가봐야지!” 설레고 들뜨는 마음으로 강당으로 가자, 이미 설명이 끝난 강당엔 각자 아이들이 있는 반으로 돌아 가시는 많은 부모님들 속에서 대체 어떻게 령우의 어머니를 찾아야 할지… 망연자실해 있는 가운데 희렴이가 말했다. “교실로 가보자.” 고갤 주억거리며 교실로 향하는 내내 떨리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령우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실까? 희렴이네 어머니처럼 따뜻한 분이실까, 엄한 분이실까…. 령우와 많이 닮았을까? 령우는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언제쯤이면 돌아오련지… 여쭙고 싶은게 너무 많다. 교실로 가자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아이들이 가득하고. 더럭 옆에 있던 반장을 붙잡고 물었다. “저기, 혹시 령우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알아?” “령우네 어머니? 아, 아까 계셨는데……아, 저??다. 저 분이야.” 내 말에 잠시 교실을 빙 둘러보다 말고, 어느 한 곳을 가리기며 답했다.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시선을 돌리자…세상에 맙소사. 신의 장난이 아니라면, 이럴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독 고고한 자세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짧은 헤어컷에, 검은 치마 정장이 유독 잘 어울리던 아까의 그 아주머니. 설마 저 분이 령우의 어머니이리라곤……. 잠시 굳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말고 숨을 크게 쉬고 아주머니의 앞으로 다가갔다.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말고, 다가선 나를 향해 무의미하게 응시하신다. 참 곱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희렴이네 어머니만큼 젊고 기품 넘치는 외모이지만, 전혀 웃음이 없어 보여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기 까지 하다. “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표정이 없는 무뚝뚝한 시선으로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올려다보시다 고개를 훽 돌려버리신다. “저어, 늦었지만 다시 인사드릴게요. 저는 령우 친구……” 아주머니의 냉대에 이미 잔뜩 주눅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지만 더는 나를 바라보시지도 않던 령우의 어머니께선, 별안간 교실로 들어오시던 선생님께로 그 시선을 옮기셨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선생님께로 향했고, 령우의 어머니임을 알아본 담임선생님이 먼저 말씀을 건네셨다. “어머, 령우 어머님이 아니세요?” 서글서글하게 웃으시며 사람 좋게 말씀하시는 담임선생님의 인사에도 나를 바라볼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실 뿐, 다른 어떤 인사치례나 일체의 불필요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령우 차례가 되려면 아직 좀 더 기다리셔야 하는데… 참, 령우는 좀 괜찮아 졌는지 모르겠네요. 언제쯤이면 돌아 올 수 있을까요?” 선생님의 물음에 나 또한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들려온 대답은……. “령우는……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63. 멍하니 두 분을 지켜보고 선 나.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며 되묻는 담임선생님을 향해 령우의 어머니께선 우리들의 놀란 기색과는 관계없이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셨다. “본론만 말씀드리지요. 령우는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영국으로 데려가겠어요. 유학수속을 준비해주세요.”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고 몇 번이나 되뇌어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당황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담임선생님에 앞서 다짜고짜 물었다. “…어째서요? 분명히 아까 편지에, 돌아오겠다고… 다리를 다쳐서 늦어지는 것뿐이라고 곧 올 거라고…어머니께서 잘 말씀해주실 거라고,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어째서요……?” 다소 억세 보일지도 모를 만큼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불안정하게 떨려오던 목소리가 언제, 어디서 잠겨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제야 시선을 내게로 돌리며 물끄러미 바라보셨지만, 이내 다시 흥미가 없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시며 내가 아닌 선생님 쪽을 향해 말씀하셨다. “학교는 다니던 곳에서 마저 다니는 게 령우에게 좋으리라 생각했지만, 마음이 바뀌었어요. 혼자만 한국에 두고 온 것도 늘 마음에 걸렸고 령우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부모로써 자식을 데리고 있으면서,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아,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너무 당황스러워서….” “당분간은 한국에 있을 생각이니까 수속은 천천히 하셔도……” “령우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담임선생님께서는 말씀을 나누시는 가운데 끼어든 나를 향해 나무라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후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게 물으시는 아주머니. “학생이 다희인가?” 내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고, 령우 어머니께서는 처음으로 나를 향해 입을 여셨다. “물론 령우는 한국에 있길 원해. 령우에게서 학생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 들었어. 소중한 친구라고…. 학생은 령우를 어떻게 생각해?” “저한테도 그래요. 그런데 갑자기 령우를 데려가신다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아요….” 아주머니의 말이 끝 마치지기 무섭게 대답했다. 분명 령우는…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 곧 돌아온다고 말했는데…대답을 기다리는 나를 향해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응시하며 말씀하신다. “학생에게도 령우가 소중하다면, 굳이 이의를 가질 이유는 없지 않은가? 영국으로 가는 게 령우에게 좋을 거야.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원하는 걸 배울 수도 있고.”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령우에게 좋은 게 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 학생이니까 잘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건 나뿐만 아니라 엄마 된 입장이라면 누구든 마찬가지 일 거야. 나는 이보다 좀 더 좋은 환경에서 령우가 지냈으면 하는 것뿐이야. 그 쪽 부모님으로서도 학생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내게 하고 싶으셔서 이 학교로 왔을 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야. 한번 어머니께 여쭤봐. 세상 부모 마음이 다 그렇지 않겠어.” “…그런 거 물어볼 어머니가 제겐 없어서요…….” 내 대답에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시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떼신다. “내가 실수를 범했나보네.” “좋은 환경에 있다고…… 령우의 행복이 결정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국에 있다고 배우고 싶은 걸 못 배우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령우가 원하지 않는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령우가 가고 싶다고 해도 기뻐할 수 없을 텐데… 이렇게 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봐, 학생…….” 내 말을 가만히 들으시다 말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다소 성가신 표정으로 바라보신다. “나는 그 애 엄마야. 좋았으면 좋았지, 자식에게 안 좋은 걸 권하는 부모는 없어. 알아듣겠어요?” “물론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령우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래를 결정하실 권리는, 저희에게서 령우를 데려가실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주머니가 연거푸 ‘하’ 하고 기가 찬 숨을 내뱉으셨고, 보다 못한 선생님께서 다른 아이에게 시켜 나가있도록 했다. 교실 밖에 서서, 상담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내내 뚝뚝 떨어지는 눈물. 닦을 생각조차 않고 그대로 문에 기대 서 훌쩍이고 있을 무렵…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단숨에 뛰어온 희렴이. “왜 울어?” 놀란 듯이 다그쳐 물었고,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희렴이를 보다말고 입을 뗐다. “령우가…오지 않으면 어쩌지? 멋있어져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보지 못할까봐, 그래서 나……” 아무 말 않고, 울고 있는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희렴이. 사실 난 겁이나. 나 때문에 령우가 가게 된 것만 같고, 나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정말 겁이 나…. 내가 차츰 울음을 그칠 즈음 멀리 교무실 앞 복도에서 누군가 말한다. “다희야, 전화 왔다!” 사감 선생님이신 듯… 애써 눈물을 훔치고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들께 가볍게 인사를 하고 수화기를 들었을 때… 들려온 목소리에 왈칵 쏟아진 눈물. ?다희야??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잠시 멍하니 듣고만 있는 가운데 수화기 너머로 연신 령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희야, 전화 받았어? 말 좀 해봐.? 간신히 울음을 참아내느라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말고 잠겨있던 목소리로 답했다. “댜체 언제……돌아 올 거야.” ?후, 난 또. 왜 이렇게 대답이 늦어? 아무 일 없는 거지??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 ?근데 목소리가 안 좋다. 우리 엄마 만났어?? “……아니, 아직 못 뵀어.” ?인사하면 엄마가 알아보실 거야. 내가 웃기는 얘기 많이 했는데, 들으시곤 재미있는 아이라고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었어. 편지 받았지?? “으…으응. 저, 근데 령우야.” ?응?? “너희 어머니는… 어떤 분이야?” ?어떤 분이냐구?? “아니, 그냥… 난 잘 모르니까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서…….” ?좋은 분이야, 우리 엄마. 내 어머니여서가 아니구. 겉보기엔 좀 냉정해보여도 속정이 많으셔. 워낙 말이 없으신 분이라 처음엔 좀 불편할지 몰라도 얘기해보면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엄마도 네 얘기,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하셨으니까.? 오랜만에 듣는 령우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이야길 하는 령우의 목소리가 너무 밝아서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할 밖엔. “응, 그렇구나. 알겠어. 뵙게 되면 인사드릴게.” ?그래.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램마! 일은 무슨… 네가 자꾸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구 물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그럼 됐구. 오빠 안 보고 싶냐?? “거야 당연히……보고 싶지.” ?거 참, 그럴 줄 알았어. 며칠 있다 갈게. 뭐 가지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거 없냐?? “것보다 령우야.” ?응, 말해.? “며칠 있다가… 오는 거 맞지? 올 거지?” 내 물음에 잠시간 대답이 없다. 역시 그런 걸 물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걸까.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령우야?” ?갈 거야. 며칠 안 남았어, 깁스 푸르면 곧 갈게. 보고 싶어도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응…, 기다릴게. 빨리 와.” 아무 것도 모르는 령우에겐, 차마 아무것도 물을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가슴 한 구석이 시큰해진다. 짧은 전화 통화를 끝마치고 다시 교실 앞에 다다랐을 즘, 교실 밖으로 나오는 령우 어머니. 눈이 마주친 짧은 순간, 내가 작게 고갤 숙였고 더는 시선을 마주칠 이유 없다는 듯이 그대로 또각또각 구두소리와 함께 지나치는 아주머니께 말했다. “령우랑 통화했어요. 아주머니 말씀대로 령우는 아무 것도 모르더라구요.” 그러자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서시며 치뜬 눈으로 날카롭게 쳐다보신다. 그리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설마 쓸데없는 말을 한 건……” “믿어요.” 말씀하시던 중간에 섞여버린 내 말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시며 고갤 갸웃하신다.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저런 무표정한 얼굴도 령우와 많이 닮았다. 실은 선해 보이는 눈매도, 웃지 않고 굳게 다물고 있지만 입술도. 그래서… 어쩐지 싫게 느껴지지 않는 그녀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령우는 어머니를… 굳게 믿고 있어요. 전 령우의 웃는 얼굴을 참 좋아해요. 정말 아주머니 말씀대로 이 유학이 령우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면 웃으면서 기뻐하는 얼굴로 보내주겠지만… 령우 또한 실망해서 마음을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부탁드려요. 어떤 결정을 하시던지 령우에게 가장 좋은 쪽으로요.” 말과 함께 허리를 꾸벅 숙였다. 분명 령우에게는 제일 좋은 엄마가 분명한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어떤 결정이든, 내가 바꿀 수 없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 거라면 적어도 령우가 잘 되기만을 빌어요. 그런 마음으로 허릴 숙여 인사했다. 그런 나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내려 보시다가 이내 다시금 걸음을 옮기신다. “참. 처음엔 아주머니와 령우가 어디가 닮은 건지 전혀 몰랐었지만, 한번쯤… 웃어주시면 좋겠어요. 그럼 령우랑 정말 많이 비슷할 것 같아서요…….” 혼잣말처럼 되뇌었을 뿐이었지만, 그 말을 들으신 건지 짐짓 걸음을 멈추다 이내 재촉하는 발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한참 멀어진 뒤. 조금은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고 나 역시 기숙사로 향했다. ※ 별관 특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학교와는 먼 곳에 있어 특별히 묵어갈 수 있도록 마련 해놓은 방이었다. 조금 전 희렴과 인사를 해두고 올라온 윤영이, 그 속에서 유독 그 자리가 불편한 듯이 서있는 한 여인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희렴의 친구인 령우 어머니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령우 어머니 되시죠? 전 희렴이 엄마인데…아시겠어요?” 윤영의 뜻밖의 인사에 잠시 놀랐던 령우의 어머니, 희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그녀에게 윤영이 웃으며 말했다. “령우는 종종 봤었지만, 이렇게 부모님을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령우가 다쳤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은 가요?” “지금 영국에 있는 집에 와서 머물고 있어요. 상처가 좀 벌어진 탓에 같이 오진 못했구요.” “저런…, 많이 놀라셨겠어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걱정스러운 듯 얼굴로 말하는 윤영을 본 희주의 마음이 어딘가 한결 편안해 지는 것아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조심스레 입 밖으로 꺼냈다. “애 아버지 직장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사도 많이 다녔고… 중학교 때부터 혼자 한국에 남겨둔 게 늘 마음에 걸렸고… 이번에 다쳤다 소식을 듣고 아예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에 령우의 의견 없이 이민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잘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고민을 털어놓자 그녀의 어지럽던 머릿속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귀국을 하고 학교에 와 령우의 담임을 만나던 순간에도 그녀의 생각엔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령우가 늘 말하던 소녀, 그 아이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 령우는 어머니를… 굳게 믿고 있어요. 전 령우의 웃는 얼굴을 참 좋아해요. 정말 아주머니 말씀대로 이 유학이 령우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면 웃으면서 기뻐하는 얼굴로 보내주겠지만… 령우 또한 실망해서 마음을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부탁드려요. 어떤 결정을 하시던지 령우에게 가장 좋은 쪽으로요. 그저 맹랑한 아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틀린 말은 하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 학교 이야기를 하며, 특히 그 아이의 말을 하던 내내 얼굴에 웃음이 번지던 령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령우가 알면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행하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기만 했다. 상념에 빠져 입을 다물고 있는 희주를 향해 윤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아이가 알면 상처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단 한 번도 령우에게 좋은 엄마이질 못했어요. 곁에서 챙겨주지도 보살펴 주지도 못했고, 령우는 아마 제게서 엄마의 정을 느낄 새가 없었을 거예요. 지금부터라도 옆에 있으면서 무엇이든 령우에게 좋은 걸 해주고 싶을 뿐 이예요.” “그렇다면 그냥 령우가 하고 싶어 하는데로 하게 해주시는 게 어떻겠어요?” 윤영의 말에 희주가 고갤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매만지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령우가 한 선택이잖아요. 지금의 생활도, 환경도 그 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요. 아이가 만족하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싱긋 웃으며 그녀가 한 의미심장한 말에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희주를 향해 윤영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친구도, 이 학교도 아마 아이에겐 가장 소중하고 뜻 깊은 곳이 될 수도 있잖아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 빛나는 순간이니까요. 지켜만 봐주세요. 힘들어 하거나 가끔 응석을 부리면 어깨를 토닥여주고 괜찮다 말해주고…. 아이의 그 가장 소중한 순간을 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가장 좋은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요.” 윤영의 말을 듣고도 잠시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멍해 있던 희주가 한참 만에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문득,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바라보았다. 묽은 차에 비춘 그녀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 참. 처음엔 아주머니와 령우가 어디가 닮은 건지 전혀 몰랐었지만, 한번쯤… 웃어주시면 좋겠어요. 그럼 령우랑 정말 많이 비슷할 것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웃어본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어린 아이의 말일 뿐인데 뭘 그리 신경 쓰는지 싶어 스스로도 어이없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자신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 리 없었다. 한동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눈을 지그시 감았던 그녀가 작게 혼자 되뇌었다. “좋은 엄마가…될 수 있을까요…….”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64. 다음날 아침 일찍 희렴이와 함께 별관 건물로 향했다. 이미 떠나실 준비를 마친 희렴이의 어머니께선 로비 앞으로 나와 계셨고 우리를 보고는 한걸음 다가오셨다. 꾸벅 인사하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시고. 때마침 몰려나오는 많은 학부모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령우의 어머니를 찾고 있는 와중 말씀하신다. “령우 어머님이라면 어제 새벽에 바로 가셨어.” “예…? 며칠 계시다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급하게 돌아가야겠다고 말씀하시더라구. 참, 그리고 다희 네게 전해달라고 하셨어.” 뜻밖의 말씀에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말을 이으셨다. “네 말대로, 어떤 쪽으로든 령우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겠다. 고 말씀하시더구나.” 령우에게 가장 좋은 결정…. 마주보고 들은 말이 아니라, 령우의 어머니께서 어떤 생각, 어떤 표정, 어떤 결심으로 그 말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정말 말씀대로 령우를 위한 거라면 어떠한 결정이라도 좋게 받아들일 것이다. 말을 마친 어머니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짐 가방을 보며 묻는 희렴이. “지금 가실 거예요?” “그래야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까.” 말씀을 마치시고, 마주선 희렴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이내 가볍게 끌어안으시는 아주머니. 희렴이는 민망한 듯 말쑥한 웃음을 지었지만, 어깨를 토닥이는 어머니의 손에 곧 어설프게 허공에 떠있던 손을 모아 어머니를 안아드린다. “보고 싶을 거야, 아들. 사랑한다.” “…연락 자주 할게요.” 어쩐지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상당히 민망하게 느껴져 돌아서 있지만, 참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희렴이와 짧은 포옹을 마치시고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와 희렴이처럼…안아주셨다. “물론 다희도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가 멈춰서 있다가. 아주머니의 따뜻한 포옹과 말에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멋쩍게 대답했다. “……저두요, 헤헤.” 희렴이 또한 바라보며 엷게 미소 짓고 있는 가운데, 내 귓가에 대고 작게 말씀하시는 아주머니. “방학하면 희렴이랑 같이 꼭 와. 맛있는 음식 잔뜩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게. 주고 싶은 것도 있고.” 그 말에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는 말씀 없이 웃음만 지으실 뿐이었다.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가, 연거푸 그만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아주머니를 태운 버스가 출발을 하는 것을 보고나서야 걸음을 뗐다. “점심시간에 찾아갈게.” 학교에 다시 도착하고, 남은 자습시간 때문에 각자 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희렴이가 한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향했다. 마침 주말이어서 아침 일찍부터 나간 찬휘와 효빈이로 인해 오랜만에 방은 나 혼자만의 차지가 되었지만, 마땅히 할 일도 없어 뒹굴뒹굴 구르고 있던 와중 들려온 노크소리. “어쩐 일이야? 아직 점심시간 멀었……” 당연히 희렴이일 거라는 생각에 벌컥 문을 열었고. 문 앞에 서 있던 건 생각지도 못했던…… 학생회장 선배?! “헛!” 놀란 내가 숨을 들이키며 한발 짝 물러섰지만, 나의 그런 행동에 더욱 놀란 것은 그 인 듯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말한다. “아…, 놀랐어?” “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친구인 줄 알고…어쩐 일이세요?” 뒤늦게나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하자 그는 일전에 보여주었던 그다운 미소로 손에 들고 있던 책들을 살짝 흔들며 말한다. “일주일 후면 선거잖아. 방학이기도 하고. 도와주려고 왔지. 괜찮다면 들어가도 될까?” “아, 물론이요. 들어오세요!” 참 다행스러운 건, 효빈이는 고운 얼굴만큼이나 깔끔한 성격이라 그녀와 함께 방을 쓰게 된 후로 별다른 거리낌 없이 사람을 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희렴이와 령우. 그리고 찬휘 이외의 사람을 방에 들이게 된 것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가운데 카펫에 자리해 앉으며 묻는 선배. “갑자기 와서 놀랐지?” “사실 조금은요.” “저번에 줬던 건 좀 도움이 됐어?” “아, 아직 앞부분 밖에 보진 못했지만 유용하게 쓰이긴 했어요. 전 사실… 그냥 대충 공략만 내세우면 될 줄 알았는데 앞전에 선배들 보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어쩐지 좀 걱정도 되고 부담도 되고, 그러네요.” 멋쩍은 웃음 나의 웃음에 묘한 미소를 띠운 얼굴로, 카펫 위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말한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선생님한테 부탁 받았기 때문에 온 거였지만, 어쩐지 잘한 일 같다.” 푸근한 옆집 오빠의 미소로 싱긋 웃는 그를 따라 나 또한 웃었고. 준수한 외모에, 다정다감한 성격. 말투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참 오래 알던 사람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말고 문득 뚫어져라 쳐다봄에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가… 이거야 원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에 머리를 긁적이자, 그제야 입을 여는 선배. “그리고 난 사실, 꼭 이렇게 널 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었거든.” “예에? 저를요?!” 놀란 내가 스스로를 가리키며 지은 표정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속뜻이야 알 수 없지만 듣는 나로서는 매우 능글맞은 말이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내가 웃기는 얘기 하나 해줄까?” “뭔데요?” 궁금한 내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고, 그런 내 표정이 흡족스러운 듯 말했다. “내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 있었어.” 첫마디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던 아주 의외의 말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고 선배는 말을 이어나갔다. “난 그 사람을… 처음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별 것도 아닌 사람이랑 사귀고 있는 거야. 나는 함부로 다가갈 엄두도 못 냈는데. 그건 너무 불공평 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며,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작은 실소를 터트리는 선배. “글쎄요.” 하지만 내 대답은 동조의 말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곧 웃음기 가신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그를 향해 말했다. “모르잖아요, 선배는.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어떨지 몰라도 본인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아……, 그치만 좋아하는 사람을 잃게된 선배의 심정은 이해해요!” 내 말에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선배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을까 빠르게 말을 바꿨지만, 잠시 동안 멍해있던 그가 곧 아연하며 말한다. “나는 그 애가 적어도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과 만나길 바랬어. 그치만 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니, 꼭 그렇지만은……” 속상한 마음에 털어놓았을 이야기에 위로는 못해 주었을망정, 되려 기분을 해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상외의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선배. “네 말 들으니까 갑자기 궁금해져. 그 애가 그 사람의 어떤 면에 반했는지. 분명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 애도 흔들린 거겠지?” “아마 그렇겠죠?” “흠, 하지만 나 굉장한 욕심쟁이인가?” 도무지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피식 웃으며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뺏기는 건, 역시 내 성미에 안 맞아. 그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아서.” “에……?” 그 말을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머쓱해하며 선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너희 선생님께서 나에게 널 부탁하셨을 때, 이거 정말 기회다 싶었다구.” 그리고 잠시 동안 침묵. 좇는 시선과 피하는 시선이 그토록 대조적일 수 없었다. 등줄기로 땀이 삐질 삐질 새나는 그런 상황. “하하…. 난방을 세게 해서 그런지 좀 더운 것 같네요.” 뭔가 기대에 부풀어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고, 더럭. 그의 손이 내 얼굴 즘에 올라오는 것에 당황해 굳어진 가운데. “더워 보여서 말이야.” 그 제스처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멋쩍게 웃던 순간이었다. 하여간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뭔가 월등한 재주가 있어 보인다. “난방을 세게 해서 그런지 좀 덥네요, 하하하!” 라며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보인 건… 선배의 뒤에 선 검은 그림자. 나는 그리고 곧 그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챘을 때… 나는 턱밑까지 내려온 입을 다물 수 없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65. “희…희, 희렴아!” 나로서는 잘못한 것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마치 바람이라도 피다가 현장을 목격당한 사람처럼, 말을 버벅대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그런 내 모습에 굉장히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뒤돌아보는 선배. 그리고 희렴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슬그머니 학생회장선배에게로 그 시선을 옮긴다. “어, 이게 누구야?” 당황해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희렴이의 얼굴을 보고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우며 말하자, 그제야 고개를 숙여 뒤늦은 인사를 하는 희렴이. “오랜만이네.” 그에 씩 웃으며 희렴이를 올려보는 선배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다소 굳어져 있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희렴이다. 둘이……아는 사이였던가? 어리둥절해하며 연신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나는 개의치 않고 그는 다시 희렴이에게 말을 건넸다. “얼굴보기 왜 이렇게 힘드냐. 잘 지내?” 선배의 물음에도 그저 짤막하게 ‘네’ 하고 대답할 뿐. 계속해 먼저 말을 건네던 선배도 수 틀린 듯 ‘흠’ 하고 깊게 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둘이 할 말도 있을 것 같고, 이만 일어날게.” “아…, 자료 감사합니다. 읽고 돌려드릴게요!” “그래. 잘되면, 한 턱 내는 것도 잊지 마.” 말과 함께 내 머리를 부비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의 손이 내 머리에 올라온 그 짧은 순간에도 나의 눈은 희렴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보고도 선배가 나가는 모습에 그저 고개를 한 번 더 꾸벅였을 뿐 여전히 무표정한 녀석. 화가 난 걸까… 아님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선배님이랑 아는 사이인가 봐?”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문을 닫고 나서야 내가 넌지시 물었지만 가만히 선배가 책을 올려둔 테이블을 응시하며 문득 묻는다. “언제부터……” “응?” “언제부터 선배였어?”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돌아보며 묻는 희렴이. 분명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표정이었는데 어느새 양 미간을 찌푸린 채 내려다본다. “아니 뭐…언제부터 선배냐니, 그냥 선배니깐 선배라구 부르는 거지……” 작은 목소리로 궁싯궁싯 변명을 해댔지만,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화난 듯 말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둘이서 뭘 했는데.” “무슨 말이 그래? 하긴 뭘 했다구!” 녀석 답지 않게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투에 욱해서 볼멘소리로 말하자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한다. “이원우, 가까이 하지 마.” “그런 거 아니래두! 너 뭐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학생회장 선거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특별히 부탁을 해서 도움 준 것 뿐이고, 도움을 받은 것 밖에 없어.” “아무튼 둘이 같이 있지 마. 나 분명히 말했어.” …나름대로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건만, 유독 신경이 곤두서있는 것 같은 건 나의 착각일 뿐인 건가?! 대체 왜 이렇게 과민한 거야, 다른 때는 괜찮았으면서… 문득 녀석의 그런 태도에 심술보가 터졌고 훽 고개를 돌려버리며 대꾸했다. “흥, 대체 뭐야! 의처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자기는 아무 남자 앞에서 넋 놓고 헤실헤실 거렸으면서.” “뭐어? 내가 언제!” 눈을 치뜨고 묻자 녀석 역시 토라진 것처럼 그대로 방을 나가버린다. 쳇, 소심하긴! 내가 조금이라도 선배한테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속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아무튼 절대로 먼저 사과하지 않을 거야! 흥, 두고 보라지! ※ “짜잔, 계란말이. 오빠가 좋아하는 거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지금. “말했잖아요! 자그마치 2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렴 그걸 모르겠어요? 아무튼 많이많이 먹어요. 난 오빠가 좀만 더 살이 찌면 좋겠어.” “난 괜찮으니까 네 몸을 좀 더 신경 써.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니까.” 나름대로 인내심 있다고 생각하는, “그치만 난 이렇게 오빠가 먹는 것만 봐두 배가 부른걸요? 아이참, 이것도 먹어요. 편식하지 말구.” “…묻었잖아. 어린애처럼.” “꺅, 간지러워요~” 강다희 터지기 일보 직전. “대체 뭐하는 짓들이야!” 눈감고 귀 닫고… 웬만하면 잠자코 있으려고 했지만, 발끝까지 동이나 버린 인내심에 거칠게 식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도대체가 밥을 먹을 수가 없어, 밥을! 여기가 교내식당이라는 걸 잊은 거냐!” 그제야 내가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효빈이와, 그런 효빈이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수 닦아주시다 말고 쳐다보는 찬휘. “어머, 언니 언제 와 계셨어요?” 황소처럼 숨을 씩씩대는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작게 묻는 효빈이. 언제부터 있었긴, 니들이 급식을 받아와 내 앞에 앉기 그 전부터 나는 이 자리에 있었다구! “희렴이는 어쩌구 혼자 있어?” 뒤늦게 이성을 찾은 찬휘가 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물었다. 하긴 뭐… 한참 좋을 때 인데 내가 안중에나 있겠어…? “흥,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 내 알 바 아니야!” 어제의 일이 떠올라 여전히 뿌루퉁한 채로 고개를 돌리고 말하자 대충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하는 찬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몰라. 나한테 묻지 마. 나두 단단히 화났다구~” “또 금세 화해할 거면서 뭘 그래.” “맞아. 빨리 화해해요, 언니. 그렇게 혼자 밥 먹으면 외롭잖아요….” “…….” 그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밥을 혼자 먹도록 내버려 두는, 네 놈들이 더 나쁘다! 계속 이들 앞에 있다간, 그나마 한 숟갈 먹은 밥마저도 얹히리라는 생각에 터덜터덜 식당을 나가려던 찰나, “아.” “아이쿠야!” 나가는 문의 좁은 틈에서 부대낀 사람으로 인해 쓰린 어깨를 부여잡고 아파하다 말고 빠르게 고개 숙여 사과 했다. “아, 미안하……” 그리고 슬그머니 올려다 본 얼굴이 익숙하다 싶었더니만, 무표정하니 나를 내려다보는 원희렴. 이 자식이……식당 안에 있었으면서도 아는 체도 안했단 말이야?! 괘씸함 두 배. 입술 꾹 깨물고 올려다 보았지만, 녀석 또한 삐진 터라 말도 하지 않은 심산인지 그대로 지나친다. 어쭈?! 하지만 그건 내키지 않아 나 또한 빠른 걸음으로 녀석을 앞질렀고, 앞지름과 동시에 다시 눈이 마주치자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게 서로를 앞지르고, 쫓고 앞지르고 쫓는 건 기숙사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 지리 하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정말로, 건물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더는 눈을 맞추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는 원희렴. 이 녀석…, 삐져도 단단히 삐졌다. 녀석과 다퉜던 그로부터 사흘 뒤, 학생회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천 여 명가량의 학생들이 모두 강당에 모여 투표를 하게 되는, 하루를 꼬박 잡고 하는 그 작지만은 않은 학교행사에 참가자로서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으랴. “너무 긴장하지 마. 너라면 아마 득표율 90%라도 거뜬할 테니까.” 긴장하고 있는 나를 향해 안도의 말을 건네는 학생회장 선배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단상에 올라섰고 내 공략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쏟아졌다. 그건 꼭 내가 처음 이곳에 오던 그때를 떠올리게 해서, 참 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무려 782의 득표수로, 2위 후보와도 몇 백 표 이상 차이나는 압도적인 우세였다고 볼 수 있겠다. “실감 나?” “네? 뭐가요?” “그렇게 많은 남자애들을 제치고 네가 당당하게 학생회장이 된 거, 실감나느냐구.” 선거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던 길, 말없이 묵묵히 걷고 있던 나를 향해 던져진 선배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지만 부담은 팍팍 느껴지는 것두 같아요.” 멋쩍은 내 웃음에 피식 웃는다. 그리고 다시 말이 없어진 사이에 뭔가 생각이라도 났는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하길, “참, 같이 학생회 실에 가보는 게 어때?” “…예?” “몇 달 후면 교실만큼 들락날락 거릴 곳인데 아직 잘 모르잖아. 구경시켜 줄게, 가자.” “아, 나중에 천천히 봐도 괜찮은데….” “내가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들떠서 내손을 이끄는 선배의 호의를 뿌리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함께 따라갔다. 듣던 대로 넓기도 넓거니와 교내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는 말답게, 대형 TV와 컴퓨터, 소파, 탁자, 뭐 하나 없는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저 안 쪽에 있는 문은 학급에 필요한 학용품이 있고, 저 쪽은 회의실이야. 회의 때 사용하는 프로젝트랑 테이블은 모두 저 방에 있어.” 그의 열띤 설명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설명을 마친 선배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는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뇨, 일은 무슨요. 없어요~”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역시 심란하기만 하다. 대체 그게 왜 그렇게 화낼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둘이 같이 있지 마. 나 분명히 말했어.’ 어쩐지… 그때 희렴이 말이 걸리기도 하고. 다시 침울해져 한숨을 폭 내쉬는 나를 향해 대뜸 묻는 선배. “희렴이랑 싸웠어?” “에? 안 싸웠어요!” “에이, 얼굴 보니까 딱 그런데 뭘. 무슨 일 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화해하도록 해.” 생각보다 예리하군. 딱히 둘러댈 핑계가 생각나지 않아 결국 눈을 돌리고 딴청을 피우다 말고, 모락모락 피어오른 궁금증. “저어… 선배랑 희렴이는 원래 아는 사이인가요?” 조심스런 내 물음에 가만히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어…, 희렴이가 아무 얘기 안했어?”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bearnangman 66. “무슨 얘기요?” 침을 꼴깍 삼키고, 내 대답에 이어질 선배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 나를 향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대수롭잖게 말한다. “희렴이 1학년 때 학급임원이었어. 이야기도 많이 나눴었고… 난 내 나름대로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2학년 올라와서 관두더라구.” “아아….” “그래서 통 만날 일도 없고, 서먹해졌지. 물론 그 전에 결정 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지만.” “결정 적인 사건요?” 당장이라도 꼬치꼬치 캐물을 기색으로 눈을 번뜩이는 나를 보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이내 씩 웃는 얼굴로 말을 잘랐다. “응. 하지만 이건 비밀이야.” “에이, 말해주시면 안돼요?” “……나중에. 나중에 기회 되면 꼭 말해줄게.” 그에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결국 입을 다물고 문득 다시 한 번 학생회 실을 둘러보았다. 음, 좋긴 좋구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없는 내 앞에 금방 탄 따끈한 코코아 한 잔을 내민다. 헤헤 웃으며 코코아를 마시고 있는데……별안간 느껴진 시선.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또 뭣 때문인지 뚫어져라 나를 보고 있다. 이를 또 어쩌면 좋은가 싶어 애써 시선을 피하며 눈을 굴리고 있던 와중, 말도 없이 더럭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천히 내 뒤쪽으로 간다. 대체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옆으로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볼……” “잠깐 기다려!” 때문에 그의 손길이 닿기 이전에 재빠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꺄악!!!” 우당탕탕―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린 의자가 뒤로 넘어감과 동시에 굉장한 소리와 함께 내 육중한 몸 또한 뒤로 나뒹굴고 말았다. “웃, 난 그 의자가 비틀거린다는 걸 알려주려고 했을 뿐인데 말이야…….” “정말 죄송해요!” “됐어, 그보다 괜찮아?” “…예. 놀랐을 뿐 이예요, 괜찮아요.” 하지만 사실 그 것보다 더욱 놀란 건, 내가 넘어짐과 동시에 밀려난 선배가 함께 넘어진 것. 그것도 하필이면, 내 위로. 다행히 그의 팔이 가까스로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덕에 몸이 부대끼지 않았지만 내뱉는 숨이 서로에게 닿을 만큼 가까이 닿아있다는 건. 그것도 바닥에 나둥그러진 채라는 건 상당히 민망한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이 남자,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어, 그만 비켜주세요.” 시선을 외면한 채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말을 꺼내고 나서야 먼저 몸을 일으키기보다 말만 할 뿐이다. “아, 물론이야. 다친데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일어서려 했지만 아주 갑자기, 유난히 느린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려오는 불안감. 그리고 곧 그 불안감은 현실 되어… 작은 웅성거림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학생회실의 문을 열었다. 한 두 명이 아닌 듯 한 말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멎은 것은 끼이익하는, 작지만 귀에 확 들어오는 그 또렷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나서… 그러니까, 종전의 상황을 알 수 없다면 누구라도 오해할 만한 그 자세의 나와 학생회장 선배의 모습을 보고서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는 것이다. ※ “언니, 언니!!”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던 누군가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효빈이었다는 걸 안 것은 방문이 더럭 열림과 동시였다. 한참 뛰어온 듯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물끄러미 바라보고선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묻는다. “언니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 효빈이가 이렇게 놀라 아연하며 뛰어 올만한 소문이라는 게 내 뇌리를 스치고 가는 건 단 한 기억밖에 없지만 그래도 모르는 척 넌지시 묻자, 동그랗게 뜬 눈을 연신 껌뻑이며 말한다. “언니랑 회장선배랑요….” “응.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말해봐~” 쉬이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효빈이를 닦달하자 눈을 꾹 감고 입을 뗀다.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교내에 파다해요.” 대충 짐작했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역시 그랬어. 그러니까 어제. 넘어진 나와, 그런 나를 돕겠답시고 다가섰던 선배 또한 내 위로 넘어진 그때의 아찔한 상황에서, 때마침 월례회의를 하기 위해 많은 수많은 인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할 말을 잃은 것. ‘하…하하. 이, 이거 오해예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무 말 않고 되레 뒷걸음질을 쳐버리는 그들로 인해 가까스로 선배를 밀어내며 후딱 자리에서 일어나 극구 오해임을 설명하려했지만, 전혀 믿지 않는 분위기. ‘선배, 그죠? 나 도와주려다가 같이 넘어진 거잖아요. 뭐라고 설명 좀 해봐요…. 선배님…?!’ 당황해하며 횡설수설하는 나의 말에도 그냥 고개를 돌려버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던 도무지 알 수 없던 태도의 선배. 그 모든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한참 동안 얼굴을 붉히며 그 상황을 설명했고 나의 변명에 모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소문은 나게 마련이다. “학생회 실에서 둘이 몰래 만나고 있었다는 거… 다 거짓말이죠? 오해죠?” 내 팔뚝을 지그시 잡아당기며 아닐 거라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바라본다. 그런 효빈이의 모습에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넘어지는 걸 도와주려다 선배도 같이 넘어져 일으켜주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뿐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 나의 대답에야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안도의 한숨을 크게 폭 내쉰다. 하여간 귀엽기도 해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걱정스러운 듯이 물어온다. “그렇지만 소문이 너무 많이 퍼졌는걸요? 우리 학년들도 다 알고 있는 거 보면…… 혹시라도 희렴오빠 귀에 들어가면 어떡해요?”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안 그래도 한참 삐져있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소문이 날게 다 뭐야! 그렇게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도 결국 이런 식으로 소문을 내다니. 그 자리에 있었던 인간들을 죄다 찾아서 아작을 내버릴겨! “언니 희렴 오빠한테는 뭐라 말할 거예요?” “괜찮아,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뭐. 희렴이 겨우 그런 소문 가지고 화낼 속 좁은 녀석 아니야. 다 이해해 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 나보다 더 초조해하는 효빈이를 안심시켜 두고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회장선배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그 말, 그냥 곧이들을 걸 그랬다. 어쩐지 어제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을 하는 나를 돕지도 않고 그저 멀찍이 서있던 건 대체 왜 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소문이 어떻게나든 전혀 상관없는 사람 같았던 그 태도는 나 혼자만의 착각인 걸까? 설마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에이 설마.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희렴이의 상태를 알아보러 A반 교실에 다라라 여느 때처럼 문을 열었을 뿐인데. “…….” 제각기 할 일을 하다 말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평소와 달리 유난하게 시선이 끊이질 않자 내심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담담한 척 주위를 둘러보았고. 창가 앞쯤에 서 있다가…나를 발견하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희렴이. “헤헤, 할 말 있는……” 그 상황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며칠 전의 일을 먼저 사과하고 오해도 풀 겸 해서 멋쩍게 웃어보였을 뿐인데. 굳은 얼굴로, 그대로 내 손목을 잡고 교실을 나와 버린다. “…아, 아파!” 나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 녀석. 결국 손을 잡힌 채로 쉬지도 않고 버드나무 벤치까지 끌려오다시피 오고 나서야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아프잖아! 그렇게 빨리 걸으면 어떡해?” 그새 빨갛게 부어버린 손목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전혀 개의치 않는, 오히려 더욱 무거운 음성으로 답한다. “말했잖아.” “뭐를…?” “이원우, 가까이 하지 말라고.” “아…. 설마 너도 그 소문 들은 거야? 그거, 다 오해야! 신경 쓰지 마.” 그런 내 말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을 뿐이다. “소문이라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아?” “나라고 아무렇지 않을 리 있겠어? 너도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 오해가 생길 법한 상황을, 만들지 말란 말이야.” “그냥 학생회실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뿐이었어! 내가 바보같이 정신 놓고 있다가 의자 기운 것도 몰라서 넘어지는 걸 도와주려다 선배도 같이 넘어진 것 뿐이구.” “왜 내가 너를 피했는지.” 답답한 내가 가슴을 치며 말했지만,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린 채 잠시 멈췄다가 마주보며 말을 잇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래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몰아붙이는 녀석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너까지 꼭 그렇게 말해야 해? 딴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잖아.” 순간 욱하는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서운한 속마음을 토로하자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건……” “됐어. 난 너마저도 내 말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리라곤 전혀 몰랐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나 때문에 엄한 소문에 휘말린 선배한테 미안할 뿐이야.” 말과 함께 돌아서는 내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운채로 묻는 희렴이. “어딜 가.” “선배한테 갈 거야. 다 나 때문인데 가서 사과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더는 오해하고 말 것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질적으로 희렴이의 손을 뿌리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잠깐 동안은 내 이름을 부르며 뒤를 좇는 희렴이의 발걸음 소리도 들렸지만 외면한 채 한참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았을 때는 텅 빈 복도. 아쉬운 마음으로 시선을 거뒀다. 내가 화를 낼 입장은 아니지만… 나를 좀 더 믿어주지 못한 희렴이에게 속상하고 섭섭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다. 느릿한 걸음으로 학생 회실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고. 똑똑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선배.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서와.” 내 등장에 놀란 듯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맞이하는 그를 향해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말했다. “저어, 사과드리러 왔어요.” “사과라니?” 의아한 듯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묻는 선배를 향해 멋쩍게 말을 꺼냈다. “저 때문에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으셨나하구요…. 정말 죄송해요, 소문은 제가 잘 설명해서……” “아아, 요즘 떠도는 소문에 대해 말하는 거야?” 그의 말에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이자, 생각 외의 웃는 얼굴로 답한다. “그것 때문이라면 괜찮아,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 “그치만……” 우물쭈물해하며, 미안한 마음에 쉽게 사과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로 나를 마주하며 선배가 한 그 말은, 내 귀를 의심하게 하기 충분했다. “나는 그 소문이 최대한 빨리, 널리 퍼지기만 바랬거든.”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No.1｀낭만곰탱이＊: http://cafe.daum.net/bearnangman 67. “예…?”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 되물었을 땐 이미 굳어져버린 내 얼굴.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몰려온 건 정말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구태여 내가 엄한 소문을 퍼트려도 될 것 없이 자연스럽게 퍼졌잖아.” “저기, 저. 그러니까… 지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런……” 멍해 있던 것도 잠시,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한 손으론 머리를 쓸어 넘기고, 또 다른 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떠듬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이 태연하게 그가 말한다. “말했잖아. 손도 못 써보고 빼앗길 수는 없다고. 계획했던 거랑은 좀 다르지만,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 이런 상황.” “뭐, 뭐라구요…?”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게 되자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나는 그냥 졸업할 때까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선수를 뺏겨버리면 속상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잖아.” “하. 그럼 그때도 일부러 대꾸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음, 부정하진 않을게.” “대체…, 이렇게 하고 나면 선배한테 남는 게 뭐가 있어요?” 그 물음에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을 굴리다 말고 손을 딱 소리 나게 누비며 내뱉은 한 마디. “남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지금 이 순간 그가 짓고 있는 저 웃음이, 웃음이 아니라 믿고 싶다. 제발. 어이없다 못해 당혹스럽고 더는 기가 찬 한숨마저 나오지 않는다. 이 인간, 제대로 미쳐있는게 분명해! 더 이상 말을 섞어봐야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돌아서는 내 어깨를 잡아 멈춰 세운다. “놔요!”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내는데 반해, 다시금 내 양쪽 어깨를 꾹 짓누르고 있는 그의 손에선 더욱 힘이 더해져온다. “뺏기지 않아. 반드시 되찾을 거야…. 알아듣겠어?” 누군가 나 하나 짝사랑 해주는 사람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지만…이런 뻔뻔한 스토커를 바란 건 아냐! 마주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피해버리게 될 만큼, 지독하게 옥죄는 시선에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손 놔요…….” 그렇게 되도 않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와중, 문 쪽에서 들려온 낮게 깔린 무거운 음성으로 인해 선배와 나의 시선이 그곳으로 꽂혔다. “희렴아!” 잡고 있던 문고리를 어찌나 세게 움켜쥐던지 그 미묘한 떨림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져온다. “손 놔.” 악다물고 있는 잇새사이로 새어나온 듯한 그 낮은 목소리에 천천히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내린다. “어서 와.” 도저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그 인사말에 희렴이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번갈아 보았다.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차라리 희렴이가 못 보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묘한 공기가 교실 안을 에워쌌다. “이리 와.” 그를 외면한 채로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희렴이. 하지만 내밀어진 희렴이의 손을 잡으려 걸음을 떼는 내 앞을 가로막아버린 선배로 하여금 얼굴에 짙게 깔려버린 분노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한다. “…비켜.” 더 이상은 존댓말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냉랭한 말투 때문인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가 입을 뗀다. “이거 정말 섭섭한 걸. 나는 우리 사이가 몹시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얼굴 붉히고 말이야.” 그런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그를 지나쳐, 등에 가려져 있던 내 손을 굳게 잡는다. 그리곤 그대로 학생회 실을 나서려 걸음을 떼는 우리의 뒤로 다소 언성이 높아진 채 말하는 선배. “대체 뭐야!” 그리곤 급작스럽게 돌아서있는 희렴이를 끌어당겨 벽 쪽으로 밀어붙인다. “꺄악!”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라 놀란 내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새나왔고. 그를 말리려 입을 떼려는 나를 향해 나직이 고개를 젓는 희렴이.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는 가운데 그가 희렴이의 멱살을 쥐어 올린다. “그때도 넌 일부러 날 피했었지.” “…….” “대답해!” 그에 아무런 대답도 않고 애써 선배와 눈을 맞추지 않는 희렴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곤…전혀 상상도 못했다. 애초에 희렴이 말을 듣는게 좋았다구! 강다희 18년을 살고 보니 별의 별일이 다 있다. 안절부절 못하던 것도 잠시 멱살을 쥔 선배가 더욱 거칠게 희렴이를 벽에 몰아세움으로써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만 해요! 나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하지만 내가 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고개 숙인 채로 나직이 말하는 선배. “내 마음 받아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잖아. 근데 고백하자마자 그렇게 매정하게 학생회까지 나가버리고, 일부러 나를 피하고… 고작 저런 못난 애를 선택한 건 이해할 수 없어.” 잠시 동안… 멍하니 선 채로 말을 하려던 말은커녕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된 거여. 암만 그렇고말고. 그가 지금 원망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가리키고 있는 것은, 정녕 내가 아니라 생각해. “말해 봐! 대체 이유가 뭐냐구!”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저 선배의 시선만 외면할 뿐인 희렴이다. 확실히, 이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해. “저기, 제가 지금 이해가 안가서 그러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그 심각한 상황이 도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서 머쓱해하며 물었고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 시선을 희렴이에게로 옮기는 선배. “아무리 봐도 머리도 안 좋고 예쁘지도 않고 뭐 하나 잘 나지도 않았어. 역시 난 인정할 수 없어.” “거기 지금 내 얘기 하는 거 아니죠?!” 듣고 있다만 내가 발끈하며 나섰지만 더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희렴이를 채근한다. “내가 저 애보다 뭐가 모자라다고 생각해? 외모, 성적, 집안? 뭐 하나 뒤질 것 없다구!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그래?” “선배, 제발……” “그런 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어.” “…제길.” “좋아해, 좋아한다구! 왜 이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상황이 참말로 현실이 맞는 걸까….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위험한 남자의 로망…? 정신을 놓은 채로 맹하니 있는 나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된 채, 난감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그런 선배를 진정시키려는 듯 타이르는 희렴이. “그만 정신 차려요, 선배.” “저 앤 너와 어울리지 않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용납할 수 없어! 나를 거부했으면… 적어도 나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야 할 거 아냐!” 하지만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는 듯하다…. 그러니까… 나한테 말을 걸고 친해지고 한 게 내 질투심을 유발시키려는 게 아니라, 희렴이의 질투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거였다구?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희렴이었다는 거여, 시방!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전교에 꼴랑 하나인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이 남자만도 못하다 이건가. 그저 벙 찐 채로 넉 놓고 서있었고. “나한테도 기회를 달라구.” 도무지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희렴이를 향해 잔뜩 흥분한 음성으로 거칠게 묻는 선배를, 이제 그만 내가 나서서라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한 걸음 다가서던, 그때였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요.” 낯익지만 몹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갤 돌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이고 들어서며 전보다는 조금 짧아진 머리로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 “아….” 선배와 희렴이, 그리고 나. 모두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쳐다보았다. 그에… 변함없이, 여전히 그 개구진 미소로 환하게 웃는다. 마치 헛것을 보는 사람처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희렴이를 가둬두고 있는 선배를 느지막이 밀어낸다. “이 녀석은 제 거라서요.” “뭐…, 뭐야.” 말과 함께 희렴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그를 끌어당기며 말하는 희렴이. “…제길, 왜 이제 왔어.” “기다리기라도 했냐?” “당연하지. 보고싶었다구.” 그런 희렴이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을 한 듯 그와 희렴이를 번갈아보는 선배를 향해, 그가 허릴 숙여 선배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이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조용히 돌아가 주세요. 오케이?” 그러자 놀라 움찔하더니, 이내 ‘제길’ 하고 작게 욕지거리를 읊조리며 나를 밀치고 선배가 나간 뒤로 학생 회실은 조용해졌다. 선배가 나가자 희렴이를 꼭 두르고 있던 팔을 떼며, 멍하니 서있는 나에게로 시선을 향해 웃는 그 녀석. “다녀왔습니다.” 반령우. “왜 말이 없어? 나 안 반가워?” 그저 말없이 멀거니 서서 얼굴만 바라보는 내가 서운한지 멋쩍은 듯 내 볼을 콕콕 찌르며 묻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에 나는 잠시 일렁이는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다, 이내 더럭 령우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급작스러운 내 행동에 깜짝 놀란 듯하던 령우도 조심스럽게 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행이야, 돌아와서……정말 다행이야.” 어쩌면 령우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매일 언제 오나 기다리는 건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조금 짧아진 흑갈색의 머리와… 늘 개구지던 녀석이 어느덧 굉장히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금방 오겠다고 했었잖아. 약속… 지켰지?” 떨리던 물음에 가슴이 시큰해져서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게 빠른 거냐! 그러게 좀 가만있지, 어쩌다 또 다친 거야? 지금은 괜찮아?” “어쭈, 오랜만에 와서 반갑다고는 못할망정…. 다 나았으니까 걱정마라.” 말과 함께 큰 손으로 나의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더는 장난을 같이 치는게 아니라 받아줄 만큼… 어른이 되어버린 녀석을 보는 건 어쩐지 시원스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한 애매모호한 느낌이다. 뒤돌아 가볍게 악수하는 희렴이와 령우. “어떻게 그렇게 여전하냐.” 령우의 그 말에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웃어 보이는 희렴이. 때문에 내가 더럭 물었다. “참,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줘! 회장선배랑… 희렴이 네 사이에 대체 무슨 말 못할 사건이 있었던 거야?!” 그 나의 물음에 고개를 슥 돌려버리는 희렴이와 흥미롭다는 듯이 본래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는 령우. “오호, 다희 너는 그 사건을 아직 모르는 건가?” “엥? 뭔데? 무슨 사건인데?” “말하지 마!” 령우의 말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막으려했지만 역시 희렴이의 손놀림보단 령우의 입놀림이 빨랐다. “학생회장이 1학년 때 저 녀석한테 고백했잖아.” “고백?” “그때는 학생회장이 아니었지만 완전 장난 아니었어. 너한테 반했느니, 사랑하니 어쩌니. 장난 아니었다니까? 남들 앞에서는 전혀 티 안냈는데 둘만 있으면 아주 가관이었지. 나중엔 덮칠 지경이었다니까.” “뭣이? 덮쳐?!” “그래. 희렴이 저 자식이 손목을 부러트리려다가 다신 안 그런단 맹세 받아내고 잠잠했었는데… 어쩐 일로 다시 나타났대?” 령우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젓는 희렴이다. 세상에.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거야. 그에 비하면 나는… 하마터면 그 인간이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거라고 입 놀렸다가 망신만 당할 뻔 했네! 그래도 어쨌든간 이런 상황에 맞춰 령우가 돌아왔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다려. 찬휘 데리고 올게.” “어? 기다려, 같이 가.” “아니야. 내가 다녀올게. 여기 있어.” 그 와중에 먼저 일어서며 굳이 불필요한 수고를 하는 희렴이가 의아스러웠지만, 저렇게… 엷은 미소를 띠우며 일부러 자리를 비우는건 녀석의 배려라는 걸 실은 령우도 나도 안다. 희렴이가 나가고 우리 둘이 된 교실 안.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령우가 말한다. “어머니가 네 얘길 하셨어.” “내 얘기?” 고개를 끄덕이는 령우. 령우의 어머니께는…경솔해보일지도 모를 만큼 대담하게 말을 드렸던 기억에, 걱정스런 마음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듣던 데로라고 하시더라.” “에?” “내가 말했던 것처럼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고 말이야. 다음번에 만나면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하셨어. 그리고 네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응? 아니 뭐 딱히…왜에? 어머니라 뭐라셔?” “한국에서 돌아오시마자 나한테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구. 며칠전만 해도 그냥 영국으로 오라고 하실땐 언제고 말이야. 갑자기 어서 가보는게 좋겠지 않냐고 하셔서 좀 놀랐어.” 사실… 어느 정도 냉혹한 평가도 감수하고 있었지만 생각외의 령우의 말에 기분이 묘하다. 령우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겠다던 그 말씀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어 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쩌면 네가…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어.” “약속했었잖아,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더 멋있어져서.” 그 대목에서는 피식 웃자 발끈하는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묻는다. “잘 지냈지?” “물론이야! 너도 잘 지낸 거지? 다리는 괜찮구?” 그러자 개구지게 웃으며 대답하는 녀석. “…물론이야.” 더 이상 구태여 다른 말을 할 것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다. 돌아 와줘서 고맙다는, 혹은 보고 싶었다는. 헌데 마주보다 말고 미묘하게 시선을 내 뒤의 창밖으로 옮기다 말고 별안간 눈을 크게 뜨며 말하는 령우. “어…. 눈 온다!” “뭐, 정말?!” 나 또한 빠르게 되돌아보자 사방에서 굵은 눈발이 휘날리고 있다. 언제부터 내렸던 건지 이미 나무와 건물은 엷게 덮여있고, 반대편 건물에도 우리처럼 창가 앞에 나와 올해의 첫눈을 구경하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와아! 눈이야! 일기예보에는 그런 말 없었는데, 빨리빨리 나가자! 응?” 미소 지으며 따라나서는 령우. 반가운 사람과 함께… 단휴연기숙사고에도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No.1｀낭만곰탱이＊: http://cafe.daum.net/bearnangman 68. [……마지막으로, 이번 겨울방학이 우리 학생들에게 보람차고 뜻 깊은 시간이 되길 바라며 이만 말을 마칩니다.] 교장선생님의 짤막한 연설과 함께 교가제창이 마쳐짐이 동시에 강당 안은 환호성으로 떠들썩했다. 방으로 돌아와 창가를 바라보니, 방학 동안이나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려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넌지시 그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하는 희렴이. “준비됐어?” “무슨 준비?” “방학식 날 같이 갈 데가 있다고 했잖아.” 아, 이제 기억난다. 그랬었지…. 아차 싶어 손뼉을 치고 나서 실없이 웃어보이자 쌜쭉한 표정의 녀석. “알겠어, 가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 나를 멈춰 세며 참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쭈욱 훑어 내린다. “이러고 가려고?” “응, 왜?” “그러지마…….” 어쩐지 묘한 애원조의 말투. 때문에 나 또한 찬찬히 내 몰골을 살펴보니, 무릎이 다 나온 자주색 체육복의 차림. 직접 보니 참 남루하긴 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것 또한 내키지는 않아 보이지만 환히 웃으며 걸음을 옮긴다.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일단 무작정 따라나섰지만 생각지 못한 서울행 고속버스까지 타고나서야 던져진 물음에 눈을 깜박이며 대답하는 희렴이. “삼촌 만나러.” “삼…촌?” “응.” “삼촌이라구 했어, 지금?” “그래, 삼촌.” “말두…안돼. 왜 그걸 지금 말해주는 거야! 너무해! 가족 분을 뵙는 거면 미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내 꼴이 이게 뭐야!” “그래서 옷 갈아입었잖아.” “그런 거랑은 달라! 아아, 못살아….” 오메, 내가 환장하겠어. 대충 청바지에 코트만 집어 걸친 꼴이라니! 희렴이는 패닉상태에 빠져 ‘어떡해’를 읊조리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어깨를 토닥인다. 어쨌거나 세 시간여 만에 서울에 도착했고, 20층은 가뿐히 넘을 것만 같은 고층건물이 즐비한 거리에 연신 입 쩍 벌리고 구경하던 가운데 희렴이의 걸음이 멈춰 섰다. “여기야.” 녀석의 말에 앞에 있는 간판으로 시선을 옮기자 큼지막한 네 글자가 눈에 띤다. “성형외과?” “응.” “삼촌이 의사였어? 그것도 성형외과~?”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희렴이. 오호, 성형외과라…. 몹시 구미가 당기는 곳이 아닐 수 없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향하자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희렴이를 알아보곤 말을 건넨다. “어머,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다, 얘. 원장님 보러온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희렴이를 향해 눈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 간호사. “조금만 기다려. 곧 수술 끝나실 거야. 차라도 마시고 있을래?” 말과 함께 슬그머니 희렴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 끌어당긴다. 아니, 간호사가 저래도 되는 거야?! 내가 발끈하기 이전에 그녀의 손을 밀어내며 내게 묻는 희렴이. “마실래?” “아, 으응.” “누구야? 못 보던 친구네.” 밀려난 것은 안중에도 없는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은근슬쩍 희렴이의 팔을 부여잡은 채 턱 끝으로 가리킨다. 아니 저 여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하지만 다시금,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어내며 내 옆으로 옮겨 서며 희렴이가 한 한 마디. “제 여자친구예요.” 그에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훑어 내린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요.” 허나 표정은 하나도 반갑지 않으시군요. 어쨌거나 미묘한 감정이 서린 듯한 그 간호사가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던 그 무렵이었다. “오호, 이게 누구야.” 막 수술을 끝낸 듯 급하게 가운을 걸쳐 입고 마스크를 벗어내며 웃어 보이는 남자. “여전하네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꼬맹아.” 반갑다는 듯이 혹은 어린아일 다루듯이 희렴이의 머리를 부빈다. 그리고 이내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묻는다. “네가 녀석이 말하던 여자친구인가? 잘 부탁하마.” “아, 네! 안녕하세요.” 벙찐 내게 손을 내민다. 잠시 멍해있다 말고 손을 잡자 가볍게 악수를 하는 멋진 삼촌. 오호, 핸섬하다. 잘 생긴데다가 돈도 많고… 대체적으로 완벽한 유전자를 지닌 집 안인 게야. “나가자. 밥 아직 안 먹었지? 정 간호사, 남은 수술은 윤 선생 앞으로 돌려줘.” 정 간호사라 불린 여자가 쌜쭉하니 대답하곤 희렴이를 향해 방싯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나이 먹어서 주책이야! 어쨌거나 삼촌을 따라 예약 돼있던 호텔 안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 앞으로 가자 이미 누군가 먼저 자리해있다. “너무 늦어, 아저씨.” 부루퉁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며 희렴이 삼촌을 향해 말하는… 인형? 까맣고 긴 생머리에 분을 칠한 듯 하얀 얼굴. 동그랗게 뜨고 있는 크고 검은 눈. 말할 때마다 오물거리는 입술하며… 넋 놓고 바라보는 가운데 희렴이가 나를 흔들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챙겼다. “뭐해, 앉지 않구.” “아~ 으응.” 뻘쭘하게 의자에 앉자 나와 희렴이를 번갈아 보며 그 어여쁜 여자가 환하게 말을 건넨다. “안녕.” “안녕하세요.” 나이는 우리 또래정도 되었을까 싶었는데, 삼촌 말이 21살이란다. 믿기지 않아. 아무튼 척 보기에도 응응한 사이인지, 채원이라는 이름의 그 언니가 공주님처럼 앉아 있으니 직접 스테이크를 다 잘라서 접시를 바꿔주는 매너를 보여주고 있는 희렴이의 젊은 삼촌. “그래. 오늘부터 방학이라구? 집엔 언제 돌아갈 생각이야.” “다음주중에는 갈 거야.” “그래. 안 그래도 네 엄마가 날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 지 아냐. 그나저나 꼬마아가씨는 아까부터 조용한 걸. 뭐하고 싶은 말 없어?”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며 옆에 놓여있던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든 채 묻는다. 맹하니 있던 와중에 더럭 말을 걸어오자 당황한 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으음…, 제가 채원언니처럼 얼굴을 바꾸려면 견적이 얼마나 나올까요.” 순간 정적. 마시던 물을 푸하고 뱉어낸 채 이맛살을 찌푸리고 나를 응시하는 희렴이와 후훗하고 작게 웃는 이쁜 언니. 희렴이 삼촌 역시 황당한 질문에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한다. “앞트임 하고, 콧대 조금 높이고 이마에 보톡스도 맞아야겠고. 박피도 두어 번 정도 해야겠네. 내 희렴이 여자친구니까 패키지로 저렴하게 600만 원선에서 해결해줄게.” “네에? 600만원이요?!” 놀라서 들고 있던 빵도 떨어트리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포도주 한 모금을 마시고 말한다. “농담이야.” 능글맞게 그런 농담을 웃으면서 잘도 하신다. 어쨌거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이어진 식사. 대체적으로 분위기는 좋았다. 그러니까… 예쁜 언니는 아까부터 계속 포도주를 탐하려 했지만, 희렴이의 삼촌이 먹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틈을 타 포도주를 맛보고 결국엔 취해서 비틀거리기 전까진 말이다. “으음, 아저씨. 나 졸려…….” “하여간…이 웬수. 집에 가서 봐, 강채원.” 아기처럼 흥얼거리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든 채 우리에게 말한다. “벌써 일어나서 미안하다. 아무튼 즐거웠어, 꼬마 아가씨.” “네, 헤헤. 저녁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조심히 가. 또 보자.” 엷게 웃어주며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유유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말고 희렴이가 말했다. “그만 가자.” 고개를 끄덕이고 학교로 돌아갈 버스에 몸을 싣고, 버스가 움직이던 내내 곰곰이 생각중인 나. “흠, 패키지로 600이라…….” “아직도 그 생각해?” “나 진지하게 고민 중에 있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 모습에 턱을 괸 채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덧붙인다. “나는 지금이 제일 좋아.” “…엥?” “누가 뭐래도 나는 좋다구.”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내 코끝을 탕하고 튕긴다. “아얏, 아퍼!” 찡하게 아려오는 코끝을 움켜잡긴 했지만… 그런 나를 보고 또 미소 짓는 녀석을 보자 작은 화조차 낼 수 없다. 그리고 사실 고민이니 뭐니 자시고 할 것 없이 애초부터 먹고죽을래도 없는 돈이었어! 버스가 달리던 내내 희렴이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상태. “우우, 졸려.” 로비 앞에 다다라 졸린 눈을 비비고 서있는 나를 향해 귓가에 속삭인다. “들어가서 자. 좋은 꿈꾸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나를 마주보며 조심스럽게 내 볼 쪽으로 녀석의 입술이 가까워오던 찰나, “거기 다희니?” “아, 예에! 저 다흰데요!”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혼비백산해서 그새 저만큼 멀어져 딴청을 피우는 희렴이와 깜짝 놀라 굳어선 채로 크게 대답했다. 사감실 문으로 배꼼이 고개를 내민 채 나를 알아보고 말씀하시는 선생님. “마침 잘 왔어. 지금 전화 왔거든, 빨리 와서 받아봐.” 대체 누구여, 이런 시간에 전화를 하는 사람이! 사감실로 들어가 집무를 보시는 선생님을 향해 작게 고개를 꾸벅이고 다소 신경질 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뉘쇼!” [누나!]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No.1｀낭만곰탱이＊: http://cafe.daum.net/bearnangman 69. “정말 갈 거야?” 문 앞에 서서. 다급히 짐을 챙기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어쩐지 의기소침하게 묻는 희렴이. 마음이 급한 나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물론이지! 영웅이가 왔다잖아. 오래 못 있을 텐데 하루라도 더 같이 있어야지.” 그러자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녀석. “치, 나는…….” “응? 뭐라고 했어?” 내 물음에 그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다. “후. 다 됐다. 내일 아침 첫차로 가야 하니까 일찍 자야……” 잠자리에 들기 위해 말하는 내가 무색하게, 말을 끊고 말한다. “그래도 모처럼 크리스마스이븐데 그때까진 나랑 있어.” 전같으면 생각지도 않았을 낯부끄러운 말을, 참 잘도 한단 말이야. 대견스러운 녀석의 모습에 나야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아이들이 모여 있을 방으로 들어서려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문 너머로 누군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말도 안돼! 나는 어떡하라구요…….” 더 보고하고 말 것도 없이 효빈이.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 훌쩍이며 눈물을 닦고 있는 효빈이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은 왜 또 그러시나. 찬휘가 집에 다녀온다고 라도 했으려나? “오빠가 없는 동안 외로워서 죽어버릴 지도 몰라. 일주일이나 볼 수 없다니… 흑, 오빤 날 보지 않아두 괜찮은 거예요?” 빙고. 그러면 그렇지 싶어, 시답잖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안 괜찮아. 하지만 모처럼 가족이 모이는 자리라 빠질 수 없어. 바로 올게. 전화도 만날 하고.” “전화만 할 거예요?!” 쌜쭉하니 볼을 부풀리는 효빈이. 또 그런 효빈이를 대체 귀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찬휘와… 둘을 사이에 놓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도록 꾹 깨물고 있던 령우가 말한다. “나 가고 만날 이랬냐…?” “응. 거의 그랬지.” “용케도 얘네랑 놀아주고 있구나.” “이제 적응됐어. 너도 차차 익숙해질 거야, 인마….” 한숨을 푸욱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이내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번득이며 환한 얼굴로 묻는다. “참, 선물은?” “선물? 선물은 무슨 놈의 선물?” 그 환한 미소를 애써 외면한 채 시큰둥하니 그새 또 처연한 얼굴로 말하는 령우. “내일은 크리스마스잖아! 선물이 있어야지, 선물. 어여 내놔봐.” 말과 함께 당연하다는 듯이 넙?손바닥을 내민다. 그냥 콱 깨물어 버릴까. “그러는 너나 내놔봐! 너는 해외씩이나 다녀온 놈이 뭐 하나 사탕쪼가리라도 들고 왔어?!” 그러자 정말 놀랍다는 듯이 아연하며 말한다. “에엑? 내가 온 게 가장 큰 선물 아니었어?” “놀구 있네!” 콧방귀를 뀌며 질색을 하고, 혀를 내둘렀지만 사실은 그래.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녀석은 알까 몰라. 하지만 역시 모르는 지 씁쓸한 얼굴로 작게 읊조리는 령우. “하아. 우정이고 나발이고 사랑 앞에 이기는 장사 없네.” “에이, 반령우 답지 않게 왜 그러실까~” 그런 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했다싶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들이대자 눈썹을 찌푸린 채 얼굴을 밀어내는, 상당히 걸쩍지근한 녀석의 태도. “코맹맹이 목소리 치워….” 이 녀석은 참…잘해줄 껀덕지가 없어! 아무렇지 않게 장난 치는 령우의 모습이 참 당연스럽게 느껴지자 가슴 한 편에 담아두었던 걱정이 물 밀 듯 사라진다. 어쩌면 예전 같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그야말로 참 바보스러운 걱정이었던 거다. 그 와중 돌연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찬휘와 효빈이. “우린 이만 먼저 일어날게. 다들 잘 자, 좋은 꿈꾸고.” “미리 메리크리스마스예요. 언니두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둘이 팔짱을 낀 채로 손을 흔든 채 방에 멀어져간다. 저것들이 아주…,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그런데 난 그런 때가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아까부터 한참동안 희렴이가 말이 없었다는 걸 눈치 채고 옆을 돌아보려던 순간에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령우. “에휴~ 나도 그만 들어가서 자련다.” “엥? 벌써? 왜 같이 있다가 들어가지.” “피곤해. 내일 잘 다녀와라.” “응. 잘 자!” 령우 마저도 보내고, 슬쩍 희렴이를 돌아봤는데. 말없이 깍지 낀 손으로 혼자 손장난을 칠 뿐이다. 어색한 침묵 속에 잠자코 있다 말고 입을 떼려 한 순간, “나는.” 작은 목소리지만 힘주어 말하는 희렴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다시 말을 잇는다. “모처럼 크리스마스니까 단 둘이 있고 싶었는데…….” 마치 삐진 어린아이가 투정을 하는 투로 말한다. 잠시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다 말고 북받쳐 오는 감동. 이 자식…, 점점 멋진 남자가 되어가고 있는 거구나. 솔직하게 속마음을 말할 줄도 알고.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녀석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내리치며 말했다. “그거야 나도 그렇지! 그래도 부끄럽게 그런 말……” 하지만 내가 말을 체 마치기도 전에 딱 한 마디로 할 말을 잃게 했다. “맹꽁이.” 그저 저 단어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사람을 벙찌게 만든다. 눈만 껌뻑 껌뻑거리며 굳어 있는 나를 뒤로 한 채 홀연히 나가버리는 원희렴. 아니 저 인간이 증말! 발끈하며 질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서 벌떡 일어섰지만 홀로 남은 방안은 참으로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다음날, 홀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아침 일찍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꾸려놓은 짐을 들고 사정없이 녀석의 방문을 두들겼다. “정말 나 얼굴도 안 볼 거야?!” 조용한 방안. “나 진짜 그냥 갈 거야?” 심지어 인기척조차 없는…, “오늘가면 1월이 돼서야 볼 수 있단 말이여! 그래도 안 나올 거야?” 내 커다란 외침에도 꿈쩍 않는 방문. 어젯밤일로 삐져도 정말 단단히 삐진 게 분명해. “흥, 그래! 나도 몰라!” 쳇, 마중까진 바라마지도 않건만, 얼굴도 안 보여줄 건 뭐야! 남자가 소심하게…. 혼자서 궁싯거리며 터미널로 향했다. 그래도 모처럼의 만남이니까 밝은 모습으로 가야지 하고, 버스 타고 터미널에 도착해 공항으로 가고. 또 비행기에 올라타는, 참으로 번거롭게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희야!” “원장님!” 공항에 도착하자 마중을 나와 계신 원장선생님. “영웅이랑 아이들은요?” “집에 있지. 다들 따라 나오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걸 간신히 말렸단다.” 오랜만의 재회에 잘 지냈는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사이 살이 더 찐 것 같다 등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있을 집으로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우성을 치며 반기는 녀석들.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반갑게 맞아주는 아이들에게 새삼 감동하며 집으로 들어서자 문 앞에 서 있다가 나를 보고 달려드는 영웅이. “누나아!” “영웅아!” 안 본 사이에 훌쩍 커버린 듯, 전처럼 안아 올리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아직은 애기 같은 녀석. “보고싶어써!” 놓지 않겠다는 듯 옷깃을 꼭 부여잡은 작은 손을 보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붙들려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모두가 잠들고 나서야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에구구, 죽겠다.” “많이 피곤하지? 네가 온다니까 다들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니, 여지껏 붙잡고 있었구나. 많이 늦었는데 그만 들어가서 쉬렴.” “예, 원장님도 그만 들어가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원장선생님도 그만 주무시러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한숨 돌린 채 전화가기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얼굴도 못 보고 나왔는데, 목소리라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전화를 걸었건만, [희렴이? 희렴이라면 아까 외출허가 받고 나갔는데?] 라는 사감선생님의 목소리가 대신 할 뿐. “예에? 나한텐 아무 말도 없었는데…, 혹시 어디로 간 건지 모르세요?” [나야 모르지. 돌아오면 너한테 연락하라고 전해주마.] “네. 부탁드려요.” 허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삐졌어도, 그런 것도 말 안하고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대체 어딜 간 걸까? 아무튼, 연락 오기만 해봐 어디! 어쩐지 그 사이 조금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내 방에 누워, 서운하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스르르 눈이 감겨올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탕탕탕― 거실로 나가니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런 시각에 누구일까 잠시 망설이다가 침을 꼴깍 삼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배꼼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누구……”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체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설마 잘못 본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아도… 언제부터 내렸는지 알 수 없는 흰 눈발이 흩날리는 그 가운데에 희렴이가 서있다. “희렴아…?” 그에, 언제나처럼 엷은 미소를 띠운 체 나를 바라보다가 더럭 끌어안는 녀석. 내가 앗하고 놀랄 새도 없이 추위에 붉게 물든 볼로, 마치 첫사랑 고백을 하는 수줍은 소년처럼 작게 말한다.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때문에…아주 잠시 동안 들었던 서운한 생각도, 걱정도 싹 사라진 채 조심스럽게 희렴이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랴 싶어 아무 말도 않고 가만있을 뿐인 내게 별안간 묻는다. “너는?” “에이, 뭘 그런 걸 묻구 그래… 부끄럽게!” 말과 함께 거칠게 가슴팍을 내리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발 짝 물러선다. 집 앞에 있는 공원 그네에 걸터 앉은 채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희렴이. 그러려니 했다가… 도통 눈길을 떼지 않기에 볼가를 쓸어내리며 멋쩍게 물었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근데 왜 그렇게 봐. 사람 민망하게에…….” 그러자 환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이뻐서.” 것 참…, 오늘 하루 사람 여러모로 놀래킨다.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진 것도 잠시, 익숙지 않은 녀석의 태도에 숨을 잘못 들이켜 연신 딸꾹질을 하고 있는 가운데 말하는 희렴이. “딸꾹질 멈추는 방법, 알아?” “으음…뭔데?” 그러자 아주 잠시 동안의 침묵을 끝으로 빠르게 희렴이의 얼굴이 다가온 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순식간의 일은…너무 놀란 탓에 가까워진 희렴이의 얼굴을 더럭 밀어낸 것. 때문에 내게 떠밀려진 채로 잠시 가만있더니, 이내 어둠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말한다. “이런 건……처음 시도해 본 건데….” “아니, 나는 갑자기 다가오니까 너무 놀라서… 장난치려는 줄 알고 그랬지!” 뒤늦은 변명을 시도했지만 부루퉁한 표정. 평소처럼 여유를 가지고 다가왔더라면 잠자코 있었을 텐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도 놀랐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안타까운 실수를 저지를 리 없잖아! 하지만 볼멘소리로 말하는 희렴이. “그럼 이런 걸 말하고 해?” “뭐 어때!” “됐어. 창피해서 다신 안 해.” 상처라도 받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을 따라 일어서, 불시에 어깨를 잡아끌자 내 쪽으로 향해 숙여지던 참… 내가 생각해도 민망한, 더럭 볼에 쪽 소리나게 뽀뽀. “뭐, 그럼 내가 하면 되지!” 나 역시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대단한 용기로 했건만, 나보다도 더욱 붉어진 얼굴로 이내 자리에 털썩 웅크려 앉으며 부끄러운 듯이 말한다. “…몰라…….” 뭐 아무려면 어떠냐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서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운 상황에…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웃음을 멈추었을 때는 마치 희렴이나 나나 둘이 맞춘 것처럼 입을 모아 동시에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No.1｀낭만곰탱이＊: http://cafe.daum.net/bearnangman 70. 춘 삼월, 벚꽃이 만개한 단휴연 고등학교의 너른 교정에는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했다. 아직은 어설프게 새 교복을 차려입은 입학생들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들뜬 마음으로 조잘댄다. “아……. 내가 단고에 입학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학교 경치 진짜 대박이다. 멋져…. 과연 순정만화 속사랑은 이런데서 자연히 이뤄지는 게 아니겠어? 넓고 아름다운 교정에 잘생긴 선배가 가득한……아아.” “야, 야. 됐거든? 입학식 시작한다.” 단상 위에 올라온 한 여학생의 등장으로 인해 정신없이 수군거리던 단휴연 기숙사고등학교의 신입생 모두 바싹 긴장한 채로 수군거림을 멈췄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제 28회 학생회장 강다희입니다. 먼저, 자리해 있는 신입생 여러분들의 본교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우리 단고에서 뜻 깊고 의미 있는 고교학창시절을 보내 잊지 못할 고교시절의 추억을 만들기를 바라며, 개회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처음 올라설 때는 약간 긴장한 듯, 경직되어 보였으나 곧 마이크에 대고 또박또박 말을 건네는 저기, 저 단상위의 여자 학생회장에 대해 신입생들은 저마다 몇 마디씩 주고받았다. “저 언니가 그 언니인가?” “그 언니? 무슨 언니?” “아, 왜 그……있잖아. 단휴연고의 첫 여학생. 소문에 의하면 제작년에 특별하게 전입했다던 여학생 얘기가 있었잖아.” “에이~ 그 언니가 저 언니인지 니가 어떻게 알아?” “대충 생각을 해봐. 지금 3학년에 여자 선배들은 별루 없는 편이잖아. 30명 좀 안된다고 하더라. 그런데 어떻게 그 30명 중에서 학생회장을 맡을 수 있었겠니? 뭔가 단고 학생들 사이에서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입학생들의 시선 속에서 약간 긴장한 듯이 서있는 학생회장. 많은 여학생들에게서 다른 의미의 시선을 받고 있는 3학년 좌석에 앉아 있는 남학생 하나가, 단상 위의 그 학생회장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 남자의 시선을 따라 좇던 여학생들이, 어렴풋하게 단상 위의 여학생과 자신들 앞의 멋진 남학생을 번갈아 보게 됐을 무렵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교가제창이 끝나고 모두가 배정된 반으로 향하려던 찰나, 학생회장의 갑작스런 발언으로 모두들 다시금 단상위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예정에는 없었던 돌발적인 행동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선생님들과, 궁금한 듯이 바라보고 있는 신입생 및 재학생들 사이에서 잠시 묘한 웃음을 짓던 그녀가 입을 뗐다. “이건 지금 상황과 관계없는 이야기인데요.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빌어 한 마디만 할게요.” 아까 그 긴장하는 것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운동장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고정 시킨 채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사랑한다, 원희렴.”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그녀의 돌발고백에 강당 안은 곧 커다란 함성소리와 야유로 가득 찼다. 그런 와중에도 결국 선생님들께 꿀밤을 맞아가며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는 학생회장이나, 그런 여학생을 보며 결국 소리 내어 웃게 된 남학생이나 주위의 야유를 받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렴 개의치 않는 듯 둘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가실 줄 몰랐다. .. “어쩜, 어쩜! 요새 들어 잠잠하다 했더니 어쩜 그런 생각을…! 신입생보기 민망해 못살겠다, 내가!” 그녀를 보는 선생님들 모두 한 마디하며 꿀밤 한 대씩 쥐어박는 걸 잊지 않고 지날 무렵, 단상 아래 무릎을 꾼 채 손 들고 서있는 그녀의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엇, 어쩐 일이야?” 환하게 웃으며 반기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고백 속 ‘원희렴’으로 추정되는 그 남학생이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향해,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한 번도 말 해준 기억이 없어서.” “무슨 말?” 도통 모르겠는지 자신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을 생각도 않고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그녀 ‘강다희’ 를 향해 ‘원희렴’ 이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뗐다. 지치고 힘들 때 옆에서 힘이 되어줄, 사랑한다고 말로 해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앞으로 몇 년…아니 몇 십 년이 지나도 평생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그런……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말을 하는 남학생은 얼굴 가득 드러나 있는 감정을 전혀 감추지 못하는 듯, 사랑스러운 듯이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인 듯, 탄성이라도 터져 나올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그녀가, 곧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고 새침하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평생요.” “그건 내가 고민 해봐야겠는걸요.”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랑 안 한 적이 없었던 사람. 변함없이 영원할 거라 믿어. 지금도, 또……언제까지나. 어쩌면 또 다른 시작과 함께, 늑대사육소 마침. ★ 낭만곰탱이＊ : puresky222@hanmail.net">puresky222@hanmail.net ★ No.1｀낭만곰탱이＊: http://cafe.daum.net/bearnangman Ct